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55화 (456/527)

제80장. 야옹(5)

무서운 왕자.

수어를 쓸 때의 히나는 란델을 그렇게 불렀다. 자상한 왕자, 좋은 왕자, 그냥 착한 오빠, 엉뚱한 부군단장, 어른스러운 동생 등, 대체로 좋은 말을 써서 부르는 히나였으나 란델에 대해서만은 아니었다. 아니라면 1왕자라고만 불러도 될 텐데도 굳이 무서운 사람이라 칭했다.

그런데 히나와는 사뭇 다르게 란델을 평가하는 이가 있었다.

"무서운 분이 아니라 어떻게든 버텨오신 분입니다."

처음에는 란델이 플란츠보다 더 무서웠는데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레릭의 말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 것은 덴이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오래도록 란델을 지켜봤던 상급 시종으로서 한 말이었으니 허튼 소리는 아닐 터였다.

- 쪼르륵······.

덴의 말을 들으며 찻주전자를 든 얀이 팔을 기울였다. 그리고 준비해뒀던 찻잔에 조금씩 천천히 찻물을 부었다.

청량한 향이 감도는 것이 느껴진다.

민트차였다.

"다들 비슷하시죠."

세 번째 잔에 찻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던 얀이 조금 늦은 반응을 보였다. 덴이 느끼기에야 란델이 가장 안타깝겠지만 레릭의 입장에서는 플란츠가, 얀의 입장에서는 칼리안이 그러하지 않겠나.

"란델 왕자님만 버텨온 것이 아니라요."

마음이 불편하여 말싸움을 만들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칼리안의 두 형제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으리라 여겨보려 노력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얀의 시선에서 란델을 무조건 안타깝게만 여겨줄 수가 없어서 내려둔 말이었다.

차마 왕족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뒷말을 할 수도 없고 당사자도 아닌 시종들에게 '그래도 란델은 다른 형제들에게 멸시받진 않았다. 고개는 들고 살았다. 독차를 받은 칼리안이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기에 하루아침에 그렇게 변했는지, 란델이 생각을 해보기는 했을까.' 하는 등의 말로 원망을 토로할 수도 없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기엔 좀 억울하지 않나.

"비단 우리 왕자님만의 일은 아니다······ 그렇겠군요."

"우리 왕자님이라고 해서 다를 것 없죠."

"네."

"네."

덴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얀이 덧붙였다.

짧은 대화의 끝에 침묵이 감돈다.

"아······ 그······."

덕분에 좌불안석이 된 사람은 레릭이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영주성에서 나가고, 방에 들어와 인사를 하더니 대뜸 막냇동생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한 발칸의 부군단장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져 앉은 란델이 책을 펼쳤을 무렵.

맛없어서 맛있는 차 말고 맛있어서 더 맛있는 차를 꼭 만들겠노라 다짐한 얀이 레릭과 함께 영주성의 다과 준비실에 들어섰다. 그러다 란델의 방에 차를 올리고 뒷정리를 하던 덴과 마주쳤다.

'덴, 다 같이 차 한 잔 하실래요?'

'레릭.'

'······ 그러죠.'

그리고 이렇게.

서로 간단한 묵례만 나누고 지나치려는 덴을 레릭이 붙들었다. 그렇게 자신 때문에 만들어진 자리였으니 레릭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차 준비는 제가······.'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어차피 연습하러 온 거라서요.'

'알겠습니다.'

솔직히 레릭은 얀과 덴이 이렇게까지 서먹한 사이인 줄을 몰랐다. 얀과 덴이 서로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을 꺼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레릭이 오기 전까지의 얀과 덴은 서로 교류할 일이 전혀 없었다. 적어도 상급 시종들끼리는 그렇게 지내지를 못했다. 레릭 이전에 있었던 플란츠의 상급 시종과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아침 조찬 자리에서 마주쳐도 간신히 묵례만 주고 받았고 다과 준비실 등에서 볼 때에도 별다른 대화 없이 서로의 용건만 처리하고 나갔었다.

어쩔 수 없다기보다는 당연하다 해야 할 일이다.

