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41화 (442/527)

제78장. 내 영역에 들어왔으면(3)

짜증이 났다.

분명 진작부터 익혀두었을 마법.

동생 놈이 결코 스스로를 위해 익혔을 리 없는 마법.

'아브턴던트.'

그 덕에 아픈 것이 사라지니 짜증이 났다.

'두십시오.'

'란델 형님 목숨 깎아가면서······.'

'몇 날이든 몇 분이든 줄어드는 것 아닙니까.'

'······ 감사합니다.'

보이는 것 하나 없이 어렴풋이 들려오던 말들 때문에.

목숨이 경각인 건 나고 목숨이 줄어드는 건 저 사람인데 내 동생이 거절하고 있어서. 치료받는 건 나고 치료하는 건 저 사람인데 내 동생이 감사해하고 있어서. 살려주는 건 내 목숨인데 저 사람이 그 값으로 받은 흰 장미는 내 동생이 준 것이라서.

둘 다 간과한 것 같지만 지금 멋대로 사이좋게 주고받는 그 목숨 사실 내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흰 장미 말고 차라리 미스릴 가위로 값을 받아라, 고작 몇 분 덜 살게 되는 것 가지고 그렇게 비장하게 굴지 말아라, 말을 해야 하는데.

내 동생 쟤가 체이스의 심장을 가지고는 꿋꿋하게 저울질을 했던 놈이다. 그러니 내 동생 쟤가 형님의 몇 분을 저울에 올리지 못하는 건 위험한 왕궁에 전하를 못 보내겠다 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니까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지 말고 반성이나 하셔라.

그러고보니 정신 나간 놈이 지금 왕제로 돌아갔다 왕자로 돌아왔다 하느라 하도 바쁘셔서 저 사람 말고 내 편 들어주기로 했던 것을 다 잊으셨나보다. 그렇게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아서 짜증이 났다.

그나저나 내 목숨값 네가 마음대로 치르지 말라고.

나 대신 멋대로 나서서 감사하다 인사하지 말라고.

내가 나가서 벌어졌던 일을 두고 자책하지 말라고.

대체. 목소리가 왜 그따위냐고.

안 죽을 거니까. 숨 좀 쉬면 안되겠냐고.

말을 해야 하는데 나오질 않아서 짜증이 났다.

'괜찮아.'

저 놈은 그 말을 제 때 해줬는데.

그 말을 언제 해주면 되는지를 알려줬는데.

분명히 배웠는데. 짜증나게 그 짧은 말도 해주질 못하고. 당신 때문이 아니라는, 네 탓이 아니라는 그 말도 결국 전해주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 * *

- 딸깍.

- 틱, 톡, 틱,

- 딸깍.

- ······.

- 딸깍.

- 틱, 톡, 틱, 톡,

- 딸깍.

- ······.

겉보기와 내부가 완전히 다른 마차.

급한대로 소파에서 치료를 마친 환자를 옮겨 둘 침실까지 있는 왕실의 마차. 그런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것을 가만히 들으며 마차 외벽에 기대 서 있는 키리에의 앞에 커다란 컵 하나가 내밀어졌다. 으깬 감자와 베이컨이 든 따뜻한 수프였다.

"괜찮습니다."

란델은 돌의 힘에 더해 보다 강해진 축복까지 지닌 사람이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맹독은 눈치도 못챌 것이라서, 칼리안은 플란츠의 독을 어느정도 해독한 란델이 마차 안의 소파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기대는 것을 그냥 두었다.

그러나 키리에는 아니었다. 진작부터 쫓겨나 있었다.

전염병은 아니었으나 혹시나 독기운이 마차에 남아있을까 우려한 까닭이다. 축복을 지닌 플란츠마저 몇 분만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는데 그조차 없는 일반인이 독에 노출된다면. 전해지는 말마따나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나.

"저하는 좀 어떠십니까?"

그러니 당연히, 레릭은.

"아직 다른 말은 들리지 않습니다."

"······ 네."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칼리안에게 부축을 받으며 마차로 들어간 플란츠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있었다.

에반 때문에 쓰러졌을 때에는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 하더니. 지금의 레릭은 정신 잃은 칼리안을 앞에 둔 얀 정도로는 침착해졌다. 확연히 굳은 얼굴로 앉지도 않고 물도 안 마시고 계속 마차 주변을 오가며 키리에를 채근하고 있기는 했지만 울지 않았다.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것은 플란츠가 일어난 뒤로 미뤄두기로 한 모양이라고. 얀이 그렇듯이.

