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장.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2)
평온하다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던 아르센이 스스로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들어보아도 평온한 소리는 아닌 것 같아서였다.
- 쏴아아아······.
왕궁 북쪽 숲 속의 계곡은 세뉴강을 향해 흐른다. 그 거센 물소리가 흐르고 흘러 결국은 언제나 고요한 세뉴강에 가 닿는다. 그리고 긴 강의 끝에 이르도록 소리없이 뻗어나간다.
저렇게나 시끄러운 물줄기가 침묵하는 강을 향해 흘러가는 것에 오늘따라 마음이 쓰인다. 그리 고요한 세뉴강도 언젠가는 저렇게나 소란한 날이 있었음에 문득 생각이 닿아서. 그것이 어쩐지 애상스러워서.
- 저벅, 저벅.
숲속 한가운데의 넓은 공터.
그곳에 자신의 말 로로를 세워 둔 뒤 보다 깊은 곳을 향해 발을 옮기던 중에 떠오른, 스스로와 참 어울리지도 않을 생각에 잠긴 아르센이 그냥 홀로 웃었다. 그리고 그 소란한 물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계속 걸어나갔다.
'군단장님께서는 어디 계시나?'
'부상자들의 상태를 둘러본 뒤 다시 나가셨습니다.'
'전하께 가셨나?'
'그것까지는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아니지. 전하께서는 지금 지그프리드 공작님을 만나고 계시는데.'
왕궁의 북쪽 숲에서 돌아와 있던 드미레아를 만난 슬레이만이 르메인에게 갔었다. 그리고 드미레아는 칼리안에게 왕궁의 상황을 전하는 중이었다.
그 사이 시오나를 통해 같은 내용을 전달받은 아르센은, 중상자들의 상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호전된 모습을 하나하나 확인한 후 빌헬름 관 밖으로 나왔다.
'그럼 아르피아 궁에 계시는 것 아닐까요?'
'거기에 안 계시네. 아무튼 어디에 계시는지 알 것 같으니 내가 가보겠네.'
'네. 알겠습니다.'
'아, 참. 제이아 사단장.'
'네. 부군단장님.'
'혹시 향수 말고 술도 가지고 다니나?'
'······ 네?'
'아니. 됐네. 이 상황에 술 마시는 미친놈 보듯 하지 말게.'
'네.'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 네?'
뭐, 아무튼. 그렇게 왕궁의 북쪽 숲으로 온 참이다.
숲의 공터를 조금 더 지나가면 나오는 곳.
그 소란한 물소리가 온 사방에 들어앉은 계곡을 향해서.
- 쏴아아아······!
계곡에 도착한 아르센이 어느 한 곳을 봤다.
유난스레 밝은 달빛에 반짝이는 계곡물이 쏟아지듯 흘러내리는 곳. 그 곁에 놓인 너른 바위 위에 앉아있는 대마법사의 등을 한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전하 잘 모시고 왔습니다."
이미 진작부터 자신을 찾아오는 아르센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을 대마법사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왕궁을 등지고 앉아 하염없이 쏟아지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고생했네."
그러다 이렇게, 애상스런 물빛에 잠겨들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끄덕끄덕.
보이지도 않을 고갯짓을 한 아르센이 앨런이 있던 곳으로 쭉 걸어들어갔다.
- 털썩.
곧 아르센은 앨런의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맞은편의 적당한 바위 하나를 골라잡고 앉았다. 그 뒤 마법사 주머니 속에서 평소였다면 절대 지니고 다니지 않았을 것을 꺼내들었다.
히몰리카였다.
- 조르륵······.
앨런의 집무실에 들어가 대충 집어들고 온 술잔에, 그 술잔의 곁에 놓여있었던 독한 술을 가득 따른다. 그리고 그것을 앨런에게 건네며 말했다.
"하필 술이라 싫어하실까 고민했습니다만."
익숙한 잔에 가득 든, 흐린 날의 달무리같은 빛의 술을 쳐다본 앨런이 피식 웃었다.
"하필 술이군."
"하필 술만큼 필요한 게 없을 것 같아서 그냥 가져왔습니다."
아르센의 말을 들은 앨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유능한만큼 미운 짓도 참 많이 하는 부하의 술을 건네받았다.
하필 술이었으나, 하필 술만큼 필요한 것이 없던 터라.
