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26화 (427/527)

제76장. 얍 하면 슉 하고(1)

칼리안이 있다 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얼마 안 남은 적들을 향해 시선을 두지도 않았다.

상반신을 타고 올라온 독에 목까지 검게 변해가는 슬레이만을 부축해 앉힌 로난시테가 치유사를 찾으며 두리번거릴 때, 란델이 앞으로 나섰다.

- 파아앗!

그러더니 곧바로 슬레이만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슬레이만의 몸에서 반 뼘 쯤의 거리를 띄운 채로.

치유력이 붉은 것은 란델의 심장에 든 돌의 영향이라 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치유할 힘은 돌이 아니라 란델이 가진 신관의 능력과 가짜 신물에서 나오는 것임에도, 심장 속의 돌은 흰 빛의 신력이라도 붉게 바꾸어야 하겠다는 듯 악착같이 제 존재를 드러냈다.

그렇게 뻗어나오는 붉은 빛을 본 슬레이만과 로난시테, 그리고 여전히 벼랑 끝에 서서 칼리안을 바라보던 르메인까지도 놀란 얼굴이 되었으나 란델은 그들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다. 슬레이만의 상처가 아닌 다른 아무 곳에도 눈을 두지 않은 채로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하여 치유의 힘을 쓰기만 했다.

- 파직, 파지직!

- 부우웅!

- 콰직!

그 사이에도 에우리아는 쉬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적들을 치워냈다. 에우리아에게서 빠져나오는 놈들의 심장에 검을 꽂아넣는 것은 로난시테의 몫이 되었다.

- 타다닷!

에일라와 키리에가 서둘러 움직였다. 이곳 저곳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뒤지며 흩어진 단검을 주워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를 짐작한 플란츠가 발을 옮겼다. 그리고 몇 걸음 앞에 보이는 시신의 심장에 꽂힌 단검에 손을 뻗을 때.

- 우웅!

미세한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텔레포트다.

- 스르릉!

거의 동시에 반응한 플란츠가 검을 뽑았다. 그 직후, 제온의 마법사 한 명이 플란츠의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체없이 뻗어나간 플란츠의 검이 마법사의 심장을 향해 치달았다.

- 휘이익!

- 카앙! 카가강!

놈이 펼쳐낸 실드에 검이 튕겨나온다.

검을 들어 다시 휘둘렀다.

- 카가강! 캉!

- 카강!

실드가 깜빡인다.

놈의 손에 마력이 응집된다.

- 철컥!

드미레아를 통해 잘 고쳐진 채 되돌아 온 시나스타가 둘로 나뉘었다. 플란츠가 오른손에 들었던 검으로 실드를 강하게 내리쳤다. 실드가 다시 한 번 깜빡, 힘을 잃었다.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은 플란츠의 왼손이 뻗어나갔다.

- 푸욱!

놈의 몸 깊숙한 곳에 잿빛의 시나스타가 박혀들어갔다.

붉은 치유의 빛이 마법사의 몸을 감싼다. 타인을 치료할 수는 없으나 자신의 몸은 얼마든지 되돌려내는 돌의 힘이 움직인다.

플란츠가 다시 한 번 검을 들었다.

그렇게 놈을 향해 한 번 더 검을 박아넣으려 하는 순간,

- 콰직!

놈의 뒤로 달려든 또 하나의 잿빛 검이 놈의 심장을 관통하여 가슴팍으로 튀어나왔다.

"괜찮으십니까."

키리에였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키리에가 검을 뽑았다.

- 쿠웅!

생명을 완전히 잃은 마법사의 몸이 곤두박질친다.

서른 명 째의 적.

마지막 놈의 숨이 그렇게 멈췄다.

- 저벅, 저벅.

더 이상 남은 적이 없음을 확인한 에우리아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제야 눈이 마주친 르메인에게 간단한 예를 보인 뒤 주변을 둘러봤다.

곧 에우리아의 입이 열렸다.

"베른 경. 칼리안 왕자님이 안 계시는데."

다리가 사라졌다.

르메인과 슬레이만, 로난시테가 돌아왔다.

그런데 칼리안이 없으니 하는 말이었다.

"반대편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칼리안이 왜 없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키리에는 이렇게만 말을 했다. 그리고 르메인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켜보였다.

그제야 칼리안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게 된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텔레포트 쓰면 금방 내려가. 내가 갈게."

"세이렌 경은 이 쪽에 있으라고, 왕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계곡을 건너가 왕자님을 구하는 것까지는 금방일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절벽을 타고 다시 올라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각자 산에서 내려가 다시 합류할 때까지는 이쪽 일행들을 보호해 줄 전력이 필요합니다."

