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38화 (439/527)

제77장.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6)

팔 대신 붉고 긴 날개가 달렸다.

은색으로 시작해 붉은색으로 끝나는 앨런의 머리카락과 달리 어떤 것은 붉고 또 어떤 것은 은색인 머리카락들이 한올한올,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다리에도 같은 빛의 깃털이 가득하고 발 끝에는 에일라가 지니고 다닐 법한 예리한 날의 발톱이 있다. 그 발톱과 피에는 특수한 독이 있다 하였다.

"그런데 왜 혼자 다니나."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고 겁이 꽤 많다는 글을 읽었던 것 같은데 놈은 혼자였다.

"······ 하긴. 책에 적힌 내용이 다 진실일 리는 없지."

알려져 내려온 것과 다르다.

겁이 많았다면 이렇게 많은 일행의 앞에 나오지 않았을 거다. 책이 틀린 것인지 저 놈이 예외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관심도 없다.

지금은.

- 끼야아악!

그 한 놈이 내지르는 소리에 훈련된 말들이 겁을 집어먹는다. 사일런트를 거꾸로 둘러도 소용이 없는 듯한, 그러니 귀를 틀어막아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들려오는 놈의 섬뜩한 울음소리가 머릿속을 뒤흔든다.

'이게, 뭐예요?'

'통신용품. 선물이야, 히나. 마석으로 만든 거라 마력을 못 다뤄도 쓸 수 있는 거야.'

'그런데, 마석이, 분홍색이네요.'

'아. 혹시 별로야? 싫어하는 색이야?'

'싫다고 하면, 새로 만들어, 주시려고, 그러는 거죠.'

'당연하지. 싫으면 내가,'

'아뇨. 예뻐요. 안 싫어요. 그냥 신기해서요. 이런 색의 마석도, 있는 줄은, 몰랐어요. 마법 등불이나, 욕조같은 곳에, 붙어있는 마석은, 보통, 노란색이나 갈색이잖아요.'

'그런 건 하급 몬스터에서 얻었던 것들이고, 이건 종류가 달라. 하피의 알 화석에서 나온 거야. 다 자란 하피에게서 나오는 마석은 이것보다 조금 더 진한 색이라는데 그건 나도 본 적이 없어.'

'하피가 이제, 없어서요?'

'그래. 기존의 마석들은 하도 귀해서 팔질 않고, 이제 새로운 마석을 얻을 방법도 없잖아. 하피는 양신전쟁이 끝나고 오래 되지 않아서 멸족했으니까.'

'전쟁 중이, 아니라, 끝난 뒤에, 사라졌어요?'

'응. 안 그래도 마석이 귀해졌는데 마석 색이 예쁘기까지 하잖아.'

'그럼, 심장이 예뻐서, 죽은 거네요.'

'뭐······ 그런 셈이지.'

그래. 멸족했다.

양신전쟁으로 개체수가 급감한 뒤 인간들의 손에 의해 멸족했다. 이제는 아직까지도 썩지 않은 시체나 알, 남겨진 마석을 통해서나 놈들이 이 시스테라 대륙에 있었음을 안다.

그런 놈이 갑작스레 나타난 이유.

살아남은 개체가 있던 것인지, 아니면 또 다누인지. 시스테라가 아닌 또 다른 대륙에 산다던 괴물들을 이 땅으로 불러오고 있는 것인지.

그 역시 관심없다.

지금은.

'생긴 것은, 어때요? 생긴 것도, 예뻐요?'

'그렇다 해도 괴물이야. 하피가 사냥하는 모습을 그려 둔 것들을 보면 아무리 너라도 꽤 놀랄 걸.'

'그, 정도예요?'

'응. 인간들 입장에서는 잔혹하지. 인간들과 비슷하게 생기고 가끔 말도 통했다지만 엘프나 인어같은 다른 종족으로 보지 않고 굳이 몬스터로 구분해 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니까.'

중요한 것은 그런 놈이 눈 앞에 있다는 사실 뿐이다.

어린 시절 루이즈와 체이스 몰래 서고에서 가져와 읽었던, 저절로 눈이 찌푸려지는 그림 투성이였던 그 도감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혹은 꿈을 꾸는 듯하거나.

- 끼야악!

- 카가가강!

"······ 실제로 들으니 상상 이상이네."

새카만 빛으로 번뜩이는 놈의 발톱을 쳐낸 칼리안이 곧바로 검을 고쳐잡은 뒤 휘둘렀다.

- 펄럭!

움직임이 빠르다.

날갯짓 한 번에 어느새 뒤로 쭉 물러난 놈이 하늘 위로 몸을 띄웠다.

바람만 베어낸 셈이 된 칼리안이 아주 잠시 고개를 돌렸다. 놈의 울음 소리를 버텨낼 재간이 없을 얀, 그리고 레릭과 덴의 얼굴이 하나같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 얀. 다른 시종들 데리고 마차로 들어가.

- ······ 마차에는 란델 왕자님께서,

- 들어가. 이 상황에서까지 마차 같이 쓰는 것 싫어할 사람 아니야.

고개를 살짝 끄덕인 얀이 둘을 데리고 마차 문을 여는 것이, 그 곁에 선 완두콩이 의외로 안 시들고 활을 찾아 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더 지켜볼 틈도 없이 놈이 다시 한 번 날아들었다.

- 카앙, 카가강!

재빨리 검을 든 칼리안이 놈의 발톱을 막고 쳐냈다.

놀랍게도, 놈은 칼리안에게 결코 뒤쳐지지 않을 빠르기로 허공을 누비며 공격을 피하고 반격을 해왔다.

- 휘익!

- 카아앙!

다시 한 번 달려든 하피의 발톱을 쳐내자 이번에는 날개의 끝이 목을 노리고 휘둘러진다. 고개를 재빨리 뒤로 젖힌 칼리안의 머리카락을 하피의 깃털이 스치고 지나갔다.

- 사락······!

한 마디 쯤 잘려나간 검은 머리카락이 하릴없이 떨어지는 것을 본 칼리안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깃털까지 칼날같단 말은 못 봤는데."

그것 참.

한 뭉텅이 쯤 가져다 에일라 주면 좋아하겠네.

훌쩍 하고 가볍게 발을 놀린 칼리안이 하피로부터 조금 더 거리를 벌린 뒤 기억을 더듬었다. 과거의 사냥꾼들은 놈을 어떻게 잡았는지, 주의해야 할 것이 또 있었는지. 그것을 떠올렸다.

- 마법사들 두고 왜 혼자 싸워요?

그렇게 만들어진 찰나의 틈에 에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안이 곧장 답을 전했다.

- 안돼. 내가 알기로는······.

적당히 반격을 하며 놈의 공격 방식을 눈에 담던 칼리안이 에일라에게 대답하다 말고 급히 한 발을 물렸다. 목을 베겠다는 듯 짓쳐들던 발톱에서 오래되지 않은 피 냄새가 확 풍겨온다.

이미 어디선가 '사냥'을 했다는 소리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칼리안이 마력을 운용했다.

- 쌔애애액!

순식간에 만들어진 바람의 창이 놈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놈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벌렸다.