"웬일로 술을 권하나."
"왕자님께는 오늘 일 말씀 못하실 것 아닙니까."
놈들이 앨런에게 무엇을 보냈는지, 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오늘 누구를 보았는지. 무려 이백의 군사를 손가락 하나로 태워버린 대마법사가 왜 이런 곳에 앉아 청승을 부리고 있는지.
그 모든 말을 혼자 삭일 것이 뻔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저라도 술 드려야지."
그러니 어쩌겠나.
유능하고 시간 많은 부군단장이 나서야지.
"기특한 짓을 다 하는군."
"기특하면 급여 올려주십시오."
앨런의 날카로운 눈에 가는 미소가 담겼다.
그러더니 아무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조용한 듯 시끄러운 듯 울리는 물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급여 올려 줄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은 일이었던 터라, 아르센은 감기기운에 먹먹해진 코로 숨을 한 번 들이마시며 물 냄새를 맡았다. 그 뒤 저 물보다 새파란 눈을 감고 오늘 있던 정신없는 전투들을 죄 잊게 해줄 평온한 소리에 생각을 맡겼다.
그렇게 하고 나니, 간혹 줄어드는 술잔의 술 소리와 소란한 물 소리 말고는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 반가웠네."
시끄러운 정적 속에 가만히 앉아있던 아르센의 귀에 앨런의 말이 들려왔다. 자조섞인 웃음이 말의 뒤에 매달리는 것이 들려서, 아르센은 조금 늦게 눈을 떴다.
"잊은 적도 없는 얼굴인데. 어찌나 반갑던지."
앨런이 말을 이었다.
죽은 아들이 살아돌아왔을 리 없음을 알면서도 반가웠다고.
아르센이 시선을 옮겼다. 술잔을 내려다보는 앨런의 얼굴을, 앨런의 목걸이를, 그것에 걸어둔 통신용 반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계곡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도 아실 텐데. 정말 말씀 안 하실 겁니까."
"괜찮으니 걱정말아라 해야지. 왕자님께서 이미 진 걱정이 한가득인데 아비가 되어서 걱정거리를 더 얹어 줄 수야 있나."
- 살펴보라 하였더니. 제 아비에게 건넸구나.
문득.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계속 고민하던 시스파니안의 전언이 다시 생각났다.
"······ 아버지라······."
앨런의 말과 시스파니안의 말을 잠깐 되뇌던 아르센이 긴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쉬었다.
"오래전에 말입니다, 군단장님."
"그래."
"아주 오래전 어느 날에. 산으로 토끼 잡으러 갔던 아버지와 누나가 야만족들에게 죽고, 그 일을 복수하겠다며 나섰던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술잔에서 눈을 뗀 앨런이 아르센을 쳐다봤다.
"자네 얘기인가."
"네. 제 얘깁니다."
제 스승에 대한 자랑 말고 이제껏 입에 담지 않았던 시절의 일을 꺼내놓은 아르센이 말을 이었다.
"사흘 전 아침까지는 모두가 모여서 같이 밥을 먹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상에 저만 남았습니다. 사흘만에 말입니다."
"······ 그것을 어찌 견뎠나."
"막막했습니다. 복수하자니 복수할 길이 막막하고, 그냥 살자니 살 길이 막막하고. 견디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그러했겠네."
"결국 그래서······ 대사막은 먹을 것이 부족하고 살기도 어렵다 했으니 그것 때문에 국경을 넘어왔겠거니. 그런 놈들에게 우리 가족이 운 나쁘게 그런 일을 당했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습니다. 복수도 못 하는 채로 계속 살려니 그게 제일인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쪼르륵, 하고.
앨런에게 건네고 남은 히몰리카를 따른 아르센이 술잔을 쳐다봤다. 그것을 마시면 분명 취할 것임을 알아서 입에 대지는 못한 술을 눈으로만 마셨다. 그리고 풀어놓을 생각 없던 얘기를 계속 꺼내놨다.
"그런데 마을을 찾아온 기사들이 주고받던 얘기를 듣게 됐습니다. 그 야만족이 사실은 대사막 늑대들 중의 한 무리였고, 저들끼리 내기삼아 국경 너머 마을에 '사냥'을 나섰던 것임을 알았습니다."
"······ 안 된 일이군."
