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장. 내 영역에 들어왔으면(5)
키리에는 진작부터 마차 밖에 나와 있었다.
그 후 한참이 지나 베른 역시 밖으로 나왔다. 마차가 아니라 아예 방어막까지 벗어나며 멀리 가버렸다.
그런 베른이 이렇다 할 말을 해두고 가질 않아서, 키리에는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렸음에 대해 레릭에게 알리기로 한 약속을 잠시 미뤘다. 어쩌다보니 베른도 없는 마차의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셈이 되었으나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마차 안을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덕분에 키리에도 없고 베른도 없어진 마차 안에는 베른의 살기만큼이나 진득하고 묵직하지만 그것을 어색함이라 할 수도 긴장감이라 할 수도 없이 사람을 그냥 되게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쉽게 말해,
"······ 비켜드리겠습니다."
"되었다."
란델과 플란츠가 단 둘이 있다는 소리다.
차라리 확실한 남이면 서로 신경쓰지 않고 살면 될 일인데 하필 둘 다 르메인의 피가 반씩 흐르고 있어서. 차라리 왕의 자식이 아니라면 서로 없는 셈 치고 살면 될 일인데 하필 귀하디 귀한 핏줄인 탓에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무조건 같은 건물의 입주자로 살아야 해서. 차라리 딱 둘만 형제라면 서로 외동아들인 양 여기며 살면 될 일인데 하필 둘 다 같은 사람을 막내동생으로 두게 되어서.
원수보다 더한 남이지만 형제는 형제라서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형제여야 하는 것에 똑같이 치를 떠는 형제가 시계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먹먹한 공간에 묵묵히 들어앉아 있었다.
"불편하신 것 압니다."
"너는 아니라는 듯 말하는구나."
"형님 못지않습니다."
어차피 겉보기와 속 크기가 다른 마차를 만드실 것이면 침대만 놓아주지 말고 벽과 문도 만들어주셨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경량화까지 되어 있다 하니 무게 걱정도 없는 마차인데, 마차 안에 벽과 문이 딸린 욕실과 화장실도 있는데, 그렇다면 벽 하나 쯤은 더 놓아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사려깊던 축복만큼이나 아쉬운 일이다.
이래서야 다음에 가면 뚝딱뚝딱 마차 수리까지 해 줘야 하나.
천고를 살아온 지극히 위대한 조상님이 카이리시스의 하늘을 가렸던 거대한 날개를 고이 접고 세렌티가 잠든 알을 감싸안은 채 이딴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 리 없을 플란츠가 팔을 뻗었다.
- 차르륵!
그리고 협탁 위에 놓여있던 칼리안의 시계를 집어들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레릭도 없어서 제멋대로 구겨진 채 무릎에 덮여있던 시트를 옆으로 치웠다.
나가려는 것이다.
온도 조절 마법이 걸려있는 실내에서 세심히 조각된 마호가니 침대에 누워 보드라운 감촉의 오리털 시트를 덮고 쉬는 것보다, 모닥불 옆에 대충 놓은 침낭에 들어가 흙과 풀냄새를 맡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였다.
- 핑글······.
그러나 해독이 되었다 뿐이지 독에 상한 속까지 모두 나은 것은 아니라서, 속이 다 나았다 치더라도 흘려낸 피가 다시 채워지는 것도 아니라서, 바닥과 천장이 서로 자리 싸움을 벌이는 듯한 감각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밖에 키리에가 있는 것 같던데 잠시만 도와달라고 할까. 아니면 레릭을 불러달라 말할까. 천천히 눈을 뜨던 플란츠가 그런 생각을 하다 침대 기둥을 잡았다. 혼자 나가지도 못할 사람이 기어코 부축까지 받아가며 자리를 피하는 것이 밖의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부스럭 소리가 다시 만들어지자 침대를 등지고 앉아있던 란델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플란츠만큼 낮은 음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집을 부리는 것도,"
"어머니를 닮은 것이 아니라. 숨이 막혀서 나가려는 겁니다."
그 말을 자르고 대꾸했다.
어차피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한데 듣기 싫은 말을 얌전히 듣고 있어 줄 만큼 너그러운 상태는 아니었던 탓이다.
"······ 때를 봐 가며 부리거라, 그리 말하던 중이다."
그런데 란델이 잘린 말을 덧붙였다.
하려던 말을 오해하고 혼자 날을 세운 격이 된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란델 쪽에서 옷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제껏 미동없이 앉아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였다.
