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56화 (457/527)

제81장. 있잖아, 드미레아(1)

있잖아, 드미레아.

내가 할 말이 있는데······.

그런데 말해주기 전에 먼저 주의를 줄 게 있어.

일단, 드미레아.

내 말 다 듣고 나면 심호흡 해야 해.

아니다. 칼 먼저 집어넣고 심호흡 해야 해. 그 뒤에는 자리에 다시 앉아. 물도 한 잔 마셔야 될 거야. 그 쯤 되면 네가 또 일어나서 칼을 뽑을 텐데 그걸 한 번 더 집어넣어 놓고 자리에도 다시 앉은 뒤에 차분하게 생각을 먼저 하는 거야. 나랑 다르게 너는 신중한 사람이라서 내가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잊지 말고 생각 먼저 해야 해.

참. 스승님 아직 옆에 계셔?

그럼 스승님한테 혹시 네가 칼을 세 번쯤 뽑더라도 도로 집어넣게 해 달라고 부탁해놔. 내 생각에는 그게 좋겠어. 너 혼자 못 참을 것 같아.

뭐 때문에 그렇게 장담하기는.

네 생일 선물 안 줬다고 자고 있던 얀한테 칼 꽂으려고 했다며. 그 일에 그 정도로 화를 냈으면, 내 생각에 네가 내 말 듣고 나면 칼 든 채로 여기에 찾아올 것 같거든.

생일에 칼 꽂으려고 했다는 얘기?

응. 얀한테 들었어.

오해······ 가 아닌 것 같던데. 얀이 진짜 무서워하던데.

아, 아니······ 응.

나야 네 말 믿지. 응.

칼은 실수였고. 응, 그래. 대체 무슨 실수를 어떻게 하면 자고 있는 새끼 코끼리한테 칼이 딱 떨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아니야. 실수겠네. 실수 맞네. 실수가 생기면 자고 있던 오빠한테 칼도 떨어뜨리고 그럴 수 있지. 네가 고작 생일 선물 못 받았다는 그런 일로 화를 낼 사람이 아니지.

그렇지······ 응.

그치. 응. 당연히믿지. 응. 내정혼자님인데. 응. 정혼자님아니면내가누굴믿겠어.

거짓말 아니야. 말했잖아, 나 거짓말 못 한다고. 그래서 다 들키고 다니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벌써 세 명밖에 안 남았다니까. 아니······ 얼마 안 남아서 속 편해진 게 아니라 거짓말을 못 한다는 거지. 네 말 믿는다고. 응.

그런데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 왜 또 혼나, 드미레아?

아냐. 내 잘못 아니라니까. 내가 원흉이기는 한 것 같은데 내 탓은 아니야. 비밀 들킨 것도 진짜 아니야. 내 얘기 듣고 나면 비밀이 문제가 아니게 될 테니까 그 부분은 걱정 말아.

아무튼 들을 준비 했어? 얘기해도 돼?

아, 그래. 물부터 가져와.

기다릴게. 나 시간 많은 사람이야.

물 가져왔어?

어때.

이제 말 해도 돼?

그래. 말할게. 라시드 브리센이 얀을 노리고 있어.

- 뚝.

드미레아?

드······ 미레아?

듣고 있어? 생각 중인 거야? 물 마시고 있어?

정혼자님.

아아아. 정혼자니임. 내 말 안 들려?

음.

"······ 어떡하지."

"왜."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소공작님 온대요?"

"음······."

어떡하지.

* * *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늘 꿈꿔오던 것처럼 색을 넣거나 목소리를 넣지는 못했다. 다만 이것을 위해 익혀 두었던 보존마법을 잘 응용해 언제까지고 절대 녹지 않도록 만드는 것에는 가뿐히 성공을 했다.

프레이야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칼리안과 많이 닮기도 했거니와 왕궁의 초상화를 통해 참 많이 봐왔기 때문에 쉬이 만들었다. 초상화 속에서 입었던 옷도 단번에 구현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 우루루!

