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53화 (454/527)

제80장. 야옹(3)

어쩌다보니 첫 부탁을 가로채게 되었다.

"레릭."

휘트린의 귀족들 앞에 선 칼리안이 멋진 옷을 뽐내며 주특기같은 퍼포먼스를 펼치기 몇 시간 전, 아침의 일이었다.

"네, 저하."

"부탁할 게 있는데."

레릭을 불러내 이런저런 것들을 부탁해보겠다 마음 먹은 사람은 플란츠였다. 그런데 정말 어쩌다보니 그 역할을 칼리안이 가로채게 되었다. 물론 플란츠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은 칼리안이나 레릭이나 똑같이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부탁······ 네, 네, 저하. 말씀해주세요."

새벽의 식사를 마친 칼리안과 플란츠는 어쩐 이유에선지 다시 변장을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왕세자의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플란츠를 흉내냈다. 마치 나비아와 프레이르에게 변장하고 있던 것을 드러낸 적 없다는 것처럼.

덕분에 플란츠의 얼굴과 말투로 건네진 '부탁'이라는 말에 아주 잠시 동요하게 된 레릭은 앞에 선 이가 진짜 플란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애써 상기하며 서둘러 대답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레릭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적당히 가늠했으나 별다른 내색 없이 입을 열었다.

"왕비 프레이야의 추숭식 때 '내 아우님'이 입었던 것."

"칼리안 왕자님······ 의 복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혹시 기억하나."

프레이야의 추숭식에서 칼리안이 입었던 옷.

프레이야의 드레스를 떠올리게 했던 예복을 말함이다. 진주색의 프릴이 가득 달린 하얀 셔츠와 살구색 재킷, 하얀 바지, 붉은 보석으로 치장된 망토까지. 수많은 귀족의 눈앞에서 죽은 프레이야를 일순간에 되살려냈던 그 옷을 어떻게 잊을까.

"네, 저하. 초상화 속 프레이야 왕비님의 드레스에서 따온 것이니까요. 저도 기억합니다."

"그것과 비슷한 옷이 필요한데. 망토는 빼고."

그 말과 동시에 레릭의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다.

마법사 가방을 탈탈 뒤집어 약 보름 간의 시찰 일정을 위해 준비해 온 오십여 벌의 옷을 싹 꺼내 정신없이 뒤졌다. 그나마 메를린이 얀에게 건넸다던 칼리안의 옷보다는 적은 수였으나 그렇다 해서 그것들을 다 살피는 일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사이에서 살구색 재킷과 하얀 바지를 찾아내기는 했다.

그런데 없는 옷이 있었다.

바로 프릴이 많이 달린 셔츠였다.

예복이 아니고서야 프릴이 주렁주렁한 거추장스런 옷을 입을 플란츠가 아니었으니까.

"제가 얀에게 가서······."

"없어. 거기에는."

"그럼 덴에게라도,"

"아니."

열정이 흘러넘치는 레릭을 칼리안이 말렸다.

아무리 알맹이는 칼리안이라 하나 란델의 옷을 입은 플란츠라니. 란델이나 플란츠나 똑같이 질색할 것이 뻔한 일 아닌가. 그 반응들이 사뭇 궁금하긴 하지만 나중으로 미뤘다.

"빌려오지 마."

추숭식에서 칼리안이 입었던 문제의 그 셔츠. 의상담당자 섀틴과 메를린의 욕심이 다 들어간, 장미 꽃잎 수보다 많이 붙여둔 게 아닌가 싶던 어마어마한 프릴을 떠올린 칼리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프릴은 필요없어. 그것까지 따라하지 않아도 돼."

그래.

프릴은 필요없다.

사실 그건 다 아리안느 때문이다.

