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장. 대마법사가 되어야지(2)
칼리안.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정말 내 안위를 위해 마련한 자리인 건지. 아니면.
언제든지 왕위를 이을 수 있을 사람이 필요한 건지.
* * *
대답을 했던가.
그냥 미뤘던가.
머릿속에 맴돌던 답을, 내가. 입 밖에 냈나. 대답을 했나.
잠시 그것을 고민하고 있으려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부터입니까."
세크리티아 사람들 지독하다는 말은 틀렸다.
세크리티아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미련하다.
"왕자님의 오러가 나뉘어 생긴 일이 맞는지, 아니면 검을 잡아본 적 없던 몸을 쓰시게 되어 생긴 일인지. 언제부터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미련할 뿐 아니라 오지랖도 넓다.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아서 이 자리에 테일란을 부른 것은 맞다. 하지만 검을 가르친 기억이 없음에도 제 검술을 고스란히 쓰고 있는 타인에게 경계심을 느끼기는 커녕 일단 걱정부터 건네오는 것을 정말로 보게 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세상에 미련하게 오지랖 넓은 이는 완두콩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세크리티아 사람들도 미련하리만치 오지랖이 넓다.
"굳이 따져본다면. 처음부터입니다."
고마움일지 어색함일지 그리움일지 모를 감정을 담은 긴 숨을 들이쉬고 내쉰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멀리 표정 없는 얼굴로 이곳을 바라보는 키리에와, 앞에 서 있던 테일란을 번갈아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키리에를 구하기 위해 오러를 발현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 날에도 지금같은 증상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다.
다누를 상대했던 날에도, 그리고 오늘도.
조금만 무리를 하면 늘 그랬다. 흔하다 할 수 있을 만큼.
"이 몸으로 갑작스럽게 오러를 다루게 되었으니 당연히 무리가 오리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누구나 겪는 일이 아닙니까. 제 '과거'에서도 겪어봤던 일이었고, 그래서 카스트린 경에게 호되게 혼났던 날도 있었으니까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혼이 나시는 것이 맞습니다."
"네. 그래서 얌전히 혼났습니다."
혼자만의 기억을 풀어 둔 칼리안이 웃음을 지었다.
테일란이 나지막이 말했다. 자신의 표정이 동정으로 느껴지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허나 이번 일은 단순히 무리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닌 듯 보입니다."
"네."
무리하면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 맞다.
그러나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더는 당연하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제가 이것을 이제 와 이상이 있다 여긴 것은."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대답 대신 양 팔을 내렸다.
그리고 확인을 거듭하듯 오러를 운용했다.
- 우우웅!
- 우웅!
붉은 검에 붉은 오러가 깃든다.
붉은 검에 푸른 오러가 깃든다.
일렁이는 두 오러의 빛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검을 흩어냈다. 그리고 더는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여지없이 울렁거리기 시작한 속을 다잡으며 말했다.
"말씀드린대로 서로 다른 오러 때문입니다."
칼리안의 마력과 일체화되었던 오러.
그저 바람의 마력만 담았을 때에는 아무 색 없이 투명했던 오러. 그러다 옛 칼리안의 마력을 받아들이게 된 이후, 옛 칼리안도 베른도 아니었던 오랜 기간동안 저도 모르게 흐른 피어가 살기처럼 섞여 검붉은 빛을 내었던 것. 그러나 이제는 완연한 붉은 빛을 내게 된 오러.
그것은 분명 칼리안의 힘이 맞았다.
그런데 푸른 오러가 발현되기 시작했다.
칼리안을 뺀 모든 소드마스터가 가진 것과 똑같은 짙푸른 빛의 오러가 쌓이기 시작했다. 마력과 일체되지 않은 까닭이다.
"처음에는 그저 쌓이기만 해서 큰 문제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간혹 속이 깎이는 것도, 오러 때문이 아니라 몸 때문이리라 생각했고요."
