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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39화 (440/527)

제78장. 내 영역에 들어왔으면(1)

하피의 입이 벌어진다.

그 속의 붉은 오러가 번뜩인다.

- 우우웅!

더는 칼리안의 것이 아니게 된 검이 하피도 칼리안도 아닌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그 칼날의 끝이 향할 곳을 알게 된 칼리안이 잇소리를 냈다.

"······ 젠장."

욕지거리가 터져나온 그 때.

마치 그 말이 신호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움직였다.

- 쌔애애액!

하피의 입 속에서 붉은 비수가 쏘아져 나갔다.

- 피이잉!

- 휘익, 스르릉!

플란츠가 하피의 입을 향한 활 시위를 놓았다.

에일라가 공격을 쳐내려 제 검을 집어 던졌다.

키리에가 플란츠의 앞을 막은 채 검을 들었다.

- 우웅! 우우웅!

아르센의 얼음 벽이 그 모두의 앞에 세워졌다.

에우리아가 얼음 벽 위에 물의 장막을 펼쳤다.

모두가 동시에 움직였다. 모든 일이 일순간에 일어났다.

- 두근!

그리고 칼리안은.

자신의 것이었던 붉은 칼날을 향해 이미 달려들고 있었다.

오러를 한계까지 운용한 몸이 빛줄기마저 따라잡을 듯 내달린다. 그 속도에 갇힌 심장이 느리게 박동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칼리안이 시간을 넘어설 듯 움직인 그 순간, 그렇게나 빠른 움직임 덕에 시야가 확장되고 주변의 모든 것이 현저히 느려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찰나의 순간. 칼리안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번개가 점멸하듯 이어졌다. 한결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보며 서둘러 판단을 했다.

'마법이나 검은 소용없다.'

놈에게는 마법이 안 통한다.

에우리아의 장막도 아르센의 방벽도 다 무용지물이다. 놈이 마음만 먹으면 검을 통과시킬 틈 정도는 쉽게 만들어진다는 소리다. 놈이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저 칼날은 장막을 뚫고 아르센의 얼음 벽을 부술 수 있다. 그만큼의 힘을 실어뒀었다.

검으로도 막아서지 못한다.

키리에는 오러를 막을 수 없다. 에일라 역시 마찬가지. 오러 하나 안 실린 날붙이로는 절대 못 막는다. 그만큼의 서슬을 실어뒀었다.

빌어먹게도, 내가.

그러니 에일라도, 키리에도, 아르센도, 에우리아도, 발칸의 다른 대원들도, 모두 실패할 것이다. 플란츠의 화살은 계산도 하지 않았다. 완두콩의 기특한 잔재주가 통할 정도였으면 저 하피는 이미 진작에 죽고 없었을 테니까.

'오러를 남겨둘 걸.'

오러를 남겨둘 걸 그랬다.

이럴 줄 알았으면 푸른 오러를 죄다 심장 속으로 밀어넣지 말 걸 그랬다. 어차피 축복의 힘도 강해진 김에 일단 남겨둘 것을 그랬다. 충돌이 일든 말든 속을 녹이든 말든 그냥 남겨둘 것을 그랬다.

'······ 빌어먹을.'

실리케에게 스스로 달려들어 해를 입더니.

에반에게는 일부러 속아주어 해를 입더니.

데블란에게는 유용해 보여서, 제온에게는 괜히 나서서, 다누에게는 이유없는 미움을 받아서, 그리고 라시드에게는 향수를 들켜서. 그래서 그렇게 해를 입더니. 어떻게든 눈에 띄어서 그렇게나 노려지더니.

이번에는 그냥 멀뚱멀뚱 맨 앞에 서 있었다는 딱 저다운 억울한 이유로 노려지는 희멀건한 놈 쪽으로 달려가면서 또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삼켰다.

하여간 가지가지하는 망할 완두콩.

손 진짜 많이 가는 내 형님 새끼.

- 타앗!

다시 한 번 발을 박찼다.

달렸다.

- ······ 스르륵!

실드 사이로 작은 구멍이 생겨난다. 두터운 얼음에 뜨거운 물줄기를 가져다 댄 것처럼, 반투명한 막의 한가운데에 틈이 생긴다. 하피의 짓이다.

그렇게 하나, 그 다음 하나, 또 하나.

겹겹이 쌓인 실드들이 뚫렸다.

