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장. 대마법사가 되어야지(6)
이거 조금.
비슷한 것 같은데.
잔 숨을 내쉰 칼리안이 비소를 머금었다.
베른의 모습을 가져본 지 오래되지 않아 그런 것일지, 베른으로 검을 휘두른 지 오래되지 않아 그런 것일지 몰라도. 요즘 왜 이렇게 그 날이 떠오르는지.
"등 뒤가 무거워서 그런가."
혼잣말일 것 분명한 중얼거림을 마친 칼리안이 잠시 뒤를 쳐다봤다. 그 날의 성문과 다를 바 없이 여겨지는 긴 다리가 보였다. 슬레이만이 다리 근처에 다다른 것도 보였다.
누가 업을 수 있을 덩치도 아닌데 다치기까지 했으니, 저 아슬아슬한 다리를 부축까지 받으며 다 건너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 쌔애액!
- 서걱!
- ······ 쿠웅!
세크리티아의 성문같은 슈린츠 산의 다리를 등진 채, 하얀 악마들이 떠오를만큼 끝없이 찾아드는 제온의 기사 한 명을 다시 베어냈다.
슬레이만은 아직이다.
다리 위까지 이어진 피가 검다.
"버르장머리 없는 것만 닮을 것이지. 독 좋아하는 것까지 브리센을 닮아서야."
슬레이만의 발이 지나치게 느린 이유를 이제야 눈치챘다.
언젠가의 칼리안과 똑같은 상황. 상처 새로 스민 독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칼리안보다 강한 소드마스터라 하나 슬레이만은 많이 지쳤으니까. 살을 뚫고 내장에 직접 닿았을 독을 막아낼 오러가 없었을 터였다.
"벌써 한계가 왔나. 말이 많아졌는데. 왕자."
"님. 붙이라니까. 말도 좀 올리고."
- 쌔애액!
- 카강!
그놈의 버르장머리를 좀 알려주겠다는 듯 뻗어나간 단검이, 방금 전 칼리안에게 말을 건넸던 전사의 검에 막혔다. 피식 웃는 전사를 보던 칼리안이 예쁜 웃음으로 답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력과 오러를 움직였다.
상대의 검에 막혀있던 칼리안의 단검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 직후 전사의 심장 바로 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 ······ 콰직!
"말이 많든, 한계가 왔든. 너희들은 나 못 지나가."
이미 생명을 놓은 이를 향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 콰앙, 콰아아앙!
- 콰아아앙, 콰과광!
그 말이 맞다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굉음이 들려온다.
내리치는 번개의 힘에 발 아래가 진동하고 나뭇잎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거기에서 한 술을 더 떠, 반대편 산에서 터져나온 폭포수같은 물에 떠밀린 놈들이 벼랑 아래로 추락하는 것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잠시 감탄했다.
에우리아 세이렌.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천재지변이다. 아무리 놈들의 회복력이 좋다 한들, 저 계곡으로 떨어져 살아날 수는 없을 테니까. 굳이 위에서 다 죽여버리지 않아도 될 효율적인 처리 방법이 아니겠나.
역시 두 가지 속성의 마법을 다 쓰니······.
- 우우웅!
- 쌔애애액!
- 콰직!
"······ 아."
푸른 오러가 어린 붉은 단검을 날려 두 명의 목숨을 더 끊어낸 칼리안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소리를 냈다.
이중 속성.
속성의 구분이 없어지는 대마법사가 되기 전에 양속성의 마법을 융합하는 방법을 깨달은 에우리아가 있었다. 그런 마법사를 곁에 두고서 왜 테일란에게만 질문을 했을까!
어쩌면 오러의 충돌을 해결할 수 있을 방법을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법과 오러는 결국 같은 마나를 쓰는 기술이니까.
이런 생각에 잠긴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검을 놀렸다.
- 우우웅!
- 서걱!
하나.
하나의 검이 날아가 전사 한 명의 심장을 관통했다. 좀전처럼 여러 개의 단검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슬레이만을 안심시킬 필요도 없으니 굳이 무리를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사실.
- 울컥!
입술 새로 배어나오는 비린 것을 막기에도 급급한 상황이라.
