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22화 (423/527)

제75장. 대마법사가 되어야지(3)

생각을 하자.

생각을 해 보자.

- 지그프리드 공은, 함께 사라졌습니까.

- 네. 찾지 못했다 합니다.

- 그럼 스승님. 새벽의 습격을 슈린츠에서 왜 이제야 전해왔는지는 아십니까.

- 슈린츠 변경백 측에서 호위 기사들을 붙이겠다 하였으나 지그프리드 공작이 거절했다 합니다. 때문에 상황을 곧바로 파악하지 못하다가, 슈린츠 변경백이 지난 밤에 전하께 안부 인사를 올린 뒤 오늘 아침에 다시 찾아갔을 때 알게 되었다 들었습니다.

- 별궁······ 별궁에도 통신 장비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 사용하지 못하도록 부서진 것을 슈린츠 변경백이 확인했다 알려왔습니다.

- 변경백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은요.

- 세이렌 경이 슈린츠에서 전하를 모셨던 시종들과 직접 대화 후 확인한 사실입니다.

시종들. 시종들이 살아있다.

- ······ 시종들이 전부 살아있습니까.

- 그렇습니다. 호위기사인 렌 경은 크게 다쳤으나 시종들은 무사한 채로,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합니다.

르메인의 곁을 지키는 시종들은 죽이지 않았다.

호위기사 렌 역시 살려뒀다.

습격 사실을 카이리스 왕궁으로 곧바로 알릴 수 없도록 통신 장비를 파괴시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뒤 어떻게든 왕궁에 사실을 알릴 것이 뻔한 시종들과 전투력을 상실한 호위기사를 죽이지 않고 그냥 뒀다.

- 싸운 흔적은요.

- 부서지고 잘려나간 가구들, 핏자국. 여러 흔적이 있었으나 습격한 이들의 시신은 없었다 합니다.

- 그럼 렌 경이나 시종들은, 범인을 봤다 합니까.

- 렌 경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종들은 마법에 당한 것 같다 들었습니다.

- 슬립같은 마법 말씀이십니까.

- 네. 아무도 보지 못했답니다.

- 지그프리드의 로난시테 경이 함께 갔습니다. 로난시테 경은 없었습니까.

-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톡, 톡, 톡.

다소 빠른 속도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칼리안이 다문 입에 힘을 주었다. 곧바로 슈린츠로 가지 않기 위해서. 상황을 먼저 파악하기 위해서.

"칼리안."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이 가라앉은 눈으로 플란츠를 보다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 알았어."

형님이 권해드린 대로 왕궁을 떠난 형님 아버지가 실종됐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조금 더 생각에 잠겨있던 칼리안이 앨런에게 말을 전했다.

- 제가 전하께서 슈린츠에 계시다는 것을 알린지 이제 하루입니다. 그리고 카이리시스에서 슈린츠까지는 이틀. 누군가 전하를 노려 곧바로 슈린츠에 자객을 보낸다 해도 시간 안에 자객들이 슈린츠까지 도착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슈린츠는 해가 지면 성문을 닫는 곳 아닙니까. 슈린츠에 이미 거주하던 세력에 전서구를 보냈다 보는 것은 너무 억지스러운 생각이고요.

- 네. 그렇습니다. 하루만에 준비할 수 있을 정도의 자객이었다면 지그프리드 공작이 전하를 모시고 사라질 이유가 없지요. 공작의 손에 전부 다 죽었을 터이니.

- 그렇다면 아마도, 제온이겠군요.

- 네. 지그프리드 공작과 로난시테 경이 더는 상대하지 못하고 비밀통로 등으로 전하와 함께 물러났을 듯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 놈들에게 붙잡혔거나.

앨런의 대답이 전해지지 않았다.

대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 국왕에 대한 단순한 암살 시도라면 전하를 찾아 원하던 바를 이룰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왕궁에 사실을 알려 올 시종들과 호위기사를 살려 둘 이유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슈린츠 변경백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라도, 습격자와 직접 대면했을 렌 경은 반드시 죽였을 겁니다.

- 목적이 다른 데 있다 보십니까.

