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장. 얍 하면 슉 하고(3)
어두웠던 하늘 한 구석이 빛났다.
오전에 카이리시스의 왕도를 다급히 달려 수도를 빠져 나간 왕세자와 두 왕자에 대한 이야기로 여전히 떠들썩한 아스트리샤 거리. 저녁이 찾아온 시간이었음에도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아 계속 북적이던 곳의 하늘이 그렇게 빛을 냈다.
처음에는 그 빛에 신경을 쓰는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번쩍거림이 몇 번이고 이어지자 결국 거리의 카페들에 모여있던 이들이 하나 둘 창 밖을 살피기 시작했다.
"비가 오려나······."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앉아있던 자리에 새로운 차 네 잔을 가져다 내려놓던 건장한 카페 주인도 창 밖을 살폈다.
- 번쩍!
하늘이 다시 한 번 청보라빛을 냈다.
"내가 젊었을 때 세크리티아에 갔었는데 말야. 하늘이 파랗게 빛났어. 대체 이게 뭔가 싶어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갑자기 뭐가 내리더라고. 처음에는 눈인 줄 알고 반가워했는데 눈이 아닌 거야."
"그럼?"
"꼭 파란 반딧불같이, 빛 덩어리가 눈처럼 내리는데······."
"세렌티의 시간 말인가?"
"그래. 그거였어. 돌아와 보니 주변 사람들은 그게 뭔지 다들 알던데, 나는 듣도 보도 못했던 일이라 어찌나 신기하던지. 내가 다 경건해지더라니까."
"이 사람, 운이 좋군. 내 딸은 그것을 보겠다며 세크리티아에 두 번을 갔네. 그런데 가던 해마다 허탕을 쳤어."
"올 해에도 왔다 하던데. 올 해에는 안 갔나보지?"
"내 말이 그 말이네. 이번에는 일이 많아 가질 못했는데 하필 올해에 왔으니. 그래서 내년에 다시 가겠다며 떠날 날을 벼르고 있어."
네 잔의 차를 내려놓는 동안, 자리에 앉은 손님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어쩔 수 없이 손님들의 대화를 엿들은 셈이 되어 버린 카페 주인이 다시 한 번 창 밖을 내다보다 입을 열었다.
"따님께서 가신다 하면, 내년 말고 내후년으로 날을 정하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 말을 들은 손님들 중, 딸을 언급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대화에 끼어든 카페 주인에게 불쾌함을 드러낼 법도 했으나 오히려 반색하는 얼굴이 되어 물었다. 초면도 아니었고 어느 정도 친분이 생겨 있던 까닭이다.
"그것을 미리 알 수가 있나? 예측이 불가능하다 하던데."
"아, 네. 그렇기는 한데······ 저희 누님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나 봅니다. 어차피 올 지 오지 않을 지 모르는 일이라면, 이왕 가는 것 그런 말이나마 나오는 해에 가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자네 누님이라면. 제이아 경 말인가?"
"달리 또 있겠습니까."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카페 주인, 스칼렛을 보던 여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 하라 전해줘 보겠네. 믿고 가든 그냥 내년에 가든 그 놈이 알아서 할 일이겠네만."
만약 그 이야기가, '미래를 살다 죽어 과거로 되돌아 온 동생 놈이 말해준 것을 기억하던 왕세자가 세렌티의 시간이 보고 싶다 하는 사단장을 위해 슬쩍 언질해 준 최고급 정보'임을 알았다면 이 정도로 미적지근한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다만 그런 사실을 손님도 스칼렛도 알 리가 없었으니 그 최고급 정보가 한낱 '카더라' 정도로 취급되는 중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여보인 스칼렛이 쟁반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창 밖을 쳐다봤다.
- 번쩍!
또, 같은 빛이 하늘을 비췄다.
소리없는 한숨을 쉰 스칼렛이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하늘을 밝히는 저 빛과 참 닮은 색의 전기를 만들어내는 누나가 떠오른 까닭이다.
