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37화 (438/527)

제77장.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5)

특별히 다른 것을 못 느끼겠다.

슬레이만의 말로는 살짝 닿기만 해도 피부가 매끈해지는 느낌이 난다 하였는데.

"······ 글쎄."

창 밖에서는 빗소리가 들려오고 욕실 안에는 물소리가 가득한 오후. 체르밀 궁의 것만큼이나 드넓은 욕조에 온몸을 푹 담근 칼리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더 좋아질 것이 없어 그런가, 하고.

'하루 쉬고 가도 큰일 안 날 것 같은데.'

'뭐하러 시간을 허비합니까. 이미 다 나았다니까요.'

'너. 팔. 부러졌잖아.'

'거의 다 아물었습니다. 계속 보셨잖습니까, 이렇게 칭칭 감아놓고도 고기도 먹고 빵도 먹고 그러는 것을요. 저는 형님 저하만큼 약하디 약한 사람이 아니라서 금방 낫습니다.'

'내 아우님께서 사람 말로는 거짓말을 못하시니 짖어보기라도 하시겠다는 건가.'

조금 전.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짓자마자 당장 휘트린으로 가려던 칼리안을 플란츠가 막았다. 치유력을 남발하느라 지쳤을 것 뻔한 란델이나 아직 잠들어 있는 두 마법사는 신경도 안 쓰면서, 이미 다 나았다는 칼리안의 말은 손톱만큼도 믿질 않았다.

'라시드 브리센이 당장 움직인다 해도 하루 안에 휘트린에 오지는 못할 것 아닌가.'

'그건 그렇겠죠. 스승님같은 마법사도 없고 숲의 길을 이용한다 해도 하루 안에 올 수 있을 거리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그러니까. 쉬라고.'

'그래도요. 어차피 가는 것이면,'

'말 좀. 들으라고. 칼리안.'

'······ 네.'

덕분에 칼리안은 휘트린이고 제온의 전사고 시간의 축이고 뭐고 오찬 이후 꼬박 하루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완벽히 금지당한 채 별궁의 방 한 곳에 가둬지다시피 들어오게 됐다. 그리고 이렇게, 빗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화려한 욕실의 욕조에 들어선 참이었다.

- 찰랑······!

슈린츠.

그렇게나 좋은 온천이 샘솟는 곳이 아니던가. 아무것도 못하게 됐으니 물에나 들어가 쉬어야지.

그렇게 홀랑홀랑 옷을 벗고 들어앉은 참이었다. 그런데 특별히 다른 것을 못 느끼고 있었다. 그리 유명한 슈린츠에서도 가장 좋은 시설이 갖춰진 별궁의 욕조 안에 앉아 있었음에도.

바로 전날까지 여러 명의 사람이 죽어나간 곳이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르메인이 머무른 층에 가득했던 싸움의 흔적이 아직 다 치워지지 않았기는 했다. 부서진 가구들이나 베여나간 기둥과 조각들을 하루만에 수리하고 복원해둘 수는 없었으니까.

다만 그렇다 해서 온천에 감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낭자했던 핏자국이야 조사가 끝난 뒤 찾아온 마법사들이 싹 치워냈고 칼리안의 일행들은 드넓은 별궁의 다른 층을 이용하고 있었으니, 상황을 몰랐다면 바로 전날 이곳에 머무르던 르메인이 습격을 당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터였다.

"향이 안 나서 그러나······."

얀이 체르밀 궁에 준비해주는 물에서는 늘 좋은 향이 났다. 때로는 민트 향이, 어느 날에는 레몬 향이 나기도 했고, 가끔씩 이름 모를 잔잔한 꽃 향이 나기도 하고, 또 언젠가는 다디단 꿀이나 과일 향이 나기도 했다. 그날그날 칼리안의 상태를 솜씨 좋게 가늠해 마음에 꼭 드는 그런 향을 물에 풀어놨다.

