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50화 (451/527)

제79장. 숙이거라(6)

에우리아가 큰 숨을 들이쉬었다.

도대체가.

밖에서는 기껏해야 선잠만 잔다던 칼리안도 아니고 아무데나 널브러져 잠든 고양이도 아니고 마법에 취해 기절한 것과 마찬가지인 백작의 어깨를 손 끝으로 건드려 깨우려 드는 왕세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도 심지어, 잘 벼려진 칼날을 들고선 절대로 죽지 않고 정신만 차릴 곳들을 쏙쏙 골라 솜씨 좋게 찌르든, 감히 내 앞에서 또 한 번 처자빠져 있으면 아예 영원히 재워주겠다는 듯 살기와 피어를 쏘아보내든, 한낱 백작이 잠든 꼬락서니를 내가 언제까지 지켜보고 있어야 하느냐는 듯이 웃는 얼굴로 에우리아에게 눈짓을 하든. 무엇이 되었건 절대로 온건하지는 못할 방법으로 사람을 깨워낼 것이 분명한 검은 맹수의 외양을 한 왕세자를 말이다.

"······ 저하."

결국 에우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이건 플란츠의 행동을 더는 못 보겠어서 나서는 것이 아니다. 이중 속성을 정말로 성공하게 된 일과, 에우리아의 호위 대상에 있던 이들 중 하필이면 칼리안이 납치됐음을 알게 된 일 다음으로 당황했기 때문도 아니다.

수면향에 취한 채로 어디로 잡혀갔을지 모를 그 맹수를 한시라도 빨리 되찾아 두기 위해서 나서는 거다.

"잠시만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한편 새어나오는 웃음을 힘들게 집어넣은 에우리아가 마력을 운용했다.

- 촤아악!

그리고 나비아의 얼굴에 얼음장같은 물을 쏟아내는 것으로 플란츠의 수고를 가볍게 덜어줬다.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나비아가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눈 앞에 서 있는 3왕자를 발견하곤 몸을 튕기듯 일어났다.

"왕자님!"

플란츠가 욕실에서 갓 도망친 안네의 꼴이 된 백작을 보다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 마력을 운용해 나비아와 온 방에 묻은 물을 없앴다. 어차피 칼리안도 마법사이니 이 정도로는 의심받지 않을 테니까.

침실에서 납치된 뒤 물세례를 맞고 정신을 차렸더니 앞에 있던 친절한 3왕자가 물기를 말려 주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던 나비아가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인사라니.

이 모습, 석찬 중 두 왕족을 앞에 두고도 당당했던 나비아가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모습을 칼리안이나 란델이 봤다면 분명히 비웃었을 터였다.

다만 칼리안은 석찬에서의 분위기를 플란츠에게 알리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플란츠에게 그 사실을 일러 줄 란델도 아니다. 때문에 나비아를 그냥 칼리안을 엄청나게 어려워하는 예의바른 백작 정도로 여긴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입가를 움직였다.

- 생긋.

하고.

참 어여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음의 준비 없이 그 모습을 본 에우리아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리고 두 주먹을 있는대로 말아 쥐며 큰 숨을 또 들이 쉰 뒤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못 봤다. 아무것도 못 봤다. 저 분은 칼리안 왕자님이다. 그 플란츠 왕세자가 생긋거리는 동생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 그냥 칼리안 왕자님이다. 그래. 그런 거다.'

필사적으로 되뇌면서.

"내 형님. 내놔."

그러자 에우리아의 한계를 시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아니다. 저 분은 그냥 칼리안 왕자님이다. 그러니까 웃으면 안 된다. 안 된다.'

끝없는 메아리가 에우리아의 머릿속을 맴돈다.

나비아는 고개를 돌린 뒤 한 번을 크게 움찔거리다 뻣뻣하게 굳은 에우리아의 어깨를 보지 못했다. 플란츠는 정확히 보았으나 신경쓰지 않았다. 악의가 담긴 반응이 아니라는 정도는 이미 알았거니와 오래도록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으니까.

