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장. 숙이거라(3)
아우성같은 침묵.
굳이 말로 바꿔본다면 그리 표현해야 할 터였다. 온갖 악다구니와 놀라움이 뒤섞여 만들어진 침묵이라고.
국왕 르메인의 첫째 아들. 작은 왕관을 받게 되는 책봉식을 치르지도 않았으니 언제 고꾸라질지 모를 왕세자의 형. 상황이 변한다면 그 작은 왕관의 주인이 될 여지가 얼마든지 있는 1왕자.
'제대로 숙이거라.'
그런 란델이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이 자리를 찾아온 '플란츠'에게 제대로 예를 보이라고.
시시때때로 손을 잡았다 놓아가며 지내온 칼리안과 플란츠와 달리 이제껏 다른 형제의 편에 선 적 없다던 란델이 속내를 보인 것이다. 그렇게나 신중히 정황을 살피던 사람이니 지금 저 행동은 플란츠의 왕위 계승을 확신했다는 뜻이리라.
때문에 귀족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니, 다물었다 하기보다는 악물었다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있는 힘껏 맞물린 입에서 작은 바람 소리 하나조차 새어나오지 않았으니까.
곧 칼리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귀족들을 향해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한 것으로 할 일을 마쳤다는 얼굴을 한 란델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 아무래도."
칼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만찬장을 울린다.
침묵을 거두어들이려 하기보다는 그 침묵을 완전히 내리누르듯이. 자리에 모인 한 명 한 명의 숨을 손아귀에 넣고 틀어쥘 것처럼, 발 밑에 놓고 옭아맬 것처럼, 얼마든지 그리 할 것처럼.
빛이 들지 않았던 연두색 눈에 어느새 짙고 짙은 서슬을 가득 담고서 귀족들을 하나하나 겨누어 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에서까지 환영받지는 못하나 보군."
누구 하나를 겨냥해 꺼내진 것이 아닌 말.
그러니 이 자리의 모두를 향해 전해진 말.
그런 말에 대한 해명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해명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거부하는 것이었다.
왕궁이었다면, 카이리시스였다면, 하다못해 휘트린이 아닌 여느 다른 영지였다면 절대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왕세자의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광경은 펼쳐지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곳은 휘트린이다.
독차를 마심으로써 움츠림을 끝낸 칼리안이 브리센을 향해 뻗어낸 최초의 칼날이 바로 브리센 상단을 사들였던 일 아닌가. 아무리 칼리안이 머리를 잘 굴린다 하여도 휘트린 영지에서 꼬박꼬박 보내온 엄청난 돈이 없었다면 절대로 성취하지 못했을 일이지 않나.
칼리안이 상단의 수익을 기반으로 마법학교를 세우고, 기사들을 양성하고, 그렇게 얻어낸 마법사와 기사들의 힘을 제 세력 삼아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음을 휘트린의 모두가 안다.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이 지닌 존귀한 상징성과 앨런 마나실 한 명의 이름만으로는 얻지 못할 만큼의 세력을 키워낸 것에 휘트린의 공헌이 있음을 안다. 칼리안이 왕위에 오른다면 이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당연히 안다.
그러니 자존심을 부리는 것이다.
감히, 이 나라 왕세자의 앞에서.
"내가 아우님 없이 찾아왔거나, 함께 왔으나 내 아우님이 사경을 헤매는 중이라면. 그래도 나는 이런 취급을 받았을까······ 궁금해지는데."
허울 뿐인 왕세자위 정도는 언제 어디서든 얼마든지 거둬가 줄 수 있는 칼리안이 이 성에 함께 있다.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 하나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닌 상태로 말이다.
그러니 이들이 칼리안의 무력과 세력을 믿고 왕세자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인지. 만약 칼리안이 동행하지 않고 플란츠와 란델만 찾아왔거나, 혹 지금과 같은 상황이지만 칼리안이 위독한 상태라 해도 똑같은 모습을 보일 것인지.
그저 칼리안을 믿고 부려보는 배짱인지.
아니면 칼리안을 향한 충의의 발로인지.
그 자존심의 기저에 든 것이 궁금하다 말했다.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저하."
명백한 질문에도 대답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왕족에 대한 능멸이다. 그리고 왕세자는 자신을 경시한 귀족 한 둘의 목숨 쯤은 그 자리에서 끊어낼 권한이 있다.