"생각도 못한 사실이었습니다."
"상상이나 했겠나. 아무리 대사막 늑대들이 전부 다 긍지높은 전사는 아니라지만."
"네. 시오나 힐같은 늑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설마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법을 배웠는가."
"그 즈음 야만족을 잡으러 마을에 왔던 마법사가 바로 제 스승님이었습니다. 막막하지 않게 살 길이 열린 것 같아서 스승님을 찾아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은, 마법은 커녕 글도 제대로 못 읽던 어린애를 흔쾌히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인사도 제대로 안 한다고 혼내기는 하셨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 뒤에 저는 죽기살기로 마법을 배웠고 스승님과 함께 대사막에 갔습니다."
아르센이 먹지 못할 술을 대신 마시듯, 앨런이 자신의 잔에 담긴 술을 다 비웠다. 그 잔에 술을 다시 채워준 아르센의 목소리가 물 소리처럼 이어졌다.
"원하던대로 실컷 복수를 하면서 그렇게 대사막을 다니다가, 우연히 스승님의 짐 속을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노트가 하나, 그 안에 초상화가 한 장.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것에 손을 댔는지 몰라도 홀린듯이 집어들었는데······ 파란 머리가 보였습니다."
소리없이 웃은 아르센이 결국 제 손에 들린 술을 들어 입에 가져다댔다. 정말 살짝, 입술만 축인 뒤 그것을 도로 내려놨다.
"어린 아이. 제가 스승님을 만났을 그 나이 또래의 파란 머리 어린아이가 그려져 있어서, 처음에는 저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 스승의 자식이라도 되었나."
"네. 자식 없다던 스승님에게 죽은 아들이 있던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제가 스승님의 아들을 빼닮아서 저를 제자로 받으셨던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자네 속이 편치는 않았겠군."
"아들 대신으로 들어가 산 것을 알았으니까요. 편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스승님을 붙들고 물어볼까 하다 결국은 묻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냥 지내다가, 스승님께서 돌아가시던 그 날에야 입이 열려 여쭤봤습니다."
앨런이 긴 숨을 들이쉬었다.
아르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 말이 맞다고. 죽은 아들을 대신해 저를 키웠다고. 그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미안했다 하시면서 숨을 놓으셨습니다. 제가 스승님을 어떻게 여겼는지 말씀드릴 틈도 안 주시고서 말입니다."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한숨을 쉬지도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가만히 흐르는 물 소리만 들었다.
아르센이 전해주는 지금 저 말이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왕자님께서 독 때문에 위험하셨을 때 군단장님을 만나신 것으로 압니다. 왕자님을 아들처럼 여기시게 된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군단장님."
"······ 그래. 그리 여겼지. 속죄할 길을 찾았다 여겼네."
"왕자님도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아시면서 군단장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지내기로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앨런이 대답없이 눈을 떴다. 아르센이 채워 준 술잔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저는 말입니다. 스승님의 아들이 왜 죽었는지, 스승님이 왜 저처럼 대사막의 전사들을 다 잡아 죽일 듯이 굴었는지. 아직도 그것을 모릅니다. 그 이야기가 꼭 세크리티아의 방벽처럼 단단해서, 저는 그 일을 묻고 위로해드리고······ 그러질 못했습니다. 그 높은 방벽 안으로 들어서지를 못했습니다."
로닐의 무덤에 혼자 찾아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런 곳에 혼자 갔느냐 묻던 칼리안의 말이 생각났다.
"왕자님께서 티를 내신 적은 없겠습니다만 저는 그랬습니다. 스승님께서 끝내 저를 죽은 아들 대신으로만 여기다 돌아가신 것 같아서, 그것이 저에게는 평생 내려놓을 길 없어진 묵직한 돌이 되었습니다."
"그리 여겨지던가······."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애가 끊어지셨는지, 얘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왕자님께서 군단장님 아드님의 일에 대해 건드리면 안 될 기억이라고 여기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왕자님은 군단장님의 아드님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는 것 아닙니까."
칼리안이 로닐의 자리를 건드리려 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런 면이 내심 고맙다 여기고 있었다. 빈 자리를 채우려 들지 않고 새 자리를 만들어 아들 노릇을 하는 칼리안을 그저 속이 깊다 여기고 있었다.