에일라와 키리에가 에우리아를 말렸다.

슬레이만이 언제 나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주요 전력인 에우리아가 홀로 빠지면 안 되니까. 그렇다 해서 저 가파른 계곡 아래로 모두 함께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럼, 저 계곡을 맨 몸으로 내려가겠다고?"

"네. 그렇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에우리아의 얼음은 칼리안이 사용하는 오러만큼 강하고 단단하지 않았으니 얼음으로 된 외다리를 만들어낸다 한들 사람의 무게를 버티지는 못한다. 계곡 반대편까지 닿을 만큼 긴 나무도, 화살에 매어 양 쪽을 연결할 수 있을 밧줄도 없었다.

다른 방편을 구할 시간 역시 없다.

"왕자님 더 이상 대답이 없어요."

에일라의 말이 아니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절벽에 매달린 칼리안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신을 놓은 것인지 지친 것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비녀와 손목에 둘둘 감겨있는 저 붉은 오러가 일순간 사라지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대부분의 단검을 회수한 에일라가 벼랑 쪽으로 걸어갔다.

- 저벅.

플란츠가 그 앞을 막아섰다.

"줘."

에일라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아듣기엔 너무 짧은 한 글자라서, 플란츠가 말을 덧붙였다.

"업어 오든 끌고 오든. 내가 낫지 않나."

어차피 키리에가 같이 갈 터였다. 칼리안을 데려오다 놈들을 마주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니 키리에는 검을 쥐어야 했다. 그렇다면 다른 한 명은 저 망할 동생 놈을 들춰 업고 오든 질질 끌고 오든 해야 한다는 소리다. 칼리안보다 체구가 작은 에일라보다는 이 쪽에 있어봐야 큰 전력이 안 될 플란츠가 가는 것이 낫다는 말이기도 했다.

"많이 안 시드셨네."

살짝 웃는 얼굴로 중얼거린 에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에 들린 단검 십여 개를 플란츠에게 건넸다. 4층까지도 폴짝폴짝 테라스 타고 다니는 사람이라 했으니까. 절벽 쯤이야 잘 내려가겠지 싶어서였다.

에일라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곧장 이해했으나 듣지 못한 척 한 플란츠가 단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키리에와 나눈 뒤 절벽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런 플란츠를 향해, 이제껏 아무 말 않고 서 있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플란츠."

"계십시오. 데리고 오겠습니다."

"······ 미안하구나. 나 때문에."

"전하 탓 아닙니다."

단정 짓듯 답한 플란츠가 절벽 가장자리에 섰다.

양 손에 단검 하나씩을, 나머지를 품에 넣은 키리에가 절벽 밑으로 먼저 발을 내딛었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며 내려가는 방법을 익힌 플란츠가 몸을 돌려 섰다.

"······ 조심······ 하거라."

주저함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르메인을 마주 본 플란츠가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네. 전하."

그리고 키리에의 뒤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잘나신 만큼 대책없고 사고 잘 치는, 그리고 살아있는.

망할 동생 놈 데리러.

* * *

다행인지 아닌지.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 내 말 들려요?

- 왕자님.

- 안 들려요?

다만 지치기는 했다. 사실 많이 지쳤다. 계속 전해져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간단한 대답이라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만큼.

- 울컥!

더는 되삼킬 필요 없는 핏덩이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것이 턱을 타고 흘러 후두둑 떨어져내린다.

칼만 들었다 하면 이 사달이 생기니.

고작 전사 몇 명을 상대하고 이 지경이 된 것을 체이스가 알면 혀를 찰 일이다. 아마도 베른이었다면 절대로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 지금 내려가고 있어요.

- 조금만 기다려요.

에일라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깜빡.

천천히 눈을 뜬 칼리안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씩이라도 내려가 보기 위해 남은 팔을 움직였다.

- 욱씬!

날선 통증이 머리를 울렸다.

비녀 하나에 연결된 오러를 붙들고 버티는 건 왼팔인데 정작 통증은 오른팔에서 전해져오고 있었다. 에일라의 비녀를 감고 절벽 쪽으로 몸을 날렸을 때, 남은 오러를 오른팔에 두르고 바위에 부딪히는 충격을 줄였었는데. 아마도 그 충격이 다 흡수되지 않았나보다.

팔이 부러진 모양이니.

하기사.

저 아래로 내리꽂혀 사지가 부서지는 것보단 낫겠지.

- 정신 들었어. 괜찮아.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부러진 팔 덕에 되돌아 온 김에 에일라에게 말을 전했다. 그러자 에일라의 답이 곧장 전해졌다.