- 콰지직, 콰직!

물의 장막과 얼음의 방벽에 균열이 생긴다.

그 사이가 넓게 벌어지며 검 하나쯤은 쉬이 드나들 만큼의 틈이 만들어졌다. 그 역시 하피의 짓이다.

- 카각!

있는대로 느려진 칼리안의 시간 속에서, 플란츠가 쏜 세 발의 화살이 유영을 시작했다. 그 중 한 발의 화살이 급속하게 얼어붙은 아르센의 얼음 방벽에 막혀 튕겼다.

아무튼 둘은 정말 더럽게도 손발이 안 맞는다. 엄청 친하게 지내더니 그냥 친하기만 했나보다.

안 친해도 되니까 손발 좀 맞춰놓지.

나처럼.

- 쌔애액!

- 쌔애애액!

그래도 셋 중 나머지 두 발의 화살이 하피가 만든 틈새로 나가는 것에 성공했다. 그 중 하나가 놈의 벌어진 입을 향해, 또 한 발이 미간을 향해 쇄도해갔다.

- 콰직!

- ······ 카가각!

오래지 않아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어딘가에 막혀드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날아들던 붉은 검에 정확히 맞은 화살 하나가 힘없이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검을 내쏜 이후 재빨리 도약한 하피의 발톱에 다른 하나가 튕겨나가는 소리였다.

시기 좋게 날아간 세 발의 화살이 그렇게 모두 무용지물로 사라진 뒤, 화살로는 절대 막지 못할 검이 계속하여 날아갔다. 그 속도마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로.

- 카아앙!

에일라의 검이 붉은 오러를 막으려 날아들었다. 늘 다리에 매어 두고 다녔던 비수를 집어들어 내던진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게 급박하게 보낸 검은 붉은 오러에 실린 힘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동강난 검이 따로따로 나뒹굴었다.

그 모든 소리와 광경을 뒤로한 채, 어느새 붉은 검의 궤적을 따라온 칼리안이 팔을 뻗었다. 그것이 부러진 오른팔인 것을 잊은 것처럼 뻗어냈다.

그러나 닿지 않는다.

그렇다 하여 발을 멈출 수도 없는 일이다.

다급히 한 번 더, 발을 박찬다.

'전사가 보내오는 공격을 제 마력으로 바꿨습니다.'

'상황이 좀 급했던 터라 어쩌다보니 하게 됐습니다.'

'공격에 얽혀있던 마나가 읽혔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 스릉······!

바로 그 때.

플란츠의 한 발 앞을 가로막고 선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이미 뽑혀나온 검을 말아쥐었다.

키리에가 눈을 감았다 곧바로 다시 떴다.

그 눈이 붉은 검의 궤적을 정확히 직시했다.

'마음 먹은 만큼 되질 않네요.'

그리고 기적적으로.

정말 기적적으로.

'하면 되잖아. 했으면.'

- 우웅······.

키리에의 잿빛 검이 긴 울음을 냈다.

칼리안의 머릿속을 맴돌던 완두콩의 말을 같이 들었다는 것처럼, 지상에 떨어진 별의 잔재를 한 번 더 태워낼 듯이.

푸른 빛이 칼리안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 ······ 우우웅!

잿빛의 검이 빛난다.

푸른 오러가 맺힌다.

감격할 겨를이 없음을 아는 키리에가 지체없이 검을 세워들었다. 날아드는 붉은 것을 향해 휘둘렀다.

그와 함께, 드디어.

- 콰악!

칼리안의 손 끝에 드디어, 비로소, 검의 날이 닿았다.

칼리안이 그 붉은 날붙이를 있는 힘껏 붙들어 잡았다.

무엇이든 베어낼 것처럼 잘 벼려진 날이 살을 찢고 그 속의 것을 다 잘라내려 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오러로 막고 버티며 온 힘을 다해 칼날을 부여잡았다.

- ······ 두근!

한 번 했으면, 하면 된다고 했다.

빌어먹게 똑똑해서 틀린 말은 안 하는 완두콩이 그랬다.

그래. 그렇게 말했다.

말하기는 했다. 말만 했다.

······ 말이 쉽지, 젠장!

"내가, 젠장! 형님 새끼 완두콩 너 같은 줄······ 알지!"

키리에의 잿빛 검이 푸른 오러에 휩싸인 그 때.