모시는 사람의 입장을 대변하고 왕자의 일에 대해 가장 많이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이 바로 상급 시종이다. 르메인조차 칼리안에게 할 이야기를 얀을 통해 전하고, 칼리안을 만나기 위해 얀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이 관례가 아닌가. 그러니 왕자들간의 사이가 곧 상급 시종들간의 사이일 수밖에.

게다가 결국 세 왕자들 중 두 명과 그의 시종들은 왕궁을 떠나야 하지 않나. 모시던 왕자를 따라 수도 밖이나 탑까지 따라가지는 않겠다 결정하더라도 왕궁 안에 남아있지는 못하게 되니 말이다.

강제된 끝이 다가오는, 경쟁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에 놓인 왕자들. 그들의 상급 시종들이 서로 친목을 다질 수 있었을 리가.

"죄송해요."

급속하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몸소 느끼며 후회한 레릭이 사과를 전했다.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너무 무거운 얘기를 꺼냈나봐요."

"신경 쓰지 말고 차 마셔요."

"네. 고맙습니다."

시종의 서열 역시 모시는 이를 따른다.

그러니 지금은 레릭의 위치가 가장 높다. 셋 중에 맨 마지막으로 상급 시종이 되었더라도, 얀보다는 나이가 많았지만 덴보다는 분명히 어리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런 레릭이 사적으로나마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고 있었으나 다른 두 시종은 별달리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다시 바뀔 왕세자 자리라는 것을, 다른 귀족들은 모른다지만 이 자리의 모두는 다 알고 있었으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맛은 없을 거예요. 차를 직접 만든 게 오래 되질 않아서요."

"괜찮아요. 저도 차는······."

이렇게 말하던 레릭이 말을 멈췄다.

다른 말 없이 얀의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고 손을 뗌으로서 얀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덴을 발견한 까닭이다. 얀의 말이 겸손이 아니었구나, 하는 얼굴로 말이다.

그 태도가 어찌나 란델과 닮았는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얀이 입을 열었다.

"제 차 맛있게 드시는 분은 우리 왕자님밖에 없어요."

거짓이 아님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얀 역시 자신의 차에 두 번 손을 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얀이 차를 내간 날에는 플란츠가 차를 남겼구나.

그 사실을 레릭이 이제야 알았다.

그동안 얀과 차를 마실 때에는 대부분 레릭이 차를 우려냈다. 간혹 얀이 내어주는 차는 찻잎이나 꽃잎이 아닌 과일청으로 만든 것이었다. 특별히 찻잎 우리는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으니 몰랐을 수밖에.

"그런데 왜 직접 차를,"

향은 좋은데 쓴 것인지 떫은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차를 애써 한 모금 더 마시고 내려놓던 레릭이 이렇게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또 괜한 질문을······."

"아니에요."

실리케의 독차가 전달된 이후로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얀이 누구에게도 차 만드는 일을 맡기지 못하게 된 것임을 또 뒤늦게 깨달았다.

"체르밀에 제가 쓰던 노트가 있습니다. 혹시나 제가 없을 때 다른 시종이 차를 내어 갈 것을 대비해 차 우리는 법을 적어뒀는데, 왕궁에 돌아가면 보여주겠습니다. 도움이 될 겁니다."

덴의 말이었다.

그 말이 꽤 의외라서,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덴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왜 호의를 보이는지에 대한 의문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얀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도 얼마 전부터 제가 직접 차를 드리고 있어서 그럽니다."

또, 침묵이 찾아든다.

이번에는 어색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저도'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덴 역시 직접 차를 내어가는 이유를 모를 이들이 아니라서 생겨난 침묵이다.

르니에리의 독을 겪은 이가 비단 칼리안 뿐만은 아니었으니.

"······ 고맙습니다. 주시면 잘 볼게요."

"네."

달칵.

얀의 맛 없는 차를 세 모금 째 마신 레릭이 찻잔을 내려놨다.

마시다 보니 이게 또 썩 나쁘지만은 않은 듯 싶다. 칼리안이 왜 얀의 차가 맛있다 하는지도 알 것 같다.

- 차르릉!

열어 둔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든다.

그 바람에 흔들린 은색의 막대 장식이 고운 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던 덴이 입을 열었다.

