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57화 (458/527)

제81장. 있잖아, 드미레아(2)

나오지 마.

에일라.

이렇게 내뱉은 짧은 말이 전부였다.

- ······ 쿠웅!

하피.

그것의 울음소리를 들은 에일라는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이 무엇을 연습해도 무너지지 않을 수련장의 두터운 문을 힘껏 닫았다.

칼리안과 하피를 밖에 둔 채로.

에일라 자신과 플란츠를 안에 둔 채로.

'안 나설 테니까.'

'진짜요.'

'안 한다고.'

그것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질 못했다.

칼리안은 이미 수도 없이 나서지 말라는 말을 했고 플란츠는 딱 그만큼 나섰다.

그 행동들은 대체로 정답이 아니었으니 이번에는 얌전히 안에서 기다려야 되겠다고. 등 뒤가 가벼운 칼리안은 하피보다 몇 배는 더 괴물같은 놈이 될 테니 안전하게 있으면 될 거라고. 그나저나 이럴 줄 알았으면 시나스타를 통째로 건네 줄 것을 그랬다고.

닫힌 문 너머를 가늠해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한다고 왕자님이 더 잘 싸우는 것 아니에요."

그러던 중 에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란츠가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저하가 쓰는 검술은 제대로 본 적 없는데 활을 그럭저럭 다루시는 건 봤어요. 그래도 아마 제가 저하보다는 활도 잘 쏘고 단검도 잘 던질 거예요. 하피가 하늘 높이 있어도 충분히 맞힐 수 있으니까요."

"알아. 그게 왜."

"그렇다고 해도 제가 같이 나가봤자 아무 도움 안 되니까 왕자님만 내보낸 거예요. 제가 약해서가 아니라 하피가 워낙 까탈스러워서요."

"······ 용건."

"시들지 말고 할 일 찾으세요."

······ 또.

또 시든다고 했다.

그 말같지도 않은 이상한 짖음을 고스란히 배워 써먹고 있는 동생 놈의 새 부하, 혹은 옛 정혼자. 아무튼 저 분에게 반박의 말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 꺄아아아악!

- 카아앙! 카각!

작은 창 너머로 싸움의 시작을 알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혼을 빼놓는 듯한 울음소리. 그리고 금속이 충돌하는 듯한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던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 휙!

그랬더니 곧바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누군가가 물건을 던져서 건네는 것에는 조금도 익숙하지 않았으나 아무튼 놓치지 않고 잘 받은 플란츠가 손을 내려다봤다.

쉼없이 이어지는 싸움 소리를 뒤로한 채 에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받아요. 터지면 다쳐요."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길쭉한 구체.

그것이 마력탄임을 그제야 알았다.

그런 말은 받기 전에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장 따져묻고 싶은 마음을 일단 접어놓은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터뜨리기에는 좁은데."

"광범위 마력탄 아니에요. 거리 벌리고 던지면 안 다쳐요."

그건 싼 거라서.

이렇게 덧붙인 에일라가 품 속에서 똑같은 마력탄 하나를 더 꺼냈다. 그리고 주저없이 마력탄의 점화 버튼을 누르려던 그 때.

- 뭉클!

에일라의 손에 들린 마력탄에 주먹만한 물방울이 얽혀들듯 뭉쳐들었다.

생각지 못한 모습을 본 에일라가 고개를 모로 틀었다. 플란츠는 그런 에일라 대신 발 밑과 눈 앞을 어지럽히고 있는 검붉은 것들을 보며 말했다.

"내 아우님 대신해서 저것들을 태우려는 것 같은데. 아닌가."

"태운다기 보다는 더 조각내려던 거지만, 맞아요."

저 사이에 무엇이 있든 식별만 못 하면 되는 것이니까.

태워 없애든 폭발시켜 조각내 없애든 다를 것이 있겠나.

"태우는 게 낫겠군."

"낫죠."

"더 확인할 건."

