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장. 내 영역에 들어왔으면(2)
[아브턴던트]
서클이 부족할 때부터 이미 익혀두었던 것.
이제는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나 효과를 확인할 날은 결코 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을 위해 마력을 운용했다.
피 비린내가 옷을 적신다. 손을 물들인다.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다시 한 번 마력을 운용하면 그 붉음을 지울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잊은 머리는 마법 대신 기억을 불렀다.
'누구를 원망하느냐. 네 악몽 속에 매일 나를 불러내면서.'
지나온 날의 소리가 찾아든다.
기억을 물리지 못한 새빨간 눈이 숨을 놓치고 침잠했다.
'왕자님같은 기사로 살다 죽겠다 했습니다.'
'네가 있는데 무엇을 걱정할까.'
'정신 차리십시오. 멈추지······ 마십시오.'
'네 형제가 그리 중하다면 어디 한 번 해보거라. 피에 절은 손으로는 네 형제도, 너도, 결국 그 어떤 것도 지키지 못할 테니.'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왕제님, 푸른 솔새가······.'
'제발······ 물 밖으로 나와 토해내기라도 하십시오.'
'그리 하지 말거라. 그저······ 그저 있거라. 부탁이니······ 베른. 그저 있거라. 내가 이렇게 부탁할 테니······.'
지켜내겠노라 마음 먹은 것들을 지켜냈던 적이 없었다. 뒤죽박죽 찾아드는 그 기억을 다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 베른 세크리티아가 세렌티의 이름을 빌어, 나의 유일한 주인이 되실 체이스 세크리티아 왕자께······.'
지키겠다 마음 먹은 것들 대신, 지키려 했던 사람보다 먼저 죽겠다 했던 맹세 하나만 겨우 지켰다. 그러니 그것은 결코 지켜낸 것이 아니었고 그러므로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삶이었다. 어떤 것도 어느 누구도 무엇 하나도 지켜내지 못하고 끝난 삶이었다.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지키지 못한 생이었다.
'살고 싶어서.'
그래도 이번에는 다르리라고.
그랬으니 이번만은 다르리라고.
생각했는데. 다짐했는데.
"······ 또······."
그런데, 왜, 이렇게.
대체,왜,또,이렇게,다시. 나는.
나는.
피냄새를 또 맡게 되고. 결국 다시 맡게 되고.
가장 안전했어야 했을 곳에서.
당연히 그랬어야 했던 곳에서.
내 손이 닿았던 곳에서, 그럼에도 다시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이 이미 전부 다 완연한 독이었던 놈에게, 내가. 디디는 곳과 전해지는 말과 들이닥치는 숨이 모조리 다 온전한 독이었던 놈에게, 또, 독을, 이렇게, 내가. 결국 이번에도 여전히 나는, 또. 다시 이렇게, 내가.
'어련히 알아서 살려주실까.'
뱀이 보낸 바다에 빠져들어 유령을 다시 만났다.
세레누스에 깊이 취해 화살의 비를 다시 맞았다.
그날의 성문 앞에서 얼었던 심장이 다시 멎었다.
차마 어찌하지를 못하고 기어코 또 그리 되었다.
"······ 아니야."
나는, 또.
내가, 또.
또. 이렇게. 지켜내지 못하는 생이.
다시 반복될까봐.
겁을 집어먹고서.
"당신, 탓이 아니야······ 칼리안."
전해지는 말을 하나도 듣지 못하고.
* * *
-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이 이렇게 물어왔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가 대답했다.
- 위험할 것을 몰랐습니까.
-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벌써 풀어놓기에는 아직 시기가 이른 것 같으니······.
- 벌써라니.
상대방의 말을 끊은 그가 웃음 소리를 냈다.
상대방은 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하고 싶던 말을 접어두고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 때가 되어 움직이는 것에 정해진 시기가 있겠습니까. 상황이 그리 되었으니 풀어두라 하는 겁니다.
- 때가 되었다니. 앨런 마나실이 처리된 겁니까.
- 아직입니다. 허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 앨런 마나실을 두고 그것을 꺼내라 하면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까.
- 앨런 마나실은 카이리시스에 있습니다.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대답에 상대방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화내지 않았고 웃음을 접은 상대방이 말을 보냈다.
- 앨런 마나실이,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 해서 없는 전력으로 셈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남작.
비아냥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에도 그는 여전히 화내지 않았다.