- 괜찮아요?

- 생각보다 많이 걱정해주네.

- 걱정해줘야지. 내 비녀 하나에 목숨 맡긴 사람인데.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 안 죽을 만큼은 돼.

- 그럼 됐어요. 지금 왕자님 데리러 가는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 알았어.

- 붙든 것 놓치지 말고.

- ······ 그래, 에일라.

- 네.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 숨에 같이 새어나오는 핏물을 뱉어내며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칼리안의 왼손이 붉게 빛났다.

절벽에 매달린 채라 하더라도 잠시 쉰 것은 맞으니까. 말로는 아무것도 못하겠으니 알아서 구해달라 하였으나 그렇다 해서 정말로 이 높이에 매달려 기다릴 수는 없지 않나.

- 파악!

결정을 마친 칼리안이 제 몸을 지탱하던 오러를 절벽 반대편으로 강하게 움직였다. 그 힘에 뽑혀나온 에일라의 비녀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의 몸도 다시 추락했다.

- 우우웅!

쉼없이 오러를 운용한 칼리안의 왼손에 예리한 검이 들렸다. 그것을 휘두른 칼리안이 절벽을 내리찍었다.

강한 반발력과 함께 떨어지던 몸이 멈춰선다.

부러진 오른팔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다시 머릿속을 헤집었으나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검을 붙든 채 숨을 한 번 골랐다. 그리고 검을 다시 없앴다.

또 떨어져내린다.

또 한 번 만들어낸 검을 절벽에 박아넣는다.

- 콰직!

틈새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단단한 바위든 내리찍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게 대여섯 번.

추락하다 멈춰 매달리기를 반복하고 난 뒤.

비로소.

- ······ 탁.

칼리안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멈췄던 숨을 길게 내쉰 칼리안이 바위를 짚으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 비척비척 다리를 움직였다. 아까부터 계속 놓치지 않고 쳐다보고 있던 곳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 타박. 타박.

그 발이 멈춘 곳에서 입 안에 도는 비린 맛을 한 차례 삼켜낸 뒤 허리를 숙였다.

미련없이 뽑아내 바닥으로 떨궈낸 것.

에일라의 비녀를 집어들어 품 속에 잘 넣었다.

예쁘다고 했으니까. 돌려줘야지.

- 툭!

곁에 있던 커다란 바위에 온 몸을 기대고 선 칼리안이 제 뒤통수를 툭 댔다.

"아······ 이제 진짜 모르겠다."

다리에서 떨어져 죽지도 않았고 절벽에서도 잘 내려왔고 에일라의 튼튼한 비녀도 챙겼다. 그러니 이제 진짜 모르겠다.

이렇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돌아가면 정말 어떻게든.

서클 하나부터 일단 꼭 늘려놓겠다고.

그런 다짐을 하면서.

* * *

카이리스 북쪽에 위치한 수도 카이리시스.

카이리시스 전체를 두르는 외성 정문을 지나 언제나 고요한 세뉴 강을 건너 다시 북쪽으로 얼만큼을 달리면, 좀처럼 문을 닫아두는 일이 없는 내성이 보인다.

북쪽을 제외한 방향으로 난 3개의 내성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귀족들의 거주지인 에이난샤 거리와 아스트리샤 거리를 보게 된다. 그 거리들의 호화로움과 멀리 보이는 왕실 숲을 눈에 담으며 다시 조금 더 북쪽으로 향하면 왕도를 기준으로 대칭되는 구조의 광장, 시스파니안 광장과 하츠아라 광장에 발을 들일 수 있다.

그 두 광장까지 지나치고 나서야 도착하는 곳. 외성과 내성을 지나 계속하여 북쪽으로 향하고 나서야 마주할 수 있는 곳. '봄이 오는 곳'이라는 뜻의 카이리스에서 언제나 길고 긴 겨울을 맞이하는 곳.

바로 카이리스 왕궁이다.

지리적 이점과 생활 환경, 타국과의 관계 개선에 유리한 입지 등. 그런 문제들은 조금도 계산하지 않은 채 오로지 '눈은 좋아하고 답답한 것은 싫다' 말했던 시스파니안만을 생각한 하츠아라가 제 마음대로 위치를 결정하고 지어버린 그런 왕궁이었다. 그래도 거대한 강 하나는 지나가는 곳에 터를 잡은 것이 참 용하다 할 일이다.

어찌됐건.

