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52화 (453/527)

제80장. 야옹(2)

무언가가 탁, 탁! 하고 테이블을 때렸다.

백금으로 장식된 어두운 빛의 나무 테이블. 그 값비싼 가구를 두드린 것이 만약 사람의 손이었다면 뒤에 서 있던 호위기사 렌의 검이 당장 뽑혀나왔을 터였다. 테이블이 비싼 까닭이 아니라 테이블 주인의 자리가 이제 퍽 비싸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값비싼 테이블을 있는대로 두드린 것은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그래서 렌은 검을 뽑아드는 대신 소리없는 미소만 지었다.

바로 그 테이블 위에 태평하게 드러누워 잠든 잿빛 고양이를 가로막고 앉아있던, 미려한 자태의 흰 고양이가 다시 한 번 꼬리를 탁! 내리쳤다. 덕분에 잿빛 고양이가 깔고 누운 서류를 꺼내보려다 흰 고양이의 미움만 더 사게 되어버린 사람은 하릴없이 손을 거두어야 했다.

"참 영리한 고양이가 아닙니까?"

그 사람의 맞은 편에 앉아있었으니 흰 고양이를 지나치지 않고도 잿빛 고양이의 깔개가 된 '라이츠 백작령 수로 개선 요청서'에 손을 가져갈 수 있는 마법사가 말했다. 서류를 대신 빼내어 건네 줄 의향은 전혀 없다는 듯한 얼굴이다.

무엇을 두고 영리하다 하는지를 물어봐야 득될 바 없는 답이 나오리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 흰 고양이의 미움을 한가득 받고 있는 그 사람, 르메인이 말없이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러다 흰 털과 잿빛 털이 캐모마일 꽃잎과 함께 둥둥 떠있는 것을 보고는 도로 내려놨다. 앞에 앉은 마법사는 그것을 절대로 없애주지 않을 테니까.

"치유사 베른 경은 어제 아침에 돌아왔다 하던데."

"미워할 사람을 제대로 골라 이렇게 털을 세우고 있으니, 주인을 닮아 고양이도 영리해진 모양입니다."

"······ 고양이들을 데려가질 않는군."

"그나저나 이제 밥을 좀 주어야 할 터인데. 배가 고플 때가 되었습니다."

"주었네."

"이미 주셨습니까?"

"이제야 내 말이 들리는가?"

"어찌됐건 저 고양이가 한 수를 접어 준 것이겠지요. 전하를 이렇게 미워하면서도 식사를 사절하지는 않았다 하니. 주인을 닮아 영리한 것인지 돌보는 손을 타 순해진 것인지는 몰라도 참 기특한 일입니다."

지금 나는 대체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가.

서류를 침구삼아 잠든 고양이와 그 고양이를 '보호' 중인 또 다른 고양이와 제 할 말만 하는 마법사 덕에 세 번 씁쓸해진 르메인이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런 모습에 큰 관심이 없는 앨런이 제 잔에 든 고양이 털을 간단히 치워낸 뒤 차를 마시고 내려놨다.

"향이 참 좋습니다."

"나는 잘 모르겠군."

마시지를 못해서.

갈색의 찻물 위에 동동 떠 있던 고양이 털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르메인의 무도한 손길로부터 무구한 안네를 지켜낸 루시가 앞발에 턱을 괴며 엎드렸다.

"애오옹······."

가느다란 울음이 난다.

그 소리가 사뭇 애처로워서, 혀를 쯧쯧 찬 앨런이 루시의 동그란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열 밤만 기다리거라. 저하께서도 그 즈음이면 돌아오실 터이니."

"에옹."

누구를 탓하랴.

결국 르메인의 세 아들이 한 길로 왕궁을 떠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르메인이 원흉인 것을.

"흰 고양이는 칼리안의 고양이라 하던데."

르메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루시의 귀가 쫑긋거린다. 플란츠와 꽤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오니 저도 모르게 반응하는 것이리라.

"플란츠 저하를 더 따르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지요. 저하가 그리도 아끼니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동물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군."

"정 줄 곳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고양이라도 안고 있어야 품이 식어들지 않았을 것을."

"······ 그래."

