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51화 (452/527)

제80장. 야옹(1)

일단 얀을 불렀다.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던 얀이 곧장 찾아와 제대로 된 옷을 전해줬다. 정확히 말한다면 정성 가득한 손길로 사근사근 입혀줬다 해야 맞을 일이다.

그런 얀을 본 칼리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형님 저 따라하는 게 그렇게 어려우셨습니까."

얀을 보며 웃더니 플란츠에게 말을 한다.

칼리안이나 플란츠나 둘 다 편한 차림이었지 않나. 칼리안은 침대에 누워있던 중에 프레이르에게 붙들려갔고 플란츠는 침대로 향하려다 말고 칼리안을 찾아 나섰으니 말이다. 때문에 각자의 모습대로 돌아와있던 칼리안과 플란츠는 서로 꽤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얀은 둘이 변장을 풀었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을 챙겨주고 있는 얀의 손길이 이렇게나 조심스럽다. 지금 앞에 선 이가 칼리안으로 변장한 플란츠가 아니라 진짜 칼리안임을 알아봤다는 의미다.

그래서 건넨 질문이었다.

도대체 내 흉내를 얼마나 못 냈으면 새끼 코끼리가 바로 눈치를 채느냐고.

"그게 아니라 제가 왕자님을 제대로 보는 거예요."

"그런 거야?"

"제가 어떻게 왕자님을 못 알아봐요. 그리고 왕자님 흉내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칼리안은 플란츠가 흉내를 못 내는 게 아니라며 편을 들어주는 말인지를 물으려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 얀에게 건넬 만한 농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불어 옛칼리안을 떠올리며 복잡한 심상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얀은 얀이었고 칼리안은 그저 칼리안이니까.

"그래. 네 말이 맞네. 얀."

고개를 끄덕인 얀이 칼리안의 옷 시중을 마저 들었다. 사실 잠옷이라 하기보다는 편한 옷이라 해야 할 법한 하얀 셔츠 위에 자주색의 크라바트를 가볍게 매 주고 검은 베스트와 재킷을 입혀 준다.

그 새벽에 기어코 옷을 갖춰입고 나서야 속이 편해진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고마워. 같이 밥 먹을래?"

"아뇨."

"그래, 그럼. 가서 쉬어."

"저 올라가도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여기에도 사람들 있잖아. 걱정 말고 자."

"식사하고 바로 주무시면 안 돼요."

"응. 알았어."

"식사 마치면 홍차 말고 다른 차 드세요. 잠 안 와요."

"그렇게 할게."

"안 주무시면 안 돼요. 잠깐이라도 쉬세요."

"그래. 걱정하지 마."

"네. 알겠습니다."

굳이 쉬고 있던 얀을 불러내서는 옷을 챙겨달라 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얀을 돌려보냈다.

"정말이군."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나오기에는 허기가 많이 진다는 이유로 얀을 불러낸, 그러면서도 그냥 고맙다는 말만 전하는 칼리안을 지켜본 플란츠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우님의 대단한 시종이 말해준 게 있어서."

"얀이 형님께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까."

"그래."

응접실은 식사를 위한 곳이 아니다.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도록 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 용도로 쓰이는 응접실의 가장 큰 테이블에 찻잔 대신 식기가 놓이기 시작했다.

퍽 부자연스러운 광경이었으나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은 칼리안이 앞에 놓인 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의외네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는다.

얀과 플란츠의 일이었고, 칼리안이 알아야 할 내용이면 얀이든 플란츠든 먼저 말을 했을 테니까.

"반가워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 별로."

"네."

입에 맞는 음식만 말할 것이 아니라 다음에는 이럴 때 레릭도 같이 불러야 되겠다. 아직은 왜 그래야 하는지까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불러보면, 그래서 레릭이 찾아오게 되면, 그 때는 이해하게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한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지금 당장의 난관은 레릭이 아니라 이제야 간신히 소화가 좀 된 듯한 뱃속에 무언가를 또 들이게 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정말로 수프만 적당히 먹고 말아야지.

······ 이렇게 작정하고 음식을 차리라 요구할 줄 알았으면 나는 그냥 저녁 먹었다고 할 걸.

- 똑똑.