"편치 않은 것은 서로 다르지 않을 테니 내가 나가마."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본 란델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함께 있느니 밖에서 밤을 새는 편이 나은 것은 란델도 똑같았으니까.
말이 잘리고 화풀이를 당한 날이 하도 많았던 탓에, 말을 자르고 멋대로 짜증을 낸 것에 대해서는 사과할 마음이 없는 플란츠가 란델을 봤다. 그리고 란델의 손이 마차의 문에 직접 가 닿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갚겠습니다."
"치료비는 막내에게 이미 받았다."
"두십시오. 제가 갚습니다."
"되었다."
이미 받은 흰 장미를 굳이 물릴 수도, 이미 숙인 칼리안의 허리를 굳이 되돌릴 수도 없는 일임을 둘 다 알았다. 그럼에도 기어코 내가 갚겠다는 놈과 기어코 안 받겠다는 놈이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잠시 벌였다.
곧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흐름없는 깊은 물이 가득한 눈으로 제 혈육을 내려다보다 물었다.
"내가 고친 것이 네가 아닌데 왜 네가 대신 갚으려 드느냐."
플란츠를 살려 고쳐진 것이 칼리안이라 칼리안에게 값을 받았는데 왜 그 값을 대신 내겠다 하느냐고.
"저만 고치셨으니 제가 갚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답했다.
자신만 살았을 뿐 칼리안은 못 고쳤다고.
깊은 심연이 플란츠의 말을 되새겼다.
그 모습을 조용히 마주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기어코, 칼리안이 이미 낸 치료비를 다시 냈다.
다른 말없이 플란츠를 바라보던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손을 움직여 체르밀 궁의 5층만큼 적막하던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알았다."
이렇게, 새로 전해진 치료비를 거절 않고 밖으로 나갔다.
조용한 마차 안에 혼자 남게 된 플란츠가 침대 기둥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두 다리를 시트 속으로 도로 밀어넣은 뒤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그 후에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동생의 회중시계를 쥐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 딸깍.
- 틱, 톡, 틱, 톡.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멀쩡히 흘러가던 시간을 제 스스로 되돌아가 악몽에 잠겨버린 놈. 고작 몇 분의 시간을 주는 것으로는 고치지 못할 놈. 무엇을 주어야 고쳐낼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된 동생을 그렇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 틱, 톡, 틱, 톡.
시간이 흐른다.
란델이 외면해왔던 것으로는 멈추지도 되돌리지도 못했던 시간이, 플란츠가 홀로 애쓴 것만으로는 어떤 흐름도 달라지지 않았던 시간이, 그리하여 결국 둘에게서 한 명을 앗고 한 명을 전해주었던 시간이 흐른다.
언제 돌아올지, 돌아오기는 할지.
'사라지기 전에 돌아올게.'
아니다.
돌아오겠다 했으니 돌아오겠지. 그런 말까지 또 못 지키려 할 놈이 아니니까 오기는 오겠지.
다시 오겠지.
창 밖에서 들려왔던 말을 상기하면서, 돌아오면 이번에는 늦지 않으려고. 방법은 아직 하나도 모르겠지만 기회마저 놓치지는 않으려고. 그러다 정말로 영영 잃어버리는 일을 다시 겪지 않으려고.
- 틱, 톡, 틱, 톡.
밀려드는 졸음을 어떻게든 쫓아보내며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초침이 움직인 끝모를 수를 멋대로 세어 내곤 하는 머리 때문에 가까이 두지 않고 살던 시계를 감아 쥐고서.
'사고 아니야. 나한테는 아니야.'
손을 통해 전해지는 짧은 감각으로, 귀를 통해 전해지는 가벼운 감각으로 이어지던 단조로운 시계 소리를 그렇게 버텨내고 있을 즈음.
- ······ 똑, 똑똑.
조심히, 아주 조용히, 주저하듯 시작되다 조금씩 커지는 노크 소리가 찾아들었다.
이런 곳에서 들릴 리 없을 노크 소리.
늘 조심스럽게 시작해 매번 다른 크기로 두드리다 끝나는, 주저하듯 두어 번을 두드리다 언제는 네 번의 큰 소리를 내고 다음 날에는 세 번을 내고 그러다 또 어느 날에는 한 번만 내기도 하는, 좋은 머리로 생각해봐도 똑같은 소리를 낸 날들을 꼽아 짝을 맞추기 어려운 그런 노크 소리.
