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36화 (437/527)

제77장.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4)

머리가 지끈거렸다.

남겨두고 간 업무 때문은 아니었다. 근심걱정 많은 아버지에게 잠시간의 휴양을 권했던 둘째 아들이 놀라울 만큼 깔끔하게 국왕의 대리 업무를 수행했으니 말이다.

물론 르메인은, 플란츠가 '결벽적이라 할 만큼 완벽한 국왕으로 살다 죽은 아비에게 온갖 것을 다 배운 뒤 자신의 형을 단 하나의 오점도 없는 훌륭한 국왕으로 만들어 놓았던 대단한 왕제'를 동생으로 두고 있음을 전혀 몰랐다.

때문에 플란츠가 알지 못했을 업무에 대해서는 앨런의 도움을 받았겠거니, 칼리안이 나중에 왕위에 오른 뒤에도 플란츠를 수도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 한 것이 제 형이 이렇게 일을 잘 하는 사람임을 알았던 까닭이겠거니, 적당히 그 정도만 생각하고 넘겼다.

어찌됐건 미뤄둔 업무들이 르메인의 두통거리가 되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펜을 잡는 것에 문제가 없을 만큼 아물게 된 팔의 상처 역시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그런 르메인이 눈가를 주무르고 있는 이유는 딱 하나.

"우선은 왕궁 문을 닫을까 하네."

"이 참에 저하와 왕자님들을 다 내보내고 드디어 혼자 살 요량이십니까?"

"그게 아니라,"

"안 그래도 전하 때문에 세 분이 아직까지도 고생만 덕지덕지 하는 것이 영 꼴보기 싫던 차인데 그것 참 잘 결정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제가 세 분 다 싸들고 남쪽으로 떠날 터이니 전하는 왕궁 문 닫고 건강히 오래오래 잘 계시지요."

"······ 다시 앉게."

"멀쩡한 왕궁 문을 닫겠다시니 반가워 이러는 것 아닙니까."

"멀쩡한 왕궁 문을 왜 닫겠다 하는지를 먼저 물어봐주면 안 되나?"

"여쭙기 전에 먼저 말씀을 하시지요. 전하나 저나 시간 모자라기는 매한가지인 사람들이니."

"시스파니안께서 오셨지 않나. 그것을 어찌 공표할지를 결정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까 좀 앉게. 가려고 들지 말고."

······ 아무튼.

르메인이 눈가를 주무르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시스파니안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단순히 찾아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온 카이리시스의 상공에 나타나 위용을 떨치고 갔다. 덕분에 르메인은 상한 곳 없이 왕궁에 잘 돌아오게 됐다.

원래부터 좀 상해 있었어서 그렇지 특별히 더 상하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왕권이 올라갈 날을 상상만 해오다 이렇게 마주하게 되니 감당이 안 되십니까? 왕궁 문을 닫겠단 생각을 다 하시고."

"······ 마나실 후작. 말을 좀."

"틀린 말이 아니잖습니까. 당분간 전하 모가지가 위험할 일은 사라진 것인데. 그렇다면 좋아하셔야지요."

당연히 좋은 일이 맞다.

앨런의 말마따나 왕권이 올라가게 될 일이다. 그 위대한 고룡의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였음을, 그 고룡의 핏줄을 이은 이가 바로 르메인임을 상기시켜 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국왕의 위세가 함께 올라갈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나.

그런 것을 차치하더라도 르메인은 분명 감격했고 감사히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아팠다.

"수백 년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분이네. 그런 분이 이 땅에 재림하신 것을 두고 사람들이 그저 좋아하기만 하겠나. 왜 오셨는지, 그 이유를 궁금해 할 테지."

"왜 오셨는지를 설명하면 될 일 아닙니까."

"그것을 어찌 말하라는 것인지 모르겠군."

"설마 제온 놈들의 습격을 비밀로 부칠 생각이셨습니까?"

"그렇네."

카이리시스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르메인은 가능한 이번 문제를 조용히 해결할 생각이었다. 제온의 군사들이 수도 안으로 침입했음을 알리지 않으려 했다.