그것을 뱉어내 적들의 사기를 하늘 끝까지 올려 줄 생각은 추호도 없던 칼리안이 핏물을 되삼켰다. 그러다 무언가를 깜빡했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가벼운 바람같은 미성이 앞에 선 놈들을 향했다.
"서른 둘."
제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죽여 없앤 놈들의 수를 셌다.
이제 남은 것은 다섯.
저 놈들을 마저 없애고 다리를 건너가 끊어내고, 저 편의 제온 놈들을 다 처리한 뒤 산을 내려가서.
- 사사삭!
- 사사사삭!
전하는 아르피아 궁에 무사히 돌아가고.
완두콩은 루시와 안네를 안고 다시 휴식을 취하고. 옥수수수염은 그 좋아하는 자몽차와 케이크를 먹다 흰 장미를 돌보러 가고. 나는 레이븐이랑 놀다 스승님이랑 얀이랑 히나에게 한바탕 혼이 나고.
그렇게 하면 될 것이라고.
- 스르릉······!
- 챙!
- 채앵!
생각했는데.
"······ 하."
처음 칼리안의 상태를 알아보고 제온의 전사들을 한데 뭉치게 했던, 덕분에 다섯 뿐이라고는 하나 전멸하지 않고 버티는 것에 성공한 전사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너도 발을 움직이지 않을까 싶군. 왕자님."
이제껏 칼리안이 죽여 없앤 딱 그 정도의 지원군을 등 뒤에 둔 채로.
칼리안이 웃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슬레이만이 다리를 거의 다 건너간 것을 보았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놈들을 확인했다.
쉽게 죽일 수 있을 마법사는 보이지 않는다.
오러를 들었든 말든 소용없을 수준 낮은 검사가 딱 여섯.
그렇다는 것은.
"대체 어디서 이렇게 쏟아져 나오는 거야? 늑대 새끼들."
나머지는 전부 다 대사막의 늑대라는 뜻이다.
이 곳에서 승산없는 싸움을 하다 죽고 싶은 생각은 없고, 놈들을 달고 다리를 건너가 저 편의 일행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없고. 도망을 칠 상황은 못 되고.
그러니 이 일을 어찌할까.
- 우우웅!
고민은 길지 않았다.
칼리안이 오러를 운용했다.
- 쌔애애액!
- 콰직!
- 쌔애액, 쌔애애액!
- 서걱!
- ······ 쿵!
순식간에 뻗어나간 세 개의 단검이 가장 앞에 있던 놈들의 심장을 관통했다. 놈들이 쓰러지는 모습에 남은 놈들의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 타앗!
칼리안이 발을 박찼다.
놈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뒤를 향해서, 다리를 향해서.
"건너가서 다리를 끊을 셈이다! 잡아!"
칼리안의 상태를 눈치챈 전사가 외쳤다.
기민하게 상황을 파악한 전사들이 재빨리 칼리안의 뒤를 쫓았다.
- 툭.
가벼운 걸음이 다리 위에 올라섰다.
칼리안을 따라온 전사들 역시 다리를 밟았다. 칼리안이 발을 디뎠을 때에는 미동도 없던 다리가 출렁이는 것이 느껴진다.
- 타박.
칼리안이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다시 한 발, 또 한 발.
좁은 다리 위에 한 줄로 서게 된 전사들이 섣불리 달려드는 대신 계속하여 거리를 좁혀들었다. 이대로 하나 대 하나의 싸움을 하며 수를 줄이느니, 칼리안을 몰아세워 다리를 잘라내지 못하게 하며 반대편까지 건너간 뒤 다시 포위하고 싸우는 것이 낫다 여긴 까닭이다.
- 탁.
다리의 중간 즈음.
칼리안이 발을 멈췄다.
잠시 주변과 아래를 살피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고운 미성이 전사들을 향했다.
그 목소리와 눈빛 속에 담긴 것을 그제야 알아본 전사가 고개를 돌렸다. 다시 되돌아가라 외치려 했다. 그런 뒤늦은 깨달음을 비웃듯 칼리안의 예쁜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안 건너가고 끊을 셈이었어."
죽음을 선고하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붉은 눈에 꽃을 담은 미소가 그려진다.
- 쌔애애액!
붉은 검이 번뜩인다.
* * *
찰싹, 하고.