소리도 횟수도 일정한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과 완전히 다른 그 소리를 낼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이곳에서 노크를 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일정하게 이어지는 시계 소리에 파묻혀 저도 모르게 꿈 속에 들었는지를 잠시 의심해보던 플란츠가 눈을 떴다. 그리고 다른 말이 더 들려오지 않는 밖을 향해 얼른 입을 열었다.
"들어와."
- 달칵.
그 말이 들리기를 기다린 것처럼 문이 열렸다.
반짝이는 하얀 리본이 달린 동그란 구두가 마차의 계단을 밟고 올라와 안으로 들어섰다. 그 구두의 안쪽에 까만 때가 묻어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이름을 가진 말의 등자에서 묻은 것일 터였다.
- 발, 칸, 그만 두고, 좋은 왕세자 저하랑, 자상한 왕자님, 따라다닐까요? 조심히 좀, 다니라고, 몇, 번을 말해도, 또 다치고, 또 다치고, 또 또 다치고.
마차 밖의 풀 냄새가 확 전해졌다.
다 자라지 않은 어린 나뭇잎에 스치는 바람 소리처럼, 손가락이 서로 스치는 소리에서도 풀 냄새가 났다. 향기 아닌 풀 냄새가 났다.
그 구두에 묻은 때를 지워줄까 하다가.
아직 작은 것 하나만 골라 지울 만큼 마법을 다루지는 못하여서 그만두었다. 그러다 혹시나 풀 냄새까지 지워버릴까 걱정이 되어 그냥 말았다.
"그래도 정혼자인데. 염려는 안 하고 혼부터 내지."
이제 저 말이 호의인 것을 알아서, 더 의심하지 말라 했던 키리에의 가르침도 잘 배운 플란츠가 이렇게 대답했다. 마차 밖에 귀가 참 밝은 히나의 오빠가 아직 서있다는 것을 아주 잠깐 모르는 척 하고서. 순간적으로 튀어나왔다 사라지는 투기도 짐짓 못 느낀 척 하고서.
"어떻게 왔어."
- 튼튼, 이, 타고요.
성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로 대답한 히나가 급하게 걸쳐입었던 커다란 로브를 벗었다. 조금 전까지 란델이 앉아있던 소파에 그것을 대충 올려고는 플란츠가 앉아있던 침대로 걸어왔다.
- 걱정을 하니까, 혼 내는 거예요. 정혼자라서가 아니라, 저하라서 걱정하는, 거예요.
"알았어."
- 싸움도 못 하는, 사람이 왜, 맨날, 앞에 있다가, 다쳐요?
"······ 너까지."
나 부군단장이라고.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처럼 나도 맨 앞에 있어야 되는 사람이라고. 나 싸우는 걸 못 본 것도 아니면서 너까지 왜 그러냐고.
할 말이 가득 담긴 연두색 눈에 히나의 말이 다시 비췄다.
- 그리고, 누워 있지, 왜, 앉아 있어요? 어지러울 텐데.
"잘까봐."
- 아프니까, 자야죠.
"······ 자고 나면 더 아플까봐."
이 말을 들은 히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플란츠의 손에 잠겨든 것처럼 쥐여진 검은 회중시계를 건져내듯 꺼내들어 협탁에 돌려놨다. 그 대신 하얀 구슬을 꺼내 그 손에 다시 쥐여주었다. 고래 울음같던 시계소리 대신, 딸기 아이스크림같은 히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 자고 일어나도 안 아프게 고쳐줄 테니까, 그냥 자요.
마나가 모여든다.
갓 떠오르는 햇빛을 다 받아낸 호수의 윤슬처럼, 달 밝은 바다 위에 별처럼 흩뿌려진 물비늘처럼, 금빛의 반짝이같은 마나가 히나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이 보였다.
본래에는 손에서 흘러나오던 빛무리만 보였는데, 마법을 익히고 나니 마나가 모여드는 것까지 제대로 보였다. 이미 심장에 든 마력을 쓰는 마법사들은 저런 것이 없었는데 히나는 아니었다. 매번 주변의 마나를 모아다 치유력을 내는 히나였으니까.
햇빛과 달빛의 가장 고운 부분을 모으다 흘러 떨어진 것 같은 반짝이들을 한참 바라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가득했던 풀 냄새 끝에 귤 냄새가 배어 있어서.
귤 좋아하는 어느 왕자를 그렇게나 아끼는 시종이 제 사비를 들여 구해왔다던 귀한 향기를, 잠시 그 왕자로 분해 라시드를 만나러갔던 플란츠도 써본 적 있었어서. 그러니 그 향기가 히나의 머리 끝에 배어 있는 낯선 상황이 반가워서 그리 말했다.