물론 '편식하는 완두콩'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아주 많이 신경쓰고 있었지만.

그러니 에우리아가 웃든지 말든지.

플란츠는 하던 대로 계속 칼리안을 연기해나갔다.

"······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 번 말하는 취미 없어."

그나마 상황이 이러하여 말을 길게 늘리지는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평소의 칼리안이라면 어지간한 귀족들을 향해 말을 내리지도 않을 테고 이렇게 짧은 용건만 툭툭 던지지도 않겠지만, 심기가 불편하거나 심사가 뒤틀리거나 살짝 더 돌아버리는 경우에는 그 말투부터 싹 바뀌지 않던가.

"형님이라 하시면, 란델 왕자님 말씀이십니까. 혹시 란델 왕자님께서 사라지기라도 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말······. 플란츠 형님."

말고, 라는 말버릇을 물리고 대답한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리려다 말았다.

하기사. 휘트린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 칼리안이 '내 형님'이라 할 만한 사람이 란델밖에 더 있겠나 싶어서였다. 만약 이곳이 플란츠의 영지 세레이아였거나 혹은 란델의 영지 파비안이었다면 그곳의 사람들은 누구를 떠올리려나. 문득 궁금해진다.

"설마, 저하께서 사라지셨습니까?"

"설마. 아무 일 없이 잘 계신 분을 내놓으라 할까."

"아······ 그래서 저를 이렇게······ 갑자기."

그제야 '칼리안'이 자신을 납치하다시피 끌고 온 이유를 눈치챈 나비아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아닙니다, 왕자님. 지금 처음으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럼 말해. 백작이 아니면 누구일지."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저하께서 사라지셨다는 이야기도 지금 처음 접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누가 그랬는지······."

"생각······ 을 해. 백작."

애초에 나비아를 의심해서 납치한 것도 아니었다.

플란츠가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칼리안이 예상했듯 플란츠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나비아는 아니다.

그레이는 고사하고 레넌도 안 할 짓이 아닌가.

휘트린 영지에서 벌어진 일이니 말이다. 개입을 했든 안 했든 그 일이 벌어진 곳이 휘트린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미 광장에 설 이유가 되는데 심지어 휘트린이 플란츠를 적대하고 있다면 그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런 일이 벌어질 때 가장 좋아할 사람이 누구인지, 의심스럽던 놈들이 누구인지, 그놈들 중에 감히 왕세자를 건드리겠다 마음 먹을 놈들은 누구인지. 생각을 해야 살려 줄 마음을 먹을 것 아냐."

목소리 끝에 살기가 든다.

"······ 내가."

그 살기를 읽지 못했어도 상관없다.

가는 미성은 이미 충분히 서늘했다.

나비아가 흔들리는 숨을 간신히 내뱉었다. 그리고 앞에 선 왕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관리하는 영지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책임을 피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플란츠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말.

때문에 플란츠의 붉은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것을 보지 못한 나비아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고는 내일 아침 제가 알게 된 것으로 하겠습니다. 더불어 왕자님께서는 부상을 입어 혼미하셨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왕자님께서는 모르는 것으로, 부상이 깊었던 것으로 해두십시오."

"그게. 무슨 뜻이지."

"왕자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신 것을 제가 보았으니 그것만은 제가 반드시 증명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 하."

플란츠의 입에서 헛웃음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느새 웃음을 지운 에우리아의 얼굴에는 복잡한 표정이 든다.

동생의 부상보다 제 말의 건강을 더 염려하던 태도, 지독할만큼 실리케를 닮은 행동과 표정, 상대함에 있어 결코 녹록하지 않은 처세. 그러니 동생에게 절대로 제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것 같던 왕세자. 칼리안의 형제 아닌 형제.

그의 실종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왕세자의 실종으로 인해 피해 입을 칼리안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게 된 까닭이다.

"본인이 없어 다행이군."

