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20화 (421/527)

제75장. 대마법사가 되어야지(1)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온전히 담지 못했다.

- 카아앙!

- 카앙, 캉, 카가각!

눈을 깜빡이는 그 짧은 순간에서조차 몇 번의 검격이 오갔다. 발을 물리면 따라붙고 몸을 틀면 검을 비틀어 찔렀다. 그것을 막으면 어느새 상대의 뒤에 선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대륙의 첫번째 검.

그리고 칼리안.

둘의 공방이 오가는 내내, 키리에는 분명 둘의 검을 모두 보았고 발소리와 숨소리를 들었으며 검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담지 못하는 공방이 태반이었다.

- 휘이익!

- 타악!

칼리안의 검격 범위로부터 훌쩍 몸을 날려 피한 테일란이, 제 앞을 스친 검이 지나가자마자 칼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에 쥔 검을 재빠르게 없애 흐트러진 중심을 최대한 바로잡은 칼리안이 테일란에게 마주 달려들며 다시 한 번 검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가로로 치켜들며 그 사이 날아온 테일란의 검을 막아냈다.

- 콰아아앙!

고작 한 발자국을 달려들었을 뿐임에도 온 몸의 무게를 더한 듯한 굉음이 울린다. 표정없는 칼리안의 입이 꾹 다물리는 것이 보인다. 테일란의 무게를 받아낸 칼리안의 발이 뒤로 쭉 밀려나는 소리가 들린다.

투둑, 툭, 투두둑.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두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검 손잡이를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 카아앙, 카앙!

- 카가가각!

있는대로 벌어진 손바닥 상처 사이로 검 손잡이가 파고드는 게 아닌가 싶은 통증을 무시했다. 그리고 테일란은 그런 칼리안의 작은 상처를 무시했다.

고작 그 정도의 상처를 신경쓰다가는 죽는다는 것을, 이 자리의 둘 모두 너무나 잘 아는 까닭에.

- 콰앙!

- 쌔애액!

칼리안에게 막힌 검에서 잠시 힘을 풀었다 곧장 내리친 테일란이 빛과 같은 속도로 검을 뻗었다. 그러자 칼리안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던 자신의 검을 위로 올려 뻗어냈다. 그러나.

- ······ 스걱!

결코 유쾌하지 않은 소리가 울렸다.

테일란의 속도를, 막아내지 못했다.

가늘게 찢어진 칼리안의 검은 셔츠와 재킷 사이로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하얀 팔뚝에 긴 혈선이 새겨졌다. 그나마 몸을 틀어 목 대신 팔만 베였음을 아는 칼리안이 재빨리 몸을 뒤로 젖혔다.

- 부우웅!

묵직한 파공음이 칼리안의 코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이 그 바람에 잘려나가 바닥으로 흩어졌다.

- 타아앗!

허리를 튕기듯 세운 칼리안의 몸이 그대로 테일란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크게 휘둘린 뒤 회수되던 테일란의 검 아래로 공격을 뻗어냈다.

- 파앗!

- 콰아아앙!

휘둘린 방향대로 계속 움직이던 테일란이 자신의 검을 강제로 붙들어 내리그었다. 그렇게, 칼리안이 찔러들던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 우우우웅!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검을 다시 내버린 칼리안의 손에 붉은 검이 만들어진다. 푸른 예기를 있는대로 뻗어내던 그 검이 테일란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빠른 공격이 테일란의 목을 향해 치닫는다.

그 순간.

테일란의 신형이 칼리안의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칼리안의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휘이익!

- 쌔액!

테일란이 검을 뻗어냈다.

그러자 그 검 끝에 있던 칼리안의 신형 역시 그림자 속에 숨어들 듯 모습을 지웠다.

"제법 빠르구나."

자신과 엇비슷한 속도로 모습을 감춘 칼리안을 향해 짧은 감상을 보낸 테일란이 몸을 비틀었다. 그렇게 어느새 제 뒤에서 날아드는 검격을 피해냈다.

칼리안이 멈추지 않고 테일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붉은 검에 어린 푸른 오러가 비산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테일란의 검에 어린 짙푸른 오러가 칼리안의 검에 휘감기는 듯한 착각이 든다. 바닥이 진동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 콰앙!

아니.

바닥이 진동한다. 그것만은 착각이 아니다.

- 카앙, 카아아앙!

- 카아앙!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목 언저리에서 반대편 허리를 향해, 어느새 정수리를 노리며, 정형화되지도 않은 쉼없는 공격이 테일란에게 이어졌다.

한 발, 두 발, 세 발.

