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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32화 (433/527)

제76장. 얍 하면 슉 하고(7)

별궁의 옥상에서 어떻게 내려오게 되었는지 모른다.

언제 어디로 발을 내딛었는지, 어디를 향해 몸을 피하고 텔레포트를 했는지, 어떤 방향으로 달려가 검을 내지르고 피했는지 모른다.

싸움을 이어나가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몸집만한 바위를 등지고 멈춰 선 칼리안이 눈앞에 있었다.

- 카드득!

칼리안의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던 검이 바위를 긁었다.

검을 회수한 전사가 방금 전 긁은 그 바위의 뒤로 서둘러 텔레포트했다. 그와 동시에 붉은 검이 전사가 있던 자리로 짓쳐들었다.

- ······ 서걱!

전사를 대신해 칼리안의 검을 맞게 된 바위가 거창한 소리조차 없이 갈라졌다. 그것을 보며 간신히 피해 살았다는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전사가 제 손에 마력을 뭉쳐들었다.

- 화르륵!

- 쌔애애액!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을 뿐인데 어느새 화염의 창이 칼리안에게로 쇄도해오고 있었다. 그러자 칼리안이 들고 있던 붉은 검이 넓은 방패로 바뀌었다.

피한다면 멀리 등 뒤에 둔 슈린츠의 별궁에까지 저 창이 날아갈 것이라서, 칼리안은 빠르게 만들어 낸 방패로 창을 쳐냈다.

- 카아앙!

두 발이 뒤로 몇 걸음 쯤 밀릴 듯한 충격이 전해진다.

마법과 오러가 부딪혀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날붙이 소리와 불똥이 어두운 시계를 어지럽혔다.

비산하는 불꽃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보랏빛의 눈이 그 어둠 속에서도 곧장 칼리안을 찾아냈다. 재빨리 발을 박찬 전사가 칼리안에게로 달려들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당장이라도 어둠을 다 집어삼킬 듯한 붉은 눈이 지나치게 익숙한 이의 얼굴에 올려진 보랏빛 눈을 향했다.

- ······ 툭.

작게 발을 차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 휘익!

- 카아앙! 캉, 카앙!

단검을 놀리던 때와는 완벽히 다른 연격이 전사에게 쏟아부어지듯 터져나왔다. 검을 들어 막고 실드를 둘러 막았다. 칼리안의 먼 곳으로 텔레포트한 뒤 마력을 응집해 폭발시켰다.

- 쿠구궁······ 콰아아앙!

칼리안의 발 밑에서 분수같은 화염이 터져나왔다.

지금 선 곳이 바위 가득한 언덕이 아니었다면 주변을 전부 태워내고도 남았을 강한 불길이 칼리안을 휩쓸어가듯 집어삼켰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제 발 밑에서 용솟음치는 불길이 아닌 전사를 봤다.

-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든다.

칼리안의 발 밑에서, 주변에서, 강하게 회오리치는 바람이 모여들었다. 곧 그 바람이 방금 전 터져나온 불길을 감싸안으며 빠르게 회전했다. 불길을 머금은채로, 전사의 마력을 죄 집어삼킨 채로.

- 콰과과······!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갇힌 불길이 전사를 향해 날아든다. 시뻘건 불을 삼킨 투명한 뱀처럼, 이글거리는 속을 고스란히 드러낸 거대한 뱀처럼, 독기를 품은 채 전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화염을 가득 품은 날 선 바람에 베이고 타들어간 돌조각이 사방으로 튕겨져나갔다.

바람 속에 갇힌 자신의 마력을 흐트러뜨린 전사가 다시 한 번 텔레포트를 했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칼리안의 등을 향해 자신의 검을 내질렀다. 전사가 만들어낸 청은빛이 또하나의 검인 듯 예리한 잔상을 만들었다.

- 쿠웅······.

뒤를 돌아 볼 생각도 않은 칼리안이 힘주어 발을 밟았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꽉 말아쥔 채 몸을 회전시켰다. 강한 힘을 실은 검이 앞에서 뒤를 향해, 아래에서 위를 향해, 묵직한 타원을 그리듯 휘둘러졌다.

- 카아앙! 카가강!

- 카앙, 캉! 카아아앙!

뻗어나오던 검을 아래로 내려뜨려 그것을 되받아친 전사와 튕겨나온 검을 놓아버리고 새 검을 만들어 든 칼리안의 공격이 서로 얽혀들었다.

