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장. 숙이거라(2)
카이리스의 왕실 마차.
그 내부는 왕자들의 방을 절반 쯤 떼어왔다 해도 좋을 만큼 호사스러우나 겉모습은 그저 평범한 마차.
물론 하얀 오팔과 진주 가루로 바탕의 빛을 내고 온갖 보석으로 화려한 문양을 새겨넣은 뒤 황금을 녹여 왕실의 문장과 마차의 테를 둘러 놓은, 무려 여섯 마리의 말이 이끄는 그런 마차를 평범하게 여기기는 어렵다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초대왕 하츠아라의 취향에 꼭 맞을 눈부신 외관을 지녔다 한들 그에 걸려있는 온갖 마법과 내부 구조에 비한다면 겉모습 정도야 평범한 축에 속한다 할 수 있지 않겠나.
- 다그닥, 다그닥!
그러니 휘트린의 외성 경비대가 놀란 것은 그렇게나 '평범한' 마차를 발견하게 된 까닭이 아니었다. 새하얀 로브 혹은 제복 차림을 한 백여 명의 군인이나, 보라색과 파란색의 머리를 지닌 두 마법사가 내보이는 어마어마한 위용도 놀라움의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왕실의 군대나 호사스러운 마차나 명망 높은 두 마법사도 아닌 단 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
옅은 에메랄드 빛의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를 지닌 사람.
"성문을 모두 개방하라!"
"마차를 통과시킨다!"
거대하고 새카만 말 위에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은 채 모두를 이끌어오고 있는 사람. 표정 하나 없이 냉염하기만 한 얼굴을 하고서는 자신을 마주한 이들을 죄 짓누를 것처럼 고고한 위압감을 풍겨대는 사람.
그러니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을 오늘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하여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게 만드는 그런 사람.
"왕세자 저하시다!"
카이리스의 왕세자.
바로 '플란츠 룬 카이리스'였다.
- 다그닥, 다그닥!
그 왕세자를 앞세운 일행은, 영지의 대리인이 마중을 나오도록 연락을 취하지 않고 갑작스레 찾아온 것으로 모자라 외성에 다다를 때까지 속도를 줄이지도 않았다. 사람과 수레가 지날 정도로만 열려있던 성문이 완전히 다 개방됨과 동시에 외성 문을 지나치고는 내성이 있는 곳을 향해 그대로 내달렸다.
그렇다 해서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들의 가장 앞에 선 왕세자의 얼굴은 결코 급박하지 않았다. 그저 발을 멈춰선 뒤 누군가를 상대하는 것이 지독하게도 싫을 뿐이라고, 하늘 아래 저만 있다는 듯한 얼굴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지 않나.
덕분에 휘트린의 외성 수비 담당관은 갑작스런 귀빈을 맞이하고자 서둘러 나온 뒤 왕세자의 일행이 제 앞을 허망하게 지나치는 것을 구경만 한 셈이 되었다.
"이게 무슨······."
방금 지나쳐간 어마어마한 일행의 모습, 정확히는 시선을 끌어모으듯 빼앗아간 왕세자의 뒷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황망한 마음 때문에 잠시동안 아득해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서둘러 외성 문을 다시 닫도록 명했다.
"내성에는 소식을 알렸는가."
"네. 명하신 즉시 병사들을 보냈습니다."
"그래."
왕세자를 그렇게까지 바라본 이유가 황망함 때문이 아니라 그 왕세자가 일부러 줄기줄기 뻗어내던 서슬 때문임을, 사람들의 이목을 그 정도로 끌어당길 줄은 아는 사람이 제 말의 고집 하나를 못 꺾어서 결국 말을 갈아타지 못하고 달려오는 중임을, 즉 검은 말 위에 오른 이는 사실 왕세자가 아니라 왕세자의 겉모습을 뒤집어쓰고서 지금의 상황을 즐겨보려 노력 중인 어여쁜 고양이라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 이 정도면 저도 형님 잘 따라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잖아.
- 그러니까요. 형님 따라하는 데에 짧은 말보다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뭐가 있겠습니까.
- 내 아우님께서 혹시 다시 짖으려 준비 중이시라면.