테일란이 뒤로 물러서며 칼리안의 공격을 튕겨내고 막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칼리안의 검을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올려쳤다.

키리에는 분명 칼리안의 검이 다시 튕기리라 여겼다. 칼리안의 검도, 칼리안의 몸도, 테일란과는 비교하지 못할 만큼 가벼웠으니까.

- 콰아아앙!

하지만 막았다.

자신의 검을 걷어내려는 듯 올려쳐진 검을 힘으로 버텨내면서, 칼리안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 카가가가각!

붉은 검날을 받쳐 든 형상이 된 테일란의 검을 오히려 지지대 삼은 칼리안의 팔이 쏘아지듯 뻗어나갔다.

붉은 검날에 맞닿은 테일란의 검에서 불똥이 튀어오른다.

테일란이 어깨를 틀었다. 자신의 검을 억누르며 달려드는 새빨간 검으로부터 몸을 피했다. 그러나 온전히 몸을 빼내지는 못했다.

- 스걱!

예의 소리가 다시 들렸다.

테일란의 왼쪽 어깨 위에 날카로운 발톱에 긁혀나간 듯한 긴 상처가 생겨났다.

주루룩.

뚝, 뚝, 뚝.

한 번씩의 얕은 상처를 주고받은 두 사람에게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것에 시선조차 두지 않은 테일란이 제 검을 다시 올려쳤다. 이번에는 버티지 않고 검을 치워낸 칼리안이 새로운 검을 손에 잡아들며 발을 박찼다.

- 타앗!

- 카아앙! 캉! 카앙! 카아아앙!

- 카가각, 카앙, 캉!

테일란이 몸을 숙이자 붉은 검이 그 위를 지나친다. 그것을 내친 테일란의 검에 찰나와 같은 달빛이 반사된다.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칼리안이 제 등 뒤로 검을 뻗어 테일란의 허리를 노린다. 어느새 방향을 바꾼 테일란의 검이 그것을 다시 쳐낸다.

빠른 속도로 모습을 지워내면 더 빠른 속도로 앞을 가로막았다. 상대의 검 끝을 밟고 도약하면 그 발이 닿을 곳에 먼저 달려가 검격을 보냈다. 상대의 검에 힘이 실리면 보다 강한 힘으로 밀어내듯 막아냈다. 서로가 그렇게 서로의 목숨을 붙들고자 검을 내질렀다.

- 카아앙, 캉! 카앙!

키리에가 작은 숨을 몰아쉬는 사이 세 번의 공방이 더 오갔다. 칼리안이 공격했고 테일란이 튕겨냈다. 테일란이 검을 휘두르고 칼리안이 막아냈다. 방향을 잃은 검을 되잡은 칼리안이 테일란을 옭아맸다.

- 카가강!

두 검이 교차되듯 맞붙었다.

찰나의 힘 싸움이 이어진다.

서로에게 막혀 움직이지 않는 검 사이로, 테일란을 꿰뚫어내듯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네. 빠릅니다. 제법."

이미 한참 전에 건네졌던 테일란의 말에 대해 답을 전했다.

- 카아아앙!

칼리안이 테일란의 검을 힘주어 밀어냈다. 그와 함께 자신의 몸 속을 휘감아 돌던 오러를 조금 다르게 운용했다.

- 우우웅······.

푸른 빛을 띠던 칼리안의 오러가 붉게 변했다.

오로지 붉은 빛만 내게 된 검을 손에 잡은 채 발을 내딛었다.

울컥!

갑작스레 달라진 오러의 성질을 모두 견디지 못한 어린 몸 속에서 피 냄새가 치밀었다. 이제는 버릇이라 할 수도 없을, 마치 숨을 쉬듯 그것을 되삼킨 칼리안이 발을 박찼다.

- 쿠웅!

묵직한 소리가 울린다.

푸른 오러를 몸 속으로 돌려 팔과 다리의 근육을 단단하게 만든 칼리안이 날아오르듯 몸을 띄웠다.

- 쌔애애액!

에우리아의 번개가, 아르센의 얼음창이, 에일라의 단검이, 혹은 플란츠의 화살이 만들어낼 법한 파공음과 함께 붉은 검이 내리꽂혔다. 피하는 것 대신 막아서기를 택한 테일란이 자신의 검을 굳게 다잡았다. 찔러드는 붉은 검의 가드 쪽을 향해 검날을 댔다.

붉은 검이 내리꽂힌다.

그것을 막아선다.

- 콰아아아앙!

두 날붙이가 서로를 부숴놓을 듯 맞부딪혔다.

