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장. 있잖아, 드미레아(3)
처음은 아니었다.
이런 순간에 누군가가 앞에 서 준 것을 말함이다.
특히 완두콩이 여러 번을 그랬다. 세어 보기에도 피곤할 만큼 많이 저질렀다. 그래서 그것이 기꺼웠나, 누군가 그리 묻는다면 고개를 가로저어야 할 터였다.
기껍기는.
오히려 처음에는 그런 행동을 방해라 여겼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지키려 했다기보다는 실리케를 막고자 혹은 보호하고자 달려들었던 날. 플란츠 덕에 칼리안이 잘 세워두었던 계획도 어긋났을 뿐 아니라 언제까지고 숨겨두려던 검술 실력까지 드러냈으니 그 처음은 칼리안에게 있어 분명한 방해가 맞았다.
때문에 거슬려했다. 그 거슬림이 점차 우려가 되었다가 조금씩 이해로 바뀌었다. 그렇게 저도 모르게 익숙해진 플란츠의 행동을 어느새 기특하고 고맙다 생각하게 되었을 즈음, 갑작스런 악몽이 찾아왔다. 덕분에 이제 칼리안은 비록 그것을 방해나 거슬림으로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으나 그렇다 해서 기꺼이 여기지도 못하게 되었다.
"······ 큰일났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유 모르게 안심이 된다.
결국 플란츠든 드미레아든 칼리안보다 약하다는 사실만은 서로 다를 바 없지 않나. 칼리안의 앞을 가로막고 설 만한 실력이 못 된다는 것에서는 플란츠와 차이가 없을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스레 기껍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응. 내 정혼자님 너무 멋있는데."
그리 기꺼운 마음에 손을 내밀어 드미레아의 곁을 쓸어내리듯 실드를 둘러 준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렇게 다 좋기만 하면 나 정말 어떡하나."
거짓말은 못 한다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은 정말 어찌나 잘 하는지. 여전히 앞을 향해 내민 검을 거두지 않은 드미레아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술에 취하신 겁니까, 독에 취하신 겁니까."
"나 취한 것 같아?"
"이런 상황에 속없는 소리나 하고 계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지원군이 나타난 것을 본 하피가 하늘 높이 몸을 띄운 사이, 칼리안이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답을 전했다.
"아니야. 맨정신이야. 그냥 좀 아파서."
이 말에 살짝 고개를 튼 드미레아가 빠르게 훑어내리듯 칼리안을 살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되돌렸다.
괜찮느냐 물은 것이 무색하게 누가 봐도 안 괜찮은 꼬락서니다. 또 무슨 변덕으로 저런 옷을 입었는지 몰라도 분홍색 재킷의 한 면이 온통 검붉다.
"도대체······."
저 사람은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어디든 하나씩은 망가져 있는 정혼자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왕궁에서 파혼서를 받기가 싫어서 그냥 세뉴강에서 안네루시아를 받기로 작정하신 건지를 물어봐야 하나.
짧은 한숨을 내쉰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안 좋은 것 없는 줄 모르면서 부르셨습니까."
혼을 내는 대신 칼리안이 처음 건넨 말에 대한 늦은 답만 전했다. 취해서 한 말이 아니라 하니 대답이나 제대로 해줘야 되겠다 생각하면서.
늘 비슷하게 건네지는 말에 대해 늘 비슷하게 전해주는 대답이기는 했지만.
"몰랐지. 나는 아버지 불렀거든."
"마나실 경에게 반지를 되돌려주는 것을 잊고 나왔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제가 어떻게 안 옵니까."
앨런을 불렀는데 드미레아만 왔다.
칼리안과 연결된 앨런의 반지를 가진 채로 말이다.
"그래. 잘 했어."
덕분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때마침 도착하지 않았다면 정말 사달이 났을 거라고.
그런 말 대신 그냥 잘했다고만 했다.
때마침 잘 도착했고 사달도 안 났고 그래서 살았으니 된 일이다. 앨런의 통신 용품을 그대로 가져왔다고는 했지만 키리에와 히나가 나눠 가진 것이 아직 있지 않나. 왕궁으로 연락할 수단이야 또 있으니 그 문제도 됐다. 그게 아니더라도 조금 둘러둘러서, 칼리안의 수정판을 잠시 빌려간 아리안느와 체이스를 통해도 되는 일이니까.
- 딸랑······.
세뉴강을 건너기 직전에 칼리안을 붙들어 준 낮은 목소리만큼은 아니지만 이 순간 참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하마터면 반가움에 잠겨 잠시 주변을 잊을 뻔했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 카아앙, 카강, 캉!
