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31화 (432/527)

제76장. 얍 하면 슉 하고(6)

이러려고 데리고 온 옥수수수염은 아니었는데.

르메인의 호위기사인 렌을 향해 뻗은, 플란츠보다 좀 더 두꺼운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긴 손에 어린 붉은 기운을 바라봤다.

"란델 형님."

"얘기하거라."

"무리하지 말고 피곤하면 쉬십시오. 상처가 깊기는 해도 당장 목숨을 놓칠 정도는 아닙니다."

"되었다."

심장 속에 담긴 돌의 힘으로 오러나 마력을 쓰면 생명력이 함께 닳는 것을 안다. 때문에 만약 란델이 사용하는 것이 검이나 마법이었다면 그 힘을 쓰지 말도록 만류했을 터였다.

하지만 치유력은 달랐다.

돌이 아니라 신물에 담긴 세렌티의 신력을 쓴다. 그러니 저 빛은 그저 치유사의 심장 속에 돌이 담겼음을 알리는 정도일 뿐이라, 그래 이럴 때 아니면 란델 형님 네가 언제 이렇게 좋은 일 해보시겠냐 하는 마음으로 그냥 두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친 경험이 딱 한 번 뿐이었던 란델에게 하루 두 명의 환자가 무리일 것은 분명하여서.

"지그프리드 공의 상처도 보셨지 않습니까."

결국 다시 한 번 우려섞인 말을 했다.

손에 어린 치유의 힘을 물리지 않은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깊이 가라앉은 빛의 눈으로 칼리안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세워 둔 칼날이나 접거라. 그것을 견디기가 더 어려우니."

"······ 아."

벌써 몇 번이나 잠재운 살기가 저도 모르게 또 흘러나왔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서릿바람보다 더 날카롭게 벼려진 제 기운을 지워내듯 가라앉힌 뒤, 칼도 제대로 못 쓰면서 심장 속의 돌 덕에 살기만 느끼게 된 란델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되었다."

"네."

란델의 반대편에 앉아 눈만 감고 있던 에우리아가 작은 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방을 메우던 살기에 숨이 차오고 있던 까닭이다.

그것을 보며 거듭 반성한 칼리안이 다시 란델의 손을 봤다.

흐트러짐 없는 붉은 빛이 렌의 몸 속으로 계속하여 스민다.

'그러고보니 의외로 제 몫을 챙기시네.'

렌을 치료해주기를 부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란델이 알아서 나선 것이었다. 슬레이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했다. 왜 그렇게 열심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다. 제 의지로 따라온 길이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짐만 되는 '빚'을 만들어 두기가 싫은 것이다.

뭐, 르메인의 상처는 아예 못 본 듯이 굴었으나 그에 대해서는 르메인은 물론 칼리안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배운대로 행동하고 받은대로 돌려준다는 것은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이치가 아니던가.

그나저나 따뜻한 우리 히나는 그 보드라운 손을 험한 상처에 직접 대던데. 굳이 저렇게 손을 떼고 치료를 하는 모습이 사뭇 생경하다.

'손을 대면, 장미같지 않을까봐 그러시나.'

치료하는 대상이, 혹은 공격하는 대상이, 사람같을까봐. 장미와 달리 숨을 쉬고 움직이고 체온이 있는 사람같을까봐. 혹시 그 차이를 알게 되기를 꺼려하는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냥 손을 떼고 치료하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는 모습에 대해서만 신기하게 여기기로 했다. 가위질을 열심히 하셔서 그런가 팔도 안 아픈 모양이다, 라고.

- 틱, 톡, 틱, 톡.

뱃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깊이 꿰뚫렸던 렌의 상처가 아주 조금씩이나마 호전되어 가는 것을 보며, 칼리안은 그렇게 주제도 흐름도 없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는 데에는 딴 생각만한 것이 없음을 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살기를 다스려가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반과 묶은 맹세의 인을 고려한 플란츠가 돌아가는 정황을 눈치채지 않기 위해 다른 생각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라도 인내심의 끝을 붙들어두지 않으면, 감히 일국의 왕세자를 향해 암기를 던지고 도망간 놈을 찾아 뛰쳐나갈 것 같았으니까. 놈을 잡아 무슨 짓을 벌이다 죽일지 스스로도 가늠하지 못했으니까.