-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제가 매번 형님께 말을 좀 길게 하시라 했었는데 이럴 때는 짧은 말이 편하긴 하네요. 혹시라도 이런 날이 올 것을 대비해 평소 굳이 그렇게 말씀까지 줄여오신 겁니까. 아무튼 형님께서 이렇게 안목 넓은 분이셨던 것을 알게 될 때마다 제가 얼마나 감탄하는지 형님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 ······ 짖잖아.
- 이런 칭찬을 두고 짖는다니요. 편한 마차 놔두고 혼자 밖에 있는 아우에게 고생한다는 위로는 못 해주실 망정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까.
- 이러려고 아우님의 그 대단한 시종에게서 팔찌를 빌려다 채워주셨나.
- 설마 그렇겠습니까. 그저 만일을 대비해 전해드린 겁니다.
완벽할 정도로 냉염한 얼굴을 만들어내고 있는 까만 고양이.
그러니까, 플란츠 스스로도 따라하지 못할 '소문 속의 그 플란츠'를 쉬이 만들어 연기하고 있는 칼리안이 마음 속으로는 최선을 다해 멍멍거리는 중이라는 사실 역시 알 리가 없었다.
"······ 그렇게나 닮았다 하더니. 사실이군."
마뜩찮다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 그가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왕세자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스스로를 애써 부인하듯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 목소리를 듣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와버린 칼리안이 제 턱을 조금 더 들어올렸다. 그리하여 딱 그만큼 높아진 시선으로 눈앞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그러나 어느 한 곳도 눈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해 보이며 말을 전했다.
- 생각해보니 형님 이 참에 란델 형님과 좀 더 사이좋게 지내보셔도 되겠네요. 혹시 압니까. 어여쁜 막냇동생 얼굴을 보면 란델 형님 마음이 좀 풀어지실지도요.
- 필요 없어. 싫어.
- 그럼 특별히 안 친해지셔도 되니까 마차 안에 같이 계시는 것이 답답하다면서 셔츠 단추 풀어헤치고 그러지만 마십시오. 제 그 고운 목 아무한테나 보여주려고 있는 것 아니니까.
- 너.
- 네.
- 내가 내 어머니를 떠올릴까 염려되는 마음에 사람 말을 집어치우신 거면, 됐으니까 그만 짖어. 그 고우신 목 아무한테나 보여주기 전에.
- ······ 이럴 때만 되면 제가 짖는 이유를 그렇게 잘 눈치채십니까. 저는 평소에도 많이 짖는데요.
- 아신다니 다행이군.
소문 속의 그 플란츠.
제 어미를 쏙 빼닮았다 이름난, 그 플란츠.
칼리안이 플란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만큼 꺼려하는 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칼리안이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그런 소문에 딱 걸맞는 모습의 플란츠였다.
그렇게 싫어하던 낯을 일부러 만들어 드러내고 있으니 칼리안이나 플란츠나, 하다못해 란델까지도 속내가 편할 리가 없지 않겠나.
그래서 짖고 있었다.
짖는 대신 솔직하게 걱정을 입에 담을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는 아니니까.
- 따라하실 거면 제대로 하시라 말한 건 나잖아. 신경쓰지 말라고. 괜찮으니까.
- 네. 그럼 신경 안 쓰고 더 짖도록,
- 야.
때문에 쓸데없는 말로 르니에리 향을 좀 털어낼 겸, 지금 칼리안의 모습 때문에 제대로 날이 서 있을 란델과 플란츠가 싸울 틈도 없앨 겸, 겸사겸사 그렇게 끝없이 짖는 사이.
- 다각!
이제 간신히 서먹함은 덜었다 싶은 형제간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주인을 대신해 열심히 앞을 보던 레이븐이 발을 멈췄다. 그것을 안 칼리안이 이제껏 어떤 것도 눈에 담지 않겠다는 듯 내리뜨고 있던 연두색 눈을 들어올렸다.
- ······ 하려고 했는데. 그러지는 못하겠네요, 이제. 도착했으니까.
- 반말.