다행한 일이다.
그마저 없었다면 영원히 답을 듣지 못했을 테니까.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모두가 황망한 까닭이니······."
"그래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 대신 에두르는 말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영지 관리인 나비아의 말을 툭 잘라먹었다. 그리고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은 채 나비아를 계속 쳐다봤다.
만약 속내 뿐 아니라 겉모습까지 칼리안이었다면 무어라 말을 더했겠으나 플란츠는 말이 짧았으니까. '너희가 황망했다 해서 내가 그것을 이해해야 하는지' 혹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따위의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다 내보내지 않았을 것 아닌가.
뒷말이 이어지지 않자 나비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을 풀어주십시오, 저하. 예기치 못하게 저하와 왕자님들을 마주하게 되어 모두가 당황하였을 뿐입니다."
그래.
기어코 사과하지도, 인사를 다시 하지도 않겠다 이건데.
이 정도의 일로 놈들의 진짜 속내까지 알아내지는 못한다.
이 일을 두고 괘씸하고 가소롭다 해야 할지 기특하고 고맙다 해야 할지도 아직은 모르겠다. 그러나 저 놈들 모가지가 어마어마하게 뻣뻣하다는 것만은 잘 알겠다.
연두색 눈으로 나비아를 응시하던 칼리안의 한 쪽 입꼬리가 아주 살짝, 그러나 분명하게 눈에 띌 만큼 올라갔다.
"재미있군."
비슷한 일을 겪은 뒤 르메인을 향해 제 허리를 넙죽 숙였던 에반이, 그리고 그레이가 생각난다.
왕자의 영지를 대신 관리하는 백작 나비아, 그를 빼면 나머지들은 기껏해야 자작이나 남작이다. 카이리스에 도대체 몇 명이나 있는지 칼리안조차 가물거릴 만큼 많은 하위 귀족. 그런 이들의 콧대가 그 브리센의 후작보다 높은 곳에 닿아 있으니 재미가 있을 수밖에.
- 털썩!
무엇을 재밌게 보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 칼리안이 퍽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았다. 뒤이어 조용히 자리에 앉은 란델이 귀족들을 쳐다봤고, 앉는 것을 허락받은 귀족들이 천천히 착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칼리안이 손을 뻗었다. 짙붉은 와인을 들어올려 향을 맡다 입 속에 머금고 삼켰다.
그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고아한 움직임으로 스푼을 들어올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놀렸다. 일말의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작게 잘라낸 요리를 입에 담고 소리없이 씹은 뒤 느릿하게 삼켜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을 뿐더러 그 누구를 보면서도 '식사 중 말을 해도 된다' 하지 않은 채로. 레이븐이든 루시든 미친 따까리든, 살아있는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의사소통의 권한을 그렇게 멋대로 빼앗아 든 채로.
아우성같은 침묵 속의 석찬이 시작됐다.
* * *
너무 안에만 계시면 오히려 의심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돌아다니면 몸 상합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석찬에 드는 길이라던 칼리안의 말을 떠올리다 저도 모르게 눈꼬리를 찌푸린 플란츠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잠시 빙그르르, 하고. 벽과 천장이 서로 섞여들다 제 자리를 찾는다.
상했던 속은 축복의 힘과 히나의 치유 덕에 다 고쳐졌으나 어지럼증은 아직 남았나보다.
하기사. 카이리스에서 보냈던 겨울, 죽다 살아났는지 아니면 정말로 죽었다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겨울. 그 때에도 깊이 패였다 아문 몸 속에 피가 다시 채워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 깜빡.
그래.
그 겨울.
어지럼증을 느낀다 여기자마자 냉암했던 그 겨울날에도 오늘과 같은 감각을 겪었다는 사실과 그에 대한 기억을 멋대로 불러다 떠올려주는 머릿속에 오늘 마주한 '칼리안'의 연두색 눈동자가 함께 오른다. 그리고 다시 어질어질, 플란츠와 참 많이 닮았으나 결코 영원토록 닮아질 리 없을 한 사람의 얼굴이 겹친다. 청포도색 드레스가 그려내듯 찾아와 아릿하게 흔들린다.
서랍 속 가장 깊은 곳과 매일 아침 마주하는 거울 위에 표정도 움직임도 숨도 없이 머무르던 얼굴이, 오늘 내내 말하고 움직이고 숨쉬던 동생의 그림자 위에 내려앉는다. 어찌 할 도리 없이 떠오르고 만다.