상대방은 카이리시스에서 일어났던 일을 제대로 모르지만 그는 아니었다. 이번에 그의 계획이 많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상대방보다 그 스스로가 몇 배는 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화를 내지 않았다.
- 앨런 마나실은 때맞춰 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그러졌던 계획의 가장 큰 축이었던 앨런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신을 가졌다. 이전의 계획이 틀어진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 해서 앞으로의 계획까지 망가질 리 없었으니까.
- 남작의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 장담합니다. 앨런 마나실은 오지 못합니다.
- 섣부른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번에는 그가 코웃음 소리를 냈다.
상대방이 보내온 것과 썩 비슷한 소리를 따라했다. 그리고 하나만 알고 둘은 가늠하지 못하는 머리를 가진 상대방을 위해 귀찮음을 물리고 설명을 더했다.
- 그것을 상대하려면 결국 그들은 마차에 둘러진 시스파니안의 힘을 끌어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대응할 방법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다만 반대로, 그렇게라도 대응할 방법이 있다면 그들은 절대로 앨런 마나실을 부르지 않을 겁니다.
- 어째서 절대로 부르지 않는다 장담합니까.
- 검은 고양이가 늑대 새끼를 품어 안고 갔습니다. 그것 하나를 지키는 것에도 이미 급급할 테니, 그 와중에 앨런 마나실까지 밖으로 불러내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절대로.
다시 한 번 장담을 했다.
상대방이 여전히 못미더워하는 목소리를 보냈다.
- 하지만 남작의 말대로 그들이 시스파니안의 힘을 쓴다면 위험에서 쉬이 벗어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정도 일이 벌어지면 배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앨런 마나실을 불러오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그것, '그 괴물'을 풀어놓은 이후에 우리가 증거를 없앨 시간이 부족합니다.
- 걱정이 과하십니다. 시스파니안의 힘을 쓰고 나면 한동안은 그 누구도 부르지 못할 텐데. 앨런 마나실을 어떻게 불러온다는 겁니까.
그의 말에 상대방이 침묵으로 답했다.
그의 인내심이 달하기 직전, 비로소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소리를 낸 상대방이 말했다.
- 마차의 대마법 방어······ 외부로의 통신이 안되겠군요.
- 맞습니다. 시스파니안의 힘이 작동하면 마차를 중심으로 마법 금제가 걸려 외부와 단절되니, 시간이 지나 방어벽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그 고양이라면 빠져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특별한 일이 있기 전에는 굳이 혼자 떨어져 나와 나가려 하지 않을 겁니다. 마차를 이끌고 휘트린까지 가면 안전이 보장될 텐데 일행을 두고 나갈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상황을 정리할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설득이 된 것인지, 상대방은 더 이상 앨런에 대한 우려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걱정거리를 전해왔다.
- 상당히 소란해질 겁니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답답한 질문이다.
잠시 말을 접고 인내심을 부리던 그가 답했다.
- 이미 소란합니다. 이보다 더 소란해지기도 쉽지 않을 만큼 소란합니다. 그까짓 것 하나가 나타났다 해서 특별히 여겨질 수 없을 만큼 소란해졌습니다.
- 카이리시스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 곧 알게 될 겁니다.
- 남작. 정확히 설명을 해 줘야, 나도 남작을······.
- 오래 이야기 할 시간 없습니다. 늦기 전에 내어놓으십시오.
상대방의 말이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인내심을 꺼내며 침묵했다.
- 만약 이 일로 문제가 생긴다면, 남작.
- 당신이 책임질 일은 없을 겁니다.
- ······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그제야 상대방으로부터 원하던 대답이 들려왔다.
그제야 흡족하게 웃은 그가 말했다.
- 휘트린의 이동 마법진 인근 숲. 그곳에 꺼내두면 됩니다.
- 숲에다 풀어두라는 말입니까.
- 그렇습니다.
- 어차피 꺼낼 것이라면 인적이 많은 곳이 낫지 않습니까.
- 숲이어야 합니다. 반드시.
상대방의 말이 더 전해지지 않았다.
그, 라시드 브리센이 통신을 마친 까닭이었다.