"아무튼 고양이에게도 미움을 받는다 여기지는 마십시오. 전하께서 못 주신 것을 대신 해주는 아이들입니다."

"알았네."

"이제야 알아서 대체 무엇을 하실는지."

지칠 일 없을 타박을 건넨 앨런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런 손길로 안네의 배 밑에 깔려있던 서류뭉치들 중 제일 위에 있던 것의 바로 아래 서류를 살살 꺼냈다. 안네와 닿은 맨 윗 서류를 꺼내려면 안네가 깰 수밖에 없으니까.

- 경위서

가타부타 이렇다 할 설명도 없는 짧은 제목이 앨런의 눈에 들어왔다. 짤막하나 정갈한 필체도 함께 보였다. 그것이 꽤 익숙한 까닭에, 의외라는 얼굴이 된 앨런이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 공작이 반성문을 보냈습니까?"

바로 슬레이만의 필체였던 까닭이다.

읽어 볼 생각도 들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었던 것을 다시 마주하게 된 르메인이 눈꼬리를 찌푸렸다.

"어제의 일에 대해 보낸 것이겠군요."

"그렇네."

"구경을 좀 해도 괜찮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게."

말이 좋아 경위서지 사실은 그냥 반성문이다.

바로 전날 저녁, 대원들의 훈련이 끝나고 한가해진 발칸의 훈련장에 슬레이만이 찾아왔다. 시오나와 테일란이 함께 서 있었다.

훈련장에 있던 발칸의 사단장 데미안 스콘에게 '군단장 앨런 마나실의 허락을 받았다'는 거짓말을 한 슬레이만은 그 자리에서 시오나와 테일란을 인사시켰다.

싸움을 붙였다는 소리다.

"소공작의 시름이 또 깊겠습니다."

슬레이만에게 멋대로 이름이 팔렸던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럴싸한 내용으로 잘 채워진 경위서, 아니. 반성문을 도로 덮었다.

"하여간 왕궁이 안정되면 치르기로 했던 대련이니 웃고 넘기시지요. 둘의 싸움을 보는 일은 발칸 놈들에게도 큰 견식이 되는 것이니."

"안 그래도 그렇게 할 생각이네."

"몇 수를 내지도 못하고 힐 경이 검을 놓쳤다 하니 조만간 둘의 대련이 또 있을 겁니다."

"참고하지."

그래도 슬레이만이 아예 선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발칸의 훈련장을 소드마스터 둘의 대련장으로 썼다 한들 왕실에 해가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다.

"그러고보니 칼리안도 카스트린 경과 대련을 했다 들었는데."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칼 든 놈들은 본래 다 그렇게 지냅니다. 왕자님이라 해서 다를 것 있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던 앨런이 테이블에 놓인 산딸기 파이를 집어들었다. 한가득 들어간 커스터드 크림과 산딸기의 맛이 퍽 잘 어우러진다. 그것이 꽤 마음에 든다는 듯 세 개를 연달아 더 집어먹은 앨런이 입을 열었다.

"칼리안 왕자님이 서클 하나를 더 두었습니다."

없는 사람처럼 서 있던 호위기사 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툭 던지듯 꺼내진 앨런의 말에 놀란 것이 비단 렌 뿐일까.

앨런의 입에 그 단 것이 네 개나 들어가는 것을 새삼스레 쳐다보던 르메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루시를, 그리고 안네를, 찻잔을, 그 위의 꽃송이를, 고르게 한 번씩 보다 다시 앨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칼리안이 5서클 마법사가 됐다는 소리인가."

"스승을 잘 둔 값은 하고 있지요."

고작 스승을 잘 둔 값이겠나.

무려 5서클이다. 물론 아직 5서클을 마스터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서클을 얻은 단계라 하나 그렇다 해도 5서클이다. 아르센이나 니들렌, 에우리아와 같은 수의 서클이 심장에 들었다.

르메인의 눈이 자연스레 앨런을 살핀다.

그 입에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을지 뻔하다. 때문에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보다 빠릅니다."

4서클에 들어선 것도 앨런보다 빨랐다. 지금도 그렇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얻어낸 기적적인 성과라 하더라도 대단한 일이다.

