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장. 얍 하면 슉 하고(2)
칼리안 가라사대.
나처럼 안 생긴 놈이 나처럼 살면 혼난다.
그말인즉슨.
"다친 데는."
"팔이요. 부러졌습니다."
"말고."
"손목도 좀 부었고요."
"말고."
"아까 떨어지다 살짝 베인 거······?"
칼리안처럼 생긴 칼리안은 안 혼났다는 소리다.
걱정인지 추궁인지 모를 말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다리를 끊어먹은 일로 혼나는 것은 아니니까.
"크게 다친 곳 없어요. 괜찮습니다, 형님."
아무튼 이렇게, 어디 한 군데 혼낼 구석이라곤 찾을 길 없이 참 어여쁘고 곱디곱기만 한 미모 덕에 오늘도 혼날 일 하나를 줄였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칼리안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신이 가물거리던 와중에도 내가 바로 네 동생이라 말하는 바람에 화 낼 틈을 놓치게 해버린 원수같은 망할 미친 동생 놈의 태평한 대답을 듣던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숨긴 것. 말하라고. 피냄새 나잖아."
"체스 할 정신은 못 됩니다. 아파서."
"너."
"이기시면 말씀드린다 했잖습니까. 그러니까 왕궁에 돌아가면 놀아드릴게요. 이기시면, 말씀도 드리겠습니다."
플란츠의 진면목을 보기 전까지는 제 고집이 대륙 최고인 줄 알고 살아왔던 칼리안이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그 전까지는 숨길 겁니다."
"왜."
"괜히 걱정만 더 하실 것 뻔한데,"
"서클에 미처 담기지 못해 마력과 일체되지 않은 오러가 쌓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성이 서로 달라진 오러들이 왕자님의 몸 속에서 계속하여 충돌을 일으키는 중입니다. 서클을 더 늘리거나 해결 방법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계속하여 내상이 생길 것이라 합니다."
"······ 키리에."
칼리안의 검은 재킷을 조심스레 벗긴 뒤 와인색 셔츠의 오른쪽 소매를 걷어올리던 키리에가, 칼리안의 제지를 듣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평시에는 축복의 힘이 있으니 큰 문제가 없습니다만, 오러를 운용하게 되면 내상을 입는 정도가 더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제 무리하여 내상이 생긴 채로 이동 마법진을 쓰게 된 데다 싸움에까지 나선 탓에 이런 상황이 된 겁니다."
"키리에. 얘기하지 말라 했었는데, 내가."
"죄송합니다만, 왕자님. 저는 왕자님의 명령보다 왕자님의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키리에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칼리안이 다리를 끊어내는 짓만 안 했어도 계속 함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차라리 누구에게든 상황을 알리고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낫겠다 여겼다.
칼리안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키리에.'
'네, 왕제님.'
'본궁 말고 첨탑 지하에도 비상 출구가 있어. 오른쪽 열 네 번째 마법등불 아래, 세렌티를 새겨 둔 벽 조각을 눌러. 계단이 나올 텐데, 자세히 보면 계단 우측 벽에 숨겨진 문이 있어. 계단만 보고 내려가면 나락에 갇히니까 내려가지 말고 벽 문을 열고 통로로 가.'
'······ 그것을 왜 저에게 알려주십니까.'
'거기로 가. 세크레타 외부 숲으로 이어질 거야. 출구 오른쪽 바위 아래를 파 보면 금화가 든 주머니가 있어. 잊지 말고 다 가져가.'
'왕제님.'
'도망 가, 키리에. 가서 살아. 검의 길에도 올라보고 다른 놈들도 가르쳐 보고 이곳 저곳 구경을 다니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 무엇을 하든 좋으니, 살아. 키리에.'
'싫습니다.'
'부탁하는 것 아니야. 명령하는 거야.'
'부탁이든 명령이든 상관없습니다. 안 듣겠습니다.'
'키리에.'
'저는 왕제님의 명령 말고 왕제님을 지키려고 기사가 됐습니다. 모르셨습니까.'
······ 그 때나 지금이나.
말을 잘 듣다가도 제멋대로 어기는 건 그대로다.
조용히 입을 다문 칼리안에게서 눈을 뗀 키리에가 칼리안의 팔을 살폈다. 사실 오랫동안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부러진 뼈가 어긋난 탓에 손목과 팔꿈치 사이가 툭 불거져 있었으니까.
그것을 잠시 보던 키리에가, 두 손으로 칼리안의 손목 위와 팔꿈치 아래를 강하게 붙들어 잡았다.