카이리스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수도 카이리시스가 아닌가. 바로 그 카이리시스의 외성 밖도 아니고 내성 밖도 아니고 무려 내성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왕궁 인근의 아스트리샤 거리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던 시간, 광장에서 웃고 떠들던 그 시간, 바로 옆 왕실의 숲에서 사백 대 칠백의 전투가 치뤄지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나.

- 달칵.

르메인이 로즈마리 차 한 모금을 목 깊은 곳으로 넘긴 뒤 찻잔을 내려놨다. 지난 밤 사이 내상까지는 모두 낫게 된 호위기사 렌, 그리고 다른 시종 셋과 함께 서둘러 왕궁에 돌아온 시종장 라울이 감격에 겨운 얼굴로 내어 온 것이었다.

"이번 일을 제온이라는 미상의 조직이 벌였고, 그 배후에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가 있음을 알게 되면. 내 자리가 도로 위태해지는 것은 차치하고 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질 걸세. 게다가 자칫하면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엘프들에게로 화살이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엘프들의 어머니가 먼저 자행한 짓이니, 엘프들이 피해를 보는 일에 문제될 것이 있습니까."

찻물 위에 둥둥 뜬 로즈마리 잎을 입으로 후 불어 치워내던 앨런이 찻잔을 향해 내려간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시선만 올려 르메인을 쳐다봤다.

조금씩 식어가던 차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르메인을 향했다.

"이 참에 엘프들을 노예로 삼지 못하도록 금지하던 법을 철회하든, 숲 속의 엘프들을 죄 꺼내와 사방이 모래뿐인 대사막으로 추방을 하든. 아니라면······ 모조리 처형을 하든. 이 땅으로 시스파니안께서 현신하신 상황에 다누가 제대로 된 항의나 할 수 있겠는지요."

르메인이 잠시 눈을 찌푸렸다.

"······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그대 머리 색이 꾸며낼 수 없는 것임을 몰랐다면 누군가 그 변장 마법이라는 것으로 그대를 따라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겠군."

날카로운 눈을 내려 뜬 앨런이 찻잔을 조용히 매만졌다.

'슈린츠에 다시 한 번 습격이 있었다 합니다.'

'또 일이 있었단 말인가? 왕자님은, 아니. 다들 무사하시다 하나?'

'네. 그런데······ 놈들이 세크리티아 국왕 전하의 모습을 하고 칼리안 왕자님을 찾아갔습니다. 다행히 별 탈은 없었다 합니다만.'

'······ 체이스를 보냈단 말인가. 그 아이에게.'

'왕자님께서, 조금 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마나실 후작님께는 혹시······.'

'로닐이 왔었느냐고 물었나.'

'네. 그렇게 된 일이 맞는지를 확인하셨습니다.'

지난 새벽, 공작저로 돌아가기 전 찾아온 드미레아가 전해왔던 말.

'놈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왕자님께서 믿지 못할 이들에게까지 비밀을 들킬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시 모를 일이지. 시도 때도 없이 들키는 재주가 으뜸인 분이니. 덕분에 데블란에게까지 비밀을 들켰던 분이 아닌가.'

'네,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듣기로는 데블란 역시 왕자님과 세크리티아 국왕 전하와의 관계까지는 알지 못했었다 했습니다. 만약 왕자님이 정말로 누군가에게 비밀을 또 들켰다 한들, 하필 왕자님의 지난 형제를 가장하여 찾아갈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겠네. 그럼 체이스의 모습을 어찌 알았을까.'

'누군가는 과거의 일을 알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혹, 의심되는 이가 있는가.'

'가장 먼저는 라시드 브리센입니다. 과거와 다른 행보를 보인다 했던 텐실의 하이데른 공작가 쪽도 의심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꼽자면,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입니다.'

'그래. 다누라면 정확히 알고 있겠지.'

'네.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가 왕자님과 저하께 과거의 일을 보여주었다 했습니다. 심지어 그때 남겨진 검을 시간 너머로 가져와 왕자님에게 전해주기까지 하여 지금 그것을 저하께서 사용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맞네. 그러했다지.'