사람의 얼굴을 한 놈의 입이 비정상적인 크기로 쩍 벌어진다.

- 파슷······!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이 된 거대한 입 속으로 바람의 창이 빨려들어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칼리안이 자신의 앞에 실드 하나를 만들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놈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익숙한 마력.

칼리안의 마력이 놈의 입 속에서 다시 뭉쳐진다.

- 쌔애애액!

방금 전 칼리안이 보낸 것과 완벽히 똑같은 마법이 칼리안을 향해 내리꽂힌다.

- 콰가각!

실드에 막힌 창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발을 박차며 에일라를 향한 대답을 마저 전했다.

- 마법은 못 써도 돌려보낼 줄은 아는 놈들이라.

- ······ 그런 것 같네요.

- 형님한테 활 쏘지 말라고 해. 화살 날아드는 것 안 좋아해.

- 하피가?

- 내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하피가 있던 높은 곳까지 단숨에 뛰어오른 칼리안이 아래에서 위로 검을 올려쳤다. 재빨리 발을 내민 놈의 발톱에 검이 얽혀들었다. 미련없이 검을 놓아버린 칼리안의 손에 새로운 검이 만들어졌다.

- 펄럭!

몸을 빼려는 것처럼, 놈의 날개가 다시 움직인다.

칼리안이 놈의 발을 밟고 다시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놈의 몸뚱이 말고는 디딜 곳 없는 높은 곳에서 놈의 얼굴을 마주보게 된 그 순간, 이제는 자유로워진 오러를 있는대로 운용했다. 그리고 놈의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 쌔액, 쌔애애액!

동시에 떠오른 네 개의 단검이 놈의 날개를 향해 치닫는다.

하피가 몸을 비틀었다.

부러진 오른팔 대신 멀쩡한 왼손으로 빗나간 검을 틀어잡고 다시 내리긋는다. 뒤이어 날아간 단검 하나가 붉은 날개 끝을 베어냈으나 그 뿐, 뒤로 쭉 물러난 놈을 향해 뻗어나가던 단검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칼리안이 조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 슈우우욱······!

날개가 없으니 결국은 추락할 수밖에 없는 칼리안의 몸이 바닥을 향해 내리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지가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바람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 끼아아악!

그것을 놓치지 않은 놈이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칼리안을 향해 날개를 휘둘렀다.

씨익.

기다렸다는 듯.

붉은 입매가 위로 올라간다.

- 우우웅!

칼리안의 몸 아래에 주먹만한 오러가 만들어진다.

- 타앗!

공중에서 몸을 비튼 칼리안이 자신의 오러를 밟고 도약했다. 하늘을 밟고 날아오르듯, 허공에 놓인 징검다리같은 오러 뭉치를 밟으며 하피를 향해 몸을 날렸다.

"······ 대단도 하시군."

슈린츠의 절벽에서 떨어질 때에는 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가능한 것. 얼마든지 가능한 미친 짓.

에일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사들과 함께 화살을 재고 있던 플란츠가 날개 없이 공중을 누비는 미친 짓을 해내는 동생 놈을 향해 중얼거렸다. 마치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조금 더 긴 호선을 그렸다.

- 부우웅!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는 하피에게 달려든 칼리안이 검을 내질렀다.

하피의 몸이 다시 멀찌감치 떨어졌다. 칼리안이 따라붙는다. 붉은 빛의 검을 피하면 단검이 날아든다. 앞에서 쇄도해오는 단검을 피하면 위에서 내리찍히는 또 다른 단검이 날개를 잘라내려 든다. 그것을 피해 몸을 빼면 지상으로 추락해야 할 인간이 코앞으로 달려들어 다시 검을 찔러온다.

마법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어떻게.

- 후두둑, 후둑!

어느새 꿰뚫리고 찢겨진 날개 끝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그것이 지상으로 떨어지자, 하피의 피에 닿은 곳의 풀이 시커멓게 시들어갔다. 그 모습을 내려다 본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것에 노출되고 살아남은 이가 없다 했던 맹독의 피.

- 피에 독이 있어. 실드 거두지 말라고 해, 에일라.

- 알았어요.

그 대단한 독성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 까닭에.

* * *

분명 들떠있어야 했다.

시스파니안이 모습을 드러내고 온 카이리시스를 축복했다.

그러니 진심이든 아니든 들뜬 얼굴을 한 채 르메인에게 경탄의 말을 해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을 골라 건네고 마치 자신의 먼 조상을 만난 것처럼 기뻐해야 했다.

그러나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왕궁을 떠났던 르메인이 돌아온 뒤 처음으로 열린 회의였으니 온 귀족이 입을 모아 왕실을 칭송하며 하루를 보내기에도 모자랄 날이었음에도.

"갑자기 이것이 무슨 행동인가."

침묵의 끝에 흘러나온 르메인의 목소리에, 귀족들이 일제히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소문이 사실인가.'

'브리센이 빈 왕궁을 침입하려 했다더니······ 왕궁에서 퍼뜨린 거짓 소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눈이 향한 곳.

회의장에서 가장 높은 자리의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의자에 앉은 르메인의 발 밑. 그 차디찬 바닥에 두 무릎과 양 손바닥과 이마를 가져다 댄 사람.

"······ 사죄드릴 것이 있습니다, 전하."

그레이 브리센의 참담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그 등을 내려다보던 청회색 눈동자가 르메인을 향해 고요히 움직였다. 이 자리에 오지 않은 칼리안을 대신해 '잘 짜놓은 판'의 결과를 직접 확인하고자 왕궁을 찾아온 공작의 대리인. 지그프리드의 소공작 드미레아였다.

드미레아의 귀에 르메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죄라니.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브리센 후작."

"시스파니안께서 이 땅을 찾으시기 전, 전하의 군대인 발칸이 큰 전투를 치른 것을 압니다."

그레이의 말에, 고요한 가운데 간신히 이어지던 귀족들의 숨소리가 멎었다.

발칸과 미상의 세력이 그곳에서 큰 전투를 벌였음을 모르는 이들은 이제 없었다. 그날 하늘을 밝힌 것이 단순한 마른 번개가 아니었음을 다들 알았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그 일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으려 했던 것은 전투를 묵과하고 넘기려는 이유가 아니었다. 상대 세력의 정체를 아직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칸의 단순한 실전 훈련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침입이 있었는지, 그것을 확신할 수 없던 까닭이었다.

당장 마음대로 입을 놀렸다가는 '시스파니안의 후손'임을 재증명한 르메인의 손짓에 따라 왕궁에서 나가 집에 돌아가는 대신 광장의 레니시타 잎 위에 세워질 테니까.

"왕실 숲에서 있던 일을 말함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그 일에 대해 그대가 무엇을 사죄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 일을 그레이가 입에 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일로 르메인에게 '사죄'를 하고 있었다.

잔잔한 태풍을 담은 국왕과 후작의 대화를 듣던 드미레아의 머릿속에 시스파니안이 떠난 이후 칼리안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 그럼. 왕자님의 말씀은, 다누와 제온이 벌인 일을 브리센 후작에게 뒤집어 씌우겠다는 겁니까.

- 왜. 마음에 안 들어?