그런 향기도, 하다못해 유황 냄새도 없는 것이 낯설어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순간 실소했다.

"누가 들으면 처음부터 이렇게 살았던 줄 알겠네."

정말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 베른은 따뜻한 물에 몸을 씻어냈던 적이 없었지 않나. 한여름이건 한겨울이건 베른의 욕조에는 언제나 살을 에일 듯이 차디찬 물이 가득했었다. 안온함 속에 잠기면 온 몸에 묻은 비린 냄새가 전부 다 씻겨나가 사라질 것 같아서 그랬다.

그런 베른이었으니, 물에 향기를 풀어놓는 일 같은 것도 당연히 한 적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향기를 찾고 있으니.

칼리안이 결국 작은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체르밀과 달리 문을 닫을 수 있도록 된 욕실 안에서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웅웅 울렸다.

"또 무슨 생각을 하였기에 그리 웃고 계십니까."

그런데 문 밖에서 갑작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순간에 욕실 밖에서 끼어드는 목소리는 플란츠의 것일 때가 많았지 않나. 때문에 대체로 미간을 찌푸렸던 칼리안이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 촤악!

"스승님!"

거의 눕혔던 몸을 급히 일으킨 칼리안이 문 밖을 향해 반가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서둘러 일어나 가운을 집어들려 하는데 밖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냥 들어가 계시지요. 상처가 잘 아물도록 해주는 물이라 하니 혹시 압니까, 동강난 뼈도 잘 붙을지."

"······ 아."

붉은 오러로 잘 고정시켜둔 제 오른팔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욕조 안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간 뒤 그 팔을 조심조심 물 속에 넣으며 말했다.

"들으셨습니까."

"멀쩡한 다리를 끊어내고는 절벽에 매달려 살아남은 뒤에 또 싸움을 벌이고, 이제 비밀이라 하기에도 미안한 그것을 세이렌 협회장에게 또 들켰다는 소식까지는 들었습니다."

아, 이제 혼날 차례인가보다.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보고싶었어요. 스승님."

창 밖에서는 빗소리가, 욕실 안에는 물 소리가. 아무리 그렇게 소란한 곳에 있다 한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스승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칼리안이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이렇게 딴 소리를 했다.

그런데 앨런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해서일지, 혼내려던 말문이 막혀서일지, 하려던 말을 가로채여서일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칼리안은 문 밖의 앨런을 향해 계속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인 줄을 알면서도 반갑고, 생전에 해주지 못한 일들을 그 사람에게라도 해주고 싶고, 그렇게 하면 속죄가 될 것 같고.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이미 알고. 그럼에도 다시 마음이 쓰이고······. 참 어려운 일이죠."

여전히 앨런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로닐을 만난 일을 다 이야기하고 새 아들에게 위로를 해달라 하려 찾아왔는데, 그런 말을 하나도 듣지 않은 칼리안이 위로를 건네고 있었으니까.

"다음에 리베른에 가실 때에는 저도 데려가주세요."

앨런의 속내에 쌓여있던 로닐의 벽이 그렇게나 단단하고 높았는데도 어느새 칼리안은 그것을 멋대로 녹여내고 욕심껏 제 자리를 만들며 들어앉아 있었으니까.

"좋은······ 바질리카를. 구해다 놔야겠다."

때문에 한참동안 아무 말도 못하던 앨런이 이런 말을 했다.

"계속 리베른의 술만 들고 찾아갔었는데 생각해보니 로닐이 바질리카도 꽤 좋아했던 것 같구나."

"은근히 독한 술인데, 그런 것을 드셨습니까."

"아들이라고 둘 뿐인데 둘이 다 그렇게 독한 것을 좋아하니······ 너는 적당히만 좋아하거라."

"아······ 적당히 좋아할 만큼만이라도 주량이 늘면 좋겠네요."