앞뒤와 좌우를 구분않는, 무게의 움직임 따위에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그리하여 그 다리를 등진 채 단검을 보내오던 그 놈과 앞에 선 놈이 과연 같은 놈이 맞는지까지 의심스러운 붉은 검을 정신없이 받아쳤다. 어느새 다시 달려드는 검을 쳐내면 뒤에서 날아드는 단검을 피해야 했고, 그것에서 몸을 피하면 바닥에서 솟아오른 바람의 창이 심장을 노렸다.

- 카아아앙!

같은 놈이 맞나.

정말, 같은 놈이 맞나.

텔레포트 하나 하지 못할 4서클의 마법사가, 그 산 위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한 채 제온의 전사들을 상대하던 그 놈이 맞나.

- 카가각! 캉!

아델리아의 실드를 잘라내고 테일란과 맞붙고 앨런에게 따라붙어 검을 날리고. 근접해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미친 얼음 마법사를 시도때도 없이 제압하고.

홀로 선 6서클의 화염 마법사 따위와는 조금도 비교되지 않을 발칸의 마법사들이 서로 뭉쳐 날린 공격을 막아내고, 발칸 기사들의 빈틈없는 협공을 상대했던 놈임을 몰라서.

잠든 세렌티를 향해 거짓없는 살기를 내뿜었던 놈임을 몰라서.

- 콰아아앙!

그런 놈의 앞에 하필 '체이스'의 얼굴로 선 까닭에.

하필 그런 놈의 스승에게 '로닐'이 찾아갔음을 들킨 까닭에.

- 카드득, 카각!

- 카아아앙!

마법사임을 끝내 숨기고 때를 기다려 칼리안을 다시 찾아왔으나, 그렇게 틈을 노린 보람조차 없이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다.

- 쌔애애액!

먼 곳으로 텔레포트를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붉은 비수를 쳐낸 전사가 순식간에 따라와 다시 검을 내지르는 칼리안의 공격을 강하게 밀어치며 잔숨을 삼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한지 알 수 없을, 사람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짐승에 가까운 붉은 눈이 전사의 보랏빛 눈을 집어삼키듯 빛났다. 그런 눈을 한 채 내질러오는 맹수의 발톱같은 검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 후두둑, 후둑······.

짙고 짙은 피 냄새가 풍겨온다.

······ 그래.

놈은, 칼리안은, 분명 오른쪽 팔을 다쳤다. 싸움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불의 화살과 함께 내지른 검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랬음에도 이런 싸움을 벌이고 있다.

"축복이라는 것이 있다 들었는데. 치유가 느리군. 왕자님."

그나마 엄청나게 빨라진 치유속도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다시 헤집어지기 시작한 속 때문에 어깨를 치료하는 것이 늦어졌을 뿐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찌됐건 덜 사려깊어진 시스파니안 덕에 이 정도의 싸움을 하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로의 검이 마주 닿아 생겨난 찰나의 정적을 틈타 흐트러진 숨을 몰아 쉰 전사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 그 얼굴."

왕궁의 숲에서 여든 일곱 명을 상대하지 않았다면, 아르센의 첫인사에 분노하여 달려들지 않았다면, 세크리티아의 첨탑에 찾아가 싸움에서 승리했음을 알리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절대로 마주보지 못했을 그 보랏빛 눈을 향해 말을 보냈다.

"왜 그 얼굴인지. 그거나 말해."

겨울의 잔혹을 모아 내뱉는 듯한 서늘한 목소리.

그런 것이 전사를 향했다.

숨소리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칼리안으로부터 풍겨오는 피 냄새는 놈이 지금 녹록한 상태가 아님을 전해주고 있었으나, 당장이라도 숨통을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묻고 있는 얼굴에는 죽음을 유예해 준 포식자의 여유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칼리안을 한동안 쳐다보던 전사가 입을 열었다.

"네가 따라가지 않은 그 여자는 이 일과 관계 없다. 너를 끌어내기 위해 돈을 주고 시켰다."

키리에에게 잡아오라 시켰던, 별궁에서 달려간 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알아들었음에도 칼리안은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그 얼굴인지······ 물었는데, 내가."

- 카드득!

맞닿은 검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자신의 목을 향해 한 뼘은 더 가까워진 붉은 검을 본 전사가 한숨같은 웃음을 지었다.

