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장. 야옹(4)
바람이 분다.
머리를 죄 헤집어 둘 만큼 드세지도, 저도 모르게 옷을 여밀 만큼 차지도 않은 바람이 분다.
- 차르릉!
즐기기에 딱 좋을 바람임을 휘트린의 사람들도 아는 모양이다. 커다란 창문 위를 장식한 은색의 막대기들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좋은 소리가 방 안으로 건네져 왔다. 함께 묶여 있던 각진 유리 구슬이 흔들흔들, 햇빛을 모아 만들어낸 작은 무지개들을 흩뿌린다.
"고향이라 하기에는 어폐가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왕자님과 잘 어울리는 곳입니다."
종소리와는 또 다른 은은한 소리를 듣다가 바람에 흔들려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무지개를 쳐다보던 파란 머리 마법사가, 어쩐 일로 이렇게 감상적인 소리를 꺼내놨다.
틀린 말은 아니다.
고향은 아니었지만 휘트린은 확실히 칼리안과 썩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바람이 많이 분다는 것도 그렇지만 배 곯을 일이 결코 없는 영지라는 점이 특히 그랬다.
때문에 아르센의 말을 들은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달칵.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물을 따라 마신 아르센이 레몬향이 살짝 감도는 물컵을 내려놨다. 그러더니 앞에 놓인 당근 케이크를 한가득 떠 올려 입에 넣었다.
대사막에서 지내던 오랜 날 동안 간이 된 음식을 제대로 먹어본 적 없던 아르센이다. 때문에 아르센은 단 맛을 그리 즐겨하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 것이다.
그랬다면 짠 것도 싫어했어야 마땅할 일인데 이상하게 짠 것은 좋아했다. 마치 대사막에서 접하지 못했던 만큼의 소금을 이제부터라도 몸 속에 다 채워 놓을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그런 아르센이었으나 당근 케이크마저 사양하지는 않았다. 쫀득쫀득한 식감의 당근과 시나몬 향이 잘 배어있는 부드러운 빵, 거기에 더해 입에서 사르르 녹아드는 생크림까지. 이 모든 것이 잘 어우러진 케이크의 맛이 너무 좋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제가 아직 점심을 못 먹었습니다."
전날부터 바쁘게 돌아다니며 조사를 하느라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까닭이 컸다.
"먹으라고 안 했는데."
그런 아르센을 가만히 지켜보던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하필 아르센이 올 때에 맞춰 놓여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먹으라고는 안 했다고.
이 말에 아르센이 씩 웃었다.
"당근 안 좋아하시니 제가 먹겠습니다."
"······ 괜찮나보네."
"혹시 여기에 독이라도 들었을까 걱정하셨습니까?"
맞은편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르센이 먹는 것이 아까워서 한 말이라기 보다는 그 안에 뭐가 들었을지 몰라서 꺼낸 소리였다. 프레이르가 보냈다며 갑작스레 건네진 그 당근 케이크가 사과의 뜻일지 이제와 건네는 친목의 뜻일지 아니면 오늘의 일로 화가 난 까닭에 보낸 독일지를 장담할 수가 없었으니까.
물론 프레이르의 말로는 프레이야가 좋아하는 것이라 하였다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 아닌가.
아무튼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 케이크를 받은 뒤 기분이 언짢아지지는 않았다. 단순히 프레이야가 좋아했다는 이유만 붙여 보내왔다면 나를 프레이야의 아들로 보지 말라 했던 칼리안의 말을 싹 무시한 처사로 여겼겠으나, 다행히 프레이르는 그 뒤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직 저하와 두 왕자님의 기호를 몰라 그러니 알려주신다면 내일은 좋아하시는 간식을 올려 드리겠다' 라고.
"그나저나, 제가 재밌는 소문을 하나 들었습니다."
"무슨."
사라져가는 케이크를 내려다보며 프레이르의 말을 떠올리던 사람이 짧게 물었다. 그러자 아르센이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집어와 마저 삼킨 뒤 말했다.
"돼지 도둑입니다. 한 달 쯤 전부터 성 안팎에서 키우는 돼지가 매일 두어 마리씩 사라지고 있답니다. 그것을 조사해야 할 수비대 나부랭이들이 농땡이를 부려서 도둑이 잡히질 않는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돼지는······."
