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44화 (445/527)

제78장. 내 영역에 들어왔으면(6)

칼리안 가라사대.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달가운 것은 고기뿐이다.

물론 당연히, 이제 정말 정말 생일이 얼마 안 남아서 도대체 어떤 것을 선물해야 좋을지에 대해 잠든 세렌티를 잠시 깨워 물어본 뒤 다시 영원히 재워놓고 싶게 만드는 우리 히나와 대륙에서 제일 센 우리 아버지와 대륙에서 가장 잘난 우리 레이븐에게는 '것'이라는 대명사를 갖다붙일 수 없으니 뺐다. 그 셋을 빼고 나니 고기만 남은 거다.

참고삼아 덧붙이자면 어떤 상황이든 칼리안에게 있어 결코 조금도 절대로 달갑지 않은 '것'이 하나 있는데,

"어떻게 고기를 남기십니까."

바로 깨작거리는 완두콩이다.

"맛 없어서 못 드십니까."

"아니야."

사실 마법사들은 대부분 그렇다.

집 밖에서는, 야생 닭이든 대사막 쥐든 새알이든 뭐든 일단 불에 익히면 맛있는 음식이 됐다 생각한다. 여러 영지들을 다니며 용병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아 혼자서 먼 거리를 다닐 일도 많기 때문에 한 끼 식사를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대충 급하게 채워넣는 연료' 이상으로 여기질 않는 것이다.

기사들은 달랐다.

기사 서약으로 묶인 영주를 위해 한 곳에서 터를 잡고 살면서 영지 인근으로 단체 훈련을 가는 정도만 겪는다. 그러니 밖이라 해도 식사는 잘 챙기지만, 대신 요리사까지 따라붙지는 않으니 돼지나 닭이나 샐러드용 채소같은 '보편적인' 식재료를 굽고 삶고 으깨 익혀 요리하는 법 정도를 대충이나마 배워 알고 있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 음식이 플란츠의 입맛에 맞겠느냐 하면 당연히 전혀 아닐 것이다.

일평생 금이야 옥이야 르메인의 주방장 다음으로 솜씨가 좋은 요리사가 온 대륙의 가장 값진 재료들을 정성껏 공수하여 매 끼니 제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 만들어낸 만찬만 먹으며 귀하게 자란 완두콩에게, 후추를 뿌려 잡내를 줄여보려는 노력만 한 멧돼지고기 구이와 대충 썰어 놓은 베이컨이 든 감자 수프와 적당히 데워 온기만 다시 낸 밀빵이 맛있게 느껴질 리가 있나.

"맛있기만 한데."

"그런 것 아니라고. 반말."

"요."

그런데 칼리안은 다소 특별한 경우에 속하지 않던가.

왕궁에서 쫓겨나 세크리티아 전역을 누비고 다니던 호기로운 시절, 본래 다른 기사들에게 요리하는 법을 배운 적은 있었으나 왕족인 제 손으로 요리를 해본 적은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굳이 극복하려 노력하지 않는 자기만족 참 강한 성격 덕에 그 입맛만은 마법사들을 많이 닮게 됐다. 그 인성만큼이나 복잡하게 다져진 입맛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지금 앞에 놓인 '야영을 할 일이 없을 줄 알고 요리사 없이 떠나온 일행의 식사를 챙기려 한 마법사들을 다 내쫓은 기사들이 서툴게 만들어 낸 요리 비슷한 무언가' 역시 칼리안에게는 왕궁의 만찬과 다를 바 없다는 소리다.

그래서 스스로는 참 맛있게 식사를 하는 중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완두콩을 신경쓰는 중이었다. 세심하지 못한 탓에 애써 키운 완두콩을 아예 잃어버릴 뻔했던 터라 이제 조금 더 세심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껴 그렇다.

덕분에 그 완두콩이 곤욕을 치르는 중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입에 맞지 않는다 해도 만들어 준 사람이랑 가져다 준 형님 시종의 성의가 있는데 그걸 그렇게 남기십니까."

