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23화 (424/527)

제75장. 대마법사가 되어야지(4)

- 카아아앙!

동강난 검이 몇 바퀴 쯤 공중제비를 돌다 바닥에 꽂혔다.

그러나 그 모습에 눈을 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부웅!

쓸모없어진 검을 내버리고 단검을 꺼내들던 이의 허리에 슬레이만의 검이 찍혀들었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제법 두터운 갑옷이 검을 막았겠으나, 푸른 오러가 넘실대는 검을 맞닥뜨린 상황에서는 갑옷이든 사람 가죽이든 그리 다를 것이 없던 터라.

- 카드득······!

- 콰직!

있는대로 우그러지던 갑옷이 결국은 찢어지듯 벌어졌다. 틈새를 파고든 묵직한 검날이 약하디 약한 사람의 살을 가르고 그 속의 것을 부서뜨렸다.

착용자의 생명을 몇 초 늘려주는 것에 일조한 갑옷에서 검을 빼낸 슬레이만이, 쉴틈없이 달려드는 다음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대륙 두 번째 소드마스터의 눈에 들게 된 놈이 검을 뻗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두 명의 검사가 슬레이만을 향해 함께 달려들었다.

- 카앙, 카아앙!

귀를 어지럽히던 계곡의 물소리 대신 차디찬 날붙이가 만들어내는 비명소리가 산을 울린다.

앞으로 달려들던 슬레이만이 돌연 한 발자국을 물렸다. 그리고 뒤에서 달려들던 놈의 검 손잡이를 자신의 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고 단단히 죄였다.

- 챙강!

슬레이만의 옆구리와 팔꿈치 사이에 손이 붙들린 검사가, 손목에 가해지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놨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뒤로 돌아선 슬레이만이 자신의 검 손잡이로 놈의 얼굴을 강타했다.

- 빠각!

- ······ 쿵!

유쾌하지 않은 소리.

이마가 함몰되어 죽은 기사가 힘없이 쓰러진다.

그 모습을 확인하며 큰 숨을 들이쉰 슬레이만이 본래 향하려던 방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카아앙, 카각! 캉!

- 카가가강!

붉은 빛을 내던 두 명의 검을 그대로 부숴낸 푸른 오러가 지치지도 않고 계속 뻗어나갔다. 그러더니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놈의 갑옷과 가슴을 함께 잘라낸 것으로 모자라 그 뒤에 선 놈의 목을 반쯤 파고든 뒤에야 슬레이만에게로 되돌아갔다.

"후."

멈추었던 숨을 내쉰 슬레이만이 끝을 모르고 덤벼드는 놈들을 보며 검을 다잡았다.

한 명.

한 명만 더 있었다면.

진작에 놈들을 다 죽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을 것을!

소용없는 것을 알면서도 벌써 몇 번째 드는 생각을 접은 슬레이만이 발을 박찼다.

- 쿠웅!

육중한 몸의 어느 곳에서 그런 탄력이 나오는 것인지.

돋움닫기조차 하지 않은 채 순식간에 몇 걸음 앞으로 날아들듯 움직인 슬레이만이 또 다른 검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검과 함께 목이 꿰뚫린 놈을 발로 차 멀찍이 내보낸 뒤 다음 놈의 심장과 그 뒤에 서있던 놈의 배를 함께 내리꽂았다.

저 많은 놈들이 대체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알게 된 사실이라고는 그저, 놈들이 정말 지랄맞게도 많다는 것, 어지간한 상처로는 죽지 않는다는 것, 놈들 중 절반 쯤은 출처 모를 붉은 오러를 쓴다는 것.

그리고.

- 화르륵!

- 쌔애애액!

저 놈들 중에는 마법사가 있다는 것.

"로난시테!"

불덩이의 방향을 가늠한 슬레이만이 소리쳤다.

적의 심장에서 검을 빼내던 로난시테가, 곁에 있던 르메인의 뒷목을 부여잡고 다급히 몸을 숙였다.

- 휘익!

- 콰아아앙!

아슬아슬하게 둘의 머리 위를 지나친 화염구가 계곡 반대편의 바위에 적중했다. 굉음과 함께 반쯤 그을린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것이 보인다.

"실례했습니다, 전하."

"아니네."

계속 실례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이미 했다.

세 번이나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성이 기사인지라. 벌써 몇 번째인지 세기 어려울 말을 다시 건넨 로난시테가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잴 것도 없다는 듯 제 검을 그대로 올려그었다.