"하피가 좋아하지."
"맞습니다. 그런 것도 아십니까?"
이 말을 들은 맞은편 사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모습이라도 보았다면 좋았으련만.
실로 애석하게도 아르센은 레몬 향이 나는 물을 몇 모금 더 마시고 내려놓느라 다른 곳으로 눈을 두지 못했다.
돼지 도둑이 나타난 것은 잘 알았으나 제 앞날은 모르는 파란 머리 마법사가 말을 이었다.
"하필 라시드 브리센이 활개를 치고 다녔을 그 즈음부터 하필 하피가 좋아하는 돼지들이 휘트린 전 지역에서 슬금슬금 사라졌다고 하는데, 돼지 잃어버린 놈들 얘기를 모아보니 이상하게 돼지가 안 없어진 지역이 딱 한 군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문제가 생기는데 유난히 멀쩡한 곳이 있으면 일단 의심부터 해보라고 저희 스승님이 말씀해주셔서 말입니다. 제가 그곳을 한 번 가 볼까 하는데 문제는······ 거기가 외성 밖입니다. 제가 외성 밖에 나가려 하면 수비대가 왜 나가는지를 궁금해할 것 아닙니까?"
"하겠지."
"그런데 저는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잖습니까."
"없겠지."
"게다가 변명을 해 놓고 나간다 해도 출입 기록이 남지 않습니까?"
"남겠지."
"그렇게 되면 왕자님께서 제가 왕자님 명령을 어긴 것을 바로 아시게 될 테고 말입니다."
"알겠지."
아르센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의 새빨간 눈을 보며 말했다.
"네. 그래서 당분간은 부군단장 아니라 그냥 우리 왕자님의 형님만 하고 계시는 왕세자 저하께서 제가 외성 밖에 나갈 만한 핑곗거리를 좀 만들어주셨으면 하고 이렇게 찾아뵌 겁니다."
"왜."
"당연한 것을 물으십니까. 우리 왕자님께서 제가 밖에 나가려 드는 것을 아시면 저를 이 세상 밖으로 내보내주실 것 아닙니까. 참 곱게 웃으시면서요."
"참 곱게, 라는 건······ 이런 거?"
새빨간 눈이 곱게 휘어든다.
붉은 입술이 곱게 움직여 예쁜 호선을 그려낸다.
"네, 딱 지금처럼 그렇게······ 곱게······."
"곱겠지. 나도 잘 알아요."
덜그럭.
"혹······ 시, 저하······ 가 아니라······ 왕자님, 이십, 니까?"
칼리안과 플란츠가 서로 바꿔치기 한 상태에서 칼리안 몰래 밖으로 나갔던, 그 후로 지금까지 열심히 정보를 모아 온, 때문에 칼리안과 플란츠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온 것을 몰랐던 파란 머리 마법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들어갔다.
곧 마법 계산 잘 하는 머리가 재빨리 굴러갔다.
방금 잘못한 일을 세어보기 시작했다는 소리다.
하나, 칼리안이 시켰던 호위를 멋대로 관두고 몰래 조사를 하러 나갔던 일을 고스란히 이실직고한 셈이 됐다. 둘, 플란츠를 '당분간은 부군단장 아니라 그냥 우리 왕자님의 형님만 하시는 왕세자 저하'라는 불경한 호칭으로 부른 것을 칼리안이 들었다. 셋, 꼼수를 부려가며 칼리안의 명령을 또 어기려는 것을 제대로 들켰다. 넷, 칼리안의 뒷담화를 칼리안에게 했다.
다섯.
칼리안이 좋아하는 당근 케이크를 다 먹어 버렸다. 심지어 칼리안은 그걸 먹으라고도 안 했다.
그리고, 여섯.
"알아보지도 못합니까. 나 안 잊어버리겠다 하더니······ 헤르츠 경."
칼리안을 못 알아봤다.
밤새 술집들을 전전하며 소문을 모으느라 눈이 침침해지고 생각이 짧아져서 못 알아봤다.
다른 건 몰라도 다섯 번째랑 여섯 번째는 어떻게 용서받을 도리가 없다. 특히 다섯 번째는 세렌티가 저질러도 용서받지 못할 잘못이고 여섯 번째는 용서고 나발이고 누구든 저지르면 안 될 잘못인데 지금 방금 아르센이 저질러버렸다. 저지르고 말았다.