"아니라고 하잖아."

아니라고, 세 번 말했다.

그러나 칼리안은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튼 내 형님께서 가끔 이렇게 매정한 면을 보이실 때마다,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의젓하게 다 크실지······ 하루하루 성심성의껏 열심히 키워드리는 동생으로서 참 아득해집니다."

많이도 짖는다.

아무튼 짖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 너, 좀."

내 아우님께서 아무래도 많이 무료하신 듯 한데.

소공작을 불러다 놈이 비밀을 또 들킨 것을 알릴까. 히나를 찾아가 놈이 다 낫지도 않은 채로 에이프린 백작이 내준 흰빵을 여덟 개나 먹어치운 일을 이를까. 같이 밥 먹기 싫다고 거절하고서 막사에 들어가 주무시는 첫째 형님 옆에 가서 마저 짖으라고 쫓아버릴까.

"어쨌든 좀 더 드세요. 무럭무럭 쑥쑥 크시려면,"

"칼리안."

"네."

해맑게 웃는 대신 잠시 즈려감았던 눈을 뜬 플란츠가 여러 번 깎여나간 인내심을 애써 되찾아왔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잠시 골랐다.

인정하기 싫은가본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 손가락 반 마디 만큼은 더 크다고 할까 하다 말았다. 안 통할 것을 안다. 베른보다 더 커지지 않는 이상 놈의 눈에는 계속 덜 자란 새순 정도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혹시나 다시 과보호하지 말라는 말도 그냥 말았다. 그 역시 안 통할 게 뻔하다. 동생 놈이 제일 무서워하는 걸 쏙쏙 잘도 골라 한 번에 다 저질렀으니 그 말을 하지는 못하겠다. 지금 이 마차 안에 실드를 안 둘러놓는 게 다행이다.

하피와 싸우던 중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완두콩이니 형님 새끼니 하는 말을 지껄인 것을 탓할까 하다가, 무턱대고 앞으로 뛰어들어 그 피에 닿고 바닥에서 올라온 독기운까지 들이마시게 된 것보단 덜한 잘못이니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망할 완두콩······ 파릇파릇하네······.'

사실 놈이 에반을 죽인 뒤 했던 짖음 때문에, 3왕자가 저보다 아홉 개월을 오래 산 왕세자를 그 말도 안되는 식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발칸 놈들이라면 이미 싹 다 안다. 그래서 이제 그냥 포기한지 오래다.

얼마 전에 한 번 꾸었던 끔찍한 꿈처럼, '플란츠 룬 카이리스 대공은 그 본인의 업적보다는 동생되시는 칼리안 루 레인 카이리스 국왕의 곁에서 일평생 고양이나 잘 키우며 파릇하게 살다 가신 완두콩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인물이다' 따위로 카이리스 역사서에 기록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만 여기며 다 내려놓기로 했다.

그러니 그것들을 다 빼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느라 꽤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플란츠가 아직 제대로 얘기도 못 나눈 레릭이 가져다 놓은 딸기차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만 걱정해. 네 탓 아니니까."

거창하게 해 줄 말이 없어서 이렇게만 말했다.

아무래도 칼리안은 사고 직후에 플란츠가 같은 말을 했던 것을 확실히 못 들은 모양이다. 제 접시에 오른 마지막 고기 조각을 집어들던 흰 손이 우뚝 멈췄으니까.

"네 탓 아니라고."

"······ 어떻게 제 탓이 아닙니까."

한 번을 더 강조하듯 덧붙였으나 칼리안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놈이 왜 악몽에 들었는지. 왜 플란츠도 잊어버리고 그렇게 뛰쳐나갔는지. 그에 대해서는 '베른'이 설명을 했다.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번 사고가 칼리안의 탓이 아니라는 것만은 아직도 이해를 못 했다. 누구도 알려주질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게 왜 네 탓인데."