- 왕자님께서 브리센 후작을 없애려 하시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브리센을 뼛속까지 증오합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 그래. 알아, 드미레아.

- 하지만 왕자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은 너무,

- 너무 뱀 같아?

- 네. 그렇습니다. 공정하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런 식으로 브리센을 쳐내는 왕자님의 행동이 브리센과 다를 바가 있습니까.

- 역시. 내 정혼자님은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지.

- 아시면서 그런 말을 저에게 전해달라 하십니까. 저는 그런 책략까지 돕기 위해 왕자님의 편에 선 것이 아닙니다.

- 알아. 나도 잘 알아, 드미레아. 그러니까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 계속 말하도록."

그렇게 이어지던 기억이 르메인의 목소리로 인해 잠시 멈췄다. 회상에서 빠져나온 드미레아가 다시 르메인과 그레이를 쳐다봤다.

"네, 전하. 그날 왕실 숲의 전투에 나선 발칸의 수가 수백에 이르렀다 들었습니다."

"그 일을 설명하라 한 적 없네, 브리센 후작. 그 일에 대해 내가 그대에게 사죄받을 일이 무엇인지. 나는 그것을 물었을 뿐인데."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칼리안 왕자는 그 일의 잘못을 분명 후작에게 뒤집어 씌우려 할 겁니다. 그러니 후작이 먼저 국왕의 앞에 나서서 외부의 침입을 알려야 합니다. 발칸이 나서서 침입 세력을 진압하는 동안 브리센에서 돕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겁니다.'

'안전을 침탈당한 귀족들을 벌벌 떨게 하라는 말입니다. 시스파니안이 온 것을 까맣게 잊고 국왕을 원망하고 불신하게 하라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하겠습니까, 후작.'

라시드의 말.

한 마디도 잊지 못할 아들의 말. 그것을 계속 상기하며 여전히 바닥을 향해 고개를 조아린 그레이가 말을 이었다.

"전하께 사죄드리겠다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왕실 숲을 통해 왕궁으로 침입하고자 한 것이, 바로······."

르메인이 자신의 등을 옥좌에 기댔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그레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멈추었던 그레이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남작, 라시드 브리센. 고작 몇 개월 전에 카이리스로 돌아온 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침묵이 깨졌다.

회의장이 떠나갈 듯한 소란이 터져나왔다.

"······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후작."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전하. 제 아들이 이 왕궁을 감히 침탈하려 하였음을 제가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자마자 이렇게 전하의 앞에 나선 것입니다. 이에 사죄를 드립니다."

왕실 숲에서 발칸과 싸운 것이 브리센의 군대라는 말.

다만 그들을 이끈 것은 브리센이라는 가문이 아니라 라시드 브리센이라는 개인이었다는 말. 그것을 알아내 막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이 회의장의 소란을 이끌었다.

"도모한 일이 실패하자 제 아들은 곧바로 카이리시스를 떠났습니다. 현재 브리센의 기사들이 제 아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방면으로 수색하는 중에 있습니다. 아들의 욕심을 미리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무슨 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레이가 머리를 조아렸다.

자식의 반역을 먼저 고발해 직접 레니시타 잎 위에 세워두려 함으로써, 어떻게든 연좌를 피하려는 아비의 이마가 또 다시 바닥에 닿았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르메인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가관이군."

그레이를 향한 르메인의 꾸밈없는 평가가 흘러나왔다. 이 자리에서 차마 '지랄한다'고는 할 수가 없어서 대신 꺼내든 말이었다.

'브리센에게 누명을 씌우는 건 우리가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려는 움직임만 보일 것이라고, 왕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합니다.'

'그렇다면, 마나실 후작. 그 뒤에는 어찌 할 생각이라 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브리센 후작이 라시드의 목을 알아서 가져다 바칠 터이니.'

드미레아와 앨런을 통해 전해진 말, 칼리안의 예측이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었으니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들의 말을 잘 들은 르메인은 왕의 자리를 굳건히 다져나가고 있는데, 아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그레이는 저와 제 자식의 목을 스스로 자르려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실로 가관이 아닌가.

- 브리센 후작이 아니라 남작을 위한 덫인 겁니까.

- 맞아. 드미레아.

-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 응. 그래도 여전히 뱀 같아서 싫어?

- 교활하기 짝이 없는······ 검은 고양이 같습니다.

-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야?

- 브리센 후작의 속내는 그리 잘 보시면서 제 말은 못 알아 들으십니까.

- 아······ 그럼 내 계획 칭찬해 주는거야, 정혼자님?

- 네. 칭찬입니다.

- 와. 고마워, 드미레아.

- 또 그렇게 좋으십니까.

- 언제든 당연히 좋지. 내 정혼자님 칭찬인데. 사실 내가 혼날 일을 하나 저질렀는데 그건 나중에 말할래. 기분 좋으니까 나중에 혼날래, 드미레아.

르메인의 신랄한 말을 흘려들으며, 칼리안의 목소리를 다시 불러와 귀에 담던 드미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내리떴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레이의 등을 내려다봤다.

"실로 가관이다. 브리센 후작."

드미레아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듯.

르메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회의장을 울렸다.

* * *

- 펄럭!

중심을 잃고 휘청이던 하피가 날개를 다시 움직였다.

아직 여유롭게 남은 오러를 다시 운용한 칼리안이 더 기다리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족히 십수 개는 될 단검이 놈의 목과 날개를 향해 일제히 날아갔다.

- 하피 몸은 건드리지 말고 죽여요.

- 이 상황에? 나 저 놈 처음 봤는데?

- 그러니까. 마석이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 나 꽤 힘들게 싸우고 있는데, 에일라. 그런 것까지 따져야 해?

- 나랑 떠들 정신 있으면 충분한 것 아닌가. 귀한 마석 부수지 말고 목만 잘라요.

- ······ 으응. 알았어.

그래서 목과 날개만 노리는 중이다. 하피의 심장이 어디 있는지, 하필 그 부분이 기억나지 않아서 그렇게만 공격을 하고 있었다.

- 쌔애애액!

- 카앙, 카아앙!

반쯤 잘려나간 놈의 오른발이 휘둘러졌다.

서둘러 몸을 움직인 칼리안이 그 발톱보다 더 꺼려지는 검붉은 피를 피해냈다. 그리고 하늘로 높이 도약하며 수많은 비수를 날려보냈다.

- 펄럭······!

다 끊어져 너덜거린다 해도 좋을 날개를 가진 채로도 놈은 여전히 빨랐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칼리안의 공격을 피하고 쳐내며 다시 날아올랐다.

겁이 많다 했으면서.

도망조차 가지 않고 끈질기게 달려들던 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제껏 신경쓰지 않았던 곳을 바라봤다.

수많은 실드와 얼음의 방벽으로 둘러싸인 곳.

칼리안의 일행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그것을 눈치챈 칼리안이 놈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을 때,

- 휘이익!

놈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속도가 나오는지 알 수 없을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일행을 향해 날아들었다.

칼리안이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누를 앞에 두었던 그 날만큼의 오러를 일순간에 운용했다.

- 우우웅!

- 우웅! 우우웅!