그렇게 생각한 키리에가 멀리 발칸의 대원들과 함께 앉아있는 얀과 덴 쪽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깨어나시면 알려주겠습니다."

"······ 네."

조용히 대답한 레릭이 수프가 든 컵을 도로 들고 걸어갔다. 거절한 수프를 당신이라도 좀 먹으라고 말했어야 했나, 잠시 생각하던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얀이든 덴이든 혹은 다른 사람들이든 같은 말을 해 줄 이가 꽤 많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 딸깍.

- 틱, 톡,

- 딸깍.

- ······.

- 딸깍.

- 틱, 톡, 틱, 톡,

- 딸깍.

- ······.

레릭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마차 안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플란츠의 주머니에 있었을 회중시계의 크라운을 뽑았다가 돌려놓는 그 소리가 다시 들린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듯이.

흐르지 않는 시간을 참아내지 못하는 듯이.

"후우······."

앞으로 계속 가야할지를 알려 줄 사람이 없던 까닭에 멈춰 선 마차. 날이 저물도록 움직이지 않는 마차에 기대 날이 저물도록 같은 소리를 듣고 있던 키리에가 긴 한숨을 쉬었다.

크라운을 건드릴 때마다, 초침소리와 칼리안의 숨 소리가 같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것을 듣고 있던 까닭에.

* * *

국왕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

왕궁에서 일하지 않는 일반적인 귀족들이 회의나 만찬이 진행되는 세뉴 관 다음으로 많이 찾는 곳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아르피아 궁의 문턱이 귀족이라면 누구든 아무때나 드나들 수 있는 세뉴 관만큼 낮지는 않았다. 그럭저럭 까다로운 사전 절차가 있어야 방문이 허락되는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국왕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곳이니까.

때문에 사전 허락 없이 아르피아 궁에 들어섰을 때 기사들이 발을 막지 않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왕세자와 왕자들, 국왕이 아님에도 그곳에 집무실을 두고 있는 앨런 마나실 후작을 제외한다면 카이리스의 마법사 협회장이나 발칸의 사단장 이상은 되는 정도의 직위가 있어야 했다.

그도 아니라면.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지그프리드거나.

"그래. 따로 보는 것이 오랜만이구나, 소공작."

"네, 전하."

직위니 작위니 하는 말이 불필요한, 그냥 지그프리드.

아르피아 궁에 들어올 허락을 받은 귀족들이라 하더라도 결코 구경할 수 없는 국왕의 후원. 왕족과 앨런만 발을 댈 수 있는 그 조용한 곳에서 산책을 하던 르메인에게 사전에 약속되지 않았던 드미레아의 방문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르메인은 슬레이만도 와본 적 없던 후원으로 드미레아를 곧장 불렀다.

물론 정확히 말한다면 슬레이만이 못 간 것이 아니라 안 간 것이다 해야 할 일이지만, 어쨌든 중요한 점은 르메인이 굳이 드미레아를 그 문턱 높은 곳에 들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 절그럭!

심지어 드미레아의 검을 풀어두라 하지도 않고서.

그러니까 이것은 이를테면 '칼리안과 손을 잡은 지그프리드에 대한 국왕의 신임이 어느 정도인지를 상기하라'는, 그리고 '칼리안이 귀족들 앞에서 왕세자위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한들 칼리안을 내치거나 경계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표현인 것이다.

귀족 세력의 가장 큰 파이였던 브리센이 다시 흔들리는 이 상황에, 귀족들이 다시 어느 한 곳에 모여들고자 한다면 지그프리드가 그 축이 되는 것이 가장 낫다 여겼으니까.

"팔은 괜찮으십니까."

그런 르메인의 속내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드미레아는 그 무거운 검을 허리에 맨 채로 아르피아 궁의 후원에 들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르메인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화살에 관통됐다 하나 뼈를 다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축복이 강해진 덕에 상처는 큰 무리없이 잘 아물고 있었다. 때문에 아들들에게도 듣지 못했던 걱정을 들은 르메인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버지에게 전하께서 아버지 대신 다치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나보다는 공작의 부상이 심했는데, 어떠하더냐."

"무탈합니다. 며칠 쉬는 정도면 된다 하였습니다."

"그래."

나중에 슬레이만을 만나면 '생각해보니 그때 고마웠다'는 말이나 해야겠다 마음을 먹은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몇 차례.

그리 큰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상적인 대화가 잠시 오갔다.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 갑작스레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고, 갑작스레 르메인을 찾아 온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지도 않은 채로.

