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장. 다른 끝(5)
······ 아.
"형님 저하가 원래 이렇게 막 입은 채로 밖에 나가고 그러시는 분은 아닙니다. 물론 예전에는 벗다 말았는지 입다 말았는지 모를 차림을 하고 다니긴 했지만 그건 대외용 인격을 구축하던 시기라 본의와 다르게 행동하셨던 거고요."
······ 정말······.
"사실 오늘 재밌는 일 하나를 하는 바람에 형님이 제 모습으로 지낼 일이 생겨서 형님께 제 옷을 빌려드렸습니다. 그래서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 온 뒤에는 품이 너무 딱 맞았을 겁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얼굴 고운 만큼 몸도 고운 터라."
"궁금치 않았던 이야기를 하는구나."
"란델 형님 앞에서 형님 편 들어드리기로 했거든요. 아무튼 그래서 형님이 지금 이런 차림인 겁니다. 그러니까 혹시나 타이도 제대로 안 매고 재킷도 안 입고 셔츠도 풀어놨다 해서 여전하다느니 브리센 같다느니 그런 말씀 마시라고요."
"참작하마."
그냥······.
꺼졌으면 좋겠다.
편 안들고 참작 안하고 그냥 둘 다 꺼졌으면 좋겠다.
"애오옹!"
루시 엄청 오랜만이네.
안네는 찾아와도 너는 안 오길래 네가 나 까먹은 줄 알았는데······ 아. 안네는 층을 헷갈린 거구나. 하긴, 어쩐지 혼자 오더라.
이렇게 중얼거리는 칼리안이 루시의 수염 근처를 쓰다듬었다. 완두콩이 짜증을 내든 웃든 그리 신경쓰지 않는 느긋한 모습이었다. 세심하지 않기로는 대륙 으뜸인 탓에 그런 것에 대해서는 루시가 털을 세울 때 만큼도 신경을 안 쓰는 이가 바로 칼리안 아니던가.
"그런데 안네 되게 동그래졌네요. 살 쪘나."
"아니야."
"쪘는데."
"털이야. 반말."
"털이구나. 요. 아무튼 예쁜 건 여전하네요. 루시도, 안네도."
"······ 그래."
화 난 완두콩 정도야 뭐.
하도 동그래서 금방 풀리기도 하고.
"아, 형님. 코코는 얀을 시켜 헤르츠 경에게 데려다주도록 했습니다. 벌써부터 자기 자식 남한테 맡겨 버릇 하면 안 되니까요."
"지금 누구 얘기를 하시는지."
"그나저나 고양이들이 의외로 란델 형님을 싫어하지 않는 것 같은데. 란델 형님 방에도 루시랑 안네 다닐 문 하나 만들어두라 할까요."
"되었다."
"싫어."
"애옹!"
"니아앙."
"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답한 칼리안이 얌전한 소리로 우는 안네를 안아들어 플란츠에게 건넸다. 그리고 곁에 있던 루시를 가볍게 안아 제 무릎에 올려놓은 뒤 찻잔을 잡았다. 그러더니 차 위에 동동 떠 있는 길다란 잿빛 털에도 전혀 놀라지 않고 자연스레 클린을 시전하고는 바닐라와 오렌지 향이 감도는 홍차를 한 입 마시고 내려놨다.
그러다 그새 란델의 하얀 재킷에까지 안네의 털이 날려 간 것을 보고는 클린을 한 번 더 써서는 온 방의 고양이 털을 치워냈다.
그 모습을 보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개를 키우겠다 하더니."
"고양이들은 제가 키우는 게 아닙니다. 이 하얀 녀석은 히나가 키우는 제 고양이기는 한데 어쩌다보니 다 형님 품에 들게 됐습니다. 개는 제가 키우게 되겠지만요."
"이 곳이 더 소란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이 말에 잠시 란델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숨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꺼냈다.
"······ 네. 안 그래도,"
"그렇게 돌려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러나 제 말을 자르고 들려오는 플란츠의 목소리 덕에 입을 다물었다. 둘의 대화에 끼어든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칼리안이 체르밀에서 개를 기를 일은 없을 겁니다."
"섣불리 장담을 하는구나."
"섣부르지 않습니다."
"그래. 다만 네가 과연 그것을 지켜볼 수 있겠느냐."
