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장.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1)
아스트리샤 거리가 생각났다.
넓은 대로, 주변을 가득 메운 깨끗하고 커다란 건물들, 고급스러운 상점, 곳곳에 놓인 작은 분수와 화분, 평평하게 잘 깔린 화강암 보도. 밤을 환히 밝히는 마법 등불까지.
그 모든 것이 아스트리샤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아스트리샤에는 카페가 더 많은 것에 비해 이곳 슈린츠의 중심가에는 술집이 더 많고 의상점과 장신구 판매점 만큼이나 기념품을 파는 곳이 많이 보인다는 정도일까.
때문에, 새벽이 밝아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환하게 불을 밝힌 여러 술집과 음식점들 사이로 발을 옮기는 내내 아스트리샤 거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라트란이 생각나네요."
그런데 곁에서 함께 걷던 에일라의 생각은 달랐나보다.
이제는 앨런 마나실 후작의 영지가 되었으나 한때는 헤일 라트란 백작의 영지였던 곳이 생각난다 했다.
"거기에도 술집이 참 많았으니까."
하긴.
이런 시간까지 문을 열어 둔 곳이 별로 없어 그렇지 술집이 많기는 했다. 퍼붓는다는 말로도 부족한 거센 비가 내렸던 밤, 신물을 사고파는 라트란 백작의 뒤를 캐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칼리안이 에일라를 처음 만났던 곳. 그곳도 술집이었지 않나.
"기억납니다."
그 때를 생각하던 키리에가 고개만 끄덕이려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먼저 말을 걸어온 에일라를 향해 짧게나마 대답을 했다.
"그때 비가 왔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네. 많이 왔었습니다."
이렇게 소란한 관광지에서 서로 대화 한 마디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도망치는 놈들의 눈에 띈다고, 그러니까 친한 척 말을 나누기는 해야 한다고, 에일라가 그런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에이프린 백작과 슈린츠 변경백의 기사들이 내성 전체를 수색하는 중이 아닌가. 물론 영주의 실종 사실과 제온의 존재를 비밀에 부쳐야 했으니 성에 숨어든 수배범을 찾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찌됐건 그렇게 온 성을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 혹시나 누군가 숨었다면 경계심이 가득할 텐데, '우리는 지금 별궁에서 도망쳐 인파 속으로 숨은 수상한 여자를 찾고 있습니다' 하고 광고하듯 다니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니 재밌네요. 그 때랑 지금이랑 너무 달라서. 그날 처음 봤을 때 왕자님 진짜 무서웠었는데."
"그렇습니까."
"아니었던 것 같아요?"
"지금보다 조금 더 날카롭기는 하셨습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체이스가 들었다면 칼리안은 그때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이 온순하기만 한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할 테지만, 에일라와 키리에는 베른 시절을 알지 못했으니까.
아무튼 이런 짧은 말이 오간 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적당한 대화가 필요하다 했지 수다가 필요하다 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별궁에서 이곳까지 달려온 뒤 가파르게 몰아쉬고 있을 도망자의 숨소리를 듣고자 귀를 기울이는 키리에. 분위기 괜찮은 술집이 있나 살피는 듯한 얼굴로 숨어들기 좋을 골목과 건물 틈새를 빠짐없이 훑어보는 에일라.
사람 찾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과 사람 피해 숨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계속 발을 옮겼다.
"혹시, 슈린츠 변경백은 믿을만한 사람입니까."
그러던 중 키리에가 이렇게 질문을 했다.
이 말에 고개를 돌린 에일라가 저보다 한참 높은 곳에 있는 키리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나 세크리티아 출신이에요."
"압니다. 그래도 아는 바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왜. 세작이라서?"
"이곳에 온 적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영주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방문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물은 겁니다."
어깨를 살짝 으쓱인 에일라가 답을 전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뭐 따로 있나. 그래도 별궁에 암살자를 보낸다거나 세자 저하에게 칼을 던질만한 사람은 아닐 거예요. 내가 조사해봤을 때는 그랬어요."
"그렇습니까."
"왕자님이 속을까봐 그래요?"