플란츠가 다짐의 끝에 약간의 후회를 할 즈음, 노크 소리와 함께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유리문 너머 한 명이 문을 열고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문을 연 이는 키리에였고 들어온 이는 란델이었다.

"결국 시계를 고장낸 것이더냐."

사방이 어두운 새벽.

늦었다고 해야할지 지나치게 이르다고 해야할지 가늠이 안 되는 시간의 식사에 초대된 란델이 한 소리를 했다.

"시계 말고 제가 고장나지 않았는지는 안 물어보십니까."

"그랬다면 네 수하는 나를 부르러 오는 대신 다른 곳에 갔을 테지."

"그래도요. 서로 걱정하면 좋잖습니까. 형제 사이에."

"부러 상기시키지 말거라. 잊지 않았으니."

"반가운 말씀이네요."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느냐는 타박에 내 걱정은 안 하는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칼리안에게 탈이 생겼으면 이미 나비아를 찾아갔을 키리에가 멀쩡히 심부름이나 하고 있겠느냐는 답이 돌아온다.

그것이 결국 걱정을 하기는 했다는 뜻일지 아닐지를 물으면 기껏 돌아오던 여러가지 말 말고 또 무상한 답이 나올까봐, 칼리안은 그냥 웃음만 보였다. 플란츠가 제 입에 걱정했다는 말을 올리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너인 것을 알았다면 손대지 않았을 이들로 보였다."

"네. 저인 줄 모르고 데려간 것은 맞습니다."

"허면. '둘째'를 붙들어 간 이는 어찌하였느냐."

"살아있습니다."

"의외로구나."

"들어야 할 말이 아직 많아서요."

테이블 위에 푸짐한 음식들을 올려두는 하인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물론 그들에게 손 뿐만 아니라 눈과 귀도 있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신경쓰지 않고 대화를 했다.

어차피 '플란츠로 변장 중이던 칼리안이 누군가에게 납치되었으나 플란츠와 란델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렇게 공개된 곳에서 버젓한 식사를 하는 것 아니던가.

다만 칼리안은 '프레이르'라는 이름만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프레이르가 플란츠를 도운 사실이 노출되면 혹시나 보복이 가해질까봐, 그래서 아직 나누지 못한 대화가 더 이어지지 못할까 우려한 까닭이었다.

"그래."

몇 마디의 대화로 상황을 대충 파악한 듯한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생했다거나 안 다치고 왔으니 다행이라거나 하는 등의 말 대신 스푼을 들어올렸다. 형제가 온 것에는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고 먼저 식사를 시작한 플란츠의 뒤를 이어 수프를 떠올려 입에 넣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또 생글생글 웃었다.

하얀 버섯과 브로콜리를 넣은 수프에는 눈이 가지 않을 만큼 배고픈 건 나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에 또 잠깐 속이 허해진 까닭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식사 후에 하시죠."

"그리하거라."

"네."

그렇게, 비로소, 드디어.

식사가 시작됐다.

저민 돼지고기를 뭉쳐 튀겨낸 요리를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사과 소스의 향에 절로 웃음이 든다. 좋아하는 민트 젤리가 곁들여진 양고기 스테이크도, 뭉근하게 졸인 양파가 곁들여진 소고기 구이도, 옥수수 반죽을 얇게 구운 뒤 채썬 오이와 닭가슴살을 올려 돌돌 말아놓은 요리도, 전부 다 만족스러운 맛을 냈다.

엘프와 하프엘프 귀족이 인간 영지민들과 섞여 살아가는 곳이라 그런가. 엘프들의 식단으로 보기엔 어려운 음식들을 그렇게 차곡차곡 뱃속에 채워넣었다.

수프 반 그릇과 샐러드 두 입으로 두 번째 저녁식사를 마친 란델. 수프 두 입과 샐러드 반 접시로 다시 배를 꽉 채운 플란츠. 그 둘이 각각 두 잔의 와인과 탄산수를 비워내는 동안의 일이었다.

- 달칵.

식사 중의 칼리안은 대체로 말이 없다.

란델과 플란츠는 원래 말이 없다.

그러므로 사과 과육이 기분좋게 씹히는 탄산수를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친 칼리안이 말 그대로 배부른 미소를 지을 때까지 응접실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곧 칼리안이 주변에 서 있던 하인들을 향해 손짓을 보냈다. 소리없이 다가온 이들이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말린 살구가 올려진 접시와 차를 다시 내어놓을 때까지 고요함이 계속됐다.

