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48화 (449/527)

제79장. 숙이거라(4)

있잖아, 드미레아.

내가 변명할 게 있어.

혹시 칼 찾을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또 들킨 건 아니야. 네가 말한대로 나도 정말 진지하게 큰 맘 먹고 꼼꼼하게 따져봤는데 여기서 들킬 곳은 더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화내지 말고 내 말 잠깐만 들어봐.

오늘 아침, 아니지.

밤이 지났으니 이제 어제구나. 그러니까 어제 아침에 너랑 히나를 배웅해주고 나서 휘트린에 왔어. 오는 동안에 다른 일은 더 없었고 별 탈 없이 잘 도착했어. 그리고 잠깐 쉬면서 시간을 좀 보내다 귀족들이랑 석찬을 가졌어.

혹시 걱정할까봐 또 미리 말하는데 석찬에서도 특별한 일 안 벌이고 착하게 조용히 밥 잘 먹고 왔어.

진짜야.

란델 형님께서 석찬 분위기를 꽤 마음에 들어하셨을 정도였거든. 그러니까 믿어도 돼. 사실 그 귀족들이 좀 석연찮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나 정말로 성질 안 부리고 잘 지내고 있어.

아무튼 그렇게 석찬을 마치고 방에 돌아왔어. 그 뒤에는 뽀득뽀득 열심히 씻고 생각도 좀 정리하고 바람 쐬고 별도 보면서 있었지. 그랬더니 금방 잘 시간이 되더라. 그래서 누웠지. 레릭이 들어주는 시중이 좀 어색하긴 했지만 얌전히 눈 감고 자려고 했어.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

시간은 한밤인데 달은 가늘었고.

그래서 어두웠고, 나는.

- ······ 꼬르륵.

그만 배가 고파지고 말았어.

왜냐면, 드미레아.

사실 지금 내가 완두콩 노릇을 하고 있거든.

고양이 노릇을 하는 데만 해도 신경써야 될 일이 한 둘이 아닌데 아예 완두콩 노릇을 하려니 어땠겠어. 희멀건한 얼굴에 희멀건한 머리통에 완두콩알 같은 눈을 하고 완두콩처럼 동글동글 스륵스륵 지내려고 애를 좀 썼지. 그러다보니 별 수 없이 밥도 깨작깨작 먹었어.

영지 관리인이 석찬 메뉴에 신경을 쓸 줄은 알았어도 하필 타조에 새끼 돼지를 올릴 줄은 몰랐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육포나 좀 챙겨둘 걸.

여하간 그랬어.

덕분에 배가 많이 고파졌지. 그러다보니 잠이 안 왔어.

물론 내가 원래 집 밖에 나오면 잠을 안 자기는 해. 그런데 그건 안 자는 거지 못 자는 건 아니었거든. 그런데 배가 고팠잖아.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잖아. 그럼 내가 어떻게 됐겠어.

서러워졌지.

그냥 서러운 것도 아니고 되게 서러워졌는데 눈은 말똥말똥 잠은 안 오고 그렇다 해서 나가서 산책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두 손으로 이불을 꼭 붙들고 눈도 꼭 감고 시간 가는 소리만 세고 있었어. 그랬는데.

- 사락······.

침대 커튼 새로 갑자기 잔바람이 불어드는 거야.

자.

생각해봐, 드미레아.

밤은 늦었고 시간은 안 가고 할 일은 없고 나는 배가 고팠잖아. 엄청 많이 고팠잖아. 그런데 바람이 불잖아. 누군지 몰라도 기세좋게 내 방에 찾아왔잖아. 그럼 내가 어땠겠어.

신났지.

많이.

그래서 나는. 너 이 자식 잘 됐다, 안 그래도 좀 허했던 속도 달랠 겸 한바탕 싸움이나 해야겠다. 그래도 내가 형님이 아닌 게 아직 알려지면 안 되니까 오러는 쓰지 말고 시나스타만 써야지. 그런 다짐을 하면서 얌전히 눈을 떴어.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문제가 좀 있더라고.

사실 내 형님이 예민하기로 따지면 레이븐이랑 겨뤄도 지지 않을 분이시라서, 당연히 그 정도 바람에도 잘 깨는 사람인 건 내가 겪어봐서 알아.

근데 그건 나만 알잖아.

내 형님이 어디 나가서 성질머리로는 도통 질 리가 없고 입 험한 것으로는 백 번에 아흔아홉 번은 이기고 올 상인데다 술병 잡는 법만큼은 아니지만 검 잡는 법을 어느 정도는 익혀뒀을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카이리스 사람이 아니지. 그런데 자다 말고 침실에 바람 든다며 일어날 줄 아는 정말 의외의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는 건 대부분 모르거든.