고민의 끝에 눈물을 머금고 부서뜨린 얼음 조각이 테이블 위에 흩어졌다. 그것이 곧 사르륵 녹더니 공기 중으로 기화하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때문에 누군가와 사이좋게 함께 있던 프레이야가 다시 홀로 서 있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 곁에 있던 '칼리안'의 조각상을 아르센이 지워내듯 없앤 까닭이다.

공들여 만든 것을 없앤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칼리안을 쏙 빼닮은 손바닥만한 얼음 동상을 다 완성했다가 처음부터 만들기를 이미 여러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칼리안은 프레이야와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라고만 했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프레이야와 함께 서 있는 칼리안이 지금의 칼리안이어야 할지. 아니라면.

생긴 것은 같겠으나 훨씬 어렸던, 어깨가 조금 더 움츠러들어 있고 입가에 미소가 없으며 앞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다던 시기의 칼리안이어야 할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을 다시 만들었어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아르센이 마력을 다시 모았다.

- 팔락!

란델의 손 끝에서 넘어가던 책장의 소리가 조금 크게 울린다.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르센이 란델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란델이 입을 열었다.

아르센을 쳐다보지도 않고, 책을 읽어내려가던 시선을 그대로 두고서.

"허울 뿐인 직책이라는 타박이라도 받았더냐. 그리 증명하지 않아도 나는 알겠다만."

마력이 흘러 넘치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렇게 헛짓거리를 하고 있느냐는 소리다. 마법사 너 때문에 산만해서 책을 못 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머릿속이 하도 복잡해서 제대로 된 의미를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어쨌거나 욕인 것은 잘 이해했다. 때문에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곧 끝내겠습니다."

"마법사의 신의가 그리 대단하다 하던데 이제 나도 잘 알겠구나. 행동마저 막내를 따르는 것을 보니."

하는 짓이 딱 칼리안 같다는 말.

왕족에게 타박을 들었으니 곧장 사과하고 자중해도 모자랄 판인데 사과도 설명도 없이 좀만 더 기다리라 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이렇게 되돌려 준 것일 터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란델 왕자님."

"좋게 보아 하는 말이겠느냐."

"좋게 보신다 여겨 감사드리는 것이겠습니까."

"막내가 제 사람 하나는 확실히 잘 두었구나."

"과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가는 말이 곱지 않다.

그 칼리안의 명령을 제멋대로 어기고 저보다 한참 어린 플란츠와 하루에도 몇 번씩 말싸움을 하는 아르센인데 란델을 상대로 거리낄 것이 있겠나.

"내가 그리 불편하더냐."

"이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경계하는 겁니다."

"어째서."

"란델 왕자님께서 우리 왕자님을 정말 형제로 보시는지, 아니면 가장 나은 수로 여기시는지. 저는 아직 확신을 못 했습니다."

"그러하더냐."

"네. 그렇습니다."

아르센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계산과 실리 없이 움직인 적 없던 이성적인 란델이 아니던가. 그런 란델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것이 정말 옛 형제에 대한 부채감이나 새 형제를 향한 믿음 때문일까. 아니면 이번에도 단순히 칼리안 쪽에 서는 것이 가장 낫다 여긴 까닭일까. 그런 의심이 든다.

"저희 스승님이 사람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고 가르쳐주어서 말입니다."

"잘 배웠구나."

"네. 잘 배웠습니다."

"그래. 막내 곁에도 똑똑한 사람이 한 명 쯤은 있어야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르센은 마법사다.

계산을 잘 하기로 따지자면 시스테라 대륙에서 한 손 안에 꼽힐 만큼은 된다.

칼리안은 다르다. 마법사이기 이전에 기사였고 기사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형제인 칼리안은 란델마저 울타리에 넣었다.