"내 생일의 축하연을 준비할 일이 아니었군."

다음 달에 치러질 자신의 탄신일 기념 축제 따위를 준비할 때가 아니었다. 칼리안의 성취를 널리 알려 축하를 해야 마땅하지 않겠나.

"역시 아들을 셋이나 감당하기는 버거우십니까? 아무래도 버겁다 생각되시면 제가 좀 덜어가 드리지요."

기다렸다는 듯한 앨런의 답이 들려온다.

내가 뭘 또 잘못했구나, 르메인이 침통한 표정이 되어 뒤늦은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지나치게 강한가."

"왕자님은 전하의 자리에 앉을 분입니다. 국왕에게 필요한 것은 칼과 마법을 부리는 힘이 아니라 그것을 지닌 이들을 부리는 힘입니다.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에는 지나치게 강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숨기셔야지요."

"······ 안타까운 일이군."

"플란츠 저하의 마법도, 란델 왕자님의 치유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려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슈린츠에서 돌아오던 길, 부상을 입은 슬레이만을 치료하던 모습을 보게 된 까닭에 란델이 치유력을 지녔음은 르메인도 알고 있었다. 그에 더해 렌의 상처도 란델이 치료했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플란츠와 관련된 내용은 금시초문이었다.

"둘째가 마법을 익혔는가?"

때문에 르메인이 놀라며 물었다.

그리고 다시 경멸의 눈초리를 받았다.

아니. 말을 안 해주는데 어떻게 아느냔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조금 억울해지려다가.

말을 안 해주게 된 것도 내탓이구나, 깨달은 르메인이 산딸기 파이를 집어들고 입에 넣었다. 쓰디쓴 입에 든 파이에서는 단 맛이 안 났다.

"저하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발칸의 마법사들도 모릅니다. 두 왕자님과 세이렌 협회장을 포함해 몇몇만 알고 있습니다. 혹시나 또 눈치없이 구실까 먼저 알려드리는 것이니 유념하시지요."

"알겠네."

"그럼 이만 가 볼 터이니 고양이들과 잘 계십시오."

입 궁금한 때 찾아와 단 것으로 배를 채운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보던 르메인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라시드 브리센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네."

"브리센 후작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정하셨습니까."

"후작도 구금 중이고."

그레이를 체포하고 라시드를 수배하도록 했다.

둘 모두를 처벌하겠다는 소리다.

"광장에는 한 명만 세우십시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상황을 보아야 되겠지만, 그리해야 할 테지. 그래도 우선 브리센 남작을 확보할 때까지는 후작을 풀어놓지 않을 생각이네."

일순간에 브리센을 와해시키게 되면 여파가 클 터였다. 결국 브리센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하더라도 조금씩, 귀족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낸 뒤에 진행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지금 르메인은 그 연결고리 끊기를 하고 있었다. 라시드를 붙잡아 처형을 하고, 그 때까지 브리센을 손아귀에 꽉 쥔 채 놓지 않음으로써 브리센과 르메인의 힘이 서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눈과 귀로 보고 듣게 하고, 지그프리드를 격상시키고, 새로운 귀족 세력을 길러내고.

그 후 칼리안을 카밀론에 보낸다면.

그 때에는 자연스레 브리센을 말살시킬 수 있으리라.

"알겠습니다."

"생포한 제온의 이들에 대한 조사는 어찌 되어가고 있나."

"발칸의 사단장 한 명과 기사 한 명이 심문 중입니다. 입이 무거운 작자들이라 아직은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만 슈린츠에서 붙들린 두 놈 중 한 놈이 헤르츠 부군단장을 만나고 싶다 하고 있으니······ 헤르츠 부군단장이 돌아온 뒤 대면을 시켜볼지 그냥 처형대에 올릴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변장용 마법 도구를 파훼할 방법은."

"세크리티아 린 후작의 영애와 함께 연구 중입니다. 세크리티아 국왕과 긴밀한 관계인 터라 그 부분에 대해 아는 바가 많으니."

"믿어보아도 좋을 사람인가."

잠시간의 인사와 오찬, 그리고 빌헬름 관을 찾았을 때 한 번을 더 마주친 아리안느를 떠올린 르메인이 이렇게 물었다.