제 머리카락과 똑같은 낯빛이 된 아르센이 덜커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무래도 내 따까리가 희멀건한 완두콩이랑 어여쁜 나를 헷갈려하는 것 같아서 조용히 대꾸해가며 상황을 지켜봤던 칼리안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왜 일어납니까."
"무릎꿇고 손 들려고 일어납니다, 왕자님."
"그러면 내가 용서해 줄 까봐?"
"혹시 모르잖습니까."
"됐으니까 그러지 말고. 만들어봐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동상. 만들고 싶다며."
푸른 낯빛이 순식간에 생기가 돈다.
"왕자님 동상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그거."
"왕자님 지금 미운 놈한테 상 주시는 겁니까? 그래도 고생했다고 알아봐주시고 선물까지 내려 주시는 겁니까?"
윤슬이라도 담긴 듯한 아르센의 눈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그 윤슬에 얽힌 물결처럼 고운 목소리를 냈다.
"그래야 그 핑계로 부숴놓지. 내가, 헤르츠 경을."
아르센이 침을 꼴딱 삼켰다.
방금 넘어간 것이 침인가, 숨인가.
도저히 구분을 못 하겠다.
"케이크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디서."
"왕자님의 형님 되시는 왕세자 저하께도 같은 케이크가 갔을 것 아닙니까. 저하께서는 익은 당근 안 드시니까 제가 가서······."
서로 손발은 안 맞고 만나면 맨날 싸우고 그러면서 입맛은 제대로 알고 있고. 이러니 내가 둘 사이를 나쁘다 할 수가 있나.
"둬요."
"네. 그냥 두겠습니다."
"동상이나 만들라니까."
"저희 코코가 아직 어립니다, 왕자님."
"아빠 있잖아."
"엄마도 필요합니다."
"그래서요."
"잘못했습니다."
"뭘."
"반성문으로 써서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로 하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예전에 준 것도 아직 안 봤는데, 나는."
"이렇게 하나씩 모아보시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지 않을까······ 죄송합니다."
잘못을 했든 안 했든 대답은 참 잘 한다.
"알았으니 하나 만들어 둬요. 외성 밖은 내가 갈 테니까."
코코야, 엄마일세.
미안하네.
저 왕자님이 이 엄마를 정말 부숴버릴 생각이신 듯 하여 내가 자네를 더 돌봐주지는 못하겠네.
그러니 아무쪼록 아빠 말 잘 듣고 편식하면 안 되니까 모이에서 완두콩만 골라먹지 말고 호수에 뜬 그놈의 개구리밥 좀 적당히 주워먹고······.
그런데 이상하다.
왜 자꾸 같은 말을 하시지.
"정말······ 만들라는 말씀이십니까?"
톡, 하고.
테이블을 한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같은 말을 더 하기 싫을 때 보이는 칼리안의 버릇임을 아르센이 어찌 모를까. 말을 못 알아들어 처먹는 앞사람의 귓구멍을 두드릴 순 없으니 앞에 놓인 물건들 중 적당한 무언가를 대신 두드리는 것이라는 사실도 물론 잘 알았다.
"채찍을 줬으니 당근도 줘야지."
칼리안이 이런 말을 했고 아르센은 당연히 못 알아들었다. 넓은 아량으로 내 따까리 내가 다시 잘 거둬 건사하는 마음이 된 칼리안이 설명을 더했다.
그 말을 다 들은 아르센이 꽤 흐뭇한 얼굴이 되어 답했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만들어 두겠습니다."
"잘 만들어놔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이렌 경한테 이제 좀 쉬라고 전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버릇처럼 창 밖으로 나서려다 잠시 발을 멈췄다. 지금 있는 곳이 6층이라서가 아니라 얀 때문이었다. 어디 가기 전에는 꼭 미리 말하겠노라 약속하지 않았던가.
- 얀. 나 잠시 외성 밖에 나갔다 올 거야.
그래서 이제 쓰임을 마친 뒤 플란츠가 돌려줬을 팔찌를 통해 이야기를 전했다.
- 어디.
물론. 당연히.
완두콩이 아직 팔찌를 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얀을 직접 불러 말했을 거다.
