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장. 숙이거라(1)
지저귄다.
온 숲이 지저귐으로 가득차는 기분이 든다.
어떻게 들으면 새끼 오리 시절의 코코가 내던 소리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들으면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지저귐이 숲 속의 새벽 이슬 사이로 가만가만 이어졌다.
사실 카이리스의 왕궁에도 새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테라스의 난간이나 바닥에 종종 작은 새가 내려앉아 쉬어가기 일쑤였다.
그런 날에는 꼭 루시가 앞장을 섰다. 가르쳐 준 적이 없음에도 자세를 낮추는 법을 어느새 익힌 하얀 고양이가 조심조심 테라스를 향해 다가가면, 안네는 으레 그 뒤를 따라가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두 녀석이 함께 나서는 사냥은 늘 실패로 끝난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때를 보는 루시의 뒤에서 철모르고 달려오다 몸을 부풀리는 안네 때문이다. 둥실둥실한 잿빛 털뭉치를 보고 놀란 새들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곤 했으니까.
그 뒤에는 언제나 애옹, 하고. 안네를 조금 타박하는 게 아닐까 싶은 루시의 말이 들려왔다. 물론 걱정할 만큼 혼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시무룩한 소리를 내며 사과하듯 툭툭 발을 건드리는 안네를 끌어다 안고 제것보다 더 긴 잿빛 털을 정돈해주는 루시의 용서로 금세 끝날 타박임을 플란츠도 잘 알았다.
"새 소리가 많이 나네요. 루시랑 안네가 있었으면 많이 신나했을 것 같습니다."
새의 지저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두 고양이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레릭의 말이 들려왔다. 때마침 레릭도 고양이들을 떠올린 모양이다.
그래서 플란츠는, 고양이들을 생각하는 머릿속에 함께 떠오르고 있던 기억 하나를 꺼내 레릭에게도 알려줬다.
"솔새."
"솔새요? 그런 새의 소리입니까?"
"그래."
이름만 익숙했지 실제로 보거나 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푸른 솔새 말고, 보다 흔하다던 산솔새였다. 그리 귀하다는 푸른 솔새와는 색이 확연히 다르지만 소리만은 퍽 비슷하다 했던 지저귐이었다.
"이름이 예쁘네요. 작은 새일 것 같은데요."
"작았어. 예쁘고."
푸른 솔새는 훨씬 더 예쁘다 했었지만.
'솔새, 산솔새의 울음입니다.'
새까만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예쁘게 지저귀던, 샛노란 줄무늬를 가진 작은 새. 그런 새의 이름을 배웠던 날의 기억이 이어진다.
물론 그것은 책에서 배운 내용이 아니었다. 체르밀 궁의 4층에 거주하는 두 고양이 말고 3층에 사는 또 다른 고양이, 예쁜 소리 대신 잘 짖어대기만 하는 검은 고양이가 알려 준 사실이었다.
'아, 저기 있네요. 세크리티아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도 보게 되니 더 반가운 것 같습니다.'
책에서는 새의 소리나 반가움까지 보이지는 않으니까.
'내 아우님께서는 새들의 이름까지 다 아시나.'
'아뇨.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솔새니까요.'
'세작명 때문인가.'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기억을 해 둔 새입니다. 세작들이 이름으로 쓰는 그 많은 새들을 저도 다 알지는 못해요. 그래도 저 녀석이 솔새인 건 잘 압니다. 그냥······ 형님 말버릇처럼 저도 그냥. 어쩌다보니.'
다누를 만나러 가던 길에서 칼리안이 했던 말.
그때까지만 해도 칼리안이 왜 솔새의 소리와 생김만 유난히 잘 새겨뒀다는 듯 굴었는지, 저 고운 지저귐을 왜 굳이 '울음'으로 듣고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안다.
그것을 안다 여겨도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저하께서 제가 모르는 것을 다 아십니까. 신기······."
챙겨온 것들 중에 가장 두터울 듯한 튼튼이 색 재킷을 건네던 레릭이 이렇게 답하다 화들짝 놀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황급히 다시 말을 했다.
"아니······ 저하께서 모르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제 말은 그러니까······."
"오해 안 했어."
"죄송합니다, 저하. 말을 조심하겠습니다."