뒤늦게 불어든 바람에 키리에의 머리카락이 잠시 흔들리다 제자리를 찾았다.

"······ 이제는 제법 무겁기도 합니다."

말을 덧붙인 칼리안의 붉은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테일란의 발이 흙바닥을 파고든 것을 본 까닭이었다.

가드에 막힌 테일란의 검이 뼈를 긁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들으며 칼리안의 기세를 마주하던 테일란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무리하고 있구나."

"무리하지 않고 스승님을 상대했던 적 없습니다."

검을 비틀어 칼리안의 공격을 아래로 흐트려낸 테일란이 몸을 돌려세웠다. 방금 전까지 앞에 있었으나 어느새 등을 향해 치닫는 스승의 검을 피한 칼리안이 다시 달려들었다.

8년 전의 테일란.

그 시기의 베른은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던 스승을 향해서.

- 카아앙, 카가강, 캉!

테일란이 제법 빠르고 제법 무거운 검격을 받아냈다. 그 뒤 양 손에 쥔 검을 힘껏 올려치며 발을 박찼다. 가늠하기 어려울 빠른 속도로 칼리안의 지척까지 날아든 테일란이 검을 내찔렀다.

칼리안이 새된 소리가 날 듯한 웃음을 지으며 오러를 다시 운용했다. 목구멍을 타고 치받아 오르는 묵직한 피 냄새를 끝내 삼켜냈다.

- 우우웅!

- 파앗!

팔을 덮는 작은 방패가 칼리안의 왼손에 쥐어졌다.

보다 얇고 날카로워진 검이 칼리안의 오른손에 들렸다.

- 카아앙!

- 휘익!

붉은 빛이 찰랑이는 듯한 방패를 들어 테일란의 검을 올려친 뒤 오른손의 검을 내찔렀다. 검에서 손을 놓을 수 없어 무게 중심이 잠시 흐트러진 테일란이 허리를 비틀었다.

쓸모를 다한 방패를 내버리듯 없애버린 칼리안이 오러 섞인 마력을 다시 운용했다.

······ 울컥!

삼켜냈다. 입 밖으로 조금도 새어나오지 않도록.

조금 전까지 방패를 쥐고 있던 왼손에 예리한 단검이 들렸다. 테일란에게 막힌 오른손의 검 대신 반대편 손에 들린 단검을 틀어잡았다. 테일란을 향해 있는 힘껏 찔러넣었다.

- ······ 푸욱!

살갗이 꿰뚫리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곧, 피부 속을 단단히 죈 테일란의 오러에 막혀든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얕은 자상 하나를 늘린 테일란이 발을 물렸다. 재차 달려드는 대신 가만히 멈춰 선 칼리안이 단검을 없앴다.

"변칙에 능하구나."

"공정한 방법으로만 공격하는 적은 세상에 없는 까닭입니다."

그가 했던 말을 조금 바꾸어 되돌려 준 칼리안이 검을 다잡았다.

"굳이 나를 이기겠다고 그렇게 무리해가며 온갖 수를 다 꺼내드는 것은 아닌 듯 한데······ 나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이냐."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피 냄새가 짙어진다. 붉은 입이 더 짙은 웃음을 그려낸다.

그리고 테일란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어깨와 허리를 조금씩 베였다 하여 물러설 테일란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인물을 스승으로 두었던 적 없었기 때문에.

테일란이 검을 다잡았다.

제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왔다 한들.

제 아무리 후일의 테일란과 검을 주고받았다 한들.

- 카아앙!

제 아무리.

- 카아아앙, 카강, 카아앙!

- 카가강, 카앙!

형태의 제약이 없는 검을 사용한다 한들!

- 콰아앙!

굉음이 울린다. 두 검이 다시 맞붙었다.

테일란의 은빛 검이 칼리안을 향해 내리꽂힌다.

칼리안의 붉은 검이 테일란을 향해 올려쳐진다.

서로를 닮은 두 검이 여지없이 얽혀든다.

* * *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쉬십시오.'

'칼리안.'

'네.'

'설명.'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아까 했던 말. 대공.'

'란델 형님 계실 때는 아무 말씀 안 하시더니. 궁금한 것 못 참는 분께서 계속 참고 계셨습니까. 바로 물어보셔도 됐을 텐데요.'

'대답. 짖지 말고.'

'말 그대로입니다. 설마 국왕의 형으로만, 발칸 부군단장으로만, 아니면 새로운 공작이나 후작 작위 하나 받아 겸직해가며 평생을 보내려 하셨습니까. 그 정도로는 형님 평탄한 여생 보내시기 힙듭니다.'

'알아. 이미.'