앨런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잘 닫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그 소리를 기분 좋게 듣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체이스 형님에게 말씀드려서 좋은 바질리카를 구해달라 해야겠습니다. 처음 찾아가는 자리인데 술 맛이 별로여서야 되겠습니까."

앨런으로부터의 대답이 또 들려오지 않았다.

찰박, 하고 괜스런 물소리를 대신 낸 칼리안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세레누스도 괜찮겠습니다. 조용한 곳에 찾아가기에는 그만한 술이 없어서요."

"······ 그래."

"자주 가면 될 테니까. 여러 고민 말고 하나씩 가져가요."

"그래. 그리 하자꾸나."

"네. 아버지."

"그래······."

혼자 앉은 채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물에서 빠져나와 가운을 걸쳐입은 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하루 푹 쉬기로 한 김에, 밖에는 비도 내리는 김에, 애상할 일 많은 부자가 마주앉아 오래도록 술이나 마셔야 되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고 보니 별궁에는 무슨 술이 있더라, 하고.

* * *

- 저벅, 저벅.

벌써 몇 바퀴 째 서재 안을 돌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느릿한 발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그렇게 같은 곳을 맴돌았다.

'전하의 앞에 가서 사과하십시오.'

'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귀족 회의가 열린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찾아가시라는 겁니다, 후작. 가서 국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사과하십시오.'

'도대체······. 말같잖은 소리 그만하고 물러가거라.'

- 저벅, 저벅.

'왕궁에 변고가 있던 것을 모르고 태만했다고. 공격이 있었음을 이제야 알게되었다고.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늘어나는 것이 못내 불안해서 기사들을 더 많이 데려다두고 있었는데 외부로부터 공격이 있는 줄 알았다면 출병하여 전하를 도왔을 것이라고. 바닥에 머리를 대고 사과하라는 겁니다.'

'내가 네 말을 따를 것 같더냐?'

'안 그러면 후작 죽습니다.'

'왕실 숲의 일······ 네가 꾸민 짓이로구나. 라시드.'

'중요한 것이 진실입니까. 후작이 언제부터 그런 것에 관심을 보였습니까.'

'그 일의 주범으로 왕실에서 나를 골라내리라고. 그리 생각하는 것이더냐.'

'하던대로 계속, 이번에도 조용히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시라는 겁니다. 쓸데없이 머리 굴리다 다 망쳐놓지 마시고. 하던대로 계속, 그렇게요.'

- ······ 저벅.

계속 옮기던 발을 멈췄다.

"밖에 있느냐."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그레이가 서재 밖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서재 문이 열리며 집사장이 들어왔다.

"네, 후작님. 찾으셨습니까."

"라시드는 어디에 있느냐."

"조금 전에 외출했습니다."

"어디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만, 내성 밖 쪽으로 말을 몰아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레이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내성 밖이 아니라 외성 밖으로 나간 것일 터다. 르메인이 이미 손을 써 두었다면 '브리센'의 어느 누구도 외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해두었겠으나.

'놈이라면 쉬이 나가겠지.'

라시드라면 사람을 회유하든 죽이든,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든. 원한다면 어떻게든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터였다.

"이 사달을 내어놓고 도망치려는 심산인가······."

"도망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작님?"

"아니. 신경쓰지 마라."

이렇게 말한 뒤 다시 몇 걸음을 걷던 그레이가 집사장을 쳐다봤다.

"외출을 하겠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비가 많이 내립니다."

'어차피 평생동안 숙여 온 고개인데, 한 번 더 굽히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살고싶다면 시키는대로 하십시오. 가능한 많은 이들이 보는 곳에서 전하의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겁니다.'

라시드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어두운 창 밖의 왕궁을, 그 반대편으로 이어지는 넓은 왕도를 살피던 그레이가 녹빛 눈을 돌렸다.

"지금 당장."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대답했다.

* * *

'왕궁에도 이미 생포한 놈이 한 명 있습니다. 저 놈도 데려가 같이 심문할 터이니 험한 일까지 죄 도맡아 하려 들지 마시지요.'