'게다가 누군가 마나실 후작님의 영식을 그 정도로 상세히 기억하기에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시간이 너무 오래 흘렀습니다. 어머니 나무가 후작님의 영식이 어떤 얼굴을 지녔는지, 칼리안 왕자님의 옛 형제가 누구인지. 그런 정보를 그들에게 알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네, 소공작. 다만 속단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네.'

속단하지 말자 했으면서.

앨런도 결국 사람인지라.

"생각같아서는 엘프의 숲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전부 다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다누를 향한 화를 참을 길 없던 대마법사가 결코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을 했다.

"······ 본의가 아니길 바라네."

"진심입니다."

르메인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다누 때문에 발칸의 대원 여럿이 죽을 고비를 넘겼음을 르메인도 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로 칼리안까지 죽을 뻔했다. 아직도 그 다리가 끊어졌던 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러니 앨런도 화가 났겠거니.

앨런이 다누에게 화가 난 진짜 이유까지는 가늠하지 못하지만 화가 난 것까지는 이해를 한 르메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의 책임을 무고한 이가 지도록 하지는 말게."

"그런 생각을 할 줄 아셨으면서, 본인이 눈을 감고 20년 가까이 살아온 일의 책임을 무고한 저하와 왕자님들께서 지도록 만드셨습니까?"

괜스레 앨런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바람에 또 한 소리를 들은 르메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앨런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는 로즈마리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뭐든간에, 이번 일을 묵과하고 넘기지는 마시지요."

한층 진정된 목소리를 낸 앨런이 말을 이었다.

"칠백 대 사백의 전투였습니다. 발칸이 아무리 눈에 띄지 않도록 움직였다 한들, 그렇게나 큰 전투가 내성 안에서 있었음을 묻어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아직 슈린츠에 계신 상황이라면 모를까 돌아오셨다면 더 이상 쉬쉬할 이유가 없습니다."

"말했잖은가. 그것을 알리면."

"엘프에게 보복하는 것은 차후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상황만 이용하시라는 말입니다. 전하."

"어머니 나무와 그 단체의 개입을 숨기고, 전투가 있었음에 대해서만은 알리라는 말인가."

'습격 사실에 대해서만은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칼리안 왕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이겠습니다만 저하께서도 반론하지 않으셨다 하고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시스파니안까지 이곳에 오셨었다면 분명 누군가는 숲 속에서 터져나온 빛과 그 소음과 수많은 군사들과 시스파니안의 모습을 한데 엮어 불안할 소문을 만들어낼 터이니."

"불안한 소문이라······."

'숨기려 하다가는, 자칫 란델 왕자님이 물어뜯길 수 있습니다. 숨겨진 세력이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는 언제나 가장 약한 자가 누명을 뒤집어 써 오지 않았습니까.'

"왕자들 중 한 명이 이 모든 일을 꾸몄노라 한다는 말인가."

"이 상황에 시스파니안께서 오시면 가장 이득이 될 것은 전하 아닙니까. 집채만한 돋보기로 들여다봐야 겨우 보일까 말까 했던 왕권이 일순간에 집채만하게 부푸는 꼴이니."

"······ 그래. 내 이득이 가장 크지."

이 말을 끝으로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 세자가 무마했다 하나 칼리안이 왕위에 욕심이 있다는 듯이 굴었었지."

"그렇습니다. 저하께서 급히 나서 왕자님께서 그리 행동한 이유를 대충 덮어두었다 하나 그런 것까지 속아 넘어갈 귀족들은 아닙니다."

"그래. 그리고 그대는 칼리안의 편에 선 사람이고."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칼리안이 당장 내 자리를 뺏으면 곤란하다, 라고. 란델이 그리 생각해 반역을 꾀하자 연이어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다 못한 시스파니안께서 나섰다······ 그런 소문이 돌 지도 모른다는 말이 맞겠나."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왕궁이 침묵한다면 어떤 소문이 생겨날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사실을 알 수 없다면 그 어떤 거짓도 사실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시스파니안이 나타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미 벌어진 뒤다. 그 시스파니안이 몇백 년만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보다 더한 억지 주장이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

당장 올 해가 지나면 왕궁을 떠나야 하는 란델이 무슨 수를 써서든 상황을 역전시키려 했을 것이라는 억지 말이다.

