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장. 다른 끝(6)
누군가에겐 당연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아닌 일이 있다.
이제는 당연하게 여기지만 처음에는 아니었던 일도 있다.
'라시드 브리센은 저와 닮았습니다.'
'전혀.'
'제가 볼 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라시드 브리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없습니다. 반대로 놈은 저에 대해 꽤나 많은 걸 알고 있고요.'
'에반과 같은 것을 숨기고 있을 수도.'
'오러 말씀이시죠. 검의 길에 올랐던 것을 숨겼던 일이요.'
'그래.'
'네. 라시드 브리센이 이미 검의 길에 올랐고, 저보다 더 많은 오러를 가지고 있어서 제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그런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뭘 숨겼을지 제대로 알아보려는 중입니다.'
'마법사라도 몰래 붙이겠다는 말씀이신지.'
'들킵니다. 헤르츠 경의 은신 마법을 알아봤다 했으니 그런 것은 안 통해요. 제가 직접 라시드 브리센이 의심하지 못할 사람으로 분해서 접근할까 합니다.'
'누구.'
'하얀 수리. 그 자입니다.'
'불가능할텐데.'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썩 재밌는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어떻게.'
'저도 없었으니까요. 마지막에는.'
'······ 혹시. 내가.'
'아무리 그래도 설마하니 형님께 제 팔 잘라 놓을 실력이 있었을 리가 없잖습니까. 제가 며칠 못 자고 못 먹고 화살도 많이 맞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남도 모르고 저도 모를 상태였다지만 형님같이 약하디 약하신 분한테 팔을 내줄 만큼 엉망은 아니었습니다.'
'신랄하시군.'
'괜히 또 시드시는 것보다는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게,'
'그 핑계로 짖지 말고.'
'······ 네. 어쨌든 그것까지는 형님도 보셨을 줄 알았는데요. 다누에게 불려가셨을 때. 모르셨습니까.'
'혼자 먼저 보지 말라며.'
'그래서 제대로 안 보셨습니까.'
'안 봤어.'
'잘 하셨네요. 이렇게 가끔씩이나마 말 잘 들어주시는 것을 보면 뿌듯하긴 합니다. 키우는 보람이 있기는 하달지.'
'고양이라 하시더니. 짖는건 천성인가.'
'대사막 개 닮았다면서요. 천성인가보죠.'
'다시 보니 안 닮았다 하면. 안 짖나.'
'이제와 아니라 하셔도 계속 짖겠죠. 천성이라서.'
'······ 하던 얘기나 계속하시지.'
'네. 어쨌거나 제가 하얀 수리로 모습을 바꿔서 찾아가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장 나가서 그 자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려 하신 건가.'
'아뇨. 지금은 우선 제 모습으로 후작저에 가 볼 생각이었습니다. 둘 사이가 정말 나쁜지도 확인할 겸, 브리센 후작이 모두를 경계하도록 만들어 둘 겸.'
'그럼. 그 변장 도구. 지금 한 번 더 쓰는 것은 어떠신지.'
'변장 말씀이십니까.'
'아우님께서는 오러를 숨기실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있습니다. 하얀 수리로 변하면 그것부터 숨길 생각이었고요.'
'그러니까. 변장하고 오러 숨기는 것. 지금 하자고.'
'어떤 식으로 말씀이십니까.'
'아우님과 내가 라시드 브리센을 동시에 만나는 식으로.'
'혹시 형님께서 제 모습으로 변장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형님 저 따라하실 수 있겠습니까.'
'있어.'
'저한테 그 정도로 관심 두신 줄 몰랐는데. 또 뿌듯하네요.'
'이 정도로 열심히 짖으실 줄 몰랐는데. 또 짜증나게 하지.'
'멀쩡한 왕궁에서 멀쩡한 귀족들 멀쩡하게 잘 만나다 멀쩡했던 손바닥 두 쪽이 안 멀쩡하게 쭉 갈라져서요. 아프니까 열심히 짖기라도 해야죠.'
'미안해. 그건.'
'또 그럴 일 안 만들겠다 하시면, 사과 받겠습니다.'
'알았으니까.'