비단 똑똑한 머리 때문만이 아니라, 아무나 겪지는 않을 날을 걸어 온 까닭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를 떠나보낸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그렇게 떠오른다.
얼굴이, 눈빛이, 걸음이, 향기가, 지독히, 아리다, 그렇게, 저미는,
"······ 하."
실리케가.
불현듯.
어찌 할 도리 없이. 그렇게. 그렇게.
- 뭐 하고 계십니까.
치밀다가.
사무치다가.
문득 치밀다가. 다시 사무치다가.
- 혹시 누워계셨으면 이제 일어나시죠, 형님.
불어닥치듯 몰아닥치듯 찾아든 목소리에 밀려나버린다. 불어내듯이 몰아내듯이 어느새 밀려나버렸다.
퍼뜩 잠에서 깬 것처럼 고개를 든 플란츠가 어깨를 굳혔다. 멀리 협탁 위에 놓인 거울에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이 비친 까닭이다. 갑작스런 소란에 놀라 잠을 깬 듯한 눈빛이 된 플란츠가 그 거울 속에 든 얼굴을 쳐다봤다. 왜 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다시 기억해냈다.
그러자 방금 지나간 겨울을 돌이켜 볼 겨를을 주지 않겠다는 듯 많은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이 즈음 무슨 생각에 잠길지 알았다는 것처럼. 그럴 리도 없겠지만 정말 그런 것처럼.
- 저녁 드셔야죠. 계속 누워만 지내다가 어지럽다고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백 명이나 되는 형님의 미친놈들이 이번 시찰 마칠 때까지 속 편하게 형님 그냥 쭉 업고 다니겠다 했습니다. 물론 저나 란델 형님이나 헤르츠 경이야 발칸 놈들 등에 업힌 형님을 구경하는 재미가 좀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형님까지 같이 재밌어하실 만한 유흥거리는 못 될 것 같으니 식사하세요. 속까지 다친 중상이 아니라는 건 여기 귀족들 전부 다 알고 있으니 사양 말고 드세요. 고기 드세요. 많이 드세요. 풀만 휘적거리면 빈혈 오래갑니다.
고요하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저 놈 말이 사실이기는 할 텐데. 사실이면 놈은 왜 드러누웠다 일어날 때마다 바나나를 그렇게 처먹었는지. 그냥 또 식사를 가지고 간섭하려는 건 아닌지. 제 식사 자리가 마뜩잖아서 내 식사를 참견하고 있는 건지. 그러고보니 부러진 팔은 다 나았는지. 혹시 아직 덜 아문 팔로 석찬에 들었는지. 아픈 것을 또 무식하게 참고 먹느라 식사 자리가 마뜩잖은 건지. 그래서 이렇게 잔소리를 하고 있는지.
어느새 향기가 가시고 잔소리가 들려와서.
어느새 향수는 멀어지고 소란이 찾아와서.
- 알았어.
싫다 하지 않고 순순히 대답을 했다.
- ······ 이상한데. 웬일로 순하게 알았다 하십니까. 고기 드시라는 잔소리 제일 짜증난다 하시더니.
- 싫으면.
- 아뇨. 잘 먹고 무럭무럭 잘 자라겠다 하시는데 그걸 싫어하겠습니까. 싫은 것 아닙니다. 참 기특한 완두콩이시다 칭찬해드리는 거지.
······ 짜증난다.
사실 제일 짜증나는 건 고기를 먹으라는 동생 놈의 잔소리가 아니라, 그 연두색 곡식에 나를 자꾸 가져다 대는 저 돌아버릴 말버릇과 내가 약하다 하는 극도로 주관적인 평가와 툭하면 잘라내는 말꼬리와 내가 제 형임을 시시때때로 잊어버리는 것이 분명한 사고체계와 하루하루 늘어만 가는 짖음과······ 대체 저 많은 것들 중에 무엇이 제일 짜증나는지 이 머리로도 가늠이 안 되는 지금의 상황까지 전부 다. 다 짜증난다.
어느새 향기는 사라지고 대신 줄줄이 찾아드는 짜증 때문에, 습관처럼 쓸어올린 손길도 소용없도록 곧바로 사르륵 가라앉던 까만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 뒤에는 피식, 하고.