절벽에 꽂힌 비녀를 틀어잡았던 것과 같은 긴 오러가 놈을 향했다. 높은 곳에 몸을 띄운 채 지상에 선 만큼 빨리 움직이지는 못할 칼리안을 대신해 뻗어나간 오러가 놈의 몸을 휘감았다.

- 끼아아아악!

순간적으로 온 몸의 움직임을 속박당한 하피가 몸을 뒤튼다.

그 울음소리에 당장이라도 땅에 내려앉아 귀를 틀어막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를 악문 칼리안이 놈을 향해 다시 날아들었다.

벗어나려는 놈의 발버둥을 강제하면서, 있는대로 끌어올린 오러의 한 귀퉁이를 뜯어내듯 분리해 놈의 날개를 향해 내리찍었다.

- 서걱!

그리고 비로소.

- ······ 툭!

그렇게나 애를 먹였던 놈의 날개 하나를 잘라냈다.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쉰 칼리안이 놈을 붙든 오러를 잡아당겼다.

- 쿠웅······.

몸 속의 오러가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것을 갈무리하여 다시 내보냈다.

- 서걱!

나머지 한 쪽의 날개마저 잃은 놈의 비명 소리가 속을 뒤집어놓는다. 눈을 감았다 뜨며 소리의 충격에서 애써 정신을 차린 칼리안이 놈의 몸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 쿠우웅!

묵직한 것이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가벼운 움직임으로 바닥을 디딘 칼리안이 놈에게서 한 발을 멀어졌다. 좀처럼 가만히 있지 않는 놈의 피가, 그 맹독이 사방을 물들이기 시작한 까닭이다.

- 우우웅!

칼리안의 기운이 쉼없이 움직였다.

허공에 발을 디디게 하던 오러의 형태가 날붙이로 바뀌었다. 그것이 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 꺄아아아악!

날개 잃은 하피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긴 울음을 냈다.

그 울음 소리.

그것이 종전과는 달랐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다.

하지만 칼리안은 그러지 못했다.

- 화아악!

강제로 몸을 일으켜 세운 하피의 입이 다시 벌어진다.

그 입 속으로, 붉디 붉은 오러의 검이 삼켜져 들어간다.

그 오러 역시 마력임을 알아챈 놈이 칼리안의 비수를 입에 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 두근!

위험을 직감한 칼리안의 심장이 요동친다.

칼리안이 발을 박찼다.

놈의 입이 벌어진다.

그 안에서, 아르센의 얼음 장막과 수많은 실드 쯤은 단번에 통과할 만한 위력의 붉은 검이 쏘아지듯 뻗어나갔다.

"······ 젠장."

그 두터운 방어막 안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은 채 시위를 재고 있던 이들. 그들의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람.

- 쌔애애액!

하얀 말 위에 올라있던 사람을 향해서.

[외전] 세뉴

그 강이 고요한 것은.

한결같이 언제까지나 그리도 고요한 것은.

한날같이 언제까지고 그렇게 고요한 것은.

어쩌면.

* * *

"스승님."

"왜."

"스승님은 정말 나쁜 놈입니다."

"안다."

주먹만한 대사막 쥐를 적당히 손질해 굽고 있던 노년의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곁에 앉아있던 새파란 머리의 청년이 손바닥만한 도마뱀을 꼬챙이에 끼워 넣으며 입을 열었다.

"왜 나쁜 놈이라 하는지는 안 물어보십니까?"

"안 궁금하다."

"정말 안 궁금하십니까?"

"그래. 안 궁금하다."

인상을 팍 찌푸린 새파란 머리의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새파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가슴팍 한 쪽이 사라진 놈, 목구멍에 정말로 구멍이 난 놈, 팔다리만 남은 놈, 그 옆에는 팔다리를 잃어버린 놈. 등을 내보이고 죽은 놈, 앞으로 달려들려다 죽은 놈. 동료를 지키려다 죽은 놈, 그 동료의 등 뒤에서 함께 죽은 놈.

대사막의 전사. 대사막의 늑대들.

처참한 몰골의 시신이 된 그들의 모습에 푸른 눈길이 닿았다.

"어떻게······."

"왜 나쁜 놈이라 하는지 안 궁금하다 했다."

시신을 슥 훑어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무감하게 움직였다. 시신의 모습에는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던 얼음장같은 눈이 놈들의 짐보따리에 가 닿았다.

"어떻게 쥐를 먹습니까, 스승님."

"한 두 번 먹은 것 아니다."

"대사막 쥐가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십니까?"

"맛있는 것은 안다."

"저 보따리 안에 고기 있는 것 아시잖습니까."

"그 고기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른다."

"그 고기에 독이라도 들었을까봐 대사막 쥐 드십니까?"

- 화르륵!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로 적당히 잘 타오르고 있던 모닥불이 일순간에 확 타올랐다. 사람 몸통만한 크기로 갑자기 불어난 불길에 그슬릴 뻔한 머리통을 황급히 치운 파란 머리 청년 아르센이, 도마뱀 꼬치를 손에 꽉 쥔 채 스승을 노려봤다.

"처먹어라. 시끄럽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무 명의 대사막 전사들을 도재하듯 잡아 죽인 제자의 머리통을 그슬리는 것에 실패한 스승이 대사막 쥐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스승님은 정말 나쁜 새······"

- 화르륵!

"나쁜 새끼입니다."

이제는 말 몸통 쯤 되는 크기로 타오르는, 때문에 더 이상 모닥불이라 하기에도 어려운 불길에서 몸을 뺀 아르센이 제 할 말을 다 뱉었다. 그리고 그나마 대사막에서는 제일 안 귀여운 축에 속하는 모양새의 도마뱀 고기를 대충대충 씹어 삼켰다.

"말버릇 하고는. 말 좀 공손히 하거라."

"이 정도면 공손히 한 겁니다."

고개를 돌린 스승이 한 마디를 안 지는 제자를 봤다. 그리고 대사막 쥐 고기를 보란듯이 하나 더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소금도 후추도 넣지 않아 맛도 없고 누린내만 가득한 그 고기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카이리스 왕궁의 만찬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네 마리의 대사막 쥐를 뱃속에 넣은 스승이 아르센을 쳐다봤다. 그리고 가시지 않은 불만이 남아있는 새파란 제자를 향해 말했다.

"가자."

미련없이 일어난 스승이 밤을 밝히던 불을 껐다.

그리고 입 속에서 우물거리던 대사막 쥐의 정강이 뼈를 퉤 뱉어낸 뒤 걸음을 옮겼다.

대사막 쥐를 먹은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음을, 그런데 새파란 제자가 오늘따라 저렇게 대사막 쥐에 연연하고 있음을, 그러니 혹시나 다른 일 때문에 저를 나쁜 새끼라 욕하는 중은 아닌지 고민해보아야 할 때임을 모른다는 것처럼.

그날 새벽, 그 새파란 제자가 자신의 짐 속에서 잠깐 꺼내두었던 쓸모없는 일기장을 열었음을, 그 쓸모없는 일기들의 사이에 끼워두었던 아들의 초상화를 보았음을, 그래서 저런 말을 하는 중임을 전혀 모른다는 것처럼.

