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29화 (430/527)

제76장. 얍 하면 슉 하고(4)

정답, 혹은 오답.

"왕궁에 계시면 괜찮으실 줄 알았습니다. 만에 하나 스승님께서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왕궁 안이라면 안전할 줄 알았습니다."

오답을 골랐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빨리 알아볼 것을 그랬습니다. 브리센의 후작저에서 라시드 브리센을 만났을 때 어떻게든 알아낼 것을 그랬습니다. 여유로운 척, 관대한 척.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굴지 말고 잡아다 비밀을 털어내게 할 것을 그랬습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던 것 알잖아."

라시드 브리센을 곧바로 잡아들일 수 없었다. 슈린츠에 앨런과 함께 올 수가 없었고 칼리안이 오지 않을 수도 없었다. 최선을 다해 골라낸 오답들이 그렇게 늘어났다.

앨런의 일은 드미레아와 시오나가 어떻게든 도움을 줄 것이라고, 왕궁 북쪽의 숲으로 가기 전에 아르센과 테일란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것이라고. 그러니 이번에는 가지 말라고.

'······ 미안해. 막아서.'

그렇게 전해오는 플란츠의 말에 아무것도 못했다.

가지 말라고 울며 막아서던 체이스를 뿌리치고 기어이 나섰었다. 그 생각이 나서, 그것이 겹쳐서, 플란츠에게 붙들린 팔을 뿌리치질 못했다.

- 풀썩.

결국은 발을 멈추고 영주성의 복도 벽에 묻히듯 기대어 섰다.

제 왼팔을 꽉 쥔 손을 놓지 않는 플란츠를 그냥 둔 채로, 플란츠가 가져가도록 내버려 둔 통신용 반지를 돌려받지 않은 채로, 플란츠가 얀을 통해 드미레아를 불러내는 것을 막지 않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알겠다고만, 했습니다."

주머니 속 회중시계의 초침소리를 가없이 듣기만 하던 칼리안이 두서없는 말을 꺼냈다.

직접 가지도 못하고 상황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말을 꺼냈다. 제 발로 나서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일은 태어나 처음이라서, 그것이 너무 낯설어서 말을 꺼냈다.

"대답없다 걱정하지 말고, 날이 추우니 밤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밤새 기다리다 몸 축내지 말고 있으라고. 스승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냥 알겠다고만 했습니다."

플란츠는 그 말을 들어줬다.

칼리안의 두서없는 말이 이어졌다.

"다녀올 테니 걱정 말고 있으라고. 아리안느랑 어머님 모시고 있으라고. 놈들이 얼마가 왔든, 다녀오겠다고. 저는 그렇게 얘기했는데. 체이스 형님이 아무 말도 안 하셨었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그런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

다녀오겠노라 거짓말을 한 것을 그렇게 후회했는데.

체이스는 말없이 보냈던 것을 그렇게 후회했겠구나.

그것을 이제 알았다. 이제서야 알았다.

"······ 조심하시라고 할걸."

끝내 칼리안을 걱정하던 앨런에게 알겠다고만 하지 말고, 조심하시라고 말할 걸 그랬다. 이제서야 후회를 한다.

플란츠가 긴 한숨을 쉬었다.

칼리안의 팔에 멍이 들지 않을까 싶을 만큼 세게 붙들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지 저 동생 놈에게 배운 것이 없어서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해."

두 놈이 다 똑같이 걱정만 하고 있으면 안 되지 않겠나.

둘 중에 한 놈이라도 안심을 시켜 줘야지. 달래줘야지.

다만 네가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잘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말은 안 했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말이 칼리안에게는 비수가 될 때가 많다는 것을 겪어가며 배웠다. 그래서 그 말은 골라내 버렸다.

"다음부터는 잊지 말고 해."

성문 앞에 나설 때와 지금은 다르다는 것만 말했다. 앨런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이번에는 다음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만 말했다.

"······ 네."

칼리안이 가만히 대답했다.