아리안느가 베른이나 체이스보다 키도 크고 힘도 셌을 어린 시절.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어마어마한 장식이 달린 드레스를 가져온 아리안느가 그걸 베른에게 냅다 입혔었다. 머리도 땋아줬다. 거기에 더해 베른의 머리통만큼 커다란 리본도 매줬다. 그렇게 멋대로 꾸며놓고는 루이즈에게 자랑을 하자며 베른을 끌고 기어코 밖에 나갔다.

그러다 마주쳤다.

체이스를.

그때 체이스가 지은 표정을, 길고 긴 인생을 통틀어 딱 한 번 지어보인 그 표정을.

'그으, 래······ 잘, 어울리······ 네.'

못 볼 것을 봤다는 그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 그러니 프릴은 됐다.

아무튼 그 난리를 부려 찾아 입은 옷이었다.

추숭식 때와 마찬가지로 프레이야를 떠올리게 할 옷이었으나 그것을 입은 의도는 완전히 달랐다. 그 날에는 자신이 프레이야의 아들임을 브리센에 알리기 위해서 입었지만 오늘은 그 반대였으니까.

휘트린에서 도대체 왜 그렇게 프레이야를 따르는지는 모른다. 브리지트 숲에서의 프레이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칼리안은 분명 그렇게 느꼈다. 저들은 이제껏 칼리안이 아닌 프레이야의 아들을 만나게 될 날을 기다려왔을 뿐이라고.

'그대들이 따르는 것은 칼리안입니까. 아니면 프레이야의 아들입니까.'

때문에 그런 옷을 입고 귀족들 앞에 나섰다. 그들이 그렇게나 바라마지 않던 프레이야를 보여줬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 말했다.

칼리안을 바라는지.

죽은 프레이야의 아들을 바라는지.

란델과 플란츠를 볼 것인지.

독살된 아이샤와 독살한 실리케의 아들을 볼 것인지.

"그대들이 나를 따르고자 함인지, 아니면 내 어머니의 그림자로 남고 싶어 하는지. 그것을 알 수가 없어 묻습니다."

"왕자님. 그 모습은 거두신 뒤에······."

눈빛, 표정, 분위기.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프레이야를 닮았다.

칼리안은 단 한 번도 프레이야를 보지 못했으나 휘트린의 귀족들은 그리 여겼다. 칼리안의 목소리가 아무리 가늘다 하여도 절대로 프레이야의 것과 같을 수는 없었으나 모두가 그 목소리마저 알아서 프레이야의 것으로 바꿔 들었다. 가짜 로닐을 마주한 앨런이 그렇게 착각을 했듯이 말이다.

"이것이 잔혹한 장난입니까. 내 눈속임이 가혹합니까."

선홍빛의 긴 머리를 지닌 붉은 눈의 '프레이야'가 그리 물었다.

휘트린의 귀족들이 입을 꽉 다물었다.

죽은 동생을 눈앞에 둔 프레이르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습니다. 거두어주십시오."

"왜."

'프레이야'가 웃는다.

잔혹한 장난임을 칼리안도 알았다. 가혹한 눈속임임을 모르지 않았다. 앨런에게 로닐을, 칼리안에게 체이스를, 그런 그림자를 보낸 이들과 똑같은 짓임을 칼리안도 알았다.

그러나 그 짓을 먼저 시작한 건 저들이다.

칼리안에게 프레이야를, 플란츠에게 실리케를 씌워놓은 것은 저들이다.

"잔혹하고 가혹한 것을 알면서. 왜. 어제 석찬에 든 '나'에게 그렇게 악의를 보냈습니까. 그 속에 든 것이 누구인지 왜 알아보지를 못하고. 카이리시스의 귀족들이었다면 분명 오래지 않아 알아봤을 텐데."

아무리 플란츠를 브리센의 새끼 늑대라 부르며 손가락질하고 있다 한들, 그 플란츠가 실리케보다 더 실리케같은 모습을 취하는 것은 어쩐지 이상하다고. 기세가 등등하고 좌중을 내리누르는 행동들이 오히려 칼리안을 닮았다고. 카이리시스에서 칼리안과 플란츠를 보았던 이들이라면 분명 그리 생각하며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 란델마저 생각을 달리할 만큼 차이가 났으니 둘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몰라봤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곳의 귀족들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저희가 몰라 뵌 것은, 왕자님."