"아들 노릇을 할 겨를을 안 주시는데 어떻게 아들이 됩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했다.
로닐의 빈 자리 곁에 쌓아 둔 앨런의 벽이 높아서, 안으로 들어설 엄두를 못 내고 그 곁에 새 자리를 만들려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되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네."
앨런이 아르센의 손에 들려있던 히몰리카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입만 대고 만 아까운 술을 한 입에 털어 마셨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해줄 줄은 몰랐는데. 고맙군."
사라지는 술을 보며 아쉬운 얼굴을 해 보이던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히몰리카같은 색의 달무리를 올려다보다 대답했다.
"사실 제가 옛날 얘기 꺼내는 것을 안 좋아해서, 협회장님만 아는 일입니다만. 시스파니안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 때문에 안 그래도 아버지 생각도 나고 스승님 생각도 나고······. 그러다 군단장님 청승부리시는 것을 보니 말이 나왔습니다."
"시스파니안께서 무슨 말을 하셨나."
"못 알아들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먹먹해진 기분으로 아르센을 보던 앨런이 실소했다.
"말씀하시는 것이 꼭 누구를 생각나게 하는데 말입니다. 왕세자위에 올라있느라 오늘내일 하시면서 평생 오늘내일 버티실 것 같은 그 부군단장께서는 그래도 되물어 볼 시간은 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럴 겨를도 없이 그냥 사라지셔서 말입니다."
여느때와 비슷한 얼굴로 돌아온 아르센의 푸념이 오늘만큼은 귀찮지 않았던 탓에, 너그러운 마음이 된 앨런이 아르센을 쳐다봤다.
"무슨 수수께끼를 주셨기에 그러나."
"살펴보라 하였더니 제 아비에게 건넸다. 시스파니안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버지에게도, 스승님에게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앨런이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말했다.
"엉뚱한 곳에 이야기를 전하셨군. 시스파니안께서."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군단장님은?"
살펴보라 했더니 아비에게 건넸다.
시스파니안이 '무언가를 하라' 말을 전했던 사람은 칼리안 뿐이다. 그나마도 딱 한 번, 칼리안에게 살펴보라는 의미의 말을 전했던 일은 딱 한 번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었던 칼리안은 시스파니안이 살펴보라 한 것을 앨런에게 전했었다.
시간의 축의 조각.
시스파니안의 공동에서 플란츠를 통해 칼리안이 받았던 것. 받자마자 품에 넣은 탓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아르센은 조각을 전해받았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
왜 그 말을 엉뚱하게 상황 모르는 아르센에게 전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앨런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 수수께끼를 자네에게 전하면 자네가 자네 스승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한 덕에 자네가 나를 찾아와 옛 이야기를 전해주고. 그리 할 것을 아셨던 모앙이네."
지극히 위대한.
실로 사려깊은 시스파니안이시여.
"시스파니안께서도 나를 두고 아비라 하시는가."
조용히 중얼거리던 앨런이 품 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 속에 고이 담아두고 있던 축의 조각을 아르센에게 건넸다.
"당장 내가 찾아가 전해주고 싶네만. 왕궁 돌아가는 상황이 바쁠 터이니 자네가 대신 가게."
"이것이 무엇입니까?"
"왕자님께서 살펴보셔야 했다는 물건이네."
돌아가는 상황과 시스파니안의 말과 앨런의 말을 여전히 반 쯤은 못알아들은 아르센이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가면 됩니까?"
"굳이 그리 말씀하셨다면, 가능한 빨리 전해드리는 것이 나을 터이니. 전해드리고 왕궁에 오실 때까지 잘 돌봐드리다 함께 오게."
"저까지 가면 부군단장 자리가 둘 다 비는데. 다 없어도 괜찮으십니까?"
"있어봐야 사고만 치는 것을."
오랜만에 마주한 정찬 중 으뜸가는 만찬이라는 듯 당당히 누운 채 식사 테이블 위로 올라섰던 부군단장을 떠올린 앨런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사고 잘 치기로는 칼리안에게 절대 지지 않는 그 부군단장을 보며 말했다.
"고맙네."
익숙하지 않은 말을 두 번이나 듣게 되어 슬쩍 웃은 아르센이 대꾸했다.
"고마우시면 급여 올려주십시오."
"왜. 세이렌 경 꽃 사주려고 그러나?"