"소리가 듣기 좋다고, 우리 왕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얀과 레릭의 눈이 덴에게로 향했다.

바람이 만드는 소리에 다시 한 번 귀기울이던 덴이 말했다.

"바이올린 말입니다."

"아······ 네."

며칠 전 숲에서, 마법사들의 짐꾸러미에서 나왔던 바이올린을 얀이 만지작거렸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이 소리를 들려달라며 부탁을 했다. 빌헬름 관에 자주 드나드는 슬레이만과 드미레아 덕에 발칸의 사람들도 이제 얀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몇 번을 거절할 만큼 완강하질 못한 얀이 결국 바이올린을 들었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들려줬던 지그프리드의 자장가를 연주했었다. 그만 좀 떠들고 이제 좀 자라는 의미로.

그것이 듣기 좋았다는 란델의 말.

그런 말을 잠시 귀에 새기던 얀이 짧지만 시원한 한숨을 탁 하고 내쉬었다. 그리고 덴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가르쳐 드릴까요?"

"······ 지그프리드의 바이올린을 말씀이십니까?"

주변 정황을 읽는 눈이 플란츠보다 뛰어난 란델 덕에 얀의 출신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덴이 물었다. 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 더 이상 비밀일 필요도 없는 가문의 이름을 대충 들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 우리는 법 적힌 노트랑 교환하는 셈 치고요. 저도 왕자님께 하모니카 연주하는 걸 배우고 있는데 재밌더라고요."

"가르쳐 주신다면 감사히 배우겠습니다."

"네."

순간 눈이 반짝했던 레릭이 잠시 어깨를 물렸다. '저도 배울래요' 하던 말을 삼켜내야 했던 까닭이다. 자신은 얀에게 특별히 가르쳐 줄 만한 것이 없지 않나.

그 생각이 뻔해서 웃은 얀이 레릭을 보며 말했다.

"차 연습하는 것 도와주시는 값으로도 칠게요."

"아······ 저도 배워도 됩니까?"

"생각이 있으면요."

세상에.

지그프리드의 바이올린이라니.

"당연하죠. 배울게요, 저도."

지그프리드의 검만큼이나 유명한 것을 익히게 된 레릭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런 좋은 곳에 멋들어진 별장을 지을 돈도 없었고 바닷가를 다 뒤져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찾아 올 여건도 못 되지만 잘 모아뒀던 시종의 급여로 바이올린 하나는 충분히 살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연습해서, 돌아오는 11월에는 플란츠 저하께 생일 축하곡이라도 연주해드려야지.

"덴."

"네."

"혹시 란델 왕자님 탄생일 때 무슨 선물 하셨었어요?"

"안 했습니다."

"아······ 네."

······ 나는 꼭 해드려야지.

* * *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홀로 밝았던 술집.

안에 들어섰을 때 보게 된 아름다운 푸른 솔새.

그 뒤에 널브러져있던 목 없는 시신들.

딱 그 날의 광경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 이 곳에는 비가 내리는 대신 바람이 불고 알싸한 술 냄새 대신 바람 내음 사이에 든 피 비린내가 진동한다는 것 정도일까.

"그 망고 색 머리 남자요. 그 사람이 몰래 빠져나가기에 따라왔더니 여기였어요. 탁 트인 곳에서 한참동안 말을 달려온 거라서, 뒤를 밟는 걸 안 들키려고 말 발굽자국을 따라 걸어왔는데. 그런데 도착해보니 이미 누군가한테 죽었더라고요. 그래서 살펴보는데 저택 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다 죽였죠."

에일라의 설명을 들으며 걸음을 잠시 멈춘 칼리안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뒤에서 따라오던 플란츠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무리일 것 같으면 잠깐 기다리고 계실 만한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괜찮아."

다리 끊고 떨어진 네 놈 데리러 갔을 때 계곡 아래에서 마주친 시신들 상태가 몇 배는 더 끔찍했던 것을 알기는 하느냐고.

그런 말 대신 내뱉은 짧은 대답에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네."

참으로 예민하신 완두콩이 혹시 절여졌는지 아니면 시들었는지. 이렇게 확인을 마친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봤다.

별장의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정확히는 전쟁이라도 치른 듯한 광경이 보인다.

