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장. 대마법사가 되어야지(5)
푸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푸른 하늘 아래 푸른 호수를 곁에 두고 푸름 가득한 수많은 산책로에 둘러싸여 살았다. 사냥을 위해 찾았던 왕실 숲도, 왕도 주변에 심겨진 나무들도, 물론 푸르렀다.
그러나 푸름이 무엇인지 몰랐다.
성인식 로젤리타를 다녀오는 길에서조차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마차의 큰 창을 열어 둘 생각도 않고 어떤 것도 푸르다 여기지 못한 채 그저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무엇이 푸른지 안다.
나뭇잎 새로 비추는 햇빛이 푸르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 소리가 푸르고 은하수처럼 부서져 발을 적시던 파도가 푸르다. 작은 덤불의 풀내음과 손 끝에 어리던 안개가 푸르다. 루시가 달려오는 소리, 안네의 고로롱 소리, 리리에의 웃음소리도 푸르다.
신 귤의 향. 그 신 것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동생 놈이 말하던,
'워낙 파릇파릇하신 분이라.'
······ 아니. 그건 됐다.
지금껏 많은 것을 알았으나 몰랐고 이제 다시 알게 된 푸름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오늘 몇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는 것을 떠올리다, 저도 모르게 또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생각을 그렇게 갈무리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전하 무사히 찾고 나면, 다시 알려드릴게요. 산에 대해서.'
숲과는 또 많은 것이 다른 산의 푸른 공기, 까마득한 아래에서 흐르는 계곡의 푸른 물살을 지나쳐 건너편 산을 바라봤다.
- 쏴아아아!
칼리안이 건너간 다리, 그리고 수풀로 가려진 탓에 지금 서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다리 너머를 바라보던 플란츠가 시선을 되돌렸다. 얼마나 깊은 것인지 한 눈에 가늠도 되지 않을, 산과 산 사이의 푸른 흉터같은 계곡에서도 눈을 뗐다. 그 대신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쳐다봤다.
'형님 탓 아닙니다.'
'제온이 전하를 노렸다면 렌 경과 시종장은 물론 다른 시종들도 전부 다 죽였을 겁니다. 그러니 전하를 노린 것이 아닙니다.'
'설령 전하를 노린 것이 맞다 한들, 형님과는 상관없습니다. 이건 전하를 목표로 둔 놈들 탓이지 형님 탓이 아닙니다.'
이곳에 오기 전.
체르밀 궁의 5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칼리안은 그 말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겨서 이렇게나 급히 궁을 비우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내버려두고 그런 말만 했다.
제 형이 또 오지랖을 부릴까봐.
'자책이 아니라. 걱정하는 건데.'
그래서 대답했었다.
푸름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가르쳐줬던 동생 놈한테, 그렇게나 푸른 것 중에는 누군가를 걱정하는 모습도 들어있었노라고.
"······ 브리지트 경."
짧은 회상을 끝낸 플란츠가 '아우님의 새 부하'라는 호칭 대신 다른 말로 에일라를 불렀다. 란델을 등 뒤에 둔 채로 에우리아의 주변을 경계하던 에일라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 저하."
"호위 대상은 형님 뿐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아니에요."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른 설명이 없었다.
언제 모습을 드러낼 지 모를 놈들 덕에 긴장한 탓도 있었지만 사실 에일라도 말 수가 적은 편이 아니던가.
어쩌면 낯가림이 심하다 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칼리안을 대할 때만큼 긴 말을 하기엔 플란츠와 대화를 나눈 일이 너무 없었으니까.
"브리지트 경이 란델 왕자님을, 제가 저하를 호위합니다. 왕자님께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덕분에, 과묵하기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키리에가 끼어들었다. 에일라보다 먼 곳에 서 있기는 했지만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상황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대답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없었지만.
어쨌든 눈치 빠른 플란츠는 적당히 이해를 했다. 칼 뽑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가더니, 사실은 이미 진작부터 플란츠까지 '호위 대상'에 두고 있던 모양이라고. 그래서 이렇게 란델의 옆에 사이좋게 밀어넣고 에일라와 키리에로 하여금 앞을 막고 서 있도록 했나보다고. 칼리안이.
"왜."
"저하께서 상대하시기 버거운 이들입니다."
"상대해봤어."