차라리 키리에였다면 칼리안이 믿고 있는 란델을 똑같이 신용할 테고 에일라라면 칼리안이 아닌 누구도 믿지 않을 테지만 아르센은 아니었다. 마법사이면서 동시에 칼리안을 따르고 있는 입장에서는 란델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 팔락!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란델이 책장을 또 한 번 넘겼다.

"그 곁에는 예전 모습이 더 어울릴 것 같다만."

"곁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각상을 말하는 것이다."

아르센의 눈이 아주 잠시 굳었다 펴졌다. 고집스레 책만 쳐다보는 줄 알았더니 아르센이 뭘 하고 있었는지를 알아 본 모양이다.

"프레이야 왕비님의 곁에 예전 모습의 왕자님을 세우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생각은 달랐더냐."

아르센으로부터 답이 나오지 않았다.

란델의 말대로 아르센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칼리안에게 줄 것이 아니라 프레이르에게 줄 것이지 않나. 그러니 프레이야의 곁에는 옛 칼리안이 서는 것이 어울린다 여겼다. 다만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한 이유는.

"막내가 신경쓸까 우려되더냐."

이 역시 란델이 다시 정확히 짚었다. 그 조각상이 혹시나 칼리안을 이방인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질까, 아르센은 그런 걱정을 했다.

"네. 우려됩니다."

"막내도 좋아하지 않겠느냐."

방금 전 말싸움을 벌인 것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건네진 솔직한 대답에, 란델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 달칵.

그리고 얇은 갈색 테의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올려두며 말을 이었다.

"제 어린 시절을 다시 보는 것이니."

아르센이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왕궁 북쪽의 숲에서 베른을 불러내 그 손에 죽을 뻔 해가며, 그렇게 힘들게 칼리안으로 하여금 베른을 제대로 받아들이도록 했으면서. 그랬으면서 옛 칼리안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칼리안은 옛 칼리안의 몸과 기억을 다 가진 채 베른만 가져와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칼리안이 베른을 숨기거나 선을 긋지 않게 된 것은 옛 칼리안 또한 온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잊고 있었다.

"왕자님이 좋아하겠습니까."

"막내 곁에 똑똑한 이가 한 명은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보았더냐."

"······ 아닙니다. 좋아할 것 같습니다."

세레누스에 취했던 자신의 기억을 다 지나간 일처럼 꺼내놓고, 이렇게 바람이 잘 드는 곳에 조금 더 빨리 와보지 못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아쉬워하고. 칼리안은 이제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 일들을 아프고 아쉽다 여길지언정 더는 죄책감을 갖거나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되었다. 그런 사실을 이제서야 생각해 냈다. 다시 깨닫게 됐다.

베른의 외향을 하고 있던 칼리안이 란델을 불렀던 날. 그 모습을 란델에게 보여주며 차라리 남이라 생각하라 말했던 날. 자신을 직시하는 연보라색 눈을 보며 칼리안의 이런 속내를 제대로 알게 되었던 란델이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네 계산 밖의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것이 비단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란델을 보는 아르센의 시선에 대해서까지 함께 일러주는 말인지. 란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탁 하고.

책을 덮어 내려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좋으니 밤 산책이나 가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 * *

- 휘이이잉!

바람을 모아 자그마한 창 밖으로 밀어냈다.

방 안 가득하던 악취가 그 바람에 실려 밖으로 흩어졌다.

클린을 써서 악취의 원인이 된 핏자국을 지워내고 이곳 저곳에 널브러진 검붉은 것들을 태워 없앨 수도 있었지만 일단은 바람만 일으켰다.

"역하십니까."

"조금. 괜찮아."

"네."

마음먹은 대로, 조금 더 세심하고 살뜰하게 완두콩부터 챙긴 칼리안이 긴 숨을 들이쉬었다. 악취를 몰아내는 바람의 반대 방향에 서 있으니 그나마 좀 낫다.

- 자박, 자박.

