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장.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3)
손톱 위에 피어난 새하얀 반달이 살며시 드러났다.
모난 곳 하나 없는 뽀얀 엄지가 접힌다.
'소중한 우리 히나.'
과연 그것이 검을 쓰는 이의 것이 맞을까.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과히 신비롭기만 한 보드랍고 매끈한 검지. 이번에는 그것이 접혀들어갔다.
'내 귀여운 새끼 코끼리.'
뼈마디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길쭉한 중지도 접혔다.
'전하.'
이렇게 손가락 세 개를 접어둔 뒤 잠시 고민을 했다.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아, 레이븐. 세상에서 제일 착한 레이븐.'
약지에 끼워두었던, 짙은 은색의 반지가 잠시 빛났다.
다섯 개의 고운 손가락들 중에서도 가장 어여쁜 약지가 가만히 접히느라 달빛에 반사된 까닭이다.
'아니야. 레이븐은 알 것 같아.'
도리도리.
뽀얀 뺨과 가느다란 턱선, 오똑한 콧날을 지닌 어여쁜 얼굴이 무언가를 부정했다. 그와 함께 험한 것은 좀처럼 쥐어본 적 없다는 듯 그저 곧기만 한 약지가 다시 세워져 올라갔다.
'그리고 또······.'
맑은 빛이 도는 둥근 이마에 작은 주름이 진다.
'그러니까······ 또······.'
깊은 고민이 계속 이어졌다.
도르륵 도르륵, 하고.
꽃보다 붉고 보석보다 맑은 두 눈이 구슬처럼 움직였다.
'없네.'
그 고민의 끝에 나온 결과.
다섯 개나 있는 손가락 중에 고작 세 개만 접힌 손.
그것을 내려다보던 도톰하고 새빨간 입술이 꾹 다물리다 살짝 벌어졌다. 그 사이로 소리없이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비가 내리면 빗물이 내려앉고 눈이 내리면 눈송이가 소복이 올라설 것처럼 길고 숱많은 속눈썹이 한참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왔다.
그러니까 지금 칼리안은, '왕자님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을 세는 게 빠를 것'이라던 앨런의 말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그나마 그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다섯 손가락은 다 채웠던 것 같은데 이젠 레이븐을 끼워넣어도 손가락이 남는다는 깨우침을 얻고 있었다.
'······ 셋.'
셋 남았다.
셋을 빼면 다 안다.
역시 스승님의 말씀은 틀린 것이 없다. 아는 사람 세기를 때려치고 모르는 사람부터 세어 보니 답이 이렇게나 금방 나오지 않나.
"음······."
어떡하지.
"······ 하."
오늘 저녁엔 어떤 종류의 고기를 먹으면 좋을지를 꼽아보는 것만큼이나 신중한 얼굴이 되어 제 손가락을 하나씩 접더니 그나마도 잘 접었던 것 하나를 다시 펴고 있는, 그야말로 애증해 마지않는 내 망할 동생 새끼의 꼬락서니를 지켜보던 플란츠가 나이먹는 소리를 냈다.
뭘 하는지 들여다보지 않아도 뻔하다. 비밀을 안 들킨 사람이 누가 있나 세어보다 이제까지 얼마나 많이 들켰는지를 드디어 깨달은 거겠지. 제 시종에게 들킬 뻔했을 때 그렇게나 마음을 졸였다 했었으면서.
"세렌티께서 괜한 수고를 하시는 것 같은데."
방금 들은 이상한 이야기에 대한 의문이 가득한 에우리아의 눈과, 내가 어쩌다 또 들키게 됐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득한 동생 놈의 눈을 한 번씩 본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이래서야.
'베른'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굽어살피사, 숙면중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낱 인간의 기억을 지우고 위대한 고룡의 입까지 틀어막고 있는 세렌티 혹은 또 다른 누군가의 헛된 노고에 애도를 표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그렇게 열심히 막아대면 뭐 하나.
저렇게 전부 다 들키고 다니는데.