- 제온이 나선 것이라면 전하보다는 지그프리드 공 쪽에 관심을 두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와 지그프리드가 손을 잡았기도 하고, 이 순간 가장 접근하기 쉬운 곳에 홀로 있는 소드마스터니까요.

- 공작을 노렸다는 말씀이십니까.

- 네. 그리고. 스승님, 혹은 이 왕궁까지.

톡······ 톡.

조금 느릿하게 변하던 칼리안의 손가락이 멈췄다.

- 시종들과 렌 경을 일부러 살려 둔 겁니다. 적당히 시간이 지난 때 왕궁에 사실을 알리도록. 다른 이도 아닌 전하께서 사라졌다면 스승님께서 그곳에 가실 것이 분명하니. 스승님이 사라진 왕궁을 노렸든, 급히 찾아갈 스승님을 노렸든······ 둘 모두를 얻고 싶어했든.

- 그렇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 제가 가겠습니다.

- 카스트린 경과 싸우다 왕자님 속이 상했다 들었습니다. 이동 마법을 사용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 밤새 다 나았습니다. 괜찮아요.

- 또 늙은이 속을 썩일 요량이십니까.

- 그래야 제가 무사합니다, 스승님.

자신의 손 끝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을 것이 분명한 플란츠를 보며 말을 이었다.

- 헤르츠 경까지 부상중인 곳에 제온 놈들 들이닥치면 피해가 큽니다. 지금 왕궁에 무슨 일이 생겨 누군가 아르피아 궁의 왕좌에 앉는다면. 혹은, 만에 하나 제 생각과 달리 놈들이 노린 것이 전하가 맞고 형님이 왕세자인 상태에서 전하께 변고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사라지면.

-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저입니다.

앨런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애써 다른 말로 바꿔 전했으나, 그것이 결국 '죽는다'는 뜻임을 알아들은 까닭에.

답을 기다리는 대신, 칼리안은 통신용 팔찌가 아닌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 얀.

- 네, 왕자님.

- 키리에를 불러와줘. 그리고 히나에게 왕궁으로 돌아와달라는 말을 전하라고 해줘. 호위가 반드시 있어야 해. 무조건 안전하게. 왕궁에 오면 스승님께 찾아가라고 해주면 돼.

- 네. 알겠습니다.

- 그리고 공작저에 가 있어, 얀. 드미레아에게는 대문 닫으라고 전해주고.

- 큰일입니까?

- 응. 조금.

- 저 이것도 걱정 안 해야 해요?

- 아니. 조금만 하고 있어. 나 뿐 아니라 지그프리드 공 걱정도 해줘야 해.

- 슈린츠 쪽의 일입니까?

- 맞아. 그러니까 조금만. 아무 일 없을 테니 잠 안 자고 밥 거를만큼 걱정하지는 말고.

-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앨런에게 말을 전했다.

- 히나를 불러오라 했습니다. 헤르츠 경과 제이아 경, 스콘 경. 최소한 그 셋은 곧바로 치료해달라고 전해주세요. 키리에는 제가 데리고 갈게요.

- 그리하지요. 그리고 슈린츠에는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모셔다 드리고 곧장 돌아와 있겠습니다.

- 라시드 브리센 역시 제온과 연관이 있습니다. 무슨 수를 가지고 스승님을 공격하려 했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다못해 스승님께 마법 방해라도 걸어 둘 방법같은 것을 찾았다면 스승님 왕궁에서 벗어나는 순간 위험해집니다.

- 그런 것이 있을리 있겠습니까.

- 에반의 저택에도 있던 것입니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하나 그보다 강한 것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스승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슈린츠 인근까지 이동 마법진이 연결되어 있으니 저는 그쪽으로 가면 됩니다.

- 그렇다면 세이렌 경이라도 데리고 가십시오.

- 네. 그렇게 할게요.

칼리안의 시선이 플란츠를 향했다.

"슈린츠에 가야 합니다."

"같이 가."

같이 가자는 것인지. 같이 가겠다는 것인지.

