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59화 (460/527)

제81장. 있잖아, 드미레아(4)

정말 반갑다고.

아마도 칼리안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빈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해줬을 것이다. 에우리아였다면 뒤질라고 왔느냐 물었을 테고 르메인이었다면 지랄맞게도 찾아온다 했을 거다. 물론 플란츠는 소같은 르메인이 그런 말을 할 줄 안다는 것도 몰랐지만 에우리아의 말은 참 잘 들었었다.

그런데 사실 플란츠는 알고 보면 의외로 엄청 곱게 자랐다. '관자놀이 옆에서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리는'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던, 험한 말이라고는 주변에 제 윗사람이 없는 줄 알고 입을 놀리는 레넌에게 들은 것이 전부였던 완두콩이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짖는다'는 말은 다른 곳에서 배웠다.

여하간 그렇게 자란 플란츠인데, 제온의 전사들에게 건네던 에우리아의 말을 듣고 어떻게 했겠나.

당연히 배웠다.

내심 놀라기는 했으나 그런 말을 언제 써먹으면 되는지에 대해 아주 열심히 배워뒀었다. 한참 쑥쑥 자라나는 시기의 어리고 예민한 내 형님께서 혹시라도 험한 말을 배워 자신에게 돌려줄까 걱정한 칼리안이 늘 예쁜 말만 입에 담으려 아주 꼼꼼하게 신경을 쓰던 노력이 무색하게 말이다.

그간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서 내뱉은 말이 정말 예쁜 말뿐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가지지 않도록 하자. 칼리안은 자신의 노력에 대해 매우 뿌듯해하고 있으니까.

뭐, 아무튼.

칼리안이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있는 완두콩이 지금 정말 큰 맘을 먹고 눈을 떴다.

'라시드 브리센.'

에우리아에게 배운 신선한 표현을 써먹어 볼 순간이 왔다. 다른 놈도 아니고 라시드 브리센이 나타났는데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 그 말을 써보겠나.

살아오면서 험한 말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으니 어려울 일도 아니다. 방금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연 뒤 이 상황에 딱 맞는 말을 해 주면 된다.

지금 뒤지고 싶어 왔느냐, 라고.

"지금······."

"오랜만이네요. 반가워요."

못했다.

"아.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라. 그때 그 새 맞나?"

"새 아니라고 했는데. 기억 안 나나봐요."

"내가 좀 바쁘다보니."

계속 못했다.

칼리안이 나간 문의 반대편 벽에 난 창문을 가운데 두고 에일라와 라시드의 말싸움이 시작된 까닭이다. 덕분에 모처럼 험한 말을 준비했던 완두콩은 딱 두 글자만 내뱉고 단 한 마디도 더 못했다.

다음에 만나면 말해야지.

그땐 내가 먼저 꼭 말해야지.

이렇게, 어쩐지 이루는 것이 늘 요원한 것 같은 다짐을 습관처럼 또 하나 늘리는 사이.

"하긴, 바쁠만 하겠어요. 수배됐던데."

"그렇지. 잘 아네."

"잘 알죠."

"새라서?"

"지금은 아니라니까. 새였을 땐 너한테 관심 없었어요."

"아, 그건 좀 서운하네."

말싸움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다친 데는 다 나았나?"

"나았으니까 여기 있죠. 너 죽기 전엔 못 죽겠더라."

"다행이다. 죽을까봐 걱정했는데."

"죽이려고 했으면서, 거짓말 잘 하네요."

"죽이려고 했지. 멋대로 떨어질 줄은 몰랐어."

"아······ 내가 네 손에서 안 죽고 혼자 죽을까봐 걱정한 거예요?"

"응. 재미없잖아. 그건."

"그럼 요즘 재미없는 일 많겠네요. 네 아버지랑 우리 왕자님 덕분에 네가 세워 둔 계획 전부 다 어긋나는 것 같던데."

"그냥, 조금."

"그래서 왔나. 계획이 틀어져서."

드디어.

드디어 끼어들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 밖을 향해 플란츠가 말을 꺼냈다. 그러자 아주 잠시 대답이 없던 바깥에서 라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저하. 얼굴을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상황이 이러하여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하는 것을······."