세크리티아의 별궁에서 히나와 키리에가 린 후작저에 갈 시간을 벌고자 플란츠가 혼자 제온을 막아섰던 일이 있었다. 칼리안은 물론이고 발칸 놈들까지 안 믿어주는 날이 많아 굉장히 억울하지만 어쨌든 플란츠도 칼을 쓸 줄은 아는 사람이 아닌가.
"상대하다 다치셨습니다."
"버거워서 다친 것 아니야."
그래. 다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놈들이 던진 마취제에 맞았기 때문이지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플란츠 저하와 란델 왕자님을 호위하라고. 저는 왕자님께 그렇게 지시받았습니다."
"언제까지 나를,"
"게다가 저하 역시 신력으로 치유받으면 안 되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 입이 무겁지 않다 하시더니. 정말이군. 내 아우님께서."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걱정하셨을 뿐입니다."
"치료 받을 일 없어. 어차피."
다칠 일도 없을 뿐더러 어차피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하더라도 란델에게 치료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란델 역시 마찬가지. 플란츠의 목숨줄을 두 번이나 늘려 줄 생각 따위는 없을 터였다.
플란츠가 여전히 아무 말없이 서있는 란델을 일별했다. 그리고 키리에가 서 있던 곳의 옆으로 걸어간 뒤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피 냄새."
키리에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그것을 똑바로 응시하던 플란츠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 나던데. 내 아우님에게서."
"그건."
키리에가 무어라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플란츠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손바닥 상처는 왜 여전하지."
"어제 카스트린 경과 대련하다 벌어진 상처입니다."
"그랬다 해도 다시 아물었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다쳤다.
스치고 베인 단순한 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손바닥만 다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껏 왕궁으로 히나를 불러오게 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치료받을 생각도 없이 이동 마법진을 썼다. 히나가 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왜 다쳤는지, 어떤 상태인지 안 물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저는 왕자님의 명을 어길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뒤에 계십시오, 저하."
"걱정, 되니까."
'걱정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든 전하는 제가 무사히 모셔올 테니까.'
"걱정되니까. 한 시라도 빨리 정리하고 가서 아우님 쪽도 돕자고. 그런 말을 하는 거잖아. 내 잘난 아우님 명령을 어기라는 게 아니라."
플란츠를 바라보던 키리에의 눈이 반대편 산을 향했다.
잠시 후, 플란츠만큼 낮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저하."
"왜."
"마음이 산란하면 검 끝도 방향을 잃습니다."
"내가 할 말인데."
"저는 싸움에 집중할 줄은 압니다."
"알아. 나도. 그 정도는."
"저하께서 쉽게 상대하실 수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알아. 그것도."
"······ 그러니 무리하게 나서시면 안 됩니다. 조급하게 상대하려 들지 마십시오. 힘들어지면 물러나십시오."
"알았어."
"알겠습니다."
허락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 파지지직!
- 콰앙, 콰아아앙!
보랏빛 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바람이 일었다.
잔 바람에도 흔들거리던 다리는 그저 계속 흔들렸을 뿐, 바람 이상의 무언가를 담은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또렷한 인영이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새 다리를 건너온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바람이 일었다.
- ······ 쿵!
- 쿠웅, 쿵! 쿵!
그 바람이 잦아들었을 땐, 정확히 같은 상처를 목에 매단 네 명의 시신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온의 검사들이었던 이들이 그렇게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제온의 일당 중 한 명이 남은 추격자들의 발을 멈춰세웠다. 그리고 자신을 마주한 이의 붉은 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 칼리안."
"왕자님."
놈의 말을 받은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하고 불러야지. 버릇없잖아."
버르장머리 없는 게 꼭 브리센같네.
이렇게 중얼거리던 칼리안이 앞을 둘러봤다. 그리고 자신의 첫 공격이 만든 결과를 확인해봤다.
'넷.'
넷을 죽였다.
서른 셋이 남았다.
키리에가 생각한 수보다 훨씬 더 많다. 그렇다는 건, 키리에가 발소리를 가늠해내지 못했을 만큼의 실력자들이 섞여있다는 소리다. 이를테면 대사막의 늑대같은 놈들 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칼리안은 별달리 동요하지 않았다. 예상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 슬레이만이 고작 저 정도의 수를 당해내지 못해 옆구리가 꿰뚫린 것은 아닐 테니까.
"칼리안 왕자. 우리는 지금 네가 아니라."