하마터면 6층 창틀에서 미끄러져 생을 마감한 소드마스터로 기록될 뻔한 칼리안이 아연한 얼굴을 했다.
- 왜 형님이 대답하십니까. 얀은요.
아우님의 잘난 시종은 아직 못 만났다.
그래서 너 또 어디 가는데.
아파서가 아니라 칼리안 행세를 하느라 진이 다 빠져서 또 극단적으로 말이 짧아진 완두콩이 저 두 문장을 최선을 다해 전했다.
- 아직. 어디.
라고.
- ······ 잠시 알아볼 게 있어서,
- 같이 가.
- 형님 지금 환자인 건 아십니까.
- 나았어.
- 어디 가는 줄은 아십니까.
- 외성 밖.
- 외성 밖 어디인 줄은,
- 몰라.
- 왜 가는 줄은,
- 몰라.
- 위험할 지도 모르는데요.
- 알아.
- 마차 못 탑니다.
- 안 타.
- ······ 혹시 루시랑 안네가 없어서 많이 심심하십니까.
- 그래.
······ 와.
심심하단다.
완두콩이.
- 안 나설 테니까.
- 또 멋대로 나서서 가로막고 그러는 일 안 하신다는 말씀 맞죠.
- 그래.
- 진짜요.
- 안 한다고.
데굴데굴.
빈혈 완두콩이 또 데굴데굴 따라온단다.
그래. 심심하시다는데.
어쩌겠나. 나 때문에 루시랑 안네도 못 보고 있는데 데리고 다니기라도 해야지. 저 놈을 여기 놓고 가는 것보단 데려가는 게 안전하긴 하겠지. 안전해야지.
- 나오십시오, 그럼. 얀한테 팔찌 돌려주시고요.
- 알았어.
짧은 한숨을 내뱉은 칼리안이 창 밖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이곳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알지만 여기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어떤 인사인지를 더 잘 아는 아르센이 창가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란델의 방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에우리아를 대신해 란델을 호위하면서 무언가를 만들어야 했으니까.
프레이야와 칼리안이 함께 선 조각상.
프레이르에게 선물할 그것을, 녹지 않을 얼음으로.
* * *
- 다음 일정 부터는 꼭 치유사 베른 경을 동행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전해지는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하다.
- 그래야 왕자님이 몸을 좀 사리실 것 같아요.
- 알잖아, 얀. 외성 밖에는 보는 눈도 없어서 놈들이 뭘 할지 몰라.
- 그러니까요. 그런 곳엘 왜 혼자 가십니까.
- 혼자 안 가. 형님이랑 가.
- 다를 것 없잖아요.
완두콩이 알면 또 억울하다 하겠네.
레이븐의 위에서 고개를 슬쩍 돌린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칼리안을 흉내내느라 잘 먹은 탓인지 아니면 축복의 힘이 열심히 움직인 탓인지, 남들 눈에는 안 띄겠으나 완두콩의 혈색이 확연히 좋아지기는 했다.
- 괜찮아. 방해는 안 돼. 에일라랑 키리에는 내가 시킨 일이 있고 헤르츠 경은 란델 형님 호위해야지. 그러니 지금 더 놀릴 만한 사람도 없어.
- 세이렌 경 있잖습니까. 발칸은요.
- 세이렌 경도 좀 쉬어야 되고, 발칸은 군대잖아. 확실한 증거 없이 마음대로 움직이면 지금은 편해도 나중에 나한테 좋을 것 없어. 아무데나 군대를 끌고다닌 전적이 있는 국왕을 누가 따라다녀. 그냥 내가 가야 별 일이 안 생겨.
- 역시 제가 검을 배울 걸 그랬나봐요.
- 새끼 코끼리는 레릭이나 덴한테 차 우리는 법이나 더 배워두면 되지.
- ······ 맛 없으신거죠.
- 맛 없어서 맛있어. 싫다는 소리 아니니까 우울해하지 말고.
- 네에.
다각, 다각!
해가 저물기 직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던 이들이 말 발굽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인다.
외성을 향해 나서는 두 마리의 말 위에 앉은 이들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아무리 부유한 휘트린이라지만 이곳 뿐 아니라 카이리시스의 어느 누구도 쉬이 입지 못할 귀한 질감의 옷에서부터 차이가 나지 않나.