물론 단순히 오러가 쌓일 뿐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문제가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몸에 강제로 오러를 담고 있어서 그것을 버티지 못한 것이겠거니, 몸이 더 단련되면 나아지겠거니.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발칸을 상대하던 중에 처음으로 푸른 오러를 꺼내 쓰게 되었는데······. 두 오러의 성질이 단순히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마법사에게 불어넣어진 신관의 치유력처럼 말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처음에 서클 속 마력과 오러를 일체화시킬 땐 몰랐던 문제라서."
"전례가 없던 방식을 쓰고 계시는데 문제 될 것을 어떻게 미리 예견하겠습니까."
"네. 뭐, 마력과 오러를 따로따로 운용했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같은 일이 벌어졌을 듯 싶기도 하고요. 어쨌든 이런 상황이 되어서 조금 당황스러워 하는 중입니다."
그게 그저 당황하고 끝날 일일까.
이런 생각을 하던 테일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었다.
"평소에는 그렇다면, 문제가 없습니까."
"네. 지금은 충돌이 인다 해도 축복의 힘 덕에 다시 잘 아물고 있습니다."
어쩐지.
오러를 감추고 살지 않는데도 계속 배가 고프고, 생길 일 없던 흉터도 그렇게나 쉽게 생기더라니.
피식 웃은 칼리안이 자신의 심장 부근을 가리켜 보였다.
"그런데 축복에도 한계가 있는 터라······ 이것이 어디까지 버텨줄 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붉은 시선이 자신의 두 손을 향해 움직였다.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가 하나의 서클을 더 만들어야 하고. 오러가 다시 넘치기 전에 또 하나의 서클을 만들어야 하고. 뭐랄까······ 목숨을 갱신하는 그런 상황같달까요."
"마법사는 서클을 늘릴수록 심장에 담기는 마력의 양이 기하급수로 늘어난다 들었습니다."
"네. 서클이 일곱 개 쯤 되면 심장에 담기는 마력도 무한에 가까워진다 하니 그리 된다면 오러가 얼마나 쌓이든 문제 될 것이 없겠습니다만. 그것은 안전한 해결방법이라기 보다는 도박에 가깝다 해야겠죠."
마음을 먹는다고 서클이 늘어날 수 있다면 아르센은 이미 서클 하나를 더 늘려 술독에 빠져 살고 있을 거다.
마법에 재능이 있고 앨런보다 더 빠른 시기에 4서클을 달성한 칼리안이라 해도, 아직까지 다음 서클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바쁘게 지냈다 하여 수련을 게을리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러니 시기적절하게 매번 다음 서클의 벽을 넘어설 수 있다 장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무엇보다 저는······ 잘 살다 늙어 죽고 싶어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남들에겐 당연한 일상이 스스로에겐 일생일대의 목표인 것에 그만 웃음이 나서.
"계시는 동안 시간이 날 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지 생각을 해주셨으면 하고. 이렇게 도움을 청하는 겁니다."
테일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 상태로 가만히 선 채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먼 곳을 보다 말을 더했다.
"참. 그리고, 스승님께는······ 아직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해한다는 듯, 테일란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방법을 알아내면 찾아뵙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칼리안의 오러를 잠시 지켜보던 테일란이 인사를 전한 뒤 걸음을 옮겼다. 당장 칼리안과 함께 있는다 하여 해답을 찾을 수 있을 문제가 아닌 까닭이다.
- 저벅, 저벅.
숲 입구로 걸어나온 테일란이 풀어두었던 팔찌를 찼다.
그리고 말에 오르는 대신 말 고삐를 쥔 채 천천히 걸었다.
빌헬름 관의 맨 윗층, 여전히 환히 밝혀져 있을 곳을 향해서.
칼리안은 이 문제를 앨런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하였으나 테일란은 아니었으니까. 가르친 것 하나 없었으나 같은 검술을 쓰는, 함께 죽었다며 묵은 것을 털어내듯 웃는 제자를 잘 살려놓는 건 스승들의 몫이었으니까.
* * *
팔뚝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목 언저리를 만졌다.
살짝 화끈거리고 쓰라린 느낌이 든다.
이걸 보면 얀이 또 얼마나 잔소리를 하려나.
"나 또 혼나겠다."
이런 걱정을 꺼내놓는 칼리안에게 키리에가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검은 코트를 벗어 칼리안의 어깨에 걸치더니 깃을 세워주었다. 얇은 코트의 깃이 목 옆에 난 상처를 대충이나마 가렸음을 안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가려도 들킬 걸."