'네. 아무튼 그럼. 형님 말씀대로 했을 때 놈이 가짜임을 알아본 듯한 티를 낸다면 저보다 오러가 많다는 말이 될 테고. 티를 내지 않더라도 제가 원했던 결과는 얻어지겠습니다.'
'그래.'
'무엇보다······ 재미가 있겠네요.'
'재미있겠지.'
'라시드 브리센은 제가 만나겠습니다. 스승님께 부탁드릴 테니 브리센 후작저에는 형님께서 가십시오.'
'말고. 반대로. 놀란 것을 숨기는 정도는 나도 알아볼 수 있어.'
'하지만. 형님.'
'내 몫이라고 했던 말. 잊으셨나.'
'형님 몫 챙기다 또 시드실 것 같아서 그럽니다.'
'대체 아우님께서는 나를 뭘로 보시는지.'
'툭하면 시들어서 손 되게 많이 가는 파릇하고 동그란 거.'
'너. 또.'
'형님이 지금 떠올리고 계실 바로 그거요.'
'······ 야.'
'걱정된다는 얘깁니다. 형님이.'
'괜찮다는 얘기인데. 내 아우님께서 잘 고쳐두신 울타리 덕에.'
'그래도······ 네. 알겠습니다.'
이렇듯 길고 평화로운 대화 끝에 벌인 일이었다.
칼리안으로 변장한 플란츠가 라시드 브리센을 만났고 결국 완두콩 고집을 못 꺾은 칼리안이 그레이 브리센 후작저로 갔었다.
잠시 그 대화를 떠올리는 동안 칼리안의 말을 정리하고 이해한 란델이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레이 브리센 후작으로 하여금 네게 무언가 다른 속내가 있으리라 여기게끔, 후작이 제 세력을 섣불리 모으게끔. 그런 목적으로 변장 도구를 썼던 것이라며 라시드 브리센이 착각하기를 원했다는 것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채워져 있던 팔이 사라지는 바람에 바닥에 널브러진 통신용 팔찌들. 그것을 주워 다시 착용한 칼리안이 대답했다. 그리고 방금 전 플란츠에게 말했던 것들 중 란델이 몰랐던 내용들에 대해 보다 자세한 설명을 더했다.
"하얀 수리라는, 라시드 브리센의 수하가 제가 아는 외팔이 기사로 변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후 제가 하얀 수리를 죽였습니다만. 라시드 브리센은 그 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
"그래서 놈으로 변장해볼까 하는 겁니다. 제가 설마 변장을 또 하지는 않으리라 여길 테니까요. 외팔이 검사라면 더더욱이요."
칼리안이 잠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제 왼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 손 끝을 바라보던 란델이 말했다.
"그것은 이해하였다."
"네."
"허나 모르겠구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란델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플란츠를 바라보다 다시 칼리안을 쳐다봤다.
"너는 간혹 미래를 아는듯이 말하더구나."
"조금 압니다."
"그리고 그 이방인. 세크리티아의 국왕. 너는 그를 닮았었지."
"······ 형님입니다. 저의."
"그런데 세크리티아의 국왕에게는 동생이 없지 않더냐."
"형님께서 믿기에는 어려운 일이겠습니다만. 저는 체이스 형님의 동생으로 스물여섯 해를 살았습니다. 그러다 죽었고, 10년을 거슬러왔고, 그리고 지금입니다. 과거의 저는 이번 생에선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너를 두고 나에게 경고를 했던 일이 있다. 아마도 그 역시 너에 대해 아는 듯 하던데."
"맞습니다."
"헌데도 그 자를 따라 돌아가지 않았구나."
"네. 안 갔습니다."
"그 변장 도구를 이용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그리 하지 않았더냐. 네가 왜 굳이 이 곳에 남았는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 가며 우리를 돕는지. 그에 대한 의문이 드는구나."
"······ 그것은."
란델의 말에 대해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한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이유를 알리기 난감했던 까닭이다. 나름의 당사자가 이 자리에 함께 있지 않나.
한동안 대답이 이어지지 않자 란델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것은."
그런 칼리안을 대신해 그 당사자,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의 새 국왕이 전쟁을 일으켰다 합니다. 그 전쟁 때문에 죽었고 세크리티아도 그로 인해 멸망했다 합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기로 했었습니다."
