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42화 (443/527)

제78장. 내 영역에 들어왔으면(4)

청량한 기운.

내 손에 맺히던 마력과 썩 비슷한 느낌이 드는 그 기운이 어쩐지 낯설다. 그것에 막연히 신경이 쓰여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다.

'······ 클린.'

목소리가 들린다.

몸과 옷에서 진동하던 피 냄새가 사라진다.

그제야 그리 낯설던 기운 속에 달라지지 않고 들어있던 익숙함이 느껴졌다. 신경이 쓰였던, 내 것과 비슷한 기운의 마력은 분명 낯설었으나 그 마력이 만든 마법만은 익숙했다.

사실 익숙한 것이 반가웠던 적은 그리 많지 않았어서. 루시의 온기에서 전해지던 위로와 안네의 소란에서 전해지던 평온이 어느새 익숙하게 느껴지기 전까지는, 그래.

주저하듯 시작해 점점 크게 문을 두드린 뒤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던 노크 소리. 아주 드물게 어디선가 고요히 들려오던 바이올린 소리. 열린 창 밖에서 부는 다정한 바람이 어린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그때까지 느껴본 반가움이란 그것이 전부였어서.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처음 걸어주고 오늘 두 번째로 받았으나 여전히 낯설기만 한 생소한 마법 말고, 잊는 것 모르는 머리로도 몇 번을 받았었는지 다 세어보기 버거운 익숙한 마법에 불현듯 반가움이 들어서.

그래서 잠에서 깼다. 익숙하고, 반가워서.

'확인된 것이 있더냐.'

그러나 익숙함과 반비례하게 안 반가운 목소리를 듣게 되어 도로 눈을 감았다.

나를 고쳐준 것은 절대로 안 고마운데 그렇게 고쳐서 살려 둔 것에는 고맙다 말해야 할 것 같고 그렇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느니 그냥 이렇게 30년이고 50년이고 쭉 잠들어 있는 게 나을 것 같고. 그런데 그렇게 되어 버리면.

'네.'

저따위로 바뀐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여서.

눈을 뜰까. 뜨지 말까.

아주 잠시동안 고민을 하고 있는데.

'죽일 겁니다.'

이런 말이 들렸다.

그래서 결국은 어쩔 도리 없이 눈을 떴다.

그 사이 안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전부, 다.'

그 목소리 참 가관인데.

그 목소리로 꺼내는 말은 더 가관이다.

- 스륵······.

익숙한 마차의 익숙한 천장이 빙글빙글, 낯설게 도는 것을 꾹 참고 힘들게 일어나 간신히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길래 그새 제멋대로 목줄을 풀었는지.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건대 목줄에서 한 술을 더 떠 이제는 입마개를 씌우든 재갈을 물리든 해야 할 때가 된 것인지.

툭하면 여기저기 이를 드러내는 내 동생 쟤 때문에 마음 놓고 쉴 수가 없으니.

그래서 일단 입부터 열었다.

할 말 참 많았을 때에는 아무 소리도 안 나오던 입에서 드디어 소리라 할 만한 것이 튀어나왔다.

"기다려."

하고.

그 말에, 동생 놈이 발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더니 아득히 쳐다봤다.

그 눈을 봤다.

그리고 곧바로 알게 됐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 하.'

동생 놈이 부린 마법의 기운이 왜 그렇게 낯설었는지를. 그 목소리가 그렇게 형편없던 까닭을. 많이 익숙하고 조금 반가운 새빨간 눈이 지나치게 아득한 빛을 띠던 이유를.

그것을 그제야 알게 됐다.

"뭘 얼마나 더 기다리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잠들기 전 동생 놈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은 왕제로 돌아갔다 왕자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느라 바빠서가 아니었음을. 그게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 애를 쓰느라 바빠서였음을.

그러나 결국,

"······ 싫어."

돌아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돌아간 채 영영 돌아버렸다는 것을.

- 틱, 톡, 틱, 톡.