"비 오면 다리 쑤실 텐데······ 저녁은 먹었나 모르겠네."
잠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스칼렛이 주방 안을 분주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달그락, 달그락!
생각이 난 김에, 실전같은 훈련 중에 허벅지를 다쳤다던 누나에게 샌드위치나 만들어다 가져다 주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서.
* * *
스무 명.
스무 명의 마법사가 동원되었다.
- 파지직, 파직!
- 우웅!
맑은 하늘에 구름이 모여들었다.
강제로 모여든 구름이 검게 물들었다. 그 사이로 청보랏빛이 비춰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기다리며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지나치리만치 길게 느껴졌다.
"니들렌."
때문에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추스른 이가 옆에 선 다른 사단장을 불렀다. 저 멀리서 몰려오는 놈들과, 굳게 다잡은 검을 들고 놈들을 견제 중인 발칸의 대원들을 한 번씩 바라보면서.
제온의 놈들이 계속 다가온다.
백 걸음 남짓에서 오십 걸음 남짓까지. 그러다 이제는 고작 서른 걸음 정도의 거리까지로 가까워졌을 때.
"됐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니들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들렌을 불렀던 또 한 명의 사단장, 라즈 이베카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긴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실드를 펼쳐라!"
평소 꽤나 조용조용한 성격이라 기사들 중에서는 플란츠의 말을 가장 잘 알아듣는 라즈의 입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중간 중간에 선 대원들에게 지급된 소리 증폭용 마법 도구에서 똑같은 명령이 동시에 흘러나와 모든 대원에게 전해졌다.
- 우우웅!
- 우웅!
그와 함께 거대한 실드들이 발칸의 앞을 보호하듯 둘러쌌다.
그래.
저 실드를 두르는 것에만 스무 명의 마법사들이 동원되었다. 무려 스무 명이 만들어 낸 견고한 실드가 일순간에 펼쳐져 모두의 앞을 빠짐없이 막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니들렌이, 곁에 서 있던 다른 세 명의 마법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끄덕.
집중한 얼굴로 니들렌만을 바라보던 이들이 고개를 움직였다. 그와 함께, 니들렌을 포함한 네 명의 마법사들이 이제껏 있는대로 끌어모았던 마력을 터뜨리듯 풀어냈다.
- ······ 우르릉.
하늘이 울었다.
- 쿠궁······ 쿠구궁······!
모여든 구름 사이로 계속하여 빛이 번쩍였다.
- 쩌저적!
- 쩌적, 쩌저적!
강한 완력으로 장작을 찢어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저 소리를, 어린 시절의 스칼렛은 유난히도 무서워했었다. 하늘이 갈라지고 구름이 찢어져나가는 그 소리가 무섭다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베개 밑에 숨어있던 스칼렛을 토닥이던 기억이 난다.
- 쿠궁, 쿠구구궁······!
하늘이 울었다. 진동했다.
그리고.
- 콰아앙!
최초의 번개가 땅으로 내리꽂혔다.
- 콰앙, 콰아앙!
- 쿠르르릉······ 콰앙! 쾅!
- ······ 쿠구궁, 콰아앙!
두 번째, 세 번째.
셀 수 없이 많은 번개들이 대지를 향했다.
정확히는, 그 대지 위를 가득 메운 적들을 향했다. 제온에서 찾아 든 사백여 명의 불청객을 향해 거리낌없이 떨어져내렸다.
- 파지직! 파직!
왕실 숲의 바닥에 흥건한 물을 타고 전류가 흘렀다.
거침없이 내리꽂힌 번개의 힘이, 번개의 범위를 벗어난 전사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것을 밟은 이들의 몸을 타고 올라가 놈들의 몸 속을 태웠다.
'번개는, 부군단장님.'
'협회장이 이중 속성이라 가능하다는 거잖아. 그것도.'
'네. 맞습니다.'
'자꾸 혼자서 만드는 것만 생각하지.'
