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장. 얍 하면 슉 하고(5)
여느 때와 다름없던 밤.
왕궁에 가져갈 여러 개의 샌드위치 꾸러미를 든 스칼렛이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손님이 없는 마차 하나를 불러 올라탔다.
덩치 좋은 손님을 태운 마차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다각, 다각!
오래지 않아 아스트리샤와 에이난샤 거리를 지나친 마차가 광장에 들어섰다. 거리를 지날 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소란함이 마차 안으로 들려왔다.
한밤이었으나 오늘은 주고받을 이야기거리가 많은 날이 아닌가. 때문에 사람들이 광장을 떠나지 않은 듯 했다. 즐겁게 오가는 대화 소리, 악사들의 연주 소리, 노랫소리가 온 광장을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 다각······ 다각.
광장의 소음이 사라지고 마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스칼렛이 창 밖을 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다를 떨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느라 분주했을 모든 이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기어코 마차가 멈춰섰다.
그것에 불만을 말하는 대신, 스칼렛은 그냥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대체 저게······."
달이 사라져 있었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달이 기울고 새벽이 밝아오고 태양이 뜬다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어둠을 비출 것 같은 거대한 날개가 보였다. 달이 밝다면 달을 가리고 태양이 오른다면 태양을 저물게 할 듯한 검은 날개에 어둠이 맺혀 있었다.
- ······ 사아아아······.
그 찬란한 어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안온한 어둠이 바람결에 흘러왔다.
모든 이들의 마음 속을 쓸어내리는 것만 같은 칠흑의 빛이 찾아들었다. 그 뒤에는 서로를 바라보는 하츠아라와 시스파니안의 조각상을 보듬어보듯 한참을 맴돌다 왕궁을 향해 퍼져나갔다.
- 털썩.
누군가 무릎을 꿇었다. 누군가는 허리를 숙였다. 또 누군가는 치켜든 고개를 내리지 못했고 다른 누군가는 제 두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수그렸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렸고 곁에 있던 사람은 웃음을 지었다.
그곳에 선 모두가, 더는 전설일 수 없을 기적을 맞이했다.
* * *
시오나가 숨을 내뱉었다.
드미레아가 숨을 삼켰다.
자비를 거둔 대마법사의 고요한 형벌이 끝난 뒤 남은 것은 그을음 하나 묻지 않은 옷가지와 무기들, 놈들의 심장 속에서 제 할 일을 충실히 이행한 돌, 그리고 단 한 명의 포로 뿐이었다.
이백의 군사가 있었다는 흔적은 그뿐이었다. 머리카락은 물론 뼛조각조차 남지 않고 모조리 불에 타 사라졌다.
반쯤 넋이 나간 제온의 전사를 기절시킨 앨런이 뒤로 돌았다. 그리고 시오나와 드미레아를 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험한 모습을 보게 되었네."
드미레아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곁에 있던 시오나가 두어 번 눈을 깜박인 뒤 대답을 전했다.
"험한 것은 됐고, 당신과 같은 편이라 다행이란 생각은 하는 중이다."
"솔직하군."
"엘프는 거짓말하지 않으니까."
숨소리만 내며 웃은 앨런이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껏 거두어들이지 않았던 자신의 보호막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시오나가 잘라낸 부분까지 다시 촘촘히 가로막혔던 두터운 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순간, 하늘 먼 곳에서 흘러나오던 강대한 마력의 기운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 딸랑!
시오나의 검이 급히 움직였다.
하지만 그 검을 뽑아들지는 못했다. 곁에 있던 앨런이 허리를 숙이는 것을 본 까닭이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다누가 숲의 길을 닫기 전부터 방문을 짐작하고 있던 이를 향한 앨런의 뒤늦은 인사가 흘러나왔다. 얼핏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그 끝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의지를 만난 적은 있었으나 본신을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 이해하였다.
셋의 머릿속으로 사려깊은 이의 대답이 전해졌다.
그 뒤에야, 그 자리에 있던 다른 한 명이 가까스로 움직였다.
바로 드미레아였다.