말이 좋아 심문이지 사실 반쯤은 고문이다.

'새들은 거짓말을 하는 법을 배웁니다. 어떻게 해야 거짓말이 티나지 않을지를 배우는 것이라, 반대로 알아보는 것도 곧잘 합니다. 그러니 체이스 형님이 남겨두고 가셨던 세작을 데려다 같이 심문하세요.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래서 전서구를 한 번 써보시라고 인사 추천을 했다. 굳이 험하게 고문하지 않아도 사실관계를 알아낼 수 있다면 두루두루 좋은 것 아니겠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항시 조심하십시오.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시스파니안을 만나기 전에도 이미 왕자님께서 있는 곳으로 제온의 놈들을 옮겨 둔 다누입니다. 그런데 시스파니안께서 그런 경고까지 남긴 터라, 다누가 어떤 마음을 먹었을지 누구도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왕자님에게까지 해코지를 하려 들 수도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조심할게요.'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아버지 부를게요.'

'꼭 그리하셔야 합니다. 지난 번처럼 혼자 다리 끊어먹고 그러지 말고. 다 죽어가다 운 좋게 서클이 늘어나서 간신히 살아남는······ 그것 참. 누구 아들이 이렇게 잘나셨는지.'

'아버지 아들이요. 아버지 닮아서 잘난 아들이요.'

'그리 웃지 마시지요. 두 번 넘어가드리진 않을 터이니.'

'네에.'

'아무튼 조심하시라는 겁니다. 또 그 난리를 부리면 정말로,'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아버지.'

'······ 알겠습니다.'

조심하라는 말만 서른 번 쯤을 듣고, 조심하겠다는 말만 서른 번 쯤을 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하는 앨런을 잘 달래서 카이리시스로 돌려 보냈다.

휘트린까지 데려다주고 가면 더 편할 테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휘트린은 슈린츠에서도 한참 남쪽에 있는 곳이다. 지그프리드 공작령에서도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즉, 시스파니안의 '영역'에서 멀어진 만큼 다누의 영향력이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곳에 함께 찾아가는 것은 플란츠 정도면 족하지 않겠나.

대신.

앨런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칼리안을 돕기로 했다.

"왕자님!"

누가 보면 삼년 쯤 못 만나던 가족을 이제야 간신히 상봉한 것이 아닐까 싶은 얼굴로 달려온 얀이, 칼리안을 또 이리저리 돌려세우며 다친 곳을 확인하고 옷 매무새를 살폈다. 차마 그렇게 험한 손길로 제 윗사람을 다루지 못할 레릭과 덴도 각자 열심히 플란츠와 란델의 상태를 확인했다.

"고양이들은."

"치유사 베른 경에게 부탁했습니다."

"바쁠 텐데."

"바빠지면 전하께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 누구."

"베른 경이 저하 걱정 마시라고 농담한 겁니다. 세크리티아의 린 영애가 계속 빌헬름 관에 머무르면서 베른 경도 돕고 루시와 안네도 같이 돌봐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았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지도 못한 동행인들이 추가된 것에 칼리안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물론 그 주변에 서 있던 백여 명의 발칸 대원들까지 전부 확인한 뒤였다.

"······ 내 직위를 이렇게 쓰겠다 한 것은 아니었는데."

왕자의 직위를 남용해서 자신의 영지에 갑작스런 시찰을 나서겠다는 칼리안의 말에 동의한 앨런이 대규모 시찰단을 옮겨다 놓고 갔다. 물론 시찰단을 꾸린 것은 르메인일 터다. 아니었다면,

"그래도 잘 됐네요. 두 분은 저기 타고 편히 가시면 되겠습니다."

"싫어."

"혼자 타마."

거대하고 화려하며 편안하기로는 이를 데 없을 뿐 아니라 안전하기까지 한 카이리스 왕실의 마차까지 보내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네."