"달리 의심을 품는 분이 아니시니 말입니다."
"하긴. 누구든 참 잘 믿어주기는 하지."
어디 믿다 뿐인가.
됨됨이만 믿어도 충분할 텐데 능력까지 의심없이 믿는 바람에 제 사람이 던질 비녀 하나에 덥썩 목숨을 맡겨놓는 사람이니, 또 무슨 말이 필요할까.
라트란 영지에서 에일라와 싸움을 벌였을 때 '마력탄이 더 없다' 했던 거짓말까지 믿는 바람에 숨겨 둔 검술 실력을 들켰던 일을 떠올린 에일라가 피식 웃었다. 남의 거짓말을 그렇게나 잘 알아보는 사람이, 적이었던 에일라의 말을 제 판단보다 더 굳게 믿었었다는 뜻임을 이제는 알게 됐으니까.
"아무튼 이상한 사람이야."
짧은 말로 평가를 마친 에일라가 계속하여 주변을 살폈다. 마찬가지로 소리에 계속 집중하던 키리에가 우뚝 발을 멈췄다.
그것을 알았으나 에일라는 왜 멈춰섰는지를 묻지 않았다. 문을 닫은 기념품 판매점 뒤, 마법 등불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게 된 까닭이다.
얼굴을 가린 후드 아래로 언뜻 보이는 갈색 단발, 그리고 펑퍼짐한 로브자락 사이로 보이는 갈색 바지. 그것을 확인한 에일라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저 사람인 것 같네요."
추정하듯 말했으나 장담할 수 있다.
저 로브 안에 입은 셔츠는 검은색일 것이고 로브 안으로 숨긴 손에는 검은 가방이 들려 있을 것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닐 수도 있으니 이쪽을 계속 살펴봐 주십시오."
키리에의 말이었다.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야기한 키리에가 에일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에일라가 이제껏 걸어온 길 쪽으로 되돌아서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였다.
- 타닥, 탁! 타다닥!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규칙적이지 않은 놈의 발소리와 정돈되지 못한 가쁜 숨소리가 함께 들렸다. 숨을 곳 하나 없는 별궁 인근에서 벗어나면 처음 마주하게 되는 이 거리까지 쉼없이 달렸을 테니 발이 흐트러지고 숨이 찰 수밖에.
- 타앗!
키리에가 발을 박찼다.
그리고 자신의 잿빛 검을 검집 채로 뽑아들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키리에를 확인한 놈이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가며 화려한 거리 뒤의 복잡한 골목 사이로 계속 들어갔다. 곧게 달린다면 이미 진작에 붙잡았을 텐데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가며 달리는 통에 거리가 쉬이 좁혀지질 않는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그 뒤에는 오른쪽으로, 어깨가 끼일 듯 좁은 건물 틈 새를 비집고 들어가 왼쪽으로. 마치 다람쥐인 양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가며 달리는 놈을 계속 따라갔다.
그러다 결국, 막다른 골목이 나왔다.
"······ 아. 끈질기네."
골목 끝의 벽을 등지고 나서야 발을 멈춘 여자가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에 반해 힘든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키리에가 놈을 향해 한 발을 냈다.
그것을 보던 놈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키리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암기일지, 공기중에 퍼지는 독일지, 혹은 돈일지,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 키리에가 일단 숨을 참으며 자신의 검을 천천히 말아쥐었다.
바로 그 순간,
- 딸깍.
결코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키리에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손에 들린 것을 키리에가 알아봤음을 눈치챈 놈이 씩 웃었다. 그러더니 그것을 키리에의 눈 앞에서 흔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뭔지 알면, 오지 마."
마력탄.
방금 전 안전장치가 해제된 마력탄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어디서 저런 것을 얻었는지, 저놈이야말로 마력탄이 뭔지는 알고 이런 곳에서 안전장치를 해제해버린 것으로 모자라 저렇게 흔들어대고 있는지. 해야 할 말을 일단 다 미뤄둔 키리에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물러나. 놔버리든 던져버리든 하기 전에."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은 놈이, 여차하면 그것을 놓아버리거나 아무 곳으로 던지겠다는 듯 제 손을 조금 더 뻗어 보인 까닭이다.