시스파니안께서 아마도 저 놈이 막내인 줄을 아셨나보다. 남은 축복 어디 쓸 곳이 더 없어서 저 놈의 웅대한 위장에 한 번을 쏟아주시고 남은 것을 비밀 들키는 능력에 다 들이부어 주셨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시 눈 뜬 뒤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한 번을 들키며 찬란한 새 삶을 시작한 뒤 삼 년이 채 되지도 않았을 지금에 와서는 비밀 모르는 사람이 셋 밖에 안 남는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납득을 못 하겠다.
"일단······ 세이렌 경."
플란츠의 긴 한숨 소리를 듣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네. 왕자님."
"설명을 해야 할 일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경이 나에 대해 궁금해할 만한 일이 많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안 그래도 칼리안에 대한 의문이 나날이 쌓여가던 중이었지 않나. 아르센은 무언가를 아는 듯 해서 몇 번을 물어봤으나 의심 말고 믿으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도무지 확인을 할 수가 없어서 더 묻지를 못했을 뿐, 의문을 접었던 것은 아니었다.
'체이스 형님.'
'이렇게 또 죽나보다.'
'이번에도 또 죽어서 또 사라졌다가 또 다시 살게 되면.'
그런데 이렇게, 대충 어떤 일이 생긴 것인지 이해되지만 이해되지 않는 소리를 훔쳐 듣게 되었다. 때문에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어 있던 에우리아가 솔직한 대답을 했다.
"네, 맞아요. 궁금한 점이 많았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해 주겠습니다. 대신 이 자리 말고, 할 말을 정리한 뒤에 해도 괜찮겠습니까. 사실 지금 내가 좀 피곤한 상태라서."
산도 타고 다리도 끊고 절벽에도 매달려보고 죽을 고비도 넘기고······ 체이스의 얼굴을 향해 검까지 휘둘러 보고. 아주 긴 하루를 보낸 까닭에, 설명은 일단 내일로 미뤘으면 좋겠다고.
그런 말에 에우리아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 아침이 되기 전에 조용히 찾아오셔서는, 네가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며 검을 겨눌 생각은 아니시겠죠."
"내 비밀보다 가벼운 사람한테 내가 형님들 목숨을 맡겨두고 나갔을 리가 있나."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임을 알아들은 칼리안이 이렇게 대답했고 에우리아는 당연한 일을 한 번 더 확인받은 정도의 얼굴이 되었다.
"네. 그럼 언제든 설명을 해주신다면, 감사히 듣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혹이니 의심이니 그런 것 말고 마법사의 호기심 때문에 더는 덮어두지 못하게 되어버린 일에 대해 순순히 수긍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형님."
"왜."
거짓말은 못해도 숨기는 것은 곧잘 하지만 제일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안네의 수염 끝에 묻어있던 고양이용 닭고기 수프의 흔적만큼도 숨기질 못하는 동생 놈을 플란츠가 쳐다봤다.
"들어가 주무십시오. 저도 좀 쉴 테니까요."
알아서 숙면을 취하러 들어가셨다던 란델을 좀 본받아 너도 가서 좀 자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저는 쉬겠단다.
잘 생각이 없는 것이다.
전날부터 이미 밤을 샌 키리에도 잠을 자야 할 테니, 키리에가 없는 상황에 자려고 할 리가 없다. 산에서 내려오던 동안 잠시 기절했던 것을 휴식 삼아 오늘은 밤새 고민하고 있을 놈임을 안다.
생포한 제온의 전사를 어떻게 더 추궁할지, 조각만 남은 시간의 축에서 무엇을 더 살펴보아야 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에우리아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해 줘야 소공작에게 파혼당하지 않을지. 그런 고민들 말이다.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란츠가 에우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그 고민거리 중의 하나 쯤은 털어내줘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상황을 만든 건 세렌티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아. 어쨌건 협회장에게 말했던 시간의 축이라는 물건 때문에 시간이 되돌아갔다고 했어."
그러더니 대뜸, 내 동생의 복잡한 개인사정에 대한 핵심 요약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튼 저 동생 놈의 팔랑팔랑한 입보다는 나 때문에 비밀이 알려지게 됐다 여겨지기라도 해야 소공작이 동생 놈의 목숨이나마 살려둘 것 아닌가. 어차피 알릴 일이라면 더 숨길 필요 없이 싹 다 말하는 게 낫기도 하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에우리아가 알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 계속 듣겠습니다, 저하."