그 왕궁과 왕궁 북쪽의 숲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지역이 바로 시스파니안의 '영역'이었다. 물론 지그프리드 공작령의 내성 부근도 시스파니안의 땅이지만 그곳은 카이리시스가 아니었으니 제외하고 설명하자면 그렇다.

"왕궁 북쪽 숲이 왕궁 안으로 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경계는 하되 크게 염려하지는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르센의 말에, 빌헬름 관의 회의실에 함께 모여 있던 네 명의 사단장과 한 명의 군단장 중 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누가 시스파니안의 영역으로는 길을 열지 못한다 했네."

"네. 맞습니다, 군단장님. 아시다시피 왕자님의 로젤리타 때 숲의 길을 이용했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 이유 때문에 지그프리드령이 아닌 인근의 숲까지만 길이 열렸습니다."

"그 말이 거짓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엘프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해서 다누까지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걱정 말게, 제이아 사단장. 혹시 왕궁의 숲 쪽으로 침입이 있다 하더라도 시스파니안의 보호 마법이 있지 않나. 그리고 나 역시 계속하여 왕궁 안을 살필 터이니."

"······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그럼 대원들은 왕실 숲 쪽으로만 보낼까요?"

앨런이 니들렌의 말에 대답하고자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니들렌의 옆에 있던 또 다른 사단장의 말이 조금 앞서 나왔다.

"그래도 칼리안 왕자님께서도 군단장님께 특별히 당부를 하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바로 왕궁의 보호 마법을 구동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만약 전하께서 왕궁 안에 계셨다면 이베카 사단장 말대로 했을 걸세. 그런데 전하는 물론이고 왕세자 저하와 두 왕자님까지 오늘 아침 공개적으로 자리를 비우셨네. 왕궁이 빈 것을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섣불리 보호 마법이 구동되었다가는 일이 커질 수 있지 않겠나."

왕실 보호가 아닌 왕위 찬탈 시도로 여겨지리라는 말이었다.

앨런의 대답에 동의한다는 듯 이제껏 조용히 있던 다른 두 사단장, 데미안과 페일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생각인 아르센이 말을 더했다.

"전하와 저하, 왕자님들까지 모두 자리를 비우신 상태니 보호 마법은 상황이 벌어진 뒤에 펼쳐도 늦지 않는다 여기네. 대처가 늦어 어느 정도의 피해가 생긴다 하더라도, 왕궁에 변고가 생겼음을 성급히 알리는 것보다는 낫네. 사실상 지켜야 할 것은 왕궁 전체가 아니라 아르피아 궁과 옛 헤이시아 궁의 터가 아니겠나."

르메인과 플란츠, 란델, 그리고 칼리안.

최우선하여 지켜야 할 이들이 있다면 왕궁이 위험에 처했음을 외부에 알리는 것을 얼마든지 감수하며 보호 마법을 구동시킬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왕궁에 머무는 이들은 발칸의 대원들과 여러 사용인들, 그리고 테일란이 지키는 중인 아리안느 뿐이었다.

외부의 침입이 있고 피해가 생긴다 하더라도 왕족이 해를 입는 최악의 상황이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움직여 괜한 혼란을 만드는 것보다는 피해를 감수하는 쪽이 낫다는 말이었다. 아르센의 말마따나 발칸이 최종적으로 지켜내야 할 곳은 옥좌와 왕관이 있는 아르피아 궁, 그리고 옛 헤이시아 궁의 터 뿐이니까.

아니.

정확히는, 시간의 축이라 해야겠지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부군단장님."

이 자리에서 공동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이들은 앨런과 아르센 뿐이다. 다른 이들은 공동을 그저 '시스파니안의 중요한 보물이 들어있는 곳'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르피아 궁과 마찬가지로 그곳을 지켜야 한다는 말에 의문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닌 시스파니안의 보물이라 하는데 이의가 생길 리 만무했다.

"그럼 외성 쪽에 가 있는 대원들 중 마법사 서른 명, 기사 백 명을 왕궁으로 돌려보내고. 대신 왕궁에 있던 마법사 오십 명, 기사 삼백 명을 왕실 숲으로 먼저 보내게. 해가 지기 전에 정비를 마쳐 그만큼의 인원을 더 보내도록 하고. 제이아 사단장과 이베카 사단장이 숲으로 함께 가면 될 것 같네."

"알겠습니다."

"통신물품 잊지 말고. 주시하고 있을 터이니."

"네, 군단장님."

"왕궁의 대원은 셋으로 나누어 한 쪽은 아르피아 궁을, 다른 한 쪽은 시스파니안의 공동 쪽을, 나머지는 대기하는 것으로 하게."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짧은 회의가 끝났다.