- 서걱!

- 쿠우웅!

소리도 없이 뒤로 달려와 검을 내리치려던 검사 한 명이, 검을 쥔 양 팔을 높게 들어올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놈의 가슴에 길게 새겨진 검흔에 잠시 눈을 찌푸린 르메인이, 왼손에 들고 있던 작은 활을 들었다.

지치지도 않고 따라붙는 저 놈들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것을 슬레이만이 주워다 건네 준 활이었다. 멀뚱히 서 있기만 하면 자네가 우리에게 많이 미안할 테니 조금 덜 미안하도록 뭐라도 하라는 배려심 가득한 말과 함께.

다른 것은 젬병이어도, 기마 다음으로 사냥을 좋아하는 만큼 활은 좀 다룰 줄 아는 르메인이 아닌가. 할 줄 아는 것이 있든 없든 모가지가 간당간당해서 그렇지.

뭐, 아무튼.

덕분에 네 발이 달리거나 날개 한 쌍이 달린 생물 말고 두 다리가 달린 생물을 오늘 처음으로 쏘아 보게 되었던 르메인이 한 촉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적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놈을 겨냥했다.

- 욱씬!

그의 형 아스난에게 옆구리를 베였던 날 이후로 오늘 다시 느껴보게 된 날카로운 통증이 신경을 타고 머리를 울린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같은 통증을 느꼈으나 익숙해지기에는 요원한 느낌에 르메인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시위를 당기던 팔에서 힘을 풀지는 않았다. 그런 것에 큰 신경을 썼다가는 로난시테가 또 한 번 실례했다는 말을 하게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 드드드득!

있는대로 당겨진 시위에 활대가 크게 휘었다.

팔이 흔들리는 것을 참아낸 르메인이 시위에서 손을 뗐다.

- 피잉!

- 쌔애애액!

반대로 가해지던 힘에서 벗어난 화살이 빛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큰 나무 뒤에 선 마법사의 머리를 꿰뚫었다.

- ······ 쿵!

시신이 된 것이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전해진다.

고개를 돌린 르메인이 이제 몇 개의 화살이 남았는지를 확인해보는 사이, 어느새 두 명의 검사를 더 죽인 로난시테가 르메인 쪽으로 검을 뻗었다.

- 부우웅!

묵직한 검 끝에 바람이 인다.

르메인의 귀를 스치듯 뻗어나간 로난시테의 검이 르메인의 뒤로 달려들던 검사의 목에 깊은 상처를 냈다.

한 번 더 힘을 주어 혹시나 치유가 가능한 놈이었어도 회복할 수 없도록 완전히 생명을 끊어낸 로난시테가 단조로운 목소리를 냈다.

"실례했습니다, 전하."

"······ 그래."

평생 들을 사과를 그냥 오늘 다 듣는 셈 치는 게 낫겠다.

이렇게 마음먹은 르메인이 적당한 대답을 했다.

* * *

잠시 아득해지던 시야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삽시간에 주변 풍경이 완전히 달라지는 일은 이미 몇 번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낯설다.

고개를 돌려 옆에 선 레이븐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린 칼리안이, 레이븐에게 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안장에 올랐다. 그리고 곁에서 묵묵히 말에 오르는 란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속이 울렁거릴 수 있습니다."

"조심하라 일러주기에는 늦은 말이구나."

"이동 전에 경고해드리면 괜히 겁내실까봐요. 돌아갈 때는 이동하기 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되었다."

"속 불편하시면 말씀해주시고요."

"되었다. 그것도."

"네."

불편하다 했어도 시간을 지체할 생각은 없었던 칼리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동 마법진을 통해 처음으로 찾아온 손님들 사이에 무려 한 명의 왕세자와 두 명의 왕자가 있음을 알고 적잖이 놀란 마법사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곧 이동 마법진을 둘러싼 방벽을 지나 밖으로 나온 칼리안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에일라. 키리에."

"네."

"네, 왕자님."

"앞으로 와서 서."

"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변을 경계해야 했던 까닭이다.

- 다각.

칼리안이 한 발을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키리에가 플란츠의 오른쪽으로, 그리고 에일라가 란델의 왼쪽으로 왔다. 함께 온 에우리아는 자연스럽게 일행들의 가장 뒤를 맡게 되었다.

"세이렌 경."

"네, 왕자님."

"주변 경계 단단히 해 줘요. 지그프리드 공을 붙잡았거나, 공이 물러나도록 했을 정도의 실력은 있는 놈들이니까."