"내가. 물었는데."

"아, 네. 맞습니다. 물으셨습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런데 무엇을 물으셨습니까? 그새 잊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그리 영민하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확실히 닮았군."

"또 제 아비를 말씀하십니까?"

"그래. 그런 말을 그대의 아비도 나에게 했었는데."

"그 말을 실리케도 했었는데. 역시 닮으셨습니다."

"닮아야지. 그대는 그대의 아비를 닮고 나는 내 어머니를 닮고. 당연한 일 아닌가."

- 딸깍.

아주 작은 소리가 에일라 쪽에서 들렸다.

싼 것이라 폭발 범위가 좁다 했던 마력탄과 확연히 다르게 생긴, 소용돌이치는 화염을 담은 상급 마력탄이었다.

그것에 잠시 눈을 둔 사이 라시드로부터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나 플란츠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 쌔애액!

- ······ 콰아아앙!

라시드의 목소리보다 큰 소리가 터져나온 까닭이다.

"숙이세요. 유리 파편 튀어요."

마력탄을 꺼내기가 무섭게 그것을 창 밖으로 집어던진 에일라의 느긋한 말이 들려왔다.

아니 그러니까.

저런 말은 저지르기 전에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세크리티아 사람들은 대체 뭘 보고 배우는 거지? 설마 내 동생의 옛 형님인 그 국왕도 저러나?

이런 질문을 할 틈이 없었다.

질문은 커녕 점점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는 날이 늘어나고 있어 매우 피곤한 한편 할 말을 못 하는 답답함도 늘어나는 모순된 상황에 적응할 틈도 없었다.

- 타앗!

창문으로 불어닥친 폭발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에일라가 몸을 날리는 것을 보게 됐으니까.

누군가의 팔꿈치였을 듯한 생김의 무언가를 살짝 밟고 뛰어오른 에일라가 또 다른 누군가의 신발을, 정확히는 그 신발 속에 든 하얀 발목 뼈를 디디고 멀리 나아갔다. 그 후에는 오래 눈 마주치기 싫은 어떤 것을 건드리듯 가볍게 스치며 몸을 띄웠다.

마치 칼리안이 그러하듯이.

체중과 중력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것처럼.

- 휘이익!

그렇게, 바닥에 놓인 어느것도 손상시키지 않으며 넓은 수련장을 가로지른 뒤에는 철창의 조임쇠를 밟은 뒤 날듯이 도약했다.

- 타악!

곧 에일라가 멀리 창틀에 발을 가져다 댔다.

그러더니 그대로 창 밖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분명 쇄골이 관통되고 옆구리가 찢겼었다.

라시드와 싸운 뒤 그 지경이 되어 건물 밑으로 추락했던 에일라다. 칼리안이 붙들어 잡지 않았으면 이미 죽었을 거다. 그런 에일라가 겁도 없이 혼자 밖으로 나가버렸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조차 자신이 상대하지 못할 사람이라며 조용히 물러나게 만들었던 라시드가 있는 곳으로 말이다.

그러니 정말이지.

세크리티아 놈들은.

"······ 하."

짧은 한숨을 내뱉은 플란츠가 입을 꾹 다물었다 뗐다. 그리고 에일라의 뒤를 따라 움직이며 발을 박찼다. 바로 뒤에 문이 있었으나 그 쪽으로 나가면 칼리안이 보게 될 지도 모르니까. 혹시라도 하피의 피에 또 중독될 지도 모르니까.

다만 에일라처럼 가볍게 몸을 띄울 수는 없던 탓에, 가능한 밟지 않으려 했던 바닥의 잔해들을 뛰어넘으며 달렸다. 발 밑에 채이고 밟히는 미끄러운 것들이 무엇인지 잠시 잊은 채로 달렸다.

- 터억!

- 휙!

그 뒤 손으로 창틀을 짚으며 바닥을 박찼다.

그대로 훌쩍, 창문 사이로 몸을 빼내 밖으로 빠져나갔다.

- 카아아앙!

곧이어 날붙이 소리가 들린다.

"마력탄 낭비 좋아하네, 여전히."

"돈 쓸 데가 없어서."