- 절그럭!
가벼운 사슬 갑옷이 접혀들었다.
무거운 검의 끝이 바닥에 닿았다.
카이리스의 코끼리, 지그프리드.
시스파니안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의 우직한 후손들. 카이리스의 왕가도 카이리스도 시스테라 대륙도 아닌, 오로지 시스파니안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이어져 내려온 가문.
그 방패를 이어나갈 이의 한 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하늘을 향했던 고개가 더할 나위 없을 만큼 깊숙이 내려갔다. 가문이 지닌 방패의 진짜 주인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 드미레아가 단 한 마디의 말도 꺼내놓지 못한 채 기사의 예를 보였다.
그런 드미레아를 향한 안온한 바람이 불어왔다.
- 너희들의 신념을 내가 기꺼워하였다.
드미레아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그 목소리가 계속하여 전해졌다.
- 허나 나에게는 네 선택이······ 나비같았다.
신념만을 고집하지는 않기로 했던 결정에 대해 말했다.
'나는 그 소식이 나비같아서 좋았어요.'
봄날의 나비같이 꽃이 피었던 날, 소중한 이가 다시 일어서 나라를 세웠노라 전해졌던 날.
흐드러지던 바람 냄새, 노란 꽃무리가 사분거리던 소리, 이야기를 전해오던 얼굴. 걱정을 덜고 기뻐하던 눈빛.
여전히 아로새겨진 봄같은 말.
영원토록 다시 듣지 못할, 영영 지나간 봄의 말.
- 꽃이 핀 것 같아서. 다행히도.
그런 말이라는 것도, 무슨 뜻을 지닌 말인지도 알지 못했으나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드미레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품은 검은빛이 상처 많은 손을 매만지다 사라져갔다.
* * *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
사려깊은 검은 용이 느린 날갯짓을 했다.
왕실 숲의 전투를 마무리짓던 발칸의 기사들이 숨을 삼켰다. 그들의 곁에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몸을 낮췄다.
저도 모르게 말에서 내려섰던 아르센이 아주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어둠을 향해 예를 보인 마법사의 푸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일렁였다.
슬레이만이 검을 내렸다. 하늘을 향해 무릎을 대고 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흔들린 적 없던 청회색의 두 눈이 깊이 감겨들었다. 이제껏 지켜온 신념이 허상이 아니었음을 확인한 이의 눈가에 긴 주름이 졌다.
그리고 르메인.
그 어떤 이의 앞에서도 굽힐 일 없을 르메인의 고개가 조용히 높이를 낮췄다. 아주 오래 전 지그프리드 공작령에서 마주했던 시스파니안의 의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고룡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들을 품어안듯 매만지고, 대마법사의 늦은 인사를 받고, 오랜 방패를 지켜나갈 다음 주인의 불안을 어루달래던 그 순간의 시스파니안에게 인사를 올렸다.
- 눈을 감지 말라 하였거늘.
그리고 혼났다.
르메인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질책일지 따져보지 않았다. 태어나 지금까지 똑바로 주시하지 않고 지내온 것이 지나치게 많았음을 아는 탓에.
그저 다시 한 번 깊숙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 챙그랑!
그 수많은 인사들이 끝났을 때.
요란한 쇳소리가 외성 밖의 정적을 깼다.
카이리시스로 향하는 성문을 가로막고 얼음 방벽을 향해 붉은 오러를 내지르던 이들이 검을 놓쳤다. 르메인을 향해 마법을 운용하려던 이들이 바닥에 엎드렸다. 검을 쥐고 있던 손에 가해진 강제를, 온 몸에 전해지는 피어를 이기지 못한 탓이다.
곧, 싸울 의지를 이미 잃은 제온의 군사들에게도 검은 빛이 내려앉았다.
- 전하거라. 내가 부재하지 않았음을.
짧은 말이 그들을 향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군사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시스파니안이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놈들을 이해하고 용서한 까닭도 아니었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어 전한 경고가 이대로 잊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카이리시스가 누구의 영토인지를, 앞으로의 침탈에 대해 더 이상의 이해가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려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
- 펄럭!