'마력을 융합했던 것처럼 해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발칸에 마법사만 오백 명이 넘는데. 다 각자 싸우려는 생각 좀 버리면 안 되나. 군대잖아.'
에우리아의 번개.
그것을 만들어냈다. 니들렌이 전기를, 나머지 세 마법사가 물을. 에우리아가 홀로 만들어내는 마법을 네 명의 마법사가 구현해냈다.
끊임없이 내리꽂히는 번개의 힘에서 아군을 보호하는 방어막이 끝없이 번쩍였다. 부분 부분이 일순간 점멸하다 다시 강고히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두터운 막 너머로, 검게 타버린 이들이 하나 둘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다음!"
십 수 번을 내리친 번개가 사그라들 때 쯤.
다음 명령을 내리는 라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화르륵!
- 파직, 파지직!
진작부터 준비하고 있던 마법사들의 손에 제각기 다른 힘을 지닌 구체들이 만들어졌다. 얼마 전 칼리안을 상대로 썼던 것처럼, 완전히 다른 속성의 마법사들이 세 명씩 모여 각자의 힘이 담긴 구체를 만들어냈다.
"실드 해제해!"
- 파앗!
마법의 진행 정도를 확인하던 니들렌이 외쳤고 동시에 모두를 감싸던 실드가 사라졌다. 그러자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적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발칸의 대원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을 처리하고자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대신.
- 쌔애애액!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화염이, 얼음이, 번개와 바람이, 땅의 조각이, 제각각의 힘을 담은 채 제온의 군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니들렌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실드!"
- 우우웅!
이상을 확인한 놈들이 산개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눈으로 좇던 마법사들이 제가 보낸 마력의 구체를 놈들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곁에 있던 다른 마법사들의 구체에 자신의 것을 밀어넣었다.
얼음과 불이 모인 구체에 또 하나가 더.
전기와 물이 모인 구체에 또 하나가 더.
꾸역 꾸역, 강제로 그렇게 속성 다른 마법을 쑤셔넣듯 일체시켰다.
강제로 모여든 힘이 서로를 잠식하려 크기를 부풀린다. 그러나 그 힘의 크기가 똑같다. 어느 것도 우세하지 않은 균등한 마력을 가졌다. 그럼에도 다른 마력을 제 것으로 받아들일 생각 없다는 듯 계속하여 힘 싸움을 이어나간다.
- ······ 쿠구궁.
불안한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위에 놓인 것들을 확인한 제온의 마법사들이 붉은 실드를 만들어 군사들을 보호했다.
"충격에 대비한다."
실드가 해체되고 마력의 구체가 날아들고 다시 실드가 펼쳐지기까지, 머리 위의 마력탄이 하나로 합쳐지기까지, 서로를 물어뜯다 고요한 울림을 내기까지.
고작 숨 한 번을 길게 내쉴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고작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 깜빡!
니들렌이 눈을 깜빡였다.
라즈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 ······ 콰아아앙!
- 콰앙, 콰아앙!
완전히 똑같은 마력, 완전히 똑같은 크기와 속도.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숱하게 고생을 해 왔던 마법사들의 눈 앞에서, 그 노력의 성과가 거대하게 폭발했다.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공기를 빨아들이고 빛을 내다 결국은 제 주변의 것들을 휩쓸어나갔다.
- 콰아아앙! 콰아앙!
숲의 한가운데.
아무것도 없던 곳에 모습을 드러냈던 제온의 군사들이 그렇게 폭발의 힘에 밀려나고 몸이 찢겼다.
- 쿠구궁······ 콰앙!
그 어떤 화염구로도, 어떤 마력탄으로도 만들어내지 못할 거대한 소용돌이를 맨 몸으로 맞았다.
놈들의 몸이 붉게 변했다.
타오르던 몸에 새로운 살갗이 생겨났다. 깊이 패인 상처 속에 살이 차오른다. 관통된 상처가 채워지고 아문다.