플란츠는 똑똑하니까.

분명 맞는 말일 테니까.

- 달칵.

칼리안이 카이리시스에 가려던 고집을 접었음을 안 플란츠가 뺏어들었던 반지를 돌려주려 할 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르메인이 걸어나왔다. 그 뒤로 슬레이만과 로난시테, 그리고 나머지 다른 일행들도 모두 함께 나오는 것이 보였다.

벽에서 등을 뗀 칼리안과 르메인 쪽으로 몸을 돌린 플란츠가 예를 보였다. 칼리안이 멀리 가지 않았음을 알고 안심한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바로 슈린츠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그런데 르메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궁으로 가마."

"······ 전하. 카이리시스는 지금,"

"네, 전하."

카이리시스로 돌아가겠다는 말.

그곳은 위험하니 안 된다 하려는 칼리안의 대답을 끊고 플란츠가 답을 전했다.

"발칸에서 카이리시스의 이동 마법진 쪽으로 호위대를 보내도록 전해놓겠습니다."

"안 됩니다, 전하. 위험합니다."

"왕실 숲 쪽으로 공격할 계획을 우리가 전혀 몰랐을 거라고, 제온은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그럼 카이리시스 외성 밖에는 놈들이 없을 것 아닌가."

"아뇨, 형님. 발칸의 눈을 돌려 두려 선동을 일으킬 전력을 빼뒀을지도 모릅니다. 외성 밖의 안전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아우님 말씀대로라면 슈린츠로 가는 길이 안전할지도 확신할 수 없는 문제같은데."

"그러니 저와 지그프리드 공이,"

"란델 형님 덕에 지그프리드 공작은 이제 마법진을 사용해도 무리가 없고. 그렇다면 지그프리드 공작과 발칸이 카이리시스 외성부터 왕궁까지 전하를 호위해드리는 쪽이 저 숲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놈들을 경계해가며 슈린츠로 돌아가는 것보다 안전하지 않나."

"대신 슈린츠보다 왕궁이 더 위험하지 않습니까. 왕궁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직 왕실 숲의 전투가 다 끝난 것도 아닙니다. 왕궁 쪽에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왕궁이 안전해졌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플란츠로부터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르메인을 쳐다봤다. 그런 칼리안이 무슨 말을 할지 뻔한 일이라, 르메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왕궁에 문제가 없다면 모르겠다만, 칼리안. 왕궁에 문제가 생겼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수도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한시바삐 왕궁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전하."

국왕으로서는 그게 참 당연하고 기특한 소리이긴 한데 왜 하필 지금 기특하시냐고. 되게 낯설다고. 낯선 게 문제가 아니라 그러다 전하 당신 진짜 죽는다고. 이제까지 살아있던 게 신기한 사람이 완두콩만 있는 줄 아시느냐고. 완두콩 아버님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칼리안이 제 입에서 튀어나올 뻔한 말들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말을 '아들이 아버지를 걱정해서 하는 말' 답게 포장할 수 있을지를 아주 잠시 고민하는 사이,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저는 형님과 칼리안을 데리고 슈린츠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칼리안이 한 번 더 환장할 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카이리시스로 돌아가던 르메인에게 변고가 생기면 그 즉시 플란츠가 카이리스의 수도를 슈린츠로 바꿔버리겠다는 뜻이다. 칼리안에게서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사라지면 위험하다는 사실도 알았으니 소식이 전해지거나 칼리안이 풍겨대는 피 냄새가 짙어지는 즉시 제 동생에게 기사 서약부터 할 작정이리라는 것은 그 속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이 뻔한 일이다.

제 아버지가 무병장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별개로 그 아버지가 어디에 앉은 사람인지 칼리안만큼이나 잘 아는 플란츠니까. 르메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되 르메인의 아들로 살 수는 없을 칼리안은 무조건 르메인의 안전을 우선하지만 플란츠는 아니니까. 위험을 무릅쓰도록 르메인에게 먼저 요구하지는 못하겠으나 그 결정을 반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하거라."