- 틱, 톡, 틱, 톡.

손에 들린 회중시계의 초침소리는 그대로인데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별궁에 들어오고 에일라가 곧바로 나간 뒤 아직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았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은 시곗바늘을 다시 살피던 칼리안이 손목을 바라봤다. 그리고 셔츠 소매 아래에 숨겨진 가느다란 팔찌들 중 하나를 작동시켰다.

- 에일라.

-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 잘 숨었네. 아직 못 찾았어요.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 그래.

- 나오지 말아요.

- 안 나가. 여길 어떻게 비워.

- 누가 또 습격할까봐 그러는 게 아니라 왕자님도 아직 환자니까 얌전히 있으라는 소리예요.

- 많이 나았어. 훨씬 빨리 회복되고 있고.

- 그렇다 해서 멀쩡한 것도 아니잖아. 말 좀 들어요.

- 응. 그렇게 할게.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 나 이제 다시 바빠요. 왕자님이랑 오래 못 놀아요.

- 그래. 조심해, 에일라.

- ······ 남 걱정하는 만큼 자기 걱정도 좀 하면 좋겠네. 아무튼 알았어요. 이따 봐요.

- 응.

에일라와 대화를 마친 칼리안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래, 상처가 나았었지.

다음으로 생각할 거리를 찾았다.

플란츠의 검을 잡았던 상처도, 암기를 붙들어 생긴 상처도, 이미 생긴 흉터를 빼고는 모두 다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

오러를 둘렀던 덕에 스치듯 베인 작은 상처라지만 그렇게까지 빨리 아물 만큼은 아니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치유력이 늘어났다. 깎여나갔던 속도 마찬가지. 모두 다 나은 것은 아니었으나 속이 아물어드는 속도가 달라졌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틱, 톡, 틱, 톡.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부단히 노력하는 머릿속에, 조금 전 주고받았던 대화가 떠올랐다.

'슈린츠에는 잘 도착하셨습니까.'

'스승님!'

'늙은이가 그리도 반가우십니까.'

'당연히 반갑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놈들이 무슨 짓을 하진 않았고요?'

'이제 괜찮습니다. 그리고 습격한 놈들은 시스파니안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모두 잘 쫓아보냈습니다. 전하께서도 무탈히 환궁하는 중이라 하니 저하께도 걱정 덜으시라 전해주시지요.'

'네. 얘기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시스파니안께서 오셨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나누는 것이 낫겠습니다. 드려야 할 이야기가 많고 시간은 늦었으니.'

시스파니안이 왔다 했다.

그러니 회복이 빨라진 것은 분명 시스파니안이 준 선물일 터였다.

'이곳의 일은 더 걱정 말고 푹 쉬십시오.'

'빨리 뵙고 싶네요.'

'······ 나도 그렇구나. 조심히 지내다 오거라.'

'아버지도 조심하시고요.'

'그리 하마.'

왕궁을 정리하느라 정신없을 앨런을 오래 붙들지 못했다. 그래서 적당히 상황만 전해들은 뒤 대화를 마쳤었다. 슈린츠의 변경백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안그래도 어제부터 삶아질 일만 참 많이 생기고 있어서 다분히 말랑말랑해진 완두콩의 머리꼭지에 웬 놈이 튼튼한 손잡이 하나를 콕 박아두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하지 못했다.

"하······."

다른 생각의 끝에 결국 또 붙어나오는 습격자 생각에, 다시금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진득한 살기를 가라앉히다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것을 느낀 플란츠가 가만히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뜨며 말했다.

"왜."

"아닙니다."

"자."

소름끼치게 하다가 심란하게 하다가 소름끼치게 하다가 심란하게 하다가. 계속 그렇게 옆 사람 괴롭힐 거면 방도 넓으니 저 구석 어디든 처박혀 잠이나 자라는 소리다.

"잠 안 옵니다."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하긴.

산에서 내려오는 내내 등에 업혀 신나게 주무셨으니. 안 그래도 키리에까지 없는 마당에 잠이 또 올 리가 없지.