칼리안의 시선이 잠시 찻잔에 머문다.

홍차가 아닌 말간 흰 빛의 차. 그것이 든 잔을 들어올린 칼리안이 차 한 모금을 머금었다.

-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손길에 또 한 번 조용한 소리가 난다. 그와 동시에 반투명한 막이 주변을 둘러싼다.

사일런트.

"프레이르라고 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오늘 형님을 강제로 모셔가려 한 자의 이름입니다."

"왕비 프레이야와 이름이 비슷하구나."

"네. 그렇습니다."

칼리안을 찾으러 갔을 때 프레이르의 얼굴을 이미 보았던 플란츠는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짐작했다는 듯 했다. 대신 란델이 말했다.

"동생이 있다더니 그 자였더냐."

"실제로는 오빠입니다. 보다 어려보인 까닭에 동생이라 알려진 것 같습니다."

곧 칼리안이 이야기를 전했다. 엘프들의 대장로 나르잔에게 프레이야가 사실은 엘프였다는 말을 듣게 된 일부터 세크리티아의 브리지트 숲의 일까지 모두 알렸다. 숲 속에 만들어진, 이제는 북쪽 대사막과 연결된 엘프 추방자들의 마을과 그곳에서 발견한 '휘트린'이라는 이름 역시.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유를 모를 리 없는 플란츠가 여지없이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마치 이제까지 자신이 말을 했던 것처럼 자연스레 뒤를 이었다.

"휘트린은 왕비 프레이야와 절친한 사이였던 다른 엘프의 이름입니다.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지만, 저와 칼리안은 휘트린이 브리센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리라 여깁니다."

"어째서 그리 확신하느냐."

칼리안이 자신을 대신해 또 나선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는 그런 동생 놈의 새빨간 눈을 못본 척하며 대답했다.

"휘트린의 남편이 브리센에서 숨기려던 비밀에 연루되었다 살해되었고, 휘트린은 그 일을 파헤치려다 죽은 것으로 보인 까닭입니다."

"내 어머니가 독살된 일을 말함이더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전해진 물음.

칼리안이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플란츠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휘트린으로 걸음을 했으면서 그런 사실을 이제야 설명하는 건 이제까지 나에게 전하지 못할 만한 일이었기 때문일 테지. 굳이 셋째 대신 둘째가 입을 열 만한 사고는 그것 뿐이고."

"······ 네."

칼리안이 대답했고 란델은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계속 설명하거라."

"네. 왕비 프레이야는 휘트린을 찾기 위해 카이리스를 찾아온 뒤 곧바로 왕궁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독살되었지. 마찬가지로."

"그렇습니다."

말린 복숭아를 우려낸 흰 빛의 차.

칼리안의 찻잔에 든 차가 반으로 줄고 란델의 찻잔에서는 두 모금이 사라질 때까지도 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 사이 플란츠의 차는 조금도 줄지 않은 채로.

- 달칵.

세 모금 째의 차를 마신 란델이 찻잔을 내려놨다.

하얀 눈꽃이 담긴 듯한 빛의, 따스하고 편안한 향의 차를 바라보다 플란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거라. 꽃 향이 아니니."

나지막한 목소리가 플란츠를 향한다.

칼리안이 소리없이 웃었다.

도무지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란델의 창문에 바람이 들 틈이 마련된 것 같아서. 그 사이로 넘어오는 하얀 복숭아 향에 배가 불러서.

"네."

비슷하게 나지막한 대답이 란델을 향했다.

르니에리와 다른 흰 빛의 차가 담긴 잔에 플란츠의 손이 가 닿았다.

진종일 머무르던 지난한 꽃 향기가 그제야 저문다.

* * *

갈색 구두.

그리고 세 걸음.

붉은 와인을 앞에 둔 이의 귓가에 그 걸음 소리가 맴돌았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직시하던 연두색 눈이 생각났다. 티없는 갈색 구두를 들고 온 하인에게 발을 내어 준 채, 제 발을 받쳐든 손이 구두를 신기고 바짓단을 골라 내려줄 때까지 의자에 기댄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모습을 떠올렸다.

'형님 구두 작으시죠.'