"······ 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그렇게 하면 오해가 생길 일도 없어지게 될 것처럼.

* * *

- 쌔애애액!

선득한 얼음의 날이 대기를 가른다.

딱 그만큼 서늘한 소리가 모래 평원 위로 퍼져나간다.

- 콰직!

여지없이 내리꽂히는 차디찬 것이 생명을 앗았다.

벌써 오늘만 두 번째로 마주친 늑대의 무리.

공격을 왜 하는지, 왜 죽이는지조차 설명하지 않고 건네진 늑대 사냥꾼의 창날이 타오를 것 같은 태양의 열기 아래에 녹아 사라졌다.

"왜······."

그것이 궁금하여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그 순간 그것 하나는 알아야 되겠다는 듯, 가슴 한 쪽에 생긴 거대한 구멍을 틀어막은 전사 한 명이 아르센을 보며 물었다.

얼음의 창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싸늘한 푸른 눈이 전사를 향했다. 그의 손에 들린 칼날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모습으로 걸어온 사냥꾼이, 조금씩 잦아드는 전사의 숨소리를 몇 번쯤 듣다 시선을 옮겼다.

그 푸른 눈초리가 그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향했다.

몇 송이의 붉은 꽃이 활짝 핀 나뭇가지를 내려다봤다.

"알지 않나."

이미 많은 늑대들이 아는 사실.

그 문신, 대사막의 늑대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바람이 담긴 그림을 몸에 새긴 전사들만 찾아간다던 늑대 사냥꾼.

대사막의 늑대들에게, 꽃이 핀 나무라니.

이 황량한 모래의 땅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 아닌가. 놈들이 감히 탐하기에는 다분히 주제넘은 꿈이 아닌가.

때문에 그것이 보기 싫어 그 문신을 지닌 늑대들을 사냥한다고. 대사막의 전사들에게는 그렇게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니 혹시나 그것과 같은 문신을 새겼다면, 그러고도 살고 싶다면, 그 사냥꾼의 앞에서는 팔을 감추라고. 복수하겠다 찾아가지도 말고 소매를 내리라고. 그렇게 소문이 났다.

"고작 그런 이유로 우리들을 그렇게······."

다만 정말 그 뿐일까.

대사막의 전사가 헛된 바람을 꿈꾸려 들기 때문일까.

마지막으로 답을 듣기 위해 고개를 든 전사가, 죽음을 앞둔 다음에야 마법사의 푸른 눈을 제대로 보게 된 전사가, 절망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 왜."

새파란 눈 속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눈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티끌같은 감정 하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절망했다. 북쪽 대사막의 황량한 바람같은 눈 속에서 자신을 죽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자신의 죽음이, 무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았으니까.

"도대체······ 왜······."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남기던 전사의 목소리가 끊겼다.

눈감지 못한 전사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놈을 죽인 진짜 이유를 애써 기억해내어 알려줘봐야 더는 들어 줄 사람도 없음을 깨닫고 열었던 입을 도로 닫았다.

재미삼아 인간 사냥을 했던, 고작 사흘만에 파란 머리의 어린아이 하나를 세상 속으로 내던진, 이미 죽은지 오래인 그 늑대들의 팔에도 똑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음을 결국 이번에도 알려주지 못했다.

"뭐야. 나는 궁금한데."

그런데 아르센의 등 뒤에서 이렇게.

삼킨 말을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감정한 눈으로 시신들을 내려다보던 푸른 눈이 조용히 들어올려졌다.

- 쌔애애액!

건네진 말에 대한 대답 대신 얼음의 창이 날아갔다.

이번 사냥에 스승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광막한 사막에서 아르센에게 말을 걸 사람은 적 뿐이지 않겠나. 게다가 들려온 목소리는 스승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때문에 공격을 보냈다.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로.

- 카강!

그러나 생소한 소리가 들렸다.

뼈를 가르는 소리도 아니고 살을 꿰뚫는 소리도 아니었다. 둔탁한 것에 얼음창이 막히는 소리가 났다.

눈을 가늘게 접어 뜬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낯선 마법사 하나가 아르센을 보며 서 있었다.

고요히 잠겨든 눈으로 그 마법사를 보던 아르센이 물었다.

"전사들이 이제 마법사까지 고용합니까."

그러더니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마력을 다시 모았다.

- 쌔애액! 쌔액!

적일 것이 분명한 상대를 향한 날선 공격이 이어진다.

무엇이든 꿰뚫을 기세로 날아간 얼음의 푸른 잔상을 지켜보던 아르센이 미간을 찌푸렸다.

- 타다당! 카강!

말을 건넨 놈을 향해 사방에서 쇄도하던 얼음창이 모조리 막히고 부서져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마법사의 손짓 한 번에. 고작 그 한 번의 움직임만에.

아르센의 눈이 조금 더 잠겨들었다.

죽은 전사들의 원을 스스로 보복하지 못한 대사막의 늑대들이 마법사를 고용했나보다. 그것도 꽤나 강한 마법사를 찾아내어 보냈나보다.

여전히 그렇게만 생각하던 아르센이 마력을 다시 모을 때.

무감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과는 완전히 다른 눈.

조금도 숨김없이 '화'를 담은 적갈색의 눈에 날이 섰다.

"이 애송이 새끼가······."

극심하게 화가 난 목소리가 이어진다.

대사막 한가운데에 야만족이 아닌 사람이 있기에 반가워서 말 좀 걸었다가 밑도끝도 없는 공격부터 받게 된 보랏빛 머리의 마법사.

"뒤질라고."

한낮의 하늘에서 죽음을 불러오는 이가 씹어뱉듯 말했다.

* * *

주먹만한 소고기 덩이가 얼굴로 날아왔다.

그것을 받아드는 아르센을 본 스승이 혀를 찼다.

"물주먹에 얻어터진 꼴 하고는."

"물주먹이 아니라 물로 만든 주먹입니다, 스승님."

"같은 말이다."

"완전히 다릅니다."

- 철썩!

반박 대신 두 번째 소고기가 하나 더 날아와 얼굴에 안착했다.

인상을 쓰려다 터진 입술이 아파 그만 둔 아르센이 잔뜩 부푼 뺨과 이마에 고깃덩이 하나씩을 얹었다.

"그러게 누누이 말했잖느냐. 사람을 보면 인사도 제대로 하고 공손하게 좀 굴라고 말이다."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몰랐으면, 그럼. 어디서 개가 짖더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성질머리 하고는."

전기와 물을 쓰는 보라색 머리의 마법사.

이런 설명을 들은 스승은 그가 누구인지 아는 듯했으나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러게 새로 만난 사람과는 인사부터 제대로 나누라 하지 않았느냐 타박만 했다.

"아무튼 너는 사람 보는 눈이 없어 탈이다."

"제가 왜 사람 보는 눈이 없습니까. 스승님 잘 찾아와서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더냐. 대체 뭘 보고 날 따라다니느냐?"

"스승님이 그러셨지 않습니까. 마법사는 저보다 돌은 놈 골라서 따라다니면 된다고요."

"언제는 나더러 나쁜 새끼라 하더니 이제는 돌은 놈 취급까지 하느냐?"

"네. 맞습니다."