미묘한 차이가 있으나 정확히 어떤 의미였을지 알 수 없을 말. 그런 말을 꺼내놓는 형을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생각을 정리한 듯 대답했다.

"네."

"체르밀 궁은 비우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네. 그게 낫겠네요."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방을 나섰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지니고 있던 또 다른 팔찌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앨런 말고 얀 말고 또 다른 누군가를 불러낸 것이다.

- 에일라.

답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칼리안이 방을 나와 계단까지 갔을 즈음, 에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한 번도 이걸로 얘기한 적 없더니. 팔찌 많아서 헷갈린 거면 다른 쪽에 다시 연락하세요. 나 안 위험해요.

- 내가 위험해, 에일라.

- 왕자님이?

- 그래. 그러니까 지금 같이 어디 좀 가.

- 무슨 일 시키려고요.

- 호위.

- 왕자님 호위?

- 왕자는 왕자인데 나는 아니고.

칼리안의 발이 계단을 디뎠다.

- 치유력 가진 옥수수수염.

내려가는 곳 말고.

올라가는 방향으로.

- 뭐야, 그게. 아무튼 알았어요.

- 바로 나와.

- 나가고 있어요.

칼리안이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걱정이 한가득일 앨런을 향해 말을 하려 했다.

그런데 앨런의 말이 먼저 전해져왔다.

- ······ 다치지 말고······ 다녀오거라.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하대가 전해져왔다.

처음으로.

- 네.

칼리안이 웃었다.

- 잘 다녀올게요. 아버지.

* * *

지나치게 힘을 주어도 안 되고 지나치게 힘을 빼도 안 된다.

힘을 주고 주지 않고의 차이점은 괴사하느냐 소용이 없느냐 정도.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아무튼 둘 다 아프다는 것 정도랄까.

지혈에 대한 이야기다.

"많이 아프신가?"

아플 것 뻔히 알면서 건네진 말에 인상을 찌푸리던 이가 대답했다.

"지랄맞을 만큼."

"험한 말 하나 가르쳐놨더니 그걸 아직도 기억해뒀나?"

"이럴 때 쓰려고."

"대꾸하는 걸 보니 지랄맞게 아프긴 해도 죽을만치 아픈 건 아닌가보군. 다행이네."

"그래."

"아무튼 참게."

대체.

참으라고 말할 것이면 아프냐고는 왜 물었는지.

이런 말을 하려던 르메인이 입을 다물었다.

"자네 아들들은 그것보다 더한 것도 겪었으니."

슬레이만이 덧붙인 소리에 할 말을 잃은 까닭이다.

때문에 르메인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슬레이만이 적당한 힘으로 잘 묶어 둔 탓에 딱 지랄맞을 만큼만 아픈 오른팔을 내려다보면서.

그 꼴을 쳐다보던 슬레이만이 마뜩찮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게 왜 멀쩡한 화살을 몸으로 막아서나. 막아서기를."

"그대 뒤통수로 날아가는 화살을 봤는데. 막기라도 해야지."

"쓸데없는 짓을 했으니 하는 말이네. 대체 소드마스터 머리에 화살이 꽂힐까 걱정하는 건 무슨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인지."

"혹시 모를 일이지. 그대가 제대로 살아있어야 내가 안 죽을 텐데, 죽는 것보다는 다치는 게 낫지 않나. 똑같이 다쳐도 내가 더 빨리 낫기도 하고."

"목숨 아까운 줄은 아시나?"

"아들들한테 도움되는 일을 하라 말했던 것은 그대인데. 지금은 내가 살아있는 게 도움되는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아네."

"험한 말만 기억해 둔 것은 아니라니 다행이군."

- 자박, 자박.

그런데 그때, 조용히 다가오는 작은 발 소리가 들렸다. 르메인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슬레이만은 르메인의 피가 흥건히 묻은 손을 바지에 슥슥 닦았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대해서는 경계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직 이 쪽으로 다가오는 이들은 없습니다, 공작님."

슬레이만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의 절반 가까이를 함께 했던 기사의 발 소리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잠깐 숨 좀 돌려도 되겠군."

"네."

고개를 끄덕인 슬레이만이 붕대 하나를 더 꺼냈다.