왕궁 안에서만 살아온 플란츠가 의외의 것을 알고 있음에 순수하게 놀랐다가 그 말이 혹시라도 무시하는 의도로 들렸을까 기겁을 한다.
오해하지 않았다 하는데도.
시종이라기보단 그냥 왕자보다 아주 조금 낮은 신분을 가진 사람 정도,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칼리안의 가장 가까운 보호자를 자처하는 공작가의 아들과는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
물론 그 새끼 코끼리가 별난 것이지 레릭이 이상한 게 아니다. 얀 역시 칼리안이 '칼리안'이 된 이후 지금처럼 바뀌게 되었겠지만 그 기저에는 왕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출신이 가지는 사고방식이 있음을 안다. 그러니 레릭은 절대로 얀처럼 편하게 플란츠를 대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조심하라는 게 아니잖아."
그렇게 조심해가며 피망 못 먹는 것을 소문내고, 그렇게 어려워하며 안 익힌 양파를 걸러내는 것을 온 사방에 다 알리고. 식사 한 끼를 같이 했다고 다음 날 눈이 퉁퉁 부어 왔으면서.
이제야 그것이 누구의 연주인지 제대로 알게 된 바이올린 선율과, 뭐에 또 마음이 동했는지 모를 동생 놈의 고요한 노래. 그 소리들을 듣다 까무룩 잠이 든 뒤 꽤 오랜만의 숙면을 취한 플란츠와 달리 한 숨도 못 잔 얼굴을 하고선 아무렇지 않은 척 멍하게 있다 말 실수나 하고 있으니.
"눈치 안 봐도 된다고. 걱정한 것 아니까."
어쩌겠나.
안네에게 새를 사냥하는 법은 알려주지 못하더라도 레릭에게 상관을 걱정하는 법은 알려줘야지.
칼리안이 워낙 무시무시하게 화를 낸 까닭에, 갑작스레 찾아왔던 히나도 플란츠를 어마어마하게 혼냈을 것이 분명해서, 게다가 얀으로부터 지난 번처럼 호들갑떨지 말고 침착하게 있으라 언질을 들었을 터라서. 이런 저런 이유로 저까지 무어라 말을 더 얹지도 못하고 꾹꾹 참고 눌러왔을 걱정이 그제야 모습을 디민다.
"저하······."
도대체가.
체르밀 궁에서 상급시종이 되려면 다들 이렇게 눈물보가 쉽사리 잘 터져야 하는지.
"다치지 마세요······. 부탁드릴게요, 저하."
걱정하라 했더니 듣기 좋은 새 소리를 죄 울음 소리로 바꿔버린, 새끼 코끼리만큼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내 동생 놈 만큼은 눈물 많은 것이 분명한 시종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울리긴 했는데 다독이는 법을 몰라서 그랬다.
칼리안이 우는 것을 그냥 두고 봤었고, 플란츠가 우는 것을 베른 역시 그냥 두었었는데. 안네가 울 때 루시는 늘 털을 가지런히 해줬던 터라 털 없는 사람이 울면 어떻게 해야 그치게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히나의 머리카락 끝에 귤 향기가 배어있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히나가 칼리안에게 그러했듯 레릭을 안아줄 수도 없지 않나.
걱정해도 된다는 말을 괜히 했나.
그래서 또 잠깐 이런 생각을 하다가.
- ······ 토닥.
앨런이 가끔 그렇게 해줬던 것이 생각나서.
가만히 손을 뻗어 레릭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는 둥, 당장 달려오고 싶었는데 키리에가 막았다는 둥, 칼리안 왕자님이 같이 계셔서 걱정했다는 말도 못했다는 둥, 빈 식기를 가져다 정리를 마친 뒤 다시 살펴보러 왔더니 잠드신 것 같아서 더 들여다보지도 못했다는 둥.
몇 번을 끊겼다 다시 이어지는 말들을 가만히 들었다. 그런데 그 말이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아마 레릭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발칸 대원들도 있고 칼리안 왕자님도 있고 기사 베른 경도 있잖습니까. 세이렌 경도요. 그러니까 저하. 제발 몸 좀 아끼세요. 안그래도 약하신데다 잘 싸우지도 못하신다면서요······."
"······ 누가."
"저하께서요······."
"말고. 내가 약하다고 누가 말했는데."
"······ 전부 다······ 그랬습니다."
"······ 하."
아.
그냥 나가라고 할 걸 그랬다.