어둠에 잠겨들었던 날개가 다시 움직였다.
그 날개의 끝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여겨진 순간, 하늘의 빛을 다 가리고 섰던 거대한 용의 모습이 지워졌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없어졌다.
아마도 카이리시스 안에서는 그렇게 느낄 터였다.
하지만 외성 밖에 서 있던 르메인의 일행은 아니었다.
- ······ 사락.
가벼운 천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껏 단 한 마디의 말도 꺼내놓지 못하고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기만 하던 아르센이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 카이리시스를 잠겨들게 한 어둠을 담은 긴 머리카락. 발끝까지 내려오는 검은 드레스와 검은 구두, 아래로 내려뜨린 새하얀 손가락에 끼워진 흑진주 반지.
그리고. 붉은 눈.
초상화 속에서 언제나 보아왔던 모습의 시스파니안이 모두의 앞에 서 있었다.
- 또각, 또각.
- 사락······.
시스파니안이 발을 옮겼다.
아르센이 서 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 외성 인근의 작은 산과 이어진 숲이 있던 곳. 그 앞에 서 있던 누군가를 향해서.
"······ 후."
긴장을 이기지 못한 아르센이 작은 숨을 내쉬었다.
발을 옮기는 소리가 두 번 울렸을 뿐이다. 그런데 시스파니안의 모습은 어느새 그 누군가의 앞에 다다라 있었다.
어둠 속에 잠겨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가 말을 전했다.
- 너의 이해는 나와 다르다.
시스파니안과 같았다.
그 음성이 귀로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이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뻔한, 다누의 말이 이어졌다.
- 나는 지켜보았다. 기억하였다. 잊지 않았다. 내 의지는 네 뜻과 다르다. 시스파니안.
- 다른 것이 아니다.
- 다르지 않다면 무엇인가.
- 네가 나를 거역하였다.
고룡의 대답에 어둠이 흔들린다.
조용한 말이었으나 그 분노에 어둠이 몸을 떨었다.
다누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 바꾸기 위함이다.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거역이라 하여도 그것은 필요한 일이다.
- 네 행위가 선을 벗어난 간여임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참극을 만든 것은 인간의 왕이 아니라 너의 방관이다. 그조차 올곧이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무엇을 바꾸려 간여하는가.
- 모든 것을 바꾸고자 함이다.
- 교만이구나, 비아다누르.
거역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고룡의 말이, 홀로 피어난 첫 생명을 향했다.
- 내가 네게 베푼 것을 아직 보은받지 않았음을 상기하여라.
- 그의 앞에 선 네 아이들을 누가 지켜냈는지를 상기하여라.
- 네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내가 살려두었음을 상기하여라.
- 시스테라와 네 아이들의 생명이 지닌 무게를 내가 저울질하지 않고 있을 뿐임을 상기하여라.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시스파니안의 말이었다.
모든 말이 동시에 흘러나와 머릿속으로 찾아들었다.
절대적인 우위에 선 이의 목소리 끝에 바람이 인다. 그 바람의 사이로 달빛이 든다.
어둠에 가려져있던 다누의 모습에 빛이 비췄다.
녹빛과 흰 빛이 섞여있는 머리카락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황금빛 눈동자를 지닌 어린 엘프가 보였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양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 닮았다.'
머리색이 달랐다. 눈동자 색이 달랐다.
허나 저 얼굴은 닮았다.
그 아이.
신물을 둘러싼 사건에 칼리안을 말려들게 했던 아이. 제 마을로 칼리안을 이끌어 검은 돌의 존재를 알게 했던 아이. 칼리안이 제온에게 처음으로 습격당하기 직전에 만났던 아이.
'대장!'
그 아이.
시아와 닮았다. 똑같았다.
- 이것이 나의 마지막 이해임을 상기하여라.
시스파니안의 최후통첩이 다누를 향했다.