"내 영역에 들어왔으면 그게 누구든 무엇이든 당연히 내 손 안에서 무탈히 지내야 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오던 사람입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고요. 당연히 제가 인지했어야 할 일들 뿐이지 않습니까. 놈이 제 오러를 가로챌 수 있다는 것도, 놈의 공격을 막고자 키리에가 나섰다면 오러를 발현할 수도 있었다는 것도, 제가 키리에에게 뛰어드는 꼴이 되더라도 키리에는 오러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도, 놈이 죽지 않았으니 그런 제 뒤를 노려오리라는 것도, 그걸 보신 형님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리고 놈의 피에는."

독이 있다는 것까지.

"그럼. 그게 다 아우님 탓이라 생각해서. 이제 그런 일을 아예 안 만들려고 다누에게 가려 한 건가. 다 없애버려서 더이상 위험한 일이 안 생기도록. 그런 일을 벌인 3왕자가 어떻게 될지는 계산도 안 하고서."

"옳지 않았다는 건 이제 압니다. 하지만 란델 형님 안 계셨으면, 란델 형님께서 그렇게 마음을 바꿔주지 않으셨다면 형님이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그건 분명히,"

"칼리안."

"네."

무슨 소리를 해야 이 일이 칼리안에게도 불운과 실수가 겹친 사고일 뿐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네가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잘 해줄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그것이 '네가 없어도 된다'는 의미로 들리지 않도록 이야기할 수 있을까.

붉게 우러난 찻잔 속을 한참 들여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 란델 형님이 마음을 고쳐먹은 게 결국 누구 덕인지, 서클이 늘자마자 아브턴던트부터 익혀둔 건 누구인지. 그건 알고 있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동생 놈이 자책하지 않도록 고쳐놓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그 생각을 당장 고치는 게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남을 살리지 않고 스스로 사는 법도 이제 좀 배워보라는 그 말도 못하겠다.

아직도 르니에리 향기에 빠져들면서, 스스로도 헤어나오질 못했으면서, 더 오랫동안 바닷속에 잠겨있던 사람에게 네 손으로 모든 것을 살릴 필요 없다는 그런 말을 더는 못 꺼내놓겠다.

모조리 다 살려내질 못하고 이제야 살려내기 시작한 한 명을 제 숨구멍으로 삼은 놈에게 그 숨길 다시 막는 짓은 안 하기로 했다. 그래서 스스로 탓하지 말라며 계속 강요하는 대신 이 '사고'를 해결한 것에 제 덕도 있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그것만 더 물었다.

"그건······ 네. 접니다."

칼리안이 조용히 대답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그럼."

이제야 고개를 들고 마주봐오는 빨간 눈을 보다 비슷한 빛을 내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고생했어. 살리느라."

꽃에 익숙해지게 하지 않고, 꽃이 다 르니에리가 아니라는 것을 억지로 가르치지 않고 그냥 치워준 것처럼. 그렇게만 말했다.

그 정도를 안다면 그건 퇴보도 침잠도 아닐 테니까. 갑작스럽게 고치려 하지 않더라도 다시 조금씩 나아질 테니까. 플란츠 스스로가 겪어 알고 있는 것처럼.

"이제 괜찮아."

"정말, 괜찮습니까."

"내가 괜찮다잖아."

"네."

"그러니까, 숨. 쉬어."

"······ 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다시 숨이 돈다.

루시를 따라 침대에서 협탁까지 뛰어보려다 한 발이 모자라 그대로 고꾸라질 뻔한 안네를 받아들었던 어느 날처럼, 긴 한숨을 내쉬며 동생 놈을 마주보던 플란츠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가."

가라고.

"저 아직 다 안 먹었는데요."

싹 비운 접시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꽁알꽁알 대꾸했다.

결국은 져 주게 될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리며 답했다.

"······ 더 먹고. 가."

"고기 더 안 드실 거면 저 주세요."

"새로 가져오라고 해."