검은 셔츠에 금사로 수놓인 타이를 하고 어두운 감청색의 재킷과 바지를 입은 사람. 그리고 검은 바지와 흰 셔츠를 입고 검은 타이를 맨 뒤, 짙은 분홍색 베스트와 옅은 분홍빛의 재킷을 입은 사람.
이 둘을 향해 모아지던 시선들이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다던 플란츠에게로 먼저 꽂혀든다. 그 시선들이 곧, 바로 옆에서 함께 오고 있는 생소한 얼굴을 향한다.
칼리안 왕자님이시다.
그들의 눈과 입이 벌어지는 것이 보인다. 발칸에 새로 들어온 마법사들이 칼리안을 처음 보았을 때에나 볼 법한 무한한 신뢰와 동경의 빛이 그 눈에서 쏟아진다. 익숙한 시선들을 보지 못한 척, 칼리안은 눈을 내리 뜬 채 얀에게로 다시 말을 건넸다.
- 키리에는 돌아왔어?
- 아뇨. 아직이요.
- 돌아오면 곧바로 알려줘.
- 알겠습니다. 왕자님은 언제쯤 오실 건데요?
싸움을 할 지도 모를 곳에 찾아간다기에는 지나치게 잘 차려입은 칼리안이 오찬에서 입은 것과 꽤 비슷한 빛을 내는 분홍색 재킷의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 빠르면 오늘 중에, 늦으면 내일 오전 중에.
- 차이가 큰데요.
- 밤에는 외성을 닫잖아. 혼자 였으면 성벽 타고 넘어갈 텐데 아니라서.
- ······ 왕자님이 왕자님이신 걸 잊진 않으셨죠?
- 안 까먹었어. 한밤에 외성 열게 시킨 걸 알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욕 먹어.
- 플란츠 저하요.
- 그래.
- 알겠습니다.
- 내 별장도 외성 밖에 있다며.
- 왕자님 별장 기억하고 계셨어요?
- 얼마 전에 말해준 건데 그걸 까먹었겠어, 내가?
- 별로 안 고마워 하시기에 잊으신 줄 알았죠.
- 고마워하고 있어. 많이.
- 네에. 아무튼 성 안에는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외성 밖에 마련해 뒀어요. 외성 밖이기는 해도 휘트린의 수비 범위에는 드는 곳인데다 휘트린 측에서도 별장을 수비하고 관리해 줄 사람을 상주시켜 놓겠다고 했었고요.
- 그래. 그러니까 이 참에 거기도 구경하고 올 테니까 걱정 말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 네에.
- 그런데, 얀.
- 네.
- 별장이 외성 밖 정확히 어디였지.
- 까먹으신 것 맞잖아요.
- 어디인지만. 알려주면 이제 안 까먹을게.
찡찡거리는 새끼 코끼리를 재빨리 달래 준 칼리안이 얀의 설명을 들었다.
- 한적한 곳에 있나보네.
- 예전에 왕자님께서 그런 곳에 있고 싶다고도 하셨잖아요.
- 응. 기억 나. 바람이 많이 불면 예쁜 모습이 된다고 해서, 내가 참 많이 가보고 싶어 했었어.
- 네. 맞아요.
- 네 강아지도 궁금해했었는데. 나는.
- 강아지 얀은 보셨잖아요.
- 그래······ 나는 봤지.
- 설마 그것도 까먹으신 건 아니죠?
- 아니야. 안 까먹었어.
- 네. 아무튼 별장이 어디에 있냐면요······.
휘트린의 외성 밖.
너른 밀밭과 인공이 아닌 진짜 강줄기가 잘 보이는 곳.
좋은 바람이 많이 불고 어느 방향도 막혀있지 않은 곳.
칼리안이 마음껏 구경하다 머무르고 싶어하던.
그런 장소에 만들어진 별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얀이 고르고 골라낸 좋은 곳에 마련해뒀다던 자신의 별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게 됐다.
톡, 톡, 톡.
제 어린 날의 회상을 마친 칼리안의 손가락이 레이븐의 안장 위를 두드렸다.
"왜."
주인이 생각에 잠긴 것을 안 레이븐이 귀를 쫑긋거리는 것을 본, 한 다리를 거쳐 동생 놈이 생각에 빠졌음을 눈치챈 플란츠가 물어왔다.