그 연둣빛에 감춰진 붉음이 드러난 뒤 꺼내진 말을 되새겼다.

- 찰랑······!

투명한 유리잔 속 와인이 맑은 음을 낸다.

갈색 구두.

그 속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새하얀 발. 그것은 단 한 번을 쓰고 버리는 붉은 융단의 위를 걷기 위해 존재하는 발이었다. 왕족의 발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하지 않았다. 갈색 구두에서 꺼낸 발을 기꺼이 바닥에 가져다 댔다. 대신하여 바닥에 닿아야 할 구두를 제 손으로 직접 들어올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세, 걸음.

맨발로 바닥을 디디며 제 형제의 앞으로 다가가던 세 걸음. 그 뒤 제 손으로 내려놓은 갈색 구두. 그것을 대신해 집어든 검은 구두. 그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 새하얀 발.

그 손길 하나하나를, 그 걸음 하나하나를, 잔에 든 와인과 달리 온전히 올곧아 흔들리지 않던 붉은 눈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 그런데 왜."

맨발, 갈색 구두, 세 걸음.

그것이 어째서.

복종 아닌 보호로 보이는지.

영주성의 가장 깊은 곳, 조금 전까지 칼리안이 함께 있던 자신의 서재에 여전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프레이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남은 이야기는 다시 나누자 했던 칼리안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말을 전해오던 붉은 눈, 곧은 시선, 흔들림없는 걸음, 그래. 칼리안이 맞다. 프레이야를 닮았다. 동생의 아들이 맞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프레이야의 아들이 맞는데 왜.

실리케의 아들을. 왜.

어떻게.

그렇게.

- 찰랑!

실리케의 허울을 뒤집어 쓰면서까지, 그 발로 바닥을 디디면서까지, 굳이 허울을 쓰고 복종을 흉내내면서까지.

"······ 누구인가."

생각에 잠겨있던 프레이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든 이들을 물리고 홀로 앉아있었음에도 그렇게 물었다. 와인을 내려다보던 암갈색 눈을 움직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스스로 잘라내 짧아진 귀를 쫑긋거리지도 않고서.

"와······ 뭐지."

그러자 누구도 없던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물과 전기를 함께 쓸 수 있는 까닭에 투명화를 유지하며 텔레포트를 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없는 마법사. 때문에 칼리안에게 가장 절실했던 정보들을 참 많이 가져다주었던, 정보 조직의 보스이기도 한 마법사.

그 마법사의 보랏빛 머리카락이 너울너울 드러났다. 시치미를 떼고 얌전히 있기에는, 정확히 자신을 향해 쏘아진 위협적인 기운을 무시할 수 없어 투명화를 때려친 에우리아였다.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은 에우리아가 프레이르를 쳐다봤다. 그러자 살짝 기울인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건넨 프레이르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 필요한 것이 있다 전해왔다면 건네드렸을 텐데, 괜한 수고를 하는군."

칼리안의 말에 따라 잠시 정보 조직의 우두머리로 되돌아간 에우리아가 프레이르의 앞에 마주앉았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의 대답이 프레이르에게 전해졌다.

"칼리안 왕자님은 아무나 안 믿으시거든."

"그래서 나를 몰래 살피라 하시던가. 서운하군."

"아니. 수면향 훔쳐오라고 하셨는데. 집 밖에서 주무시는 걸 별로 안 좋아하시나봐."

"내 감시가 아니라 수면향을."

"어. 칼리안 왕자님은 아무나 의심 안 하시거든."

이래서야.

칼리안이 사람을 잘 믿는다는 것인지 안 믿는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 않나.

때문에 작게 웃은 프레이르가 와인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보며 그 잔을 가리켜 보였다. 같이 마시겠는지를 묻는 것이었고, 에우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스는 별로."

프레이르는 거절에 대한 또 다른 제안을 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먼 곳에 놓인 책상 서랍을 열었다.

"제조법도. 수면향이랑 해약 제조법 둘 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우리아가 말했다.

"······ 바라는 게 많은 마법사로군."

"말했잖아. 주무시는 걸 싫어하신다고. 해약을 만들어야 할 것 아냐."

"해약을 함께 달라 하면 되지 않나."

"그게 해약인지 독약인지 어떻게 알고 드시게 하나. 당연히 직접 새로 만들어야지."