바람결에 살랑거리는 옅은 빛의 머리카락 사이로 영주성이 보인다. 자신의 것이었으나 단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역시 내려다봤다.
보잘 것 없다는 듯이. 발 아래 둔 세상이라는 듯이.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플란츠 왕세자 저하. 휘트린 영지를 관리하고 있는 나비아 헤이젤이라 합니다."
흑갈색 머리와 짙은 회색의 눈을 지닌 영지 관리인의 인사가 모두에게 들려온다. 그 얼굴에 애써 띄워진 굳은 미소에, 레이븐의 안장에 올려져 있던 뼈마디 불거진 손가락이 긴 호선을 그려냈다.
- 도착했습니다. '칼리안 아우님'.
루시 발바닥 색의 입술로는 그려내지 못할 웃음이었다.
* * *
'휘트린은 제 영지입니다.'
'알아.'
'정작 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제껏 단 한 번도 영지 수익금을 미루거나 속여 낸 적 없었습니다. 함께 보내오는 서류는 늘 정확했고 전하께서 간혹 비밀리에 감찰을 하실 때에도 문제가 생겼던 일이 없었습니다. 적당히 때를 맞춰 영지 수익금만 보내온 것이 아니라 저에 대해 무슨 일이 있었다 소문이 나면 약재를 보내든 선물을 보내든 꼬박꼬박 저를 챙겨 온 곳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치하한 적이 없었는데도요.'
'그래서.'
'보통 그런 경우는 두 가지거든요.'
'진심이거나, 숨기는 것이 있거나.'
'맞습니다.'
'해서 너와 둘째가 서로 모습을 바꿔 다니려는 것이더냐. 어차피 너를 앞에 두고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테니 네가 아니라 둘째를 어찌 대하는지 직접 보려고.'
'네. 형님은 아직 쉬셔야 할 상황인데 휘트린의 사람들이 라시드와 연관이 있는지, 문제가 없는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지를 알려면 형님이 좀 나서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란델 형님 말씀처럼 저에게야 진심이든 아니든 어차피 좋은 대접을 할 테니 말입니다.'
'그럼 그 싸움에서 둘째가 아니라 네가 당한 것으로 속이고 찾아갈 생각이더냐.'
'그렇습니다. 형님이 아니라 제가 다친 것처럼, 그래서 형님이 저인 척 하고 드러누워 계시면 제가 열심히 형님인 척을 하면서 지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아우님께서는 나에 대한 소문대로 치장을 하시는 게 더 낫겠군.'
'망나니요, 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일단은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저기 가서 고양이를 찾아 안고 지낼 수는 없으니까요. 오랜만에 술도 좀 마실 겸.'
'······ 말고.'
'내가 둘째를 보듯이. 그것을 말함이다.'
'그건······ 저희 셋 다 나락에 들었다 나오는 모양새일 텐데요.'
'나는 매일을 보았고 둘째는 익숙할 테니. 너만 견디면 되겠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둘 말고 셋이 머리를 맞대어 나온 결과였다.
사냥에 익숙한 칼리안이 몸을 낮추고 다가서면 멋모르고 따라 달려들던 플란츠 덕에 일이 틀어진 날이 많았지 않나. 마치 루시와 안네의 새 사냥처럼 말이다.
그래서 한 명이 더 머리를 댔다.
"마법을 다루시는 까닭에 치유사의 힘은 해가 된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당장 치료사라도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저하."
이동 마법진에서 나오고 얼마 뒤, 정체 모를 적들의 습격이 있었고 그들을 상대하던 칼리안이 부상을 입게 됐다. 때문에 서둘러 영주 성까지 달려왔다.
이런 뒷이야기를 가진, 셋의 머리를 모아 만들어낸 연극이 지금 막 시작된 참이었다.
"······ 말 했을 텐데. 필요없다고."
'플란츠로 분장한 칼리안'이 '칼리안으로 분장한 플란츠'를 영주성의 귀빈실에 데려다 놓은 뒤. 걱정 가득한 영지 관리인 나비아에게 칼리안의 냉랭한 대답이 전해졌다.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을 한 채 침대에 기대앉은 플란츠를 정말 스치듯 쳐다본 칼리안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더 걱정할 것도 없다는 듯 방 밖으로 걸어나가며 레릭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에스티나는. 어때."