르메인의 팔에 깊숙이 박혀있던 화살촉을 뽑아내고 지혈도 마쳤으니 두 번째 환자를 돌볼 차례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긁힌 곳 하나 없이 멀쩡한 슬레이만이 붕대를 왜 또 꺼냈을지 잘 아는 로난시테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슬레이만에게 붕대를 받아 손등부터 팔꿈치까지 길게 베인 자신의 상처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만큼을 있었을까.

호위기사 렌과 시종장 라울, 그리고 다른 세 시종이 지금쯤 어찌 되었을지 알지 못하는 르메인이 깊은 걱정에 잠겨들고, 붕대를 다 감은 로난시테가 다시 주변을 정찰하고자 고개를 돌렸을 즈음. 슬레이만이 르메인을 쳐다봤다.

"르메인."

"왜."

"이동 마법진이 있을 텐데. 어디쯤에 있는지 아나?"

사실 별 기대없이 물어 본 것이었다.

이동 마법진은 칼리안과 발칸이 주도하여 만들어낸 것이 아니던가. 아무리 칼리안이 이동 마법진을 새로 세울 때마다 르메인의 허락을 먼저 받아왔었다 한들, 드넓은 카이리스 땅에 설치된 수많은 이동 마법진을 르메인이 어떻게 다 알겠나.

"슈린츠에서 에이프린 백작령 방향. 말을 타고 두 시간 쯤 걸리는 곳에 있네."

그런데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이런 대답이 전해졌다.

네가 소같기는 해도 진짜 허수아비는 아니었구나.

속에 든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코끼리들의 가장답게, 슬레이만이 제 생각을 그려낸 듯한 얼굴로 르메인을 쳐다봤다.

"······ 내가 왜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는지. 그 정도는 알 것이라 생각했는데 몰랐나보군."

르메인이 짜증섞인 말을 했다.

르메인도 슬레이만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과거'에 발칸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아닌 르메인이었으니까. 가진 머리가 영 장식품은 아닌 것이다.

늘 간당간당해서 그렇지.

"그럼 그 쪽으로 가세."

"슈린츠령을 완전히 벗어나자는 말인가?"

"변경백의 군사들에게 도움이라도 청하고 싶나?"

슬레이만의 되물음에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 잠겨 보이지 않을 슈린츠 성 쪽으로 눈을 돌린 르메인이 대답을 꺼냈다.

"비밀통로가 슈린츠 성 외부로 이어졌다고는 해도 성과 먼 곳은 아니네. 내가 사라진 것을 알면 마나실 경이 곧 올 테니, 그렇다면 차라리,"

"르메인. 저기 돌아가서 마나실 후작 올 때만 기다리다가는 우리도 죽고 슈린츠 변경백 군사들까지 다 죽네."

이렇게 말한 슬레이만이 자신의 검을 들어올려 르메인의 얼굴 앞에 내밀어보였다.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도 서늘한 예기를 뿜는 검날에 작은 흠이 난 것이 보였다.

"놈들의 검에 어렸던 그 시뻘건 기운들 말일세. 멋있어 보이라고 빛나는 게 아니라 오러일세. 그것도 내 검날을 상하게 할 정도로 강한 오러. 자네 호위기사 쯤 되고 내 기사단장 쯤 되니까 다치는 정도로 끝난 것이네. 슈린츠 변경백 본인이라면 몰라도 다른 기사들은 못 버텨."

"그렇다면 역시. 칼리안이 이야기했던 그 세력인가."

"그렇지. 아마도 르메인 자네 말고 나에게 관심이 있는 듯도 하고. 어쨌든 이왕 슈린츠 성 밖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이동 마법진 쪽으로 가세. 마나실 후작이 오면 우리가 어디 있든 금방 찾을 테고. 자네 아드님이 온다면 이동 마법진 쪽으로 올 테니, 누가 오든 그게 낫네."

"······ 칼리안이."

"그래."

슬레이만이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어둠이 완연히 짙어진 것을 보아 대충 가늠했던대로, 날이 밝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남지 않았다.

"로난시테."