- 상세히 바꾼다면 더 좋겠지만 굳이 완벽히 똑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비슷하기만 하면, 그것을 본 사람의 기억이 나머지 얼굴을 알아서 채워놓을 테니까.

비슷하기만 하면 알아서 환각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마법의 힘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는 건 그런 착각을 스스로 만들어 빠져 죽는 존재니까. 그러니 똑같을 필요 없이 비슷하게만 꾸며 앞에 나서면 알아서 착각하고 알아서 절망하리라고.

그런 편지를 떠올리던 전사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느리고 낮은 목소리가 그 시선을 뒤따른다.

"생김을 바꾸는 마법 물품과 초상화를 전달받았다. 그 모습을 하면 이길 것이라고."

"누구에게."

"모른다."

거짓이 아니다.

초상화.

때문에 목소리만은 바꾸지 못한 것인가.

그것이 체이스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저 전사가 알고 있는지, 그 누군가는 왜 하필 체이스의 얼굴을 골라 칼리안에게 보냈는지. 그래서 그 누군가의 정체는 무엇인지.

치미고 들어오는 의문들을 떨쳐내고 '체이스'의 얼굴에서 다시 눈을 뗀 칼리안이 전사의 검을 올려쳤다.

- 카아아앙!

짧은 대화는 여기까지. 그런 의미임을 알아들은 것처럼, 다시 한 번 텔레포트로 몸을 피한 전사가 불의 화살을 날려보냈다.

칼리안이 오러를 운용했다. 날아드는 화살을 막고 새로운 단검을 만들어 전사에게 쏘아보내기 위해서였다.

- 우우웅······!

그러나 덜컥.

하고.

몸 속을 돌던 오러가 움직임을 멈췄다. 서로 얽혀들었다. 이리저리 뒤엉켜 난투를 벌이듯 온 속을 헤집었다. 갑작스럽게, 대비할 틈도 없을 만큼 급격하게.

"······ 쿨럭!"

황급히 허리를 숙인 칼리안이 시커멓게 뭉쳐진 핏덩이를 토해냈다.

- ······ 깜빡.

손에 들린 붉은 검이 해일에 잠긴 등대처럼 깜빡이다 빛을 잃었다. 이를 악문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발악하듯 날아드는 전사의 화염이 짓쳐들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 * *

좋은 꽃향기가 들었다.

지나치게 과하지도 않고 미미하다 할 만큼 연하지도 않은, 마치 볕과 바람이 잘 드는 봄의 언덕에 올라있는 기분이 함께 든다.

아카시아 꽃을 우려낸 차였다.

"감사합니다."

테이블에 올려진 두 잔의 차를 본 드미레아가 말했다. 이번에도 직접 우려낸 차를 건넨 히나가 그 향기같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슬레이만의 팔목을 잡고 속을 살폈다.

슬레이만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물었다.

"전하의 팔을 먼저 봐드려야 하지 않겠나?"

손을 뗀 히나가 어디선가 묻은 핏물이 짙게 밴 소매를 살짝 접어올린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 전하께서, 치료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날 밤.

왕실 숲에서 벌어진 발칸과 제온의 전투가 끝났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으나 다친 이들까지 없진 않았다. 중상자가 무려 스물 아홉이었고 경상자는 다 세어보지도 못했다.

칼리안과 싸움을 벌이다 생명에 지장이 생길 위험은 하나도 없이 아프기만 하도록 다쳤던 대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상처였다. 중상자들은 하나같이 치명상을 입은 채였으니까.

덕분에 히나가 마법사들을, 왕궁의 치유사가 기사들을 맡아 정신없이 환자들을 살폈다.

그 뒤 간신히 숨을 돌릴 즈음 시스파니안의 현신이 카이리시스를 찾아왔고 오래지 않아 르메인이 왕궁에 돌아왔다.

- 살펴보니까, 상처가, 많이 아물고 있어서, 내일 다시, 봐드리겠다고, 말씀드렸어요.

화살 하나가 박혔던 정도의 '경상'에 더해 보다 강해진 시스파니안의 축복까지 지니고 있는 르메인을 살펴 줄 여력이 없었다. 시스파니안의 위용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니 말이다.

"나도 괜찮네. 무리하지 말게."

국왕의 상처를 살피는 것까지 미뤘다 하니, 슬레이만은 말을 마친 뒤 다시 뻗어오는 히나의 손을 만류했다. 그것을 본 히나가 살짝 웃었다.

- 이동 마법진, 쓰셨잖아요. 그냥, 계세요.