그리고 팔을 늘리듯 반대로 잡아당기며 힘을 주었다.
한 마디의 예고도 없이.
- 으드득!
부러져 어긋난 팔의 뼈를 제자리로 맞추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멈췄던 칼리안이 제 팔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플란츠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는 칼리안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눈꼬리를 찌푸렸다. 골절 없이 탈골만 되었던 자신의 팔을 키리에가 맞춰주었을 때 어땠는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 으득! 까드득!
"지금 상황에서 축복의 힘까지 사라지면 왕자님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저하."
키리에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제 손으로 만들어내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온전히 들으면서. 잠시 멈췄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작은 숨소리를 오롯이 들으면서.
- 우드득!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간신히 제자리를 찾은 가느다란 팔을 내려다보던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도 찡그리지 않았으나 창백하게 질린 낯빛까지는 숨기지 못한 칼리안을 보다 플란츠에게로 눈을 돌렸다.
"저하께서 그 사실을 아시게 되면······ 이런 상황에 혹시라도 왕세자 직위를 내려놓겠다 하실까봐 왕궁에 무사히 돌아가기 전까지는 말씀을 못 드린다 하는 겁니다."
누군가 아르피아 궁에 들어 왕좌에 앉아 카이리스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고하는 순간, 르메인과 그 자식들에게 내려졌던 축복이 거두어진다. 왕위를 찬탈한 이의 몸 속에 시스파니안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그 자에게 새로운 축복이 내려지겠으나 만약 아니라면 축복의 힘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르메인이 사망할 때.
세자위에 오른 자식이 없다면 새로운 왕이 결정되어 왕좌에 앉을 때까지는 축복의 힘이 유지되겠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왕위를 이을 이가 정해져있지 않나. 그러니 르메인이 사망하는 즉시 란델과 칼리안에게 주어진 축복의 힘이 거두어질 터였다. 플란츠의 자리를 찬탈해 그 왕좌에 앉지 않는 이상, 축복의 힘을 다시 지닐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변고가 생길까봐 세자위를 미리 내려놓으실 생각은 말아주십시오. 걱정하고 해결 방법을 같이 고민해주시는 것만 부탁드립니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속을 죄 들어갔다 나온 듯한 키리에의 말이 끝났다.
뼈를 맞춰 준 것에 고마워해야 할지, 숨긴 것을 싹 풀어놓은 것을 나무라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칼리안을 내버려 둔 키리에가 자리를 벗어났다. 부목으로 삼을 만한 것을 찾아오기 위해서였다.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님 대신 키리에한테 혼났네요."
"언제부터."
"아플 거라고 말도 안하고 제 뼈 맞추기 시작한 때부터요."
"말고."
"······ 정확히는 모릅니다. 발칸 상대로 싸우느라 두 오러를 다 꺼내보기 전까지는 저도 몰랐던 것이라서."
"그럼 그 푸른 오러가."
"네. 그 푸른 오러가 새로 쌓이고 있는 순수한 오러입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사용하는 것은 붉은빛이었고요."
붉은빛.
그 돌의 힘 역시 붉은빛이다.
우연이라 하나 기이한 일이다.
앨런은 7서클이 되어 속성의 속박이 사라지기 전까지 불을 주종으로 다뤘다. 때문에 앨런의 마력은 붉은빛이다. 에우리아와 니들렌, 아르센, 그리고 플란츠 자신의 마력도 마찬가지. 주종이 지닌 고유한 빛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칼리안은 아니었다. 마력과 섞인 오러의 색이 붉었다. 숲에서 앨런과 싸움을 벌이며 오러와 마력을 완전히 일체시키기 전까지는 투명한 빛이었다 하였음에도.
그것이 마법의 주종 때문도, 저 돌의 영향도 아니라면.
칼리안의 오러는 왜 붉은빛인지.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온전한 마력도 아니고 온전한 오러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예외적인 색이 나는 것이 아닐까. 그 정도로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의문을 가지자마자 떠오르는 생각들, 언젠가 칼리안이 했던 이야기, 오늘 보게 된 란델의 기운, 제온의 일당들이 쓰는 오러의 빛까지.
'빨간색이었으면 좋겠어요.'
기억 속에서 붉은빛과 연관된 모든 것들을 일순간에 떠올려내는 머리를 진정시킨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안 쌓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레이 브리센 후작처럼 되기 전에는요."