"제조법을 주면. 만들 줄은 알고."

에우리아가 피식 웃었다.

"마법사에게 약을 묻나."

마법사들은 대부분 약을 함께 배운다. 양신전쟁 이전의 마법사들은 마법을 부리는 것 뿐 아니라 마법의 힘이 담긴 약도 만들었던 까닭이다. 다만 그 대부분이 흑마법이었던 탓에 이제는 약에 마법의 힘을 담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마법사들은 여전히 약을 함께 익혔다.

때문에 마법 못 쓰는 약제사는 많아도 약 만들 줄을 모르는 마법사는 많지 않았다. 베로니카와 아리안느가 약을 다루고 서클을 만들지 못했던 로닐이 약제사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네 조카 되시는 왕자님 처음으로 살려드린 게 나야."

그러니 에우리아 역시 약을 다뤘다.

칼리안이 독차를 마시고 있음을 안 앨런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아니던가. 마법사 협회를 찾아가 해독약을 만든 것 말이다.

"휘트린에서 당신에게 빚을 졌군."

"그렇게 생각되면 제조법 주고 퉁치면 되겠네."

드르륵, 하고.

무언가를 꺼낸 뒤 서랍을 닫은 프레이르가 다시 걸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에우리아의 앞에 내려놨다.

제조법이 적힌 종이가 아니었다.

작은 유리병에 든 갈색의 물. 단순한 해약이었다.

이것을 본 에우리아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 말이 사람 말이라 이해가 어려웠나."

"당신은 못 만드니까."

"왜."

"인간 마법사라서."

에우리아의 눈썹이 조금 더 찌푸려진다.

"뭐야. 흑마법이야, 또?"

"아니."

다행인지 아닌지 고개를 가로저은 프레이르가 손을 움직였다.

"나만 만들 수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프레이르의 손 끝에 금빛의 기운이 모여들었다. 그것이 가만히 뻗어나가 서재 전체를 감싸안았다.

빛의 기운이 히나가 부리는 힘과 썩 비슷함을, 그리고 그렇게나 깨뜨리기 힘들었던 방어막이 바로 그 빛의 힘이었음을 안 에우리아가 눈을 빛냈다. 칼리안의 심부름 때문에 잠시 미뤄두고 있던 마법사의 호기심 하나가 해결된 까닭이다.

곧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네가 먼저 빚졌다 했어. 그거 퉁쳐 줄 테니까 그냥 줘. 제조법."

감탄은 감탄이고.

칼리안이 시킨 일은 해야 하니까.

"나는 뭐 대단한 비밀인 줄 알았네."

에우리아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상관없으니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프레이르가 그런 에우리아를 가만히 보다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알려준다면 내어주지."

"뭔데."

"플란츠 왕세자. 협회에서 왜 아직까지 왕세자를 살려두는지를. 분명 앨런 마나실과 손을 잡았던 이유는 칼리안 왕자님을 옹립하고 브리센을 축출하기 위해서였을 텐데. 어째서 움직이지 않았나."

맞는 말이다.

'혹시 여기 마법사들은 칼 든 새끼 사자가 왕관을 써도 괜찮다고 생각 중인가?'

에우리아를 처음 만난 앨런은 그렇게 물었었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칼리안의 편에 섰다. 마법사 세력을 키우고 브리센을 무너뜨리고자.

지금 프레이르는 그것을 다시 묻고 있었다.

분명 그랬던 마법사 협회가, 그들의 수장이, 플란츠를 왜 살려두는지를.

그 말을 들은 에우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뒤지기 싫어서."

"······ 누구에게."

"칼리안 왕자님이시지. 내가 누구 무서워할 사람인가."

가벼운 대답이었으나 프레이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에우리아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어. 괜찮아. 다들 처음에는 그런 반응 보이더라. 아무튼 나는 대답했으니까, 목숨 아까운 줄 알면 저하 그만 건드리고."

콕콕콕.

누구를 떠올리듯 테이블을 콕콕 찌르던 에우리아가 그 손을 다시 내밀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프레이르에게 내보이며 같은 말을 한 번 더 꺼냈다.

"제조법이나 줘."

칼리안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하프엘프 치유사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그에 대한 마법사의 호기심 어린 기대감에 한껏 고양된 얼굴을 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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