그 말을 따를지, 다시 거역할지. 그것을 알리지 않은 다누가 숲 속으로 한 발을 물렸다. 그렇게 모두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시스파니안이 일순간 나타났던 것처럼 다누 역시 일순간 사라졌다.
달빛마저 숨을 삼킬 듯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한동안 숲 속을 바라보던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돌렸다.
- 숲을 불신하지 말거라. 나의 터에 다시 들지 못하니.
지고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다누가 카이리시스 안으로 숲의 길을 더 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왕궁 북쪽의 숲과 왕실 숲을 태워버려야 하나 고민하던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속내를 다 듣는 것처럼 가만히 서있던 시스파니안이, 르메인과 슬레이만을 한 번씩 바라보다 발을 내딛었다.
- 사락······.
그 구두가 바닥에 닿았을 때 르메인의 앞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검은 드레스 자락의 끝으로 같은 색의 구두가 보였다.
르메인이 고개를 들었다.
오랜 후손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시스파니안이 입을 열었다. 마음이 아닌 귀로 전해질 목소리를 밖으로 꺼냈다.
"그것이 부족하다며 어찌나 시끄러운지."
자신이 카이리스 왕가의 시조가 맞았음을 증명하는 것인지. 시스파니안은 이렇게 머리 꼬리 없는 말을 전했다. 그 뒤에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새하얀 손가락의 끝이 르메인의 이마 앞에 잠시 머물렀다.
손 끝에 검은 기운이 다시 뭉친다.
그 빛이 르메인을 감싸안고 서서히 스며든다.
어둠에 담긴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곧바로 이해한 듯한 르메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시스파니안의 말이 이어졌다.
"그 아이를 위함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너 말고 네 아들 때문에 주는 것이라 못박았다.
"감사합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르메인이 치장없는 감사를 보냈다.
곧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돌렸다. 카이리스의 두 번째 국왕 카밀론과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진 먼 후손에게서 그렇게 눈을 뗀 뒤, 슬레이만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려 아르센을 쳐다봤다.
다른 이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을 진중한 음성이 아르센의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 살펴보라 하였더니. 제 아비에게 건넸구나.
수수께끼같은 말.
아르센이 그 뜻을 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다누의 얼굴을 지닌 아이에 대해 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지극히 위대한 존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 * *
레이븐이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그 정도였으니 함께 달려온 다른 말들의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플란츠의 말 에스티나도, 키리에의 말 이리스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말들이 온 몸으로 더운 열기를 내뱉으며 가쁜 숨소리를 냈다.
"조금만 더, 레이븐."
그것을 알면서도 칼리안은 멈추려 하지 않았다.
푸르릉 소리를 낸 레이븐이 다시 발을 박찼다. 이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별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했다.
슈린츠의 성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왕세자의 일행을 알아본 기사들이 황급히 문을 열었으나, 슈린츠 변경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변경백은 어디에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왕자님. 오후부터 사라져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습격자들을 찾는 한편 수색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릅니까.'
'마지막으로 모습을 확인한 기사가 있습니다. 오후 네 시 경에 별궁 인근에서 변경백을 봤다 했습니다.'
불안한 눈으로 성문을 지키던 기사들은 이런 말만 전해왔다.
- ······ 절그럭!
- 드르륵······ 철컹!
완전히 닫힌 성문의 굵은 사슬이 바닥에 닿고, 결코 부서지지 않을 두터운 잠금장치가 굳게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 다그닥, 다그닥!
그 소리를 뒤로한 채 계속 달렸다. 슈린츠 성에 도착했다 하여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변경백 에밀리아까지 실종되었다 하니 말이다.
일행의 가장 뒤에 선 에이프린 백작과 그의 기사들이 무사히 따르고 있음을 스치듯 확인한 칼리안이 계속하여 레이븐을 앞세웠다.
- ······ 다각, 다각.
- 타악!
레이븐의 발이 비로소 멈추어 설 때까지.
체르밀 궁의 다섯 배는 될 크기의 별궁이, 그 정문이 눈앞에 보일 때까지.