"새 국왕이라면."
"네. 접니다."
"셋째가 용케도 너를 그냥 두었구나."
"아쉬우십니까."
"다소 그렇다."
"용케도 그냥 둔 것이 저 뿐인 줄 아십니까."
"아니더냐."
"칼리안이 처음 이 곳에 왔던 날, 형님에게 살기를 흘리려던 것을 제가 불러 막았습니다."
"그리 막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겠구나."
"다소 그렇습니다."
그것 참. 세렌티시여.
쟤들이 뭐가 예쁘다고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요.
"그만하시죠. 저까지 아쉬워지기 전에."
좋은 형님 놔두고 내가 여기서 이게 뭔 고생이람.
알고보면 난 의외로 인내심이 정말 많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보던 칼리안이 속내를 곱게 포장한 말을 꺼내 전했다.
"형님 말씀대로입니다. 처음엔 막기 위해서. 그 뒤엔 살리기 위해서. 그러다 보니 지금은······ 살고 있어서. 안 갔습니다."
"살리다 보니 살게 되었다. 그것이 네 답이더냐."
"정해진 결말을 한 번 바꿨으니. 더 나은 다른 끝을 만들어 보여드려야 할 의무도 생겼고요."
누구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인지에 대해 란델보다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한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것이 자신이 했던 말에 대한 답임을 알아들은 까닭이다.
'내 어머니가 그리 애써가며 걸어간 길에. 그것 말고 다른 끝이······ 있기는 할까.'
그 날의 플란츠에게는 알리지 못했던 다른 끝.
실리케가 그리 애써가며 걸었던 길의 종막. 그것을 떠올리던 칼리안이 잠든 루시의 분홍색 발바닥을 건드려보며 말을 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정해진 결말'을 입에 올렸다.
"회색 갑옷을 입고 있던 기사들. 새하얀 로브 차림의 마법사들. 형님이 그 둘을 거느리고 선 것을 기억합니다."
칼리안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그 날의 모습을 기억하느라 웃은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발바닥 건드리는 것을 참 싫어하는 루시가, 잠결임에도 불구하고 솜방망이같은 하얀 발로 칼리안의 손을 팡팡 때려댄 탓이었다.
"그보다는 이렇게, 회색 고양이와 하얀 고양이를 돌보며 지내는 지금이 낫지 않습니까. 탑이나 다를 바 없는 텐실의 왕궁에 어쩔 수 없이 불려가 누군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것보단 제가 드린 장미를 거기까지 가져가 키워보겠다 말씀하시는 지금이 낫고요."
플란츠는 당연하다 여기지만 란델은 그렇지 않은 일.
지금의 플란츠에게도 처음부터 당연하지는 않았던 일.
칼리안이 이 곳에서 사는 것, 라시드의 외팔이 수하 노릇까지 감수하며 생판 남이라 해도 될 두 형제를 굳이 살리겠다 하는 것. 이제는 새삼스러워진 그 이유를 다시 설명했다.
"란델 형님 텐실까지 잘 배웅해 드리고. 브리센 후작저 새로 지어서 형님 살게 하고. 그러고 나면 전쟁 날 일도 없겠죠."
"브리센을 없앤다면서. 후작위에 둘째를 두겠다 하느냐."
"아뇨."
칼리안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켜보이며 생긋 웃었다.
"아시겠지만 멋대로 심장 묶어두신 게 란델 형님 뿐만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형님이 그렇게 맺어 둔 맹세의 인이 잘못 돌아갈까봐 걱정이 되어서, 저도 형님과 계약을 하나 해 둔 터라."
"둘째에게 맹세의 인이 하나 더 있더니."
"네. 알고 계셨습니까."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란델이 플란츠의 심장에 묶인 또 하나의 인을 언제 알게 되었는지를 눈치 챈 까닭이다.
에반을 없애기 전까지 플란츠의 목숨을 연장시켜둔 것에, 칼리안과 묶어 둔 맹세의 인 뿐만 아니라 히나와 란델의 치유력도 큰 몫을 했었지 않나. 본의 아니게 란델의 도움을 받았던 날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유쾌한 기분이 들 리가.