시간이 흘러서 목줄이 풀린 것이 아니라 동생 놈의 속에 든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버려서 목줄이 사라진 것임을.

"칼리······."

놈을 부르려다 그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앞에 선 사람은 내 동생이 연극을 하듯이 불러내고 물려내던 이가 아닌데. 연극을 하듯이 내 동생이 얼마든지 불러내고 물려낼 수 있는 이가 아닌데.

반대로 내 동생을 물려낸 '유령'인데.

그렇다면 나는 저 유령을 무어라 불러야 하나.

그것을 알지 못해서, 혹시나 또 오답일까봐.

- 저벅, 저벅.

더는 익숙하지 않을 발소리가 났다. 오래지 않아 마차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소음을 하릴없이 들었다.

다시 부르지도 못하고.

일어나 붙잡지도 못하고.

- 틱, 톡.

- 틱, 톡, 틱, 톡.

고개를 돌렸다.

회중시계가 보인다.

동생 놈에게 받아뒀던 회중시계. 하도 소란하게 굴기에 그것을 받은 뒤 시간이 흐르지 않도록 크라운을 뽑아뒀던, 그 후 한참이 지나 크라운을 다시 눌러두었던 시계. 그것의 시간이 어느새 또 멈춰있었다.

- 틱, 톡, 틱, 톡.

크라운이 뽑힌 채 협탁 위에 올려진 시계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이 웅웅거리듯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생 놈이 쥐고 있었을, 흐르기를 멈춘 시계에서 그렇게, 시계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 시계를 들고 있었나.

저것을 손에 쥐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제 시간을 뒤집어놓지 않으려고 애를 썼을까. 시간이 멈춰야 현재로 돌아올지 시간이 흘러야 지금으로 돌아올지, 어떻게 해야 혼자서도 악몽에서 빠져나올지. 깨워 줄 사람도 없이 홀로 잠긴 악몽에서는 어떻게 깨야 할지, 그것을 고민했을까.

과거로 돌아가버린 채로 어떤 말을 듣고 무엇을 봤을까.

마차에 막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흰 장미로 치료비를 냈을 때까지만 해도, 감사하다 인사할 때까지만 해도, 그때까지만 해도 분명 '칼리안'이었는데.

그 뒤로 지금까지 혼자 무엇을 보고 어떤 말을 듣고 누구를 떠올렸기에, 내가 잠들고 날이 저물어 다시 깰 때까지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얼마나 겁을 먹었기에.

결국 돌아가 돌아오지 않게 된 걸까.

'괜찮아.'

그 말을 할걸. 해줄 걸. 어떻게든 할 걸.

그랬으면 기다렸을 텐데.

혼자 잠겨들지 않고 기다렸을 텐데.

'형님······ 플란츠.'

기다렸을 텐데.

* * *

마차의 문이 비로소 열렸다.

그 문을 열고 나온 베른이 잠시 멈추어 섰다. 진작부터 그 문을 보고 있던 키리에가 다가왔다.

"키리에."

"네, 왕자님."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대답한 키리에를 한참 보던 베른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하피를 마주하기 전까지 걸어왔던 쪽을 바라봤다.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것임을 안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베른의 말이 먼저 들려왔다.

"아침까지는 방어막이 있을 거야. 사라지기 전에 돌아올게."

"레이븐을 데려오겠습니다. 타고 가십시오."

"키리에."

"네."

"네 검 하나 못 막을 사람 아니야. 나는."

하피가 보낸 붉은 비수를 막기 위해 칼리안은 비수를 쫓아 달려갔고 키리에는 그 앞을 막아섰다. 칼리안이 비수를 붙들어 오러를 흩어냈고 키리에는 자신의 오러를 흩어내지 못했다. 그것을 피하느라고, 그것을 피하려다가. 뒤에서 달려들던 하피를 칼리안이 보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마차 밖에 서 있는 내내 키리에는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고. 오러를 어떻게 다룰지, 그런 고민이나 해야 할 때임을 잊고 자책하는 중이리라고. 혹시나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칼리안이 제 검을 막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까 걱정했으리라고.