'왕자님이 살려서 가져다 두라고 전해달래요.'
저것을 손에서 놓으면 곧 폭발이 있을 터였다. 차라리 죽여도 되는 것이면 놈의 몸으로 마력탄을 덮기라도 할 텐데 그러지도 못한다. 어느 정도로 큰 마력이 응축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만약 최상급이라면 사고가 커진다.
불이 훤한 대로의 뒷골목.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을지는 굳이 소리를 들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 아닌가.
"물러나라니까?"
놈이 다시 한 번 제 손을 뻗었다.
키리에가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별 수 없다.
마력탄을 뺏어 건물보다 높은 곳까지 집어던지는 수밖에.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야 어려울 일이 아니었으나 마력탄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 키리에가 조용히 발을 뗐다. 그런데 그 때.
- 쌔액, 쌔애애액!
뒤에서 날아온 두 자루의 단검이 키리에의 목을 스치듯 지나쳐 놈에게로 날아갔다.
- 서걱!
- ······ 툭!
자칫 단검을 쳐낼 뻔한 키리에가 가까스로 팔을 멈춤과 동시에, 무언가가 잘려나가고 바닥에 떨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타앗!
키리에가 놈에게 달려들었다.
상황을 파악할 필요도 없다는 듯 주저없이 몸을 날린 키리에가 순식간에 놈의 뒤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손을 뻗었다. 크게 벌어지던 놈의 입을 막았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키리에의 손바닥에 막혀든다.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놈의 입을 틀어막은 채로 키리에가 눈을 돌렸다.
깨끗하게 잘려나간 놈의 손가락들, 안전장치가 풀린 마력탄 속에 들어있던 조그만 마력 제어 구슬을 정확하게 꿰뚫고 지나간 단검, 그리고 어둠에 잠겨든 골목을 그제야 쳐다봤다.
"나 찾아요?"
평온한 목소리가 키리에를 향했다.
- ······ 탁!
뒷건물 벽의 창틀에서 뛰어내린 에일라가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려섰다.
어둠에 완전히 잠긴 골목 끝, 키리에의 목을 지나쳐 놈의 손에 들린 마력탄을 깔끔하게 처리한 것에 일말의 감흥도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였다.
- 콰악!
에일라를 보던 키리에가 손에 힘을 주었다.
붙잡고 있던 놈의 목을 강하게 한 번 움켜잡았다.
새어나가지 못한 비명을 지르던 놈의 몸이 축 늘어진다.
키리에가 말없이 고개를 움직였다. 그 뒤 첨예한 단검의 끝에 걸린 마력 제어 구슬을 내려다보다 나지막이 말했다.
"사람들이 깰 뻔했습니다."
자칫 실수했으면 내가 네 검에 베여 죽든 마력탄에 휩쓸려 죽든 했을 것이란 말도 아니고, 솜씨가 참 대단하다는 말도 아니고, 그냥. 손가락이 잘려나간 놈의 비명 때문에 소란스러워질 뻔했다고. 그렇게 말했다.
살짝 웃은 에일라가 대꾸했다.
"그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곧 에일라가 해체된 마력탄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자박자박,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앞서 나갔다.
기절해 늘어진 놈을 들춰 멘 키리에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방금 잡은 놈을 별궁에 가져다두러. 산 채로.
* * *
어깨에서 흐르던 피가 멎는다.
부러진 뼈가 다시 어긋나지 않도록 오러로 고정만 해둔 채였던, 덕분에 이번 싸움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던 팔에서도 통증이 가라앉고 있었다.
확실하다.
축복의 힘이 확실히 강해졌다.
축복의 힘이 강해진 것은 알았다. 그러나 오러의 충돌이 계속되었던 탓에 정확히 어느 정도로 강해졌는지를 가늠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제대로 확인을 하고 있었다.
흘러내리던 핏줄기가 확연히 가늘어진 것을 본 칼리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슉 늘어나는 게 서클만인 줄 알았더니. 축복도 슉 늘려주실 수 있었다는 걸 몰랐네, 내가."