새빨간 입술에 실낱같은 웃음이 아주 잠시 들었다 사라진다.
- 또 잘 짖으시는데. 식사가 부족하신가.
- 네.
- 왜.
- 두 입 씩만 먹느라고요. 형님 입이 귀족들 앞에서는 더 짧아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 음식 세 입 이상 안 먹으려고 애쓰는 중입니다만. 형님 따라하다가 제 뼈에 구멍나겠습니다.
- 안 나.
- 네.
안 난다 하니 안 나겠거니.
이런 말은 또 잘 믿는다.
- 그래서. 왜.
실컷 짖었을 테니 말을 왜 걸었는지를 물었다.
아직 석찬이 끝날 시간이 아니지 않나. 설마하니 밥이나 먹으라는 잔소리 하나를 하려고 연락해 올 놈은 아니니까.
- 여쭐 게 있어서요.
- 해.
- 피망은 어차피 저도 이제 안 먹고, 익은 당근이랑 안 익은 양파는 피하고 있습니다만. 형님 오레가노 잔뜩 든 샐러드 못 드십니까 안 드십니까. 풀이긴 풀인데 향이 좀 강해서 드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잔소리 하나, 중요할 것 없는 질문 하나, 거기에 더해 잘 짖기 여러 개. 굳이 그런 이유로 연락을 한 것이 맞는 모양이다. 이제야 이어진 본론이 별반 중요하지가 않다.
기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으신 내 아우님께서 귀족들 입을 죄 막아두기라도 하셨나. 그래서 아무 말도 없이 음식만 씹어 넘기기에는 무료하셨나.
대충이나마 정황을 가늠한 플란츠가 답을 전했다.
- 별로. 안 먹어.
- 타조고기는 못 드십니까 안 드십니까.
- 안 먹어.
- 새끼 돼지 통구이 못 드시죠.
- 안······ 못 먹어.
- 아. 저는 꽤 좋아하는데. 역시 넘겨야겠네요. 그럼······ 뭘 먹지······.
향 강한 허브 샐러드가 어떤지 묻고. 타조와 새끼 돼지 고기를 먹는지를 확인하고. 어차피 무엇에 속하든 안 먹을 작정이면서 굳이 못 먹는 것과 안 먹는 것을 구분해서 질문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그렇게 몇 마디 말이 더 오갔다.
-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하십시오.
- 너.
- 네.
- 팔은.
- 히나 왔었잖습니까. 거의 다 붙었습니다.
- 알았어.
-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아픈 것 참는 중 아니에요.
- 알았어.
- 네.
통신 물품으로 대화를 나눠도 피곤해지지 않는 것은 히나를 대할 때뿐이다. 입을 열든 말든 동생 놈의 말이 많다는 사실만은 변하질 않으니 그만큼의 피로함이 확 몰려든다. 때문에 식사고 뭐고 그냥 도로 누울까 하던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에 새끼 코끼리가 차려놓고 나간 음식들을 쳐다봤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허기가 진다.
다시 몸을 움직인 플란츠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슬리퍼에 발을 가져가려다 가만히 멈췄다.
아무리 방 안이라지만, 슬리퍼를 신은 칼리안이라니.
차라리 장갑 낀 코코를 보는 게 더 현실적이겠다. 때문에 슬리퍼는 잊고 그 옆의 검은 구두에 발을 끼워넣은 뒤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걸어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 ······ 달그락.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피망은 남겨도 되지만 익은 당근이랑 안 익은 양파는 먹어야 하고, 오레가노 향이 풀풀 나는 샐러드는 좀 건드려 놔야 할 테고. 타조고기도······ 오늘만은 먹어야 되겠고. 새끼 돼지는, 못 먹겠다.
차라리 많이 다쳤다 할 걸.
그랬으면 수프나 좀 먹고 말아도 됐을 텐데.
이것들을 다 먹고 나면 산책이라도 가야 되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 * *
만찬장에서 나와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오르기까지.
그 동안 칼리안은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곁에서 함께 걷던 란델 역시 마찬가지. 둘을 보고 허리 숙여 인사를 보내오는 이들에게 눈을 두지 않고 지나쳐가면서 걸음만 옮겼다. 그 후에는 안 그래도 잘 꾸며진 휘트린의 영주성에서도 가장 성의껏 치장된 복도에 도착한 뒤에야 발을 멈췄다.