아르센의 왼쪽 어깨에서 큰 소리가 났다.
하나도 아플 것 없었으나 괜스런 소리에 놀란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소리를 낸 작은 손의 주인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 목도, 어깨도, 다 나았죠?
정말이었다.
우유와 계란을 가득 넣고 구운 부드러운 빵도 씹어 삼키기 힘들었던 목의 통증과 어깨가 어느새 씻은 듯이 나았다. 목을 몇 번, 그리고 어깨를 몇 번 휘휘 돌려가며 확인해 본 아르센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나았군."
- 코에 염증이, 있어서, 그것도 치료했어요. 감기 기운, 인 것 같으니까, 레몬차, 많이 드세요.
"아, 맞네. 어제 밤부터 코가 시큰하더라니."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곁에 서 있던 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르센과 마찬가지로 칼리안과의 전투에서 상처를 입었던 두 사단장, 니들렌과 데미안이 멀쩡해진 얼굴을 한 채 웃고 있었다.
한 마디로 아르센이 가장 늦게 치유를 받았다는 소리였다. 앨런이 그렇게 하라 말했단다.
순서야 어찌됐건 치료를 받은 것은 받은 것이라.
흉터가 생길 여지 없이 상처가 싹 나은 것에 아주 잠시 아쉬워한 아르센이 히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덕분에 빨리 나았네. 고맙네."
- 고마워하실 것, 없어요. 자상한 왕자님께서, 따로 부탁하셔서, 고쳐드린 거니까요.
"아······ 그래."
아르센이 다소 뜨끔한 얼굴을 했다.
뿐만 아니라 니들렌도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둘 다 '그 전투'에서 칼리안에게 찔릴 구석이 하나씩 있지 않던가.
솔직히 왕자님 말씀이 너무 매워서 사직서를 써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런 나쁜 생각은 싹 접었다, 왕자님께서 무슨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앞으로 정말 열심히 노력하겠다, 이런 말이나마 전해야 했던 니들렌은 아직 칼리안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바로 전날 니들렌의 치료실에 앨런과 플란츠와 함께 칼리안이 찾아왔었지만 이렇다 할 대화를 하기도 전에 곧바로 나가 다시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르센은.
사과고 다짐이고 뭐고 스스로를 위한 안네루시아를 들고 칼리안을 찾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를 대형사고를 저지른 장본인이다. 과거의 아르센이 그 날의 왕제에게 이름을 물었었다던 칼리안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탓에, '발칸의 군단장 아르센 헤르츠' 라고 냅다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한 마디가 그 정도의 효과를 발휘할 줄이야.
아무튼 그런 속사정이 있는 두 사람과 찔릴 것 하나 없이 열심히 제 몫을 다 하고 잘 다쳐서 속은 편한 데미안을 보던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 치료실, 모자란다고, 들었어요. 멀쩡해진 세 분은, 어서 나가서, 일, 하세요.
"그래야지. 그럼 자네는 이제 다른 대원들 치료해 줄 참인가?"
히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저 아직, 휴가, 안 끝났어요. 말씀, 드렸잖아요. 자상한 왕자님께서, 부탁하셔서, 세 분만.
"아, 그래. 그랬지."
- 저는 이제, 쾌활한 영애님에게, 갈 거예요.
"린 영애 말인가?"
- 네.
"왜. 그 쪽에도 볼 일이 있나?"
- 고양이들이랑, 오리, 데리고, 놀 거예요.
히나가 다시 한 번 생긋, 웃었다.
천지가 뒤바뀌고 저 태양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신나게 구경하더라도 우리 히나 눈 밑에 칙칙한 다크 서클이 생기는 것만은 절대 못 보겠다는 칼리안의 굳은 의지를 잘 존중해 줄 예정이라면서.
그러니까 휴가 중 갑작스런 업무는 끝.
나머지 분들은 알아서 치료하시라는 뜻이었다.
- 그래도, 긴급한 상황 생기면, 불러주세요. 왕궁 밖으로, 안 나가고, 있을 테니까요.
물론 군인의 본분을 잊지는 않았다.
히나의 말을 들은 아르센이 진지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자네도 소식 들었나?"
- 네. 왕궁이 비었고, 누가 언제, 왕궁을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요.