치미는 짜증을 꾹 누르고 손만 움직였다.
- 토, 닥, 토닥.
제 어깨를 두드리던 왕세자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도 모르는 채 한참을 더 걱정하는 레릭을 한참동안 달랬다.
억울해서라도 내가, 진짜.
내가 꼭.
반드시 꼭.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네······ 죄송합니다······."
"사과하라는 게 아니잖아."
"알아요······ 죄송해요······."
"······ 하."
내가 진짜 꼭 검의 길에 오를 거다.
아니.
키리에 다음으로 내가 오를 거다.
······ 아니.
키리에랑 소공작 다음으로.
- 토닥, 토닥.
아무튼.
진짜 꼭 오를 거다.
* * *
흥얼거린다.
온 숲을 채우도록 흥얼거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 들으면 귓가에 머무는 것 같고, 또 어떻게 들으면 입가에 머무는 것 같은 흥얼거림이 숲 속의 새벽 바람 사이로 살랑살랑 이어졌다.
세크리티아의 노래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한 음율을 가진, 가사도 없고 멜로디도 확실치 않은 그냥 흥얼거림. 그것이 언젠가 카이리스 어디서든 들어봤을 법한 그런 소리라 드미레아는 별달리 눈치를 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세크리티아의 노래를 흥얼거리지는 말라 했던 플란츠의 주의를 잊지 않은 까닭에 칼리안도 그 정도는 이미 신경을 쓰고 있었다.
- 기분이, 좀, 나아졌어요?
칼리안이 입 속에 머금은 소리를 그저 기분 좋게만 듣던 히나가 물어왔다. 레이븐의 위에 올라 튼튼이의 고삐를 잡은 채 천천히 나아가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작은 바람처럼 웃은 히나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 누가 보면, 왕자님이나, 왕자님의 동생 키가, 자란 것인 줄, 알겠어요.
어제는 어두웠고 히나를 제대로 볼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오늘 분명히 알았다. 언젠가 선물했던 하얗고 자그마한 고운 구두에 때가 묻었기에 그것을 닦아주고 고개를 들다 알게 됐다. 예전보다 고개를 덜 굽히고도 히나와 눈이 마주치고 있었다.
분명하다. 눈에 담고 다녀도 그저 감사할 우리 히나의 변화를 내가 못 알아 볼 리가 없다.
그래. 무엇을 숨기랴.
우리 히나 키가 컸다!
그러니까 히나야. 히나야. 내가 새 옷을 사 줄까, 아니면 자란 키에 맞을 새 등자를 사 줄까, 더 예쁜 새 구두를 사 줄까, 그것도 아니면 집무실의 책상을 새로 들여놔 줄까. 이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으려니 히나가 대답했다. 보리 낱알 만큼 자란 것을 두고는 새로 사야 할 물건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니까, 생일 선물, 고민을 덜었다고, 좋아하지 말고, 다시 열심히, 생각해보세요.'
쐐기를 박듯 덧붙이면서.
- 그렇게, 좋으세요?
생일 선물 고민이야 덜 수 없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라서, 전날 있던 일들을 어느새 다 잊은 얼굴이 된 칼리안이 배실배실 웃었다.
"응. 좋아, 히나."
- 많이 자란, 것도, 아니에요.
"키가 자라서 좋은 게 아니라."
또 배실배실.
아주 조금 더 커진 웃음을 매단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키가 자랐다 하니까 네가 좋아했잖아. 그래서 좋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히나네 아버님이 매우 심하게 동안이시네' 하고 물어볼 것 같은 광경이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히나가 칼리안보다 나이가 많다. 플란츠처럼 일 년에 몇 달 동안은 동갑이 되는 애매한 나이 차이를 가진 것도 아니다. 빼도 박도 못하고 그냥 누나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고 히나는 그냥 웃었다. 그것이 또 좋아서, 칼리안의 입에서는 흥얼거림이 다시 나왔다.
사라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남지 않았을 보호막을 지나쳐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까지는 금방이었다. 걸어서도 많이 걸리지는 않았던 거리였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화를 멈추고 말을 달렸다. 이동 마법진이 있을 곳까지 쉼없이 곧장 달려갔다.
"혼자 돌아가시는 것에는 무리가 없겠습니까."
"응. 괜찮아."
"기사 베른 경이라도 함께 왔어야 하는 게 아닐지."
