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장. 숙이거라(5)
휘트린은 참 이상한 곳이다.
여러모로 말을 안 듣는 놈들 투성이다.
무려 그 옥수수수염이 인사 좀 제대로 하라 했음에도 안 들어 처먹는 놈들과 저녁 식사를 했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상한 요구를 하시는군요, 저하."
미안하면 고개부터 숙이라 말했더니 이런 대꾸를 한다. 아예 대놓고 말을 안 듣겠다 한 것보다 더한 배짱이다. 그러니 휘트린은 참 이상한 곳이 맞다. 돈벌이 잘 되는 곳이라 다들 배가 불러 그런가.
······ 좋겠다. 배불러서.
뭐, 어쨌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 하는 놈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그리고 긴 다리 한 쪽을 느긋하게 움직여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렸다. 다리를 꼬았다는 소리다. 평생동안 익숙해질 일 없을 그 자세가 어색해보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 뒤에는 완두콩이 파란 머리 미친 따까리를 대할 때 보이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나른한 표정과 눈으로 놈을 내려다봤다.
"이상한 요구로 들리나."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저는 인간이,"
"나르잔도 제 잘못을 사과할 줄은 알던데."
물론 엘프들의 대장로 나르잔이 고개를 숙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진솔한 사과를 전했으니까.
앞에 앉혀 둔 이가 인간들이 다스리는 한 나라의 왕세자이니 예를 갖추라 한 것이 아니라, 네 놈이 인간이든 아니든 입만 놀려 죄송하다 하지 말고 사과의 뜻부터 제대로 보이라는 말이었음을 그제야 이해한 모양이다. 자신을 제대로 소개하려던 입을 살짝 다무는 것이 보인다.
세상만사 무엇이든 전부 내 발 아래 있다 여기는 듯하던 칼리안이 한쪽 입꼬리를 천천히 말아올렸다. 그리고 한껏 낮은 목소리를 냈다.
"사과."
플란츠의 모습을 한 칼리안이 프레이야의 모습을 참 많이 닮은 엘프에게 그렇게 말했다.
"프레이르."
덧붙여,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칼리안의 연두색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놈, 아니 그 엘프. 아니. 프레이르라 이름 불린 이가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을 향해 짧은 손짓을 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여있던 이들이 몸을 움직였다. 그것이 혹시라도 공격을 위한 움직임일까 의심한 칼리안이 오러를 준비하고 있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두 다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자리를 비워 준 것이다.
서재인지 응접실인지 집무실인지 모를, 적당히 밝고 적당히 평온한 공간에 둘만 남은 것을 확인한 프레이르가 말을 꺼냈다.
"제가 동생과 많이 닮기는 했습니다만."
프레이야의 동생이라 하더니.
그것이 아니라 오빠였나.
- 톡, 톡······ 톡.
그 버릇만은 굳이 감출 필요 없다는 듯 팔걸이를 두드리던 칼리안의 손 끝이 아주 잠시 멈췄다 다시 움직였다.
하기사.
프레이야 또래의 시오나가 아르센과 비슷한 나이의 외양을 가졌으니 저 자가 동생이라 알려진 것도 이해가 된다.
프레이야가 엘프인 것을 사람들은 몰랐지 않나. '돌연변이 엘프' 프레이야는 인간과 똑같은 속도로 성장했지만 그 형제까지 그렇지는 않았을 테니까. 오빠였다 하더라도 분명 훨씬 더 어려보였을 터였다.
"제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랬다면 먼저 소개를 했어야 되겠지. 사과한 다음에."
히나가 그러한 것처럼 끝을 잘랐는지 귀가 뾰족하지는 않다. 칼리안은 그런 프레이르의 귀 언저리를 스치듯 보며 대꾸했다. 앞에 선 놈이 누구인지 확인했음에도 태도를 바꿀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듯이.
프레이르의 얼굴에 보기 좋은 미소가 다시 든다.
그와 비슷한, 정말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인 칼리안이 입술을 움직였다.