"최악의 경우 그런 말까지 나돌 수 있으니, 그 전에 전하께서 나서시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입이 모이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진리를 발견해내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어리석은 경전을 지어내기도 하는 법이니."

"그렇다 하여도······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와 제온을 알릴 수는 없는 일인데."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생각을 하던 르메인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떠 앨런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렌 경의 말로는 브리센 후작저에 기사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던데."

갑작스레 꺼내진 그레이 브리센 후작의 기사들 수.

그것이 거론되었음에도 앨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찻물 위의 로즈마리 잎 하나가 물 속으로 잠겨드는 것을 보던 눈을 가늘게 떴을 뿐.

"브리센 후작이 매번 그 수를 줄여 보고하고 있다 하였으니. '많이 있었겠지요'."

"그래. 보고되었던 바와 실제 군사 수가 늘 달랐으니······. 브리센의 기사 수가 급격히 줄었다 추궁한들 그 수가 실제로 줄어든 수인지 평소와 같은 수인지를 증명해 낼 방법도 없겠군."

그레이가 본래부터 제 기사들의 수를 속여왔다.

그렇다는 건, 지금 당장 브리센 후작저를 봉쇄하고 그곳에 남아있던 기사들의 수를 세어본 뒤 '실종되었던 칼리안을 찾고자 브리센 후작저를 수색했을 당시보다 기사들 수가 줄어들었다. 왕실 숲으로 공격을 해오다 죽은 기사들이 브리센의 소속이었던 것이냐' 해도, 그레이가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그레이가 제 땅에 천 명의 기사를 들여다놓고 오백이라 속여왔다면, 르메인이 후작저 안에는 본래 천오백 쯤의 기사가 있었다 주장해도 그레이가 반박할 방법이 없지 않나.

'저와 통신이 연결된 김에, 왕자님께서 마나실 후작님에게 이야기를 좀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칼리안 왕자님의 기행을 참지 못하고 '왕궁이 빈 틈을 타 왕실 숲을 통과해 왕궁을 공격하려 했던, 그 일로 말미암아 시스파니안님까지 노하게 만들어버린' 브리센 후작을 벌해달라고······ 말입니다.'

브리센을 없애달라 했던 플란츠의 말을 잘 듣기로 한 칼리안이, 이번 습격에 아주 깊숙이 한 발을 들여놓고 있을 라시드에게 건넬 보답.

그 첫 선물이 이렇게 르메인을 통해 준비되고 있었다.

"감히 왕궁을 향해 검을 드리웠는데. 브리센 후작 따위가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앨런의 눈이 부드럽게 구부러졌다.

* * *

슈린츠 변경백과 에이프린 백작이 함께 한 오찬 자리.

아무것도 도움 안 될 두 형님들까지 모시고 그 자리에 앉아 정말 간신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느라 진이 다 빠졌나보다.

별궁의 소연회장을 벗어나 '휘트린에 왜 가려느냐' 물었더니 '배고프다' 대답한 이유는, 그래. 분위기 축축한 오찬 자리에서 혼자 생글생글, 어울리지도 않을 표정을 지어가며 그렇게 애를 쓰느라 진이 다 빠져서겠지.

"란델 형님. 혹시 그거 안 드실 겁니까."

"먹거라."

"네."

······ 그래.

그래서겠지.

그래서 축복의 힘이 강해졌는데도 여전히 많이 먹는 거겠지.

"오찬 자리에서 고기보다 눈치를 더 많이 먹어 그런가, 아직 허기가 지네요. 축복이 늘기 전보다는 배고픈 만큼이 줄어들었는데도요."

그래.

그런 셈 쳐야지.

오찬 자리에서 일반적인 한 끼를 그렇게 잘 드셔놓고 응접실에 와서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수많은 쿠키와 케이크를 다 처먹고, 그것으로 모자라 란델의 앞에 있던 것까지 넘겨받았지만. 먹는 양이 줄어든 셈 쳐야지.

"키가 크려고 그러나······."

이렇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는 플란츠를 향해 방긋방긋 웃었다. 그러더니 빈 접시를 다시 채워주려는 별궁 시종의 손길도 물리고 란델이 손도 대지 않은 애플 타르트를 제 앞으로 굳이 옮겨다 먹기 시작했다.