"내가 형님도 아니고. 걱정 마, 드미레아."
출발 전부터 칼리안이 혼자 마차까지 돌아갈 길을 걱정하던 드미레아가 다시 우려를 보냈다. 괜찮다는 듯 드미레아의 등을 툭툭 두드린 칼리안이 둘을 서둘러 이동 마법진에 올려뒀다.
생각같아서는 아예 일정이 끝나기까지 둘을 데리고 같이 움직이고 싶었으나 발칸의 부상자들과 지그프리드에 몰려들 귀족들과의 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마법사들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히나 뿐이었고, 찾아오는 귀족들을 '정치적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은 드미레아밖에 없었으니까.
- 조심해서, 가세요. 혹시, 문제가 있으면, 괜찮으니까, 꼭, 불러주세요.
"알겠어. 그러니까 너도 무리하지 말고. 히나."
- 저는, 걱정, 말아요.
생긋 웃은 히나가 손을 흔들었고 드미레아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칼리안이 두 인사를 모두 받은 뒤에야 마법진에 빛이 돌았다.
- 우우웅!
마력이 일렁거리는 감각과 함께,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조금 홀가분하고 또 조금 아쉽다는 얼굴이 된 칼리안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레이븐에 다시 오르지 않고 이동 마법진의 마법사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방벽 밖으로 나왔다.
- 자박.
그렇게 한 걸음.
- 자박, 자박.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발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작아지던 발 소리가 이내 사라진다.
아무 소리 없는 걸음으로 또 한 걸음, 두 걸음. 고삐를 잡지 않고도 알아서 따라오는 레이븐을 뒤에 둔 채로 계속 발을 옮기던 칼리안이 잠시 뒤를 돌아봤다. 이동 마법진의 방벽이 숲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음을 확인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칼리안이 고개를 되돌렸다.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린다.
"나와요. 그만 숨고."
허공을 향한 가느다란 미성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아무도 없던 곳에 푸름이 생겼다. 숲의 이슬이나 바람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매몰찬 푸른빛이 그려지듯 나타났다.
"네, 왕자님. 그만 숨겠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칼리안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의 대답이 들려왔다.
새파란 머리카락이 드러난 뒤 대사막에서 그 오랜 시간동안을 보낸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허연 얼굴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모습이 됐다. 도무지 곱게 봐주기 어려운 꼬락서니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곧이어 하얀 로브자락과 손가락과 다리와 신발이 차례로 생겨났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칼리안이 마뜩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따라오라고 한 적 없는데. 헤르츠 경."
"네. 제가 마음대로 따라온 것 맞습니다."
"왜요."
"오시는 길에 혼자 공격이라도 당하실까 걱정이 되어서 왔습니다. 그런데 같이 가겠다 하면 거절하실 것 같아서 몰래 온 겁니다. 마차 주변에 혹시나 하피가 또 나오면 기사 베른 경이라도 상대를 해줘야 하니 저 빼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마차에 두고 저만 왔습니다."
알아서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알아서 걱정까지 잘한다.
혹시나 마차 쪽을 염려할까봐 미리 설명까지 덧붙인, 칼리안이 드미레아와 히나를 데리고 이동 마법진까지 말을 달리는 동안 투명화 상태로 열심히 텔레포트를 해 가며 따라온 미친 따까리가 열심히 설명을 했다.
"······ 형님이 무슨 기분일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칼리안이 중얼거렸다.
뭐, 그래도. 형님이 되게 약한 건 사실이니까.
적어도 형님이 나보다는 덜 억울하시겠지.
"아무렴 이 상황에 누가 더 나타난들 상대를 못할까, 내가. 등 뒤에 둔 것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경이 안 겪어 본 것도 아니면서."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아무튼 됐고······ 어깨는. 어때요."
"왕자님 제 걱정 해주시는 겁니까?"
"생긴 구멍이 빨리 막혀서 아쉬워진 거면 하나 더 만들어줄까 해서 묻습니다."
어깨든 머리든. 어디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왕자님."
"나도 괜찮습니다."
이 말에 아르센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왕궁 북쪽 숲에서 치렀던 한 마리 대 여든 일곱 명의 전투 이후로 이제서야 둘이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까닭에. 걱정이 됐다는 건 반쯤 핑계고 사실은 사과하고 싶어서 따라왔을 아르센을 향해 칼리안이 먼저 전한 용서였다.