다 나았다 여기고 마법진을 썼었는데 완치된 것은 아니었나보다. 독기운이 빠지고 잘 아물었다 생각했던 곳에 손을 댄 히나가 햇살같은 빛을 흘려보냈다.

마주 앉은 드미레아가 찻잔을 거의 다 비웠을 즈음, 금빛의 힘을 거두고 손을 뗀 히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게 된 슬레이만을 향해 말했다.

- 돌아가면, 술은 내일까지, 드시지 마세요. 그리고 사흘 정도는 꼭, 쉬세요. 검 쓰지, 마시고요. 강아지랑 산책만, 하세요.

세리에를 붙들고 놀려던 생각을 접게 된 슬레이만이 아쉽다는 듯 대답했다.

"얀이랑 노는 것은 괜찮다 하니 그나마 다행이네."

당연하겠지만 공작저에서 태평하게 세리에의 품에 안겨 있을 멍멍이 얀을 말함이다.

다른 얀은 빌헬름 관에서 칼리안을 걱정하며 초조하게 서성거리다 베로니카에게 붙들려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차출됐다 했으니까.

그러고보니 그 얀은 아직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지. 슬레이만이 멍멍이 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생각난 진짜 아들의 근황을 그제야 궁금해하기 시작했을 때.

- 똑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고, 잠깐의 시간을 둔 뒤 문이 열렸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온 이가 히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있던 슬레이만을 보며 말했다.

"여기 계셨네요."

얀이었다.

제 생각을 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시기 좋게 들어온 아들을 향해 슬레이만이 손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히나의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본 얀이 혹시나 걱정을 할까 싶은 마음에 먼저 말을 꺼냈다.

"걱정 마라. 나는 괜찮······."

"우리 왕자님은 어떠세요?"

······ 그럼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새끼같지 않은 저 내새끼가 내 걱정을 했을 리가 없지.

멍멍이 얀 이야기가 나온 뒤에야 진짜 아들 얀을 떠올린 슬레이만이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릴 즈음, 치료를 마친 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느새 다 비워진 드미레아의 찻잔을 보다 얀을 향해 말했다.

- 저 다시, 치료실로, 가야 해요. 찻잔, 저 쪽에 있으니까, 편하게 있다 가세요, 코끼리님들.

바쁘니까 차 대접은 한 번만.

나머지는 알아서 챙기라는 말에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베른 경. 고마워요."

한 곳에 옹기종기 모인 코끼리들을 보며 인사를 마친 히나가 밖으로 나갔다. 곧 달그락거리며 자신의 것과 드미레아의 차를 준비하기 시작한 얀이 슬레이만을 쳐다봤다. 아들 놈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를 짐작한 슬레이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꼬맹이 별 일 없다."

사실 별 일이 엄청나게 많았으나 거짓말을 했다.

새끼 코끼리가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는 칼리안이 뒤집어진 속으로 이동 마법진을 쓰고 그 상태로 산에 올라와 르메인을 구하려다 멀쩡한 다리를 끊어 아래로 추락하던 중에 에일라의 비녀를 붙들고 살아남아 구조된 뒤 에이프린 백작령에 갔다가 간신히 밥만 얻어먹고 다시 나와서는 지금쯤 슈린츠에 있으리라는 사실을 얀에게 알려주면, 얀은 당장 슬레이만과 히나를 붙들고 슈린츠로 가려고 들 테니까.

"레아랑 아버지는요? 괜찮아요?"

칼리안이 괜찮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이런 질문이 붙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슬레이만이 방금 전 히나가 고쳐놓고 간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레아는 다친 곳이 없었고 나는 멀쩡해졌다."

"그것 말고요."

- 달칵.

드미레아의 앞에 새 찻잔을, 그리고 자신의 잔을 내려놓은 얀이 드미레아의 옆에 와 앉았다. 그 뒤 창 밖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보셨잖아요. 시스파니안이 오셨었어요."

슬레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답을 전하지는 않았다. 대신 한참동안 자신의 검을 만져보다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 마음을 무어라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랬다. 로젤리타를 위해 찾아왔던 칼리안으로부터 시스파니안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러나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라서, 자신의 두 눈으로 시스파니안의 현신을 확인한 그 마음을 도대체 무어라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드미레아가 걱정되어서 다른 말을 하질 못했다. 아마 얀도 슬레이만과 같은 생각을 한 까닭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 달칵.