아니.
시스파니안이시여.
하도 순하고 조용해서 아직까지 살아있는 줄 모르셨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당신의 말 짧고 잘 시들고 가끔 절여지기까지 하는데다 없는 줄 알았던 고집까지 어마어마하면서 어린 놈이 맨날 저더러 반말한다고 뭐라 그러고 툭하면 동생 개 취급하고 너 필요없으니 내 친구 데려오라며 예전 이름을 막 불러대질 않나 그래놓고는 대사막 개를 닮았다고 하질 않나 아니 대사막 개라니 그게 지금 이렇게 예쁜 동생한테 할 소린가,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속 진짜 엄청 썩이는 파릇파릇한 후손 한 놈을 기어코 지금까지 살려놓다가 여기저기 다치느라 저 진짜 고생 많이 했거든요. 이게 가능했던 거면 제 뽀얀 등짝에 흉터 생기기 전에 좀 늘려주지 그러셨습니까.
그동안 저를 못 보셨던 것도 아니면서 이걸 이제야 해주십니까. 좋기는 좋은데 조금 억울하네요. 그래도 이제라도 덜 사려깊어지기로 하신 것 같으니 다행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억울하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고요.
뭐, 아무튼 감사합니다.
자신의 투덜거림을 시스파니안이 다 들어왔음을 아직 모르는 칼리안이 깊은 감사의 인사를 짖어댔다. 그리고 다친 팔을 손으로 더듬어가며 혹시나 그 사이 뼈가 다시 움직이지는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어긋난 채로 붙어버린 뼈를 다시 부러뜨려야 할 상황을 만들 순 없었으니까.
오래지 않아, 손 끝에 걸리는 감각을 느끼며 짧은 숨을 내쉰 칼리안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 으드득!
그리고 제 손으로 유쾌하지 않은 소리를 한 번 만들냈다.
키리에가 있었다면 편했을 걸.
잠시 이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전사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어깨를 관통한 길고 붉은 비수 때문에 바위 벽에 못박힌 채 정신을 잃었다 이제 막 눈을 뜬 전사를 봤다.
- 툭.
발 끝으로 바닥을 한 번 차며 전사를 마주 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어."
다 이겼다 여겼던 싸움에서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어버린, 생각지도 못했던 텔레포트를 사용하더니 어느새 뒤로 와 서있던 칼리안. 그런 칼리안의 일격에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이제야 다시 눈을 뜬 전사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대답은 커녕 당장 이 곳을 벗어나겠다는 듯, 전사의 주변에 미세한 마력의 움직임이 일었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조용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팔뚝에, 꽃 핀 나뭇가지 문신이 있던데."
몸을 빼내려 하던 전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멀쩡했던 어깨가 어디에 박혀 있는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이유보다, 칼리안이 한 말을 깨닫게 된 까닭이었다.
칼리안이 말한 문신은 전사의 것이 아니었고, 그런 문신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전사는 익히 알고 있었으며, 팔을 직접 걷어보지 않는다면 모를 특징이 칼리안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했으니까.
별궁에서 도망치던 여자를 잡은 것이다. 칼리안이.
"이 일과 상관없는 사람이라 말하지 않았나."
"돈 주고 고용한 남이라더니."
소매 속에 뭐가 있었는지를 아네, 하고.
혼잣말처럼 속삭인 칼리안이 전사를 쳐다봤다.
"너 도망가면 그 놈이 죽어. 내 질문에 대답 안 해도 그 놈 죽일 거야. 남의 목숨 담보로 협박하는 취미가 없긴 한데 보고 배운 것도 많고 해보기도 많이 해 봐서 엄청 잘 하거든, 나도. 게다가 너도 내 형님 목숨 붙들고 나를 불러내려고 했는데. 나라고 못할 것 있나."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 툭.
칼리안이 전사의 앞에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을 본 전사가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었고 칼리안은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 여자가 마력탄을 가지고 있더래. 그래서 별궁으로 돌아오던 내 기사들이 주변을 좀 뒤졌는데 그 여자가 도망간 길 바닥에 이런 게 숨겨져 있었다더라고. 밟으면 싹 다 터지게."