"네, 공작님."

"렌 경 대신 전하의 호위를 본다 생각하도록. 다시 싸움이 있더라도 전하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로난시테의 짧은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슬레이만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별의 방향과 어둠 가득한 산의 지형을 확인한 뒤 르메인에게 입을 열었다.

"그럼, 르메인. 오랜만에 등산 좀 하지."

"······ 알았네."

"팔 아프다고 징징대지 말고."

"안 하네."

"좋군."

르메인의 한 발자국 앞에 선 슬레이만이 발을 옮겼다.

그리고 어둠이 가득한 산 속을 걷기 시작했다.

* * *

카이리스에서 가장 넓은 도로인 왕도.

왕도 위를 지나던 마차와 수레가 왕도 옆으로 비켜서고 말들 역시 길에서 벗어나 발을 멈췄다.

- 다그닥, 다그닥!

수도 내에서 말을 달리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는 듯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여러 마리의 말들 때문이다.

물론 속도 빠른 말들에 치일까 걱정하여 비켜준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 인근을 걷던 이들이 제자리에 서 황급히 허리를 숙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여러 필의 말들의 가장 앞에서 길을 열듯이 달리고 있는 검은 말, 그 말의 오른쪽 발목에 난 하얀 털. 그 말의 위에 오른,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의 칼리안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었다.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칼리안의 뒤로 플란츠와 란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이들 역시 모두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마법사 협회장 에우리아는 물론이고 서로 다른 빛의 눈을 지닌 칼리안의 기사를 몰라보는 이들은 이제 카이리시스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곁에서 함께 말을 달리고 있는 검사의 바다색 머리가, 나에랑샤 거리에 위치한 한 건물의 옥상에서 추락하다 칼리안이 직접 붙들어 잡아 목숨을 구했다던 이의 것과 같은 색임을 알아보지 못할 이들도 없을 터였다.

칼리안과 플란츠 뿐 아니라 란델까지 함께 하는, 지나치게 이례적인 일행의 모습에 놀랄 겨를도 없이 예를 올린 이들에게 답을 보낼 겨를이 없었다. 칼리안은 그 모두를 보지 못한 것처럼 계속하여 레이븐을 몰았다.

- 쿠구구궁······!

멀리 외성문이 보이기 시작하자, 평소 사람이 드나드는 작은 문만을 열어두는 외성의 거대한 철문이 서둘러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어디에서도 멈추어 기다릴 필요가 없을 왕족들의 발을 묶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덕분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수도를 벗어난 칼리안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성인식 로젤리타를 마친 이후 단 한 번도 나온적 없었을 외성 밖의 공기를 마주하고 있을 형제를 향해서.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지만."

칼리안이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은 레이븐의 위에 앉아있던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다치셨을까봐 란델 형님 모셔가는 것 아닙니다."

다쳤을지도 모르지만.

르메인을 위해 란델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크게 다친 이가 있다면 치료를 부탁드릴 생각입니다만. 전하에 대해서는 강요할 생각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럼 왜 불러낸 것이냐."

"전하께서 안 계시고 제가 왕궁 밖에 나가게 되면, 형님이든 란델 형님이든 왕궁 문 닫았다는 누명 씌우기 참 좋은 시기라서 체르밀 궁을 아예 비우는 겁니다."

"내가 정말로 왕궁 문을 닫을까 우려했던 것은 아니더냐."

"물론 그런 생각도 없지는 않습니다."

피식 웃으며 대꾸한 칼리안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제껏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에스티나의 위에 앉아 눈을 내리뜨고 있던 플란츠를 잠시 살피다 다시 앞을 바라봤다.

왕세자 플란츠가 가장 가운데에 선다면 어떻게든 란델이 옆에서 달리게 될 것이 아닌가. 때문에 플란츠를 대신해 형제들의 가운데 자리를 꿰어 찬 칼리안은 이동 마법진이 있을 곳을 향해 계속 달려갔다.

- 다그닥, 다그닥!

여러 말의 발 발굽 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시간.

슈린츠의 슬레이만은 오늘만 네 번째로 뽑아든 검을 굳게 다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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