* * *
스산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발칸의 기사들이 입술을 깨물었고 마법사들이 뒤로 물릴 뻔한 발을 붙들었다. 아르센은 숨을 참았으며 에우리아는 숨을 내쉬었다. 란델이 마차의 소파에 몸을 더 묻었고 에일라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느끼는 것을 함께 겪지는 못하였으나 분위기마저 알지 못할 리 없을 얀과 덴, 그리고 레릭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멀리 실드 쪽으로, 그 외부에 칼리안과 플란츠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저지당해 제자리에 선 채로.
그렇게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죽는다.'
그럴 리 없음을 알면서도, 사방을 잠식하며 죄여오는 살기와 공포감에 반응하는 본능 때문에.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고 편안히 숨을 쉬고 소란히 걱정하지 못했다.
- 저벅.
살아있는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 터져나오는 살기와 세상 전부를 나락에 밀어넣을 듯 흘러나오는 공포감을 버텨낸 키리에가 발을 옮겼다.
그러나 단 한 발을 내딛었을 뿐.
키리에마저 그 이상 앞으로 가지는 못했다.
숨을 막는 기운에 빠져들어서가 아니라,
"오지 마. 아무도."
칼날을 품은 듯 아무것도 들지 않은 목소리가 걸음을 막은 까닭에. 그래서 더 다가서지 못하고 발을 멈춰 세웠다.
"······ 독이 있어."
붉은 눈이 들어올려졌다.
자신을 향해 말없이 다가오던 키리에를 쳐다봤다.
하피의 맹독에서 몸을 보호할 수 있을 이가 아니라면 누구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서. 클린만으로는 독성까지 모두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서.
그래서 칼리안 자신과 달리 오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키리에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고 서서히 의식을 놓쳐가는 플란츠를 혼자 부축해 마차로 옮겼다.
시커멓게 죽은 땅.
새파랗게 질린 왕세자의 얼굴과 흰 옷에 얼룩진 선연한 피.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는 이도 없었다.
- 달칵.
온 몸에 실드를 두른 아르센이 곧바로 주변 정찰에 나서고, 에우리아와 다른 마법사들이 땅의 독기운을 씻어낼 계획을 세우는 사이. 어느새 촘촘하게 모인 기사들이 몇 겹을 둘러싼 마차에 레릭을 포함해 누구도 들어오지 않도록 짧은 지시를 내린 키리에가 칼리안을 따라 들어왔다.
"사고가 생겼더냐."
플란츠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란델이 놀란 기색도 없이 물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짙푸른 바다의 심연이 담긴 눈을 한 번 쳐다본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나 깊은 바닷속에 이미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키리에. 히나는."
란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대답이 되었다.
간신히 숨을 이어나가는 상태의 플란츠를 데려온 칼리안이 히나를 찾고 있는 상황이, 사고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시도해봤습니다만. 연결되지 않습니다."
"······ 그래."
마차 주변의 에일라와는 통신이 가능했으나 카이리시스로는 통신이 차단되었다. 왕궁 북쪽 숲의 방어막 안에 있던 앨런이 칼리안과 연락하지 못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스파니안의 마력으로 대응이 가능한 범위 밖에서 보내지는 장거리 공격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통신 마법이란 양측의 마력이 서로 이어져야 발현되지 않던가. 과거 체이스가 아리안느나 테일란의 도움 없이는 칼리안의 말을 듣지 못하던 일처럼 말이다. 그러니 마법 방어 범위 안에서는 히나를 불러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쪽에서 마력을 보낸다 해도 밖에서 보내오는 마력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이 주변을 벗어나 불러오겠습니다."
"내가 가."
울컥, 하고.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르게 새어 나온 피가 플란츠의 옷을 다시 적셨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던 칼리안으로부터 높낮이 없는 말이 이어졌다.
"······ 그게 빨라."
스스로를 향해 쏟아내듯 흘려내는, 갈무리하기를 포기한 살기와 피어가 플란츠를 향하지 않도록 계속 애쓰면서.
버티겠지.
심장이 갈라질 뻔한 상처도 버틴 놈인데. 맹세의 인이 걸어오는 속박도 버틴 놈인데. 르니에리 향기도 버티는 놈인데. 그것을 다 버티고 세크리티아의 방벽을 넘어 온 놈인데. 기어코 그렇게 시간의 축 앞에 섰던 놈인데.
이 정도 독 쯤이야.
"버티겠지."
계산일지 믿음일지 바람일지 모를, 누구에게 향한 말인지도 모를 말을 마친 칼리안이 한 발을 뒤로 물렸다. 더 지체하지 않고 가능한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가 앨런과 히나를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있거라."