동시에 칼리안의 손에 검이 붙들린 바로 그 때.

칼리안의 악다구니가 모두의 귀에 불어닥친 그 순간.

- 우웅······!

붉은 오러가 다시 빛났다.

칼리안의 손 안에 갇혀버리게 된, 희고 긴 손가락을 전부 다 잘라먹으려 들던 붉은 오러가 빛을 발했다.

- 두근!

칼리안이 오러에 얽힌 마나를 읽어냈다. 의지를 보냈다. 붉은 오러가 칼리안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오러의 흐름이 바뀐다.

- 파스슷······!

비로소, 흩어진다.

그냥 서 있었을 뿐인데 표적이 된 희멀건한 놈을 향하던 붉은 검이 사라졌다. 칼리안의 손을 꿰뚫고 표적을 향해 짓쳐들려 하던 선득한 날붙이가 흔적없이 사라졌다.

"······ 아."

되네, 하고.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래. 웃었다.

이제는 검이 아니라 자신의 목을 향해 치닫고 있는 키리에의 푸른 오러를 보면서. 키리에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급박하게 되세워지는,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얼음의 방벽을 앞에 둔 채로.

아무튼 저 완두콩이 허튼 소리는 안 한다면서.

"왕자님!"

키리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오러를 다시 만들었으나 제 뜻대로 거두지는 못하여서.

- 서걱!

서늘한 소리가 들렸다.

키리에의 검이 저와 칼리안의 사이에 있던 아르센의 얼음을 갈라내는 소리였다.

- 콰아앙!

칼리안이 몸을 비틀었다. 키리에의 검에 베여나가기 시작한 얼음 방벽에 거세게 부딪히며 몸을 틀었다. 키리에의 오러에 목이 잘리는 이변을 만들 생각은 결단코 없었으니까.

- 카가가각······!

그것 때문에. 방벽에 부딪혀 튕겨나오던 그대로 몸을 돌리며 키리에의 검격 범위에서 벗어나려 한 까닭에, 그 방벽을 디딘 뒤 온 힘을 다해 박차느라고. 그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다 쏟아붓고 있던 탓에.

칼리안은 다른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하고 말았다.

- 끼아아아악!

자신과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하피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화살을 막은 놈이 그대로 칼리안의 등을 향해 몸을 날렸음을, 누구도 대신 막아줄 길 없을 속도로 달려들고 있는 놈을 신경쓰지 못했다. 코 끝을 스치듯 지나치는 키리에의 검에서 벗어나느라 등 뒤의 상황을 살필 생각을 못했다.

칼리안의 뒤로 짓쳐드는 하피의 발톱을, 칼날같은 발톱을, 칼리안은 보지 못했다.

"정신 나갔지. 또."

대신 플란츠가 보았다.

- 화악!

그리고 그런 플란츠를, 다시 칼리안이 보았다.

* * *

짓쳐든다.

코앞까지 들이닥쳤던 키리에의 검을 피했다. 그제야 뒤에서 짓쳐드는 하피의 울음이 들렸다.

짓쳐든다. 플란츠가 에스티나의 위에서 뛰쳐내리는 것이 보였다. 짓쳐든다. 그 희멀건한 놈이 키리에의 검에 깨진 얼음 방벽 밖으로 나서는 것이 보였다. 짓쳐든다. 완두콩이 어깨를 내리누르며 등을 막고 서는 것이 보였다. 짓쳐든다. 그 완두콩의 등 뒤로, 하피의 발톱이.

- 끼아아악!

짓쳐든다.

칼리안이 손을 뻗었다. 자신의 어깨를 붙든 플란츠의 팔을 대충 잡아챘다. 그것을 틀어쥐었다. 잡아끌었다. 대책없이 등을 막고 나선 형 놈을 제 등 뒤로 도로 되돌려놨다.

내가, 진짜.

동생 말 더럽게 안 들어 처먹는 형 때문에 환장하겠다.

"정신 나갔지, 형님 너야말로."

자리를, 다시 바꿨다.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한 형을 그렇게 돌려세웠다.

- 우우웅!

실드를 펼쳤다. 그것에 붉은 오러를 꾹꾹 담았다. 실드도, 오러도, 놈에게 소용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 휘이이잉!