귀빈실이 있는 복도.
가운데에 빈 방 하나를 두고 '칼리안으로 분한 플란츠'와 란델이 나란히, 빈 방의 맞은편에 있는 가장 큰 귀빈실에 '플란츠로 분한 칼리안'이 머무르기로 한 곳이다.
물론 셋이 사용하게 된 귀빈실의 중간 혹은 양 옆의 빈 방은 에일라와 에우리아, 키리에와 아르센, 얀과 레릭과 덴이 알아서 나누어 쓸 터였다. 더불어 발칸의 대원들은 복도 양 끝의 방들에 각자 짐을 풀었다. 귀빈실 중간이나 복도 끝에 빈 채로 방치된 방이 있으면 안전하지 않을 테니까.
"불편하지는 않으셨을지 걱정되네요."
그 복도까지 와서야 칼리안의 입이 열린다.
"내가 불편했는지를 말함이더냐."
"네. 그렇습니다."
"불편할 것이 있었겠느냐. 말 한 마디면 족하였으니."
"한 마디 말이 억지였을까, 그것이 걱정된다는 말씀입니다."
란델은 짧고 굵직한 딱 한 마디의 말로 자신이 왕세자의 편에 섰음을 드러냈다. 물론 속에는 칼리안이 들어있다지만 겉모습이나마 플란츠의 비위를 맞춰주는 역할을 한 셈이 아닌가. 때문에 칼리안은 그런 란델의 속내를 신경쓰는 중이었다.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만들어진 작은 사일런트 막을 스치듯 바라보다 칼리안의 연두색 눈을 응시했다.
"네가 만들고 있는 상이 네가 보았던 둘째더냐."
"······ 맞습니다."
짧은 대답을 들은 란델은 오늘 내내 마주한 '플란츠'의 얼굴을 한동안 더 쳐다보다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같다 여겨지지 않았으니."
곧 죽어도 그 앞에 허리를 굽히기는 싫은 진짜 플란츠와 지금 칼리안이 보여주는 플란츠가 다르다 여겼다고. 그러니 진짜 플란츠의 편을 억지로 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그렇게 말했다.
"다름을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란델이 그렇게나 혐오하려던 모습. 정말로 실리케가 덧씌워진 플란츠는 진정 어떤 모습이었는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을 란델에게 보여주게 됐다. 지금의 플란츠는 따라할 수조차 없는 면을 칼리안이 만들어 여실히 보여줬다.
그러니 이제 플란츠에게 '실리케를 닮았다' 말하는 란델을 다시 볼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석찬은 그럼, 무료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저 소란하지 않다고만 여겼다."
"그것도 다행이네요. 저는 좀 무료했어서."
"볼 거리가 많았다만."
무상한 말을 하는구나, 하고.
으레 그런 대답이 오리라 생각했던 칼리안이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였다면 달가워했겠으나 작게 펼친 사일런트 막으로는 소리만 차단 될 뿐이라 웃음을 보이지는 않았다.
"보기만 하셨습니까."
"새겨두기도 하였다."
"배우셨다 해서 아무 귀족들에게나 남발하시면 해가 됩니다. 상대와 상황을 신중하게 살펴본 뒤에 쓰십시오. 명망이 높은 이가 섞여있다면 오늘 제가 한 것처럼 상대하셔서는 안 됩니다. 경거망동할 여지가 있는 놈들 역시 그렇게 상대하시면 안 됩니다. 다만 자존심이 세고 입은 가볍고 생각이 짧은 이들을 자극해 볼 상황이라면 꼭 믿을만한 호위가 함께 있을 때 쓰십시오. 한 번을 써먹어 본 상대에게 두 번 이상 같은 수를 보내면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누구에게 그리 굴었는지도 잊지 마시고요."
"그리 하마."
산교육이 따로 없다.
조금 전 칼리안은 귀족들로 하여금 허락없인 입조차 놀리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게 해 줌과 동시에, 어쩌면 3왕자 칼리안이 플란츠의 왕세자위를 빼앗는 일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덕분에 함부로 기 싸움을 걸어오는 귀족을 찍어누르는 수백 가지의 방법 중 하나를 란델에게 가르쳐 준 셈이 되었다. 고고한 품위를 유지하는 한편 섣부른 소란도 야기되지 않을, 란델이 참 마음에 들어 할 그런 방법 말이다.