"그래. 그래도 너무 걱정 말게. 마나실 군단장님께서 경계 중이고, 수도 내에는 왕궁에 들어올 만한 병력도 없을 뿐더러, 외성 밖 경비도 강화해뒀으니."
- 네. 걱정 안 하고, 있을게요.
"린 영애와 카스트린 경에게도 그렇게 전해주게나. 혹시 두 분이나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까지 불안하게 여기시지 않도록."
이 말에,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히나의 손이 움직였다.
- 자상한 왕자님을, 괴롭히던, 그 세력이 또, 끼어든 거죠?
"그렇네."
아르센이 숨김없이 답했다.
앨런에게 이야기를 전달받을 때 히나가 없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뿐.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히나 역시 알 권리가 있지 않나.
"그들이라 단정지을 수 없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네. 제온에서 보낸 놈들이 전하께서 머무시던 슈린츠의 별궁을 습격한 것으로 보이네."
- 별궁을요? 전하께요?
"그 얘기까지는 아직 듣지 못했나? 전하께서 사라지셨네."
잠시 놀란 얼굴이 되었던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 공작님도 계셨는데, 전하께서, 사라지셨다면. 그 세력이, 그렇게 강한가요? 아니면 많아서?
"강하기도 하고 많기도 하지. 늘 많았지 않았나. 공작님께서 전하를 모시고 몸을 피하셨을 정도라 하니 이번에도 비슷하거나 훨씬 많을 것 같네."
- 그런데, 그, 곳은, 아무 때나 드나들기, 힘들다고, 들었어요.
"그렇지. 별궁이 있기도 해서 슈린츠의 변경백이 언제나 출입하는 이들의 신원을 신경쓰기도 하고······ 때맞춰 성문을 닫고 경비를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왕자님께서도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지셨다 하네. 대체 놈들이 어디서 그렇게 갑자기 나타났는지 말일세."
히나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곧 히나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던 두 사단장을 쳐다봤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얼굴로 손을 움직였다.
- 잠깐, 부군단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 네, 치유사님.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부군단장님."
"이야기 나누십시오."
눈치 빠른 두 사단장이 이렇게 말하며 아르센의 치유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히나가 통신용 구슬을 꺼내 아르센의 손에 쥐여주었다. 여러 지명과 이름을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 이건 그냥 제 생각이에요, 부군단장님. 세크리티아에서 잠깐 생각을 했었는데 그 곳에서 말씀을 드리기에는 여러 일이 있었어서 말씀을 못드렸어요.
"그래. 얘기하게."
- 처음에 부군단장님께서 어깨를 다쳐왔던 일을 기억하세요?
"내가 그 일을 어떻게 잊겠나. 우리 왕자님께서 나를 구하기 위해 한달음에 찾아와 주신데다 귀한 손으로 그 비싼 옷을 찢어서 만드신 붕대까지 다정히 감아주셨던 것도 모자라 내 부상이 심히 걱정되신다며 왕자님의 애마까지 흔쾌히 빌려주셨던 날이니 말일세."
히나가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센이 그 날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붕대로 상처 말고 모가지를 감아둘 걸 그랬다며 후회할 칼리안의 얼굴이 눈에 선했으니까.
- 네. 그 때가, 부군단장님과 세이렌 협회장님께서 함께 브리센 변경백령에 가셨을 때에요. 부군단장님께서 다치기 전에도 제온이라는 그 놈들을 맞닥뜨렸고, 세이렌 협회장님께서 물리치셨던 일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협회장님 혼자 하신 것은 아니네. 나도 잡기는 했네."
- 어쨌든요.
"그래. 그랬지."
- 그리고 세크리티아에서, 왕자님과 저하께서 바다에 다녀오시던 중에도 놈들을 만나셨어요.
바닷가에 찾아간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수정판을 선물하고 돌아오던 중, 놈들을 마주치게 된 칼리안이 큰 부상을 입었었다. 덕분에 칼리안의 등에 길쭉한 흉터까지 생기지 않았던가. 물론 아르센은 흉터까지는 몰랐지만 그 일이 생겼을 때 함께 있기는 했었다.