"술 사드리려고 그럽니다."
앨런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 * *
- 저벅, 저벅.
사로잡은 전사를 기절시킨 키리에가 먼저 별궁을 향해 내려간 뒤. 발 소리가 안 나는 한 명과 언제나와 같은 발 소리를 내는 한 명이 천천히 산길을 내려갔다.
'이것을 제가 살펴봐야 한다 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산길이라 하기보다는 바위만 가득한 그 길을 내려오는 내내 칼리안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저벅, 저벅.
제 동생이 고민에 빠지면 앞이고 옆이고 안 보는 놈임을 잘 아는 플란츠가, 그 동생 놈 발이 엉뚱한 곳으로 갈까봐 새벽 산길을 대신 살폈다.
그렇게 몇 분 쯤을 걸어 별궁의 후문에 다다랐을 때, 보다 밝아진 달빛이 내려앉았다. 그것을 안 플란츠가 잠시 고개를 돌리고는 조금 떨어져 걸어오던 칼리안을 쳐다봤다.
달빛이 밴 얼굴이 방 안에 있을 때보다는 나아졌다. 그 새를 못 참고 다시 싸움을 하러 나가기에 다 죽은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의외가 맞다.
피 냄새가 어느새 사라졌다.
숨을 쉴 때마다 풍겨나오던 피 냄새. 조금 전에 다시 봤을 때에는 그 냄새가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는데 그 사이에 싹 사라졌다.
- 탁.
그 사실을 깨달은 플란츠가 발을 멈췄다.
앞도 안 보고 걷던 놈이 맞는지, 플란츠가 멈춰 서자 거의 동시에 제자리에 선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 뒤에는 어느새 별궁에 다 왔음을 알고 놀란 낯이 된 이후에야 플란츠가 제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한참동안 칼리안을 살피던 플란츠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너. 피 냄새가 안 나는데."
"아, 이제 안 납니까."
"왜."
자신의 넋두리만큼이나 뜬금없을 뿐더러 극한으로 짧기까지 한 플란츠의 말을 애써 해석해보던 칼리안이 답을 내지 못하고 연두색 눈을 쳐다봤다. 그러다 그 눈에 경계의 빛이 잔뜩 어린 것을 알게 됐다.
······ 아.
저 완두콩이 뭔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별궁의 방 안에 있을 때만 해도 줄어들지 않았던 피 냄새가, 싸움을 마친 후에 오히려 줄어들어 있음을 이제야 이상하다 여긴 것이다. 플란츠는 칼리안이 그 사이 서클 하나를 올렸음을 아직 몰랐으니까.
한 마디로, 생긴 것도 붉은 오러도 살기도 전부 다 내 동생 것이 맞는데 피 냄새는 왜 안 나느냐는 소리다. 다시 말해 너 진짜 내 동생이 맞느냐는 의미다. 붉은 검의 기운도, 살기도 다 알아보면서 찾아와 놓고는 이제와서 의심을 하고 있다. 피 냄새가 안 나서.
"그런 의문은, 중요한 물건을 넘겨주기 전에 가지셨어야죠."
칼리안의 붉은 입술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 형님."
고운 웃음의 끝에 붙어나온 스산한 목소리를 들은 플란츠가 눈꼬리를 확 찌푸렸다. 그러더니 짜증 가득한 얼굴을 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됐어."
안 속는다.
레니시타 솜털을 심으면 바나나가 자란다는 얘기를 할 때만 해도 반 쯤은 믿었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피식 웃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서클 하나를 늘렸습니다. 덕분에 오러를 다시 서클에 담게 되어서요. 이제 당분간은 충돌할 일 없을 겁니다."
"그래."
"안 놀라십니까. 그 사이에 벽 하나를 넘었다 하는데요."
"생각했어. 방금."
칼리안이 플란츠를 놀려먹으려 한 그 순간, 똑똑한 머리로 '놀리려 드는 것을 보니 내 동생이 맞는 것 분명한 저 놈이 어떻게 해서 피 냄새가 사라졌는지'를 생각해낸 플란츠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재미없다는 듯 실소한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겼다.
그런 동생 놈을 보던 플란츠의 입이 작게 열렸다.
"······ 다행이네."