나비아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칼리안이 이 자리에 없어 다행이라는 의미였다. 만약 있었다면 나비아는 제 할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나 아끼는 칼리안의 손에 의해서.

이곳은 세레이아도 파비안도 아닌 휘트린이다. 그러니 저런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이 일견 당연하다 할 일이겠으나 정작 그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 테니까.

어찌됐건 마치 텐실의 신도들이 세렌티를 추앙하듯 칼리안을 떠받드는 모습을 보니 한 가지는 알겠다. 저 놈들은, 적어도 나비아는, 칼리안에게 다른 꿍꿍이를 둘 놈이 아니다.

그것만은 분명히 알겠다. 굳이 참여한 이 재밌는 연극으로 성과를 얻기는 얻었다.

그나저나.

"그나저나. 어찌할까······."

그 완두콩은 고작 그런 이유로 죽을 생각이 이제 없는데. 그러니 지금 중요한 건 이 일의 책임을 누가 지는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대체 어떤 놈이 왕족을 납치해갔느냐는 사실인데.

무슨 말을 해야 저 충직한 영지 관리인이 이 일을 무마할 방책이 아니라 범인이 누구인지를 떠올리기 위한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되려나.

시들지 말라던 칼리안의 말 하나는 참 잘 들은 플란츠가 이런 고민을 하며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구나. 백작."

어느새 열려있던 문 너머에서 이런 말이 들려온 까닭이다.

갑작스런 피어와 살기를 느낀 마법사에게 이끌려 다른 방으로 피신하던 중, 같은 것을 느낀 뒤 플란츠의 방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서던 키리에 덕에 방 안의 대화를 함께 듣게 된 사람.

란델이었다.

조용한 소리를 내며 걸어온 란델이 플란츠와 나비아의 사이에 섰다.

"허나 네 고민은 무용하다."

칼리안이 누명을 쓰지 않을 방법에 대한 고민이 쓸데없다 말했다. 그런 란델이 무엇을 할지 알 것 같아서, 플란츠가 팔찌를 차고 있던 팔을 뒤로 돌렸다.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확인은 끝난 것 아니더냐."

"아직 원하던 만큼을 모두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자의 입만 막아두고 다시 이어나가면 되겠구나."

"타인을 그렇게 잘 믿는 분이셨습니까."

"단지 네 미래를 신뢰하지 않았을 뿐이지."

여지없는 말싸움이 이어진다.

말리든 화를 내든 누구 하나의 편을 들든, 어떻게든 중재를 해 줄 막냇동생이 없었으니 별 수 없는 일이다.

"제 핏줄을, 이라고 말씀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엇이든 상관있겠느냐."

나비아가 당황하고 에우리아가 구경하고 키리에가 한숨을 쉬는 가운데 갑작스레 시작된 둘의 다툼이 또 금세 소강을 맞았다.

"상관이 없겠습니까."

"중요치 않게 되었으니."

"······ 생각을 고치는 법을 아시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누군들 다르겠느냐."

이렇게.

물론 이것이 싸움의 맺음임을, 그나마 이 정도로도 굉장히 발전한 모습임을, 칼리안이 아닌 이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무튼 오늘 내내 '정말로 실리케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플란츠가 어떤 모습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칼리안 덕에 지금의 플란츠에게 실리케를 덧씌울 생각을 조금쯤 버린 란델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허리 뒤로 돌려 두었던 플란츠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잡아채듯 풀어냈다.

칼리안의 외견이 서서히 변해갔다.

나비아의 얼굴이 급변했다.

* * *

- 쿠우웅.

다시 한 번 울림이 든다.

그것이 마치 지진같다고, 칼리안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마력이 에우리아의 것이 아니었다면 분명 또 한 번 다누를 의심했을 터였다. 다누로 인해 지진이 들었다고 말이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그 깊은 울림 소리를 듣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을 내가 알릴 것 같나. 아니면 침묵할 것 같나."

"휘트린에서 카이리스의 왕세자가 납치됐다는 사실에 대해 말씀이십니까."

"그래."