어쩌면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될지 모를 제온과의 전투였다. 그것을 앞두고 어느정도 긴장한 얼굴이 된 이들이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제온의 세력을 정말 마주하게 되면 어떻게 싸워야 할지,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누구를 살려 잡아들이고 누구를 죽여야 할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따로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을 직접 마주했기 때문에 그들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르센과 플란츠로부터 이미 지나칠 만큼 많은 훈련과 교육을 받아 온 까닭이다.

- 드르륵!

- ······ 저벅. 저벅.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선 앨런이 느린 걸음으로 회의실을 한 바퀴 돌았다. 진중한 발소리가 걸음마다 이어졌다.

"아직은 별 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걱정이 가득 담긴 혼잣말이 회의실 안을 울리다 사라진다.

* * *

- 파삭!

- 후두둑!

단단하지 못한 곳에 박혀들어간 단검이 힘없이 빠져나왔다. 그 사이로 손가락만한 돌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 콰득!

바위 틈에 단단히 박힌 단검을 오른손으로 붙든 채, 다음으로 지지할 곳을 찾아 왼손의 단검을 찔러넣었던 플란츠가 다른 바위틈에 다시 한 번 단검을 박아넣었다.

몇 번을 흔들어가며 새로 박아넣은 단검이 단단한지를 확인한 플란츠가 오른쪽 단검을 다시 뽑았다. 그리고 그것을 지지해 줄 바위틈이 있을 곳을 눈으로 훑었다. 그런데 그 때,

- 채앵!

오른손 끝에서 달갑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뽑혀나오던 단검이 반으로 부러지는 소리였다. 온 몸의 무게를 더 버티지 못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흐트러진 균형에, 플란츠의 몸이 한 쪽으로 휙 젖혀졌다. 그러자 턱, 하고. 조금 아래 있던 키리에가 팔을 뻗어 플란츠의 몸을 붙들었다.

빠르게 새 단검을 꺼낸 플란츠가 그것을 바위 틈에 박았다. 그렇게 균형을 되잡은 뒤 짧은 한숨을 쉬었다.

"조심하십시오."

"알았어."

플란츠가 잠시 고개를 내려 아래를 바라봤다.

까마득하던 바닥이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은 이들의 시신들이 보다 자세히 보인다. 그것에서 눈을 돌린 플란츠가 왼쪽의 단검을 뽑아 다시 아래쪽으로 뻗었다.

- 콰악!

꾹 다문 입에 힘이 들어간다.

망할 놈.

원수같은 놈.

- 콰악!

4층 테라스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도 사실 조금 주저했었는데 이딴 절벽을 타고 내려가게 만든 놈. 산에 뭐가 있는지 알려주겠다 했지 산에서 무슨 고생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겠다고는 한 적 없던 입바른 놈.

만나기만 해 봐라.

- 카앙!

- 콰드득!

그렇게 속으로 온갖 악다구니를 다지며 절벽을 내려왔다. 몇 번 쯤 발이 미끄러지고 단검이 몇 개나 부러졌는지 생각하는 것도 집어치우고 그 긴 절벽을 내려왔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게 뒤틀린 시신들을 지나쳐 걸어가며 욕지거리를 삼켰다. 저렇게 될 것을 각오하고 다리를 끊어낸 미친놈이 있는 곳으로, 피비린내를 가득 머금은 드센 물살 속에 발을 담그고 뾰족한 바위를 밟고 건너며 걸어갔다.

- 저벅, 저벅.

그렇게 기어코 도착했다.

커다란 바위에 기대고 선 놈.

기어코 제 손으로 내려와 기어코 몇 걸음을 걷고 기어코 앉지도 않고 서 있는 지독한 놈. 딱 저만큼 지독한 피냄새를 풀풀 풍기며 서 있던 놈. 그런 놈이 있는 곳에.

- 스르륵.

깊이 다물려 있던 놈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그리고 제 앞으로 먼저 간 키리에를 쳐다봤다.

"키리에."

"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응."

그 곁으로 걸어갔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새빨간 눈이 보인다.

"······ 야."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놈을 불렀다.

누구 멱살 잡는 건 저만 할 줄 안다고 생각하나본데.

그거 나도 할 줄 안다고. 나도 화낼 줄 안다고.

목숨 함부로 내놓지 말란 말 나도 할 거라고.

나도 꼭.

진짜 꼭.

저 망할 동생 놈한테.

"아······ 형이다."

말 못했다.

그 먼 길을 오는 내내 쌓인 말을 하나도 못했다.

"······ 가. 집에."

이딴 말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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