예상한대로 에일라가 있었다.

에일라의 공격을 막은 라시드의 녹빛 눈이 보였다.

탁 하고 플란츠가 빠져나오는 소리에 에일라의 시선이 움직였다. 세크리티아의 바다를 닮은 푸른 눈에 질책이 담긴다.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안 했어."

"안 했으면 알아서 안에 있었어야죠."

······ 그래.

내 동생 놈이 저 분을 왜 아끼는지는 알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하."

시선만 움직인 에일라와 달리 아예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본 라시드가 이런 와중에도 묵례를 한다. 그 여유로운 꼴을 본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에일라가 이렇게 나온 것은 아마도 플란츠의 말을 따라주기로 한 까닭일 터였다. 라시드가 혹시나 들어올까봐, 수련장 안의 것을 더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단순한 복수 혹은 플란츠의 안위를 위해 저렇게까지 나설 사람은 아니니까.

- 카가각!

서로 맞댄 검날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낸다.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둘을 보던 플란츠가 아주 잠시 시선을 돌렸다. 칼리안이 있는 쪽을 살핀 것이었으나 수련장 건물에 가려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대신 여전한 하피의 비명소리와 칼날 소리가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전해온다.

그때, 의외의 소리가 들려왔다.

- ······ 딸랑!

닭 먹는 엘프, 시오나 힐의 방울소리다.

플란츠가 다시 한 번 눈을 찌푸렸다.

분명 반가운 소리가 맞았으나 좋아하지만은 못하겠다.

아니. 오히려 좋지 않다. 시오나가 왔다면 싸움이 이미 끝났어야 했다. 칼리안이 돌아왔어야 했다. 그런데 라시드가 온 것조차 모르는 듯 하지 않나.

하피와의 싸움 도중이니 에일라가 통신 반지를 통해 칼리안을 부를 일은 결코 없을 테지만 폭발음은 들렸을 것이다. 그 소음을 수련장 내의 증거를 태우는 소리로 여겼을 수도 있겠으나 폭음 이후 수련장 안에 불길이 일지 않는 것까지 모를 리가 없다. 마력탄을 창 밖으로 던진 상황임을 알아채지 못할 칼리안이 아니다.

그랬다면 연락이라도 취했어야 할 텐데 지금 에일라의 반지는 조금도 빛나지 않고 있었다.

'설마······ 한 마리가 아닌가.'

한 마리가 아니었던 건가.

다시 마주한 하피 하나를 두고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시간을 끌 칼리안이 아닌데.

아니면 혹시.

'다쳤나.'

다쳤나.

또.

- 카강, 캉!

에일라가 라시드에게 막힌 검을 빼 다시 내려치는 짧은 시간 동안의 생각을 갈무리한 플란츠가 발을 옮겼다.

- 저벅, 저벅.

시나스타를 여전히 검집 안에 둔 채 라시드와 에일라의 사이로 걸어갔다. 검을 든 라시드의 앞을 맨 몸으로 가로막으며 에일라를 뒤에 두었다.

자신이 에일라보다 싸움 실력이 부족할 것을 안다.

에일라는 칼을 다루는 것 뿐 아니라 싸움 경험이 현저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 저벅.

바닥에 발을 붙이고 라시드를 쳐다봤다.

지금 에일라보다 더 나은 검술을 쓴다 자만하고 무모하게 에일라의 앞을 막은 것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늘 마뜩잖게 여겼던 바와 같이 멋대로 또 목을 내건 것도 아니었다. 변덕을 부린 라시드가 동생 놈의 옛 정혼자나 자신을 향해 검을 보낸다면 놈의 얼굴을 물로 틀어막고 시나스타를 뽑아 들 준비를 마치고 나섰다.

그런 마음까지 먹어가며 저 앞에 다시 나설 각오를 한 것은, 라시드의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수련장 반대편을 살펴야 되겠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해."

그리고 또 하나. 확신이 들어서였다.

칼리안에 시오나까지 있는 이 상황에 찾아온 라시드는 플란츠를 죽이거나 싸울 생각이 없다고.

검을 들려는 게 아니라.

"얘기."

말을 나누러 온 길이라고.

그것도, 꽤 솔깃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서.