"대신 또 그따위로 모르는 척 인사하지는 말고. 썩 좋지는 않았어서."
물론 경고도 잊지 않고서.
"제가 또 그따위로 모르는 척 인사하는 일 없을 겁니다."
"그래. 됐어요, 그럼."
"네, 왕자님."
아르센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왕자님 혹시, 시아라는 아이 기억하십니까."
"시아는 갑자기 왜요."
곧 아르센의 설명이 뒤를 따랐다.
시스파니안의 앞에 서 있던 다누의 모습이 시아와 꼭 닮아있었노라고.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 특별한 아이라고는······ 했었는데. 다누와 만나본 적도 있던 아이인 것 같았고."
시아는 다른 엘프들과 달리 인간과 비슷한 미들네임과 성이 있었다. 말을 하는 법도 특별했고 그 때문에 다누와 이야기를 했던 일을 알려준 적도 있었다. 그런 시아와 다누가 닮았다는 말이 어딘지 석연치 않다.
"혹시 말입니다, 왕자님. 혹시나 그 아이가 본 모습이 아니라면······."
"걱정 말아요. 그 정도로 무른 사람 아니니까, 나는."
"정말 베실 수 있겠습니까?"
"다누가 아무것도 모르는 엘프 아이인 척 나서서 나를 속인 것이면. 베어야지. 당연히."
속는 것은 질색이라서.
이렇게 덧붙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와 다누가 닮은 이유를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으니 일단 참고해두겠다는 의미였다.
"휘트린 영지는. 가 봤습니까."
"영주성 안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싸움을 한 줄 알았는데. 경에게서 피 냄새가 진동하기에."
"아. 그건 제가 싸워서 밴 냄새가 아닙니다, 왕자님. 휘트린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가던 길에 제가 무언가를 봤습니다."
잠시 발을 멈춘 칼리안이 아르센을 쳐다봤다.
그러자 먼 숲의 한 지점을 가리켜보인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저쪽 숲 속, 여기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재밌는 것이 있어서 잠시 구경을 했습니다."
재밌는 것이라.
"혹시. 하피를 키운 장소가 있습니까."
"그보다는, 하피를 그곳까지 끌고 와 풀어 둔 듯이 보였습니다. 주변에 시신의 흔적이 많았습니다."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떴다.
"흔적이라 함은, 다 잡아먹혔다는 소리입니까."
"네. 하피의 깃털과 시신의 흔적을 봤습니다. 쇠사슬을 끌고 간 자국이 있었습니다만 사슬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싸움이 있던 동안 회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때문에 그 장소에 더 남은 것이 없었으니 찾아가지는 않는 편이 나을 겁니다. 다시 확인해보신다 한들 증거는 커녕 식사만 거르시게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든 식사를 거를 칼리안은 아니었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가 거기까지 하피를 끌고 가서 풀어놨다는 말인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그렇다는 말은. 다누가 아니라는 뜻이고."
다누가 숲의 길을 열어 하피를 보낸 것이 아닐까, 분명 전날의 칼리안은 그런 의심을 했었다. 이제껏 제온의 전사들이 전부 다 숲으로 넘어왔으니 하피 역시 그랬으리라고. 그래서 다누를 찾아가 협박을 하려 했었지 않나.
그런데 '인간'들이 하피를 풀었다 했다.
이동 마법진과 휘트린 영지 사이, 그 짧은 숲길에.
"라시드 브리센인가."
조용한 중얼거림에 아르센이 씩 웃었다.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왕자님."
"우리 발을 묶고 시간을 벌겠다 들 놈이 그 뿐이니까."
이렇게 대꾸한 칼리안이 계속 아무 말 없이 발을 옮겼다.
이미 사라진 방어막이 있던 곳을 지나쳐 어느새 떠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일행들이 있는 곳까지. 그리고 마차가 있는 곳까지.
란델에게 잠시 인사를 하고 마차 안에 들어선 칼리안이, 나설 준비를 끝낸 플란츠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형님."
"왜."
칼리안의 눈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들었다.
"저랑 바꾸시죠."
그 손에 들린 두 개의 물건.
에일라의 것과 슈린츠에서 만난 전사에게 빼앗은 것.
두 개의 변장용 마법 도구를 본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