그런 플란츠와 달리 란델이 형을 살려두었음에 큰 유감이 없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의 인 조건에 브리센 후작저가 묶여 있어서요. 그래서 정확히 말해 후작위가 아니라 후작저입니다."
- 플란츠는 왕궁에서 나가면 카이리시스의 브리센 후작저에서 고양이 키우면서 산다.
- 칼리안은 열심히 돕는다.
"브리센이 아주 없어지면 후작위가 없어지거나 가문 이름이 바뀔 테고, 그렇게 되면 브리센 후작저라는 것도 의미가 없어지니 어디에 살든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요. 형님 손으로 싹 태워버린 후작저 터에 새 집 잘 지어서 거기에 살게 해드리려고요."
"쉽지는 않겠구나."
"괜찮습니다. 능력 많은 사람이라. 란델 형님 편히 장미 키우며 사시게 해 드릴 자신도 있는데 수도 안에 형제 한 명을 두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어쨌거나 힘들게 고친 형님 심장 계속 안녕하시려면 그 곳에서 지낼 수밖에요. 고양이 잘 키우는······"
칼리안이 루시의 머리를 다시 톡톡, 살며시 두드렸다.
"대공으로."
아직 플란츠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원대한 포부를 툭 던지듯 꺼내놓은 칼리안이 참 태연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쟤를 탑에 보내든 수도 밖으로 내보내든 굳이 대공이라는 작위까지 만들어다 쥐여 주든 일말의 관심도 없을 란델의 무표정과, 길고 긴 여생을 고양이나 품에 안고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내게 해주겠다는 말로 꼬셔낸 똑똑한 완두콩을 평생 옆에 두고 부려먹겠다는 동생의 야심찬 계획을 이제야 알게 된 플란츠의 깊은 짜증을 못 본 척한 채로.
* * *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 고쳐지는 것인지.
며칠 사이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이 복구되었다. 칼리안이 디디고 지나가 부서졌던 것들이 말끔히 변해 있었다. 숲 속에 만들어 둔, 끝모르게 깊던 구덩이가 메워졌고 얼거나 불에 타버린 나무들 대신 어린 묘목들이 벌써 심겼다.
"마법 등불도 다 치우라 하셨나 보네."
온 숲길을 다 밝혀 둘 것처럼 설치해뒀던 마법 등불이 숲의 입구에 놓여있던 것만 제외하고 전부 다 사라져 있었다. 기왕 설치한 것이니 그냥 두어도 되지 않았나 하는 마음에 이렇게 말을 하니, 곁에 있던 키리에가 나지막한 대답을 건넸다.
"왕자님께서 어두운 숲을 좋아하신다는 것 정도는 아실 분 아닙니까."
"그래서 치우셨나."
"그래서 치우셨을 겁니다."
"나야 좋지만. 마법사들이 고생 좀 했겠는데."
"고생했다 하기에는 다들 신기해하며 전투의 흔적을 구경하느라 신이 나 있었습니다. 그것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미친놈들."
솔직한 반응에, 키리에가 소리없이 웃었다.
"그렇게 다 복구해두고 여기는 그냥 두셨네, 형님은."
"어차피 다시 망가질 것도 아실 테니까요."
무언가를 또 심어 둬봐야 다시 파헤쳐질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멀리 보이는 숲 중앙의 공터만은 아무것도 복구되지 않은 채였다.
당장 오늘만 해도 그렇지 않나.
만약 이곳까지 묘목을 심어뒀다면 다른 곳에 미리 옮겨두어야 했을 터였다. 테일란과 검을 맞대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이곳이 온전한 채로 아침을 맞이하진 못했을 테니까.
"키리에."
"네, 왕자님."
"그 후로 오러는 어때."
"아직 다시 발현하지는 못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무언가를 떠올려보다 입을 열었다.
"내 스승님이 스물 셋, 내가 스물 하나. 그렇게 검의 길에 올랐었어."
"네. 말씀해주신 적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도 엄청 빠른 거였거든. 지그프리드 공도, 브리센의 핏줄들도 그렇게 빠르게 얻어내지 못했었으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네가 그것을 당겨둘 지도 모르겠고. 그 뒤엔 내 정혼자님이 한 번을 더 당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박 자박.