"카밀론에는 칼리안이 갑니다. 제가 갈 생각 않고 잘 지켜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칼리안이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는 사이,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듯 답한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똑같이 표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로 그렇게 란델을 응시하다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과연 걱정이라는 말을 아시기는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따악!
- 차르륵······ 벌컥!
둘의 사이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울렸다.
하얀 커튼이 한 번에 걷히고 굳게 닫혀있던 긴 창이 활짝 열린다. 순간적으로 들어온 바람에 제각기 다른 색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나지막한 경고를 담은 목소리가 두 형을 향했다.
"서로 그렇게 날 세우지 마시죠. 제 앞에서."
란델과 플란츠의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장난기 가득했던 모습은 어느새 싹 지워진 얼굴로 찻잔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작게 입을 열었다.
"아픈 소리 똑같이 골라 싸움 키우는 것에 대해서까지는 형님 편 못 들어 드립니다."
아무리 편을 들어주겠다 했어도 플란츠도 잘못한 일을 두고 잘했다 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플란츠를 보며 꾸지람같은 말을 전한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란델 형님이 얼마나 억울했는지 들어주고 받아 줄 대상이 필요하면 당장 슈린츠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엉뚱한 사람 말고 잘못한 사람 제대로 찾아가 말씀하십시오."
가만히 있는 플란츠를 늘 꾹꾹 찔러대는 란델을 향해서도 마찬가지.
누구와 더 친하게 지내고 있는지와는 관계없이, '칼리안'의 입장에서는 둘 다 잘한 것 하나 없는 놈들이 아니던가. 그런 놈들이 마주보고 앉아 서로에게 상처될 것 뻔한 말을 주고받고 있으니.
"애옹!"
칼리안 아니라 루시가 봐도 혼날 짓이 맞는 것이다.
"브리센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고 란델 형님이 일부러 그런 식으로 상기시키지 않아도 형님은 이미 알아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혹시나 똑같은 사람이 될까봐 걱정하는 마음에 계속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란델이 눈을 내리떴다.
그것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었으나 칼리안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형님을 건드려가며 란델 형님께 가시가 될 말을 되돌려 들어야 속이 편해진다 여기시는 것 같은데."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용하다 무상하다 무의하다, 꺼내 놓아 보아야 어차피 그런 말 뿐일 것이 분명하여서. 무실한 답을 들을 기대는 잘 접어 둔 칼리안의 목소리가 계속됐다.
"아무것도 없던 형님 방에 시계 가져다 두셨죠."
"그리하였다."
"멈추지도 않고 되돌아가지도 않는 시계 쳐다보면서 후회하려고 노력해봐야 달라지는 것 없습니다."
"······ 그래."
"형님 손으로 아무리 오랫동안 시든 장미 피워가며 지켜본다 해도, 아무리 오랫동안 시계만 보고 있다 해도, 무슨 짓을 해도 안 바뀝니다. 되돌아갈 일도 없습니다. 되돌아갈 길이 있다 해도 제가 나서서 막을 겁니다. 무슨 짓을 해서든."
"그래."
"그러니 더는 안 그러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라도, 어떤 이유든. 안 그러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대로 보기로 마음먹었으면 저 뿐만 아니라 형님에 대해서도, 란델 형님 스스로에 대해서도 제대로 보십시오. 플란츠 형님께 르니에리를 건네고 가시를 돌려받는 그 일이, 하루종일 빈 방에서 시계만 쳐다보는 일이, 정말 속 편한 짓이 맞았는지. 속 편해지는 일이 맞을지."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이 품 속을 뒤졌다. 그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 무언가를 내어놓으며 다시 목소리를 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면 차라리 저한테 사과를 하시던가요. 괜찮다고는 못해도 들어는 드릴 테니까. 그것도 어려우면."
- 탁!
칼리안의 손에 들려있던 것이 란델의 앞에 놓였다.
"받으십시오."
"무엇이더냐."
작은 꽃망울이 달린, 많이 시들어버린 장미 가지.
녹빛의 꽃받침에 감싸인 작고 하얀 꽃잎이 언뜻 보였다.
"브리센 후작저에 가는 길에 온실을 보았는데, 시들어서 버린 것인지 버려서 시든 것인지 모를 가지에 꽃이 자라있기에 가져왔습니다. 다시 정원에 나가신다는 말을 들어서요."