"하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이다.

"단 한 번도 나를 직접 찾아와 살폈던 적 없었으니까."

추앙했을 뿐, 살피지 않았으니까.

칼리안에게 돈을 보냈다. 약재와 선물을 보냈다. 그렇게 꼬박꼬박 챙겼으나 칼리안이 어찌 지내왔는지 몰랐다.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칼리안을 처음 만난 새끼 코끼리조차 한 눈에 알아본 어린아이의 메마름을 몰랐다. 칼리안이 검의 길에 오른 것에 축하금을 보냈으나 그것이 이상하다 여기지도 않았다. 데블란조차 의심했던 일을 저들은 그저 기뻐하기만 했다.

혹여 르메인이 저들의 수도 방문을 막았을까.

아니. 르메인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실리케가 막았을까.

아니. 실리케는 저들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저들의 '지원'이 칼리안에게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을 테니까. 휘트린에서 몇 번이고 칼리안을 찾아와 인사를 나누고 관심을 보인 뒤에야 막으려 들었다면 모를까, 저들이 오는 것을 처음부터 방해했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저들은 스스로 관심갖지 않았던 것이다.

"왕비 프레이야의 아들. 그것 하나만 중요했으니까."

저들에게는 칼리안과 플란츠가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프레이르가 분명 그리 말하지 않았나. 실리케를 직접 본 이였든 보지 못한 이였든, 상관없이 모두가 '플란츠'에게서 실리케를 보았다고. 상상 속의 실리케를 만들어 그 가면을 멋대로 플란츠에게 씌워놓지 않았던가.

프레이야를 닮는 것이 불가능한 칼리안에게 프레이야를 씌워놓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대들이 그렇게나 보고 싶어하던 이를 이렇게 꺼내와 손수 보여주니 가혹하다 잔혹하다 원망을 하고 있으니. 그다지도 이기적인 것이 어찌나······."

그래서 대답했다.

내가 프레이야의 아들일 뿐이고.

플란츠가 단지 실리케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볼 생각이라면.

"어찌나. 다누를, 쏙, 빼닮았는지."

너희들은 벗어날 바 없는 다누의 자식새끼라고.

프레이야의 얼굴로 그리 되돌려줬다.

다누에게 버림받은 프레이야가 다누에게 외면받은 자식들에게, 구역질하듯이, 토악질하듯이. 족쇄를 채워주며 속삭이듯이.

도저히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 * *

- 내 아우님께서 또 무슨 생각으로 그런 옷을 입으셨는지.

- 오찬에서 귀족 놈들을 만나서 좀 고쳐놓을 게 있어서요.

- 나를 습격할 생각을 고쳐놓으시겠다는 건가.

- 아뇨. 어차피 당장은 형님께 칼을 들지 않을 겁니다.

- 장담을 하시는군.

- 다른 귀족이 형님을 해치려 들까봐 프레이르가 미리 나서서 형님을 보호하려 했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엘프들이 거짓말을 못 하기도 하지만 제가 봤을 때에도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 그런데.

- 프레이르가 나서지 않았다 해도 오늘 정말로 사고가 생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왕세자에게 칼을 들 만큼 정말 무모하거나 에반이나 그레이처럼 생각 짧은 놈들이었다면 석찬에서 제가 만들어 보인 형님을 마주하고도 얌전히 있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 그럼 된 거잖아.

- 무엇이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 아우님이 말한대로 더는 칼을 꺼낼 마음을 안 가질 거라는 말이잖아. 그럼 이제 이곳에서 잘 지내다 가면 될 것 같은데 뭘 고쳐놓겠다 하시는지.