짧은 숨을 탁 내쉰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멀뚱멀뚱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먹을 것 없는데요."

"짖지."

"그럼 뭘 드릴까요."

"시계."

"이번엔 시계를 달라 하십니까. 뺏는 것 싫어하신다더니."

"반말."

"그······ 형님."

"왜."

"세 글자 이상만이라도 써서 얘기를 해보시는 건,"

"뭐하러."

"······ 네."

네 글자 이상이라고 할 걸.

잠시 이런 후회를 하고 있으려니 플란츠가 내밀었던 손을 조금 더 들이밀며 말했다.

"달라고."

세 글자 이상으로.

"시계는 왜요."

"시간 보고 살기 흘리고, 또 시간 보고 살기 흘리고. 내 아우님께서 계속 그러고 계시는데."

"시계 안 보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까, 제가."

"나 괜찮으니까."

이렇게 말한 플란츠가 테이블을 툭 쳤다.

정확히는 그 위에 올려져있던 암기를 건드렸다.

"안 죽고 안 다쳤으니까. 안달하지 말고, 달라고. 돌려드릴 테니까."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으니 화 좀 그만 내고 시계나 달란다.

"제가 뭘······."

"시계."

아.

고집부리는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

"네."

결국 이기지 못한 칼리안이, 검은 빛의 자개판 위에 열 두 개의 루비가 박혀있고 플래티넘과 오닉스로 세공된 테두리와 덮개를 지닌 '아주 비싸고 소중한 내 시계'를 플란츠에게 넘겼다. 시계에 연결된 검은 사슬이 차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플란츠의 손 위에 올려졌다.

뒷면에 새긴 카이리스 왕실의 문장은 차치하고, 덮개에다 제 인장까지 보란듯이 세공해 둔 그런 시계다. 그것을 쓸 사람이 저 말고 대체 누가 있다고 안 주겠다 버티는지.

초침 소리가 더 들리지 않도록 시계의 크라운을 아예 올린 뒤 주머니에 넣은 플란츠가 도로 눈을 감았다.

"자."

그리고 이렇게, 방도 넓으니 옆에 붙어있지 말고 저 구석 어디든 처박혀 잠이나 자라는 말을 다시 했다.

길고 긴 숨을 한 번 더 내쉰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에우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제 성질 다스리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 가만히 앉아 밖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다 시계까지 강탈당한 막내 왕자가 다음 이야깃거리를 찾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새빨간 눈이 번뜩이는 것 같아 아주 살짝 흠칫한 에우리아가 얼른 표정을 되돌렸다.

"세이렌 경."

"네, 왕자님."

"경의 마법에 대해 물을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곧 칼리안이 질문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서로 다른 속성의 마나를 어떻게 융합하고 있는지, 그것을 알고 싶어서."

이 말에, 에우리아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것을 말로 설명드리기가······."

그러더니 어울리지도 않게 뒷말을 흐렸다.

자신이 사용하는 힘의 원천을 알려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알려주기가 어려워서 이러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정말 어려워서.

'얍 하면 슉 하고.'

칼리안이 제 마법을 설명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있겠나.

이런 이유임을 이해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다시 얘기하자 말하려는데 에우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직접 다가와 보여줘가며 설명을 해주려 하는 것이다.

그 모습에 고마움을 느낀 칼리안이 입을 열었을 때.

- 파앗!

- 우우웅!

칼리안 쪽으로 발을 내딛던 에우리아의 모습이 란델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란델 쪽으로 텔레포트함과 동시에 펼쳐진 에우리아의 실드가 란델과 렌의 주변을 감쌌다.

"칼리안 왕자님!"

그리고 그 순간.

- 콰악!

- 우웅!

칼리안은 이미 제 곁에 앉은 플란츠를 붙들어 일으켜 벽 쪽으로 밀어낸 뒤 오러가 섞인 실드를 씌워놓고 있었다.

- ······ 챙그랑!

아르피아 궁의 것만큼이나 단단한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란델의 붉은 빛이 눈에 띄지 않도록 별궁의 모든 방에 불을 켜고 두터운 커튼을 전부 다 쳐두도록 했음에도, 마치 이들이 어느 방에 들어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 툭!