"확인할 게 더 있는지는 모르겠고 시간 없는 건 알아요."

- 카강! 카가강!

- 꺄아아아악!

에일라의 말마따나 서두르라는 듯, 숨가쁘게 이어지는 날붙이 소리와 하피의 울음소리가 또 들려온다.

서두를 것이다.

칼리안은 분명 서두를 터였다.

처음 칼리안과 싸웠던 놈처럼 저 하피도 자신이 오러를 흡수할 수 있음을 깨닫기 전에, 그래서 싸움이 더 힘들어지기 전에 마무리를 지으려 들 터였다.

- 카아아앙!

저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경비병들이 올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면 별장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만약 휘트린의 귀족들이 '다른 하피가 더 있다면 영지에 큰 위협이 되니 영지 보호를 위해서라도 인근을 수색해야 한다' 주장한다면 플란츠 역시 막을 수 없다.

아무리 왕족과 관련된 일이라지만 다른 것도 아닌 몬스터다. 이런 사건에 대해서까지 '왕실의 일이니 손 대지 말라' 명령한다면, 왕족의 명이니 결국 따르기는 하겠으나 분명 반발이 있지 않겠나. 이곳은 카이리시스가 아니었으니까.

"왕자님은 하피를 최대한 빨리 잡으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까 경비병들이 여기까지 발 들이기 전에 없애는 게 나아요."

에일라가 이렇게 플란츠의 생각과 같은 의견을 냈다.

마법을 쓸 줄을 알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쓸데 없는 말은 꺼내지도 않는다. 상대하기 짜증나는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같은 생명체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다.

"알았어."

에일라에 대한 짧은 감상과 함께 대답을 전한 플란츠가 마력을 운용했다.

- 사아아······.

결코 유쾌하지 않은 모습의 여러 조각들 위로 마력을 퍼뜨렸다.

칼리안이 하려던 행동과 같았다. 퍼져나간 마력을 불의 힘으로 바꾸기만 하면 저 거짓 증거들은 이제 다 사라질 터였다.

그런데.

- 파스스······.

플란츠의 손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던 불이 사그라들었다.

에일라는 보지 못했으나 이 자리에 있던 모든 흔적들을 감싸고 있던 청량한 기운의 마력도 흩어졌다. 그것이 플란츠의 눈에는 보였다.

미간을 살짝 모았다 편 에일라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왜 그래요?"

"모르겠어서."

"불 다루는 법을 모르세요?"

"······ 말고."

생각이 돌아간다.

동생 놈에게 배워온 것들을 잘 활용해 생각을 한다.

"왜 없애야 하는지."

짜증나지만.

정말로 짜증나지만.

란델의 목소리를, 란델의 말을 떠올렸다.

'네가 제 목표를 또 멋대로 치워내도록 두지 않겠구나.'

란델은 그리 말했다.

라시드 브리센이 휘트린에 수작을 부리는 것은 결국 브리센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자신이 직접 없애고자 하는 브리센을 칼리안이 건드리려 하고 있으니 일단은 브리센을 살려놓기 위해 칼리안을 궁지로 몰 것이라고. 칼리안에게 왕궁 습격의 누명을 씌울 것이라고.

물론 칼리안도 그 말에 동의했었다.

때문에 그 꿍꿍이를 확인하고 막기 위해 휘트린에 온 것이 아니던가. 왕세자와 왕자들의 영지를 직접 시찰한다는 전례없는 명분까지 만들어가면서 말이다.

'지그프리드는 아직까지 라시드가 건드릴 수 있을 크기가 아닙니다. 게다가 지그프리드 공이 직접 전하를 호위하기도 했고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 속에 저장된 말.

그래. 칼리안은 그렇게 말했었다.

라시드 브리센이 지그프리드를 넘볼 리 없다고.

'라시드 브리센은 저를 닮았습니다.'

'왕자님과 생각하는 게 엇비슷하니까.'