아무렴 아리안느가 전하보다야 믿을 구석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고민하던 앨런이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발칸 대원들의 부상을 함께 돌본 이입니다. 카스트린 경의 입국 사실을 속였다 하여 그에 대해서까지 의심치는 않으셔도 됩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도 사과의 뜻이 담긴 서신까지 전해오지 않았습니까."

얼마 전 체이스로부터 도착한, '내가 내 정혼자를 너무 걱정한 탓에 그만 큰 전력을 몰래 보내게 됐다. 다른 의도는 없으니 오해 말아라. 미안하다.' 정도의 내용을 기분나쁘지 않을 말로 잘 적어낸 서신. 그것을 떠올려 본 르메인이 고개를 잘게 주억거렸다.

"알겠네."

"만약 변장 마법을 파훼할 방법을 찾아내기 어렵다면 세크리티아의 국왕을 직접 만나서도 논의를 해볼까 합니다."

"······ 그 데블란의 아들인데. 그대가 따로이 찾아가도 안전하겠는가."

"전하의 아드님들이 그런 말로 손가락질 받지는 않을까, 그것이나 걱정하십시오. 전하를 백 명 쯤 모아다 두어도 세크리티아의 국왕 한 명만 못할 터이니."

앨런의 이런 말이 진담임을 안다.

일말의 거짓 없는 소리임을 안다.

결국 도리없이 피식 웃은 르메인이 말했다.

"알았으니 가게 되면 날씨 따뜻해 좋다며 눌러앉지 말고 잘 돌아오기나 하게."

"옵니다. 전하의 셋째 아드님을 두고 제가 어딜 갑니까? 하여간 그 일도 진전이 생기면 다시 알려드리지요."

"그리하게."

이렇게, 진짜 용건은 짧고 굵게 끝내버린 앨런이 고개를 돌렸다. 그 뒤 저벅저벅 발을 옮겨 르메인의 집무실 문을 연 뒤 밖으로 나갔다.

"니아앙!"

그 소리에 눈을 뜬 안네가 반가운 울음을 냈다.

코 끝에 와 닿는 매력적인 단내를 맡은 까닭이다.

"애옹!"

루시가 잽싸게 눈을 떠 안네를 불렀다. 그러더니 디저트 접시로 향하려던 안네를 제 머리로 밀어냈다.

"저 아이를 돌보는 것을 보니, 나보다는 네가 확연히 낫구나."

이렇게 말한 르메인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파이가 든 접시를 들어올린 뒤, 앨런이 나간 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오던 시종장 라울에게 건네줬다.

"그래서······ 베른 경은 언제쯤 올 생각인지."

자신보다 바쁜 치유사를 다시 기다리는 국왕의 중얼거림이 집무실을 맴돈다.

* * *

특별히 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쓴 맛이 강한 것을 싫어했다. 쓴 맛이 강한 것을 좋아했다.

때문에 '그런' 결과물이 생겼다.

휘트린의 귀족들과 세 형제가 모두 함께 한 오찬 자리. 식사 후 각자의 앞에 놓인 디저트 접시에 남겨진 것들을 본 칼리안이 표정변화 없이 웃음을 삼켰다. 귀족들이 앞에 있지 않았다면 '두 분은 어떻게 그렇게 다르시냐' 하고 짖었을지도 모른다.

초콜릿 때문이다.

단단한 초콜릿 속에 같은 빛의 무스가 담긴, 보는 것만으로도 단 맛이 드는 듯한 초콜릿이 세 개. 우유를 많이 넣은 부드러운 초콜릿을 녹여 살짝 올리고 말린 딸기로 장식을 한 크래커가 세 개. 검은 빛에 가까운 파우더를 잔뜩 입혀 둔, 단 맛은 별로 없고 쓴 맛만 강한 초콜릿이 다시 세 개.

초콜릿에 대한 특별한 호불호가 없는 칼리안의 접시에서는 그 세 종류의 디저트가 하나씩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플란츠의 접시에서는 크래커만 두 개, 란델의 접시에서는 쓴 초콜릿만 두 개가 사라졌다. 셋의 입맛이 그렇게나 다르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부상을 입으셨다는 소식에 마음을 졸였는데 이렇게 뵈니 마음이 놓입니다."