"어차피 덜어 드셨잖습니까. 아깝잖아요. 애써 만든 건데."

"가져가."

칼리안이 웃었다.

"네."

드미레아.

나 농사에 소질이 있나봐.

무럭무럭 크더니 점점 그늘이 생겨.

* * *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잠깐만. 드미레아. 내가 조금만 더 설명할게."

칭찬을 받으려고 했는데.

"세이렌 경에게도 들키셨다는 것 아닙니까. 이제 사실 모르는 것이 전하와 치유사 베른 경, 그리고 오라버니. 셋 정도 남은 것 같은데요."

칭찬이고 나발이고.

변명하기 바빠졌다.

"응······ 금방 세네······."

나는 손가락 꼽아가며 열심히 셌는데.

역시 내 정혼자님은 뭔가 다르네.

개미소리만큼 작아진 말을 듣지 못한 척한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치유사 베른 경은 그냥 안 궁금해 할 뿐이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만. 묻는다면 왕자님께서는 또 다 알려주시게 될 테고요."

"아니야. 히나한테는 말 안해. 전하께도, 얀에게도, 절대 말 안해."

일행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피워 둔 모닥불이 아주 작게 보이는 곳까지 온 뒤 사일런트 막까지 켠 칼리안이 드미레아에게 이렇게 이실직고를 하고 있었다.

칭찬을 받은 것이 기분 좋아서 혼날 일을 나중에 말하겠다 했을 때부터 설마설마 했는데. 또 들켰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마를 감싸쥔 드미레아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들켰다는 사실조차 숨기질 못하고, 이 상황에 그것을 또 솔직하게 알려오는 저 융통성 없는 정혼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식사는 잘 하셨습니까. 또 울었다고 놀림받지는 않으셨고요."

이 쯤이면 늘 가지고 다닐 것이 분명한 파혼서를 내밀든 대련을 빙자한 실전을 요청하든 할 줄로만 알고 있을 칼리안에게 이런 말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맞았는지, 안 그래도 큰 빨간 눈이 더 커져서는 서둘러 마주쳐온다.

"파혼하자는 말 안 해, 드미레아? 아니면 나 이미 파혼당한 거야? 티 나?"

"파혼서 안 가져왔습니다. 썼다 버린 것이 너무 많아 다시 쓰기도 귀찮고, 더 들키실 수 있는 곳이 없다 하시니 그냥 속 편히 여기고 있겠습니다."

얀의 그 차를 맛있게 마셔왔다는 말에 잘못 하나를 봐주기로 마음 먹은 뒤라서. 대체 무슨 꿈을 꿨는지는 몰라도 아무 소리도 못 내고 히나에게 기대 후둑후둑 울던 사람의 손을 놔버릴 만큼 매정하지는 못해서. 그럴 만큼 잘못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질 않아서.

"그리고. 티 납니다."

"아······."

이해를 받은 것에 좋아해야 할지, 운 티가 나는 얼굴로 열심히 밥을 먹고 온 것에 난처해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얼굴로 눈만 깜빡이는 정혼자를 그냥 옆에 두기로 했다.

"하긴 그래. 이렇게 예쁜 정혼자를 또 어디서 구해."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운 것을 플란츠에게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애써 까먹었다는 듯 해오는 말에 한 마디를 해주려는데 칼리안이 시기 좋게 고개를 돌렸다. 드미레아를 벗어나 멀리 마차와 모닥불을, 더 멀리 보이는 짙은 빛의 나무들을 보다 입을 열었다.

"드미레아."

"네."

"나에랑샤로 가는 길에 핀 장미 보러 가기로 했잖아."

"기억합니다."

"세뉴 강에도 장미가 핀대. 키리에가 알려줬어."

"그렇습니까."

"응. 무슨 색인지는 모른다는데, 노란 색일지 분홍 색일지, 빨간 색일지. 아니면 흰 색일지. 아무튼 여기 일 보고 돌아가면 다 필 텐데. 나에랑샤 가는 길 말고 거기로 가자."