단전을 없애버리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섞인 힘이 불안정하다면. 더 좋은 것 아닌가.'
붉은빛을 치워낸 머릿속에, 이번에는 언젠가 발칸의 마법사들에게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더 좋다니.
아무것도 모르고 그 따위 말을 했었다.
"카스트린 경이 스승님과 함께 확인을 해 주실 테고, 세이렌 경에게도 물어 볼 생각이고요. 안되더라도 마음 먹고 수련하면 5서클 정도는 문제없이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알았어."
"뭘요."
"걱정만 한다고. 세자위 안 내려놓고."
"걱정은 해주실 겁니까."
"해."
"네."
생글거리며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몰골이 어떤지는 알면서 저러는지.
짜증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클린]
이제 딱 두 번째로 써 보는 마법이다. 루시와 안네가 무럭무럭 뿜어대는 털을 보면서도 안 쓰고 꾹 참았던 것을 다시 썼다.
얼굴의 핏자국부터 검은 옷에 얼룩진 흙먼지까지 싹 지워진 것을 안 칼리안이, 파리한 낯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법 잘 쓰시네요."
"안 썼어."
"클린인데요."
"아니야."
"다시 봐도 클린 맞는데."
"반말."
"이럴 때만."
"또."
끝내 한 글자를 빼먹은 칼리안이 긴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안도하여 찾아드는 졸음을 맞이한 크고 붉은 눈이 조금씩 오래도록 감겼다 올라오기 시작했을 즈음.
- 저벅, 저벅.
바위를 밟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적당한 나무조각 하나를 들고 오는 키리에였다.
플란츠가 칼리안의 팔 아래에 부목을 받쳐 든 사이, 칼리안의 주머니 속에서 붕대를 꺼낸 키리에가 조심스레 팔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잘 하네, 키리에."
"여러 번 해 봤습니다만. 저보다는 히나가 더 잘 합니다."
뼈를 맞출 줄 아는 것도, 능숙하게 붕대를 감는 것도, 왕궁에 오기 전까지 편안하게 살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들 뿐이라 마음이 쓰인다. 히나가 바느질을 잘 하는 것마저도.
칼리안이 왼손을 들어 키리에의 물색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자주 그래왔듯, 저보다 한참 어린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더 잘하게 될 일 없도록 할게."
붕대를 매듭짓던 키리에의 손이 잠시 멈췄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 알겠습니다."
다른 말을 더 덧붙이지 않고 대답한 키리에가 칼리안을 부축했다. 그리고 플란츠의 등에 칼리안을 업혔다.
덕분에 칼리안은 못 봤다.
너 새 부하한테 내가 시든다는 둥 짖기까지 했었으면서 왜 쟤한테만 걱정시켜 미안하다 하고 나한테는 안 하느냐는 불만이 가득 찬 완두콩의 무표정한 얼굴을 말이다.
"지난 번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형님 등은 딱딱하기만 하고 좀 불편하네요. 키리에 등은 딱딱하긴 해도 되게 편한데."
그랬으니 이딴 말을 할 수 있겠지.
"내려. 싫으면. 짖지 말고."
"아닙니다. 조용히 할게요."
얌전히 대답한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단잠에 빠져들었다.
딱딱하기만 하고 좀 불편한 형의 등에 온전히 기댄 채로.
* * *
- 왕자님 무사히 모셨습니다.
- 그런가 보네. 우리도 산에서 내려가고 있어요.
- 습격은 더 없었습니까.
- 없어요. 아직은.
- 알겠습니다.
- 중간에서 만날까요, 아니면 말 묶어뒀던 데서 만날까요?
- 말이 있는 곳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 산길 낯설 텐데 찾아올 수 있어요? 왕자님 계시니 괜찮나.
- 제가 찾아갈 수 있습니다.
- 알았어요. 다른 일 있으면 얘기해줘요. 나도 그럴 테니까.
- 네.
칼리안의 팔찌를 통해 에일라와의 대화를 마친 키리에가 계속 발을 옮겼다. 뒤따르는 플란츠와 거리가 벌어지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해가며 걸어갔다.
별달리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말 많은 사람이 잠에 빠져들고 나니, 세상에서 제일 말 적은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갈 수가 없던 것이다.
"앞에."
그러던 중 플란츠로부터 이런 말이 전해졌다.
발을 멈춘 키리에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어린 아이 손바닥같이 생기고 줄기가 검은 풀. 건드리면 안 된다고 들었는데."