'알면서 물으십니까.'

* * *

- 카가가각!

온 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한 감각이 키리에를 휘감았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변을 잊은 둘은 계속하여 검을 주고받았다.

검을 뻗어내면 어느새 사라진 상대의 검이 뒤에서 날아들었다. 그것을 피한 이의 검이 정 반대 방향에서 쇄도해왔다. 몸을 띄우면 띄우는대로, 몸을 낮추면 낮추는대로, 서로를 읽어낸 이들이 계속하여 공방을 이어나갔다.

- 우웅!

- 우우웅!

칼리안의 검이 화염을 담은 듯 휘몰아쳤다.

테일란의 검이 바다를 담은 듯 휘몰아쳤다.

투둑, 투두둑!

손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조금 더 적신다. 칼리안의 팔뚝에서, 테일란의 어깨에서, 허리에서, 방울져 맺힌 피가 사방으로 떨어져내린다.

"하아."

공격이 막힌 칼리안이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붉은 눈을 부릅뜨며 테일란을 향해 발을 박찼다.

- 우우웅!

세 개의 단검이 허공에 떠올랐다.

테일란의 검을 막으면서, 테일란의 움직임을 읽어내면서, 테일란을 향해 검을 내지르면서, 그 단검을 쏘아보냈다.

- 쌔애애액! 쌔액! 쌔애액!

칼리안이 손에 쥔 검과 손에 쥐지 않은 단검이 테일란을 향해 날아들었다. 온 몸의 급소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 카가가강!

테일란의 신형이 빛처럼 움직인다.

앞에서 달려드는 칼리안의 검을 쳐낸 뒤 칼리안을 향해 한 발을 다가가 몸을 틀었다. 숨을 몰아쉴 틈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 캉, 카강!

두 개의 단검을 쳐낸 테일란이 몸을 비튼다.

저만치 나가떨어진 것을 제외한 남은 하나의 단검이 테일란의 미간을 향해 치달았다.

- 쌔애액!

그것을 끝까지 바라보던 테일란이 팔을 움직였다. 칼리안의 옆을 돌아 등 뒤로 와 섰다. 날아드는 검보다 빠르게 움직인 테일란을 대신해, 칼리안이 쏘아보낸 단검이 칼리안 스스로의 미간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그러나.

- 휘이익!

곧바로 유려하게 방향을 바꾼 단검이 칼리안의 뒤를 향했다. 그와 함께 몸을 돌린 칼리안 역시 다시 검을 내찔렀다.

- 타당! 카아앙!

여러 개의 검이 달려드는 듯한 착시를 일으킬만큼 사방에서 치닫는 칼리안의 검과, 이번에는 테일란의 뒷목을 노리며 날아드는 단검, 그 모두가 전부 다 테일란의 검에 막혔다.

피 비린내가 또 한 번 목을 타고 올라온다.

강제로 단단해진 온 몸에 찢어질 듯한 통증이 찾아든다.

저무는 것을 잊은 이의 꽃같은 미소가 피어난다.

그런 칼리안을 바라보던 테일란이 잠시 한 발을 물렸다.

지칠 줄 모르고 날아드는 암기들을, 몸을 가까이하면 여지없이 찔러들어오는 단검을, 이제 되었다 싶으면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를 상대한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주변은 여전히 어두웠고 그저 계속되는 밤이었으니.

- 카아아앙, 카가각, 카앙!

붉은 장검의 아래로 검을 밀어넣은 테일란이 제 힘으로 두 검을 다 들어올렸다. 그리고 몸을 비틀어 저를 향해 날아드는 단검의 앞에 가져다댔다. 칼리안의 검에 맞아 튕겨나간 단검이 방향을 잃고 뻗어나가다 이내 사라졌다.

- 쿠웅······.

테일란이 다시 발을 박찼다.

지체없이 몸을 띄운 칼리안이 테일란의 검을 허공에서 막았다.

- 카앙, 카앙, 캉! 카아앙! 캉!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에도 공방을 주고받는 둘의 신형이 어지러운 빛을 흩뿌렸다. 디딜 곳 하나 없이도 날듯이 움직여가며 검을 다루던 둘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아니.

칼리안의 발만 땅을 밟았다.

- 투욱.

칼리안의 검 끝을 밟고 다시 도약한 테일란이 허공에서 방향을 바꿨다. 그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재빨리 몸을 틀며 검을 뻗어냈다.

그러나 테일란은 이미 그 곳에 없었다.

반짝, 하고.

정 반대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낸 테일란의 검이 칼리안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아무런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키리에와 달리 진작에 그것을 파악한 칼리안이 몸을 돌렸다.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테일란은 공격을 보내오지 않았다.