이제껏 조용히 있던 드미레아가 찻잔을 내려놨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시스파니안께서, 우리가 지켜온 것을 기껍게 여겼다 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해주셨느냐?"

"네."

드미레아가 놀란 얼굴이 된 슬레이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얀이 짧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레아. 혹시나 싶어 하는 말인데, 그건 정말 그냥 좋으셨다는 뜻일 거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 내 생각도 그렇다."

우직하게 이어왔던 그 신념이 좋았다는 말.

그런 말에 혹시나 드미레아가 흔들릴까봐 건네는 이야기였다.

시스파니안이 기꺼웠다는 가문의 신념을 계속 고집했어야 했는지, 이제까지의 코끼리들과는 달리 3왕자 칼리안의 행보를 여러모로 돕고 있는 드미레아가 그런 후회를 할까봐서.

"제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드미레아가 이런 말을 했다.

시스파니안을 만나고 기꺼웠다는 말을 듣자마자 혼란이 왔다. 존재 여부를 눈으로 확인하지도 못한 막연한 이의 기사로, 시스파니안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도 충성하거나 힘을 보태지 않는 우직한 기사로, 드미레아 자신 역시 그렇게 살았어야 했을까. 이제 시스파니안이 살아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다시 예전처럼 지내야 할까. 혼란이 왔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흔들린다 했던 히나의 말. 이유도 모르는 채 꼿꼿하게 지내는 것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면서, 이유가 있다면 흔들려도 된다 했던 말. 그 말을 듣고 긴 생각 끝에 결정한 길이 혹시 틀린 것이었을까. 혼란이 왔었다.

"그랬는데······ 다른 말씀을 더 해주셨습니다."

드미레아의 청회색 눈이 찻잔에 올려진 꽃잎을 향했다.

'허나 나에게는 네 선택이······ 나비같았다. 꽃이 핀 것 같아서. 다행히도.'

길고 긴 그 신념이 기꺼운 한편 못내 안타까웠다고. 그래서 이제야 제 길을 걷겠다 한 드미레아의 결정이 반가웠다고. 피어나 흔들린 꽃에 나비가 찾아든 모습을 보게 된 것처럼.

다행히도.

드미레아는 시스파니안의 말을 그렇게 이해했다.

다만 시스파니안의 두 번째 말까지는 슬레이만에게 전하지 않았다. 만약 슬레이만이 시스파니안의 말을 드미레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슬레이만의 신념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이 된 까닭이었다.

"그래서 제 길은 되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 뜻대로 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해 주신 것 같아서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슬레이만이 그제야 묵은 똥을 싼 표정이 됐다. 시스파니안이 드미레아에게 무슨 말을 더 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고 큼지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한 번 정했으면 쭉쭉 밀고 나갈 줄도 알아야 지그프리드지."

이렇게 말한 슬레이만이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시스파니안이 아직 어린 인간 한 명의 마음까지 다독여주는 이였음을 이제야 알게 되어서, 초상화 속에서 보았던 반지를 낀 채 상복일 것이 분명한 옷차림으로 찾아왔던 그 고룡이 아무쪼록 스스로의 마음도 다독여가며 살아왔기를, 혹은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혹시나 필요하면 얘기해주거라. 아르피아 궁에 찾아가서 욕을 하든 책상을 뒤엎든, 내 자리를 넘겨 줄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

다른 귀족의 작위는 전대 가주의 죽음으로 승계되든 죄를 지어 사라지든 하겠으나 공작위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 죄목이 반란이 아닌 이상 작위를 빼앗을 수는 없던 탓에, 공작이 큰 잘못을 저지르면 그 작위를 후계자에게 강제로 넘기도록 되어있지 않나. 그러니 필요하다면 넘겨주겠다는 뜻이었다.

드미레아와 달리 슬레이만의 신념은 여전히 굳건했으니 하는 소리였다. 드미레아의 뜻을 존중한다 하여 슬레이만까지 정치놀음에 발을 들일 생각은 없으니, 해야 할 일에 공작위가 필요하다면 자신까지 나서서 돕는 대신 그냥 넘겨주겠다는 그런 의미였다.

"저한테 넘기고 어머니랑 놀러다니시려고요."

"그렇지."

"아직 필요없습니다. 그냥 계십시오."

그 와중에도 '아직'이라며 여지를 둔 대답에 얀이 웃었다. 그리고 걱정을 덜었다는 얼굴로 드미레아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것이 제 손을 어루만지고 갔던 시스파니안의 검은 빛과 비슷한 기분이라, 드미레아가 그제야 살짝 웃었다.