"네, 전하."

결국 체이스가 베른을 붙들던 손을 놓았듯이.

결국 베른이 키리에의 고집을 꺾지 못했듯이.

그래서 결국 칼리안은 이번에도 져 주고 말았다.

"······ 조심하십시오."

이렇게 덧붙이는 플란츠와, 한참 뒤에 고개만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는 르메인을 지켜보기만 했다.

"키리에."

"네, 왕자님."

"에이프린 백작에게 전하를 호위해드릴 기사들 보내달라고 해. 지금 바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르메인을 위한 최선의 배려를 전했다.

* * *

그 때까지만 해도 문제가 없었다.

"시오나 힐."

카이리스 왕궁의 북쪽 숲, 어머니 나무가 열어 준 길의 끝으로 나왔을 때. 눈 앞에 서 있던 뾰족한 귀의 엘프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네 부족의 장로가 우리를 배신하였다 하더니. 네가 전사들을 정말로 등진 것이냐. 엘프들을 배신하더니 대사막마저 배신한 너를 이 나라에서 받아주겠다 한 것이냐."

딸랑, 하는 소리가 잠시 울렸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엘프들에게 내가 버려진 것이지 내가 배신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멋대로 뭉쳐 머릿수를 불리더니 대사막의 다른 부족들을 찾아다니고, 굴복을 거부한 긍지높은 늑대들의 터전을 잿더미로 만든 것은 너희들이다. 그것에 내 칼을 보태지 않았다 해서 나를 배신자로 모는 것은 조금 웃기지 않나."

"어쭙잖은 소리 마라, 시오나. 너는,"

"대사막의 전사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한 뜻으로 움직였는지 몰라도. 나는 너희들을 배신한 게 아니라 내 길을 가겠다 마음먹은 것 뿐이다."

시오나의 말을 들은 전사가 코웃음을 쳤다.

- 스르릉······.

곧 전사가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자신들의 적이 되겠노라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시오나를 죽여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 저벅저벅.

느린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 시오나의 앞으로 걸어와 섰다. 그 모습을 본 전사가 제 눈에 힘을 주었다.

"되었네, 힐 경. 그만하고 물러나 있게."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카이리시스의 왕실 숲으로 들어섰던 제온의 군사들도 그런 생각을 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사 역시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돌아가야 한다. 후퇴한다."

"숲의 문이 닫혔습니다. 돌아가지 못합니다."

전사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곁에 있던 남자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왔다.

"만일을 대비해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길을 열어두기로 한 것 아니었나!"

"네. 맞습니다. 하지만 닫혔습니다. 돌파해야 합니다."

전사가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쳤다.

"돌파라니."

카이리시스 왕실의 숲으로 사백을 보냈다.

그렇게 하여 수도를 혼란에 빠뜨리면 발칸의 전력이 분산되리라 여겼다.

'앨런 마나실은 왕궁을 지킬 겁니다.'

'직접 나오기만 하면 사백 쯤 무서울 것이 없을 대마법사가 무엇하러 왕궁 안에 숨어있는단 말인가?'

'3왕자가 앨런 마나실로 하여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테니 말입니다. 앨런 마나실은 왕궁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왕궁으로 더 많은 군사를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닙니다. 앨런 마나실은 왕궁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발칸은 내성 안에 퍼져나갈 군사들로 인해 정신이 없을 테니 그렇게 많은 군사를 보낼 필요 없습니다.'

'내가 네 놈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원하는대로 하십시오. 제 말을 믿고 첫 승리를 거머쥐든, 믿지 않고 익숙한 패배를 다시 겪든. 제가 상관할 바 아닙니다.'

첫 승리.

그 말에 그만 마음이 움직였다.

이번 일에 차출한 제온의 군사 중 절반을 왕실 숲으로, 나머지의 절반을 카이리스 왕궁의 북쪽 숲으로 배치했다. 그렇게 출발했다. 그리고 잠시 뒤 숲의 길을 통해 밖으로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 누구를 돌파한단 말인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 사아아아······.