오찬을 마친 이후.

에일라와 키리에가 생포한 전사와 그 수하를 심문하러 간 상태라서. 별궁과 변경백의 기사로는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워서. 그러니 남은 호위 인력은 에우리아와 아르센 뿐이지만 둘 다 밤새도록 별궁 주변을 경계하느라 이제야 쉬러 갈 수 있게 되어서.

그런 이유로 이렇게 세 형제가 다시 한 번 한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앉게 되었다.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칼리안의 배를 다 채워놓기 전엔 휘트린에 대한 얘기를 다시 물을 생각이 없던 플란츠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무엇이든 물어볼 생각이 없던 란델이 야무지게 삭삭 비워져가는 접시에서 쏟아지는 빗소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결국, 4층과 5층 거주인들의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휙!

그 시퍼런 눈을 보고싶지도 않다는 듯, 그 연두색 눈동자가 거북하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되돌린 둘의 시선이 다시 칼리안에게 가 닿았다.

"그렇게 잠깐 눈 떼기도 어려워할 만큼 안 예뻐해주셔도 귀한 막내인 줄 압니다."

그러자 접시에서 시선을 돌린 적도 없으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안다는 듯한 칼리안의 말이 들려왔다.

- 달그락.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드디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칼리안이, 라임을 넣어 둔 탄산수로 목을 축인 뒤 입을 닦았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나 어여삐 여겨주는 두 형을 번갈아보다 시종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사일런트 막이 응접실을 감싸듯 펼쳐졌다.

"또 멋대로 정했지."

소리가 차단된 것을 알자마자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고개를 가로저은 칼리안이 대답했다.

"휘트린에 왜 가려는지 천천히 말씀도 드리고 설명도 드리려고 했는데 형님께서 먼저 물어보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생각했던 결과만 우선 알려드린 겁니다."

"해, 그럼. 설명."

"아델리아에게 전서구 보냈습니다."

휘트린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이 먼저 나왔다.

눈을 찌푸리며 자신을 보는 플란츠에게서 눈을 돌린 칼리안이 란델을 쳐다봤다.

"텐실의 가짜 왕세자가 조만간 카이리스로 오게 될 겁니다. 그걸 부탁하려 아델리아가 다시 찾아왔다가 라시드에게 죽을 뻔한 저를 구해줬던 것이라서요. 세르제인이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담아서 아델리아가 알려준 좌표로 서신을 보냈습니다."

"온다면, 만나마."

"네. 세르제인이 란델 형님에게 세자위를 양보할 것처럼 군다면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만나시고, 아니라면 한 번만 만나주시면 됩니다. 나중에 란델 형님께서 텐실로 가실 때, 절친한 이의 자리를 빼앗아 앉았다는 이야기까지 돌 필요는 없으니까요."

"알겠다."

곧 칼리안의 시선이 플란츠를 향했다.

"새벽에 얘기한대로, 브리센 후작을 내리누르는 일이 이제 시작될 겁니다. 브리센 후작이 왕궁을 공격하려 했다고요."

"그래."

"브리센 후작이 반역을 꾀했다 한다면, 후작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 누구도 후작을 돕겠다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겁니다."

"알아."

"네. 그렇게 되면 라시드 브리센이 무엇을 할 것 같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한동안 생각을 하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제 어미를 찾아가나."

라시드 역시 브리센이 아닌가.

반역이란 단순히 가주 한 명만 처형되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레이 브리센이 죽는다면 라시드 역시 안전하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라시드 브리센의 어머니는 텐실의 고위 귀족이다. 텐실 국왕의 먼 혈육이기도 하다. 그러니 텐실로 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했다.

이 말에 칼리안이 웃음을 보였다.

"휘트린에 갈 겁니다."

"······ 거긴 왜."

"제가 라시드 브리센과의 약속을 어겼으니까."

칼리안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플란츠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러나 칼리안은 곧바로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자이니. 네가 제 목표를 또 멋대로 치워내도록 두지 않으려 하겠구나."

플란츠가 아닌 란델 쪽에서 들려온 말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그러니 브리센이 이대로 무너지지 않도록 잠시 그레이 브리센을 도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자신의 공로를 계속 채가는 저도 좀 없애려 할 테고요."