"염려마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두 형을 한 번씩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안 시킬 거니까 두 분은 서로 싸우지만 마십시오."

분명 그 말을 들었을 테고 칼리안이 말하는 '두 분'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아닐텐데도 완두콩과 옥수수수염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속내를 가늠해 볼 필요도 없다. 머릿속이 심난한데다 듣는 귀 많은 앞에서 동생에게 짖지 말라는 말을 할 수도 없다는 이유가 하나, 동생의 말이 말같지 않아서 대답할 필요를 아예 못 느꼈다는 이유가 하나다. 두 침묵의 이유가 퍽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 다각, 다각.

어차피 답을 기다린 것도 아니었던 칼리안이 고개를 되돌렸고, 그와 함께 레이븐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칼리안."

에스티나를 출발시킨 플란츠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

"도로로 가실 생각인 것 같은데."

"맞습니다."

"왜."

"슈린츠 성 내부는 슈린츠 변경백이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어딘가에 붙들려 계신다면, 새벽에는 성문이 열리지 않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을 테니 변경백이 찾아낼 겁니다. 그게 아니라 비밀통로로 나와 도망치는 중이라면 이동 마법진 쪽으로 향하고 계실 테고요. 물론 도망치는 마당에 말을 구할 수도 없고 멀쩡한 도로로 달려올 수도 없으니 산을 넘어서요."

"그러니까."

슈린츠 성 내는 일단 슈린츠 변경백에게 맡겨두고, 르메인이 오고 있을 산 속을 뒤져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리인 것이다. 주변에 널린 산을 두고 잘 닦인 도로 위로 말을 달리기 시작하니 꺼낸 말일 터였다. 르메인을 찾을 것이라면 도로를 달릴 것이 아니라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거기까지 생각한 것은 좋지만 한 가지를 놓친 플란츠에게 칼리안의 대답이 전해졌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산이 더 험합니다. 고작 두 시간 거리라고는 해도 그건 말을 달렸을 때의 일이고요. 전하께서 다른 일 없이 밤새도록 걷기만 하셨다 한들 이런 산 너머로는 절대로 못 오십니다."

- 다그닥, 다그닥!

곧 레이븐이 발을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몇 시간 전에 출발하셨을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오래 걸었다 가정하더라도 기껏해야······ 슈린츠에서 말을 이용해 20분 거리, 혹은 30분 거리. 사실 그 정도나 오셨으면 다행이겠습니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으나 우아함을 잃지 않는 레이븐의 안장 위에서 크게 흔들리는 것 없이 앉아있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인근까지 최대한 빠르게 간 뒤 그 때부터 산 속으로 들어가 찾는 것이 낫습니다. 지그프리드 공이 무사하고 전하께서 마법진 위치를 기억하고 계시기만 하면, 지그프리드 공이 전하께서 걷기에 무리없을 길을 찾아 안내하고 있을 테고요. 어느 쪽으로 오고 계실지에 대해서는 산에 오른 뒤 살펴보면 제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 만약 아니라면."

"슈린츠의 북쪽은 사람이 다닐 수 없을 만큼 험한 지형이라 들었습니다. 비밀통로 출구는 남서쪽으로 이어져 있고요. 기대와 달리 지그프리드 공이 무사하지 않거나 전하께서 마법진 위치를 정확히 아시지 못한다 해도, 굳이 북쪽으로 향하기보다는 이동 마법진이 있을 곳으로 향하고 계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같은 방향으로 더 가면 에이프린 백작령이 있지 않습니까. 에이프린 백작이 제 편의 사람이니 그 곳에 몸을 피하면 된다 생각하실 겁니다."

플란츠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본 것은 아니었으나 수긍했으리라는 것을 안 칼리안이 레이븐의 속도를 조금 더 올렸다.

남부 지역에 마법 학교의 분교를 세우는 일로 자리를 비운 레이첼과 함께 오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하면서.

그리고, 푹 자고 밥을 많이 먹은 것만으로는 다 낫지 않은 속으로 이동 마법진을 사용한 결과를 알려오는 몸은 무시하면서.

* * *

- 콰직!

뻗었던 검을 옆으로 휘두르듯 회수한 로난시테가 옆에서 달려들던 기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 뒤 놈의 갑옷에 끼인 검이 곧바로 뽑아지지 않자 긴 다리로 놈을 차내며 검을 뽑아냈다.

더운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와 땅을 적신다.