- 저들은 지금 저와 형님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생각할 줄 모르는 놈들이 아닌데도요. 형님이 정말 실리케를 닮았다면 전하께서 형님에게 세자위를 내리셨을 리 없다는 것도, 그랬다면 제가 형님들을 등 뒤에 놓고 하피를 상대하다 다쳤을 리 없다는 것도, 란델 형님께서 형님의 앞에 고개를 숙이라 요구하실 리 없다는 것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 알아.

- 네. 저들은 그저 왕비 프레이야의 아들을 떠받들고, 전왕비 아이샤의 아들이 실리케의 아들을 편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리케의 아들을 배척하고 있을 뿐인 겁니다. 그 외의 어떤 사실도 생각하지 않은 채로요.

- 그래서.

- 그래서라뇨.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을 빼들지 않을 만큼의 사고를 할 줄은 아는 놈들이니까. 고쳐 놔야죠. 고쳐 봐야죠.

- 굳이 고칠 필요가 있나.

- 예전이었다면, 형님. 저도 굳이 고치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고쳐야 할 놈들은 없는 편이 안전하니까.

- 무슨 뜻이야.

- 어제 석찬을 마치고 연회장에서 걸어나온 건 저 뿐이었을 거라는 소립니다.

- ······ 너.

- 라시드 브리센이 무엇을 꾸며두려 했든 상관없도록. 저들이 앞으로 습격을 할 생각이 있든 없든 상관없도록. 형님의 얼굴을 한 제 앞에 고개 숙이지 않은 그 순간 전부, 다 죽여놨을 겁니다. 저는 본래 그런 사람이라서.

- 칼리안.

- 안 죽입니다. 이제는, 그런 이유로는. 예전처럼 뒤에서 조용히 물어뜯는 대신 앞에 나서 야옹거리며 살게 됐으니까. 그래도 그냥 있지는 못 하겠습니다. 제 허울만 보고 건네는 충성을 생글거리며 받아두는 일도 못 하겠습니다. 그러니 형님의 허울만 보고 건네는 적의도 더는 안 넘길 겁니다.

- 상관없잖아. 어차피 귀족들은 이득을 보고 움직이고, 저들이 나를 지지하게 만들 것도 아닌데.

- 그래서 또 참자는 겁니까. 그레이 브리센을 그냥 보냈던 것처럼요. 지난 새벽에 란델 형님 말씀을 듣고 나서야 찻잔에 손대신 분께서요.

- ······ 그래.

-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 억울해.

- 그런데요.

- 들어준다며. 억울하다는 소리.

- 그래서요.

- 그러니까. 참으라고. 라시드 브리센 문제가 더 급하니까 억울하다는 얘기나 들어주고 그냥 두라고. 괜히 건드리지 말고.

- 싫은데. 나는.

- 너. 또.

- 나는 뱀 새끼가 맞았으니까 뱀 새끼라 해도 괜찮았는데. 당신은 아니잖아. 그래서 싫은데.

- 야.

- ······ 싫습니다. 저는.

* * *

당황스러움, 억울함, 모멸감, 분노, 애달픔, 배신감.

혹은.

부끄러움.

무엇이라 칭해도 좋을 표정들을 잔뜩 담은 귀족들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 시선들이 나비아와 프레이르를 향했다. 프레이르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고 나비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갈 곳을 잃고 허우적거리던 그 많은 시선들이 란델을 거쳐 플란츠에게 가 닿았다.

그리고 거두어졌다.

란델과 플란츠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득달같이 따라붙는 '프레이야'의 시선에 숨이 잠기는 기분이라 오래도록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시선을 뗐다.

칼리안이 눈을 움직였다. 채 갈무리되지 못한 여러 감정이 고스란히 그려진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그러다 오래지 않아 팔찌의 힘을 운용했다.

- 스르륵.

선홍빛의 머리가 짙게 변한다.