거대한 원탁에 다같이 둘러앉아 있던 귀족 한 명이 칼리안에게 말을 건네왔다. 칼리안에게 전하는 안부 인사를 이제야 꺼내놓는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또 귀족들의 입을 막은 것이다.

'플란츠'가.

따라서 모두 함께 고요한 식사를 해야 했고 차와 디저트가 올라온 이후에야 말이 허락되었다. 덕분에 이제야 안부가 전해진 참이었다.

물론 조용했던 것은 연회장 뿐이다.

- 그래도 이번에는 토끼 고기 말고는 형님이 싫어하시는 게 없네요.

- 또 잔소리를 하실 거면.

- 잔소리라고만 하지 마시고요. 돌아가면 형님 편식하는 버릇 좀 고쳐보셨으면 좋겠는데요. 골라내는 음식들을 좀 줄여보시는 게,

- 싫어.

이렇게.

아직 얀에게 돌아가지 않은 팔찌를 십분 활용중인 칼리안과 플란츠의 머릿속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참 소란했으니까.

- 형님 혹시 그거 아십니까.

- 뭐.

- 헤르츠 경도 토끼 고기 못 먹습니다.

- 그게 왜.

- 들어보십시오. 형님이 토끼랑 새끼 돼지 못 드시는 것처럼, 헤르츠 경도 토끼 고기 못 먹습니다. 형님과 헤르츠 경이 편식하는 이유가 똑같다니까요. 듣기로 헤르츠 경은 새알도 못 먹는 바람에 그 일로 어찌저찌 하다 보니 코코가 생겼다던데요.

- 그래서.

- 헤르츠 경이랑 비슷한 입맛이라고 소문나는 것보다는 드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싫어.

- ······ 네.

그래. 저렇게 싫다는 데 어쩌겠나.

계속 오냐오냐 치워줄 수밖에.

"완쾌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칼리안 왕자님."

귀족의 말이 다시 들렸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찻잔에서 손을 뗐다.

오렌지 향이 감돌던 홍차에 잠시동안 파문이 인다.

칼리안이 그것을 살짝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제껏 플란츠에 의해 말문이 막혔던 일에 대한 불만을 애써 감춘 채 자신의 안부를 걱정하는 귀족을 향해 고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카이리시스와 휘트린의 거리가 많이 멀다 여기지는 않았는데, 오늘 보니 생각보다 멀었던 것 같습니다."

"네, 왕자님.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왕자님께서 쉬이 걸음하시기에는······."

"같은 말의 뜻이 서로 달리 쓰이는 듯 하니."

하던 말이 잘린 귀족이 제 입을 다물었다.

'완쾌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보며 칼리안이 건넨 말을 가늠했다. 그 뒤에는 아주 얼토당토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왕자님의 부상이 나은 것을 두고 어찌 다른 뜻을 두겠습니까. 진정 다행이라 여겨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 그렇습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다행입니다. 사실 신경쓰였던 일이 있던 터라."

이 말에, 귀족과 칼리안의 말을 듣던 나비아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미 전날 밤에 플란츠와 대화를 나눴던 나비아였다. 칼리안이 납치되었던 일을 당연히 알았다. 서둘러 플란츠를 데려간 사람이 누구인지, 그렇다면 어디에 있을지, 그것을 곧바로 확인해 준 것 역시 나비아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이렇게 아무 일도 없던 척 말을 걸어오니 절로 웃음이 든다.

그 웃음을 참지 않고 다시 곱게 포장하여 입가에 내어 놓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비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이렇게나 바람이 좋은 휘트린인데 형님들께서는 지난 밤 내내 굳이 창문을 닫아두었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해서 나는 내가 형님들께 창을 열어두시라 말씀드릴 상황이 되지 못해 그리 하셨나보다······ 하고. 아무래도 걱정을 하던 중이라서."

쾌차한 것이 정말 기쁘기는 한지.