완두콩을 앞에 두고 달려드는 하피를 등 뒤에 두고서 마력을 모았다. 심장에 남은 마력을 꾸역꾸역 끌어모았다. 그것을 손에 담았다. 무슨 마법을 쓸지 결정하지도 않은 채로, 제대로 계산도 하지 않은 채로, 무식하다 싶을 만큼 전부 다 모아 담았다. 마력이 뭉쳐든 손이 터져나갈 것처럼 느껴질 만큼 끌어다 담았다.

- 비켜, 에일라.

범위를 넓혀 다시 세워지고자 녹아 사라지는 얼음 방벽 위를, 말을 듣자마자 반대편으로 몸을 날려 피하는 에일라의 옆을, 칼리안을 마주 보고 선 모든 이들을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간 그 자리에 아까부터 서 있던 거대한 것을 향해서.

그래.

하피가 있는 쪽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

- ······ 따악!

그 대단하다던 카이리스 왕실의 마차를 향해 마력을 내쏘았다. 모인 것을 다 털어 쏟아버리듯이 쏘아냈다.

- 콰각!

동시에, 칼리안의 실드가 하피의 힘에 속박되어 틈을 벌리는 것이 느껴진다. 신경쓰지 않았다.

- 쌔애애액!

거대한 바람의 마력이 마차를 향해 치닫는다. 플란츠를 콱 붙든 채로, 칼리안은 그것에만 신경을 썼다.

그 마차 안에 누가 있는지를 상기한 이들의 눈이 벌어진다. 에스티나가 발을 굴러 마차로부터 멀어졌다. 플란츠의 눈에 날이 섰고 키리에가 숨을 들이켰으며 에일라가 세상에 둘 없을 미친놈을 본 얼굴이 됐다. 에우리아가 한 발을 물렸고 아르센이 신났다.

그리고.

- 콰아아아앙!

시원하게 날아간 바람의 마력 덩어리가 호사스러운 왕실 마차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드세게 몰아친 바람이 모두의 머리카락을, 옷자락을, 손끝을 휘둘러 감으며 퍼져나갔다.

- 콰악!

칼리안이 쉼없이 움직였다.

"키리에, 숙여."

경고를 전한 칼리안이 다시 팔을 뻗었다. 손에 걸리는 플란츠의 옷자락을, 어깨를 되는대로 붙들었다. 있는대로 틀어잡고 내리눌렀다.

- 콰가각······ 콰직!

등 뒤를 막아서던 실드가 이윽고 부서져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대신 소용없을 실드를 다시 만들어 세웠다. 붉은 기운이 모여 칼리안의 등 뒤를 막아섰다. 하피가 그것을 또 잘라내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 ······ 쿠르릉······.

땅이 울렸다.

그 대단하다는 왕실 마차가 있는 곳으로부터 깊은 파동이 인다. 호사스러운 마차의 곁으로 검은 기운이 인다.

- 쿠구구구······!

칼리안이 보냈던 바람의 마력이 모조리 마차로 흡수됐다.

대신 검은 빛의 기운이 뭉클 흘러나왔다. 마나의 흐름을 아무리 능숙하게 읽어낸다 한들 절대로 제 것으로 삼을 수 없을 고룡의 마력이 퍼져나왔다.

- 쿠궁······ 쿠구궁!

그 대단하다는, 시스파니안이 만들고 앨런 마나실이 개조한 대마법 방어 체계가 작동했다.

- 우우웅!

칼리안이 플란츠의 어깨를 더 내리눌렀다. 그 위를 감싸듯 주저앉았다. 실드를 펼쳤다. 그 실드에 오러를 담았다. 있는대로 모조리 다 담아냈다.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 ······ 슈우욱!

마차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모든 것을 삼킬 것처럼 터져나왔다. 공격이 가해진 방향을 향한 반격을 보냈다. 그것이 플란츠의 한참 위를, 플란츠의 위를 덮은 칼리안의 바로 위를, 스치듯 비껴가며 계속 날아갔다.

- 쌔애애액!

칼리안의 실드를 향해 움직이던 하피의 고개가 돌아갔다. 자신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검은 기운을 쳐다봤다.

그 속에 얽힌 마력을 느낀 하피가 제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런 하피의 입을 향해, 주제 모르고 벌어진 아가리를 향해,

- 콰아아아앙!

- 콰앙, 콰아앙! 콰과과광!

지극히 위대한 마력이 담긴 폭격이 이어졌다.

* * *

'미스릴 그물을 씌웁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활을 쏩니다.'