경쾌하기까지 한 금속음이 뒤를 잇는다.
그래. 드미레아는 혼자 오지 않았다.
영리하게도, 신중하게도.
'스승님, 드미레아를 불러주세요. 전할 말이 있습니다.'
'그리하지요.'
휘트린 인근까지 갔던 드미레아를 카이리시스로 굳이 돌려보낸 칼리안이다. 그런 칼리안이 자신을 다시 찾는다는 말을 드미레아는 조금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곧바로 왕궁으로 들어왔고 앨런의 반지를 넘겨 받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라시드 브리센이 얀을 노리고 있어.'
그리고 이렇게, 증거는 없애두겠으나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 전해 준 칼리안의 말을 듣게 되었다.
드미레아는 그 이상의 설명을 더 들을 이유가 없다 여겼다. 그 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휘트린에 찾아왔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군.'
이 순간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이.
칼리안과 호각을 다투던 소드마스터 시오나를 데리고서.
'무슨 소리입니까.'
'불쾌한 비명 소리.'
이동 마법진에서 나와 외성 인근에 도착했을 즈음, 인간보다 청력이 좋은 시오나가 하피의 울음을 들었다.
'하피일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던대로 한 번 맞닥뜨렸다 했으니까요.'
'그럼 그 쪽으로 먼저 가지.'
'네.'
그 소리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칼리안의 앞에 섰다.
- 타앗!
시오나가 하피를 향해 높이 도약했다.
칼리안 쪽으로 달려들던 하피를 가로채듯이 공격을 보냈다.
- 카가강!
- 카앙, 캉, 카아앙!
- 끼아아악!
당장 숨을 끊어놓기 직전이었던 붉은 눈의 사냥감에게 더 다가서지 못한 하피가 화를 내듯 비명을 질렀다.
- 딸랑, 딸랑!
시오나의 검 끝이 예리한 음악을 만든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가볍게 한 발을 내며 말했다.
"아무튼 고마워, 드미레아. 그럼 잠깐 여기 있어. 독 조심하고."
"뭘 하시려고 그럽니까."
"시오나 혼자는 힘들잖아."
"싸우시려고요."
"그래야지."
"정치판에는 왕자님 편을 그렇게 많이 만들어두려 하면서 싸울 땐 왜 안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내가,"
- 철컥!
칼리안의 말이 막혔다.
이번에는 드미레아가 아닌 드미레아의 검이 칼리안을 막아섰다.
"저는 왕자님 혼자 싸우시는 모습 멀뚱히 구경하러 온 것 아닙니다. 상황 파악하고 제 편 살려놓으러 온 겁니다."
"혼자 아니야. 시오나 있어. 그리고 하피 독이 얼마나 강한지 알잖아."
"지그프리드의 검은 무엇이든 막습니다."
- 콰악!
지체할 시간 없다는 듯 드미레아가 자신의 검을 바닥에 박아넣었다. 그리고 검고 두터운 가죽으로 된 목 보호구의 깃을 세우더니 양쪽을 서로 맞대 빈틈없이 여몄다.
마치 옷과 연결된 커다란 복면을 한 것처럼 코와 입을 죄 가리고는 검은 빛의 가죽 장갑까지 꼈다.
- 절그럭!
그렇게, 가릴 수 있는 곳은 다 가리고 눈만 내 놓은 모습이 된 드미레아가 허리에 매인 검집을 풀었다.
"발톱은 쳐내면 되고 피는 피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렇기는 하지."
"쉽네요. 그럼."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다는 듯한 말.
그런 말을 내뱉은 드미레아가 팔을 움직였다. 한 손으로는 바닥에 박아두었던 검을 다시 뽑아들고 또 한 손으로는 검집을 들어올렸다.
척, 하고.
칼리안의 앞에 잘 세공된 은빛의 검집이 내밀어진다.
"계십시오. 귀찮게 굴지 말고. 얌전히."
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칼리안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검집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얌전하게.
* * *
라시드 브리센.
그래. 놈의 꿍꿍이를 확인하려 온 길이었다.
지금 라시드에게 필요한 건 지그프리드가 아니라 칼리안에 대한 누명이 아니던가. 이 상황에 굳이 위험하게 지그프리드를 노릴 라시드가 아니다. 벼랑 끝에 몰렸다 생각했다면 차라리 칼을 들고 직접 나설지언정 이런 앞뒤 안 맞는 행동을 할 놈이 아니었다.
플란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 없애지 말아야 하는데요?"