짧은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플란츠를, 그리고 란델을 지켜보다 말을 이었다.
"둘째 동생 붙들고 싸움 거는 일을 그만두자니 너무 무료하고 셋째 동생에게 사과하는 건 너무 쉬워 못 하겠으면, 그냥. 제가 자른 꽃 대신 그것이나 키워보셨으면 좋겠는데. 어렵겠습니까."
"흰 장미로구나."
"네. 장미입니다."
"많이 시들었고."
"네. 시들었습니다."
란델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손을 뻗어 시든 가지를 집어들었다.
채 피어나지도 않은 꽃잎의 끝이 이미 노랗게 타들어갔다. 긴 가지도 마를대로 말라버려서 녹빛보다는 갈색에 가깝다. 그런 것을 키우라며 건네줬다. 제대로 된 묘목도, 건강한 가지도 아닌 그런 것을.
"시들었어도. 적어도 그건 안네루시아가 아닙니다."
"······."
"장미입니다."
"······ 그래."
다 저물어가는 가지에 간신히 달린 가시가 하나도 단단하지 않아서. 키워보아도 상처가 늘진 않을 것이라서.
"그리 해 보마."
플란츠에게 가시를 주고 돌려받는 일은 그만두고 칼리안에게 사과를 건네려 애써보는 일은 미뤄두고 다 죽어가는 흰 장미를 키워보겠노라 답했다.
"좋네요. 얘기 잘 들어 주시니까."
"장미가 맞다 하니."
"네."
형제들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란델의 손에 들린 장미를 잡아보려 손을 뻗는 안네를 가만히 토닥이며 말렸다.
그것이 누구든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장미가 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란델이 키워낼, 안네루시아가 아닌 첫 장미가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가짜 신력 쓰지 말고 정성껏 키워주셔야 합니다."
"그리 말할 것이었다면 튼튼한 장미를 주었어야 하는 것 아니더냐."
"그럼 의미가 퇴색되잖습니까."
"네게는 무용한 말을 잘 꾸며내는 재주가 있구나."
"칭찬입니까."
"칭찬이겠느냐."
"시스파니안께서 그 축복을 형님에게는 머리에 몰아주신 것 같았는데 란델 형님께는 입에다 쏟아주셨나 봅니다. 저는 어디다 받았는지 잘 모르겠던데요. 막내라 그런가."
"무구한 말을 잘도 하는구나."
"칭찬입니까."
"칭찬이겠느냐."
물론.
"······ 하."
다 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안네가 후다닥 일어나 간식 줄 사람을 찾아 나서고, 어쩐 일인지 칼리안의 무릎 위에 누운 루시의 꼬리가 점점 더 느릿하게 살랑거리다 멈추었을 즈음.
두 형님의 말싸움을 말려놓고 난 칼리안이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해 생각에 잠겨있던 그 동안.
- 톡, 톡, 톡.
사람은 셋이었고 입을 다문 건 하나였는데 여지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형님들을 따끔하게 혼낸 동생이 서로 상처입히지 말라고는 했지만 그렇다 해서 친하게 지내보라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손가락을 놀리는 작은 소리가 온 방 안을 메웠다.
사람은 셋이었고 눈을 내리뜬 것은 하나였음에도.
"그래서."
테이블이나 허벅지 대신 루시의 동그란 머리를 살살 두드리는 바람에, 일정한 속도로 토닥이는 부드러운 손가락을 이기지 못한 루시가 깊은 잠에 빠져들도록 만들어버린 칼리안이 비로소 침묵을 깼다.
"라시드 브리센은 왜 찾아온 겁니까."
이제라도 본론이 나온 것에 안심한 플란츠가 피로를 견뎠고, 쓸데없다 여겨 그새 기억 저 편으로 밀어 둔 오늘 일을 생각해낸 란델이 입을 열었다.
"안부를 묻고 제안을 하고."
"네."
"협박을 하더구나."
그러고보니 안부를 물었던가.
잊어버린 일을 되떠올려 본 란델이 라시드가 안부를 묻지는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 쯤,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제안을 하고 무슨 협박을 했습니까."