- 세이렌 협회장님과 그레이스 부교장님이 브리지트 숲에 찾아갔을 때에도 놈들이 나타났어요. 얼마 전에 힐 경에게 들었는데, 힐 경이 놈들을 처음 만난 곳은 지그프리드 공작령 인근의 숲이었대요.
이 말을 들은 아르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히나가 말하는 이야기의 요지를 알 것 같아서였다.
"계속 말해보게."
- 부군단장님과 세이렌 협회장님이 브리센 변경백령에 찾아가다 놈들을 마주쳐 다 죽였다 했던 곳도 숲이에요. 그 이후에 부군단장님께서 놈들을 만나 크게 다쳤던 곳도 숲이에요. 세크리티아에서 제온 놈들이 왕자님과 저하를 기다리고 있던 곳도,
"······ 숲이었네."
- 네. 맞아요. 숲이었어요. 왕자님께서 그 놈들을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그래서 지그프리드 소공작님께 피신하셨을 때. 그 때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전부 다 숲이었어요. 조금이라도 많은 수가 있다 여겨질 때면 언제나 숲이었어요.
히나의 까만 눈이 아르센의 파란 눈을 쳐다봤다.
무엇에도 물들지 않을 곧은 빛이 언제나 냉정함을 잃지 않을 빛을 응시했다.
- 슈린츠요, 부군단장님. 슈린츠는 사방이 산이에요. 당연히 어디에나 숲이 있어요.
긴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는 듯한 히나의 말이 들려왔다.
아르센의 손 끝에 아주 잠시 냉기가 어리다 잦아들었다.
아르센도 바보는 아니라서.
이 정도의 설명으로도 히나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할 사람이 아니라서.
- 엘프들의 어머니가 정말, 카이리스의 편이 맞나요?
숲의 길을 여는 다누의 힘.
언제 어디서든 숲과 숲 사이로 길을 열 수 있을 다누의 힘.
그것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말임을 알아들은 까닭에.
"고맙네, 베른 경. 알려줘서 정말 고맙네."
작은 미소를 띤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 숨을 들이마신 아르센이 서둘러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대충 껴입은 옷 위에 발칸 부군단장의 로브를 걸쳐입은 뒤 마력을 운용했다. 이번에는 앨런의 식사 테이블 위가 아니라 그 비싼 소파에 제대로 들어가 앉을 위치를 실수없이 잘 계산한 뒤 텔레포트를 했다.
당장 경계해야 할 곳이 외성 밖이 아니라, 어쩌면.
시스파니안의 보호를 받는 왕궁 북쪽의 숲과 달리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숲. 사냥 대회를 위해 조성해 두었던, 왕궁 인근의 거대한 숲.
그래.
내성 안, 왕실 숲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
* * *
- 방해해서 미안한데, 에일라.
- 도와드려요?
- 단검 좀 던져줘. 계곡 반대편, 조금 아래 쪽에.
- 왕자님이 하시지 않고요.
- 그 정도까지 하기에는 어려워서, 지금 내가.
- 많이 다치셨나보네.
- 응. 조금 힘들어.
- 알았어요. 언제 던져요?
- 당장.
담담한 목소리로 건네진 말이 꽤 다급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 칼리안."
그나마 나지막이 들려온 플란츠의 목소리 덕에 알았다.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는 저 말을 정말 당장 실행하려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지는 않았을 거다.
물론 그랬다면 최소한 품 속의 단검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 쯤은 확인을 했을 테지만.
- 타닷!
어쨌거나 에일라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슬레이만이 한참을 걸려 건너왔을 그 다리가 있는 곳을 향해서, 태어나 가장 빠른 속도라 자신할 수 있을 빠르기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제야 품을 뒤졌다.
"아."
손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잡히는 것이라고는 손가락 굵기의 작은 마력탄들이 전부였다. 종아리에 매어 두었던 또 다른 단검을 꺼내들까 고민하던 에일라가 그 생각을 접었다. 집어던지는 용도의 단검에 비해 현저히 무거운 그것을 계곡 반대편까지 던져 꽂을 자신이 없었다.
키리에, 혹은 슬레이만에게 그것을 대신해달라 부탁할 시간도 없었다.
- 우지끈!
다리가 비틀리는 소리가 난다.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던 남은 하나의 기둥이 기우는 소리가 난다.