처음 칼리안을 불렀던 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쌔애애액!
- 서걱!
그러나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번쩍하는 붉은 빛과 함께 목의 절반이 잘려나간 놈의 시신이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말 잘라서 미안하지만."
말이 아니라 목을 잘랐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붉은 입술을 계속 움직였다.
"협상하러 온 게 아니라서, 나는."
공격 사유에 대한 뒤늦은 설명이 이어진다.
- 우우웅!
- 우웅······!
잠시 검을 내려들었던 제온의 검사들이 자신들의 검에 오러를 담았다. 이곳에 도착한 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타앗!
혼자 뛰어든 이의 미소가, 그 여유로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동료 다섯의 죽음을 금세 잊은 놈들이 칼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왕자님, 제가 돕겠습니다."
"전하와 지그프리드 공 살펴요. 괜찮으니까."
로난시테를 막은 칼리안이 마력을 움직였다.
- 휘이이잉······!
강한 바람이 다시 불었다.
산 속 이곳저곳에 흐트러진 나뭇잎과 흙, 자잘한 돌을 다 실은 채 앞에 선 놈들을 향해 불어닥쳤다.
시야를 방해받은 놈들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 우웅!
- ······ 쌔애애액!
그러자 그 때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다섯 개의 붉은 검이 허공에 떠올라 놈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붉은 잔상이 흐린 시야에 새겨진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붉은 빛.
그것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 쌔애액!
- 콰직!
생의 끝이 선고된다.
- 쌔액, 쌔애애액!
- 서걱!
- ······ 콰직!
칼리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목이 관통되고 심장이 꿰뚫리고 미간이 패인 이들이 먼지구름 속에 하나 둘 바닥을 나뒹굴었다.
- 카앙, 카아앙!
- 콰직!
거센 바람에 간신히 눈을 뜨면 어김없이 죽어나가는 이들이 보였다. 앞으로 나서면 죽었고 가만히 서 있어도 죽었다. 어디선가 날아드는 칼날을 간신히 막아내면 어느새 뒤로 찾아든 다른 칼날에 몸이 꿰뚫렸다. 등 뒤가 서늘하다 여겨지면 옆구리로 파고든 검이 심장을 뚫고 나왔다.
계곡에서 올라오는 바람보다 더 드센 바람 속에 계속하여 죽음이 담겼다.
- 쿵, 쿠웅!
- 콰직! 쿠우웅!
- ······ 서걱!
앞을 분간하지 못할 바람이 잦아들었을 즈음, 이제야 간신히 눈을 뜬 이들이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스물 다섯."
굳이 애쓸 것 없다는 듯한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껏 스물 다섯이 죽고 열 둘이 남았다고.
남은 놈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먼지구름 속에서도 칼리안의 검을 모두 쳐내고 살아남은 전사 한 명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여전히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르메인과 슬레이만, 그리고 로난시테의 앞을 가로막고 선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스물 다섯을 죽였다. 그 짧은 시간에 무려 스물 다섯을 죽여 없앴다. 저 실력에 직접 검을 들고 뛰어들었다면 이 쪽은 이미 다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뒤에 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굳이 힘을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 여겨서인지, 혹은.
'몸을 사리나.'
부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찰나의 시간 동안 여러 가정을 꺼내 본 전사가 제 손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제외한 열 한 명의 동료들을 향해 짧은 수신호를 만들어 보였다.
- 버틴다. 다른 전사들을 기다린다.
무리하게 나서지 말고 건네져오는 공격을 막아내면서, 반대편 산에서든 혹은 이 산에서든, 조금 전 쏘아 올린 신호탄을 보았을 지원군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 사사삭!
수신호를 확인한 이들이 대형을 바꿔 섰다.
한 명을 상대로 공격을 펼치던 산개 대형이 아니라 다수의 적으로부터 버티며 시간을 벌기 위한 밀집 대형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그려졌다.
- 타박.
칼리안이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앞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몸을 돌려 뒤를 보고 섰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당했는지 모를 깊은 상처를 입고 간신히 서 있던 슬레이만과, 슬레이만을 부축하고 선 로난시테를 봤다. 그리고 그제야 눈을 마주치게 된, 자신과 같은 빛의 머리카락과 전혀 다른 빛의 푸른 눈을 지닌 이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모시러 왔습니다, 전하."