키리에의 속내를 그렇게 짐작한 베른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네 잘못 아니야. 사고야."

잘못이 아니라, 실수가 아니라.

그저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사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응."

"저도 같은 말씀 해드리면 똑같이 생각해주실 겁니까. 왕세자 저하께서 해를 입으신 것은 사고였으니, 제 탓이 아닌 것처럼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말씀드리면. 그렇게 생각해주실 겁니까."

"······ 나한테는."

고개를 돌린 베른이 키리에를 쳐다봤다.

어느 순간부터 오러도 피어도 다 사라진 채 고요하고 잠잠하게 가라앉아있던 붉은 눈으로 키리에를 보다 남은 답을 전했다.

"사고 아니야. 나한테는 아니야."

벌어진 일은 한 가지였고 다친 사람은 한 명인데 키리에에게는 사고였고 자신에게는 사고가 아니라 한다. 그렇게 단정 짓듯이, 문제의 답을 알려주듯이 말한 베른이 눈을 돌렸다.

발을 뗐다.

베른이 마차에서 나온 것을 본 에우리아와 아르센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 얀과 레릭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고, 둘의 모습을 지켜보다 손에 들린 수프 컵으로 고개를 되돌리는 에일라를 보지 못한 것처럼.

- 저벅, 저벅.

이제껏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키리에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 것을, 달려오려는 얀을 에일라가 막는 것을, 마차의 문이 다시 열리지 않는 것을, 들려오는 소리와 들려오지 않는 소리를 모두 들으면서.

* * *

- 저벅, 저벅.

숲을 되돌아가는 발소리가 울린다.

마차의 방어막에 작은 틈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틈 하나를 만들어 빠져나온 방어막이 다시 아물어드는 소리를 뒤로하며 걸었다. 레이븐도 데려오지 않고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며 생각을 했다.

'하피.'

이제는 없는, 카이리스의 역사서에서도 찾기 힘든 몬스터. 그러니 당연히 실제와 기록이 다를 수 있는 과거의 잔재.

겁이 많다 했다. 발톱에서 피 냄새를 풍기는 것을 보아 이미 누군가를 사냥한, 그러니 허기진 것도 아니었을 겁 많은 하피가 먼저 달려든 것은 일단 넘겼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책의 정보와 실제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리 사냥에 나서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한 마리가 살아있던 것도 기적이라 할 수 있을 일인데 어떻게 무리를 짓겠나. 그렇게 이해하고 넘겼다.

기록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는 호전적인 놈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 저벅, 저벅.

그러나 이상했다.

마력 섞인 오러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하고 해결할 줄을 아는 놈이 무방비한 시종들을 그냥 두고 칼리안부터 노렸다. 저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마법사들을 그냥 두고 가장 힘든 상대를 골라 계속 덤볐다. 싸움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다른 일행들을 공격해 칼리안의 시선을 돌린 뒤 칼리안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겁이 많다 했던 놈이 가장 강한 놈에게 그렇게까지 집착을 할 수 있나. 날개까지 다 잃은 놈이 도망갈 생각을 않고 그렇게까지 이성적으로 덤벼들 수가 있나.

- 저벅, 저벅.

글쎄.

'하피 심장 속에 그 돌이 다 부서진 채로 있네요.'

제온의 돌.

그 돌을 가지고 있던 아델리아가 떠올랐다.

아델리아가 사용하던 흑마법, 그리고 흑마법 중의 하나인 테이밍. 이제는 전서구를 훈련시키는 것에만 쓰이지만 본래는 동물과 몬스터를 세뇌시켜 길들였다던 흑마법. 그것으로 누군가 하피를 길들였을 가능성을 그제야 생각해냈다.

'이게 왜 여기 있을까.'

사라진 하피를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른다. 하피의 심장에 왜 그 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살려내기 위해 돌을 썼는지, 아니면 간혹 말을 할 정도의 지능이 있다는 하피를 세뇌시키고자 돌을 썼는지, 그것까지는 모른다.