"세 번. 말했는데."
베른의 친모 디에나도, 친아들과 다름없이 베른을 기른 루이즈도, 베른과 체이스 외에는 가족이 없었다. 데블란이 다 죽였다. 그리고 베른은 데블란의 다른 혈육도 본 적 없었다. 마찬가지 이유다. 데블란이 다 죽였다.
그러니 지금 앞에 선 저 사람. 칼리안 만큼이나 프레이야를 많이 닮은 사람. 말로만 들었던 어머니의 형제를 마주한 것은 칼리안에게 있어 완전히 낯선 일이다. 죽음 이후 다시 눈을 뜬 뒤에 르메인과 첫 독대를 했던 그날만큼 낯설다.
그러나 그 낯섦을 반가움으로 승화시키기에는 상황이 참 애석하다. 왕족을 멋대로 납치한 혈육에게 '반갑습니다, 삼촌.' 해 가며 변장도 풀고 사실 내가 당신 조카이니 이제부터 툭 터놓고 혈육의 정이나 나눠보자 할 수도 없지 않나.
자신의 혈육에 대한 엘프들의 인식이 슬레이만과 같을지 에반과 같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예를 보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받겠다 하시니, 그렇다면."
속내 모를 프레이르가 이런 말로 칼리안의 생각을 끊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한 방법으로 모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휘트린의 영지 관리인 나비아 헤이젤 백작의 남편, 남작 피어스 헤이젤입니다."
사과를 했다.
- 톡, 톡, 톡.
프레이야의 오빠라는 위치와 칼리안이 이미 언급했던 본명은 가린 채 조금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왕비의 오빠가 아니라 백작의 남편으로 살고 있다는 의미일 터였다. 정체를 숨기고 사는 것인지 아니면 숨기고 싶어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니 그것은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아야 할······.
"······ 칼리안 왕자님."
텐데.
- 톡.
- 토독. 톡.
눈앞에 아른거리는, 여전히 희멀겋게 파릇파릇한 머리카락. 그 너머로 보이는 프레이르의 얼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해오는 암갈색 눈을 본 칼리안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스윽.
칼리안이 의자에 기대고 있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거기까지.
꼰 다리를 내려놓지도, 변장을 풀지도, '칼리안'이라 불린 것에 대한 어떤 긍정이나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프레이르를 마주봤다.
묵직한 숨을 한층 더 짓누를 듯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건. 헤이젤 남작."
그렇게나 여전한 플란츠의 목소리로 이렇게.
대화를 나누어 볼 용의가 있음에 대해서만 짧게 알렸다.
칼리안의 정체를 알면서도 스스로를 프레이야와 분리해 소개하는 이를 '가족'으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 * *
에일라가 바빴다.
라시드가 이곳에 무슨 함정을 만들지, 하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다른 의심점은 없는지, 이런 일들에 대해 조용히 확인하려는 중이었다. 그러다 잘 익은 망고 알맹이 색 머리카락의 외성 수비대 대장이 어딘가 석연치 않음을 포착했다. 그래서 그의 뒤를 캐는 쪽으로 조사 방향을 정했다.
그 후 칼리안은 석찬에 들었다. 그런데 그 사이 멋대로 성을 나갔다 온 아르센이 에일라가 무엇을 조사하는 중인지를 알게 됐다.
아르센은 그 길로 플란츠를 찾아갔다. 그러더니 성 밖으로 다시 나가 에일라와 별개로 조사를 진행하겠다 말했다.
그 말을 다 들은 플란츠가 새빨간 눈으로 새파란 눈을 물끄러미 보다 답했다.
'내가 잘 따라하고 있나 보네.'
이 짧은 말이 아르센에게는 조금 길게 들렸다.
어차피 내 허락 없어도 나갈 거면서 왜 나한테 허락을 구하느냐.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너 지금 나랑 내 아우님을 착각한 것 같다. 내가 내 아우님 흉내를 그 정도로 잘 냈느냐. 라고.