창을 깨뜨린 무언가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과 에우리아의 눈에 날이 섰다.

붉디붉은 칼리안의 오러가, 짙은 보랏빛이 도는 에우리아의 마력이, 순서를 가리기 어려울 만큼 동시에 뻗어나갔다. 그리고 방금 전 날아든 것을 두텁게 감싸안았다. 그 직후.

- 콰아아아앙!

고막을 흔드는 굉음이 방 안을 울렸다.

실드와 오러에 갇힌 채 거대하게 폭발한 것.

마력탄이었다.

"이러니······ 제가 어떻게 안달을 안 내겠습니까."

단단히 움켜잡고 있던 완두콩의 어깨에서 손을 뗀 칼리안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그 후, 방 전체에 실드를 두른 뒤 물의 장막을 펼쳐내는 에우리아, 깊은 잠에서 깨지 못한 렌, 아무 일도 안 생긴 것을 안 뒤 다시 치료를 시작한 란델, 그리고 동생 놈이 얼마나 돌았을지를 잘 짐작한 만큼 더 막을 방법도 없음을 안 탓에 두 눈만 잠깐 감았다 뜨는 플란츠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긁어대는데. 나를."

제 영역을 벌써 두 번이나 침범당한 검은 맹수의 붉은 입술이 길게 올라갔다.

* * *

멍청한 그레이거나.

이런 일에 절대로 전면으로 나서지 않을 라시드가 마음을 바꿨거나. 아직 미련을 못 버린 제온의 남은 일당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이 기회에 플란츠를 없애두려는 란델이나 칼리안의 세력이거나.

혹은.

상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놈이거나.

누구든 뭔 상관인가. 잡아서 죽이면 될 일이지.

'내가 나가고 나면 여기로 다시 들이닥칠 수 있습니다. 함정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네.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힘들면 굳이 생포하지 말고, 그것도 힘들면 스승님 불러요.'

'알겠습니다, 왕자님.'

앨런과 연결된 팔찌를 에우리아에게 건넸다.

왕궁 쪽의 상황이 정리되었다 했으니, 만약 이것이 칼리안을 불러낸 뒤 플란츠에게 다시 칼을 보내려는 함정이라면 그냥 앨런을 부르라고. 그렇게 전했다. 그리고 그 길로 뛰쳐나왔다.

- 타앗!

시스파니안의 배려 덕에 보다 더 가벼워진 발 끝으로 별궁 기둥을, 외벽을 장식하던 작은 조각을 밟고 위를 향해 뛰어올랐다. 창 밖에 매어 둔 작은 화분을 디뎌 몸을 띄우고 그 윗층 테라스 난간을 박차며 순식간에 별궁의 지붕에 올라섰다.

멀찌감치, 별궁에서 슈린츠 중심지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놈이 보였다.

- 에일라.

- 네.

- 키리에 같이 있지.

- 네. 있어요.

- 별궁에서 슈린츠 영주성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한 놈이 있어.

너무 눈에 띈다.

그러니 저 놈은 아니다.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속임수다.

- 갈색 머리, 단발, 여자같은데 정확하진 않고, 검은 셔츠에 갈색 바지. 등에 검은 가방 하나를 멨어. 눈에 잘 띄게 도망가고 있으니까 찾아서 산 채로 가져다 놓으라고 해.

- 그럴게요. 혹시 못 참고 밖으로 나서신 거면, 마음 놓지 말아요. 놈들이 마나실 후작님을 공격할 수단만 가진 건 아닐 테니까.

- 그래. 안 잊을게. 에일라.

이런 말을 전하던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쳐다보던 곳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더했다.

- 이따 봐. 이번엔 내가 바빠졌네.

- 알았어요.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따라갈 줄 알았는데 안 가는군. 검을 쓰는 놈이라고만 생각했더니 머리도 쓰나."

"아, 나는."

조금 낯익은 목소리.

곧바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뿐, 별궁의 지붕에 칼리안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올라와 있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칼리안이 혼자 있을 따름이었다.

아무도 없는 주변을 잠시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얼굴도 써."