"이제 이곳에 있는 이들이 어찌 변할지 지켜보면 되겠느냐."
태어난 이래 가장 조용했던 만큼 최고로 만족스러운 석찬을 마친 란델이, 태어난 이래 가장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막냇동생을 보며 물었다.
"네. 혹시 모르니 항시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호위 떼놓지 마시고요."
"그럴 생각이다."
"차 한 잔도 조심하십시오. 음식에 장난을 쳐 두는 그런······ 데블란도 안 했던 짓을 벌이지는 않을 테지만 여기는 휘트린이니까요. 형님과 란델 형님이 미움을 더 많이 받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까."
"무용한 주의로구나."
순간 웃을 뻔했다.
란델에게서 무용한 것이 많이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이렇게나 많이 있다니.
만찬장에서 한 번 겪었던 위기를 다시 넘기며 웃음을 지워낸 칼리안이 대답을 전했다.
"그래도요."
"네 입에 드는 것이나 살피거라. 이곳의 사람들이 둘째를 못마땅히 여기는 것이 나만큼은 될 테니."
사실 맞는 말이다.
무슨 독을 넣어 건네든 란델은 그것을 독특한 향신료라 여겨도 괜찮을 사람이다. 칼리안 역시 다르지 않다. 상처 하나 없는 지금의 몸 상태로 어떤 독을 마주하든 해를 입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결국 걱정해야 할 사람은 딱 한 명.
"그래서 부러 핑계를 대어가며 굳이 둘째와 외양까지 바꾼 것 아니더냐."
연약하기 짝이 없는데다 비실거리기까지 하고 있는 완두콩이다.
"······ 알아보셨습니까."
"누군들 모르겠느냐."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제 방의 문을 쳐다봤다.
이곳의 하인이든 휘트린과 동맹을 맺은 귀족들의 수하든. 서로 대화를 나누는 왕세자와 1왕자의 모습을 볼 만큼 봤을 테니 대화는 여기까지. 지나치게 사이좋은 것처럼 오랜 말을 주고받을 수는 없었다.
칼리안의 시선을 눈치챈 란델이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그래."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발칸의 대원이 왕세자의 방 문을 열었다. 키리에가 지키고 있는, 플란츠가 들어있을 방 쪽에는 찰나의 시선도 두지 않은 칼리안이 안으로 들어섰다.
- 달칵.
등 뒤로 문이 닫힌다.
레릭을 물리고 방 안에서 머물렀다.
속이 많이 허전했으나 차와 디저트를 더 들이라 말하지도 않았다. 소파에 앉아있다 일어서 짧게 샤워를 마치고, 잠시 테라스로 나가 어두워진 밖을 보고, 하늘 가득 흐르는 별을 보고, 오래지 않아 도로 들어와 레릭을 다시 불렀다.
걸치고 있던 어색한 카디건을 레릭에게 건넨 칼리안이 자리에 누웠다. 이리저리 분주히 돌아다니며 열린 창을 닫고 커튼을 내린 레릭이 침대로 걸어와 꼼꼼하게 시트를 덮어줬다.
- 사락, 사락.
아마 지금쯤 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영 낯설다는 레릭같은 얼굴 말고, 정말 정말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중이라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로.
새끼 코끼리의 불만 가득한 낯을 상상하다 결국은 더 참지 못한 칼리안이 소리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레릭은 제가 모시는 왕세자가 정말 재밌는 일을 두고 웃으면 어떤 얼굴이 될 지를 그제야 알게 됐다. 물론 진짜 플란츠는 저렇게 웃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언젠가는.
"편안히 보내십시오, 저하."
조금쯤 가벼워진 얼굴이 된 레릭이 밤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침대를 둘러싼 두꺼운 커튼을 마저 내린 뒤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칼리안이 눈을 감았다.
어둠에 잠긴다. 적막이 스민다.
창 밖의 달빛은 침대까지 닿지 않는다.
- 틱, 톡, 틱, 톡.
테이블에 놓인 시계에서 초침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다가.
말없이, 고요히, 조용히 듣다가.
- ······ 스륵.
다시 눈을 떴다.
바람 냄새.
그 끝에 드는 선연한 칼날 냄새.
그것을 맡고 가만히 떠올린 연두색 눈동자 속에 진득한 살의가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