에일라가 성큼 발을 옮겨 안으로 들어섰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가죽 부츠의 앞 코와 반 뼘 쯤 되는 두꺼운 굽에 검붉은 것들이 엉겨붙는 것 쯤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이다.

"왕자님의 시종이 이런 곳을 꾸며두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아닌가?"

"얀이 꾸민 곳은 아닐 거야. 개를 키우겠다고는 했어도 몬스터를 키우겠다고는 안 했으니까, 나는."

조금 전.

라시드의 편지를 발견하고 앨런을 통해 드미레아에게 조심하라는 연락을 취한 칼리안이 서재 밖으로 나왔다. 그 후 별장 이곳 저곳을 천천히 뒤져보다 별장 뒤뜰에 만들어진 곳에 들어서게 됐다.

칼리안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자마자 제일 먼저 플란츠에게 경고를 전했다. 안 들어오시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이다.

물론 동생 말 안 듣는 완두콩은 기어코 안에 들어섰지만.

"본래에는 내 수련장으로 쓰라고 만들어뒀을 것 같은데. 지그프리드 공의 수련장이 이렇게 생겼었어."

"왕자님이 뭘 연습해도 안 무너지게 생겼네요."

"몬스터 키우기에도 제격이고."

"그렇죠."

그러니까 이 곳은 '우리 꽃같은 왕자님이 안에서 뭘 하셔도 안전하게 만든 튼튼한 수련 공간'에 딱 들어갈 만한 철창을 설치해 만든 하피 사육실이었다.

채 다 치우지도 않은 돼지의 뼈와 살점 찌꺼기들이 한 곳에 쌓여있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에일라가 서슴없이 걸어다니고 있는 저 바닥에는, 아마도 돼지는 아닌 듯한 것들의 잔해가 정신없이 널려있는 상태다. 무엇인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하피를 숲으로 데려가기 위해 철창을 열었을 이들 중 일부일 터였다.

한 마디로 완두콩이 고기를 먹는 꼴을 보는 것은 당분간 글러먹었다는 소리다.

"먹성이 좋네요. 고기는 다 좋아하나봐."

"내 얘기야?"

"하피 얘기. 왕자님은 사람 안 먹잖아요."

"안 먹지. 나는."

지금 밟고 있는 것이 앞 사람의 피인가 그 옆 사람의 피인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할까.

내 아우님은 둘째치고 이제 고작 스물 두 살이라던 내 아우님의 새 부하는 그 동안 대체 뭘 하고 살았기에 굳이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단검 끝으로 뒤적거리며 살펴보려 들 수 있는지. 세크리티아 사람들 지독하다는 말이 저런 뜻이었는지.

그나저나 세크리티아 사람들은 말 꼬리 짧은 것이 특징인가. 내 동생의 옛 형님의 정혼자 분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런 걸 보면 내 동생과 내 동생의 옛 정혼자가 그냥 많이 닮은 건가. 그래서 저 사람이 나한테까지 말꼬리를 잘라먹으면 나는 이해를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똑똑한 플란츠가 비현실적일 만큼 잔혹한 광경에서 눈을 돌리고자 만들어낸 고민들을 애써 이어나가는 사이.

"왕자님 따라다니는 그 얼음 마법사는 본 것 없대요?"

"아르센 헤르츠.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통성명은 좀 해두라니까. 에일라."

"하기는 했어요."

"그래. 잘 했어."

"뭐든 잘 하죠."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헤르츠 경도 숲 밖에서 '식사' 흔적을 보기는 했다는데 특별한 건 없었댔어."

"여기는 있는데. 특별한 것."

그러자 에일라가 이런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곧바로 발을 옮겼다. 피가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겠으나 다른 부산물을 밟지는 않으려 나름대로 신경을 쓰면서 에일라 쪽으로 다가갔다. 밟는 것이 싫어서라 하기보다는 밟을 때 들리는 소리도 꼼꼼하게 잘 기억해 둘 플란츠임을 알아서였다.