"들키면, 오늘은 푹 쉬게 해드리자고 제가 얘기를 하겠습니다."
"그럼 통하나?"
"조금은 통합니다."
"그래."
헤실헤실 웃은 칼리안이 타박타박 발을 옮겼다.
그러다 멀리 보이는 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 쯤에서 네 검을 던졌거든."
"나무에 박혀있던데. 그래서입니까."
"응. 내가 던진 게 저기까지 날아가 박힌 거야."
"쉬운 일이 아니었겠습니다."
"당연하지. 쉬운 일을 자랑할 사람인가, 내가."
작은 미소를 띤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그걸 빼서 너한테 돌려주려고 했었는데 졸음이 와서. 게다가 레이븐 머리가 너무 푹신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대로 잠든 거였어."
"마음 쓰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왕자님 체르밀 궁에 모셔둔 뒤에 기사들이 곧바로 찾아와 돌려줬습니다."
"상한 곳은 없었지?"
"멀쩡합니다."
"하긴. 어떻게 찾아와 만든 검인데. 멀쩡해야지."
"그것 찾겠다며 일부러 저를 왕궁에서 내보내기까지 하신 것 아닙니까. 바위 산을 다 뒤져가며 찾아낸 운철이었는데 돌아다닌 보람이 있는 검입니다."
"그 정도로 좋은 재료가 아니면 내가 너를 보낼 리가 있나."
"네."
키리에가 제 허리춤에 매어 둔 검을 내려다봤다.
그 뒤 칼리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이 검, 왕자님께서 쓰십시오."
- 타박.
앞을 향하던 칼리안의 발이 멈췄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키리에를 쳐다봤다.
"네 검을 내가 왜 써."
"저는 다른 검을 써도 괜찮습니다."
타박, 타박.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겼다.
내일 아침에는 산책이나 나서볼까 하고 말하는 듯한 일상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러로 만든 검을 안 쓴다 해서 나아지는 문제 아니야."
조용한 말이 숲 속을 잔잔히 맴돈다.
"키리에."
"네."
"내 문제 알려주려고 부른 것도 아니고 너까지 걱정하라고 부른 것도 아니야."
"제가 왕자님의 문제를 알게 되는 것보다 두 분의 대련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셔서 부르셨음은 압니다."
"그래."
"훗날 혹시라도······ 갑작스런 일이 벌어졌을 때. 플란츠 저하께 상황을 알리고 곧바로 왕위를 이을 수 있도록 도우라는 뜻인 것도 압니다."
국왕의 명을 받아 일하는 귀족 말고.
국왕의 일에 손을 대지 못할 왕의 형제 말고, 대공.
국왕의 곁에서 무슨 일이든 함께 진행해도 괜찮은 작위. 왕자와 동급의 신분인 공작보다 높은 작위. 왕세자와 같은 권리를 지닌 작위. 왕세자가 아니어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불필요한 분란만 야기하는, 때문에 사라진지 오래 된 작위.
그런 작위를 플란츠에게 주리라 말한 것을 키리에도 들었다.
"아······ 창문이 열려있었지."
"네. 그래서 저도 들었습니다."
타박타박.
저벅저벅.
한동안 목소리 대신 발소리가 이어졌다.
공터를 벗어나 숲길로 들어섰을 즈음,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아닌데."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까."
"말이 좋아 공작이고 후작이지. 아마 내가 왕위에 올라도 사석에서 말꼬리 자르면 곧바로 '반말.' 이러실 것 뻔한데. 내 형님 그 성격에 누구 밑에서 고개 숙이고 사시겠나."
가느다란 목소리를 있는대로 내리깔며 플란츠를 따라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본인이 싫다 했다지만 본래 형님이 앉았던 자리잖아. 왕좌는 못 드려도 비슷한 자리는 만들어 드려야지."
타박, 타박.
아무튼 손 진짜 많이 간다고.
툴툴대듯 중얼거리던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했다.