순간 칼리안이 제 귀를 의심한 듯한 얼굴이 되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러다 그 놀라운 말이 잘못 꺼내지거나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드미레아 만나면 자랑해야지.
완두콩 농사를 완전히 망친 건 아니었나보다고.
실컷 자랑하고 칭찬 또 받아야지.
"조각은. 어떤데."
그 동생 놈이 이제 '아이고 우리 형님 어찌나 기특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계시는지' 따위의 말을 꺼내놓을 것이 분명함을 깨달은 플란츠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때마침 그 말을 건네려던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가 다른 얘기를 했다.
"사실 오늘 할 줄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전사가 보내오는 공격을 제 마력으로 바꿨습니다. 그게 일반적인 5서클 마법사들이 다들 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좀 급했던 터라 어쩌다보니 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했다는 말씀이신지."
"그 전사가 보냈던 공격에 얽혀있던 마나가 읽혔었습니다. 마법이 아니라 불화살을 구성하던 마나를 보게 됐고요."
별궁을 등지고 플란츠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제 손에 들려있던 축의 조각을 다시 살폈다.
"그렇게 하면 아르나이젤이 이 조각을 썼을 때 남겨진 마력의 흔적이나 또 다른 게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잘 하면 거기 얽힌 힘을 제 뜻대로 바꿀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좀 전에 했던 방법대로 조각에 얽힌 힘을 한 번 살펴볼까 생각 중인데······ 마음 먹은 만큼 되질 않네요."
이 말에, 플란츠의 손에 갑작스런 물의 마력이 얽혀들었다.
그러더니 칼리안이 '형님 너 지금 무슨 미친 짓을 하시려는 거냐' 묻기도 전에 잔뜩 모은 제 마력을 칼리안에게 내뻗었다.
- 슈아악!
날선 소리가 난다.
플란츠가 쏜 물의 화살이 칼리안을 향해 쇄도했다.
- 우우웅!
- 카강!
서둘러 검을 만든 칼리안이 물의 화살을 쳐냈다. 멀찍이 나가떨어진 화살이 다시 물의 형태로 변하며 바닥에 스미는 것이 보인다.
멍한 눈으로 그것을 보던 칼리안의 붉은 눈이, 옆에서 파릇파릇하게 서 있던 덜 익은 오디열매 알맹이같은 놈을 쳐다봤다.
"형님, 지금 저한테."
"······ 바꿨다더니."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했다는 듯 억울함 가득한 붉은 눈을 멀뚱하게 쳐다보던 오디열매 알맹이가 느릿한 대답을 했다.
"또 바꿔보라고 대뜸 공격하신 겁니까."
"했었다며."
"한 번 했었는데 다시 안 된다고 했잖습니까."
"하면 되잖아. 했으면."
"제가 형님같은 줄 아십니까. 했으니까 했을 때 또 되는 거면 이미 했죠. 안 되니까 안 된다고 했지."
"반말."
"지금 반말이 중요합니까? 저 오늘 하루종일 죽다 살다 죽다 살다, 형님 머리에 오디 열매 꼭지도 아니고 웬 손잡이 하나 날아와서 틀어박힐 뻔한 것도 막아드리고, 그 놈이랑 싸우다가 체이스 형님 얼굴까지 보게 되고. 아 이렇게 또 죽나보다 하다가 간신히 살아서 온 동생한테,"
"······ 칼리안."
"칼리안 왜요. 시간의 축이고 뭐고, 이번에도 또 죽어서 또 사라졌다가 또 다시 살게 되면 형님이 또 찾아주실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무리그래도형님정말······."
- 확!
마음 놓고 있다가 원수같은 미친 형 손에 비명횡사할 뻔했음을 알게 된 서러운 마음에 다시 짖기 시작한 칼리안의 입을, 플란츠가 제 손으로 틀어막았다.
"너. 말, 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비섬세한 칼리안이 제 큰 눈을 꿈뻑이다가, 플란츠의 표정을 보며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또 죽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자님."
그리고.
이런 무서운 말이 들려왔다.
별궁 후문 쪽에서 느껴진 생소한 기운의 마법을 느낀 탓에 급히 이동해 온, 기적적으로 아직까지 칼리안의 비밀을 모르고 있던 보랏빛 머리의 마법사 협회장이 그 곳에 서 있었다.
"······ 아."
아······.
드미레아.
······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