그렇게 다시 얼만큼 시간이 지나 아르피아 궁의 드넓은 뒤뜰에 만들어진 낮은 언덕을 반쯤 가로질렀을 무렵.

"그 아이에게도 소식을 전했을 테지. 영특한 아이라 했으니."

지루하게 고여있는 차 대신 좋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을 보던 르메인이 물었다. 그러자 평소답지 않게 긴 인사까지 꺼내두며 오래도록 말을 골랐던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네. 같은 가문의 일이라서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에게 해가 갈까 걱정이 되던가."

"그렇습니다."

르메인이 브리센 전체를 쳐낼지, 라시드만 쳐낼지.

상황에 따라 리리에에게도 영향이 갈 수 있는 문제라 찾아온 길이었다. 물론 칼리안에게는 따로 언급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칼리안은 리리에의 사정에 대해서까지 신경을 써야 할 이유도 권한도 없다 여겼으니까.

"이번 일에 대해서는······ 벌을 내려야겠지."

"그것은 가문에 대한 벌입니까."

"실은 계속 고민을 하고 있었다. 왕실 숲과 왕궁에 침입이 있던 일이니만큼, 브리센에 내릴 벌과 베른 경에게 전할 상에 대해 신중히 결정해야 할 듯 하여서."

칼리안은 그레이가 제 아들을 직접 고발하리라는 예측까지만 전했었다. 그것을 두고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르메인이 결정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그 선을 결코 넘어서지 않는 칼리안이니 그 이후에 이뤄져야 할 상벌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칼리안을 대신하여 르메인의 고민이 커질 수밖에.

"브리센 남작이 이번 일과 관련이 없다 한들 칼리안에게 해를 가했던 일이 있었고, 그 후 플란츠와 란델과도 충돌을 빚었던 듯 한데. 그래서인지 이번 일에도 그가 개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구나."

"그 점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만약 그것이 의심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브리센 남작에 대한 벌은 확실히 내릴 생각이다. 다만 브리센 후작의 말을 참작하여 남작 하나만을 벌하고 마무리할지에 대해서는, 이번에 생포한 이들에 대한 심문이 끝날 때까지 조금 더 숙고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한 르메인이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작년에 칼리안이 크게 다쳤을 때 지그프리드에서 보호를 해줬었지. 그 일을 시작으로 이제까지 여러모로 도움을 준 것을 안다. 정혼자의 일도 그러하고."

"네. 맞습니다."

"그 값을 나중에 받겠다 하였는데. 해서 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드미레아가 주저않고 답했다.

슈린츠 변경백을 구조한 일에 대해 칼리안이 공로를 챙겼던 것처럼 드미레아 역시 그러하지 않았던가. 이제껏 지그프리드에서 칼리안에게, 그 뒤의 르메인에게 도움을 주었던 일에 대한 대가의 일부를 돌려받으러 온 길이었다.

혹시나 브리센 전체를 벌하게 되더라도 리리에는 그 처벌 대상에서 제외해달라고 말이다.

칼리안에게 도움이 되었던 일의 값은 칼리안에게 받겠으나 칼리안과의 동맹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르메인의 이득에 대해서는 당연히 르메인이 갚아야 할 것이 아니겠나.

"혹시나 브리센에 대해 칼을 휘두른다 하여도 그 아이에 대해서까지 눈을 둘 생각은 없었다. 가문의 득을 나눠받은 적도 없는 아이인데 벌을 나눠가질 필요가 있겠느냐."

브리센에서 내버린 아이.

혹시나 브리센과 엮일까. 르메인은 그것을 우려하여 브리센과 실리케가 만든 재산을 단 한푼도 플란츠에게 넘겨주지 않았었다. 왕실로 환수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 재산은 모조리 다 그레이의 손에 쥐여주고, 칼리안이나 란델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실리케에게 직접 하사한 영지 한 곳만 물려받게 했었다. 그렇게 해야 브리센과 벌을 나눌 필요도 없어지니까.

리리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이가 모르는 척했던 아이가 아닌가. 에반과 레넌이 죽은 뒤, 그들의 유산과 권리를 티끌만큼도 나눠받지 못한 아이다. 그런 리리에가 브리센이 받을 벌을 나눠가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는 안다. 굳이 칼리안의 일을 값으로 치지 않더라도, 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 약속하마."

"알겠습니다."

고맙다는 말이 아니라 알겠다 대답하는 소공작을 보며 살짝 웃은 르메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소공작."

"네. 전하."

"차라리 그 아이를 지그프리드로 들이는 것은 어떨지.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그 아이에게는 그것이 더 득이 크지 않나, 하고."