라시드 브리센은 뱀이다.

뱀은, 한 번을 노려 사냥을 한다. 단번에 죽이지 못할 상대를 노리지 않는다. 저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넣을 것 분명한 상대에게 위협이 될지 치명상이 될지 자충수가 될지 모를 도박같은 공격을 하지 않는다. 데블란도 그랬었다.

라시드 브리센은 조종하는 자다.

어지간해서는 직접 나서 사냥하려 들지 않는다. 플란츠의 기억으로 하여금 플란츠를, 로닐로 하여금 앨런을, 체이스로 하여금 칼리안을 잡으려 들었다. 데블란도 그랬었다.

'그런데 라시드 브리센이 왜, 지그프리드를.'

- 카아앙! 캉!

생각을 한다.

이미 한 번 악몽이 되었던 하피를 다시 만난 탓에, 제 울타리가 또 노려지고 있음을 알게 된 탓에, 이성을 가질 여력 따위가 없을 동생 놈을 대신해 생각을 한다.

에일라가 건넸던 마력탄을 손에 꼭 쥔 채로. 저도 모르게 어느새 누군가의 피웅덩이를 밟고 선 채로.

"······ 아니야."

생각을 한다.

"없애면 안돼."

그 생각의 끝에, 플란츠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새끼 코끼리에게 감사해야 하나.

아니면 앞으로는 이렇게 넓은 선물은 하지 말아달라 말해야 하나.

굳게 닫힌 수련장의 문을 다시 확인해 본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이 별장 덕에 이렇게 혼자 하피를 맞닥뜨리게 되기는 했으나 저 수련장 덕에 다른 걱정 없이 하피를 상대하고 있으니 이것을 고맙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 꺄아아아악!

잠시 숨을 돌리며 여유를 부리고 있으려니 하피의 울음이 다시 들린다.

얼굴 생김이 다를 뿐 휘트린에 오던 길에 마주쳤던 하피와 외형이 똑같다. 팔을 대신한 날개나 긴 발톱이 달린 발이나 저 끔찍한 울음소리는 전부 다 같다.

- 파슷!

순식간에 땅을 물들이는 독기운까지도.

"나 여기에 산책로 만들 거야. 망쳐놓지 마."

타박하듯 말을 건넨 칼리안이 발을 박찼다.

완연한 어둠 속에 스며들듯 칼리안의 모습이 사라지자 디디고 있던 바닥이 푹 패여 들어갔다.

- 콰가각!

상체를 잘라낼 듯 짓쳐드는 날개를 올려쳤다. 그 사이로 뻗어나오는 발톱을 밟고 도약했다. 오러를 뭉쳐 띄워둔 것을 밟고 한 번을 더 뛰어올라 놈의 목을 노렸다.

이미 상대를 해 본 놈이라 그런지 아니면 등 뒤가 자유로워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놈을 대하는 것이 전보다 수월함을 느끼고 있었다. 놈의 속도는 그대로였으나 칼리안은 보다 빨리 움직여 발톱을 쳐내고 날개를 피해냈다.

- 카가강!

칼리안이 서 있던 곳에 칼날같은 발톱이 쇄도한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이미 한참 전에 자리를 떠난 칼리안이 하피의 바로 뒤에서 나타나 검을 내질렀다. 붉은 오러의 기운이 가느다란 잔상을 남기며 하피의 뒷목을 베어냈다.

화악!

그러나 애석하게도 칼리안의 검은 놈의 목 깃털을 살짝 잘라냈을 뿐. 재빨리 허리를 숙인 놈이 몸을 비틀어 달려드는 바람에 헛 공격을 한 셈이 됐다.

- 끼아아악!

- 쌔애액!

서늘한 기운에 반사적으로 움직인 놈이 날개를 휘두른다. 뒤로 훌쩍 몸을 날려 날선 깃털들을 피해낸 칼리안이 또 한 번 하피를 향해 공격을 보냈다. 그러자 목 뒤를 베일 뻔한 경험 덕에 더 난폭해진 놈이 마주 달려든다.