검어진 긴 머리카락이 짧게 줄어든다.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어깨가 조금 더 넓어지고 허리가 좀 더 굵어졌다. 이제야 진짜 본래의 모습으로, 칼리안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손을 움직였다.

- ······ 툭!

가벼운 것이 둥근 테이블의 한가운데에 던져지듯 놓였다.

갈 곳을 찾기 힘들어하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기다렸다는 듯 그것에 가 닿았다. 그리고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해 보였다.

시작은 희고 끝으로 갈 수록 붉어지는 빛의 깃털. 분명 아름다운 빛이었으나 새의 것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고 날카로운 깃털. 정체를 쉬이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피입니다.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 하피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조금 전 자신들을 찾아왔던 프레이야 만큼이나 커다란 파문이 인다.

그 정도의 동요는 보일 줄 알았다는 듯, 하피의 깃털을 모두의 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던 칼리안이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그들의 얼굴을 낱낱이 훑어보다 프레이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하피가 노린 것은 나였고 부상을 입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형님. 플란츠 왕세자 저하십니다."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왕세자가, 소드마스터 동생을 두고 두 명의 끝내주는 마법사와 백 명의 강력한 군대로부터 호위를 받던 약해빠진 왕세자가, 왜 혼자 다쳤는지. 어떻게 혼자 다쳤을지. 그것까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만 건넸다. 저들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실리케의 아들은 전투에 참여하다 부상이나 당하는 그런 이가 아니었을 테니까.

- 달칵.

그런데 그 때, 침잠한 연회장 안에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하피의 깃털을 보았을 때만큼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 란델이었다.

그래.

란델이 멀쩡하지 않나.

란델이 멀쩡한 이유는 그리 안전한 왕실 마차 안에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런데 란델보다 더 열심히 지켜져야 했을 플란츠는 부상을 입었다. 마차 안에 있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도록 흐름을 만들었다. 란델이.

- 스으윽.

의자 등받이를 짚었던 칼리안의 손가락 끝이 또 한 번 호선을 그려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란델에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칼리안을 잘 돕기로 한 옥수수수염이 알아서 제 할 일을 했으니 말이다.

"······ 그래서 나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다누의 자식도 아니고 브리센은 더더욱 아닌 까닭에 생각을 고칠 줄은 아는 귀족들이 고개를 돌렸다.

플란츠의 얼굴이 이제야 새삼스레 눈에 들어온다.

디저트 취향까지는 서로 따라하지 말자 했던 까닭에 크래커 두 개만 사라지게 된 제 접시에 시선을 고정시킨 왕세자가 보인다. 이제까지 내내 귀족들의 숨통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이 굴던 '그 왕세자'와, 제 디저트 접시만 쳐다보고 있는 저 왕세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로소 생각한다.

그렇게, '플란츠를 제대로 보라'는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플란츠의 진짜 모습을 놈들의 앞에 세워놓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나에게 하피를 보내고 내 형님에게 큰 부상을 입힌 그 세력에 대해서, 나에게 건네지는 그대들의 온전한 도움을 받아 알아내고 싶은데. 어렵겠습니까."

대답은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귀족들의 얼굴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몸을 돌렸다. 소리없는 걸음으로 연회장을 다시 돌아 밖으로 나갔다.

플란츠가 일어서고 란델이 자리를 벗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얀이 서둘러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얀."

그런 얀을 불렀다.

"네, 왕자님."

"내 맞은편, 프레이르의 옆으로 세 번째 자리, 그 옆으로 두 번째 자리. 그 세 명이 누구인지 알아?"

칼리안의 질문에 잠시 조금 전의 연회석 자리를 떠올리던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납니다."

"키리에에게 알려. 조사하라고 해."

"하피와 관련 있습니까?"

"아마도."

짧게 답한 칼리안이 계속하여 걸음을 옮겼다.

하피의 깃털을 알아본 세 놈.

그 놈들을 기억에 새겨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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