"내 아우님께서 본래 세크리티아 국왕인 체이스 전하의 동생이셨는데. 카이리스 왕위에 오른 '내'가 발칸을 이끌고 시간의 축을 뺏겠다며 세크리티아를 침략한 것을 막다 헤르츠 부군단장 손에 전사하신 뒤에 다시 눈을 뜨게 됐고, 본래 모습이 아니라 내 동생의 몸을 가진 채였다고 했어. 그래서 지금 보다시피 내 아우님으로 다시 사시는 중이야."
이 말을 들은 에우리아는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사실 생각이라 하기 보다는 플란츠의 말을 이해해보려 애쓰는 중이었다. 다시 깨어났다느니 시간이 되돌아갔다느니 하는 비현실적인 얘기보다도, 나랑 아르센 때문에 죽은 놈이 바로 내 동생이라는 말을 꺼내놓는 지나치게 담담한 말투 덕에 혼란만 가중된 까닭이었다.
그런 에우리아의 모습을 본 칼리안이 손을 움직였다.
- 왜, 형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해?
대신 나서서 입을 연 것으로 모자라 사실을 전달함에 있어 그 은원관계까지 조금도 숨기지 않고 꼼꼼하게 알려 준 오지랖넓은 설명에 대한 질책을 보내왔다.
결국 자신이 쏜 물의 화살 덕에 이 사달이 났다 생각중인 플란츠가 제 동생의 새빨간 눈을 쳐다봤다.
"책임지는 건데."
그리고 이렇게, 무럭무럭 자란 완두콩다운 대답을 했다.
물론 그것이 듣는 칼리안이 환장하고 듣게 될 드미레아가 탄산수를 찾을 소리이긴 했지만 아무튼 책임은 책임이니까.
* * *
어쩐지 달무리가 지더라니.
산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을 오랜만에 보려나 했더니 하늘이 어둑했다. 그러더니 오래지 않아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 경계도 할 겸 바람도 쐴 겸 옥상 위에 올라 있던 아르센이 손에 들린 맥주를 달게 마셨다. 바람은 선선하고 머리 위에 씌워 둔 넓은 얼음 장막에 부딪히는 빗소리도 듣기 좋았으니까.
"그러다 또 누가 습격해오면 어쩌려고 맥주를 마셔."
"협회장님 계시지 않습니까. 왕자님도 계시고 베른 경에 브리지트 경까지 있으니까 저는 잠깐 없어도 됩니다. 딱 한 잔만 마실 겁니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이런 대답을 한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시찰을 마치고 온 에우리아를 보다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잠깐 앉으십시오."
안 그래도 잠시 쉴 생각이었던 에우리아가 그곳으로 가 앉았다. 아르센의 장벽이 조금 넓어지며 에우리아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비를 막았다.
"생포했다는 놈은 잘 있습니까?"
"어. 마법 제어 걸린 감옥에 잘 뒀어. 여기 기사들도 있고, 브리지트 경이랑 베른 경이 번갈아가며 감시 중이야."
고개를 주억거린 아르센이 맥주병과 빈잔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을 본 에우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맥주는 됐어. 나중에 저 아래에 히몰리카 마시러 갈 거야."
"저도 데려가십니까?"
"브리지트 경이랑 갈 거야. 왕자님이나."
"왕자님이랑 술 마시는 것 이상하다 하시더니 같이 가겠다 하십니까."
"어린애인 줄 알았지. 아닌 줄 알았으니 술 마셔야지."
"아······ 왕자님 얘기······."
"어. 들었어. 새벽에."
또 들켰구나.
단번에 정황을 파악한 아르센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협회장님은 그런 말 안 믿으실 줄 알았습니다."