나나 되니까 알지 그걸 누가 알겠어.

그러니까 지금 방에 들어온 놈도 몰랐을 것 아냐.

그런 놈을 완두콩이 한 방에 죽여버리면 사람들이 완두콩을 더 경계할 것 아냐. 완두콩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나였던 걸 들켜버리면 사람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게 되어 버린 완두콩을 엄청나게 경계할 것 아냐.

그러니 별 수 있나.

- ······ 스륵.

일단 화 안 내고 조용히 눈만 떴어.

투명화 마법을 할 줄 알면 그것을 써봤을 텐데 아직 내가 다섯 서클 짜리 마법 중에 할 줄 아는 게 딱 하나밖에 없어서 못 했어. 그래서 그냥 가만히 누운 채로 기다렸어.

곧바로 침실 커튼이 열리더라고.

그런데 이상한 게 또 있었어.

놈한테 살기가 안 느껴지는거야.

- 형님 혹시 주무십니까.

- 왜.

- 조용히, 키리에를 부르세요.

남의 방에 칼 가지고 들어온 놈한테서 살기가 안 느껴지는 건 보통 두 가지지. 죽이려고 들어온 게 아니라 잠깐 얘기 좀 하려고 찾아왔거나.

- 제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들어오지 말라고 얘기해주세요.

- ······ 무슨 일인데.

- 아. 별 일은 아니고, 그냥.

잠시 대화하러 온 게 아니라면, 그냥.

- 납치될 것 같아서요.

그래.

잠깐 데려가려 온 거겠지.

- ······ 미쳤군.

- 또 새삼스러운 말씀을 하십니까.

- 말고.

- 아. 저 말고 저 데려가려는 놈 말씀이십니까.

- 그래.

- 저인 줄 알았으면 안 왔겠죠. 만만한 형님 데리러 온 거지.

- 반말.

동생 납치된다는 말이나 형님 만만하다는 말보다 위아래 따지는 게 먼저인 저 형님을 데려가려고. 그러려고 온 거겠지.

그럼 내가 어떻게 했겠어, 드미레아.

- 아무튼 얌전히 잡혀가 볼게요.

- 왜.

- 누군지 알아내야죠.

정신 잘 차리고 잡혀갈 준비를 했지.

거기까지는 괜찮았어.

그런데, 드미레아.

- 좋은 생각이 아니신데.

- 키리에랑 헤르츠 경 곁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란델 형님 옆에서 세이렌 경 안 떨어지게 하시고요.

라시드 브리센이 썼던 그 수면향 말야.

- 일단 소란하지 않게······ 해 뜨고 레릭이 제가 없는 걸 발견할 때까지는, 그냥······ 모르는 척.

그게 더 독해졌나 보더라고.

아니면 또 다른 수면향을 만들었거나.

뭐가됐든 놈들이 놀고 있지만은 않았는지.

- 아무튼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왔었는데 졸리더라고. 그것도 엄청 빠르게, 나도 모르게, 잠이 푹 들었어.

- 시들지만 마요······ 괜찮, 으니까.

- 칼리안.

그렇게 된거야, 드미레아. 사실 피할 수 있었는데 못 피한 게 아니라 안 피하고 그냥 잠든 셈인 거지. 당장 저 놈을 죽여버리면 완두콩이 곤란해질 것 같아서 얌전히 기다리다가. 그러다가 전보다 훨씬 독해진 수면향에 취해버려서.

살면서 두 번이나 납치당하는, 쓸모는 없고 방해만 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다 생각과 사정이 있어서.

그래서 그런 거야.

- ······ 칼리안.

불렀는데.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서.

더 세심해져야 되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으면서.

내가.

* * *

바람이 한 번 불어나갈 때마다 밀밭이 춤을 춘다.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그 광경이 암암히 보인다.

휘트린은 너른 곳이었다. 결코 마르지 않을 강이 흐르고 잦지만 사납지 않은 바람이 불었다. 그 어떤 지역보다 온화한 땅이었다.

물을 더 달라, 병과 벌레를 방지할 약을 달라, 땅에 가득한 물을 말려달라, 그런 요구를 한 적 없는 땅. 바닥이 메마르지도, 병충해를 입지도, 수해에 휩쓸려 밀이 다 썩어버리지도 않는 땅. 유난히 질 좋은 밀이 지치지도 않고 수확되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었던 그런 땅이었다.