- 쉬이이잉······.

테일란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멈춰 선 칼리안이 눈을 내리뜬 채 집중했다.

- ······ 쿠웅.

그 검이 그토록 가벼우리라고는 절대 예측하지 못할 육중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키리에는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가늠하지 못했다. 모든 곳에서 소리가 났고 모든 곳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듯한 착각이 든 까닭이다.

숨죽이고 있던 칼리안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 때.

- 쌔애애액!

어느새 다가온 테일란이 칼리안의 지척에서 검을 뻗는다.

칼리안이 검 손잡이를 틀어잡았다. 몸을 돌릴 겨를도 없이 뒤를 향해 팔을 움직였다. 다시 한 번 등 뒤로 검을 뻗어냈다. 그리고 그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 사아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키리에는 그렇게 느꼈다.

테일란, 테일란에게 등을 내보인 칼리안.

테일란의 손에 들린 검의 끝. 그것이, 테일란에게서 등을 돌리고 선 채 고개만 돌린 칼리안의 목에 가 닿았다.

- ······ 투둑.

- 투두둑, 투둑.

얄팍하게 베인 새하얀 목에 붉은 실이 생겨났다. 마치 칼리안의 입술같은, 검과 같은, 눈빛같은 새빨간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함께 죽었습니다."

칼리안이 굳게 잡은 검의 끝.

등 뒤로 뻗어낸 그 붉은 검의 끝. 그것이, 칼리안의 뒤를 노리고 달려들던 테일란의 왼쪽 가슴에 가 닿은 것을 안 까닭에.

"······ 그래. 함께 죽었구나."

칼리안은 목을 베였고 테일란은 심장을 찔렸다.

함께 죽었다.

* * *

'제가 왕이 되면 형님들은 더 이상 국왕의 직계 자녀가 아니게 되니 제가 왕관을 쓰는 그 순간에 그나마라도 도움이 되던 시스파니안의 축복도 사라질 텐데요. 저나 되니까 그냥 왕제인 베른 세크리티아로 살았지, 형님은 못 합니다. 왕의 형제가 가진 목숨줄만큼 실낱같은 것도 없으니.'

'······ 너.'

'듣기에도 좋잖습니까. 왕의 형이자 발칸의 부군단장인 플란츠 룬 카이리스, 왕의 형이자 어딘가의 공작 혹은 후작인 플란츠 룬 카이리스, 왕의 형 플란츠 룬 카이리스. 이것보다는. 대공, 플란츠 룬 카이리스······ 이렇게 불리는 것이.'

'칼리안.'

'네.'

'똑바로 말하고 제대로 부탁해.'

'······ 무엇을요.'

'정말 나를 위해 안배하신 자리가 맞나.'

'그게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혀. 아닌 것 같은데.'

* * *

테일란이 천천히 검을 거둬들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단숨에 검을 치워냈다.

온갖 수를 다 써가며 간신히 테일란과 함께 '죽게 된' 것에 대한 벅찬 감상을 전하려 입을 열었다. 아직 자신은 슬레이만의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다만 테일란을 상대할 수 있던 것은 테일란의 검을 모조리 꿰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으니, 혹시나 오늘의 결과로 자만을 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말하고자 입을 열었다.

"혹시나 걱정하실까 말씀······!"

- 울컥!

그러나 다시 차오르는 향을 삼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싸움이 모두 끝났음에도.

테일란의 얼굴에 가득했던 웃음이 일순간에 지워졌다.

한참동안 칼리안의 얼굴을, 그 속에서 휘몰아치는 오러를 지켜보던 테일란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칼리안이 그렇게까지 무리해가며 테일란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야 눈치챈 까닭이다.

"언제부터 스스로의 오러에 해를 입으셨습니까."

테일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자님의 푸른 오러. 혹시 그것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어느새 다시 돌아온 말투로 칼리안을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큰 신경을 쓸 여력이 없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제까지 다른 문제가 없던 것 아닙니까. 헌데 왜."

"하나의 서클에 담기는 마력에는."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이어졌다.

"한계가 있습니다. 마력과 일체화되지 않은 오러는 제가 검을 잡고 있는 한 계속 쌓여갈 수밖에 없고요. 그런데 마력을 담은 오러와 순수한 오러의 성질이 서로 달라서."

입술을 비집고 나온 핏물을 지워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 힘들어지네요. 조금씩."

드미레아에게도, 에일라에게도, 플란츠에게도.

차마 알리지 못할 사실을 내놓은 붉은 입술이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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