"안 믿었는데, 원래는."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강한 실력도, 왕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처세며 과감한 행동들도, 하루아침에 변한 듯한 모습들도, 세크리티아의 국왕이나 세작들과의 관계도 전부 다, 그 동안의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말인데. 저하께서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더니 내가 믿겠다는데 너는 왜 안믿느냐는 눈을 하시고, 왕자님은 왕자님대로 못 믿는게 당연하니 궁금한 게 더 있으면 물어봐라 하시고. 그러니 별 수 없잖아. 믿어야지."
아르센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잔에 반쯤 남은 맥주의 절반을 다시 꿀꺽꿀꺽 마셨다.
"넌 그 말을 믿고도 잘도 붙어 있었네."
"어차피 제가 뵌 것은 지금의 왕자님 뿐인데, 왕자님 속이 다른 분이었다 해서 제가 안 붙어 있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것 말고······."
이렇게 이야기하던 에우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아르센의 손에 칼리안이 죽었다던 그 일을 모를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 까닭이다.
"왕자님께서 제 손에 눈 감으셨다는 건 저도 압니다, 협회장님. 알면서 우리 왕자님 옆에 붙어 있는 겁니다."
"······ 대단들도 하다."
새삼스러운 칭찬이 들려왔다.
칼리안이나 플란츠나 아르센이나. 아무튼 정상적인 놈들이 하나도 없다.
"우리 왕자님 좋은 분입니다, 협회장님. 제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옆에 두셔서 좋다는 게 아니라. 그냥 좋은 분입니다."
"다리 위에서 만났던 그 일 때문에?"
"그도 그렇지만. 제가 대사막에서 뭘 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복수했지."
"제 가족 죽인 전사들과 같은 부족이라서, 그 전사들을 아는 놈이라서, 그 전사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놈들이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다 죽였습니다, 협회장님."
"어. 알아. 나도 봤잖아."
꼴깍꼴깍.
남은 맥주를 다시 몇 모금 마신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다 똑같은 놈들이고 다 나쁜 놈들이니까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죽이려 드는 파란 머리 마법사가 누구인지,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은 놈들도 많다는 겁니다."
"그렇겠지."
"제가 이제와 그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튼 왕자님은 안 그러셨지 않습니까."
"살려뒀다 하시네. 그걸 다 알면서."
"네. 처음에는 어쩐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겪다보니 강하기까지 해서, 지켜보다 보니 좀 많이 돌아있는 사람이라서, 제 자리 못찾고 둥둥 떠다니는 게 꼭 저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계속 따르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까지 알고 나니 이제는 다른 이유 다 필요없이 그냥 정말 좋은 사람이라서 좋습니다."
토독, 토독, 하고.
얼음판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를 잠시 듣던 에우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가 언젠가 반드시 왕자님 동상 세워놓을 겁니다, 협회장님."
지치지도 않고 꺼내놓는 대찬 포부 때문에 에우리아가 결국 실소했다. 그리고 응원이라고는 절대 볼 수 없을 응원의 말을 전했다.
"안네루시아 예쁜 걸로 준비해둘게."
"네. 예쁜 걸로 준비해주십시오."
곧 아르센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안네루시아, 조금만 빨리 사 주시면 안 됩니까?"
"조금 빨리 언제."
"카이리시스에 가고 나서요."
"가자마자 동상 만들게?"
"세뉴강 가려고 그럽니다. 곧 3년이 되어가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이라면 알아듣지 못할 말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 말을 잘 알아들어 줄 수 있을 에우리아가 조금은 놀라고, 또 조금은 기뻐하는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꼬맹이. 드디어 얘기할 마음이 생겼나보네."
"군단장님께 제가 그랬습니다. 왕자님께 아드님 얘기를 하셔야 왕자님께서 아들 노릇을 한다고."
"대견한 말을 다 했네."
칭찬을 들은 아르센이 씩 웃었다.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하고 나서 저도 반성했습니다. 말을 하지 않으셨던 게 스승님 뿐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너도 안 했어."
"네. 저도 안 했습니다."
"그랬지······ 그래."
"네. 스승님이 아버지 같다는 말을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결국은 못 했습니다."
끝내 세뉴강가에 꽃을 들고 서지 못했다.