"이러니 사람 보는 눈이 없다 하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스승이 말을 이었다.

"이왕 너보다 돌은 놈 찾아 따라다닐 것이면 생각없이 돌은 나같은 놈 말고 생각 많아서 돌은 놈 따라다니거라. 생각이 많아서 돌은 놈은 사람이라서 돌아버린 놈이니까."

"그럼 스승님은 사람도 아닙니까?"

"네놈 눈에는 어찌 보이더냐?"

잠시 고민하던 아르센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잘못 고른 게 맞나 봅니다. 사람 아닌 것 같을 때가 많긴 합니다."

- 철썩!

세 번째 소고기가 날아와 아르센의 입을 막았다.

아르센이 그것을 집어들어 채 반도 안 떠지는 눈 위에 올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얼음 마법만 알음알음 배워다 가르쳐 놓기 바빠서 버르장머리를 안 가르친 내 탓이지. 여하간 번개는 안 맞고 얻어맞기만 한 것이 요행인 줄 알아라."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 스승님 탓이라는 뜻인지, 요행이라는 것을 안다는 뜻일지 알 수 없어진 스승이 눈살을 찌푸릴 때.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마법사를 생각하던 아르센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요행인 것 압니다."

"그래. 그놈 눈 밖에 났다가 살아서 도망왔으니."

"도망온 것 아닙니다."

"도망온 것이 아니면."

'뭐야. 이미 죽은 놈이었잖아.'

"······ 그냥 갔습니다. 이미 죽은 놈이라 다시 죽일 필요도 없겠다면서요."

이 말에, 스승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은 미지근해진 소고기들을 뒤집어 얼굴에 다시 덮었다. 자신이 이미 죽은 놈이든 산 놈이든 그리 상관없으니 시퍼렇게 든 멍이나 좀 빨리 빠지기를 바라면서.

그 꼴을 보던 스승이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조금 더 오래도록, 조금 더 크게.

한숨처럼 혀를 찼다.

"이제, 그만 가야 되겠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대사막."

허연 낯빛보다 불그스름한 고기가 더 많이 보이는 꼬락서니를 한 아르센이 스승을 쳐다봤다.

"왜 그만 간다 하십니까."

"안 간다. 이제."

"그러니까요. 왜 안 간다 하십니까. 놈들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다 잡으려면 멀었습니다."

그런 제자를 물끄러미 보던 스승이 시퍼런 멍 위에 던져주고 남은 소고기 두 덩이를 집어 접시에 하나씩 올렸다. 그리고 손 끝에서 불을 일으켜 대충대충 구워내며 말했다.

"너라도 그만 죽고 살 때가 됐나보다."

그 말을 아르센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는.

* * *

시간이 흘렀다.

물주먹 말고 정말 물로 만든 주먹에 얻어터진 상처가 다 아물고 난 뒤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도 여전히 대사막을 누볐다.

다만 더는 대사막 쥐가 고기로 변해 구워지는 꼴을 보지는 않아도 되었다. 스승 없이 혼자 다니게 된 까닭이다.

"또 보네, 애송이."

"애 아닙니다."

"또 대드네, 꼬맹이."

듣는 사람의 불만을 잘 반영하여 호칭을 바꿔 줄 정도의 융통성은 있는 보라 머리 마법사를 세 번째로 만났다.

"대드는 것 아닙니다."

"그래. 많이 착해졌네. 꼬맹이."

사실 두 번째 만났을 때, 처음 얻어맞은 곳이 하도 아팠던 기억을 잊지 못해서 제대로 마음먹고 덤벼들었었다. 그리고 소고기 세 덩이로는 해결되지 않을 만큼 다시 얻어맞았다. 꼬박 두 달을 침대에서 보내며 스승이 가르치기를 깜빡했던 '버르장머리'를 배웠다.

때문에 세 번째 만났을 때에는 안 덤볐다.

대신 인사를 했다.

"······ 네."

에우리아 세이렌.

그제야 그의 이름을 알았다. 그리고 스승이 가르치기를 포기했던 '공손함'을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다.

"네 스승님이랑 같이 돌아다닌다고 들었는데, 볼 때마다 왜 혼자 있나."

"스승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안 오십니다."

"뭐. 어디 아프셔?"

"아닙니다. 많이 정정하십니다. 왜 안오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 그래서 그냥 대사막에서 혼자 다니는 거야?"

"네. 그래서 혼자 다닙니다."

"겁도 없네."

"스승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겁대가리 없이 혼자 처다니지 말고 이제 그만 들어앉아 있으라고. 그렇게 역정을 내셨는데, 들어앉아 있지를 못하겠어서 그냥 혼자 다닙니다."

"왜?"

왜. 라고.

이유를 묻는다.

대사막에서 죽어가던 놈들은 자신들을 왜 죽이는지를 물었고 에우리아는 스승까지 놔두고 혼자서라도 기어코 대사막에 다시 찾아온 이유를 물었는데.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같은 질문이었으니 특별히 해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그냥 모르겠다고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카이리스와 대사막의 경계에 놓인 숲. 근래 야만족이 자주 출몰했다 하여 찾아온, 에우리아같은 마법사들의 임시 막사가 있는 곳. 그곳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자리에 모닥불을 피우고 앉은 아르센이 고개를 들었다.

어둠에 잠겨 보이지는 않지만 숲이 끝나는 지점부터 거짓말처럼 시작되는 넓은 모래의 땅이 있을 곳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 타닥, 타닥······.

이미 죽은 생명이 타들어가며 만들어내는 소리.

스승이 늘 모순적이라 했던 평화로운 모닥불 소리가 밤의 숲을 가만히 울린다.

"이유도 모르면서 왜 오는데?"

그런 아르센의 귀에 에우리아의 질문이 들렸다.

그것도 그냥 모르겠다 하고 넘어가면 찌릿찌릿한 물주먹이 또 날아올까봐 애써 생각을 쥐어짠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 모르겠습니다."

오래도록 생각한 결과, 역시 모르겠다고.

그 노고를 알아 준 것인지.

다행히 에우리아는 주먹을 날리지 않았다.

"저기 막사 보이지."

대신 멀리 보이는 막사들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꺼냈다.

"네. 보입니다."

"저렇게 모여드는 마법사들 중에 너같은 놈이 꽤 있어."

"저같은 놈은 어떤 놈입니까."

"죽어있는 놈. 이유도 모르고 사람 죽이면서 그게 살고 있는 건 줄 알고 하루하루 숨만 쉬는 놈. 그런 놈들."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뭐, 나는. 집안도 넉넉하고 부모님도 잘 계시고 할머니 밑에서 어려운 것 하나 없이 마법이나 배우고 자라서. 꼬맹이 너나 저기 있는 놈들이나 어떻게 살았는지 들어도 몰라."

"······ 자랑하십니까?"

"사실을 말하는 건데. 아무튼 그래서 나는 다른 놈들 속사정을 아무리 들어도, 상상이 안 되니까 이해도 못해. 하기사. 어차피 내가 어떻게 살았든 나 아닌 다른 놈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웃기는 짓이지만."

"맞습니다."

"그래. 그래도 하도 많이 보다 보니까 그거 하나는 똑똑히 배웠어."