"왕자님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무슨 의도로 이렇게 왕자님을 모셔온 것인지. 저는 왕자님께서 그런 점을 더 궁금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칼리안이 맞다 말한 적 없는데."

"하지 않으셨으나 확신하고 있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을 하든지 말든지 네 좋을 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그 의문은 이미 풀어냈다.

분명 수면향 때문일 것이다. 일반인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정신을 차렸을 테니 그것을 보고 알았으리라.

"수면향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이르게 정신을 차리시기에 의심을 했습니다."

칼리안이 생각한대로 프레이르가 이런 말을 했다.

칼리안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밖에서 들려오던 울림이 조금 더 커졌으나 그것에도 계속하여 신경을 두지 않았다.

"그런 능력이 있는 마법 물품을 얼마 전에 한 번 보았습니다. 때문에 의심을 하다가······ 상대의 무장은 신경쓰지 않고, 이곳 어디에 날붙이가 있는지에도 관심이 없고, 굳이 한 가지 찾으셨던 것은 구두 뿐이기에. 그런 모습을 보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왕세자 저하와 달리 칼리안 왕자님은 날붙이가 필요치 않은,"

"내 질문은 그게 아니었는데."

"칼리안 왕자님의 행보를 지켜보기만 해야 할지 아니면 오늘을 기회로 삼아 칼리안 왕자님께 기회를 드릴지. 이곳에 머무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특히나 오늘 저녁에 보여주신 모습에 많은 이들이 놀랐습니다. 개중에는 실리케를 직접 보았던 이들도 있고 아닌 이들도 있습니다만 모두가 한결같이 실리케를 떠올렸습니다."

여전히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 쿠웅, 쿵!

통신 마법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 곳.

아마도 방어막을 마련해 둔 듯했다. 그것을 뚫기 위함인지 조금씩 커져가는 마력 충돌음이 귀를 울린다.

"아무리 이곳이 휘트린이라지만 왕자님께서는 부상을 입었다 하셨으니 말입니다. 왕자님의 부상이 중하다 알린다면······ 휘트린을 찾아온 저하께 변고가 생긴다 하더라도 왕자님께서 연루되어 피해를 입지는 않으시리라고. 성격 급한 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비아가 플란츠에게 했던 말과 같은 이야기를 프레이르가 칼리안에게 하고 있었다. 이곳의 일부 귀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왕세자가 사라진 것을 안 나비아가 곧바로 '칼리안이 중상이었다 알리면 연루되지 않으리라'는 말을 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 칼리안은 그런 사실까지는 몰랐지만 실상은 그러했다.

"다만 그것은 저나 헤이젤 백작의 뜻이 아닙니다. 때문에 백작은 내일 날이 밝는대로 그들을 불러 설득하고자 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오늘 밤이 고비였습니다. 칼리안 왕자님께는 축복의 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들은 날이 더 지나갈수록 칼리안 왕자님께 불리한 상황이 된다 여기리라 생각했습니다."

프레이르가 말한 성격 급한 이들. 그들은 이곳에서 플란츠가 사망했을 때 칼리안이 빠져나갈 구석은 '당시 칼리안이 중상이었다'는 정황 뿐이리라는 결론을 지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면 칼리안은 그만큼 회복이 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왕실에서는 상태가 호전된 칼리안과 플란츠의 암살을 연관짓게 될 터였다. 그러니 그들은 칼리안이 회복되기 전에 서둘러 일을 도모하려 할 것이라고, 그것이 프레이르의 예상이었다.

"때문에 보다 먼저 저하를 모셔온 겁니다. 모순되지만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을 '내'가 믿으리라 여겼나."

칼리안이 질문했다.

프레이르가 웃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손가락 끝이 긴 호선을 그렸다. 어머니의 혈육을 향한 살기가 짙게 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남작의 말을 믿는다면 보호가 될 테고. 안 믿는다면 성격 급한 놈들의 계획에 따르면 될 테고."

"네. 맞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다.