- 이번에 다친 사람이 많았어서 저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오늘 치료한 건 지난 번에 사주신 옷값에 안 넣을 거예요.
"그럼, 어떻게 갚을까."
- 또 안 다치는 걸로 갚으라 해도 안 지키실 것 같죠.
"응."
- 생각해볼게요. 비싸게 받을 거예요.
"알았어."
통증을 줄여주던 마법이 사라진 뒤로 내내 욱신거리던 속이 조금씩 아무는 느낌이 났다. 어떤 말을 써도 그 안온함을 표현하기 어려울 빛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고양이들은."
- 체르밀 궁에 두려고 했는데 사람이 없으니까 안 가려고 해요.
고양이가 사람을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
고양이에게 손이 그렇게 많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히나의 말이 이어졌다.
- 빌헬름 관은 너무 바쁘고 메를린도 빌헬름 관에서 약제사님들 돕고 있어요. 린 영애는 그레이스 경 돌아왔다면서 만나러 나갔고요. 그래서 아르피아 궁에 데려다 놨어요.
"······ 어디."
- 전하께서 저 돌아갈 때까지 봐주신다고 했어요. 루시는 전하가 별로 마음에 안 드나본데 안네는 잘 놀아요. 그러다 지루해지면 마나실 군단장님한테 갈 테니까 걱정 마세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르메인에게 맡겼단다.
국왕의 인가 서류에 고양이 발도장이 찍히게 생겼다.
그것을 떠올려보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 * *
난리가 났다.
히나와 드미레아가 다행히 별 탈 없이 찾아왔다지만 그렇다 해서 바로 되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숲에서 밤을 지내고 날이 밝은 뒤에 배웅을 해주겠노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다.
- 우르르!
무엇이 들었을지 어떤 것을 예상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마법사들의 주머니에서 간단한 구조의 막사를 지을 물건들이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대체 왜 저런 것을 들고 다니나 싶은, 이를테면 온갖 색을 내며 반짝이는 자그마한 마법등불이라거나 몇 가지 노래를 들려주는 구슬과 악기들에 더해 사람 머리만한 공에다 거대한 낚시대같은 것들을 전부 다 꺼내놓은 뒤의 일이었다.
밖에선 그냥 해먹 하나를 걸고 자거나 침낭에 파묻혀 자는 것이 일상인 마법사들이라, 막사 지을 재료들이 주머니 속 가장 깊은 곳에 들어있던 까닭이다.
그런 마법사들이 굳이 막사를 짓는 이유는 딱 하나.
귀하디 귀하신 우리 치유사님과 치유사님을 안전히 잘 데려다 주신 소공작님, 그리고 아까부터 밖에 나와서 덴이 내어 준 의자에 앉아 말 한 마디 없이 차만 마시는 과묵한 첫째 왕자님을 한데서 재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쓰질 않아서 이미 깨끗한 천막에 연신 클린을 걸어가며 막사를 세운 뒤, 수많은 침구들 중에 제일 따뜻한 것들을 골라 안에 깔아 놓고, 누구 향초 없느냐는 말에 또 다시 우르르 쏟아지는 온갖 향의 초들 중에 좋은 것을 고르고 골라 막사 안에 들여다 놓고.
그렇게나 난리를 피우는 놈들을 슬쩍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히나 불편하지 않게 살펴줘. 드미레아도."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 없을 키리에에게 굳이 자리를 비켜달라 이야기한 뒤 마차로 들어갔다. 히나 덕에 눈이 붓지 않아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히나의 치료가 끝난 뒤에도 기어코 눕지도 않고 잠에도 들지 않고 앉아있던 플란츠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물에 불려 삶은 뒤 잘 절였다가 햇빛에 잠시 말린 듯한 완두콩이 아무 말 없이 마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가져가. 다시."
히나가 나간 뒤 도로 집어들고 있던 시계를 건넸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받아들었다.
- 틱, 톡, 틱, 톡.
- 딸깍.
- ······.
이러다 시계는 멀쩡한데 크라운만 고장나게 생겼다고.
그런 속 빈 생각이 드는 것을 밀어내고 입을 열었다.
"······ 당신이랑 만난 적이 있어."
플란츠의 동생 말고, 플란츠를 만난 적 없던 악몽 속의 고래 말고, 헤이시아 궁에 앉아 대사막 개를 보았던 일을 자랑하던 사람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다만 그것이 헤이시아 궁에서 만난 일을 알리는 것이 아님을 아는 플란츠가 대답했다.