생각 외로 잘 안 통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써먹고는 있는 까닭에 솔직하게 대답한 칼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아무도 없는, 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던 쪽을 향해서였다.

"그나저나······ 암기에 마력탄이나 좀 보내기에 검만 쓸 줄 아는 새끼인 줄 알았더니. 마법도 쓰는 새끼였나봐. 신기하네."

투명화 마법이다. 최소한 칼리안보다 한 서클은 더 많은 마법사라는 뜻이다. 거기에 더해 인근까지 날아오도록 눈치채지 못할 암기와 마력탄을 던질 정도의 실력을 가진 검사이기도 했다.

"입이 험했군."

"얼굴만 착해."

칼리안이 가벼운 대답을 건넸다.

- 우우웅!

그와 함께 칼리안의 손에 붉은 오러가 어렸다. 그렇게 만들어낸 붉은 검의 표면에 드센 바람이 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것인지 한동안 조용하던 방향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단검이 아니군. 부상이 나았나. 왕자님."

"······ 아."

붉은 눈이 반짝, 하는 빛을 냈다.

"누구인지······."

이제 알겠다.

슈린츠 인근의 산, 그 다리 건너에서 만났던 놈.

칼리안이 부상을 입은 것을 제대로 알아보고 제 부하들을 뭉치게 해 시간을 벌었던, 칼리안의 공격에도 죽지 않고 다리까지 따라붙었던 놈. 바로 그 놈의 목소리였다.

"그 늑대. 안 죽고 살아남았네."

"보다시피."

"안 보여."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우우웅!

칼리안이 끊어낸 다리 위에 서 있던 전사.

바닥으로 추락하기 직전, 심장 속에 심어 둔 돌의 힘으로 가까스로 장거리 텔레포트에 성공한 전사. 때문에 멀쩡한 모습으로 슈린츠에 돌아와 있게 되었던 그 전사 쪽에서 오러를 꺼내드는 소리가 났다.

칼리안의 검에 어려있던 붉은 기운에 더욱 예리한 날이 세워졌다. 가느다란 울림이 조용히 퍼져나갔다.

그에 대한 답이라는 듯, 아무것도 없던 곳에 붉은 빛의 긴 금이 생겼다. 그리고 그 틈이 벌어지며 누군가가 발을 내밀었다.

'······ 하나 더.'

아르센이 사용하는 마법과는 또 다른 것.

자신의 공간을 넓혀 그 속에 몸을 숨기는 마법이다. 그러니 5서클 말고 다시 하나 더. 6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는 의미다.

"재밌네."

조용히 중얼거린 칼리안이 앞을 바라봤다.

놈의 다리가, 놈의 허리가, 놈의 손이, 놈의 상체가 공간의 틈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산에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깊은 후드를 쓰고 있는 놈의 머리까지 모두 다 그 틈 밖으로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사실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허나 나는 누구든 한 명은 확실히 잡은 뒤 돌아가야 하니······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그렇게 밖으로 나온 대사막의 전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걷었다.

- ······ 깜빡.

붉은 눈이 잠시 감겼다 올라갔다.

한 번 더,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붉은 눈 아래로 그려내듯 올려 둔 미소가 짙게 변했다.

"······ 내 스승님에게도 이랬겠군."

서늘한 목소리가 전사를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청은빛의 머리카락. 그리고 보랏빛의 눈.

'체이스'를 향했다.

깜빡, 깜빡.

잠시 숨을 참고 주먹을 말아쥐던 칼리안이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한참 뒤 다시 떠올렸다.

"아쉽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만 빨리 찾아왔으면 내가 많이 놀랐을 텐데."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소슬한 달을 등진 채, 선연한 핏빛 검이 짧게 움직였다.

- 쌔애액!

놈이 취한 모습이 왜 체이스인지, 그 따위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궁금증도 없다는 듯한 모습으로. 주저함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모습으로.

붉은 빛의 검이 '체이스'의 심장을 내리찍으려 달려들었다.

놈의 보랏빛 눈이 칼리안을 향한다.

붉게 달아오른 칼리안의 눈이 놈을 보며 웃는다.

"······ 이제 안 통해."

고운 미성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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