칼리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모양이다. 에일라가 칼리안이 더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건네주듯 던졌다.

- 챙그랑!

그것을 집어든 칼리안이 마력을 운용했다.

어지럽게 뒤덮여 있던 핏자국이 사라진다.

손에 들린 것을 살피던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건······ 반갑지 않은데."

붉은 테두리를 지닌 검은 방패 문양.

기울여 보면 드래곤의 날개가 그림자처럼 살짝 드러나는, 어떤 방식으로 세공하는지 알려져 있지 않은 문양. 따라서 위조가 어려운 그런 문양이 새겨진 금속 조각이었다.

"지그프리드 맞아요?"

"응."

한 마디로,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지니고 다니는 검의 파편이었다.

- 우우웅!

칼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오러를 이기지 못한 파편에 금이 가는 것이 보인다. 오러를 담거나 버티지 못하는 강도의 금속이었다.

그것은 곧, 지그프리드의 기사이기는 했으나 주요한 위치의 사람은 아니었던 이의 검이라는 뜻이다.

가늘어진 눈매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다른 건. 에일라."

"옷도 평범하고 갑옷은 없고. 다른 무기들에는 그런 게 없어요. 얼굴이며 몸이며 누구인지 알아 볼 수도 없고. 머리카락들도 다 평범한 갈색이라서."

이 곳에서 하피의 먹잇감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이다. 그 하피가 태어난지 딱 한 달이 된 놈은 아닐 테니 어딘가에서 잡아왔거나 다른 곳에서 어떻게든 키워내 이곳에 숨겨뒀다는 뜻일 터였다.

"적어도 한 달 전부터, 지그프리드를 덫에 넣으려고 준비하고 있었어. 그게 나와 연관되어서일지 아니면 그냥 지그프리드라서일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왕궁 습격에 실패하고 나서 내가 여기로 올 걸 라시드 브리센이 미리 알았다는 건 분명해졌네."

"왕자님이랑 생각하는 게 엇비슷하니까."

"하피가 왕족 일행을 습격했고, 자칫하면 난 그 일로 엘프들을 다 없앨 뻔했고, 그렇게 하지 않고 얌전히 여기에 왔더니 내 별장에 하피 흔적이 가득하네. 별장 안에는 지그프리드 기사의 검이 있고······."

칼리안의 동선을 전부 다 파악했다.

라시드가 칼리안을 위한 함정을 만들었으리라, 칼리안이 그렇게 생각해 휘트린에 올 것을 미리 알았다.

"나는 내가 하피를 만났다는 걸 다 알렸는데. 그랬으니 이젠 달리 둘러대지도 못할 테고."

처음에는 하피의 공격을 받았음을 휘트린에 알리지 않았었다. 그러다 하피를 보낸 이들의 배후를 떠보려 귀족들 앞에 하피의 깃털을 내보였다.

칼리안이 제 손으로 하피에게 습격 받은 일을 증명한 셈이다. 그러고 나서 이 별장에 왔더니 하피 흔적이 가득했다. 한 술을 더 떠 지그프리드 기사의 검 조각까지 보란듯이 나왔다.

- ······ 우웅!

칼리안의 손이 검게 빛났다.

- 파삭······!

오러를 버티지 못한, 지그프리드의 문양이 새겨진 파편이 바스라지듯 부서졌다.

"그거 하나 없앤다고 해서 여기 증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보기 전에 빨리 태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맞는 말이었다.

라시드가 이 곳에서 무슨 증거를 만들어 가져갔든, 일단 이 수련장부터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지그프리드와 휘트린을 한데 엮어 반역자로 잃어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안의 손 끝에 모여든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 마력의 끝에 불의 힘을 담으려던 찰나.

- 꺄아아아악!

결코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안이 팔을 뻗었다.

플란츠의 어깨를 붙들어 등 뒤로 넘겼다.

- 타앗!

발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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