"손이 매운데, 에일라."

"나 원래는 안 그랬어요?"

"칼을 이렇게 깊이 쓰지는 않았었어."

"하얀 수리는 이렇게 죽이라고 가르쳤어요. 내 탓 아니야."

"그래."

"······ 왕자님 탓도 아니고요."

"알아."

"네."

"보기 싫어서 한 말도 아니고."

"알아요. 나도."

"응."

에일라는 테일란에게 검술을 배우고 하얀 수리에게 살인을 배웠다 했다.

물론 예전에는 둘 모두 베른이 가르쳤다.

때문에 그 때와 지금의 에일라가 사람의 생명을 끊는 방법에 차이가 생기게 됐을 뿐. 그건 에일라의 탓도 칼리안의 탓도 아니었다.

잔뜩 놀란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뒹굴고 있는 누군가의 머리가 또 보인다.

"왕자님 별장인 줄 알았으면 이렇게까지 해두진 않았을 텐데, 몰랐어요."

"괜찮아. 나도 처음 와 봤어."

"잘 치우고 쓰세요."

곁에 놓인 작은 돌멩이와 사람 머리를 똑같이 여기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던 칼리안이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그래. 내가 잘 치울 테니까 얀한테는 말하지 마. 속상해 할 거야."

"알았어요."

별장의 외부와 정원에 있던 이들을 다 없앤 것은 에일라였다.

그런데 그곳을 싹 정리하도록 별장이 조용했다. 지원하는 병력이 나오지도 않았고 불을 켜거나 혼란스럽지도 않았다.

때문에 칼리안을 부르려던 참이었다.

시끄러워야 할 것이 분명한 곳이 잠잠하다면, 그건 분명 의심스럽고 위험한 상황이 아니겠나. 그런데 때마침 칼리안이 온 것이었다.

- 자박, 자박.

아직 아무것도 심어두지 않은 긴 정원을 지나쳐 정문으로 걸어가는 길. 칼리안이 곁에 선 에일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단검 하나만. 에일라."

"하피 있을까봐?"

"응. 내 검이 안 통하게 할 줄 알더라고. 오러를 흡수해버려서."

사일런트 막을 둘러놓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둘의 목소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만약 안에 누군가 있었다면 어차피 바깥의 상황을 모를 리 없을 테니 그냥 편안히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내 검은 왕자님이 쓰면 망가져요. 비녀라도 드릴까요? 그게 제일 튼튼한데."

"그냥 철이야?"

"그냥 철이지. 내가 오러 쓸 것도 아닌데."

"비싼 장비 사다 쓰라고 돈 줬잖아."

"비싼 옷 사 입으라는 줄 알았지."

"비싼 옷도 사고 비싼 장비도 살 만큼은 됐을 텐데?"

"비싼 옷 사 입고도 많이 남길래 비싼 집 샀어요."

"······ 그래. 잘 했네."

하, 하고.

내 아우님과 정혼한 것을 몰랐다던 내 아우님의 옛 정혼자와 내 아우님의 태평한 대화를 듣던 플란츠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는 아우님께서는 여기 오면서 왜 준비를 안 하셨는지."

"깜빡해서요."

자랑이다.

- 철컥!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 플란츠가 시나스타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잿빛 검 쪽을 칼리안에게 건넸다.

그 꼴을 본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형님 목숨 안 받습니다."

하피가 나오면 에일라 비녀를 뽑아다 쓰면 될 일이지.

내가 아무렴 완두콩의 검 반쪽을 어떻게 또 쓰겠나.

- 우우웅!

칼리안의 손 끝에 오러가 맺힌다.

마치 시나스타의 잿빛 검처럼, 완전히 어둠에 잠겨든 검은 빛의 오러가 긴 검의 형상을 취한다.

플란츠가 그것을 눈에 담았을 때.

- 스륵.

칼리안의 신형이 유리병에 든 향초의 잔불처럼 사라졌다.

동생 놈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를 보지 못한 플란츠가 한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에일라가 팔을 들어 플란츠를 막았다.

"기다리면 돼요. 저기로 들어가셨으니까 아마도······."