평생을 길러 준 스승을 어떻게 생각했노라 전하지 못한 말을, 그가 눈을 감은 뒤에도 결국은 하지 못했다. 그 강가에 꽃을 띄우는 대신 다리만 막고 서있기만 했다.
"뭐가 그렇게 겁난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뭐가 그렇게 겁이 났는지."
"이제는. 할 수 있겠어?"
"이제는. 네."
혹시나 거절당할까 겁을 내던 아르센임을 잘 알아서, 이제라도 꽃을 띄우고 말을 전하겠다는 그 얘기가 듣기 좋아서, 에우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르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내가 사 줄게."
"네."
"예쁜 걸로 많이 사 줄게."
"네, 협회장님."
토독, 토독.
조용히 떨어진 빗물이 또륵또륵 굴러 흘러내려갔다.
* * *
늦은 오후, 혹은 점심 무렵.
비 오는 날을 썩 좋아하지 않는 칼리안이 맞은편에 앉은 이를 향해 보기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큰 탈이 없다 하니 다행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 슈린츠의 변경백 에밀리아가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변경백과 꽤 친한 사이라 했던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이 함께 인사를 건넸다.
"왕자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은 무슨.
기사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가고 있었으니, 칼리안이 아니었다 해도 오래지 않아 찾아낼 수 있었을 거다. 그 사실을 제일 잘 아는 것은 물론 칼리안이었다.
"이곳 별궁을 지켜 줄 사람인데. 당연히 나서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칼리안은 이렇게 열심히 공로를 챙겼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앞으로 무슨 사건이 더 생길지 모르는데 이곳 저곳에 보은받을 일을 남겨두어 나쁠 것이 뭐 있겠나.
"······ 라고, 형님 저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여 나 역시 수색에 힘을 쓰게 되었던 일이니 변경백의 감사 앞에 내가 서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그 공로를 완두콩에게 돌렸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네 그 번지르르한 말이 소름끼치게 부끄럽다는 얼굴을 한 채 풀쪼가리 하나를 집어 들던 완두콩이, 자신에게로 향한 변경백의 눈을 보다 말했다.
"됐어."
"······ 우리 형님 저하께서 늘 이렇게 겸양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이렇듯 언제나 제 귀감이 되어주시니 아우 된 사람으로서 형님 저하를 마주하는 매일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변경백의 두 자리 옆에 앉아 물잔을 들어올리던 에우리아가 소리없는 헛기침을 했다. 에우리아와 변경백의 사이에 앉은 채 벌써 네 잔째의 물을 퍼마시고 있는 아르센이 잠시 천장을 봤다.
저 둘과 달리 완벽한 무표정을 하고 서 있는 키리에와 에일라를 좀 보란 말이다. 사람이 때에 맞게 입에 금칠도 좀 하고 살 줄 알아야지. 아무튼 마법사들이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란델 형님."
"무상한 말을 또 하는구나."
하.
옥수수수염까지 도와주질 않으시네.
"······ 맞습니다. 란델 형님 말씀대로,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이라 하겠습니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날의 연회장에서 홀로 애쓰던 칼리안이 웃음을 띄워올렸다. 어쩐지 축축해지던 분위기를 일순간에 만개한 꽃밭으로 만들 얼굴을 만들어보이며 그렇게 간신히 오찬을 마쳤다.
그 후 방으로 돌아오는 길.
"칼리안."
그 새를 못 참은 플란츠가 따라붙었다.
가만히 멈춰 선 칼리안이 곁에 있던 란델을 보다 대답했다.
"꿍꿍이 아닙니다."
또 무슨 꿍꿍이로 입바른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는지를 물어올 것 뻔해서 미리 대답한 칼리안에게, 플란츠가 다시 물었다.
"그럼 뭔데."
"형님들 별 일 없으려면 변경백 비위도 맞춰야 할 것 아닙니까. 안 그래도 슈린츠 일로 변경백 마음도 불안할 것 뻔한데 그것도 조금 풀어줘야 할 테니까요."
"말고. 다른 꿍꿍이."
"그래야 제가 잠깐 없어도 잘 대해줄 거고요."
"······ 없다니."
"휘트린에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나 좀 나갔다 올 테니 여기서 둘이 잘 계시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