곧 세 명의 기사가 르메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 카앙, 캉!

- 카강!

그러자 재빨리 그들의 앞을 막아선 로난시테가 두 명의 검을 막아 흘려내는 것으로 다른 한 명의 검을 같이 쳐냈다.

얽혀버린 세 개의 검에서 자신의 검을 회수한 검사가 로난시테를 향해 공격을 보냈다. 그것을 다시 쳐낸 로난시테가 허리를 튕기며 놈의 검을 밀어냈다. 그리고 두 번째 검사가 손에 든, 붉은 오러가 가득한 검을 막고자 자신의 검을 횡으로 들었다.

그렇게 로난시테의 손이 묶이기를 기다렸다는 듯.

세 번째 검사의 검이 로난시테를 향해 쇄도했다. 자신의 검을 다잡은 첫 번째 검사 역시 로난시테를 향해 달려들었다.

- 휘이익!

- 캉! 카가강!

등 뒤에 르메인이 있으니 몸을 틀어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강한 힘을 주어 붉은 빛의 검을 밀어낸 로난시테가 옆의 기사를 길게 벴다. 어깨부터 배꼽 부근까지 긴 검상을 입은 놈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다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보인다.

숨을 돌릴 틈이 없다.

붉은 오러를 내는 검사 한 명, 그리고 또 다른 검사 한 명. 아직 둘이 남았기 때문에.

- 카앙! 캉! 카아아앙!

시야를 어지럽히는 붉은 기운을 무시하며 두 놈의 공격을 계속 쳐내던 로난시테가 자신의 무거운 검을 한 손으로 옮겨잡았다. 그렇게 한 손으로 두 자루의 검을 버텨내면서, 비게 된 남은 한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허벅지에 채워 두었던 단검을 뽑아들어 앞에 선 놈을 향해 그대로 휘둘렀다.

- 서걱!

턱밑이 갈라진 놈의 피가 로난시테의 얼굴에 쏟아지듯 튀었다. 그것 역시 무시한 로난시테가 들고 있던 단검을 내버린 뒤 다시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그리고 어느새 코앞까지 치닫고 있는 붉은 빛의 검을 위로 올려쳤다.

- 카아아앙!

날카로운 소리가 다시 한 번 산을 뒤흔든다.

- 카앙, 캉, 카아앙! 카가강!

날아드는 검을 검 손잡이로 밀쳐내고 상대의 손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내리치는 검격을 밀어낸 뒤 놈의 허리를 향해 검을 찔러넣고, 그것이 막히자 다시 휘둘러 놈의 목을 노렸다.

- 부우웅!

- 카앙, 카아앙!

묵직한 파공음이 쉼없이 이어졌다.

빈 틈을 찾아 찌른 검이 놈의 허리에 깊은 자상을 냈다. 그러나 로난시테는 안심하지 않고 계속하여 공격을 가했다. 단숨에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어차피 곧 아물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붉은 빛이 비산한다.

그 사이 뒤에 서 있던 르메인이 다시 한 번 활을 쏘는 소리가 났다. 화살의 여분이 충분치 않았던 탓에, 마법사인 것으로 명확히 확인된 놈들에게만 활을 쏘는 중이리라.

- 카앙, 카아앙!

멀리서 슬레이만이 검을 겨루는 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가쁜 숨을 한 번 더 참은 로난시테가 온 힘을 다리에 실었다. 팽팽하게 부푼 다리를 박차며 놈을 향해 날듯이 다가갔다. 그리고 로난시테의 빈 틈을 찾아 뻗어낸 놈의 검을 검 손잡이로 막고 밀어냈다. 그렇게 들어올려진 놈의 팔 밑에 어깨를 가져다 대어 놈이 잠시동안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은 뒤, 들고 있던 검을 틀어잡고 놈을 향해 내리찍었다.

- 카드득!

- ······ 콰직!

갑옷의 이음새 사이로 들어간 묵직한 검이 놈의 가슴을 갈랐다. 그리고 그 속에 든 심장을 관통했다.

- 쿵!

꽤 오랫동안 겨룬 적이 비로소 눈을 감고 쓰러진다.

긴 숨을 내쉰 로난시테가 놈의 가슴팍에 꽂힌 자신의 검을 뽑았다.

"경."

그런데 그 때 뒤에 서 있던 르메인이 로난시테를 불렀다.

그 소리에 로난시테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 부웅!