"하피. 하나가 더 있었으니까."
에일라의 질문에 플란츠가 짧게 답했다.
차마 그 앞에 대고 '뭔 소리야' 라고 할 수는 없던 에일라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란츠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한 뒤 말을 이었다.
"라시드 브리센이 나나 내 아우님을 정말 죽일 생각이었으면 저 하피를 한꺼번에 보냈을 텐데. 안 그랬잖아."
하피를 보낸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을 터였다. 칼리안이 마차의 힘을 이용하는 바람에 하룻밤 늦게 영주성에 도착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라시드의 계획은 거기까지다.
칼리안이나 플란츠가 죽기를 바랐다면 지금 찾아온 하피까지 한꺼번에 보냈을 테니까.
"그래서요."
에일라의 말에 긴 설명을 앞둔 플란츠가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역한 내음이 몸 속으로 짓쳐든다.
바람을 부려 줄 놈이 이 자리에 없는데다 플란츠는 바람 마법을 익혀두지도 않았던 까닭이다.
곧 플란츠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에일라가 서 있던 곳의 바닥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여기는 내 아우님의 시종이 선물해 준 곳이야."
"알아요."
"그 대단한 시종이 어느 가문 자제인지를, 누가 아는데."
"알 사람은 다 알죠."
"아닐 텐데."
발칸의 모두가 안다.
란델과 플란츠, 그리고 둘의 시종이 안다. 르메인이 알고 앨런과 칼리안의 측근들이 안다.
그런데 그들 중 왕실의 외부인이 있던가.
칼리안의 손이 닿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내 아우님의 시종이 어느 가문 출신인지 라시드 브리센이 어떻게 알아."
얀은 정체를 숨겼다.
얀의 출신을 슬레이만이 직접 숨겼다.
모든 귀족이 '그 가문의 둘째 아들은 자신이 장자가 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집 안에 숨어 나오지 않는다' 라고 수근거리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때문에 세상에는 지금의 시로이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니. 정확한 생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덕분에 왕궁에서 얀과 드미레아가 버젓이 함께 산책을 하는 모습을 본 귀족들도 단 한 번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칼리안의 정혼자를 그의 시종이 수행한다고만 생각했다. 둘 다 그렇게나 슬레이만을 빼닮았음에도 말이다.
그 생김을 보고 의심을 할 만한 라시드 브리센은 얀을 만난 적 없었다.
"조사를 해봤다면 알았을 수도 있죠."
"라시드 브리센은 내 아우님한테 그 정도로 관심 안 가졌었어. 그랬으면 당신을 못 알아봤을 리 없을 것 같은데."
슬레이만조차 '내 새끼가 영 귀족같지가 않다' 했던 얀이다. 그에 비해 에일라는 눈에 띈다. 칼리안에 대해 조사를 했다면 휘트린의 영지민으로 갑작스레 등록되고 하루아침에 칼리안의 곁에 나타난 에일라를 먼저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라시드는 에일라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라시드 브리센이 당신을 공격하고 마나실 후작을 노리고 이번에는 나도 다쳤는데, 이제 그 대단한 시종의 가문까지 노리고 있는 걸 알게 되면. 내 아우님이 어떻게 할 것 같아."
"라시드 브리센 죽이겠죠."
"그럼 지금 지그프리드가 누명을 쓰든 라시드 브리센이 죽든. 뭐 하나라도 이뤄지면 이득을 볼 건 누구인데."
에일라가 입을 다물었다.
누구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명확히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던 까닭이다.
"어떻게든 내 아우님 약점 잡으려고 당신이 말한 그런 뒷조사를 했을 만한 사람. 그래서 내 아우님의 대단한 시종이 누구인지를 알아냈을 만한 사람. 한 명밖에 없잖아."
그레이 브리센.
그가 개입했다는 소리였다.
"라시드 브리센이 써 둔 서신은요?"
"라시드 브리센 필체를 본 적 없는데. 그냥 내 아우님이 그렇게 생각한 거고."
"그럼 이 별장에 하피를 숨기고 키운 것과 그 중 하피를 한 마리만 풀게 해서 무언가를 숨길 시간을 번 건 라시드 브리센이고. 여기에 지그프리드라는 증거를 심어둔 것은 그레이 브리센이라는 말씀인 거죠."
"그래."
얀이 마련한 휘트린의 별장.