귀족들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자신의 가문에 들이는 것은 퍽 빈번한 일이다. 작위를 계승하여 가문을 이어나가야 할 후계가 마땅치 않거나 없다 해서 가문을 닫을 수는 없으니까.

그 아르센 헤르츠도 실상을 따진다면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평민이 아니었던가.

"아직은 지켜보고 있습니다."

"혹시나 그 아이를 브리센의 다음 가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더냐."

"다음 가주는."

드미레아가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플란츠를 브리센의 새 가주로 만들겠다 했던 칼리안의 이야기가 생각났고, 그 사실을 르메인이 아직 모르는 듯했기 때문이다. 물론 칼리안이 이제 브리센을 아예 닫아버리겠다고 마음을 바꾸었음은 드미레아도 몰랐지만.

"필요하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정도로만 막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아이가 조금 더 자라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지켜보려 합니다."

그래서 드미레아는 이렇게만 대답을 했다.

플란츠의 뒤를 잇든 플란츠를 대신해 잇든, 리리에를 브리센 후작으로 만드는 것도 썩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이 소리를 들은 르메인이 드미레아를 잠시 보다가,

"그 아이가 제대로 된 보호자를 두고 있구나. 다행한 일이다."

이런 말을 했다.

그 뒤 '아무리 그래도 전하같은 사람에게 그런 칭찬을 듣고 싶지는 않다'는 얼굴이 된 작은 코끼리를 보며 소리없는 헛기침을 했다.

* * *

딸깍.

- 바깥 정리 끝냈어요, 왕자님.

- ······ 그래.

틱, 톡, 틱, 톡,

딸깍.

······.

딸깍.

틱, 톡, 틱,

- 제가 하피도 살펴봤는데,

- 왜.

딸깍.

- 화 내지 말아요. 안전한 것 확인하고 들여다 본 거니까.

- ······ 그래서.

- 마석은 없었어요.

딸깍.

틱, 톡, 틱, 톡.

- 그래.

- 대신 다른 게 나왔는데.

- 뭐.

딸깍.

······.

딸깍.

틱, 톡, 틱······.

- 제온의 검은 돌. 놈들이 가진 것보다 더 크지만 똑같이 생긴 돌. 하피 심장 속에 그 돌이 다 부서진 채로 있네요. 이게 왜 여기 있을까.

······ 딸깍.

내도록 만들어내던 시계 소리가 비로소 멈췄다.

그러나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조용히 손을 뻗었다.

- 차르륵!

협탁 위에 시계를 내려놓은 베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아있던 란델을 쳐다봤다.

귀를 괴롭히던 시계 소리가 드디어 멈춘 것을 알았을 텐데도, 란델은 여전히 침대에서 등을 돌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계속 혹사된 몸이 힘든 것인지 처음으로 힘을 쓴 심장의 돌 때문에 힘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베른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상태가 되지 못했으니까.

애초부터 의자에 앉아있지도 않았던 까닭에, 서있던 자세 그대로 시선만 돌린 베른의 눈이 침대 위를 향했다.

해독을 마친 뒤 속이 아무는 것까지 란델에게 맡길 수는 없던 까닭에. 나머지는 란델의 생명이 아니라 시스파니안의 축복으로 치료하도록 두기로 한 까닭에. 밖으로 나가 히나를 불러오는 것도 어쩌면 함정일지 모른다는 키리에의 말에 설득되기로 한 까닭에.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희멀건한 놈에게선 계속 피 냄새가 났다. 그 옷에 묻은 피가 어느새 검붉게 변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얼룩에서도 피 냄새가 났다.

[······ 클린]

한참동안 기억을 뒤져 마법 쓰는 법을 되떠올린 베른이 마력을 운용했다. 익숙하지 않은 듯한 청량한 기운이 맴돌며 아릿한 피 냄새를 씻어간다.

- 저벅.

이제껏 그냥 두었던 핏자국을 지운 베른이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마차의 문 쪽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확인된 것이 있더냐."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새 눈을 뜬 란델이 이렇게 물어왔다. 고개만 끄덕이려던 베른이 란델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입을 열었다.

"네."

"그래서, 가려는 것이냐."

"네."

"어디로."

"다누에게 갑니다."

"가서. 무엇을 하려고."

"죽일 겁니다."

"누구를."

붉은 눈이 다시 움직인다.

침대 위를 살폈다. 그새 다시 돌기 시작한 피 냄새를 살폈다.

"전부, 다."

베른이 대답했다.

란델은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기다려."

비로소 일어난 형의 낮은 목소리가 베른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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