불안한 소리가 고요한 숲을 맴돌았다.

언뜻 들으면 잔잔한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또 언뜻 들으면 거대한 무언가가 긴 숨을 내쉬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런 소리가 가만히 울리고 있었다.

다만 그 뿐, 그 어떤 거창한 징조도 없었다. 대지가 울리는 것도 아니었고 어마어마한 빛이 하늘을 밝히는 것도 아니었다. 바람이 휘몰아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불안하다 느낀 이유는 단 하나.

"둘 다 움직이지 말고 내 뒤에 얌전히 숨어있게. 함부로 나서면 위험할 터이니."

홀연히 앞으로 나서더니 지그프리드의 소공작과 대륙의 다섯 번째 소드마스터를 '피보호자' 취급하는 한 남자. 변장 마법을 사용해도 그것만은 따라하지 못한다던, 끝으로 갈수록 점점 붉어지는 긴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어내린 남자. 날카로운 눈매의 젊은 남자.

앨런 마나실이 서 있었으니까.

'라시드 브리센······ 놈에게 속았다.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에게 배신당했다.'

라시드 브리센의 말을 믿었으나 그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숲의 길을 계속 열어놓겠노라 하던 어머니 나무는 탈출구를 닫았다. 배신자 시오나 힐을 처단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잊은지 오래다. 도망갈 길 없이 앨런 마나실을 돌파해내야 하게 생겼다.

제온의 전사가 두 눈을 부릅떴다.

"숲 밖으로 퇴각하라!"

앨런 마나실은 상대할 수 없다.

모여 덤비면 모인 채로 죽고 흩어져 덤비면 흩어진 대로 죽을 것이 뻔하다. 그러니 차라리 각자 알아서 제 살길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 카이리스 왕궁으로, 혹은 숲의 북쪽과 연결된 카이리스의 내성으로. 어디든, 어떻게든.

"퇴각하라!"

"산개하여 퇴각하라!"

전사의 명령이 이곳저곳으로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이백의 군사가 재빨리 흩어져 달리기 시작했다.

- 사아아······.

그런 제온의 전사들을 배웅하는 것처럼, 아니. 오자마자 떠나겠다는 손님의 말에 아쉬워하는 것처럼, 나뭇잎이 스치는 평화로운 바람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리고.

- 덜컥!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손끝 하나, 발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시선조차 돌리지 못한 채 모두가 제 자리에 멈춰섰다. 온 몸을 짓누르는 압력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며 명령을 마친 뒤 미처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멈추어 선 전사가 짧은 숨을 간신히 들이켰다.

- ······ 투욱.

주먹보다 작은 꽃이 송이송이 떨어지는 것을 본 까닭이다.

숲의 길을 건너 온 놈들이 서 있던 곳의 중력을 바꾼 앨런이 건네준, 새하얀 불꽃이었다. 소록소록 내린 꽃들이 놈들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뻗어내던 손 위에, 내딛던 발 위에, 그 불꽃들이 하나 둘 살포시, 내려앉았다.

- 따악!

이런 순간에서조차 그 장관이 아름답다 여겨지는 것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을 때. 아름다운 정적의 끝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우우웅!

제온의 군사들을 둘러싼 반투명한 막이 펼쳐진다.

그것을 본 전사가 이를 악물었다. 방금 자신들을 둘러싼 것이 대단한 마법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탓이다. 그들을 모두 가둘 감옥을 펼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소리를 가둘 사일런트 막임을 알아 본 까닭이다.

- ······ 화르륵!

아름답게 내려와 앉은 새하얀 꽃송이가 밝게 타올랐다.

풀 한 포기, 나뭇잎 한 조각도 태우지 않은 채 오로지 군사들의 몸뚱이만을 붙들고 집요하게 타올랐다.