툭, 하고.

사뿐히 몸을 띄운 칼리안이 놈의 머리 위로 움직이며 검을 내질렀다.

- 우우웅!

붉은 검이 긴 울음을 내며 길게 늘어났다.

그 형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 칼리안이 곧바로 손에 들린 것을 휘둘렀다.

휘리릭!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올 즈음, 채찍처럼 길게 늘어난 오러가 놈의 발을 묶었다.

"······ 자를까."

채찍의 면을 날붙이로 바꿔 놈의 발목을 잘라내버릴까 잠시 고민하다 생각을 고쳤다. 혹시나 플란츠가, 혹은 에일라가 싸움을 돕겠다며 나설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놈의 피가 사방에 흩뿌려져서 생긴 사고는 한 번이면 족하다.

- 끼아아아아악!

움직임이 막힌 놈이 또 한 번 소리를 내지른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흐트러지는 정신을 떨쳐낸 칼리안이 손에 감긴 오러에 강한 힘을 줬다.

- 콰아앙!

날아오르려던 하피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있는대로 날개를 퍼덕이는 하피의 다리를 다시 한 번 잡아당겼다.

가능한 피를 흘리지 않도록, 검이 아닌 다른 무기를 쓴 공격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경계한 놈이 '오러를 흡수하는' 방법을 깨우치지 않도록. 그렇게 놈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힘 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 날개의 끝을 바짝 세워 땅에 박아넣은 놈이 다른 쪽 날개를 휘둘렀다. 칼날같은 깃털로 제 발을 묶어두고 있는 채찍을 내리찍었다.

- 콰직!

- ······ 두근!

칼리안의 심장과 단전에 순간적인 충격이 전해졌다.

놈의 힘에 짓눌려 잘려나갈 뻔한 오러가 반발력을 일으킨 까닭이다. 아마 슬레이만도 저 놈과 같은 힘을 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칼리안은 이런 와중에도 감탄을 했다.

"재밌네. 너도."

날 선 웃음을 지은 칼리안이 자칫 채찍을 놓을 뻔했던 팔에 다시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날뛰다 금세 제자리를 찾은 오러를 다시 운용했다.

- 우우웅!

칼리안의 왼손에 붉은 검이 들린다.

그렇게 오른손에는 채찍을, 왼손에는 검을 들고 몸을 날렸다.

결국 묶인 발을 풀어내지 못한 하피가 한쪽 발을 디디고 일어섰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벗어나려던 것을 그만두고 칼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 카가강!

기다렸다는 듯 왼손의 검을 휘두른 칼리안이 채찍을 풀었다.

- 휘리릭!

- 콰득!

그리고 이번에는 놈의 목을 휘감았다.

갑작스레 목을 죄여드는 붉은 빛줄기 때문에 놈의 몸이 휘청이는 것이 보인다.

칼리안의 입가에 맺혀있던 미소가 짙게 변했다.

팔 대신 날개가 있든 몸 속에 독이 흐르든.

숨은 쉬고 살 것 아니겠나.

- 화아악!

놈이 다시 한 번 날개를 휘둘렀다.

오러를 길게 늘리며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칼리안이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허공에 흩뿌려진 붉은 조약돌같은 오러들을 밟으며 놈의 뒤로 움직였다.

그 틈을 타 얼핏 눈을 돌린 칼리안이 수련장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왜."

그러고 보니 수련장 내부를 아직 태우지 않은 것 같은데.

완두콩이 에일라에게 마법 쓰는 것을 숨기는 건가. 그것을 숨기고 에일라에게는 마력탄이 없어서 저 안의 것들을 없애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설마.

무슨 일이 생겼나.

- 카드득!

일순간에 드는 생각과 불안을 일단 치워냈다.

일단 저 놈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니까.