이를테면 라시드의 수배령을 푸는 대신 그레이의 목숨을 받기로 마음먹게 할 만큼 중요한 비밀같은 것 말이다.

* * *

마법사들이 하피를 잡는 방법 하나.

하피에게 미스릴 그물을 씌워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하피가 죽을 때까지 활을 쏜다.

마법사들이 하피를 잡는 방법 둘.

하피에게 작살을 쏘아 땅에 내려놓은 뒤 결박한다. 그리고 하피가 죽을 때까지 활을 쏜다.

마법사들이 하피를 잡는 방법 셋.

하피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열심히 피해다닌다. 그리고 하피가 죽을 때까지 활을 쏜다.

요점은 단순하다.

- 펄럭!

마법도 안 통하는데 날개까지 있는 놈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칼리안은 하피가 있는 곳까지 날다시피 뛰어올라가 싸웠다. 놈이 아무리 높이 올라가 있더라도 상관없도록 함께 몸을 띄우며 검을 내질렀다.

다만 그것은 칼리안이니 가능한 방법이다.

그렇다 해서 지금 시오나와 드미레아의 앞에 허공을 밟을 만한 징검다리를 내어줄 수가 있느냐 하면 사실 좀 힘들다 답해야 할 터였다.

- ······ 두근!

덜 사려깊어진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해독을 마치기까지는 몸 속의 오러를 무리하게 움직이기가 힘들었으니까.

때문에 잠시 자리에 선 채 싸움을 지켜봤다.

멋진 각인이 되어 있는 검집을 꼭 든 채로.

- 타아앗!

다행히 시오나는 일반적인 인간보다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엘프였다. 부상 중에도 칼리안과 비슷하게 움직이며 싸움을 했던 이가 아니던가.

- 카아아앙!

쥐를 채어가기 위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수리부엉이가 그러하듯이, 양 날개를 뒤로 젖힌 채 땅으로 쇄도한 하피가 시오나를 향해 발톱을 내세웠다. 이미 여러 차례 그런 공격을 받은 시오나가 자신의 검을 들어 발톱을 강하게 올려쳤다. 어둠 속에 불똥이 튀어오르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인다.

- 쿠웅······!

곧바로 묵직한 것이 발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펼친 날개를 횡으로 그어 시오나의 허리를 공격하는 하피의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물론 드미레아였다.

최근의 칼리안보다도 훨씬 더 묵직하게 땅을 울린 드미레아가 바닥 깊은 곳을 내리찍듯 발을 박찼다. 하피의 어깨 너머로 그것을 본 시오나가 검을 내찔렀다.

하피가 시오나의 공격을 막기 위해 양 날개를 서로 겹쳐 앞을 가로막은 사이. 달려오던 속도와 발을 박차고 오른 힘, 그리고 몸의 체중을 모조리 검에 실은 드미레아가 검을 내리그었다.

- 서걱!

이제껏 신경쓰지 않았던 드미레아의 공격을 받은 하피의 비명이 이어진다. 뚝뚝 흘러내리는 핏방울에서 빠르게 몸을 피한 드미레아가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피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 휘익!

- ······ 펄럭!

칼리안이 그러하듯 순식간에 몸을 비튼 하피가 날개를 펼쳤다. 그러더니 재빨리 몸을 띄워 드미레아의 두 번째 검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기다렸다는 듯, 이번에는 시오나가 발을 박찬다.

- 타앗!

- 카가가강! 카아앙!

보다 더 높이 날갯짓하기 전에 몸을 움직인 시오나가 하피의 날개를 노리며 높이 도약했다. 쉼없이 이어지는 방울소리의 끝에 딱딱한 것이 가 닿았다.

- 우웅!

푸른 오러가 시오나의 휘어진 검 끝에 어린다. 빛이 형형한 검을 하피의 팔 대신 달린 날개를 향해 있는 힘껏 내리쳤다.

신속히 날개를 뒤로 젖혀 미세한 차이로 공격을 피한 하피가 발톱을 휘두른다. 다시 지상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검을 내민 시오나가 그것을 막고 쳐낸다.

비명소리, 방울소리가 어지러이 얽히며 이어졌다.