"무엇을 말하시는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아, 나는 저렇게 죽어 살지 말아야지."

아르센이 피식 웃었다.

"꼬맹이 네가 왜 자꾸 대사막에 오는지. 네 스승님이 왜 오지 말자 했는지. 제대로 생각해 봐."

이렇게 말한 에우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

"더 오지 말고 살아. 이제."

그 말을 아르센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는.

* * *

스승의 집에서 나왔던 다음 날.

대사막과 맞닿은 국경에서 에우리아를 만난 다음 날. 이해 못할 에우리아의 말에 마음이 심란해져 되돌아왔던 날.

"이게 다 뭡니까."

스승의 오두막집 문을 연 아르센이 물었다.

마법사 주머니에도 다 들어가지 못한 수많은 상자와 가방이 한가득 쌓여있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손바닥을 탁탁 치며 먼지를 털어내던 스승이 아르센을 흘긋 봤다. 그러더니 생각보다 빨리 되돌아온 제자를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무뚝뚝한 말을 했다.

"간다."

"가다니요."

"너 모래바람 맞으러 가는 꼴 보기 싫다."

"······ 그래서······ 떠나십니까."

"그래."

주저없이 나오는 대답에 새파란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깊숙이, 더할 나위 없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떠나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까."

북쪽 대사막의 얼음 조각에 베여나가는 듯한 목소리가 스승을 향해 흘러내렸다.

"······ 그렇게 가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까."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인사도 안하느냐며 벌을 세웠으면서. 그래놓고는 무엇이든 익히기만 하면 그게 음식이라며, 나흘을 굶은 어린애한테 무작정 구운 호밀 반죽을 내줬으면서. 다 자라도록 버르장머리를 못 가르친 것이 자기 잘못이라 한탄했으면서.

불 마법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너는 불보다 얼음에 소질이 있으니 얼음을 배워라 했으면서. 불은 내가 쓸 테니까 너는 얼음 쓰라 말했으면서. 그렇게 같이 다니면 불도 있고 얼음도 있으니 더 좋지 않겠냐 했으면서.

당신은 잘 다루지도 못하는 얼음 마법을, 다른 마법사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 가며 알음알음 배워다 하나하나 가르쳐줬으면서. 당신이 쓰는 불 마법이 그리 좋아 보이면 취미로나 써봐라 신나게 알려줬으면서.

싸움에서 처음으로 다쳤던 날, 상처를 살피던 얼굴을 보고서는 다친 사람보다 더 놀란 얼굴로 달려왔으면서. 새하얗게 질린 채로 그러게 왜 마법사가 칼 쓰는 사람 코앞까지 나가서 마법을 쓰느냐며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으면서.

그래도 살았으니 됐다 했으면서.

"······ 그 모래바람에 갇혀서라도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으면. 그럼 따라와라 하셨으면서. 같이 가서 살자 하셨으면서. 이제는 그게 싫어 떠난다고 하십니까?"

살았으니 됐다 했으면서.

그랬으면서.

"저는, 스승님이."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사는 꼴이 싫어서 떠나겠다고 하느냐고. 이렇게 사는 꼴이 싫다고 떠나버릴 수 있는 거였느냐고. 이렇게 버려놓고 갈 수 있는 사람이었느냐고.

"저는······ 스승님이······."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억울하고 화가 나고 답답해서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 안 나왔다.

나는 아니었다 할까봐. 그래서 못했다.

그냥 고개만 숙였다.

어차피 떠나기로 하신 것 잘 가시라고. 오래오래 잘 사시라고. 그런 말도 나오질 않아서 고개만 숙였다. 뒤로 돌아섰다.

"······ 렌시르."

아르센의 손이 이제 막 문에 가 닿았을 때, 스승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러더니 저벅저벅 걸어와 아르센의 앞에 서서는 종이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 카이리시스, 테이난샤 여섯 번째 거리, 헤르츠 남작가 자택.

카이리스의 수도 카이리시스.

그곳에 있는 스승의 집 주소가 적힌 종이였다.

그것을 받아들고 가만히 서 있던 아르센에게 스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계속 처나가고 나는 이제 슬슬 삭신이 쑤시고 협회에서는 계속 불러대고. 그러니 어쩌겠느냐. 너랑 같이 쏘다니다 짐덩이 되기도 싫고 너 내보내고 전전긍긍하기도 싫고. 그러느니 그냥 먼저 수도에 가 있는 게 낫겠다 싶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살가운 말 한 마디를 못해서.

그래서 구구절절 설명을 하는 스승의 말을 들었다.

"나 먼저 갈 테니 너 원하는대로 여기서 목숨 잘 붙들고 지내다가 모래바람 지겨워지면 알아서 찾아오라고 하려 했다."

그 말에 든 살가운 것들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되물을 수도 없어서. 제대로 이해를 했는지 물어보자니 입이 열리질 않아서.

결국 아르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문에 기댄 채 쭉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럼 그렇게, 버리고 가는 게 아니라고 말씀을 해주셔야 알아들을 것 아닙니까······."

그렇게 주저앉아 긴 한숨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똑같이 긴 한숨같은 스승의 말이 들려왔다.

"내가 네놈을 왜 버리고 가느냐. 가르쳐 둔 보람도 없게."

아르센이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푹 숙인 고개를 다시 들어올릴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자신 못지않게 글씨를 못 쓰는 스승의 쪽지를 꽉 말아쥐고서.

* * *

시간이 흘렀다.

소리없는 시간이 고요한 강처럼 묵묵히 흘렀다.

그 작은 오두막집에 살던 두 사람 중 나이 많은 마법사가 수도로 떠난 날로부터도, 그 작은 오두막집에서 몇 날을 혼자 머무르던 새파란 머리의 젊은 마법사가 가벼운 가방 하나를 싸들고 나간 날로부터도, 다시 오랜 날이 흘렀다.

쌓아 올린 하루하루가 시간이 아니라 세월이 된 나이 많은 마법사는 7서클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그 나이 많은 마법사는, 아르센의 스승은, 아르센보다도 더 빠른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하루하루를 늙어갔다.

"스승님."

"안 간다."

"그 오두막까지 단번에 갈 좋은 마차도 구했습니다. 잠시라도 가서 쉬시면 좀 나을 겁니다."

"안 간다고 했다."

대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나 살 수 있던 것이 비단 자신 뿐만은 아니었음을, 스승이 지나치게 빨리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평생을 누비던 대사막을 떠난 마법사가 수도 안에 잠겨 삭아없어지듯 나날이 낡아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여기서 지내기 힘드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널 두고 내가 또 가겠느냐?"

"저도 같이 가면 됩니다."

"됐다. 너는 여기 있어야지. 모래바람 그만 쐬고 좋은 바람 맞으며 살아야지."

"그럼 스승님만이라도 잠시만 다녀오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네놈이 나 없으면 어쩌고 살겠느냐? 내가 네놈 걱정하느라 더 늙을 게다."

그 무렵 사제간에 오가는 대화는 늘 이런 것이었고 그 대화는 늘 그렇게 스승의 고집으로 맺어졌다.

오두막집에서 홀로 지내던 마지막 며칠동안.