동종업자의 말을 해석하려 노력한지도 오랜 시간이 흐른 까닭에 완두콩이 꺼내놓는 이 정도의 반응 쯤이야 동시에 번역되어 들리는 정도에 이르른 것이다.
플란츠의 말을 잘 해석한 아르센이 대답했다.
'······ 제가 우리 왕자님이 아니신 셋째 왕자님과 우리 왕자님을 구분하지 못해서 우리 왕자님과 조금도 안 닮은 셋째 왕자님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왕자님 흉내 참 못 내시는 왕세자와 우리 왕자님을 헷갈린 것이 아니라고.
'그럼. 왜.'
'왕자님께 말씀드리면, 몸이라도 성하게 남겨 곱게 죽고 싶으면 얌전히 시키는대로 우리 왕자님이 아니신 셋째 왕자님 호위나 하라고 말씀하실 것이 뻔해서 그럽니다.'
칼리안이 시킨 일은 무조건 다 하는 충직한 따까리. 칼리안이 시키는 것들 중에 마음에 드는 일을 골라서 하는 새 따까리. 그 둘과 확연한 차별점을 두겠다는 듯, 칼리안에게는 시키는대로 하겠다 대답한 뒤에 명령을 어길 궁리나 하고 있는 미친 따까리.
그 미친 따까리의 주장이 이어졌다.
'브리지트 경 혼자서 조사하기는 어렵습니다. 발칸 놈들은 군인이라 조사 중에 잘못 발각되면 안 됩니다. 세이렌 협회장은 정보 조직 보스로 온 것이 아니라 마나실 군단장님 부탁대로 저하와 왕자님들을 호위하기 위해 온 길이라서 밖에 나가 정보를 조사하는 일은 못 합니다. 그러니 군인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깎일 급여가 적고 남들 눈에 발각될 가능성도 희박한 제가 나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굳이.'
'하피의 공격 때문에 이미 하루 지체했습니다. 굳이 제가 나서서라도 확인할 수 있는 건 빠르게 확인하는 편이 낫습니다. 게다가 왕자님께서 세운 전략때문에 저하께서 부상까지 입게 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왕자님께서는 이제 저하와 첫째 왕자님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두실 겁니다.'
'······ 그러시겠지.'
'네. 차라리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누구 한 명을 더 움직여 바깥 상황을 살피려 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알아서 왕자님 말씀 안 듣고 마음대로 나가야 합니다.'
칼리안의 말을 안 듣고 기어코 밖에 나가서 정보를 좀 모아보겠다고. 휘트린에 있는 이들의 꿍꿍이든 하피가 나타난 정황이든 라시드가 칼리안을 함정에 밀어넣으려 준비하고 있는 수작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든. 플란츠와 란델의 호위 임무에서 잠깐 벗어나 뭐든 빨리 확인하겠다고.
'알았어. 가.'
그런 말에 대해 플란츠가 허락을 해줬다.
어찌됐건 플란츠도 '칼리안'의 모습으로 분한 상태니까. 아르센이 칼리안의 말을 완전히 어긴 것은 아니지 않겠나. 그러니 이 일이 칼리안에게 발각되더라도 파란 머리 저 미친 마법사가 내 동생 손에 세뉴강을 건너갈 일은 없겠지.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면서.
- 키리에랑 헤르츠 경 곁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란델 형님 옆에서 세이렌 경 안 떨어지게 하시고요.
그래서 칼리안은 몰랐다.
아르센이 칼리안 몰래 자리를 비운 것도, 란델을 지키던 에우리아가 란델보다 목숨줄이 더 간당간당한 플란츠의 방에 와 있게 된 것도, 덕분에 애먼 발칸 마법사 한 놈이 에우리아를 대신해 란델의 방에 가서 죽음보다 더한 침묵 속에 얌전히 몸을 숨기고 있게 된 것도.
그런 복잡한 사정을 거쳐 플란츠의 곁을 지키게 되었던 에우리아가 누군가 겁도 없이 칼리안을 납치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앨런의 노한 얼굴을 떠올리게 된 것도, 그 덕분에 이중 속성을 정말로 성공하게 된 날 다음으로 당황하게 된 것도 몰랐다.