"너와 같은 제안을 하였다. 다만 그 뒤는."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대답하려 할 때.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뜬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형님께 텐실의 왕위라도 권하셨는지."
"네. 빌헬름 관의 병실에 있을 때 제가 그랬습니다."
"왜."
"탑에 보내드리기 싫어서요. 그렇다고 형님 사실 브리센 후작저 옆에 장미 많은 집 한채 더 지어드리면."
"싫어."
"그러실 것 같아서요."
너희들 지금 나 두고 뭐 하니.
이런 말을 꺼낼까 하다 그 역시 무의미하여 그냥 내버려 둔 란델이 찻잔을 들었다. 찻잔에 그새 또 떨어진 안네의 털을 치워준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렇게 살다 탑에 가는 것은 꺼려지고, 풍광 좋은 영지에 갇히는 것은 마음에 안 들고, 근본없는 나라의 왕관을 쓰는 것도 마뜩지 않고, 그렇다 해서 광장에 서기도 싫고. 전부 다 싫다 하신 건 란델 형님이시니······ 장미가 좋은지 고양이가 좋은지, 직접 정하십시오.'
'쉬이 집어들기 어려운 선택지구나.'
"물론 란델 형님이 하고자 하시는 것을 알려주시면, 그대로 이루시도록 도와드리겠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뭐든 상관없이 하고싶은 것 하게 해 드릴 테니까. 제가.'
"아직은 확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 그래."
소리없이 찻잔을 내려 둔 란델이 잠시 침묵했다.
"탑에 가는 것은 꺼려지고 풍광 좋은 영지에 또 갇히고 싶지는 않고. 광장에 서자니 이제는 아쉬운 마음이 들더구나."
"다행입니다. 란델 형님께도 아쉬운 것이 생겼다니."
"이곳에서 기르던 하얀 장미가 땅을 옮겨서도 제 뿌리를 낼지. 그것이 걱정된다만."
말을 멈춘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언제나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눈으로 깊숙이, 플란츠를 응시했다.
플란츠가 날카로운 눈을 한 채 란델을 마주 봤다. 심해와도 같은 란델의 시선 끝에 더 이상 향기가 들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
"끝내 동생들에게 고개만은 숙이고 싶지 않으니."
동생들이라고는 하지만 저건 무조건 플란츠를 지목하는 거다. 무슨 일이 있든 절대로 플란츠한테 고개 숙이고 살 생각 없다는 뜻이다.
피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하겠다 하시든 이뤄드리겠다 했으니까, 스승님께 부탁해 저 정원을 고스란히 텐실로 옮겨서라도 걱정하실 일 없게 하겠습니다."
"그래. 믿고 있으마."
"네."
란델이 텐실의 국왕이 되기로 한 것에 대해 플란츠가 아쉬워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때문에 조금 더 커진 웃음 소리를 낸 칼리안이 란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협박은, 그렇다면. 맹세의 인을 두고 한 말입니까."
란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맹세의 인에 의한 제약 때문임을 이미 아는 칼리안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란델로부터 조금 더 떨어져 앉은 뒤 란델의 눈을, 눈썹을, 입가를, 목을, 어깨를, 손 끝을, 무릎을, 발치를. 전부 다 한 눈에 담으며 물었다.
"제가 라시드 브리센을 죽이면. 협박의 효용이 사라지겠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상관없다.
그것이 곧 답이 된다.
"아니라면. 형님과 계약한 상대방이 라시드 브리센과 연관이 있습니까. 라시드 브리센이 그것을 두고 협박했다 하면, 그가 맹세의 인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 되니까요."
실리케를 상대했을 때처럼, 에반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데블란을 마주했을 때처럼, 에일라를 살피고 세크리티아의 마법사 협회장을 대하고, 얼마 전 하얀 수리를 내쳤을 때처럼.
침묵 속에서 답을 들은 칼리안이 다음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텐실의 인물인 것은 맞겠네요. 혹시 텐실 왕가의 사람입니까."
"무엇을 하는 것이냐."
"란델 형님 속 들여다보는 겁니다, 저도. 남들이 묻어둔 것 알아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서. 아무튼 그때 여쭤봤을 때에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여기시는 듯 하더니 여전히 그렇네요. 텐실 왕가의 사람인지가 정확하지 않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답을 들은 것처럼.