- 쿠우웅!

- 쌔애애액!

바닥에 두 발을 디딘 시오나가 몸을 일으키는 사이,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린 하피가 날개를 휘둘렀다. 균형을 되잡는 그 짧은 순간을 노린 것처럼 날개를 내저으며 발톱을 휘둘렀다.

- 카아앙! 캉!

기다렸다는 듯 다시 나선 드미레아가 시오나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 쉼없이 이어지는 공격을 검면으로 막은 뒤 올려치고 반대편 발이 날아오는 것을 튕겨냈다. 함께 튕긴 검의 무게를 버티지 않고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다시 위에서 아래로.

- 카가강! 카아아앙!

- 캉, 카아앙!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다.

단 한 번이라도 베인다면 치료를 기다릴 틈도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될 하피의 공격을 계속하여 막아내면서.

지상에서 몸을 띄운 채 드미레아를 내리누를 것처럼 굴던 하피가 뒤로 쭉 밀려났다. 그러더니 귀를 괴롭히는 비명을 다시 지르며 달려들었다.

- 쿠웅!

- 콰아아아앙!

그런 하피를 향해 맞달려든 드미레아의 검 끝에서 굉음이 인다. 여지없이 달려든 시오나의 푸른 오러가 시야를 어지럽힌다.

하피가 뛰어오르면 시오나가 함께 도약하여 끌어내리고 지상에 착지하면 드미레아의 검이 목숨을 노린다. 방울소리가 하피의 괴성을 막아선다.

- 후두둑! 후둑!

시오나의 푸른 오러에 날카롭게 베여나간 하피의 상처에서 핏줄기가 떨어졌다. 그것을 본 드미레아가 한 발을 물렸다. 그리고 긴 숨을 내쉰 뒤 다시 달려들었다.

이미 시오나의 검 끝을 발톱으로 붙들어 막고 있던 하피가 날개를 펼친다. 그리고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날개를 휘둘러 시오나를 막아섰다. 허리를 숙인 시오나가 하피의 발에 붙들린 검을 손잡이 삼아 몸을 미끄러뜨렸다. 하피의 발 아래를 통과해 순식간에 등 뒤로 돌아간 뒤 검 끝에 힘을 주었다.

다시 한 번 공방이 이어진다.

높이에 구애받지 않는 칼리안만큼 신속할 수는 없었음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 싸움이 계속됐다.

- 우우우웅!

푸른 오러가 날을 세운다.

무거운 검에 달빛이 번뜩인다.

- 부우웅!

- 카아아앙, 카가강!

드미레아의 검을 피한 하피가 날아올랐다.

그리고 쏘아보낸 화살처럼 다시 달려들었다. 그 앞으로 달려든 시오나가 하피의 허리를 베어냈다.

기우뚱!

하피의 몸이 잠시 휘청인다.

빈틈을 놓칠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드미레아가 발을 박찼다. 가능한 높은 곳까지 도약하여 모든 힘을 다 실은 검을 내리찍었다.

- 우드득!

하피의 어깨에 검이 박힌다.

두터운 뼈가 함몰되는 소리가 깊숙이 울린다.

- 꺄아아악!

- 딸랑······ 딸랑!

- 카아아아앙!

순간적으로 뻗어나오는 날선 날개를 시오나가 막아냈다. 하피의 어깨에서 검을 뽑은 드미레아가 온 몸을 휘두르듯 검을 놀렸다.

- 카각!

한 발로 그것을 막아낸 하피가 다른 한 발을 뻗었다. 드미레아가 허리를 숙이며 그것을 피하자, 허공을 가르지르게 된 하피의 발 위에 새파란 오러가 내리꽂혔다.

- 콰가각······ 서걱!

오러의 예리한 날을 이기지 못한 놈의 발목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놈에게 큰 상처 하나를 더 낸 셈이었으나 그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시오나가 재빨리 팔을 뻗었다. 그리고 드미레아의 팔을 붙들고 뒤로 던지듯 넘겼다. 동시에 자신의 몸에는 오러를 다시 둘렀다.

- 후두둑!

놈에게 더 많은 상처를 입힐수록 더 위험해지는 싸움.