키리에의 발소리가 홀로 울렸다. 그러나 홀로 걷는 길이 아님을 증명해주듯 칼리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쉽게도 지금의 내가 검의 길에 오르는 나이를 확 당겨놔버려서 가장 빠른 나이로 알려지지는 않겠지만. 분명 가장 빨리 오르겠지. 이번에는."
칼리안이 검의 길에 오른 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바람에 검의 길에 올라선 가장 빠른 나이가 열 다섯으로 기록되어 버렸다. 만약 드미레아가 스물이 되기 전에 오른다면 사실상 누구보다 빨리 검의 길에 오르는 것이지만 기록 상으로는 칼리안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애석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키리에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과거의 소공작께서는 검의 길에 오르지 못했습니까."
"못했다 하기보다는 안 했다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 때의 드미레아는 무엇을 위해서든 강해질 이유를 찾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검의 길에 오르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지그프리드는 지켜내기 때문에 강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번에는 소공작님이 하루 빨리 검의 길에 오르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얀을 우선하고 리리에를 보호하고 지그프리드를 이어가는 드미레아가 유일하게 스스로를 위해 욕심내는 게 검인데. 이제는 그렇게 하고 있는데. 보기 좋잖아, 그런 거."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키리에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난 너도, 드미레아도, 어서 올랐으면 좋겠어. 그것이 목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인 걸 나는 아니까. 검의 길에 오르고 나서 이제야 검을 제대로 쥘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고 나면 너도 드미레아도 정말 기뻐하리라는 걸 아니까. 나는 그렇게 기뻐할 네 얼굴을, 내 정혼자님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
묵직한 부담감이 싫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키리에가 주위를 둘러보다 말했다.
"소공작님도 이 자리에 부르셨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카스트린 경과 왕자님의 대련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오늘은, 안 돼."
"왜 안 된다 하십니까."
"확인할 게 있어서. 드미레아가 같이 알면 안 되는 일."
드미레아도, 에일라도, 플란츠도.
검을 다루는 이들 중 키리에가 아닌 누구도 알면 안 되는 일을 확인하려 한다 말했다.
"그런 일을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너에게야 무엇이든. 숨길 필요가 있나."
가볍게 답한 칼리안이 숲의 한쪽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튼, 키리에."
"네."
이렇게 대답해오는 키리에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 좋은 귀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있음에 작게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가늘어진 눈을 한 채로, 긴 웃음을 입가에 드리우고 말했다.
"물러나 있어. 멀찍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바람이 불어들었다. 그 뒤에는.
- 쌔애애액!
- 카가각, 카가가강!
숲의 적막을 산산이 부서뜨릴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먼 발치로 튀어나가 검을 든 칼리안과, 그런 칼리안에게 막힌 검을 들고 싱긋 웃고 있던 테일란의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둘의 인사가 그제야 이어졌다.
"인사도 없이 검을 보내십니까, 카스트린 경."
"예고를 보낸 뒤 공격하는 적은 세상에 없는 까닭입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공격부터 보내고 보는 칼리안의 버릇이 어디에서 왔을지 여실하게 드러낸 테일란이 제 검을 물렸다.
- 우우웅!
칼리안의 손에 들린 붉은 검이 길게 울었다.
적의 온 몸을 휘감아 조이는 뱀의 몸통처럼, 붉은 검을 휘감아도는 푸른 오러가 날선 울음을 더했다.
손 끝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낯선 빛을 발하는 칼리안의 검을 키리에가 바라봤다.
갈색에 가까운 녹빛을 띠는 테일란의 눈을 칼리안이 바라봤다. 그런 칼리안의 선혈과도 같은 눈을 테일란이 바라봤다.
"스승님."
"······ 그래."
테일란의 대답이 전해졌다.
"기대하마."
바람을 붙드는 듯한 그 말이 기꺼워, 칼리안이 웃음을 지었다.
"네. 얼마든지."
쿠웅······.
둔중한 발 소리가 칼리안을 향한다.
소리를 잊은 이의 발 소리가 테일란을 향한다.
- 카아아아앙!
재회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