아델리아의 손이 닿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 정신나간 마법사는 재미만 있다면 무엇이든 했을 테니 이 일에 개입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재미가 없다면 무엇이든 안 했을 테니 반드시 개입을 했으리라 장담하기도 어렵다.

- 저벅, 저벅.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하피를 만든 놈 말고 그 하피를 보낸 새끼를 잡아야 했다. 정말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남은 보리로 맥주를 만든 새끼보다 그 맥주를 마시고 주정을 부린 아르센 헤르츠에게 더 큰 잘못이 있듯이.

'다누가 개입했다.'

다누가 숲을 통해 군사를 보냈다. 숲을 통해 로닐을 보냈다. 체이스를 보냈다. 하피 역시 숲에서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다누가 개입했다. 제온의 실체는 모르지만 그들과 연결된 다누는 어디에 있는지 안다.

그렇다면 다누의 입을 열면 된다.

입을 열지 않는다면.

- 저벅, 저벅.

열게 하면 된다.

열 때까지, 다누의 자식들을 전부 다, 죽여버리면 된다.

'잊지 말거라. 너는 내 아들이다. 누구보다 나를 닮았다. 막는다면 치워내고 거슬리면 없애고 붙든다면 베어내며 사는 것이 네 길인데, 지키겠다니. 망상을 하였구나.'

'네 형제가 그리 중하다면 어디 한 번 해보거라. 피에 절은 손으로는 네 형제도, 너도, 결국 그 어떤 것도 지키지 못할 테니.'

'······ 아니지. 결국은 한 길이겠구나. 이제껏 네 말을 망상이라 여겼는데, 결국은 한 길이구나. 그래. 다 죽여 없애고 체이스만 남겨두면 체이스는 지켜질 테니.'

그래.

다 죽이면 될 일이다.

엘프를 다 죽여 다누가 입을 열게 해 제온의 핵을 찾고 그들을 찾아가 다 죽이면 된다. 그렇게 하면 될 일이다.

'누구를 원망하느냐. 네 악몽 속에 매일 나를 불러내면서.'

'원망이 아니면. 네가 갈 길을 알려 줄 이가 필요했더냐. 그래서 이미 죽은 나를 또 이리 찾아 부른 것이냐. 이제 누굴 죽여 없애야 체이스를 지켜낼지, 그것이 아득하여 나를 불렀더냐.'

- 저벅, 저벅.

'그것 참 보기 좋구나. 칭찬을 해주마. 축하를 해주마. 실로 대견하다 해주마. 네가 기어코 그렇게 체이스를 지켜냈으니.'

악몽이든 환상이든 다 상관없으니.

이제는 다 상관없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지켜내 보거라. 내가 축원해주마.'

그래.

예전에도 그러했듯이. 그때처럼 똑같이 하면 된다.

- 저벅, 저벅.

내가 어떻게든 지켜내면 될 일이니.

어떻게든 지키기만 하면 될 일이니.

내가 어떻게 하든 무엇을 하든 살려놓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방법이야 무엇이든 이제 더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 저벅, 저벅.

그래서 앞으로 가던 발을 멈췄다.

마차에서 나와 돌아섰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 걸었다.

그렇게 걷던 길이었다.

- 다각, 다각.

- ······ 저벅.

그런데.

그렇게 돌아가던 나를.

- 아, 찾았다.

생각지도 못한 손짓이 나를.

마주쳐오는 손짓이 나를.

불러세워서.

- 이 길로, 가신 게 아닐까봐, 걱정했어요.

길을 잃고 되돌아가던 나를 불러서. 내 앞에 서서 마주보며 나를 불러서. 혼자 걷던 어두운 길을 밝혀주며 나를 불러서.

- 자상한, 왕자님.

베른도 아니고 칼리안도 아닌 이름으로.

그런 이름으로 나를 불러서.

"······ 히나."

발을 멈췄다.