평소의 플란츠보다 몇 배는 더 차가운 낮은 목소리.
그것이 칼리안이 일부러 흉내내는 모습인 것도 잠시 잊을 만큼 얼어버린 레릭이 서둘러 답을 전했다.
"이제 조금씩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이동 마법진을 쓰고 난 뒤 싸움을 겪게 되어 많이 놀랐던 것 같습니다."
"다시 안 좋아 보이면 치유사 찾아다 보내."
"알겠습니다, 저하. 잘 살피겠습니다."
플란츠로 분했으니 플란츠의 말을 타야 했다.
때문에 에스티나의 위에 오른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렇게 하고 나니 레이븐이 옴짝달싹을 안 했다. 칼리안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든 귀신같이 알아보고는 발을 딱 멈춰버린 것이다. 무슨 사정이건 상관없이 저를 두고 다른 말을 타는 것을 도저히 허락해 줄 수 없다는 듯이.
그래서 결국 레이븐에 올랐다.
대신 에스티나가 잠시 아파 칼리안의 말을 대신 이용한 척을 하기로 했다. 남을 태우지 않는 레이븐의 그 성질머리는 칼리안과 가까운 이들만 아는 사실이니까.
아무튼.
'동생'을 살펴 줄 치료사는 거절하고 말에게는 치료사도 아닌 치유사를 붙이라 말한 칼리안이 계속 발을 움직였다.
뒤에 서 있던 레릭이 나비아에게 다가가 이 영지나 인근에 치유사가 있는지를 물어보는 소리, 당분간 플란츠의 방을 지키게 되어버린 키리에가 뒤에서 문을 닫고 서는 소리, 재빠르게 따라붙은 발칸의 기사 한 명이 칼리안이 머무를 방으로 안내하는 소리 전부를 들은 척 만 척 한 채였다.
* * *
휘트린의 영주성이 분주해졌다.
예고없이 들이닥친 왕세자 플란츠와 란델 왕자를 맞이하고, 부상 중인 칼리안을 호위하겠다 다가서다 키리에에게 거절당하고, 다른 일행들이 머물 곳을 제공해야 했던 까닭이다. 경비를 강화하고 영주성 내외의 환경을 소리죽여 재정비했을 뿐 아니라 영주성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보다 더 깨끗한 의복으로 갈아입기까지 해 가며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그런 와중에, 각자 제 방에 들어가 단 한 발도 나오지 않는 왕족들을 위한 저녁 만찬까지 마련해야 했다. 위독하지는 않으나 자유로이 움직이기에는 힘이 드는 듯한 칼리안에게 따로이 식사를 내가는 한편, 속내를 알 수 없는 란델과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왕세자의 입맛에 거슬리지 않을 만찬과 음악을 조심스레 골라 준비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어느새 오후를 지나 저녁이 되었다.
- 달칵!
이곳에 온 이래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방 안에 처박혀있다시피 하던 칼리안이 잠시 거울을 살폈다.
거울 속에 한참 머무르던 한쪽 입술이 살짝 올라간다.
"이러니. 사는 내내 르니에리 향이 떠날 수가 있겠나."
실리케를 미뤄두고 사는 것이 기적이다.
새삼스레 들여다보니 참 새삼스레 많이도 닮았다.
칼리안조차 때때로 플란츠의 얼굴에서 실리케를 보는데, 그 똑똑한 머리로 매일 마주하는 이 모습을 두고 어떻게 온전히 르니에리를 잊겠나.
- 탁!
짧은 한숨을 쉬듯 거울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연두색 눈을 잠시 감았다 뜬 뒤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섰다.
성주인 칼리안을 대신해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나비아와 석찬을 가져야 했으니까.
- 저벅, 저벅.
얼마쯤을 걸었을까.
얼굴에 드리웠던 것들을 다시 싹 지운 뒤 레릭과 두 명의 기사를 뒤에 둔 채 만찬장으로 가던 칼리안의 눈이 조금 가늘게 변했다.