- 달칵.
더불어 영지 관리인 나비아는.
"마법······!"
"어. 마법사 맞고 마법사 협회장인 것도 맞고 마법 쓰려고 온 것도 맞아."
이중 속성을 5서클까지 마스터한 괴물같은 마법사가, 당황한 마음과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할 일이 생겨 즐거운 마음을 절반씩 가진 채 자신의 침실에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일단 사일런트를 쳐 두기는 했는데 '조용히 산 채로' 데려와 달라 했던 플란츠의 부탁이 '사지육신 멀쩡히 팔팔한 상태로' 데려와 달라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조용히 숨만 쉴 만큼 상한 상태로' 데려와 달라는 것이었는지를 잠깐 고민하던 에우리아가 마력을 운용했다.
- 풀썩!
그리고 일단 재웠다.
아무튼 마법사기는 했지만 그래도 에우리아는 꽤 이성적인 축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 뭉클······!
이런 사정으로 침실에 들던 나비아가 생각보다 빠르게 단잠에 빠진 직후. 갑작스런 짙은 안개가 휘트린의 영주성을 감쌌다.
그 덕에 성의 경비병들은 물의 장막 위에 곱게 드러누운 영지 관리인의 몸이 자신의 침실 창문 밖으로 내보내진 것을, 그대로 공중 위에 잠시 떠오른 채 두 층 위의 지붕에 올려진 것을, 곧바로 지붕 위로 텔레포트한 보라색 머리 마법사가 영지 관리인을 꽁꽁 싸든 채 반대편 끝을 향해 서둘러 가는 것을, 그 후 다시 물의 장막 위에 올려진 채 귀빈실의 테라스에 올려진 것을,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보지 못했다.
계곡 반대편이나 아래까지 사람을 나를 수는 없지만 두 층 정도의 짧은 거리는 충분히 가능한 에우리아였으니까.
갑작스레 생겨났던 안개는 아주 서서히 자연스럽게 걷혀들었다. 안 그래도 밤안개가 많은 휘트린에서는 종종 일어나던 일이라 경비병들은 그 안개를 의심하지도 않았다.
- 털썩!
그렇게 칼리안이 모르게 진행된 일.
칼리안과 연락되지 않아 정말 안타깝게도 이번 한 번만 더 어쩔 수 없이 플란츠 마음대로 진행된 일.
그 일들의 결과로 붙들려 온 영지 관리인 나비아가 곱게 잠든 채 플란츠의 앞에 놓였다.
"여기 있습니다. 칼리안 왕자님."
'누구 한 명을 조용히 산 채로 잡아오는' 정말 어려운 일을 딱 3분 만에 수행한 에우리아가 씩 웃었다.
부탁 잘 들어줬으니까 나도 모르는 새에 칼리안이 납치됐다는 이야기는 앨런에게 비밀로 해 주면 안 되겠느냐고. 그런 의미를 가득 담은 채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플란츠가 나비아를 쳐다봤다.
그 뒤 나비아를 깨우기 위해 조용히 움직였다.
그런 플란츠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우리아가 표정을 굳혔다. 얼굴에 가득하던 웃음기도 일순 사라진 채였다.
"······ 저하."
에우리아가 나지막이 플란츠를 불렀다.
칼리안의 외양을 한 플란츠를 '저하'라 부른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서.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를 건드려 깨워 본 경험이라고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척추를 가졌으면 저런 자세로 잘 수 있는지가 의심되는 루시와 안네를 잠시 깨워낸 뒤 나름대로 편해보인다 생각되는 자세로 바꿔 눕도록 도와준 일이 전부였던 왕세자. 무려 그 에우리아에게 사람 하나를 납치해 달라는 부탁을 한 것에 더해 잠든 사람을 도로 깨워달라는 부탁까지 할 수는 없던 왕세자.