제온의 중간에 선 대사막의 전사 한 명이 소리를 높였다.
번개 속에서, 거대한 폭발 속에서 살아남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산개했던 놈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었다.
그것을 지켜볼 이유가 없던 라즈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다음."
마법사들이 실드를 거뒀다.
대신 기사들의 방패 뒤에 선 채 마력을 모았다.
- 화르륵!
- 쩌적, 쩌저적!
상대를 가리지 않는 번개, 그리고 폭발이 이어지는 난전이었다. 그 사이에서 전력을 가다듬고자 목청을 높이던 적들을 주시하던 마법사 오십 명이 일제히 마력을 방출했다.
- 쐐애애액······!
- 쌔애액! 쌔액!
난전의 가운데 한 번이라도 입을 열었던 놈들을 최우선적으로 공격 대상에 넣었다. 그렇게 날아간 세 번째 공격이 놈들의 '머리'노릇을 하던 이들의 머리에 내리꽂힌다.
방금 전까지 제온의 군사들을 모아 앞으로 달려들던 전사의 머리와 심장에 네 개의 얼음 화살과 다섯 개의 전기 쐐기가 내리꽂혔다.
- 털썩!
피할 틈 없이 그것들을 모두 맞은 놈이 축축이 젖은 대지 위를 힘없이 나뒹굴었다.
- 쌔애액!
- 콰직!
번개에 타오른 몸을 회복시키고 폭발에 뜯겨나간 상처를 재생시켜가며 전열을 정비하던 놈들이 일순간에 생명을 잃고 내동댕이쳐졌다.
- 쉬익!
- ······ 서걱!
제온의 군사들이 발을 멈췄다.
앞서 나가면 죽는다. 입을 열면 죽는다. 마법을 부리면 죽는다. 텐실 출신의 치유사임을 들키면, 반드시 죽는다.
'앨런 마나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앨런 마나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슈린츠에 보낸 놈들이나 되돌려 카이리시스 쪽에 합류하라 하십시오.'
사백이었다.
사백을 위한 숲의 길이 열렸다.
슈린츠 쪽으로 발칸의 눈을 돌려놓은 제온의 군사들이 카이리시스의 왕실 숲으로 향했다.
'어차피 카이리스 놈들은 외성을 살피고 브리센을 경계하느라 여념이 없을 겁니다. 중간에서 치고 나오리라 생각지 못할 테니, 마음 놓으십시오.'
아무런 예고 없이 이 거대한 왕국 수도의 심장부에 들이닥쳤다. 무려 사백 명이.
그랬으니, 패닉에 빠져 도망하기 바쁜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게 되리라 여겼다. 외성의 수비 병령을 서둘러 되돌리고 왕궁에서 뛰쳐나오는 발칸의 다급한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게 숲의 한 곳으로 '문'을 열고 나와 전열을 가다듬었다. 각자 목표했던 방향으로 흩어지고자 했다. 그런데 발칸의 기사와 마법사 백 명을 만났다.
'후퇴한다!'
제온의 사백을 앞둔 발칸의 백 명이 슬금슬금 후퇴하기 시작했다.
'쫓아라!'
발칸의 놈들이 왜 왕실 숲에 있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죽일 놈들이 아니던가. 때문에 쫓았다.
백 대 사백.
일방적인 싸움이 되리라 여겼다. 그러나.
'반전! 포위하라!'
그들이 생각한 바와 다른 방향의 일방적인 싸움으로 번져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발칸의 기사 육백 명에게 완전히 포위된 채였고, 백 명의 마법사들이 자신들을 향해 피어를 흘려내고 있었다.
'정보가 새어나갔다. 그렇지 않고서야 카이리스 놈들이 기다렸다는 듯 이 곳을 포위했을 리 없다.'
'새어나갔든 말든.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해. 어떻게 할 거야? 후퇴해?'
'사백 대 칠백. 그 정도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 저 놈들 사이에는 소드마스터도 없고 그 대마법사도 없지 않나.'