가까스로 피해낸 검이 로난시테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곧장 몸을 일으킨 로난시테가 검을 겨눴다. 그러나,

- 휘이익!

또 한 놈의 검이 로난시테를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로난시테가 팔을 들어올렸다. 놈의 검을 맨 팔로라도 막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로난시테가 이를 악물었다.

놈의 검이 쇄도한다.

그 순간.

- 쌔애애액!

- 콰직!

강한 파공음이 이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다행히 그것이 로난시테의 팔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 스르륵······ 쿵!

당장이라도 팔을 잘라낼 것처럼 검을 뻗던 놈이 로난시테를 스치며 앞으로 쓰러졌다.

- 챙그랑!

놈의 목을 관통한 은빛 검이 옆으로 기울다 바닥에 떨어진다.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움직인 로난시테가 남은 한 놈의 턱에 검을 꽂아넣었다. 다시 한 번 쿵, 하고. 거대한 몸이 바닥을 나뒹굴게 되었다.

로난시테가 고개를 돌려 잠시 묵례했다.

주변에 널린 검을 아무것이나 집어들어 던진, 그것으로 제 기사단장을 구한 슬레이만을 향해서.

- 우우웅!

로난시테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슬레이만이 푸른 오러가 가득한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 카드득, 콰직!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허리가 꺾인 놈이 계곡 아래로 떨어져 사라져갔다.

네 번째 싸움의 마지막 적이었다.

- 쏴아아아······!

잊고 있던 계곡물 소리가 그제야 다시 들려온다.

* * *

묶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칼리안이 여섯 말의 고삐를 서로 묶어 레이븐의 안장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레이븐의 갈기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친구들 잘 챙기고 근처에 숨어 있어. 오래 걸리니까 쟤들이 먹는 것들 보고 너도 같이 좀 먹어. 풀 널린 데에서 먹을 것 없다고 굶지 말고."

푸르륵!

여섯 마리의 말들 중에서 가장 똑똑할 것 분명한 레이븐이 대답을 전했다. 그리고 안장과 안장에 줄줄이 묶인 짐덩이같은 '친구들'을 데리고 수풀 속으로 유유히 걸어들어갔다.

칼리안이 일행들을 살폈다.

에우리아와 키리에, 그리고 에일라는 걱정할 것이 없다. 믿을 수 없게도 오래 걷고 달리는 것을 그리 힘들어하지 않는 듯한 플란츠도 일단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문제는.

"란델 형님."

살면서 올라 본 가장 높은 곳은 체르밀 궁의 5층이고, 살면서 걸어 본 가장 먼 길은 그 5층에서 장미 정원까지의 걸음일 뿐 아니라, 살면서 겪어 본 가장 힘든 노동은 가위질이며, 살면서 해 본 가장 활동적인 일이라고는 역동적인 가위질이 전부일 옥수수수염이다.

바로 그 옥수수수염의 담담한 대답이 전해졌다.

"얘기하거라."

"올라가다 힘들어지면 말씀하십시오. 업어드릴게요."

"되었다."

"네."

인내심이 한 번이라 배려의 말도 한 번인 공평한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말을 이용해 오를 수 있을 최대한을 올라온 뒤 걷기 시작한 터라 그래도 죽을만큼 힘들지는 않을 테니까.

곧 칼리안이 세크리티아에서나 간혹 보았을 법한 깊은 산 속으로 발을 옮겼다. 그 뒤를 플란츠와 키리에가, 다시 그 뒤에 에일라와 란델이, 마지막으로 에우리아까지. 그렇게 모든 일행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시간여.

란델을 고려해 길을 골라낸 칼리안이 그나마 완만한 지형을 골라 발을 재촉하고 있을 때.

"칼리안 왕자님."

에우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 사락.

앞을 막은 나뭇가지를 잘라내기 위해 팔을 뻗던 칼리안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 겹겹이 둘러싸인 먼 산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찾았습니까."

"전하께서 함께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놈들 사이에 르메인이 함께 있는지를 가장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키리에다. 르메인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다만 키리에가 그것을 확인하려면 적당한 거리까지는 다가가야 했고 에우리아의 수색 범위는 보다 훨씬 넓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에우리아 쪽으로 돌아서며 물었다.

"어느쪽입니까."

그러자 란델과 플란츠를 잠시 쳐다본 에우리아가 팔을 뻗었다.

"북동쪽, 정확히는 저 방향입니다."

"······ 아."

방향을 확인한 칼리안이 침음을 냈다.