마력탄.
족히 십수 개는 될 법한, 하지만 이미 모두 해체된 마력탄들이었다.
"내 형님 공격하면 내가 쫓아갈 줄 안 거잖아. 창 밖에서 마력탄 집어던졌을 때도 내가 그 여자 따라나설 줄 안 거잖아. 네가 돈 주고 시켰다던, 너랑 상관없는, 그, 여자. 그런데도 내가 안 가니까 그제야 직접 찾아왔잖아. 하필 그 얼굴로."
전사에게 한 발을 다가온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변경백 어딨어."
가는 미성이 흘러나왔다.
* * *
칼리안을 노렸다.
그 정도 쯤이야 늘 있던 일이니 크게 상관 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앨런을 노렸다. 앨런을 이길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라 앨런의 죽은 아들을 보냈다. 칼리안을 불러내려 르메인과 슬레이만을 노렸다. 플란츠를 노렸고 란델과 에우리아까지 함께 있던 방에 마력탄을 던졌다. 키리에와 에일라가 이미 영주성 쪽에 있던 것이 아니라면, 바닥에 설치해 둔 마력탄을 밟고 죽었을 거다. 그것도 통하지 않으니 칼리안을 직접 찾아왔다.
체이스의 얼굴을 한 채로.
그 사실을 알게 되니 화가 가라앉았다.
세렌티를 앞에 두었을 때에도 화가 났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화가 가라앉는다.
"영주성 인근에 가죽 갑옷을 만들어 파는 곳이 있다. 무두장이들이 공용으로 쓰는 창고가 있던데, 그곳 지하에 두었다."
그래서 침착해진 마음으로 놈의 말을 들었다.
"변경백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어?"
"······ 그래."
거짓말이 아니다.
"초상화 준 사람 모른다고 했지."
"모른다."
거짓말이 아니다.
"나를 불러내려 했으면 나한테 암기를 던졌어야지. 왜 엉뚱한 데로 던졌어."
"그렇게 해야 네가 따라붙을 것이라 들었다."
"누구한테."
"초상화와 함께 전달된 편지. 그것에 함께 써 있었다."
"편지는 누가 보냈는데."
"모른다. 그런 식의 명령을 처음으로 받았다."
거짓말이 아니다.
전사의 어깨를 꿰뚫고 있던 칼리안의 붉은 검이 검게 변했다. 노력한 보람도 없이 피어오른 화를 가라앉히고자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칼리안이 전사를 쳐다봤다. 그리고 무언가 입을 열려 했을 때.
"칼리안."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뭉클거리는 살기와 피어가 일순 가라앉았다.
탐탁잖은 얼굴로 뒤를 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막 돌아다니지 말라고, 제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
"안했어."
손가락 잘린 웬 여자 한 명을 데리고 돌아온 키리에와 함께 칼리안이 있던 곳으로 데굴데굴 찾아온 완두콩이 짧게 대답했다.
동생을 걱정하느라 동생을 걱정시키고 있는 내 인생 최대의 걱정거리가 그래도 세 글자 이상으로 대답한 것에 실소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오지 말라고 안 하고 나온 내 탓이지.
위험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으니 키리에가 데리고 나왔겠지.
"다시 들어가십시오."
"넌."
"저는 확인할 것이 있어서."
피 냄새가 짙다.
칼리안의 피 냄새는 줄어들었다. 대신 한쪽 어깨가 관통된 채로 바위에 매달려 있는 전사의 피 냄새가 지독했다. 전사를 저렇게 매달아둔 것이 누구인지, 왜 그랬는지, 적어도 칼리안 만큼은 잘 아는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변경백 어딨는지는 이미 말한 것 같은데. 나머지는 나중에 하지."
키리에를 통해 전사의 대답을 전해들은 모양이다.
짧은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가 계십시오."
"아우님 데려가려고 온 건데."
"압니다만."
고집을 부리리라는 것을 안 플란츠가 손에 들린 것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칼리안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이 쪽이 더 급할 것 같아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 아르센이 급히 가져온 것.
시간의 축의 조각이 그 손에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