"그런 생각에 결심했던 일이었지. 이제 와 보면 네 말도 틀린 건 아닌데. 의도한 건 아니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어둡고 조용하여 왕궁 그 어느 곳보다 더 많은 별이 보이는 숲.
그 속에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이것도 세렌티의 계획일까. 이렇게 버티다 세렌티가 해결 못한 문제를 내가 다 풀어낼 즈음이면 내 몸이 다 닳아 알아서 사라지게 하려고 그랬을까."
"······ 왕자님."
"그런 생각을 안 하진 않았어. 솔직히 잠깐 했는데. 별로 쓸모있는 결론은 안 나더라고. 그래서 잠깐만 하고 때려쳤어. 사람이 긍정적으로 살아야지. 안 그래도 욕 먹을 일 넘쳐나는 세렌티인데 괜한 의심까지 해서야. 게다가 다누가 그랬잖아. 순응하지 말라고."
"네. 그런 말씀을 해주셨던 적 있습니다."
"응. 내가 또 그런 말은 참 잘 듣는 사람이라. 히나한테 또 혼날 짓 하기 싫기도 하고. 내 정혼자님한테 지은 빚 다 갚으려면 멀기도 했고. 얀한테 하모니카 가르치는 일도 아직 한참 남았고."
타박, 타박.
"이제껏 여기저기 막 건네고 다닌 약속들을······ 또 거짓말로 만들고 싶지도 않고. 이번에는 안 그러고 싶어서, 나는."
키리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커서 담요를 두른 것 같은 키리에의 코트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붙든 칼리안이, 멀리 보이는 숲의 입구를 바라봤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드넓은 왕궁을 오래도록 지켜보다 말했다.
"그냥. 더 쉬운 길을 찾으려고 카스트린 경을 부른 거야."
"더 쉬운 길이 없으면. 그 때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럼, 뭐. 별 수 있나."
잠시 코트를 놓은 손으로 자신의 두 눈꼬리를 날카롭게 만들어보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한테 열심히 마법 배워서 대마법사가 되어야지. 아무렴 죽었다 살기까지 하고 있는데. 그것 하나를 못 할까. 내가."
앨런의 눈초리를 따라한 것이 너무 안 어울려서. 너무 웃겨서. 결국 키리에도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너무 무섭게 가르치지 않도록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통하나?"
"어쩌면 통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렇게 해줘, 키리에."
"속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이런 것쯤이야 푹 자고 일어나 밥 먹으면 낫지."
끄떡없으니까 땅 파고 드러누운 사람 보듯 하지마, 하고.
다짐시키듯 얘기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 * *
억울하다.
"비숍, b5로. 체크메이트."
이번에도 억울하다.
억울했다.
"나이트 움직인 거 한 수만 물러달라 하셨잖습니까."
"그게 뭐."
"그래서 제가 진짜 큰 맘 먹고 물러드렸는데요. 그럼 사이좋게 한 수 씩은 물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러주시면 물러주겠다고 한 적 없는데."
"그걸 꼭 말로 해야 합니까."
"지기 싫으셨으면. 물리지 말았어야지."
······ 비정한 놈.
칼리안이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는 앞에 놓여 있던, 조린 딸기가 가득 든 우유 푸딩을 괜스레 푹푹 찌르며 제 심정을 드러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똑같이 생긴 제 앞의 푸딩을 우아하게 떠 올려 입에 넣은 플란츠가 그것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아침 식사로 한 접시의 귀리 수프와 두툼하고 길쭉한 베이컨, 두 덩이의 스테이크와 구운 닭다리 세 개로도 모자라 버터향 가득한 감자와 올리브 빵으로 빈 속을 실컷 채워놓은 놈인데 거기에 푸딩까지 들어갈 필요가 있겠나 싶어서였다. 만약 저 속에 뭔가 더 들어간다면 저 놈은 시스파니안의 축복을 초대형 위장으로 받은 것이 분명하다 여겨야 할 일이다.
"저한테 이겨먹으라고 쉽게 져 주지 말라 말씀드렸던 건 아닌데요."
"언제든. 어디서든."