- 그렇게 말을 달려 들어왔는데, 왕자님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 벌써 성내에 소문이 다 났어요?
에일라의 목소리가 들려 온 까닭이다.
갑작스러운 말에도 표정 하나 드러내지 않은 칼리안이 대답했다.
- 소문이 났어?
- 말을 달린 게 아니었으면 왕세자 저하가 살아있는 사람인 줄도 몰랐겠다고, 다들 그러는데.
- 내가 잘 따라하고 있나 보네. 다른 얘기는, 들은 것 없어?
- 외성 경비대원들 말을 좀 들어봤어요. 본래에는 숲 쪽까지 늘 시찰을 해왔어서 왕실 마차가 어제 숲에 들었던 것을 이미 진작에 알고 대비했어야 했는데, 어제 하루만 숲에 못 갔대요.
- 이유는.
- 외성 경비대장이 갑자기 수비 일정을 바꿨다나봐요. 그래서 수비대 인원 변동이 있던 날이라 숲쪽 시찰을 하루 미뤘다던데.
- 하필 어제.
- 그러니까요. 하필 어제.
- 오후에 외성문 열고 맞이하러 나왔던 그 사람인가.
- 네. 다 익은 망고 알맹이 색 머리카락 가진 남자요.
- 그 사람 좀 살펴봐, 그럼.
- 따라다니는 중이에요, 이미. 자주 다니는 곳들부터 요 근래 근황까지는 내가 다 살펴봤는데 이상한 점 없었어요. 나오는 것 있으면 얘기해줄게요.
- 부지런하네. 에일라.
- 부지런해야지. 빨리 끝내고 쉬려면.
- 그래. 조심히 다니는 것 잊지 말고.
- 내 걱정 말고, 왕자님 거짓말하는 데 소질 없으니까 그 재밌는 연극이나 들키지 않게 조심하세요. 이런 일 내가 하루 이틀 하나.
- 이런 일 하루 이틀 하는 것 아니라서, 나도. 걱정 마.
- 알았어요.
칼리안을 습격한 이들의 정체를 직접 찾겠다면서 '습격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없는 왕세자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빠져나간 칼리안의 새 따까리' 역할을 맡은 에일라와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계속 발을 옮겼다.
휘트린의 영주성은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당연히 왕궁이나 지그프리드 공작령의 영주성과 비교할 정도는 되지 않았으나 에이프린 백작의 영주성보다 몇 배는 크고 화려했다. 두 가지 색의 대리석으로 모양을 낸 바닥도, 마법 등불에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벽 조각들도, 두터운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정갈한 거리들도, 다시 그 너머로 보이는 드넓은 밀밭도.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이 아름다웠다.
그런 곳을 무감히 바라보며 걸었다.
그 아름다운 성이 이미 모두 제 것인 양 걸었다.
- 저벅, 저벅.
오러를 감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발 소리를 크게 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펴는 것 정도는 평소에도 해왔던 일이니 특별히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다만 평소보다 조금 더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 뜬 채로, 습관같은 웃음을 완전히 지운 채로, 주변의 어느 것에도 쉬이 시선을 두지 않은 채로.
언젠가의 실리케처럼. 실리케를 앞에 둔 플란츠처럼. 성문 앞에서 마주했던 그 날의 플란츠처럼. 그렇게 걸었다.
- ······ 달칵.
칼리안의 앞을 막고 있던 거대한 문이 열린다.
온갖 음식이 차려진 거대한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그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 일어선 몇몇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킨 란델이 보인다.
이곳의 주인인 칼리안이 없는 자리.
동생보다 제 말을 더 걱정하는 둘째 형과 동생에게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는 첫째 형만 찾아와 있게 된 그런 자리에 침묵이 감돈다.
- 저벅.
그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모든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마련된 자리에 가 섰다.
바삐 모여든 귀족들이 고개를 숙인다. 마뜩치 않다는 듯, 이곳에 선 저 왕세자에게 수그릴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나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면서.
조용히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란델을 쳐다봤다.
그러자.
"제대로 숙이거라."
귀족들을 향한 란델의 목소리가 만찬장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