'그 대마법사 정말 못 오는 것 맞아?'
'틀림없다. 승리하는 것은 우리다.'
'알았어.'
승산이 있다 여겼다. 마법사들을 앞세우고 검을 들었다.
그런데 벼락이 떨어졌다.
놈들의 마법사 협회장은 분명 슈린츠에 있었음에도.
"다음!"
한 번도 보지 못한 대규모의 폭발이 이어졌다. 제온의 수뇌부를 향한 일제 사격이 이어졌다.
흩어진 제온의 전사들을 포위한, 칼리안마저 감탄하게 했던 기사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모여든 제온의 마법사들을 향한, 칼리안마저 발을 물리게 했던 집중포화가 이어졌다.
"생포할 필요 없다. 살려 둘 필요 없다!"
그러니 그것은 일방적인 싸움이 맞았다.
"한 놈도 빠져나가게 두지 마라!"
제온을 상대로 한 발칸의 일방적인 몰이사냥이었다.
* * *
- 왕실 숲 쪽은 빠짐없이 지켜내고 있습니다.
- 그럼 왕궁은요, 스승님.
- 왕궁에도 발칸이 남았습니다. 아르피아 궁과 헤이시아 궁의 터를 지키고 서 있습니다.
- 스승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 지금 왕궁 북쪽 숲에 와 있습니다. 놈들이 이 곳으로 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시스파니안의 보호 마법은 워낙 거창하게 펼쳐진다 하니, 제가 제 것을 둘러둘까 하여 왔습니다.
- 헤르츠 경이라도 데리고 가시지 그러셨습니까.
- 귀찮고 시끄럽기만 한 놈은 되었습니다. 보호 마법이 둘러지면 이 밖으로는 마법이 새어나가지 않습니다. 통신도 중단이 될 터이니 늙은이 대답 없다 걱정 말고, 산 속이라 날도 아직 추울 텐데 밤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몸도 성치 않으면서 밤새 기다리지 말고. 슈린츠에 가자마자 한숨 푹 주무십시오. 다 잠잠해지면 다시 연락을 드릴 터이니.
- ······ 맨날 제 걱정만 하십니까.
- 맨날 아들 걱정 하는 것 말고 아비가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알겠다는 말로 대화를 마친 뒤 고개를 돌렸다.
"제온이 숲의 길을 이용한다 합니다."
칼리안의 말을 곧바로 이해한 것은 플란츠 뿐이었다.
"다누가 개입했나."
"네.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가 개입했습니다. 이 쪽에서 철수하여 전부 다 카이리시스로 몰려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습격이 없었던 겁니다."
플란츠에게 짧게 대답한 칼리안이 르메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르메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다누가 숲의 길을 열었으며, 그곳을 통해 카이리시스의 왕실 숲으로 침입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렸다. 제온이라는 이름의 불분명 단체에 온갖 나라 출신의 마법사와 검사, 심지어 치유사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카이리스보다 몇 배는 큰 대사막의 전사들도 제온에 소속되어 있다 설명했다.
"그 제온이 카이리시스를 습격한 겁니다."
"놈들이 그런 일을 벌이도록 엘프들이 도왔다는 말이더냐."
"적어도 그들의 어머니 나무가 도운 것은 확실합니다. 그것이 선의인지 악의인지, 자의인지 타의인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만. 다누가 끼어드는 동안 시스파니안은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왕궁의 북쪽 숲이 안전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르메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전하께서는 별궁에 계셔야 합니다. 형님들도 별궁으로 가셔야 합니다. 만에 하나 놈들이 왕궁을 장악한다면 전하께서는 곧바로 슈린츠를 수도로 천명하시고 슈린츠의 별궁을 왕궁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그 후 카이리시스를 탈환해야 합니다. 그러니 만일을 대비해 별궁으로 가십시오, 전하."
"무엇을 노리고."