'좀 더 있다 잘 건데.'

'차를 가져다 드릴까요?'

'괜찮아.'

'그럼 필요하실 때 다시 부르십시오.'

'됐어. 내가 알아서 해.'

그 휘트린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 전 얀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저하.'

'너. 호칭.'

'괜찮습니다. 귀빈실 안에서 하는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치해뒀다고 헤르츠 경이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왕세자 저하'의 방은 열심히 살필 테니 우리 왕자님은 계속 조심해야 되겠지만 여기에서 잠깐은 괜찮잖아요.'

'······ 알았어. 왜.'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구두를 신고 계시기에 방 안에서도 왕자님을 따라하려 신경을 쓰시는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아서요.'

'쓰고 있잖아.'

'우리 왕자님은 안 그래요. 신경을 쓰고 있다 하기에는 너무 다릅니다. 잘 웃으시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많이 다릅니다.'

'뭐가, 또.'

'왕자님은 먹고 싶은 음식, 마시고 싶은 차, 하고 싶은 일, 그날 입고 싶은 옷이나 필요한 장신구, 목욕할 때 났으면 하는 향기까지 하나하나, 제가 해드렸으면 하는 것들 전부 다 얘기해주십니다. 당연히 저도 알아서 챙겨드리고 왕자님께서도 알아서 할 수 있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것들이나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들은 꼭 저한테, 제가 귀찮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말해주세요.'

'······ 내가, 너한테.'

'왕자님 따라서 저하께서도 저에게 그렇게 해달라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저하께서 평소에 어떻게 하고 지내시는지가 눈에 보여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왕자님의 그런 면이 좋다고요. 왕자님만큼 잘나지도 못하고 레아나 헤르츠 경이나 두 베른 경만큼 특출난 것도 없지만 왕자님께 제가 필요없는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요. 왕자님은 제가 걱정하고 챙겨드릴 자리를 내주시니까요. 그런데 오늘 저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뭐.'

'레릭은 저처럼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체르밀 궁의 커다란 인공호수에는 달빛을 머금은 물이 일렁이고 있을 시간. 휘트린에서는 끝모를 밀밭에 달빛을 떠안은 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이 또 낯설고 생소하여서 처음 마주한 광경을 가만히 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런 플란츠의 머릿속에서, 마찬가지로 낯설었던 '아랫사람의 조언'이 계속 이어진다.

'저하께서 다치셨을 때. 레릭에게 침착하게 굴라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눈치를 봐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는데 걱정을 해도 괜찮은지, 그것부터 눈치를 보고 있어요.'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걱정했다 말도 못하고 주저하기에 걱정해도 괜찮다 허락해주니 그제야 울음을 보이던 레릭이 아니던가.

'레릭이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불안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얀의 말을 듣고 나니 알 것 같았다.

그게 단순히 눈치를 본 것이 아니라, 플란츠를 어려워한 것이 아니라, 불안해서였나.

하기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칼리안같지는 않을 테니까. 입 밖으로 안 내어놓는 속내를 다 읽어주는 사람이 또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때는 레릭에게 입에 맞는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해 볼까. 플란츠의 입맛에 맞춘 식사를 본 칼리안이야 불만을 가지겠지만, 그래도.

- 사락사락······.

달빛을 받은 새카만 머리가 바람에 흔들렸으나 뒤로 넘기지는 않았다. 가는 탓에 고정이 잘 안 되는 플란츠의 머리카락과 달리, 결이 하도 좋은 탓에 손짓만으로는 고정이 전혀 안 되는 머리카락임을 이제 잘 알게 된 까닭이다.

투정 한 번 부려본 적 없는 휘트린의 너른 밀밭을 다시 잠시 쳐다보던 플란츠가 몸을 돌렸다. 약간의 깨달음과 조금의 반성과 아주 많은 각오를 다지면서.

그렇게 방으로 되돌아온 뒤 침실로 걸어갔다.

거울 속의 붉은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자 했다.

- 형님 혹시 주무십니까.

그런데 그 때.

석찬 이후로는 내내 얌전하던 동생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 왜.

또 심심했는지.

잠이 안 오기라도 했는지.

그런 생각에 눈꼬리를 찌푸리려다 칼리안이 으레 그러하듯 미간을 구겨보려 노력하면서 대답을 했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주고 받았다.

조금씩 딱딱하게 굳어지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어느새 잊고 눈꼬리를 잔뜩 구긴 채로.

- 사락······.

다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선 플란츠가 거울을 쳐다봤다. 그 속에 든 동생 놈의 얼굴을 노려보듯 마주보듯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마법사."