무슨 일이 있다면 에일라가 통신용 반지로 얘기를 전했을 테니까.

- 꺄아아악!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스미는 비명이 다시 들린다.

큰 숨을 들이쉬며 소리에서 벗어난 칼리안이 오른손에 쥔 오러를 콱 잡아당겼다.

- 콰악!

- ······ 꿈틀!

하피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절대로, 정말 절대로 새겨놓고 싶지 않은 생명의 감각이 손을 통해 전해진다. 검이 아닌 것으로도 많은 생의 막을 내렸던 베른조차 꺼려했던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 우우웅!

무뎌진 눈으로 감각을 떨쳐낸 칼리안이 오러를 움직였다. 몸을 움직이느라 잠시 물려뒀던 붉은 검을 왼손에 다시 들었다.

- 카강! 카가가강!

여지없이 달려드는 하피를 피하고, 발톱을 빗겨내고, 올려쳐가며 상대를 했다. 그러면서도 놈의 목을 옭아맨 힘을 절대 풀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죄이며 계속하여 검을 내질렀다.

비명소리가 잦아든다.

발버둥치던 움직임이 잦아든다.

왼손의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더는 칼리안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 눈에 띄게 느려진 놈을 향해 지체없이 달려들었다.

- 쌔애액!

그런데.

그 때.

서늘한 감각이 숨을 죄여왔다.

칼리안의 붉은 눈에 힘이 들어갔다.

주변을 살필 필요도 없다는 듯, 칼리안이 재빨리 움직였다. 경로를 틀어 옆으로 몸을 날렸다.

- ······ 서걱!

선득한 느낌이 옆구리를 스친다.

어울리지도 않게 차려입고 나온 분홍빛의 옷이 순식간에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젠장.

- 끼아아아아악!

또 다른 한 마리.

이제껏 상대하던 놈이 아니었다. 또 다른 하피가 날아들었다.

- 휘이익!

눈치채지 못할 사이에 달려든 다른 한 놈의 하피가 칼리안의 옆구리를 베어냈던 발톱을 다시 뻗는다.

젠장.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삼킨 칼리안이 오른팔을 움직였다. 두 마리를 상대하게 된 까닭에 고집을 버렸다. 피가 흩뿌려지더라도, 아직까지 굳게 닫힌 수련장에서 두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올 일은 없으리라 믿고 일단 한 놈만이라도 완전히 없애두어야 하겠다고.

- 우웅!

오러의 채찍을 칼날로 바꾸었다.

아니.

바꾸려 했다.

- 콰직!

새로 나타나 칼리안에게로 달려들었던 놈이 발톱을 세웠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길게 이어져있던 오러를 '잘라냈다'.

붉은 채찍의 한 가운데가 툭 끊어졌다.

- ······ 두근!

칼리안의 어깨가 움찔했다.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죄여든다. 준비 없이 잘려나간 오러의 힘에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

- 타닷!

잠시 참았던 숨을 애써 내쉰 칼리안이 몸을 날렸다.

- 쌔애애액!

- 콰악!

칼리안이 자리를 떠남과 거의 동시에 하피의 발이 내리찍힌다.

- 타아악!

놈의 뒤로 도약했다.

간신히 목이 풀려 몸을 일으키고 있던, 본래 상대하고 있던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또 한 번을 요동치다 잠잠해지는 오러를 내뻗었다. 놈을 향해 날렸다.

- ······ 콰직!

날개를 펼쳐들고 뛰어들던 놈의 목에 검을 꽂아넣었다. 놈이 반응할 새도 없이, 칼리안을 발견하고 맞받아칠 틈도 없이, 순식간에.

- 우웅!

- 카드드득!

잔뜩 날 선 오러가 놈의 목 속에서 날뛴다.

생명력 질긴 놈이 제 목에 검이 꽂힌 것도 무시한 채 달려들었다. 그 공격을 한 번 내친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빛났다.

- 우우웅!

모습을 바꾼다.