마법사들의 하피 사냥법이 떠오른 것은, 플란츠가 베른을 잡겠다며 꺼내든 미스릴 그물이 어떤 용도로 쓰이던 물건이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은, 플란츠가 그것을 어디에서 얻었을지 짐작하게 된 것은.

- 그르륵······!

형체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망가진 하피로부터 마지막 숨 소리가 들려왔을 즈음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폈다.

그리고 살아있을 리 없을, 그것이 하피가 아니라 세렌티의 육신이라 한들 결코 살아있을 수 없을 처참한 몰골을 잠시 내려다본 뒤 주변을 확인했다.

- 저놈 마석이 그렇게 비싸, 에일라?

- 지금 그게 중요해?

- 중요하지. 누가 탐내던 건데.

- 됐어요. 살았으면.

죽을 뻔했지만 안 죽고 잘 잡았다.

미스릴 그물은 없어서 많이 힘들었지만 어쨌거나 잡았다.

마법사들의 실드가 걷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놀랐으나 안정을 찾은 순한 에스티나와 이런 일 쯤은 일상이 된 까닭에 한가롭게 서 있던 레이븐도, 방벽을 거둔 아르센도, 장막을 치워낸 에우리아도, 실드 안에 있던 발칸의 대원들도, 흔들림 하나 없이 멀쩡했던 마차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시종들도.

그리고 마차와 한 몸이 된 듯 앉아있는 란델도, 두 번째로 오러를 발현하게 된 기특한 키리에도,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에일라도.

그 모두가 무사한 것이 보였다.

"후······."

정말 끝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도 놓지 못하고 내리누르고 있던 팔에서 그제야 힘을 풀었다. 그리고 동글동글 잘 말아뒀던 완두콩을 발딱 일으켜 세웠다.

"실례했습니다. 급해서."

그러게 왜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드시냐고. 큰일 날 뻔했잖느냐고. 동생 죽는 꼴 보기 싫어서 그냥 속 편하게 먼저 가기로 하셨느냐고. 그 좋은 검도 안 빼들고 맨몸으로 하피를 막고 서면 저 놈이 감동해서 물러갈 줄 아셨느냐고.

지금 저기서 푸릉푸릉거리는 말들 다음으로 연약하신 게 형님 너인 것을 알기는 아시느냐고. 그리 똑똑한 머리로 그 쉬운 사실을 매번 홀랑홀랑 까먹고 다니시냐고.

그렇게 말을 하려고. 혹은 짖으려고.

"그러게······ 왜······."

했는데.

긴 말을 삼킨 칼리안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안 그래도 희멀건 얼굴에서 핏기가 다 사라졌음을 느끼게 되어서. 짜증이 가득 담겨있어도 모자랄 완두콩 색 눈이 가만가만 느릿하게 내려갔다 올라오는 것이 보여서. 됐으니까 놓으라는 소리나 꺼내둬야 할 입이 악다물려 있음을 알게 되어서. 곧바로 멀어져 꼿꼿이 세웠어야 할 몸을 동생의 손에 여전히 죄 기대 둔 것을 눈치 채게 되어서.

"······ 왜."

발 밑.

멀쩡히 잘 서있던 플란츠를 강제로 수그리게 했던, 그 위를 감싸고 보호한 칼리안이 밟고 서있던 바닥.

그곳까지 짓쳐들었던 하피의 긴 발자국과, 발자국을 따라 이어진 하피의 검붉은 핏자국. 그리고 그 피가 스며 새카맣게 죽은 땅을 그제야 내려다보게 되어서.

- 휘청!

하피의 피는 맹독이다.

그것에 노출되고 살아남은 이가 없다 했다.

그것을.

왜.

"형님."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잘린 날개에서 떨어진 하피의 피. 물의 장벽과 얼음 방벽과 실드 안으로는 스미지 못했던 그 독한 피가 새하얀 옷에 점점이 묻어 있는 것을, 칼리안을 붙드느라 내밀었던 손에 잔뜩 튀어 있던 것을, 왜 그제야 알게 됐을까.

왜 그제야 깨달았을까.

세심하지 못해서.

정말 빌어먹게도 세심하질 못해서.

"형님······ 플란츠."

이러면서 누가 누구를 지키겠다고.

이러면서 대체 어떻게 살리겠다고.

- ······ 울컥!

대답 대신, 지독한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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