그 팔에서 이어진 손가락 끝이 별장 한 곳의 창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새 빼꼼히, 다 닫혀있던 창문 중 하나가 살짝 열린 것이 보인다.

- 달칵.

마치 에일라의 말이 맞다는 것처럼 작은 소리와 함께 별장의 문이 열렸다. 어두운 문 너머에서 칼리안의 붉은 눈이 살짝 비쳤다.

"저렇게. 문 열어주실 것이라서요."

잠시 멈춘 말이 이어진다.

함께 싸워 본 일도 없었을 텐데 칼리안과 에일라의 손발이 참 잘 맞는다. 저 둘과 판이하게 다른 결과를 낼 것이 분명하다면서 또 한 명의 부군단장을 떠올려놓는 똑똑한 머릿속을 흩트려낸 플란츠가 발을 옮겼다.

작년 7월에 다 지어진 별장.

공들여 완성된 별장 안에서 과일 향기가 훅 든다.

"고양이들은 귤 냄새 싫어한다던데, 나중에라도 루시랑 안네는 데려오지 말아야 되겠네요."

같은 향을 맡은 칼리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언제 찾아올지도 모를 집 주인을 위해 온 집안을 귤 향기로 가득 채워놓은 것이 참으로 얀 답지 않나.

제 별장으로의 첫 걸음을 창문을 넘어 들이게 된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봤다. 회색의 벽지와 밝은 색의 가구들, 하얀 커튼이 눈에 들어온다. 체르밀 궁 3층과 참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칼리안의 취향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얀의 바람을 조금 더 담아 꾸며낸 것이리라.

- 자박.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발 소리를 냈다.

이곳에 온 이유도 잠시 잊고 구경하듯 주변을 둘러보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별장이 조금만 빨리 지어졌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별장이 완성되기 전까지 얀은 이곳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었다. 그것이 다 지어진 직후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작년, 칼리안의 생일이 하루 남았던 날 저녁에 알려줬다. 별장을 만들어 두었으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가보시라면서.

이런 곳에서 쉬고 싶다 말한 것은 조금 더 전의 칼리안이었음에도.

"많이 좋아하질 못했었는데, 돌아가면 하나하나 다 좋았다고 말해줘야 되겠습니다. 마음에 쏙 드네요."

"······ 그래."

"아."

플란츠의 대답을 뒤로 한 채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한 소리를 낸 칼리안이 한 걸음을 더 옮겼다.

새빨간 입술 사이에서 가르릉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난다.

"저건······ 빼고."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깃털.

칼리안이 들고 왔던 것과 똑같은 깃털.

창 밖으로 새어드는 달빛에 그 깃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 자박.

보란듯이 떨어져 있는 그 깃털을 따라 걸어갔다. 어차피 칼리안을 노리기 위한 함정일 테니, 저렇게 드러내놓고 떨어진 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겠나. 오히려 오래 헤매지 않아도 되게 도와주어 고맙다 할 일이다.

깃털의 흔적이 꾸준히 이어진다.

그것이 곧 한 계단 위로, 그리고 복도의 가장 끝에 만들어진 가장 거대한 방으로 셋을 안내했다.

일부러 만들어낸 발 소리를 계속 내 가며 걸어간 칼리안이 문 손잡이에 손을 댔다. 그리고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문을 열었다.

달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벽을 살펴보던 칼리안이 불을 켰다.

- 화악!

빛이 들고 주변이 보인다.

넓은 서재로 쓰도록 만든 것인지, 수많은 책장과 그곳에 꽂힌 여러 책들, 소파와 테이블, 커다란 책상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 책상을 향해 걸어간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 이런. 낭패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필체.

하지만 첫 문장만으로 이미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는 편지.

- 왕자님의 시종이 이런 곳에서 위험한 일을 꾸민다기에 와 봤는데, 재밌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몇 가지를 좀 챙겨 갑니다.

그가 왔었다.

이곳에서 '지그프리드가 반역을 도모한 증거를 가지고' 갔다.

"······ 라시드 브리센."

라시드 브리센.

그가 노린 것이 칼리안이 아니었음을, 얀을 포함한 지그프리드였음을 안 칼리안의 입가에 긴 웃음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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