빈 방.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라고는 거울 속의 동생 놈밖에 없던 곳. 그런 곳에서 마법사를 불렀다.

"여기 있습니다."

그러자 플란츠가 보고 있던 방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답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마법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속도가 아르센보다 빨랐다. 때문에 허공에 얼굴만 둥둥 떠 있는 몹쓸 광경이 보여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얀이 나간 뒤로 계속 방 안에 머물렀던 마법사.

에일라와 함께 나가 있는 아르센을 대신해 왕세자의 목숨을 지키고 서 있던 마법사.

"······ 아무래도."

"네."

"또, 납치되신 것 같은데. '참 연약하신 내 아우님 저하'께서."

"네······?"

보랏빛 머리의 에우리아가 답을 해왔다.

그것을 답이라 해도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당황한 것이 분명한 에우리아를 잠깐 마주보던 플란츠가 침대 기둥에 등을 기댔다. 어질어질, 놀라서인지 빈혈 때문인지 다시 빙빙 도는 시야를 진정시키다 눈을 떴다.

"혹시. 사람 잡아본 적 있나."

플란츠의 말에서 아주 잠시 상황을 가늠해 본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사람 안 잡아 본 날이 있는지 물으시는 게 낫습니다."

"······ 살려서."

"네. 몇 번 있습니다."

사람을 산 채로 잡은 적이 몇 번 있긴 했다.

대체로 아르센을 잡을 때 그랬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세심하게 부탁한대로 아직 안 시든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네."

"여기 영지 관리인 찾아서 데려와줄 수 있겠나."

"네. 알겠습니다."

"조용히 납치하면 될 것 같은데. 산 채로."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눈.

그 속에 진심 아닌 것이 조금도 섞여있질 않았다. 때문에 그 눈빛을 본 에우리아는 매우 즐거운 얼굴을 했다.

"5분만 계십시오, 칼리안 왕자님."

아무튼 에우리아도 마법사였으니까.

* * *

왕족 납치.

죽기 전에는 겪어본 적 없던 일.

- ······ 톡, 톡, 톡.

감히 어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왕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차라리 암살자를 보내면 보냈지 납치라니. 꿈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을 벌써 두 번이나 당했다.

처음에는 다 죽어가던 것을 아델리아가 옮겨놓은 일이니 납치가 아니었다 할 수도 있겠으나 이번은 달랐다. 심지어 칼리안은 플란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 심각한 문제다. 다른 왕족도 아니고 왕세자를 납치하다니. 카이리스를 공격한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 톡, 톡, 톡.

반지가 끼워져 있다. 팔찌도 그대로 뒀다.

에반의 서재에 있던 것처럼 마법 방해가 걸린 곳인지 외부로의 통신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언뜻 불에 비친 머리카락이 희멀건한 것으로 봐선 변장까지 풀리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확인한 이후, 자리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뜬 칼리안이 의자의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렸다. 그리고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적당한 어둠과 불빛이 있는 방은 생각처럼 아득한 장소가 아니다. 꽤 푹신한 의자에 앉아있었고 어디 하나 묶인 곳도 없었다. 어느새 수면제의 기운이 다 씻겼는지 정신도 말짱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온전한 납치라 보기에는 어렵다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짜증이 났다.

때문에 마주 앉아있던 놈을 가만히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순간 그를 가장 짜증나게 하고 있는 일을 해소할 방법을 요구했다.

"신발."

신발 내놓으라고.

자려다 말고 아주 푹 잠들어 끌려온 탓에 이번에는 아예 재킷에 베스트까지 없다. 셔츠와 바지 차림이다. 완두콩의 모습으로 변장해 있었으니 여기서 단추 서너 개만 더 풀면 칼리안이 처음 봤던 완두콩의 바로 그 모습이 될 터다. 그것도 물론 짜증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다 이해하고 넘길 수 있다.

그런데 맨발이라니.

그건 못 참겠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놈이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곁에 서 있던 이를 향해 무어라 말을 전했다. 그러자 오래지 않아 반짝반짝 질 좋은 갈색 구두가 칼리안의 발에 끼워졌다.

그렇게 일단 '왕세자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킨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일으킨 것이 분명한 놈을 다시 쳐다봤다.

"급히 모시느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언짢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하."

"정말 죄송하다면."

짙은 갈색의, 쌍커풀 없는 큰 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

그리고. 도무지 잊지 못할 선홍색의 머리카락.

"고개부터 숙이거라."

프레이야를 닮은 또 다른 이를 향해 칼리안이 답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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