키리에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플란츠가 이야기한 곳을 봤다. 플란츠가 이야기한 바와 같은 모양의 풀이 길게 나 있는 것이 보였다.
'독이 있다 할 것 까지는 아닙니다만. 잘못 닿으면 피부가 따갑고 염증이 생깁니다.'
언젠가 칼리안이 알려주었던 것을 떠올려 전해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키리에가 풀더미를 멀리 돌아 다시 발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입을 열었다.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안 힘들어."
대륙에서 가장 질 좋은 천과 보석으로 만든 망토나 두르라고 있는 등에 길다란 동생 놈을 두르고 있었다. 칼리안이 아무리 가볍고 또 가는 길이 내리막길이라 한들 힘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 날아올 지 모를 공격 때문에 칼리안을 대신 업겠노라 말하기도 어려운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버거워지면 말씀하십시오. 쉬었다 가도 괜찮습니다."
"빨리 내려가는 게 나아. 해 지잖아."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진다고. 그랬어."
이 역시 칼리안이 알려 준 것일 터였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벌써 기울 만큼은 아닙니다."
"어떻게 아는데."
"어릴 때, 잠시 수도에서 나와 산에서 일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달 정도 산에서 지냈었습니다."
"······ 그럼 잠시만."
이렇게 말한 플란츠가 잠시 발을 멈췄다.
칼리안이 해 주는 말은 어지간해선 다 믿으면서 키리에의 말은 한 번에 믿질 않는다. 그런 모습에 살짝 웃은 키리에가 적당히 앉을 만한 곳을 찾아 플란츠를 안내했다.
"됐어. 그건."
그러나 플란츠는 앉는 대신 곁에 있던 커다란 나무에 한 쪽 어깨만 기대고 섰다. 잠들었다 하기 보단 기절한 것에 가까울 칼리안을 도로 내려놓으면 다시 업기가 힘들 것 같아서였다.
"물 드십시오, 저하."
"괜찮아."
키리에가 건네는 수통을 거절한 플란츠가 조용히 마력을 운용했다. 바닥을 드러낸 소리를 내던 수통 속에 물을 가득 채워 주었다. 플란츠가 마법을 쓸 줄 알게 되었음을 몰랐을 텐데도 크게 놀라는 것 없이 감사 인사만 전한 키리에가 물을 마셨다.
잠시 뒤, 휴식을 마친 플란츠가 나무에 기댔던 몸을 뗐다.
그런데 키리에의 목소리가 플란츠의 발을 붙들었다.
"마법은 언제 익히셨습니까."
"얼마 전에."
"마법까지 배워보실 생각입니까."
"아니야."
"하신다면, 잘 하실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알아."
옛 칼리안도 마법을 홀로 배웠다. 누군가 곁에서 가르쳐 준다면, 같은 핏줄인 플란츠는 훨씬 빠르게 마법을 익힐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했으니.
"그래서 안 해."
키리에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잘 할 것이 분명해서 안 한다는, 자신감이 가득한 대답으로 보기는 조금 어려운 대답의 의미를 따져보다 말했다.
"힘을 제대로 다룰 자신이 없으신 겁니까."
오히려 자신이 없다는 말인 것 같아서였다.
키리에의 생각이 맞다는 듯,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직은."
그런 플란츠를 한동안 쳐다보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의 고양이가 장미 정원에 들어갔던 날, 그래서 저하께서 히나를 도와주게 되었던 날. 그 때 히나에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부모님이 누구의 손에 목숨을 잃으셨는지에 대해서요."
에반.
그리고 브리센.
그들의 이야기였다.
"저하께 거리를 두라 말해주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
"히나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했는데."
"그래서 저하께서 좋은 사람이 되었나 보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 히나가."
"네."
칼리안의 이마에 손을 대며 열을 재어 본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히나는 사람을 잘 믿는 아이가 아닙니다. 마음 놓고 타인을 순진하게 믿고 의지하며 살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런 만큼, 사람은 잘 봅니다."
플란츠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키리에의 말이 이어졌다.
"왕자님께서 하셨던 말씀만 믿고 마음을 완전히 놓자니 문득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드시는 것이라면, 히나의 눈을 믿어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검이든 마법이든. 빨리 익혀서 아우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나."
키리에가 물끄러미 플란츠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연두색 눈을 바라보다 답을 전했다.
"호의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저하께서도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푸른 눈을 한 번, 검은 눈을 한 번.
키리에의 눈을 올려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물 줘."