그런 칼리안을 내도록 지켜보던 이가 입을 열었다.
란델이었다.
란델의 치료를 기대하지도 않았거니와 그것을 부탁할 생각도 없을 뿐더러 란델의 치료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만큼의 이성은 남아있는 칼리안이 대답했다.
"서클이 있습니다. 란델 형님 신력으로는 치료 못 합니다."
"모르지 않으니. 있거라."
그러나 란델은 이렇게 대답했다.
칼리안이 란델을 쳐다봤다.
긴 설명을 생략한 란델이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어 제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신물.
장미를 다시 피워낼 때도, 자신에게 달려들던 마법사를 '치료'할 때도, 슬레이만을 해독하고 렌을 고칠 때에도 손에 쥐었던 그 작은 목걸이. 그것을 이번에도 풀어 들었다. 그리고,
- ······ 툭.
조용히 내려놨다.
몸에서 떼어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하게 되어서, 어떤 뜻인지 알게 되어서, 밖으로 나가는 대신 란델을 지켜보기로 했던 칼리안이 팔을 뻗었다.
- 타악!
칼리안이 플란츠에게로 향하던 란델의 손을 붙들어 멈췄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두십시오."
중독된 뒤 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은 전보다 강해졌다.
그러니 굳이.
"란델 형님 목숨 깎아가면서 살려달라 할 생각 없습니다."
자연의 마나 말고 신물에 든 신력 말고. 굳이 란델의 심장에 든 돌로, 그것에 쌓인 란델의 생명력으로 플란츠를 살려달라 할 생각 없었다. 추호도 없었다.
점점 더 파랗게 변해가는 플란츠의 얼굴을, 보라색으로 질려가는 입과 손 끝을,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검붉은 핏덩이를 스치듯 바라본 란델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누워있는 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낯색으로 질려있는 놈을 쳐다봤다.
"그래서. 저대로 기다리게 할 셈이더냐. 그리해도 괜찮겠느냐."
조용한 질문이 칼리안을 향했다.
"금방 다녀올 수 있습니다."
기다리게 해도 괜찮은지.
그에 대해 거짓말하지 못할 칼리안이 다른 대답을 했다.
"누가 보면 몇 날은 덜 살게 되는 줄 알겠구나."
"몇 날이든 몇 분이든 줄어드는 것 아닙니까. 란델 형님과 이렇게 실랑이 벌일 시간 없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되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란델이 칼리안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조용히 한 쪽 무릎을 마차 바닥에 대고 앉았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란델의 목소리가 그 행동을 막았다.
"네가 내 몇 분과 둘째를 저울에 올릴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나서지 않았다."
둘째는 꼬박꼬박 형님이고 나는 꼬박꼬박 란델 형님이라 부르는 놈이. 누운 것은 아직 산 사람이기나 하지, 이미 죽어 사라진 듯이 서 있는 놈이. 그러면서 누운 것을 당장 살릴 방법을 내팽개치고 도박이나 하겠다 하고 있으니.
플란츠의 목숨과 란델의 몇 분.
그렇게나 쉬운 계산 하나 못 하는 어수룩한 막내 대신 그 계산 잘 마친 란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흰 장미 값이니. 더는 말 말거라."
미스릴 가위는 값을 셈하기가 어려워서, 다 시들어버린 볼품없는 장미 대신 몇 분을 내겠다고. 그렇게 플란츠의 목숨 값까지 함께 정한 란델의 손이 올라갔다.
아무튼 텐실의 왕궁에 흰 장미가 필 때까지는 살아있어야, 누구를 쏙 빼닮아 고개 빳빳한 저 놈이 그 빳빳한 고개를 숙이든 더 빳빳한 허리를 숙이든 할 것 아닌가. 저 놈이 살아있어야 사람같지도 않은 기운을 뿜어대는 막내가 제정신을 차릴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는 굳이 나서서 살릴 이유가 없어서 내버려뒀고, 두 번째는 굳이 목숨 빚을 질 필요가 없어서 치료해줬던, 이제 하나 남았으나 그에 큰 의미를 두진 않은 혈육의 팔에 란델이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전보다 짙붉은 빛이 그 손에 머금어졌다.
그것이 플란츠의 몸 속으로 스미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빳빳한 누군가를 대신해 란델에게 제 허리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란델이 낸 그 몇 분에 대한 진짜 값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