검 한 번, 마법 한 번을 내질러보지 못한 이백 명의 군사들이 하나 둘 사그라들었다.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속박된 채로. 사일런트 막에 갇혀 서로에게만 전해질 비명을 내지르면서. 강인한 치유력을 지니게 해 준 심장 속의 돌을 저주하면서.

"앨런 마나실!"

앨런의 새하얀 안네루시아를 받지 못한,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단지 앨런이 놈을 생포하겠노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살게 된 단 한 명의 생존자, 놈들을 이끌던 전사가 입술을 짓씹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앨런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놈들을 맞이한 대마법사가 그렇게 결정했으므로.

* * *

칼리안은 지그프리드의 대문을 닫으라 했었다.

그러나 소공작 드미레아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어머니인 세리에와 기사 유란에게 저택을 맡긴 뒤 시오나와 함께 히나를 호위해왔다. 그것이 히나를 '무조건 안전하게' 보호해 올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에게 칼리안의 말을 전한 뒤 왕궁으로 다시 따라온 얀과 함께 빌헬름 관에 머무르며 상황을 살폈다.

- 소공작과 함께 있나.

그러던 중 플란츠의 말이 전해졌다.

얀의 팔찌를 전해받은 드미레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길로 시오나와 아르센을 데리고 급히 왕궁 북쪽의 숲으로 가던 중, 플란츠로부터 두 번째 부탁이 전해졌다.

드미레아가 발을 멈췄다.

"헤르츠 부군단장님."

"네, 소공작님."

"지금 전하께서 왕궁으로 돌아오겠다 합니다. 호위 병력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앨런과 르메인.

어느 쪽에 누가 가야 할지를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힐 경과 함께 숲으로 가십시오. 제가 대원들 몇을 데리고 외성 밖으로 가겠습니다."

곧장 대답한 아르센이 발을 되돌렸다. 그 뒤 아르피아 궁과 옛 헤이시아 궁의 터를 지키고 서 있던 발칸의 대원들 중 열 명의 마법사와 스무 명의 기사들, 그리고 국왕 친위대 엘라자르의 기사 서른 명을 차출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적습니다, 부군단장님."

기사들 쪽의 사단장인 데미안 스콘이 우려하는 말을 했으나 아르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실 숲으로는 서문으로 나가 외곽으로 돌아가면 되니 사람들 눈에 띄지 않지만 수도 외성으로 가는 길은 그렇지 않네. 전하께서 돌아오기로 결정하셨다면 가능한 조용히 모셔야 하지 않겠나. 평소보다 많은 호위병력이 보이면 수도가 소란해질 걸세."

"그러다 습격이라도 있으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내가 가는 것 아닌가. 전하 한 분만 호위하면 될 일이니 그 정도면 충분하네."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한 아르센이 서둘러 왕궁 밖으로 나섰다.

- 다그닥, 다그닥!

오전에는 왕세자와 왕자들이 왕도를 달리더니, 오후에는 발칸과 엘라자르가 왕도를 달리는 것을 본 이들이 다시 놀란 얼굴을 했다. 때문에 그나마 적은 인원과 함께 오길 잘했다 여긴 아르센의 일행이 서둘러 세뉴강을 건너 외성으로 달려갔다. 외성문을 통과해 그대로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가 르메인을 기다렸다.

그렇게 어느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즈음.

- 우우웅······ 쿠궁.

작은 울림에 이어 땅이 잠시 진동했다. 그와 함께 이동 마법진이 밝게 빛나며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얼굴의, 에이프린 백작가의 인장이 박힌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의 사이에 서 있는 슬레이만과 로난시테, 그리고 가장 가운데에 선 르메인을 보게 되었다.

새 옷으로 팔에 감긴 붕대를 가린 르메인이 아르센을 발견하고 앞으로 걸어왔다.

"왕궁까지 모시겠습니다, 전하."

짧은 예를 취한 아르센이 인사말 대신 이런 말을 건넸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르메인이 말에 오르는 것을 본 뒤 자신의 말에 올라탄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외성 문만 안전히 지나가면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외성을 통과하면 가능한 빠르게 왕궁까지, 멈추지 않고 달리셔야 합니다."