칼리안이 빨리 완쾌하는 바람에 플란츠를 공격할 기회가 사라져 애석한 건 아닌지. 하필 칼리안이 부상 중에 있었을 때 플란츠에게 변고가 생길 뻔했던 것이, 칼리안이 손쓰지 못할 틈을 타 플란츠를 공격하려 했던 의도는 아니었는지.

치미는 말을 접은 칼리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혹시나 불온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한 것은 맞습니다. 때문에 진중히 살폈으나 실제로 어제 왕자님께 말씀드렸던 참담한 일을 자행하려 한 이들은 없었습니다. 저희가 왕궁을 향해 무기를 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찬에 들기 전, 칼리안을 따로 찾아왔던 나비아가 이런 말을 했었다. 혹시나 플란츠를 공격할까 우려한 프레이르가 먼저 나서기는 했으나 정말로 공격을 실행하려 한 간 큰 귀족은 없었다면서.

나비아는 자신이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여전히 자신들을 믿지 못한다 말하는 것에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플란츠를 공격하고자 마음을 먹었으나 실행하지 못한 귀족들도, 그들을 우려해 섣불리 플란츠를 납치했던 프레이르도, 때문에 이들 모두를 믿지 못하는 왕족들도, 나비아의 입장에서는 전부 다 이해가 되었던 까닭이다.

- 톡, 톡, 톡.

고민에 잠긴 칼리안의 손 끝이 테이블을 두드린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휘트린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확인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지 않나. 그러니 그 동안에는 이곳에 계속하여 머무를 수밖에 없다. 허나 그러려면 안전이 확보되어야 했다.

- 톡, 톡, 톡.

그러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까.

"하나만 물으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그 때.

낮은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귀족들의 입을 죄 막아버리고, 식사를 마친 뒤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라는 딱 한 마디를 전해 놓고, 그 후로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귀족들과 나비아를 지켜보던 사람.

플란츠였다.

자신의 옆에 앉은 란델을 한 번 쳐다본 플란츠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레릭이 다가와 의자를 빼 줄 틈도 없이 드르륵, 하고. 조금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 귀족들을 내려다봤다.

반발심을 간신히 집어넣은 것이 분명한 시선들. 칼리안을 바라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그 시선들. 그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새기듯 그렇게 한참을 지켜봤다. 그러더니.

- 저벅.

짤막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한 걸음을 걸었다.

칼리안의 뒤를 지나쳐 그 옆에 앉은 나비아의 뒤를, 다시 한 걸음을 내어 프레이르의 뒤를 지나쳤다. 그대로 계속 걸었다.

하얀 셔츠. 진주색의 타이. 베스트 없이 걸쳐입은, 몸에 꼭 맞는 살구색의 재킷. 하얀 바지. 그런 차림을 한 채로 연회장을 천천히,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걸었다.

- 저벅, 저벅.

생각을 정리하듯, 하지만 거리낄 것 없다는 듯한 걸음이 계속 이어졌다. 아무런 소리도 없는 곳에 그렇게 계속하여 플란츠의 걸음이 이어졌다.

오래지 않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플란츠가 몸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를 두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 화아악!

변화가 생겨났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듯 길어진다.

맑은 호수에 석류즙을 떨군 것처럼 색을 가진다.

갓 피어난 생명같던 연두색 눈에 또 다른 생명이 든다. 요동치는 심장같은 붉음이 든다.

허리가 가늘어지고 어깨가 좁아진다.

뼈마디가 불거지던 손가락이 길게 변한다.

선홍빛의 긴 머리, 붉은 눈. 더할 바 없을 아름다움이 담긴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런 얼굴과 몸으로 바뀐 '플란츠'가 팔을 뻗었다. 그리고 바로 곁에 앉아있던 '칼리안'의 손목에서 팔찌를 뺐다.

- 달칵!

그와 함께 '칼리안'의 검은 머리가 옅게 변하는 것을, 붉었던 눈이 본래의 연두색으로 돌아오는 것을 모두가 지켜봤다. 하지만 모두가 눈에 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나 찬 눈으로 바라보았던 이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뀐 탓에. 그렇게나 경외하던 모습으로 바뀐 탓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완전한 프레이야의 모습으로 찾아온 프레이야의 아들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따르는 것은 칼리안입니까. 아니면 프레이야의 아들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물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