무슨 말을 더 하랴 싶어진 칼리안이 엉망이 된 푸딩에 다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한 스푼 크게 떠 자신의 입 속에 잔뜩 채워넣은 뒤 아무 소리 없이 야무지게 씹기 시작했다. 기어코 저 뱃속에 무언가가 더 들어간 것을 본 플란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는 채로.
"한 번만 더 하시죠."
"왜."
"제가 한 수 물러드려서 이기신 것이니까요. 내기를 하자고 하셨으니 걸리는 것 없이 정정당당하게 이기셔야 형님도 마음이 편하실 것 아닙니까."
"아닌데."
"왜."
"반말."
칼리안이 눈을 돌렸다. 그리고 테이블에 덮인 검은색의 테이블보를 쳐다보다, 멀리 한 계단 높은 곳에 보이는 어두운 서재와 반대편에 자리한 검은 침구, 긴 창에 드리워진 검은 색 쉬폰 커튼을 쭉 둘러봤다.
그래, 맞다. 칼리안의 방인 것이다.
참 생소하게도 이 검은 방에서 식사를 하고, 체스판을 가져오라 한 뒤 체스말에 팔을 뻗는 일련의 귀찮음을 생략한 형제의 체스 게임이 시작되고, 칼리안이 제가 뒀던 한 수를 무르고, 그 덕에 플란츠가 이기는 상황이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자면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날 아침, 밤새 칼리안의 곁을 지키던 키리에가 밖으로 나간 뒤. 어김없이 울리는 부드러운 종소리에 '얀 나 5분만'을 네 번쯤 반복하던 칼리안이 간신히 일어나 눈을 떴을 때. 칼리안의 손바닥 상처가 더 벌어지고 전날 입고 나갔던 재킷과 셔츠에는 칼에 베인 흔적이 있음을 뒤늦게 확인한 얀의 추궁이 시작되려 하던 바로 그 때.
- 벌컥!
칼리안의 방 문이 열렸다. 말 그대로 벌컥 열렸다.
카이리스 3왕자의 방 문을 그렇게 열 사람이 감히 어디에 있을까만은. 딱 한 명이 있기는 했다.
창문 말고 문으로 들어온 것에 일단 그래 그 정도 노력했으면 됐다 하는 생각을 하게 할 사람. 당연히 플란츠였다.
뜨인 눈보다 덮인 눈커풀이 더 많았던 칼리안이 눈을 조금 더 뜨고, 화들짝 놀란 얀이 제 몸으로 잠옷 차림의 칼리안을 가리고 서고, 더 놀란 다른 시종들과 시녀들이 침실 커튼을 서둘러 내리는 일련의 소동을 벌인 뒤, 칼리안의 소파에 풀썩 앉은 플란츠가 커튼 너머의 동생 놈을 향해 말했다.
"식사."
아침밥 달라고.
덕분에 졸음 가득한 얼굴로 부랴부랴 아침 준비를 마치고 미처 다 깨지 않은 위장에 깨작깨작 음식을 채워넣은 칼리안이 디저트를 앞에 두고 '그래서 형님 너 왜 왔니' 하는 질문을 꺼내려 했을 즈음, 플란츠의 말이 들려왔다.
"해."
"뭘요."
"체스."
"왜요."
"내기."
"무슨 내기요."
"해. 묻지 말고."
"······ 폰, d4."
정신 말짱한 칼리안이었다면 뭐가 걸린 내기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며 똘똘하게 굴었겠으나 아직 칼리안은 잠이 덜 깼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것을 노리고 이른 아침부터 찾아든 것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을 어쩌겠나.
둬야지.
아무튼 그렇게 갑작스레 시작된 체스였다.
그 후로 열 수 쯤을 뒀을까.
"물러."
"뭐를요."
"방금 둔 것."
"나이트 무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왜요."
"질 것 같으니까."
"누가요."
"내가."
"제가 제 입으로 제 나이트 뒀는데 그것 때문에 형님께서 지실 것 같으니까 제 걸 무르라는, 그런 말씀 맞으십니까."
"그래."
"······ 그냥 제가 짖을게요. 형님까지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버릇."
"지금 말버릇 챙기게 생겼습니까."
"됐고. 물러."
생떼를 썼다. 완두콩이.
그래.
형님이니까.