얇고 가는 검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얇고 넓은 것으로.

그래.

- 콰득!

넓은 원반처럼. 칼날로 만들어진 방패처럼.

놈의 목에 여전히 깊이 박힌 채로.

오러의 날을 붙들던 목 근육을 갈라내고 크기를 부풀렸다. 사방으로 날을 뻗었다. 뼈를 가르고 살을 비집으며 튀어나왔다.

그렇게 하여 비로소,

- 서걱!

놈의 숨을 잘라냈다.

끝까지 칼리안을 노려보던 놈의 몸이 기우뚱, 넘어간다. 그 위에 올려져 있던 놈의 머리가 툭.

- 쿠우웅!

떨궈진다.

끈질기게 이어지던 숨이 비로소 멎었다.

"······ 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투두둑.

길게 갈라진 칼리안의 옆구리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 타앗!

그러나 도려내진 것인지 베인 것인지 모를 옆구리의 상처를 오래 살피지도 못한 채 곧바로 몸을 날렸다.

- 끼야아아아!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지긋지긋한 하피가 또 하나 남았으니까.

- 카아앙!

- 카강, 카가강!

놈의 공격을 쳐냈다.

순간 팔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다잡았다.

- ······ 두근!

몸 속에 든 축복의 힘이 서둘러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방금 전 오러가 잘려나간 덕에, 오러가 아주 잠시 요동치게 된 덕에, 두 번째 하피에게 베인 상처 새로 독이 스민 까닭에.

오러를 움직여 독이 최대한 퍼져나가지 않도록 막은 칼리안이 놈으로부터 한 발을 물렸다.

"······ 어찌하나."

순식간에 차오르는 독기운을 애써 밀어내며 찰나와 같은 고민을 했다. 아주 잠시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으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 스승님.

아.

안되겠다.

우리 히나랑 키리에랑 얀이랑 레이븐이랑 옥수수수염이랑 완두콩이랑. 그리고 체이스 형님과 에일라까지. 다 떼놓고 나몰라라 하기에는 억울해서. 이번마저 서른 살, 쉰 살이 되어보지 못하고 끝낼 것을 각오하며 계속 싸우기에는 아무래도 억울해서.

미련없이 싸우기에는 미련이 많아져서.

- 스승님. 들리십니까.

안되겠다.

아빠 불러야지.

카아아앙!

베인 상처에 오러를 운용해 독기운을 밀어내며 있는대로 검을 올려쳤다. 하피의 것만큼이나 날 선 칼날 울음이 고막을 뒤흔든다.

- 아버지.

앨런으로부터 답이 없다.

허리를 비틀며 발을 박찼다.

코앞에서 날아드는 하피의 발톱을 쳐낸 뒤, 금세 뒤로 돌아 달려드는 또 다른 놈의 날개를 밟고 도약했다.

- 울컥!

빠르다.

몸을 움직일수록 빠르게 퍼지는 독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그것을 다시 오러로 밀어내며 발을 박찬다. 심장이 거세게 움직인다. 독을 해독하기 시작한다.

팔을 뻗었다.

다리를 박찼다.

- 쌔애애액!

놈의 발톱이 짓쳐든다.

흔들.

시야가 점멸했다.

흔들.

피해야 할 텐데. 피하지를 못 하고.

어떻게든 막아내기 위해서 검을 들었다.

- 쌔애애액!

놈의 발톱이 짓쳐든다.

그것을 고스란히 보았다.

늦었음을 알았으나 검을 쳐올렸다.

그 순간.

- 카아아아앙!

거대한 쇳소리가 울려퍼진다.

어디선가 날아든 두꺼운 검이 놈의 발톱을 쳐낸다.

"왕자님의 아버지는 아닙니다만."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갑옷.

빛나는 은색 검.

그것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되게 멋진 정혼자님이 칼리안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칼리안의 연락을 받아 형형하게 빛나는 반지를 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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