조금 늦은 인사를 전했다.
겁을 집어먹고 뭉쳐 선 열 두 명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 * *
소용없는 짓이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파지직, 콰아앙!
- 콰앙, 쾅! 콰아아앙!
나도 칼을 들겠다.
알았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싸워라.
그런 비장한 대화를 주고 받을 필요가 없었다.
- 콰아아앙, 콰과광!
누가 오기는 해야 칼을 들고 싸우든 말든 하지.
감히 누가 에우리아의 벼락을 뚫고 가까이 다가오겠나.
"······ 물러서 계십시오, 저하."
"······ 그래."
에우리아가 불러낸 천재지변을 제대로 목도한 기사 한 명과 왕세자 한 명이 얌전히 한 발씩을 물러 섰다.
- 콰과과광, 콰앙! 콰아앙!
십 수 번의 번개가 계속하여 산을 뒤흔들었다.
깊은 울림이 메아리치고 멀찍이 보이는 다리가 휘청인다.
살과 뼈가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을 했다. 그것이 무엇의 살과 뼈인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 에일라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의 반격이 있을 거예요. 기사들은 못 오니까."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 검을 다잡으며 언제 날아들지 모를 마법 공격에 대비했다.
이러한 뒷사정은 모른다는 듯, 검게 그을린 대지를 가만히 지켜보던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뒤에 선 일행들이 아닌 다른 쪽을 향해서였다.
"대사막 강아지들. 많이도 왔네."
"······ 사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죽어있는 검은 시신들의 사이에서, 놀랍게도 온전한 모습으로 번개를 버텨낸 이들 중 한 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알아봤으면, 가."
이제는 '한낮의 사신'이라는 소싯적의 별명보다 '코코 아빠' 쪽을 더 마음에 들어하게 된 에우리아가 대꾸했다. 그러나 그런다 해서 물러날 리 없을 놈들이 에우리아의 뒤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네가 있다면 그 왕자도 왔겠군."
"어. 어느 왕자님 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다 오시긴 했어. 그러니까, 가."
훠이 훠이.
새를 쫓아내듯 손을 휘휘 저은 에우리아가, 짙은 살기를 풀풀 풍기는 대사막의 전사들을 향해 말을 더했다.
"뒤지기 싫으면."
모여드는 마력을 감당하지 못한 로브가 사납게 펄럭였다.
그것을 본 전사들이, 번개의 범위에 미치지 않아 운 좋게 목숨을 구한 다른 검사들과 마법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인 뒤 발을 박찼다. 에우리아를 향해서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우리아의 시선이 전사들의 발 밑을 향했다.
- 울렁, 울렁······.
- ······ 불쑥!
전사들이 다가서던 방향의 땅이 파도치듯 일렁거렸다. 그러더니 마치 두더지 한 마리가 머리를 드밀듯 한 곳의 흙이 쑥 솟아나왔다. 그와 함께,
- 콰아앙!
- 파지직, 파직!
계곡 아래의 물을 죄 끌어올린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거대한 물줄기가 전사들의 앞에서 솟구쳤다. 그리고 가장 앞에서 달려들던 세 전사의 몸을 휘감으며 올라갔다. 물에 어려있던 번개의 힘이 전사들의 몸을 있는대로 휘젓기 시작했다.
- 콰아아, 콰아아앙!
에우리아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한 쪽에서는 세 전사의 온 몸에 전류를 흘려넣으면서,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다시 한 번 물을 움직였다. 바닥을 뚫고 뻗어나오던 물줄기가 다른 방향의 전사들을 향해 쏟아졌다.
- 콰아아아!
산 위에서 홍수가 쏟아지듯이, 산을 타고 넘은 해일이 앞에 놓인 것들을 전부 쓸어내리듯이.
전사 셋과 검사 둘, 그리고 한 명의 마법사를 틀어잡은 거대한 물이 그대로 계곡을 향해 쏟아져 내려갔다.
긴 비명소리의 끝에 둔탁한 파열음이 들려온다.
계곡 아래로 추락했으니 제아무리 대사막의 전사라 한들 살아남지 못하리라.
- 파앗!
그런데 그 순간.
운 좋게 텔레포트를 성공하여 추락을 벗어난 마법사가 에우리아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화르륵!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 놈이 재빨리 마력을 운용했다. 그와 함께, 본능적으로 발을 박찬 키리에가 마법사를 향해 검을 뻗었다. 하지만.