"내가 당신한테 시나스타를 줬을 때."
"아니. 그 전에. 그 조금 전에. 사실은 조금 전 말고 훨씬 전에 카이리시스의 경매장에서도 만났을 것 같지만 나는 몰라. 나는 못 보고 당신만 나를 봤어. 아마 그랬던 것 같아. 아무튼 나는 당신이 나한테 시나스타를 주기 조금 전에 당신을 만난 적 있어."
"그럼, 언제."
"키리에가 죽고 얼마 안 됐을 때."
플란츠가 가만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원망 때문에 꺼낸 소리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베른이 말을 이었다.
"카이리스에 나는 철로 칼은 안 만들고 화살만 만들었나 싶었어. 화살이 그렇게 쏟아지는 것도 장관이긴 하던데 재미는 없었어. 쳐내고 피하기 바빠서."
오랜 항해를 마친 함선의 닻줄이 육지의 바람에 부대끼는 듯한 목소리가 시간을 계속 더듬었다.
"그 때 나는 팔이 하나 없었고 어떤 놈이 내 칼을 붙들고 늘어지다 죽었어. 그런데 딱 시기좋게 화살이 다시 쏟아지더라고. 오러도 별로 안 남고 힘은 빠지고 팔은 아파서, 저게 끝인가보다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키리에가 달려들었어."
"······ 그래."
"아니었으면 그때 당신이랑 만난 건 내가 아니라 키리에였을 텐데. 나 대신 키리에가 죽었어."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화살 날아드는 것 싫어해. 엄청."
"몰랐어."
"알아두라고 하는 소리야. 탓하는 게 아니라."
"알았어."
"누가 나 지키겠다고 내 앞으로 달려드는 것도 싫어해. 그렇게 달려든 놈들은 대부분 나를 죽이려던 것들이었지 살리려던 놈이 아니었거든. 그런데 살리겠다고 뛰어든 놈이 딱 한 명 있었는데 그 놈이 하필 내가 제일 아끼던 놈이었고 그 놈이 하필 그것 때문에 죽었어. 그래서 싫어해. 내가 살리려는 놈이 내 앞으로 뛰어들면, 죽을까봐."
"······ 그건."
무어라 대답하려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베른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렇게 키리에가 죽고 나서 얼마 뒤에 당신이 왔어. 죽여버릴까, 했는데. 당신이 나한테 그랬어. 살려줄 테니까 가라고."
풀썩, 하고.
플란츠가 앉아있던 침대 발치에 앉은 베른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까지 다 죽이면서 온 새끼가 살리는 게 뭔줄은 알고 그 말을 하나. 산 적도 없는 것 같은 새끼가 누굴 살리겠다는 말을 지껄이나. 싶어서. 내가 그랬어. 어디서 개가 짖는다고."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반대인데."
"반대지. 당신이 살린다 하고 내가 짖는다 했으니. 그런데."
- ······ 차르륵.
손에 들린 회중시계를 몇 번 굴려보다가.
그 뒤에 새겨진 카이리스의 문장을 보다가. 그 앞에 새겨진 제 인장을 보다가. 시간이 움직여 이제 다른 사람이 된 것을 잊지 말라는 듯이 새겨둔 그것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당신 동생한테 그랬잖아. 살고 싶다고. 나 그 말 진짜 많이 들었거든.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거든. 아마 내가 사는 내내 제일 많이 들은 말이 그 말일 거거든. 그런데 한 번도 알겠다 한 적이 없었거든. 그래서 당신 동생한테는 그 말이,"
"······ 알아. 나도, 이제. 그걸 어떻게 들었을지."
"그래."
고개를 끄덕이던 베른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당신 동생이 악몽을 꿨어. 깨워 줄 사람이 정작 잠에서 안 깨서, 잠깐 뱀 새끼가 됐어. 그래서 잊어버렸어, 잠깐."
- 차르륵.
"누굴 잃어버리는 게 어떤 건지 당신 동생만 아는 건 줄 착각을 했어. 당신도 그걸 안다는 것을 잠깐 까먹고 당신 말을 못 들었어."
- 차르륵.
"안 그럴게."
끄덕끄덕.
"야라고 하든 당신 동생을 부르든 나를 부르든. 괜찮으니까 불러. 그러면 깰 테니까. 또 그렇게 되더라도."
끄덕끄덕.
"미안해."
끄덕끄덕.
"식사하시죠. 배고픈데."
- 딸깍.
- 틱, 톡, 틱, 톡.
"······ 반말."
- 틱, 톡, 틱, 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