그곳에 칼리안을 위한 덫을 만들어 둔 이는 라시드가 맞을 것이라 여겼다. 이미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뒤 심장 속에 검은 돌을 지닌 채 다시 등장한 몬스터가 아닌가. 그런 하피를 다룰 만한 사람으로 라시드 외의 다른 이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이 별장에 지그프리드 기사의 검을 가져다 두고 어쭙잖게 하피의 깃털을 뿌려둬 가며 서재의 서신을 발견하게 하고, 그렇게 하여 라시드가 칼리안에게 '지그프리드와 휘트린의 손을 잡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누명을 씌우려 했다 생각하게 한 것은 그레이라는 소리다.
"지금 그레이 브리센은 왕궁에 잡혀있어요. 그렇게 마음대로 대처하기가 어려워요."
"통신 용품은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것 아니잖아. 그리고 오늘 오찬에서 하피 깃털을 알아 본 사람들이 있던데."
오늘 오찬에서 하피 깃털을 알아봤던 사람.
키리에가 조사하고 있을 그들 셋 중 일부, 혹은 셋 다.
그들이 그레이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을 입에 올렸다.
"그래서요."
플란츠의 말에 동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에일라가 또 이렇게 물었다.
"라시드와 그레이가 사이좋게 한 발씩 들였다 한들 달라질 건 없어요. 이 증거들이 지그프리드를, 하다못해 왕자님의 시종을 가리키는 건 여전해요. 저하 말이 맞다 해도 증거는 왜 그냥 둬야 하는데요?"
"없앨 필요 없어. 안 없애고 그냥 알릴 거야."
"어떤 소문이 나든 안 숨기고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말이에요?"
"그래. 여기서 괜한 오해까지 사느니 그게 나아."
카이리시스도 아닌 곳에서 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을 괜히 건드려 증거를 없애려 했다는 오해까지 사느니 아예 공개하는 편이 낫다는 의미였다.
"내가 다쳤으니까. 괜찮아."
"그게 무슨 말씀······."
"내가, 아니라는데."
하피에게 다친 이가 다름 아닌 플란츠다.
"내가 아니라 하는데. 누가 감히 내 아우님을 의심할 수 있는지."
그런데 플란츠는 칼리안이 잘못했다 말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 지그프리드가 아닌 그레이를 물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탓하지 않는데 누가 칼리안을 의심하겠나. 세상의 어떤 증거도 '피해자'인 플란츠의 증언보다 강력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 실리케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이 피해자들의 목소리였음을 안다. 마법사들이 모은 보고서를 단 한 글자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플란츠가 아니던가.
증거 하나 없던 그 조사 결과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플란츠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더욱이 상대방의 증거가 가짜임이 밝혀졌을 때 귀족들이 얼마나 더 분개하는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증거들을 전부 다 그대로 남겨두고, 지그프리드와 휘트린이 연루되고 시일이 걸릴지언정 제대로 확인해서 밝혀내는 편이 낫다고. 플란츠는 그렇게 판단했다.
"어쩌면 왕자님도 같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아마도."
"그런데도 태우라 하셨던 걸 굳이 두겠다고 하시네요."
"그래."
플란츠가 나서서 칼리안과 지그프리드를 옹호하면 플란츠가 이 일에 완전히 개입하는 셈이 된다. 브리센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브리센에서 플란츠를 그냥 두려 하지 않을 터.
때문에 칼리안이 이미 플란츠와 같은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취한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의 증거를 전부 태우고 문제를 그냥 덮으려 들었을 거다. 꼭 이럴 때만 이성적인 계산이 사라지는 칼리안이 플란츠가 위험해질지 모를 수를 선택할 리가 없지 않나.
"왕자님이 또 걱정하시겠네요."
"상관없어."
"그런데······ 저하가 굳이 여기를 남겨두는 건 정정당당한 왕족의 본을 보이려는 의도만은 아닐 것 같은데요."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는데."
"저하가 브리센을 정말 싫어하시나보다, 하고요."
플란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가 애써 만든 덫을 라시드에게도 보이려는 의도임을 에일라가 알아봤다. 제 몫을 뺏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라시드라면 자신의 계획을 멋대로 망쳤을 뿐 아니라.
- 끼아아아악!
- 카아앙! 캉!
저렇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잘 알려주듯이 칼리안을 멋대로 죽이려 드는 그레이를 그냥 두지 않을 테니 말이다.
"싫어."
그래서 다른 부정 없이 대답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에일라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우려와 달리 시들기는 커녕 열심히 잘만 자라고 있는 왕세자를 칭찬해주려 입을 열었다.
"이렇게 제 생각까지 해주시니······ 제가 저하께 어떤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그런데 이렇게.
에일라의 뒤편, 수련장의 창 밖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