- 쌔애액!
- ······ 콰직!
마법사의 바로 뒤에 에우리아가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듯 날아든 단검 하나가 마법사의 목에 적중했다.
적에게 다가가 칼을 쓰는 동안 곁을 비워도 곧바로 죽지는 않을 플란츠와 달리 잠시도 떨어져서는 안 될 란델이니까. 때문에 암기에 능한 에일라를 붙여둔 것 아니겠나. 이런 칼리안의 뜻을 잘 이해한 에일라가 검을 뻗거나 발을 차내는 대신 단검을 던진 것이었다.
- 쿠구구궁······ 콰아앙!
- 파지직, 파직!
자신을 지나쳐간 마법사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았던 에우리아가, 아직도 많이 남은 제온의 놈들을 계속 상대해나갔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검을 휘두르는 이들의 발을 물줄기로 막은 뒤 텔레포트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방금 전 공격을 해왔던 놈을 향해 번개의 화살을 꽂아넣었다.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물이 흥건한 온 바닥에 전류를 뻗어내 전사들의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에우리아를 공격할 범위 안에 들어서 검을 휘두르면 허공을 벤다. 에우리아가 어느새 몸을 뺀 것을 확인하고 시선을 돌리면 전기 공격이 날아든다. 그것을 피해내면 또 다시 몰아치는 너울이 몸을 휩쓸어갔다. 나무 뿌리에 검을 박아넣고 쓸려내려가는 것을 버티면 전기의 창이 다시 코앞이었다.
- 콰아앙!
그렇게 에우리아에게는 조금도 가까이 다가서지 못한 채, 검사와 전사들의 수가 계속하여 줄어들어갔다.
일행의 근처에는 가까이 오지도 못하던 여덟 명의 마법사들이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 파앗!
- 파아앗!
에우리아를 지나쳐 남은 일행들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로 일제히 텔레포트를 했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마력을 모아 남은 일행들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 화르륵!
- 우우웅······ 뭉클!
- 파지직, 파직!
불과 물, 번개의 힘이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지체할 여유 없이 쏘아지듯 달려나간 키리에가 바람처럼 검을 내보냈다. 그 뒤를 이어 에일라의 암기들도 쉼없이 쏟아져나갔다.
- 콰직!
- 쌔애액! 콰악!
- 서걱!
순식간에 다섯 명의 마법사가 목숨을 잃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키리에와 함께 달려나갔던 플란츠의 검 끝에서도 한 명의 마법사가 숨을 놓았다.
그 순간.
- 파앗!
키리에의 검을 피해 텔레포트한 마법사 한 명이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제 코앞에 서 있게 된 이를 봤다.
금발.
검도 마법도 부리지 못하는, 가장 나약한 왕자.
란델을 향해 팔을 뻗었다.
사라진 마법사를 찾던 키리에와 에일라가, 플란츠가, 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상황을 파악한 에우리아가 란델 쪽으로 팔을 뻗었다.
마법사가 실소했다.
다 상관없다. 누가 무엇을 하든 늦다. 마법을 쓸 필요도 없이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란델을 겨눴다.
- 스윽.
그런 마법사를 향해 란델이 팔을 뻗었다.
그러더니.
- 파아아앗!
치유력을 내보냈다.
마법사의 몸으로부터 반 뼘 떨어진 곳에 손을 올린 채로. 마법사의 몸에 조금도 손을 대지 않은 채로.
- ······ 치익!
- 치이익, 치익!
눈부신 붉은 빛에 휩싸인 마법사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강한 신력에 맞닿은 심각한 반발력이 속을 태우기 시작했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울린다.
- 터억!
날듯이 다가온 에일라가 마법사의 멱살을 붙들어잡고 먼 곳으로 떨쳐 냈다. 그리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마법사의 명치를 강하게 돌려찼다.
비척비척.
몇 걸음을 뒤로 움직이던 마법사의 몸이 덜컥 멈춘다. 벼랑 끝을 디디게 되었음을 안 마법사가 뒤늦게 마력을 움직인다.
- 후두둑, 후둑!
하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탓에.
속절없이 아래를 향해 떨어져내리는 마법사의 긴 비명이 이어진다.