"강이 보고 싶어지셨습니까."

"······ 내 정혼자님은 나를 너무 잘 알아. 아무튼 좋잖아. 바다랑 다르고."

하자는 대련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면서 놀러 갈 생각만 잔뜩이다. 그래서 미간을 찌푸리던 드미레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를 것 있겠습니까. 같은 물인데."

"그렇게 생각해?"

"넓고, 깊고, 조용하고. 물결이 일고. 제 생각엔 같습니다."

"아닌데. 다른데."

"그럼 나중에 바다도 보러 가면 되겠습니다. 보면 알겠죠."

"아······ 보러 갈 수 있어. 사실 세크리티아에 내 바다가 있거든. 정말로 보러 갈 수 있어, 드미레아."

"왕자님의 바다 말씀이십니까."

"응. 체이스 형님한테 선물받았어. 아무때나 마음대로 가도 돼. 그러니까 구경시켜 줄게. 전하의 탄신일 축하연 끝나고 내 생일이 오기 전에, 같이 가."

들뜬 얼굴로 말하는 칼리안을 말없이 지켜보던 드미레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보고 나서, 확실히 세뉴 강과 똑같이 좋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둥글게 올라갔다.

곧 고개를 되돌린 칼리안이, 고요한 세뉴강을 퍽 닮은 청회색 눈을 다시 바라보다 말했다.

"좋네, 드미레아."

"좋으셔야죠. 제가 같이 가드리는데요."

"나중에 파혼할 때 나 달래줘야 해. 엄청 아쉬워 할 거라서."

드미레아가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눈물 참 많은 저 막내 왕자를 달래주려면 히나라도 데리고 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평생 제 정혼자 노릇 하시던가요."

"그럴까? 그래도 되나?"

"옆에 뒀을 때 왕자님보다 더 흐뭇한 정혼자를 제가 못 찾고, 왕자님께서 더 들키지만 않으면. 못하실 것 있겠습니까."

"나보다 더 흐뭇한 사람 찾는 건 불가능할 게 뻔한데. 그럼 비밀만 열심히 숨기면 되려나."

앞의 말은 자연스럽게 못 들은 것으로 넘겨들은 드미레아가 뒷말에 대해서만 대답을 했다.

"지금까지는 열심히 숨긴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으런 건 아니고······. 더 열심히 숨기겠다는 거지."

"네. 더 열심히 숨기십시오."

"그래. 그럴게, 정혼자님."

큰 고민 않고 고개를 끄덕인 드미레아가 어깨를 한 번 폈다. 절그럭, 하고. 사슬 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작게 울린다.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 라시드 브리센을 고발했습니다."

주변을 환기시키듯 들리는 갑옷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칼리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 같아."

"아직 모르겠습니다. 붙들린 이들에 대한 심문을 마치면 결정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래."

사일런트 막을 거두려다 잠시 미룬 칼리안을 보면서, 드미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궁으로 돌아가지는 않으실 겁니까."

"영지 시찰을 왔으니 하고 가야지."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이 정도면 라시드 브리센이 일을 꾸몄든 꾸미던 일의 증거를 없앴든. 넉넉한 시간이 되었을 텐데요."

"내 따까리 돌아와 있잖아."

"헤르츠 경 말씀이십니까."

"응."

이제 이렇게만 말을 해도 드미레아까지 알아듣는다.

평생 따까리 신세에서 벗어나기는 글러먹은 듯한 아르센을 떠올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형님 쓰러지자마자 정찰간다고 했다던데. 이 보호막 안에서 정찰할 게 뭐가 있어. 알아서 그 밖으로 나갔을 거야. 가서 뭐라도 확인했으니 돌아왔겠지."

아르센은 키리에 만큼이나 늘 알아서 잘 해왔으니까.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사일런트 막을 거둔 뒤 함께 일어난 드미레아와 자신의 몸에 묻은 먼지를 클린으로 털어냈다.