검은 머리와 붉은 눈 속에 들어있는, 실리케를 빼닮았다는 그 왕세자가.
- ······ 콕.
직접 허리를 숙이고 손가락을 뻗더니 바닥에 누운 나비아의 어깨를 콕콕 찔러 깨우려 드는 꼴을 보게 됐으니까.
* * *
수면향에 취한 동안 팔찌가 풀렸던 것은 아니다.
칼리안의 진짜 모습을 본 뒤 팔찌를 다시 채워뒀다 하더라도, 사용자가 다시 변장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그저 보기 좋은 장신구일 뿐이니까.
그러니 프레이르는 그냥 알았다는 소리다. 왕세자 연기를 아주 잘 수행중이던 칼리안의 진짜 얼굴을.
그것을 혼자 알고 있는지, 아니면 휘트린의 모두와 모든 귀족들이 이미 알고 있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저 외에는 아는 이가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발설할 생각 없습니다."
그런 것을 궁금해하리라 여겼다는 듯, 프레이르가 먼저 답을 전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실소했다.
걱정 안 했으니까.
데블란처럼 되고 싶지 않아 저지르지 않을 뿐, 칼리안은 그보다 더한 잘못을 저질러도 '알아서 정당성이 생기는' 왕족이다. 그러니 카이리스에서 사용이 금지된 세크리티아의 마법 물품을 사용한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프레이르는 왕족을 납치한 범인이다. 지금 당장 휘트린에 있는 놈들을 전부 다 죽여버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고작 외모를 바꾼 것을 들킨 일 정도야. 무엇을 걱정할까.
"같은 말 또 하는 취미 없는데. 나는."
그러니 용건이나 말하라고.
"로드리 사이아스. 왕자님의 수하가 조사 중인 외성 경비대 대장입니다. 그 자를 쫓는다 하여도 왕자님께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칼리안이 대답없이 프레이르를 쳐다봤다.
그러자 프레이르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휘트린은 브리센과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왕자님께서 따로이 조사 중인 그 조직과도 연관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면."
"왕자님을 돕는 겁니다. 진심으로."
그렇다면 라시드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수면향은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굳이 믿어달라는 말을 할 것이면 왜 사람을 납치까지 해왔는지, 제온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휘트린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물을 것이 산더미인 칼리안이 의문을 감췄다.
프레이르의 말에 마음이 동한 것처럼 보일 수는 없던 까닭이다.
"어째서."
왜 나를 돕겠다 하는지.
그것부터 물었다.
"이곳의 귀족들이 플란츠 왕세자 저하를 경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브리센과 저하를 구분할 줄 아는 이들은 이곳에 없습니다. 휘트린의 모두가 제 누이를 알고, 기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자님을 돕고자 하며 브리센을 배척합니다."
"왕비 프레이야 역시 이곳에 발을 들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안다는 것인지."
"이곳은, 왕자님."
잠시 말을 멈췄던 프레이르가 웃었다.
"카이리스의 브리지트 숲입니다."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한동안 팔걸이를 두드리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전부 다, 엘프인가."
"엘프와 하프엘프입니다."
"어떻게 가능하지."
이들이 엘프임은 알려지지 않았다.
프레이야와 그의 오빠 프레이르. 둘 정도야 어떻게든 신분을 숨겼을 수 있다. 돈만 있다면 어려울 것 없다. 그러나 오늘 석찬에 들었던 이들 전부가 엘프나 하프엘프라는 말은 믿기 어려웠다. 그러니 대체 어떻게.
그에 대해 프레이르가 무어라 답을 하려 했을 때.
- ······ 쿠웅.
칼리안이 있던 곳의 바닥이 울렸다.
그와 함께 익숙한 마력의 기운이 밀려들었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아무래도······. 손님이 오셨나 본데."
내가 얌전히 있으라 했다 해서.
- 쿠우웅! 쿵!
나랑 연락이 끊겼는데도 얌전히 있을 완두콩이 아니거든.
내가 그렇게 안 키웠거든.
의도한 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