나이트를 왜 무르라 하는지 대충 셈은 되지만 아무튼 물러달라고 저렇게 간청을 하는데 어른이 돼서 그걸 또 안 물러 줄 수가 있나.
그래서 물러줬다.
그리고 졌다.
"저 진짜 억울한 것 같은데."
"반말."
"요."
세크리티아의 여름 햇살 아래 열흘동안 데굴데굴 굴려가며 잘 말린 완두콩도 지금 저 놈보다 딱딱하지는 않을 거다. 아무튼 말이 전혀 안 통하는 것이다.
소리없는 긴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말했다.
"무슨 내기였는지 말씀하십시오. 들어드릴 테니까."
"대답."
"무슨 대답 말씀이십니까."
"어제 내 말. 대답 안 했잖아."
푹푹푹.
남은 푸딩을 다시 괴롭히고 있던 칼리안의 손이 멈췄다.
"그래서 이렇게 아침부터 사람 정신없게 만드셨습니까."
"아우님 입이 워낙 무거우시니."
"제 입이 무겁다니. 레이븐이 웃겠네요."
"말고. 대답."
답을 듣기 전에는 가지 않겠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댄 플란츠가 다리를 꼬았다. 그러더니 아예 팔짱까지 끼며 대답을 종용하는 이가 갖춰야 할 준비를 마쳤다.
그것을 보면서도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미련없이 굴었어서. 안심하고 있다가도 버릇처럼 다시 걱정하시는 것 압니다. 그런데 저는 제 빈 자리 준비하던 것 진작에 그만뒀습니다. 때려친지 오랩니다."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 못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말 만에 하나요. 사람 일은 누구도 모르는 거니까. 형님이든 저든 에일라든 얀이든 키리에든 헤르츠 경이든 드미레아든. 누구라도 결국 언젠가는 빈 자리가 날 텐데. 제 자리가 비게 되면 그 뒤에 비워질 자리 주인으로 제일 먼저 손꼽힐 사람은 당연히 형님 아닙니까. 그래서 권해드리는 겁니다. 혹시나 제 자리가 먼저 비더라도 형님까지 엮이지 않게 하려고요. 무슨 일이 생기든 살려드리려고요. 살려드리겠다 했으니."
"거짓말."
"아닙니다."
"숨긴 것."
"있습니다만. 그것 때문에 대공 운운한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언제가 됐든 제가 아르피아 궁에 가게 되면, 해주십시오. 부탁드릴 테니."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숨긴 건."
"궁금하면 체스 한 번 더 이기시던가요. 절대 안 져드릴 겁니다."
찌푸린 눈을 그대로 두고 자신을 보는 형을 향해 생글생글 웃어보인 칼리안이 말했다.
"괜한 걱정 마세요. 형님께 사과드리고 받을 때까진 정정하게 잘 살 테니까. 무슨 일이 있든."
"······ 알았어."
"네."
아무튼 얀을 안심시켜놓는 것과 완두콩 설득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그래도 적당히 큰 일을 끝낸 기분이 된 칼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시원한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시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 말씀 끝나는대로 얘기해주시지요. 찾아뵐 터이니.
팔찌를 통해 앨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찔리는 구석 많은 칼리안이 조심스런 대답을 전했다.
- 스승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카스트린 경에게 들은 일이 있기는 합니다.
······ 아.
또 혼나려나 보다.
라시드 브리센 때문에 플란츠의 속과 칼리안의 손바닥이 같이 갈라진 일에 대해서도 아직 안 혼났는데 그새 또 혼날 일이 쌓인 모양이다.
이런 생각을 한 칼리안이 대답을 전하려 했다.
그런데 앨런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 다만 그것은 슈린츠에 다녀와서 얘기 나누시지요.
- 무슨······ 슈린츠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것을 안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굳은 얼굴로 웃음을 지어 보이던 칼리안에게, 앨런의 답이 전해졌다.
- 슈린츠 변경백이 협회로 통신을 보냈습니다. 지난 새벽에 별궁이 습격당했고 전하께서 사라지셨다 합니다.
- 습격이요.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르메인을 노린 것이 아니다.
슬레이만을 노린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든 까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