슬레이만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 많은 수를 이 쪽으로 보냈다면 이곳의 모두는 살아있지 못할 텐데. 무엇하러 굳이 이 쪽을 치려다 왕궁으로 돌아갔다 합니까."
- 톡, 톡, 톡.
대답 대신 칼리안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놈들은 칼리안의 상태를 모른다.
그러니 왕위를 노려 칼리안을 위험에 빠뜨릴 심산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차라리 그 사백을 슈린츠로 몰아넣고 칼리안을 죽이는 것이 낫다. 르메인도, 슬레이만도, 놈들의 최우선 목표가 아니다. 마찬가지 이유다. 그 사백이 이곳으로 왔다면 슬레이만의 말마따나 이미 진작에 다 죽었을 테니까.
왕궁을 습격한다.
르메인이 수도를 옮기고 몸을 피한다.
허나 이것은 이 쪽의 사정이다. 놈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놈들의 진짜 목적. 그것은.
- 톡, 톡······ 톡.
처음 이곳에 칼리안이 찾아 온 이유를 생각했다.
앨런을 대신해 칼리안이 온 이유를 떠올렸다.
놈들은 칼리안 자신보다는 앨런이 이 쪽으로 오리라 여겼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런 앨런을 공격할 수단을 지녔으리라 여겼다.
"칼리안."
"네."
"무슨 생각 하는데."
- 톡······ 톡. 톡.
그래서 칼리안이 왔다.
가장 안전한 왕궁에 앨런을 두고······ 칼리안이 왔다.
왕궁에는 발칸이, 시스파니안의 보호 마법이 있으니까.
"······ 칼리안."
- 톡.
- 톡. 톡.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이 위험합니다."
- ······ 톡.
앨런을 불러내지 못한다면.
앨런을 홀로 남겨두면 되는 것 아닌가.
발칸을 밖으로 꺼내두고, 시스파니안의 보호 마법을 구동하지 못할 상황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다누······ 가 싫어하는 것이. 형님 뿐만은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 날의 플란츠였고, 그 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도운 것은 앨런이었다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만약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다누는 지금 두 번째 원망을 쏟는 중일 지도 모른다.
다누를 찾아간 앨런과 아델리아의 싸움을 시스파니안이 말렸던 이유는 어쩌면, 다누를 돕기 위함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 다누로부터 앨런을 살려 돌려보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 드르륵!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안의 속내인 듯, 크게 긁힌 쇳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저벅 저벅. 다급히 발을 옮긴 칼리안이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플란츠가 급히 따라나왔다.
발소리가 사라진 걸음이 빠르게 이어졌다.
여전한 피 냄새가 뭉클 풍겨나온다.
"칼리안."
"전하와 란델 형님 모시고 슈린츠로 가 계세요. 지그프리드 공도 꼭 옆에 두세요."
"칼리안."
"에일라에게 준 반지, 가지고 계십시오. 연락 드리겠습니다."
- 화악!
플란츠가 칼리안의 팔을 잡아챘다.
이미 미쳐있는 놈이 반 쯤 더 돌아버린 눈을 한 채 플란츠를 쳐다봤다.
"대답. 칼리안."
"······ 네."
그 이름을 다시 불러세웠다.
"여기 있어."
"스승님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직접 가야 합니다."
"있으라고 했잖아."
"다누는 저 못 죽입니다. 제가 가서 막아야 다누가 물러납니다."
"다누 짓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해, 전부 다 추측인데."
"혹시 모르잖습니까.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어떡합니까."
"칼리안."
"아무 일이 없으려면 제가 가야 합니다."
"이동 마법진 또 쓰면. 죽어."
"안 죽습니다."
"고집 부리지, 또."
"형님."
"가지 말라고."
"그럼 스승님은요."
제 아버지는요.
하고.
칼리안이 물었다.
* * *
왕궁 북쪽의 숲.
그곳을 둘러싼 거대한 장막이 시간의 흐름까지 막아 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지 않고서야.
······ 어떻게.
"아버지."
감청색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넘실넘실 휘날렸다.