그 손 끝이, 정면에 보이는 건너편 산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이제껏 오른 산의 반대편으로 내려간 뒤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칼리안이나 에우리아는 물론 키리에와 에일라에게도 별 문제가 없었으나 어느새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치고 있던 란델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일 터였다. 마음 급할 것 뻔한 플란츠에게도.

"다리 있어요. 조금 돌아가야 하긴 해도 완전히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말이 전해졌다.

에일라였다.

칼리안이 에일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는 곳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물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에일라가 먼저 대답을 전했다.

"슈린츠에 놀러갔다가 돈 궁해진 귀족 한 명이 신물을 판 적이 있었는데, 너무 비싸게 부르기에 내가 그냥 훔쳐 나온 적이 있어서."

돈 안 주고 신물 훔쳐서 도망가느라 이쪽 산길을 지나가 봤다는 소리다. 피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을 훔친 것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온천 휴양지에 간 귀족이 돈 궁해질 이유가 뭐가 있겠나. 도박했겠지.

그런 놈은 좀 당해도 싸다.

"잘 했네."

"그럼. 뭐든 잘 하지."

"그 쪽으로 안내해 줘, 에일라."

"알았어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에일라가 주변을 확인해가며 앞서 나갔다.

에우리아는 다시 마력을 펼쳐 탐색을 하느라, 키리에는 작은 소리라도 빠짐없이 듣기 위해서, 란델은 힘들다 말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플란츠는 꺼낼 말이 없어서.

모두가 그렇게 조용히 발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얼만큼의 산을 더 올라갔을 때.

"반대편. 들립니다."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오십 걸음 쯤 앞에 보이는 깊은 계곡, 이곳에서는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계곡 사이를 이은 좁고 긴 다리를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누구."

그러나 칼리안의 목소리 대신 플란츠의 말이 먼저 나왔다.

한동안 소리를 듣던 키리에가 답을 전했다.

"아마도 지그프리드 공과 로난시테 경인 듯 합니다. 지그프리드 공 쪽의 걸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하. 전하의 발소리도 들립니다."

슬레이만이 다쳤다.

로난시테와 르메인이 살아있다.

다행한 일이다. 다친 것은 어떻게든 고칠 수 있다.

"그래. 그럼 어서,"

"스무 명, 아니 스물 넷······ 스물 여섯. 보다 많을 수 있습니다. 뒤쫓는 이들이 있습니다, 왕자님."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리가 좁았다. 서둘러 다리를 건너가 저 계곡을 등 뒤에 놓고 싸워야 하는지, 혹은 서둘러 슬레이만을 부축해 다리를 건너와 놈들을 상대할지, 다리를 건너오도록 놈들에게 따라잡히지 않을 수 있을지. 오래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일단 다리를 건너가 슬레이만의 상태를 확인하고 르메인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생각한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순간.

- 피이잉!

계곡 반대편의 산 속에서 붉은 빛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

얼마 전에도 저것을 본 적 있다. 칼리안을 발견한 발칸 놈들이 같은 짓을 하지 않았던가.

"신호탄이네요."

에일라의 말에 칼리안이 입술을 다물었다.

날 선 눈으로 뒤를 살펴보던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 피잉!

또 하나의 신호탄.

그것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본 까닭에. 반대편 산이 아니라 이곳, 칼리안의 일행이 지나온 방향 쪽임을 확인한 까닭에.

칼리안이 큰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내쉰 뒤 고개를 뒤로 돌려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세이렌 경."

"네. 반대편 산에도, 이 쪽에도 놈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계곡 등지고 다리까지 막힌 채 싸우면 불리합니다."

"제가 반대편으로 가겠습니다."

"아니. 이 쪽으로 올라오는 놈들 막아요. 내가 갈 테니까."

칼리안이 잠시 란델을 쳐다봤다.

슬레이만을 곧바로 치료해달라 하는 것이 나을지. 그런 생각을 하다 곧 치워냈다. 반대쪽에 르메인도 있다는 것을 상기한 까닭이다. 지켜야 될 이가 둘이나 되면 싸움이 힘들어지니까.

"네. 알겠습니다."

짧게 답한 에우리아가 양 손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 파지직, 파직!

그 손에 미약한 전류가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에일라와 키리에가 검을 뽑아드는 것을, 따라 나서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대신 검을 드는 플란츠를 확인한 칼리안이 뒤로 돌아섰다.

- 타앗!

그리고 계곡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다리 쪽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다리 너머.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반가운 이들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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