"그리고, 드미레아. 라시드 브리센을 살피는 것 말고도 중요한 할 일이 있어."

"또 무엇을 한다 하십니까."

"뒷감당."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러더니 양 팔을 벌려 펄럭펄럭 하고, 날갯짓을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시스파니안께서 오셨었다며. 브리센은 결국 사라질 테고. 전하 자리는 더 튼튼해 질 거잖아."

"맞습니다."

"그럼 전하께서 이제 뭘 하시겠어."

드미레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껏 정치하는 모습이라고는 책에서 나온 내용과 칼리안이 부리는 인성 말고는 본 것이 없던 까닭에 그 생각이 조금 길었다. 그러나 칼리안은 조용히 말을 기다렸다.

"······ 다른 귀족."

정답이 들려왔다.

모닥불이 보이는 쪽으로 발을 옮기던 칼리안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센에게 돈 주고 올라온 놈들 다 내보내고 새로운 놈들 불러오시겠지. 이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으니까. 그럼 나는 뭘 해야겠어, 드미레아."

"인재 찾으십니까."

"그렇지."

역시 내 정혼자님.

"형님들과 내 영지는 브리센이랑 관련없어. 게다가 서로 멀리멀리 떨어져 있어. 처음으로 그 지역에 왕족들이 찾아가는 셈인데 굳이 수도 말고 영지에 박혀 있던 주변 귀족들 다 모일 것 아냐. 그러니 열심히 살펴봐야지. 여기저기에 생길 빈 자리 채울, 돈 말고 머리 가진 놈들. 힘줘서 쳐다보면 꼬리 마는 바보들 말고 왜 쳐다보냐 해줄 만한, 에이프린 백작이나 레딩턴 자작같은 진짜 귀족들."

브리센이 사라져도 나라가 흔들거리지 않게 해 줄 사람들. 왕궁을 향해 함부로 덤벼들지 않으면서 생각이라는 것도 좀 할 줄 아는 사람들. 그런 놈들을 찾아보려 한다고.

"그래야 나중이 더 재밌어질 테니까."

머리 아픈 수 싸움보다 재밌는 것이 없다 여기는 정혼자를 보며 드미레아가 씩 웃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세뉴 관이 정말로 시끌시끌 해지겠구나, 그런 기대를 하면서.

- 자박, 자박.

소리없이 걸음을 옮기던 칼리안의 발 끝에 흙이 밟히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그것을 가만히 듣던 드미레아가 문득 발을 멈췄다.

왜 멈춰 서는지 칼리안은 묻지 않았다.

칼리안 역시 똑같았으니까.

"이거. 혹시."

다만 살기가 느껴졌거나, 방어막 안으로 들어온 적을 맞닥뜨렸거나,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해서는 아니었다. 정말 놀랐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듣네요. 오라버니 바이올린."

바이올린 소리.

꽃이 저물고 새가 잠들고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담은 듯한, 그런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마법사 주머니 안에 제멋대로 들어있었을 바이올린에서 들려오는 귀한 선율이었다.

"나 처음 들어, 드미레아."

정말 기쁘다는 듯 꺼내진 말.

그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께는 처음이라 하지 마십시오."

잠시 침묵하던 칼리안의 입에서 낮은 깨달음이 새어나왔다.

"······ 아."

다시 기억이 든다.

들어본 적 없으나 분명 들어보았던, 얀의 바이올린 소리가 기억에 든다.

"기억나네."

귀로 들려오고 기억 속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를 가만히 새기면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얀에게 배운 적 있는 어느 날의 자장가를 기억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먼 기억에 잠겨서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며 저도 모르게.

가만가만 그 자장가를 따라불렀다.

드미레아만 옆에 있다 생각한 탓에.

마차 창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를 듣던 완두콩 한 명이 그제야 뒤척임을 그만두고 잠에 빠져드는 것은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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