앨런의 것과 똑같은 은회색 눈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 모습, 아들 로닐의 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아버지."
그 말을 들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 때처럼, 그 날처럼.
로닐을 잃었던 바로 그날처럼.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이번에도. 그때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날처럼.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것이 가짜임을 알면서도.
아무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받으세요."
거짓인 그가, 가짜인 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버지."
그 한 마디가 그토록 사무쳐서.
거짓임을 알았고 가짜임을 알았으나, 내미는 손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이번에는 저 말고, 아버지가 받으세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로닐'이 웃었다.
제 손에 들린 것을 앨런의 손 위로 가져왔다.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앨런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봤다. '로닐'이 건네는 것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 콰각!
그런데 그때.
두터운 보호막에 균열이 생겼다.
앨런이 만들어 두었던, 세상과 왕궁의 숲을 가로막았던 깊은 벽에 금이 갔다.
- 콰가각!
다시 한 번 더, 충격이 전해졌다.
앨런이 고개를 돌렸다. '로닐'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앨런의 보호막이 길게 갈라졌다. 그 사이로.
- 부우웅!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앨런이 그것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날아든 무언가가 손에 들린 것을 휘둘렀다.
- 서걱!
앨런이 제 손으로 만들어내지 못할 소리가 났다. 앨런에게 내밀던 '로닐'의 손, 그 손목에 걸려있던 것이 잘려나갔다.
'로닐'의 감청색 머리가 서서히 붉은 빛으로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긴 머리가 서서히 짧아지는 것이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가 서서히 바뀌는 것이 보였다. 긴 손가락이 서서히 뭉툭하게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더는 로닐이 아닌 이로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 채앵!
'로닐이 아니게 된 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품 속의 단검을 뽑아들었다.
날아든 무언가가, 날아든 누군가가, 손에 들린 것을 다시 휘둘렀다. '로닐이 아닌 이'가 보내는 검을 되받아쳤다. 그의 단검이 멀리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날아들었던 누군가가 제 손의 검을 강하게 내리그었다.
- 부우웅!
- 콰악!
'로닐이 아니게 된 이'의 어깨가 함몰되었다.
그 검이 어깨를 함몰시킨 뒤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려갔다. 앨런의 보호막을 지나 들이닥친 이가 제 손의 검에서 힘을 빼지 않은 까닭에. 계속하여 검을 내리그은 까닭에.
- ······ 콰직!
결국은 '로닐이 아닌 이'의 심장을 갈라놓은 뒤에야 그 검이 멈췄다.
그렇게 멈춘 검이 뽑혀 나왔다.
그 검을 쥔 이가 제 검에 어려있던 '로닐이 아닌 이'의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더는 '로닐'일 수 없을 이의 시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앨런의 은회색 눈을, 자신의 청회색 눈으로 들여다봤다.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앨런을 불러냈다.
"마나실 후작님."
여전히 내밀고 있던 제 손을 꽉 말아 쥔 앨런이 긴 한숨을 쉬었다. 깊이 떨려오는 주먹을 더욱 다잡은 채로 자신을 찾은 이를 마주 쳐다봤다. 길고 긴 한숨이 다시 이어졌다.
"······ 그리운 것을 보셨습니까."
앨런의 앞에서 같은 얼굴의 아들을 두 번 없애는 일이 없도록, 굳이 그렇게 '로닐'을 '로닐이 아닌 이'로 바꾸어 둔 뒤에야 검을 놀렸던 이가 이렇게 물어왔다.
"그래······ 내가 잠시. 그런 것을 보았네."
참담함에 가라앉은 앨런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조심스레 바라보던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 힘을 다해 대마법사의 보호막에 작은 틈을 낸 시오나 힐을 뒤에 둔 채로, 시오나가 만든 틈 사이로 날아든 이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순간 반드시 말해주어야 할 것을 입에 올렸다.
"마나실 후작님의 둘째 아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칼리안이 걱정한다고.
드미레아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