"······ 그래. 그리하겠네."

"네. 전하."

대답을 마친 아르센이 일행들을 향해 손짓을 보냈다.

알아서 다가온 슬레이만이 르메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아르센이 데려온 나머지 기사들과 로난시테가 그 주변을 둘러쌌다. 그 뒤에 발칸의 마법사들이, 그리고 가장 뒤에 에이프린의 기사들이 전열을 맞추듯 길게 늘어서며 말에 올랐다.

준비를 마친 것을 안 슬레이만이 말을 출발시켰다.

이동 마법진의 방벽을 지나 외성 문을 향해 발을 달렸다. 빠르게 속도를 올린 말들의 발굽 소리가 어둠 속을 깊이 울렸다.

- 쿠구구궁······!

잠시 닫혔던 외성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을 보며 말을 달리던 아르센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우우웅!

슬레이만의 검 끝에 푸른 오러가 맺힌다.

찰나의 고민을 마친 아르센이 마법을 쏘아보냈다. 열리기 시작한 외성의 철문 앞에 두터운 얼음의 방벽을 만들었다.

보다 가까운 곳.

르메인의 일행보다 외성 문에서 더 가까운 곳.

그 거리에서 외성을 향해 달려드는 제온의 전사들을 본 까닭이다.

"성 문을 계속 열어라!"

일단 놈들이 외성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자신의 방벽으로 막아낸 아르센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에 마력을 응집했다.

어떻게든 르메인만 데려가면 되니까.

무조건 르메인만 데리고 왕궁에 돌아가면 되니까!

- 쩌저적, 쩌적!

서늘한 얼음의 길이 놈들을 향해 짓쳐들었다.

우르르 모여든 놈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거대한 싸움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때.

- 멈추거라.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 ······ 펄럭!

카이리시스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미 짙은 밤이었으나 다시 한 번 어둠이 내렸다.

아르센이 고개를 들었다.

르메인이 하늘을 바라봤다.

- ······ 다각.

르메인의 말이 발을 멈췄다.

내리지 말라 하였음에도, 르메인이 조용히 말에서 내렸다.

아르센은 그것을 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대한 날개.

거대한 몸집.

끝없이 펼쳐지는 방대한 마력. 숨막히는 피어.

그것을 보고 느끼게 된 까닭에.

- 방만히 침묵한 일을 속죄하겠노라 하더니, 교만의 끝을 모르고 참견하는구나.

대지를 품고 하늘을 떠받든 거대한 검은 용의 두 날개가 끝없이 펼쳐졌다. 귓가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으나 모두의 머릿속에 천둥같은 음성이 새겨졌다.

검은 날개에 빛무리가 어린다.

그것이 곧 카이리시스의 상공을 뒤덮었다.

온 하늘을 가린 채 카이리시스에 그림자를 드리운 태고의 고룡이 그렇게, 전설로부터 벗어나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날개에 어린 빛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스파니안의 거대한 날개 아래로 쏟아지듯 흘러내린 칠흑이 카이리시스의 외성 벽에 스몄다. 왕도의 바닥을 타고 뻗어나갔다. 세뉴강의 위를 연주하듯 흘러내렸다. 내성을 감싸안고 왕실 숲의 나무들을 어루만졌다. 광장의 두 조각상을 맴돌며 퍼져나가 거대한 왕궁을 둘러담았다.

천고를 살아온 이의 목소리가 다시 전해졌다.

- 물러나라. 나의 터를 네가 감히 침탈하였다.

온 카이리시스가 칠흑으로 빛났다.

그 빛에 잠겨든 모든 곳. 카이리스의 왕궁 뿐 아니라 카이리시스 전체가 자신의 '영토'였음을 시스파니안이 알렸다.

- 나의 이해를 과신하지 말라. 비아다누르.

그것은 곧, 다누를 향한 시스파니안의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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