나도 모르게 발을 멈춰 섰다.

그리고 손톱을 세워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톱 끝에 닿은 손바닥에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이런 곳에서 마주친 갑작스런 빛이 혹시나 거짓일까, 이것도 환상일까 악몽일까, 혼자서는 가늠이 되지 않아 그랬다.

그런데 아팠다.

분명히 아팠다.

히나가 왔다.

그것에 놀랄 겨를도 없이, 로닐처럼 체이스처럼 가짜인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볼 여유도 없이 달려갔다. 아무리 봐도 백금색이 맞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이름을 가진 좋은 말 위에서 내리던 히나에게 한걸음에 달려갔다.

"어떻게 왔어. 왜 여기 있어. 어떻게 여기 있어."

- 오빠가, 연락을 했는데, 아무리 해도, 연결이 안 돼서, 다시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오래 기다렸는데, 계속, 말이 없었어요. 그게, 걱정이 되어서요. 오빠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히나가 통신용 귀걸이를 가리켜 보였다. 방어막 밖으로는 마력이 나가지만 들어오지는 못하니까. 때문에 키리에로부터 통신이 왔으나 연결이 되지 않아 애를 태우다가 직접 찾아온 모양이다.

히나가, 이렇게.

- 군단장님께 말씀드리면, 같이 오자, 하실 것 같아서. 그런데, 군단장님은 오시면 안 된다고, 들어서요. 그래서 저기, 저렇게······.

말을 하던 히나가 뒤를 돌아봤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검은 말이 그제야 보였다. 나무 그림자에 묻혀 보이지 않았던 검은 사슬 갑옷도 그제야 보게 되었다.

- 절그럭!

무거운 검 소리가 뒤늦게 들렸다.

- 소공작님께 잠시만, 같이 가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말도 안 되는 얼굴을 하고 걷고 있던 칼리안으로부터 한참을 떨어진 곳에서 더 다가오지 않은 채로, 드미레아가 인사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뒤 다시 히나를 봤다.

걱정 가득한 새까만 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키리에는 괜찮아. 잘 있어. 아무 일 없어."

- 다른 사람들은요? 다들 괜찮아요?

"응. 아무 일 없어. 다들······."

그렇게 말을 하다가.

문득 안심이 되어서.

"······ 히나."

히나가 있었구나, 하고.

그것 하나를 깨닫게 되어서. 한심하게도 이제서야.

"히나······ 히나."

레이븐보다도 더 큰 검은 말 위에 멋진 정혼자가 있던 것도 잊어버리고, 무엇을 하러 돌아가던 길이었는지도 잊어버리고, 누구를 향해 칼날을 세우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리고.

"내가 악몽을 꿨어······ 이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악몽을 다시 꿨어."

다 까먹어버리고.

괜찮지 않았다고.

그렇게 대답했다.

- 그래서 또, 아팠어요?

히나는, 악몽을 꾸면 아프다 했던 말을 하나도 안 잊어버렸다. 그런 히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아팠어. 무섭고, 겁이 나서······ 아팠어."

무엇 하나 감출 수도 없게 해 주는 토닥임에 비로소 안심이 되어서. 숨기지도 못하고 다 말을 했다.

히나가 왔으니까.

히나가 있으니까.

- 이제 괜찮아요.

빛이 든다.

상처가 있어 하는 말이 아님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발칸의 대원들을 치료하다 이곳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 겁먹고, 무서워 할 것, 없어요. 자상한 왕자님이, 더 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히나가 이런 말을 했다.

어린애를 달래주듯이 꺼내는 말에 결국은 웃음이 났다.

- 다 아프고 나서, 오지 말고, 아플 때 오세요. 제 때 와서, 치료해달라고, 하세요. 저 있는 것, 잊어버리지 말고요.

잊어버리지 말라는 말에 대답을 하려다 결국은 울음이 났다.

"······ 응."

어린애처럼.

무서운 꿈에서 깨어 이제야 마음을 놓은 어린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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