쏟아져내리는 핏줄기를 본 시오나가 드미레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정말 위험하니 더 이상 나서지 말라,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 ······ 펄럭!

사고를 할 줄 아는 하피라서.

자신의 독에 개의치않아 하는 한 명과 그렇지 않은 한 명을 구분할 줄은 아는 하피라서.

- 부우웅!

- 쌔애애액!

시오나의 시선이 멀어진 찰나를 놓치지 않은 하피가 남은 한 발로 지면을 박찼다. 날개를 접듯이 늘어뜨린 채 드미레아를 향해 쏘아지듯 움직였다.

"소공작!"

하피의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던 드미레아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순간적으로 숨을 참은 드미레아가 자신의 검을 옆으로 세워 들었다. 이름 낯선 몬스터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으로 감싸이지 않은 곳, 눈과 머리의 앞을 막아야 했던 까닭이다. 몸을 틀어 피할 시간은 없다 판단했으니까.

- 절그럭!

검면을 지나친 핏방울이 얼마나 튈까.

닿는 것만으로도 중독이 되나.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핏방울에도 중독이 되던가.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눈으로 튀는 독을 막은 뒤 곧장 달려들어 목을 꿰뚫을 요량으로, 피하지 못하니 가능한 막아낸 뒤에 놈의 숨통을 끊어낼 요량으로, 그렇게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하피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눈을 감지 않았다. 온 몸을 뒤집어씌울 듯 날아드는 놈과 놈의 발, 그곳에서 쏟아지는 핏줄기를 똑바로 바라봤다. 몸을 피할 시간조차 되지 않을 그 짧은 순간 그렇게 자신의 검을 힘주어 말아쥐었다.

그러자, 그 때.

- 우웅!

옅은 하늘 빛의 실드가 드미레아의 앞을 막아섰다. 어디선가 뻗어나온 붉은 빛줄기가 하피를 잡아채듯 허리를 감아 죄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 우웅!

드디어.

이제야.

눈부신 푸른 빛이 드미레아의 검에 감겨들었다.

- 끼아아아악!

- 촤아아악!

하피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핏줄기가 실드에 막혀 사라진다. 하피를 붙든 붉은 빛의 오러가 놈의 허리를 파고든다. 지척까지 달려든 방울 소리가 하피의 날개를 꺾어낸다. 잘라낸다.

결국 나선 칼리안이 제 오러로 하피를 붙들었다. 실드를 펼쳐 드미레아의 앞을 보호했다. 실드를 확인한 시오나가 하피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리고.

- 콰직!

푸른 빛에 감싸인 드미레아의 은빛 검에 힘이 실린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제 앞의 괴물을 향해 뻗어나간다.

그대로 하피의 목을 꿰뚫는다.

- 파드득!

순식간에 두 날개를 다 잃고 허리가 반쯤 잘려나간, 드미레아의 검 끝에 꿰인 하피가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비로소 움직임을 멈췄다.

- ······ 쿠웅!

드미레아의 검 끝에서 스르륵 빠져나간 하피의 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닿았다.

드미레아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시오나가 말 없이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처음으로 몬스터를 사냥한 까닭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제대로 합을 맞춰 적을 사냥해 본 일이 처음이라서가 아니었다. 당연히 아니었다.

- 우웅, 우우웅!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푸른 빛 때문이었다.

자박, 자박.

누군가 등 뒤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의 주인이 손을 뻗는 것이 느껴진다. 그 손이 가만히 드미레아의 검을 감싸쥐는 것이 느껴진다. 그 검을 타고 안온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식을 줄 모르고 타오르는 푸른 불꽃을 가라앉히는 것이 느껴진다.

- 철컥!

드미레아의 검을 건네받아 이제껏 잘 맡아두고 있던 검집에 잘 넣는 것이 느껴진다.

툭, 툭.

드미레아의 작고 넓은 등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드미레아가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을 쳐다봤다.

"멋있다. 내 정혼자님."

축하의 말이 들려왔다.

헤실헤실 웃던 칼리안이 드미레아의 등에서 손을 뗐다.

그러더니.

- ······ 투욱.

드미레아의 어깨에 곱게 이마를 댄 채 정신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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