별궁 안에서 서둘러 달려나오는 슈린츠의 기사들과 시종장 라울, 그리고 다른 세 명의 시종을 바라보던 플란츠가 하늘을 쳐다봤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습니다."
플란츠의 주머니 속에 회중시계가 들어있는 날이 많지 않음을 아는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초조함을 감춘 플란츠가 말 위에 앉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란델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마나실 후작은."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드미레아는,"
"아직."
"네."
드미레아로부터도, 앨런으로부터도. 이렇다 할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빌헬름 관에 있다던 히나 역시 제대로 된 상황을 전해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살짝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란델을 향해 물었다.
"불편하신 곳은 없습니까."
"되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 그래."
그 사이, 완전히 닫아걸었던 별궁의 문이 열렸다.
- 철컹!
- 쿠르릉······!
걱정과 반가움, 안타까움.
늘 차분하던 얼굴에 온갖 표정을 다 띄운 시종장 라울이 문을 열고 달려왔다. 그가 혹시라도 '변장'을 했을까 우려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 뜻을 알아들은 키리에가 안심하라는 듯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평소와 달리 뜀박질을 하고는 있으나 발소리가 틀리지는 않았으니까. 라울 본인이 맞았다.
"저하······ 아직 전하를 찾아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 전하의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아직까지도 르메인의 상황을 알지 못한 라울이 다 늙어버린 얼굴로 물어왔다.
통신 장비를 통해 상황을 전했다가는 혹시나 예기치 못한 일이 다시 생길까봐. 르메인을 무사히 만나 구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왕궁으로 향하셨네. 무사하실 테니 걱정 말게."
그에 대해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하는 플란츠를 대신해 칼리안이 말을 전했다. 무사히 왕궁에 잘 돌아갔으리라고. 그 말을 들은 라울 뿐 아니라 플란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못 하는 놈이 아닌가.
그러니 무사할 거다.
"감사합니다, 저하. 감사합니다, 왕자님."
라울의 허리가 바닥에 닿도록 수그러들었다.
나이 많은 시종장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린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에일라."
"네."
"나랑 같이 나가서 슈린츠······!"
- 쌔애애액!
- 콰악!
별궁에 도착을 했으니 잠시 주변을 돌며 슈린츠 변경백을 찾아보자고. 그렇게 말하려던 칼리안이 서둘러 팔을 뻗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콱 움켜쥐었다.
- 투둑, 투둑······.
플란츠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던 것을 잡아챈 손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둥근 고리가 달린 짧은 칼날.
암기였다.
- 휘익!
- 타다닥!
그것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에이프린 백작과 기사들, 그리고 키리에가 튀어나가듯 몸을 날렸다.
- 우우웅!
- 우웅!
칼리안과 에우리아의 넓은 실드가 동시에 펼쳐졌다. 그 안에 플란츠와 란델을 가두듯 감쌌다. 말에서 뛰어내린 에일라가 검을 뽑아들며 칼리안의 반대편으로 가 섰다.
별궁의 주변에는 수풀이 없다.
무릎을 넘는 높이의 덤불도 자라게 두지 않는다. 그 사이에 숨어들어 습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숨을 자리가 없는 곳이니 분명 보다 먼 곳에서 던진 것일 터.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밖은 나중에 살피겠습니다."
"······ 칼리안."
플란츠가 나지막이 동생을 불렀다.
무엇을 걱정할지 뻔한 일이라, 고개를 가로저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저는 안 나갑니다. 슈린츠 변경백보다 형님 저하 목숨이 더 중요한 것 정도는 압니다. 어떤 놈인지 잡을 때까지 옆에서······."
"말고."
당연한 소리 그만하라는 듯.
빠른 말을 막은 플란츠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칼리안의 손에 들린 암기를, 아니. 그것을 잡아챘던 손을 가리켜보였다.
칼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조용히 움직였다. 플란츠의 손 끝을 따라 그 시선을 돌렸다.
- ······ 툭.
더 작아진 핏방울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흘려낸 손바닥의 상처.
작게 베였던 상처가 이미 모두 아물어 있었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조금 덜 사려깊어진 까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