이렇게라도 강제로 데려와 상황을 설명했을 때 플란츠가 믿어주고 이 일을 묵과하겠노라 한다면 다음 날 곱게 돌려놓으면 된다. 만약 믿지 않는다면 애석하지만 별 수 없이 플란츠의 목숨을 취하고 그 성격 급한 귀족들이 계획한대로 일을 진행하면 된다.

"재밌게 됐군. 이렇게 납치된 형을,"

- ······ 쿠구궁!

이제는 아예 벽 전체가 진동을 했다.

그 벽 너머를 향해 손가락을 뻗어보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우님께서 저렇게나 걱정하시는 것을 다들 보았을 테니."

- 우우웅!

뼈가 불거진 손가락 끝에 바람이 맺힌다.

그 바람이 둥글게 뭉쳐들었다. 형체 없는 마력이 둥글게 모여들어 작게 휘몰아쳤다.

극도로 응축되어 투명한 구슬처럼 보이는 바람의 힘 속에 오러의 날을 담았다. 그것은 다섯 서클을 놀려 만들게 된 칼리안의 두 번째 마법이었다.

폭풍을 마주한 핏빛 바다가 담긴 스노우볼.

처음 만들어 본 주먹만한 구체가 꼭 그렇게 보인다. 홀릴 듯 예쁘기까지 한 모습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당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스파니안의 마차가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강력한 듯한 보호막을 그제야 바라봤다. 보호막을 두드리는 물과 전기의 힘이 전해져 오는 곳을 가늠했다.

그 뒤 손가락을 튕기듯 움직였다.

- 쌔애애액!

칼날도 화살도 아닌 구체에서 공기를 찢는 파열음이 들린다. 그리고 잠시 후,

- 파지직!

- 콰아아앙!

밖에서 전해지던 에우리아의 마력에 안에서 뻗어나간 칼리안의 힘이 더해졌다. 안팎에서 맞부딪힌 마력을 더는 버티지 못한 방어막이 크게 요동쳤다.

- ······ 쩌적!

균열이 생긴다.

틈이 벌어지고 문을 가로막던 막이 사라진다.

- 벌컥!

보호막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칼리안이 있던 곳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저벅저벅.

어느새 멋대로 다시 파릇파릇해진 모습의 왕세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지금의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형을 향해 높낮이 없는 인사를 건넨 칼리안이 눈을 돌렸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의미임을 알아들은 에우리아가 슬쩍 웃었다.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찰칵.

이제는 굳이 하고 있을 이유가 없어진 팔찌를 천천히 풀어냈다.

사르륵, 하고.

찬 느낌이 드는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툭 불거진 뼈마디 대신 유려한 선을 지닌 손가락이 눈에 보인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눈높이가 아주 조금 내려가는 것도 느껴진다.

제 오러만큼이나 붉은 눈으로 되돌아온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쉬이 듣기 어려울 미성이 프레이르를 향했다.

"남은 이야기는 내일 나누겠습니다."

칼리안의 얼굴에서 누군가를 떠올렸을 프레이르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의 행동을 이해해주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물을 것이 더 많아 결정도 미루게 된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형님 구두 작으시죠."

플란츠는 칼리안의 신발을 신고 있다가 다시 되돌아갔고 칼리안은 애초부터 본의 아니게 큰 구두를 얻어 신은 채였다. 덕분에 본래 모습이 된 칼리안에게는 너무 큰 갈색 구두와 플란츠에게 다소 작은 검은 구두가 되어 버렸다.

칼리안의 말을 알아들은 플란츠가 제가 신고 있던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 칼리안과 서로 바꿔 신었다.

툭툭, 하고.

되찾은 검은 구두가 마음에 든다는 듯 바닥에 대고 몇 번을 두드려 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식사 하셨습니까."

"······ 아직."

"잘 됐네요. 같이 해요, 그럼."

이왕이면 탁 트인 응접실에서.

칼리안과 플란츠가 함께 있는 모습을, 전부 다 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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