여전히 계속 이어지는 사람들의 시선도 잠시 잊은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칼리안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만 한 사람, 다분히 동생 놈의 관점에서 '재밌는'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짓는 표정이 저 웃음 위에 놓여있음을 잘 알아 본 플란츠만은 눈꼬리를 찌푸렸다.
"형님 여기서 저한테 인상 찌푸리시면 어여쁜 동생 구박하는 못된 왕세자로 소문납니다."
플란츠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퍼질대로 퍼진 소문이었고 거짓 소문도 아니었으니까.
"형님 원망은 저만 하면 되니까요. 괜한 놈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표정 푸시라는 말씀입니다."
"······ 알았어."
"네."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찌푸렸던 눈에서 힘을 풀었다. 그렇다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아무튼.
다시 동글동글 순한 인상이 된 플란츠를 보며 생글생글 웃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돼지 도둑이 손을 안 댔으면 의심스러운 곳이라고 헤르츠 경이 그랬습니다만. 돼지 도둑이 손을 안 댄 곳이 제 영역이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서요."
"또 무슨 뜬금없는 말씀이신지."
"하피요, 형님. 그걸 확인하던 헤르츠 경이 의심스러운 곳을 일러줬는데."
"아우님의 별장이 있다는 그 곳과 겹친다는 소리인가."
"형님도 제 별장 알고 계셨습니까."
"레릭이. 그것 때문에 걱정을 하는 것 같던데."
"······ 아."
3왕자의 시종은 3왕자에게 별장을 선물했는데 왕세자의 시종은 그럼 뭘 줘야 하나, 하고 걱정한다는 소리다.
그것을 자랑했다니.
나중에 얀을 만나 잔소리를 해 둬야 하겠다고.
히나의 생일 선물을 고민하고 있는 만큼 레릭의 부담감을 잘 이해한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는 일단 미뤄둔 채 입을 열었다.
"네. 형님 말씀대로입니다. 장소가 겹칩니다."
"아우님에게 불리한 것들을 만들어 숨겨 두기에는 적절한 장소겠군."
"하긴 그렇네요. 진작 생각을 해 볼 걸 그랬습니다."
"감히 누가 왕족의 별장에 손을 댈 줄 알고."
설마하니 누군가 칼리안의 별장에 이상한 짓을 했을까.
그러니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당연한 일 아니냐는 말에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감히 라시드라면."
"반말."
"라시드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만약 제온과 하피가 연관됐고 하피에 대한 어떤 증거가 칼리안의 별장에서 나온다면 둘러둘러 칼리안과 제온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 왕실 숲과 왕궁 북쪽의 숲으로 습격한 이들의 배후로 라시드가 아닌 칼리안을 세워둘 만한 그럴싸한 증거가 된다.
굳이 하피를 칼리안의 앞에 풀어놓은 이유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가 보면 알겠지."
"네."
레이븐의 발이 조금 더 빨라졌다.
에스티나 역시 속도를 높였다.
휘트린에 처음 찾아왔을 때만큼은 아니었으나 분명한 빠른 속도로 말을 달렸다. 플란츠보다 더 눈에 띄기 위해 골라 입은 밝은 옷 덕분에 더더욱 쏟아지는 시선들을 뒤로 하며 계속 달렸다.
시가지와 거주지, 상점 거리를 지나 내성 밖으로. 작은 공원과 시장과 또다른 거주지를 다시 지나쳐 외성 밖으로 그렇게 내달렸다. 주변이 온통 밀밭으로 가득차고, 드문 드문 보이던 작은 농장과 집들도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어느새 어둠이 진 자리에 홀로 선, 바람을 다 담은 작은 언덕에 지어진 별장이 보일 때까지.
- 데구르르······ 툭!
이름 모를 사람의 머리가 레이븐의 발 앞으로 굴러올 때까지 달렸다.
레이븐이 발을 멈췄고 에스티나가 뒤따라 섰다.
레이븐의 발치,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게 당한 듯한 남자의 얼굴에서 플란츠가 눈을 돌렸다. 대신 칼리안이 남자의 그 얼굴을 내려다봤다.
"오셨어요? 안 그래도 왕자님 부르려고 했는데, 잘 됐네."
에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