"차 마셔, 레아. 향기 좋네."

드미레아의 웃음이 어색한 빛으로 바뀌었다.

토닥여 준 손길이 따뜻한 것은 따뜻한 것이고, 그렇다 해서 저 차가 맛있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 괜찮아요."

"내 건 맛이 없어서 그래?"

들켰다.

"다들 왜 내 차를 싫어하나 몰라. 우리 왕자님은 매일매일 맛있게만 드시는데."

얀이 툴툴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말을 들은 드미레아는, 칼리안이 뭘 잘못하든 한 번은 봐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이런 것을 맛있게 먹어준다니, 그것도 매일매일.

대단한 사람이다.

* * *

- 틱, 톡, 틱, 톡.

플란츠에게 빼앗기듯 넘긴 탓에 있지도 않은 시계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기분이 든다. 치워내지 못할 이명처럼, 시계소리가 들린다.

세상의 흐름이 느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헤어나오지 못할 환상처럼, 온 세상이 느리게 흐른다.

"······ 빌어먹을."

이명이고 환상이고 나발이고.

당장 죽게 생겼는데 뭔 상관인가.

자신을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화염의 화살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 속을 짓씹었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 끝에 오러를 집약시키면서, 화살로부터 몸을 빼내려 발을 내밀면서, 제 입 속을 물어뜯을듯 악물었다.

- 파스슥······.

모여들던 오러가 다시 흩어진다.

강제한 힘 때문에 다시 한 번 피냄새가 모여든다. 틱, 톡, 틱, 톡. 시계소리가 맞는지, 혹은 살아남으려 애쓰는 심장의 박동인지. 알 수 없는 소리에 귀가 멀 것 같다.

칼리안이 눈을 들었다. 온 시야를 가득 메울 것처럼 시시각각 커져가는 불을 쳐다봤다. 불화살이 날아드는 짧은 순간. 말 그대로 찰나와 같은 그 순간.

- 틱, 톡, 틱, 톡.

눈을 감았다.

'마력의 속성이 서로 다르면 충돌을 일으킵니다.'

'소드마스터와 마법사의 힘은 사실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연의 마나는 하나입니다. 그것을 강제하여 흐름을 바꾸고 원하는대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마법사입니다.'

앨런에게 들어왔던, 다른 마법사들에게 들어왔던, 칼리안이 배워왔던, 칼리안이 내뱉었던 그 모든 말들이 한꺼번에 귓가를 울린다.

틱, 톡, 틱, 톡.

바로 곁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려온다.

칼리안이 눈을 떴다.

대기를 찢으며 날아드는 화살을, 그것을 이루는 불에 얽힌 마나를 보았다. 결국 근원은 하나라 했던, 전사의 의지에 따라 마력으로 바뀌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을 보았다. 그것을 만들어 낸 마나를 보았다.

몸 속에 쌓인 오러를 그대로 두었다. 속성이 달라 서로 충돌하는 문제는 잠시 잊기로 했다. 그리고 제 앞으로 날아드는 화살에만 집중했다.

- 틱, 톡, 틱, 톡.

화살이 날아든다.

생각을 이어나간다.

'왕자님께서는 자연의 마나를 오러로, 그리고 마력으로, 새롭게 만들어 사용하시는 것이지요.'

화살을 바라본다.

생각을 정리한다.

- 틱.

- 톡.

- 틱, 톡.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사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실로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칼리안의 봄결같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그 따스한 바람이 칼리안의 옷깃을 매만지며 지나갔다.

전사가 보낸 불화살의 마나를 제 것으로 만들어버린, 어느새 사라진 불화살 대신 자신이 만든 바람결 속에 선 칼리안이 웃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전사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자신의 마법이 흐트러진 것을 안 뒤 발을 박찼다. 검을 다잡으며 칼리안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그 순간.

- 파앗!

칼리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껏 보였던, 검은 잔상만 남긴 채 바람처럼 움직이던 것과 달랐다. 말 그대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 우우웅!

심장이 서늘해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사의 귓가에 와 닿았다.

전사의 불을 자신의 바람으로 바꿀 줄 알게 된, 그렇게 하나의 벽을 넘고 제 심장에 다섯 번째 서클을 만들어낸, 넘쳐나던 오러를 심장 속 서클에 다시 담아내게 된.

"안녕."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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