칼리안이 보인다.
저를 쳐다보는 형을 향해 아무 걱정 말라는 듯 실없이 웃기나 하고 있는 붉은 눈이 보인다. 자신을 주인 삼은 새 부하가 아직 아무것도 던지지 못했음을 알았을 텐데도, 그 손을 철썩같이 믿고 제 목숨을 맡긴 채 웃는 놈이 보인다.
"칼리안!"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 쿠궁······ 콰아앙!
보다 다급한 굉음이 들려온다.
칼리안의 몸이 디딜 곳을 잃는다. 그 손에 붉은 기운이 어린다. 조금도 눈을 감지 않은 채 에일라를 바라본다. 그리고.
추락한다.
떨어진다.
"젠장."
에일라가 짧은 욕설을 꺼냈다.
제 머리에 꽂아두었던 비녀를 뽑아들었다.
온 힘을 다해 그 비녀를 집어던졌다.
- 쌔애애액!
정말 머리나 고정하라고 만든 것이 맞기는 한지.
내 머리카락 말고 남의 머리에 꽂으라고 만든 것은 아닌지.
어지간한 암기보다 무게 중심이 잘 잡힌 미스릴 비녀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갔다. 은빛의 선이 계곡을 가로질렀다. 그 뒤를 눈으로 좇는 찰나의 시간이 하염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비로소.
- 콰아악!
꽂혀들었다.
반대편 벼랑의 바위 틈 새에 정확히 꽂혀들었다.
그러자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 촤악!
계곡 아래에서 붉은 빛이 강하게 뻗어나왔다.
- 휘리릭!
- 콰악!
단단히,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붉은 빛의 오러가 에일라의 비녀를 붙들어 잡았다.
푸른 다이아몬드가 햇빛을 받아 사방으로 빛을 뿌렸다.
이런 와중이지만······.
그 비녀 참 예쁘네.
그 모습을 본 에일라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 쿠웅······!
- 쿵! 쿠우웅! 쿠웅!
수많은 것들이 계곡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안네루시아를 녹인 물인 것처럼, 까마득한 계곡 위에 점점이 흩어진 붉은 것이 계곡의 푸른 물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 타닥, 탁!
플란츠와 키리에가 달려오는 소리가 그제야 들렸다.
그 뒤로 르메인이 달려오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오래지 않아, 에일라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며 내어 놓는 긴 한숨 소리가 연달아 이어진다. 그것을 듣던 에일라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 당연히 예뻐야지. 누가 누구한테 준 건데.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까닭에.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쥔 에일라가 절벽을 쳐다봤다.
- 제가 못했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했어요?
- 그럴 리가 있나. 에일라인데.
- 그 에일라 많이 놀랐었거든요.
- 주인 바뀔까봐?
- 주인 바뀔까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만약 안 됐으면 있는대로 바람을 불게 할 생각이었지. 너한테 기사 작위도 아직 안 줬는데 네 주인 바뀌는 꼴을 어떻게 보나.
- 라시드도 죽여줘야지.
- 그래. 라시드도 죽여줘야지.
대책없이 자신감 가득한 말을 풀어놓는 칼리안의 목소리. 그 소리에 실소한 에일라가 절벽 반대편을 쳐다봤다. 되새기듯 확인하듯 그렇게 다시 쳐다봤다.
제 오러로 단검도, 장검도, 방패도, 몽둥이도, 심지어 루시와 안네의 장난감도 만들어내는 놈이라서. 손에 드는 것에 편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칼리안이 오러를 채찍처럼 썼다. 길게 늘어난 오러를 손에 쥐고 절벽에 매달려 있었다.
- 이제 어떻게 하실 건데요.
- 몰라. 이 이상 오러를 더 늘리기도 힘들어.
- 그래서 거기 계속 계시려고요?
- 네가 구해 주겠지. 에일라.
- ······ 내가 어떻게?
- 알아서.
바위 틈에 꽂힌 튼튼한 미스릴 비녀.
그것에 온 몸을 의지한 채로.
- 형님한테 나 괜찮으니까 시들지 마시라고 전해줘.
- 이미 시들었으면?
- 글쎄. 또 걱정시켜서 죄송하다고 하면 되려나.
이런 걱정이나 꺼내놓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