무뚝뚝한 얼굴의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란츠의 호의가 아직 많이 남은 수통을 건넸다.
* * *
"푸르릉."
칼리안의 옷깃에 이마를 가져다 댄 레이븐이 칼리안을 살짝 밀었다. 버티지 않고 반 걸음 쯤을 물린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나는 이제 내 말한테도 혼이 나네."
산에서 다 내려와 레이븐의 앞에 도착한 직후, 칼리안이 반짝 정신을 차렸다.
힘들게 산을 내려올 땐 얌전히 기절해 있더니 어쩜 그렇게 딱 맞춰 정신을 차리는지. 그것 참 빌어먹게 신기한 일이라는 듯한 얼굴이 된 플란츠를 내버려 둔 칼리안은 그렇게 계속하여 레이븐과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오래지 않아, 안색이 많이 좋아진 슬레이만과 르메인을 포함한 나머지 일행들이 찾아왔다. 더 이상의 습격은 없었다 한다.
그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정신이 없던 와중이라 한 명도 생포하지 못한 것을 아쉽다 해야 할지. 그런 생각을 접은 일행이 말에 올랐다.
팔을 다친 르메인을 에스티나에 함께 앉히고 로난시테는 에일라의 말을 함께 타기로 했다. 슬레이만은 키리에의 말을 홀로 타고 대신 키리에는 에우리아와 동석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칼리안에게서 풍겨나오는 피냄새 때문에 심기 불편한 레이븐이 키리에의 합석을 허락할 리 없었으니까.
레이븐의 위에 올라 슬레이만과 란델, 플란츠를 거쳐 일행들을 한 번씩 살핀 칼리안이 르메인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전하. 슈린츠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와 지그프리드 공의 부상 때문에 당장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지는 못할 듯 하니."
"아직 그 쪽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데, 에이프린 백작령으로 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슬레이만이 반대 의견을 보였다.
"에이프린 백작령에도 슈린츠 못지 않은 군사들이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슈린츠보다 에이프린 백작령 쪽이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왕자님."
거기에 더해 에우리아 역시 이런 의견을 냈다.
슈린츠 변경백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사 연합을 이끌며 기사들을 양성해 칼리안에게 보내오는 아이즌 에이프린은 명확한 칼리안의 사람이었으나 슈린츠 변경백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믿음이 없었으니까.
결국 르메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고 나니 칼리안이 더 이상 다른 의견을 내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칼리안 역시 지금 있는 곳에서 슈린츠가 더 가깝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으니 더 이상 이견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서둘러 말을 달렸다.
그리하여 붉어지던 하늘이 서서히 어둠에 잠겨 종내에는 완연히 검게 되었을 즈음.
차라리 에우리아의 저택이 더 크지 않을까 싶은 작은 영주성을 지닌 에이프린 백작령에 도착하게 되었다.
대륙이 나뉘는 것을 본 듯이 놀란 에이프린 백작이 서둘러 나와 맞이 인사를 했다.
"백작, 아이즌 에이프린입니다. 이렇게 뵙게 될 줄을 몰라 경황이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전하."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온 왕족이 전부 다 이렇게 찾아왔는지, 르메인의 팔에 감긴 붕대는 무엇이며 슬레이만과 칼리안의 안색은 왜 그리 안 좋은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은 아이즌은 일단 영주성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누추합니다, 전하."
빈 말이 아니었다.
기사들을 양성하라 보내주었던 그 많은 돈을 정말로 기사를 양성하는 것에만 쓴 모양이다. 백작 부인이 직접 구워 올려보냈다던, 때문에 그리 맛있던 호밀 쿠키를 떠올린 칼리안이 잠시 웃었다.
"아니네. 편안한 곳인 듯 보이네."
귀빈을 위한 방들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을 것 분명한 아담한 곳을 보며 르메인이 답을 전했다.
오래지 않아, 에이프린 백작이 급히 마련한 음식을 내어 왔다. 정성 가득한 그 음식들을 어떻게 또 거절하겠나. 때문에 칼리안은 히나가 없으니 괜찮다는 말을 꺼내놓으며 수많은 흰 빵들을 먹어 치웠다. 그렇게 배를 불린 칼리안이 참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을 때.
- 왕궁으로 오지 마시지요.
앨런의 말이 들려왔다.
곧바로 웃음을 지워내며 침음을 낸 칼리안이 대답을 전했다.
- 습격입니까.
- 그렇습니다.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별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전하."
아무것도 모르는 채 평온하게 쉬고 있던 르메인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