마법사가 그 정도로 가까이 올 줄은, 마력이 아니라 단검을 꺼내들 줄은 생각 못한 에일라가 사과의 말을 전하고자 란델에게 고개를 돌렸다.
"되었다."
그런데 란델이 먼저 이런 대답을 전했다.
누군가를 처음으로 공격해봤다 하기보다는 그저 치료를 했을 뿐이라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침착한 얼굴을 한 채로.
란델에게 치료받는 것은 내 평생 정말로 두 번 다시는 없는 일이어야 하겠다고, 이렇게 또 한 번 굳은 결심을 한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 쪽으로 이동해 온 마지막 마법사의 심장에 에일라의 단검이 날아가 박히는 것에서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지치지도 않고 계속 짓쳐드는 놈들, 그들을 향해 뻗어나가는 에우리아의 마법, 긴장한 얼굴로 경계를 계속하는 키리에와 에일라가 보였다. 그들에게서도 다시 눈을 돌린 플란츠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 타닥, 탁!
어느새 다리를 모두 건너 다가온 이들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난전이 이어진 까닭에, 그리고 에우리아의 마법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굉음에 귀가 멀 듯 하여서. 다리를 건너오는 이들을 눈치 채지도 못하고 그들의 소리도 듣지 못했었다. 키리에조차도.
때문에 이제야 보게 되었다.
로난시테에게 부축을 받으며 힘들게 발을 옮기는 슬레이만이 보였다. 그 뒤를 따라 오고 있는, 르메인이 보였다.
그런데 함께 있어야 할 놈이 없었다.
"지그프리드 공."
기적적으로 만들어진 고요함이었다.
그 사이를 뚫고 울린 플란츠의 목소리에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다급한 얼굴의 슬레이만이 키리에를 향해 말했다.
"베른 경. 서둘러 건너편으로 가게."
"알겠습니다."
일말의 되물음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키리에가 다리를 향해 달렸다. 그런데 그 때.
- 쌔애애액!
붉은 단검이 빛처럼 날아들었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다리의 한쪽 기둥을 스치고 지나갔다.
- 투둑······ 툭!
두터운 밧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굳건하던 다리의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플란츠의 눈이 벌어졌다.
다리.
그 다리 위.
서른이 훌쩍 넘는 놈들이 어느새 다리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들을 막아선 칼리안이 다리 위에 있었다.
* * *
'지그프리드 공.'
'네, 왕자님.'
'놈들 중 대사막의 전사가 있었습니까.'
'열 다섯입니다.'
'남은 것은요.'
'일곱이 남았습니다. 아마도 더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다리 건너편에 치유사가 있으니 먼저 가십시오. 나머지는 내가 맡겠습니다.'
'혼자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칼리안이 웃었다.
'등 뒤만 가벼우면, 얼마든지.'
* * *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 쪽의 싸움을 이어나가느라 반대편을 살피지 못했다.
짙은 피 냄새가 이 곳까지 풍겨온다.
- 쌔애애액!
붉은 검이 다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았다.
"무슨······!"
붉은 검은 멈추지 않았다.
산과 산을 이어 둔 유일한 다리를 향했다.
벼랑에 박힌 단단한 말뚝으로, 그것에 연결된 두터운 밧줄로 날아들었다.
- ······ 서걱!
그것을 끊어냈다.
모조리 끊어냈다.
지지할 곳을 하나 더 잃은 다리가 크게 휘청인다. 밧줄을 잃은 다리가 제멋대로 뒤틀린다. 그 위에 오른 이들의 무게를 버텨내려 안간힘을 쓰듯, 다리가 비명을 질렀다.
- 우지끈!
다리가 다시 한 번 크게 휘청인다.
붉은 검이 다시 한 번 날아오른다.
휘청이는 다리를 간신히 붙들고 있던 마지막 밧줄을 향해 날아든다. 막아낼 새도 없을 속도로 날아든 그것이 결국,
- 서걱!
마지막 밧줄을 잘라낸다.
"······ 칼리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투둑, 툭!
- 우지끈!
지지할 곳을 다 잃은 다리가 부서졌다.
균형을 잃은 놈들이 다리 밖으로 튕겨나갔다.
- 쿠궁······ 콰아앙!
찰나의 순간, 붉은 시선이 와 닿았다.
놈이 웃었다.
그리고.
"칼리안!"
추락한다.
푸름 가득한 계곡, 그 끝모를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