또 멋대로 치워내려 든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 플란츠가 잔을 들어 그 속에 든 음료를 마셨다. 라임이 든 탄산수에서 아주 잠시 르니에리 향이 스치고 지나간다.

라시드 브리센이 가장 먼저 없애고자 했을 사람.

바로 실리케가 아닌가.

그 실리케를 칼리안이 갑작스레 치워냈다. 그러더니 자신과 함께 없애기로 약속했던 브리센도 멋대로 치워내려 든다. 그런데 라시드는, 그것을 두고 '손을 대지 않고 편하게 일을 처리했다' 여기고 좋아할 놈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 자존심에 칼리안이 두 번이나 제 목표를 채가도록 두지 않으리라는 말이기도 했다.

"왕실 숲으로 기사들을 보낼 만한 곳으로 가장 유력한 지그프리드는 아직까지 라시드가 건드릴 수 있을 크기가 아닙니다. 게다가 지그프리드 공이 직접 전하를 호위하기도 했고요. 전하께서 영지에 직접 방문하셨으나 이상을 느끼지 못한데다 오히려 전하가 수도로 들도록 도왔던 에이프린 백작 역시 이번 일에 대한 누명을 씌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휘트린인가."

"네. 그 쪽에 적당한 증거들을 심어두고 제가 이 기회를 틈타 수도를 공격했다 주장할 겁니다. 때마침 제가 멋드러진 옷까지 입고 귀족들의 앞에 나섰었으니 시기가 참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가보려고요. 그런데 왕궁에서 저만 사라지면 그것을 두고 또 의심이 들 테니 당분간 형님들도 왕궁에 돌아가지 않고 제가 갈 때 같이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에게 드리워진 뱀의 아가리를 목전에 둔 것을 알면서도 태평하기만 한 검은 고양이가 보드라운 목소리를 냈다.

"텐실 쪽에서 세르제인이 카이리스로 찾아온다는 이야기가 돌면 생각없는 귀족들이 란델 형님을 더 물고 늘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전하께서 왕실을 습격한 주범으로 브리센을 지목한다 하더라도 그 일을 미리 알아내 막아내게 한 왕세자의 정혼자를 크게 치하하면 플란츠 형님이 브리센에 같이 얽히지도 않을 테고요. 그러니까 저만 조심하면 됩니다."

란델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여전히 낯선 듯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붉은 눈을 들여다보다 물었다.

"이리 살았더냐."

생각지도 못한 질문.

란델의 입에서 나오리라 여기지 못한 말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 대답했다.

"네. 하루하루 이렇게 살았습니다."

세크리티아에서는요.

피로함이 묻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며 건네진 대답에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까지 그리 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미리 예상했던 말이었다.

칼리안이 또 버릇처럼 혼자 갈 필요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혼자 가는 것이 정말 나아서 그렇습니다. 몰래 숨어 살펴보고 확인하고 조용히 돌아오려면, 제가 따로 다녀오는 편이 낫습니다."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그것을 보던 칼리안이 실소하며 말을 이었다.

"라고 해도. 따라오실거죠."

끄덕끄덕.

보지 않아도 뻔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럼 저도 올라있는 직위 써먹어도 되겠습니까."

"이미 잘 쓰고 있는 것 아니더냐."

란델의 대꾸에 칼리안이 고운 웃음을 보였다.

"아직 다 안 써먹었습니다."

"그럼 어찌 써볼 생각이더냐."

"제 영지인데, 제가 아직까지 그 곳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말에, 플란츠가 잠시 생각을 이어나가다 말했다.

"브리센 후작이 위험한 짓을 벌인 김에. 각 왕자들의 영지에 시찰을 다녀와도 괜찮겠군. 가장 먼저는 휘트린부터. 이제 세 곳 정도야 보름이면 다녀올 수 있지 않나."

"네. 셋이 함께, 사이좋게, 같이 가시죠."

명분이야 만들면 되고.

란델이야 데려가면 되고.

"어떻습니까, 란델 형님."

칼리안이 물었다.

"짜증이 좀 나는구나."

란델이 대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