당신이 당신의 제자마저 대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나 살 수 있을 사람으로 살아가다 늙고 낡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된 까닭에. 능력 좋고 재능있는 젊은 제자가 대사막의 늑대들이나 사냥하다 일생을 마치기를 바라지 않고 있음을 그제야 알게 된 까닭에.

"네놈이 나 없으면 어쩌고 살려는지······ 내가 벌써부터 걱정이 많다."

그 고집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아는 아르센은 스승의 고집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늘 아르센이 지고 마는 대화가 하루하루 반복됐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스승은 자연스레 집 안에 있는 날이 많아지고 그러다 자연스레 앉아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자연스레 누워있는 날이 많아져갔다.

"이것 열어보지 말고 그 마법사 협회장에게 가져다 주거라."

"이게 뭡니까?"

"그쪽에서 자문을 구한 일이 있다. 비밀스런 일이니 열어보지 말고 가져다 줘라."

그러던 어느날, 스승이 이런 말을 하며 편지 한 장을 건넸다.

협회에서 스승님에게 자문을 구할 일이 뭐가 있느냐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스승이 시키는대로 편지를 뜯어보지 않은 채 길을 나섰다. 스승과 아르센이 수도에 올 무렵부터 마법사 협회장으로 일하고 있던 에우리아에게 그것을 전했다.

시간이 흐른다.

창 밖으로 보이는, 언제나 고요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세뉴강처럼. 흐르고 흐른다.

* * *

그래.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스승님. 한 가지만······ 한 가지만 여쭤봐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죽을 때가 됐기는 됐나보다. 네놈이 공손한 말을 다 쓰고."

낡아 해진 스승의 시간이 멈춰설 날이 그렇게 다가왔다.

"······ 일기가 적히다 만 노트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굳게 잠긴 자물쇠를 열었다.

오늘이 아니면 더 이상 열리지 않을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제가 뭘······ 봤었습니다."

"······ 딱. 처음 나를 찾아왔던 그 때의, 너만한 나이에. 죽었다. 그래서 나는 그놈이. 살던 이 집에 더 있지를 못, 하고. 아무데나 갔다."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말 소리에 귀가 온통 웅웅거렸다. 비로소 열린 문 안에서 들려오는, 금방이라도 끊길 듯한 말 소리가 천둥보다 크게 들렸다.

"처음에는 그놈이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내가. 그랬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내가 너를. 그리 봤다. 그놈인 것처럼, 너를······ 내가 키웠다."

대답.

대답을 하려고 했다.

스승님의 그 아들인 것처럼 나를 키웠어도 나는 스승님의 그 아들과는 달랐을 거라고. 스승님의 그 아들과 나는 아마도 많이 달랐을 거라고. 아주 많이 달랐을 거라고.

스승님은 그놈을 대신해서 나를 키웠어도 나는 그놈을 대신해서 자란 적 없었다고. 나는 그냥 그놈 말고 스승님의 다른 아들로 잘 자랐다고.

"미안하다."

대답을 하려고 했다.

나는 스승님을 아버지로 여겼다고.

나한테는 스승님이 아버지였다고. 아버지라고.

그렇게.

대답을.

대답을 하려고 했다.

"스승님. 저는,"

그러나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았다.

낡아 해진 스승의 시간이 이미 멈춰버린 뒤였다.

"······ 스승, 님······."

하지 못한 말을 그렇게나 많이 남겨놓은 채로. 알려줘야 할 말을 아무것도 전하지 못한 채로. 그 많은 말을 그렇게 다 내버려둔 채로.

아버지, 그 짧은 말을 결국.

한 번도 들려주지 못한 채로.

* * *

세뉴는 언제나 고요한 강이었다.

그 강 위에 붉은 꽃이 올랐다.

"강가로 가. 여기 있지 말고."

"저는 그냥 여기 있겠습니다, 협회장님."

"꽃. 올려야지, 너도. 네가 올려야지."

"아직······ 못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아르센의 꽃은 없었다.

단 한 송이만큼의 말도 하지를 못해서 꽃도 없었다.

"돌아가신 날 이걸 전해드리려고 했는데. 그랬으면 기뻐하셨을 텐데······ 못 보고 가셨네."

그런 아르센을 찾아온 에우리아가, 꽃 대신 편지 한 장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들고 쳐다보는 아르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에우리아가 발을 돌렸다. 꽃이 오르고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편지 안에 든 내용을 이제나마 스승에게도 전해주려고, 아르센을 대신해 에우리아가 강가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센이 고개를 숙였다.

금가루가 녹아든 왕실의 인장으로 봉해진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 팔락.

편지를 열었다.

'마법사단.'

생소한 명칭. 마법사단.

그런 곳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말이 있었다. 아르센을 추천한 사람이라며 스승과 에우리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생소한 것들 투성이였다.

그러나 그 생소한 것들에 곧바로 눈이 가질 않았다.

'아르센 헤르츠.'

더 생소한 것.

아르센 렌시르가 아닌 다른 이름.

'남작 라이게르 헤르츠의 양자. 아르센 헤르츠.'

함께 동봉된, 신분 확인 결과서에 적힌 글자에 눈이 가 닿은 까닭에. 그제야 뚝뚝 떨어지는 후회들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글씨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 까닭에.

"아무리 그래도 돌아가신 제 부모님 성인데······ 스승님 멋대로 이렇게 바꿀 것이면 말 한마디 묻기나 좀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더 멋진 성을 놔두고 헤르츠라는 이상한 성을 쓰는 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뚝. 뚝. 뚝.

언제나 고요하게 흐르는 세뉴강 위에, 그 다리 위에, 꽃에 담지도 못할 말이 뚝뚝 떨어졌다.

* * *

사람을 보면 인사부터 좀 하거라.

말을 공손히. 버르장머리 없게 굴지 말거라.

싸울 때는 앞 뒤 안 가려도 위 아래는 가리고 살거라.

돌은 놈 찾아 따라다니려면 생각 많아 돌은 놈을 찾아가거라.

- 함부로 길을 막아 죄송합니다.

네놈이 나 없으면 어쩌고 살려는지.

내가 벌써부터 걱정이 많다.

- 지금 망자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여,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튼.

나 없어도 이제 제대로 좀 살아보거라.

- 영결식인가.

- 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래바람 그만 쐬고.

좋은 바람 맞으며 살거라.

- 굳이 망자의 걸음을 방해할 이유가 없지. 죄송할 일이 아니네.

네놈이 나 없으면 어쩌고 살려는지.

네놈이 나 없으면 어쩌고 살려는지.

내가 벌써부터 걱정이 많다.

- 평안히 가시겠군. 명복을 비네.

벌써부터 걱정이 많다.

* * *

그 강이 그리도 고요한 것은,

그래.

강물을 따라 떠내려간 꽃보다 많은 것을 품어두어서.

차마 흘려보내지 못하고 품은 말들이 그리도 많아서.

그 많은 넋두리가 잠겨들어서.

그래.

그러니 그리도 고요할 수밖에.

한결같이 한날같이 언제나 그렇게 고요할 수밖에.

언제까지나 언제까지고 늘 그렇게 고요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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