어쨌건 플란츠는 싫다 했고 란델은 혼자 타겠다 했으니 됐다. 안 투닥거리고 잘 나눠서 간다 하면 된 일이지, 뭐.

그나저나 나는 저기 언제 타 보나.

- 푸르륵!

이런 생각을 안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탑승감을 자랑하는 등짝을 지닌 레이븐이 칼리안의 어깨에 제 목 아래를 또 가져다 댔다. 덕분에 오른쪽 시야를 가득 메운 거대한 말 머리를 슥슥 쓰다듬은 칼리안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준비됐습니다."

그리고 이동 마법진을 관리하는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배웅을 나온 에밀리아 슈린츠 변경백, 그리고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이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것이 보인다. 속이 울렁거릴 것을 대비해 긴 숨을 들이쉬는 란델이, 조용히 눈을 감는 플란츠가 보인다. 내리는 비를 막고 있던 아르센이 이동 마법에 앞서 자신의 얼음 장막을 거두는 것이 보인다.

- 쏴아아아······!

차가운 빗물이 뺨에 와 닿는다.

커다란 빗소리가 일순간에 조용해진다. 기분 좋던 비 비린내가 상쾌한 풀 내음으로 바뀐다. 그리고,

- ······ 사락.

빛이 들었다.

바람이 불었다.

늦봄의 따스함을 머금은 바람 사이로 강한 햇살이 내리비췄다. 그것을 깨닫고 눈을 뜬 칼리안에게 잔뜩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오십시오."

휘트린.

'어머니'의 땅에 그렇게, 칼리안이 도착했다.

"반갑습니다."

일행들의 앞에 나설 생각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을 플란츠와 란델을 대신해 인사를 나눈 칼리안이 대열을 정비했다.

"에일라."

"네."

"마차 쪽 호위해줘. 세이렌 경도 같이."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왕자님."

"휘트린 쪽의 이동 마법진은 그래도 휘트린과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요. 오래 불편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란델 형님."

"우려하지 말거라."

"네."

란델이 마차에 오르고 에일라와 에우리아가 자리를 잡고 나니 아르센과 키리에가 알아서 플란츠의 곁으로 와 서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정비를 마친 뒤.

"출발하죠."

생각보다 많아진 인원을 쭉 둘러보며 레이븐을 움직인 칼리안이 정신을 다잡았다.

- 다그닥, 다그닥!

기사들이며 시종들이며 마차며 얀이며, 이끄는 일행이 많아지면 정신이 없어진다. 그렇게 정신없던 차에 다누가 또 완두콩을 쏙 빼가면, 안 그래도 정신없던 내가 그만 엘프들을 싹 도륙해버리는 정신없는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니까.

- 다그닥······ 다각!

- 우뚝!

그러지 않도록 정신을 잘 차리고 있어야지.

그렇게 정신을 잘 차리고 있어야.

- 끼야아아악!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기든.

"실드!"

- 우우웅!

- 우웅!

- 파직, 파지직!

"마차 주변으로 모여라!"

그래.

무슨 일이 생기든.

대처를 하지.

"세이렌 경. 헤르츠 경."

휘트린 인근의 마법진에서 벗어나 바로 근처의 휘트린으로 가던 그 짧은 숲길. 그런 곳에서 그새 발을 멈춘 칼리안이 조용히 레이븐의 안장에서 내려섰다.

"네. 왕자님."

"나서지 말아요, 내가 갈 테니까."

"상대해보신 적 없는 것 아닙니까."

"다들 없잖아."

그리고 씩 웃으며 왼손에 붉은 검을 만들어 들었다.

- 끼야아아악!

은빛과 붉은빛이 섞인 머리카락.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붉은 날개.

생전 처음 마주친, 드래곤이 아닌 몬스터.

"예쁘네."

하피를 보던 칼리안이 발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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