"셀레나 하이데른. 라시드 브리센의 모친이라던 그 사람입니까."
란델은 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답을 들었다.
"······ 누군지 참 궁금해지네요. 제가 살았을 땐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던 사람인데. 무엇이 바뀌었기에 일국의 왕자와 맹세의 인을 맺었는지."
재밌다는 듯, 가늘어진 눈으로 길게 웃은 칼리안이 란델을 쳐다봤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뒤 테이블에 놓여있던 팔찌를 가리켜보였다.
"오늘, 형님과 제가 그레이 브리센을 좀 건드려 놨습니다. 브리센 후작저에 가는 동안 제가 여기저기 얼굴도 드러내고 장미 가지도 얻어오고. 형님은 형님대로 왕궁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만나시기로 했으니 못해도 이틀이면 같은 시간에 같은 칼리안이 두 곳에 있었다는 것을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 알 겁니다. 제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할 사람이 형님이라는 정도는 후작도 알 수 있을 테지만 후작을 찾아간 것이 진짜 저인지 형님인지, 누가 누구의 의중을 떠봤는지는 모를 것이라서 많이 불안할 겁니다. 게다가 저는 후작과 만나는 것을 라시드 브리센에게도 '들키고 왔습니다'. 저희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라시드 브리센이 먼저 알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면 후작도 정신을 좀 차리겠죠."
오늘 무엇을 했는지와, 그 일로 노린 것이 라시드가 아닌 그레이였음을 알렸다.
"일개 개인에 불과한 라시드 브리센은 브리센이라는 가문이 사라진 카이리스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먼저 노리게 될 것은 당연히 후작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좀 알게 됐을 겁니다. 후작 말고 그 자리에 앉혀 둘 만만한 사람이 없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이제는 둘이나 더 있다는 것도, 심지어 둘 중 한 명은 저와 긴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요."
리리에.
물론 리리에를 이 판에 끼어들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랬다가는 진짜 파혼당할 거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런 사실을 모른다. 어린애들은 사랑받기만 하면 되지 정치판의 말로 다뤄지게 할 필요가 없음을 직접 알려줘도 안 믿을 것이다. 브리센이니까.
"그러니, 이 일로 제가 무엇을 꾸미는지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도 후작 자신이 타깃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 겁니다. 플란츠 형님이 후작을 따로 찾아간 일도 있었으니, 그 날의 형님은 진짜였을지 가짜였을지. 그 역시 혼란이 오겠죠. 란델 형님의 편에 설지 형님의 편에 설지를 정하는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라 생각할 겁니다. 믿을 수 있다 여겨지는 놈들을 다 불러모아 똘똘 뭉칠 테고요. 그럼 저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지금의 브리센을 치려면 어떤 가문들을 먼저 없애야 하는지만 파악하면 됩니다."
"그래서 함께 나서 한 사람 역할을 했느냐."
"······ 라고."
찻잔에서 눈을 뗀 칼리안이 란델을 쳐다봤다.
"머리 좋은 라시드 브리센은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서."
달그락.
루시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팔찌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입을 열었다. 다만 이제껏 하던 말이 아닌 조금 다른 소리를 꺼냈다.
"세크리티아에서 만듭니다. 많이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곳저곳에서 참 많이들 쓰더군요.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께서 이것이 더는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겠다 약속하셨으나, 이미 퍼진 것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를 해야 할 수밖에요."
란델과 플란츠의 눈이 팔찌에 가 닿았다.
신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살펴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키를 늘리고 생김을 변화시키고 목소리를 바꿉니다. 그런데 히나가 그러더라고요. 이것을 써도 사람 속은 안 바뀐다고. 그게 이상하다 여겼습니다. 골격을 바꾸면서 그 속은 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일까. 그것을 고민해봤는데."
찰칵.
칼리안이,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제 오른쪽 손목에 팔찌를 끼웠다.
- 스륵.
검은 머리가 길게 자랐다.
붉은 눈이 란델을 향했다. 그리고 플란츠를 향했다.
길어진 검은 머리가 색을 바꾸었다. 그 눈과도 같은 빛으로. 선연한 붉은 빛으로.
"······ 제가 아는 모습."
초상화 속의 프레이야.
체구도 몸도 다르지만 얼굴만은 프레이야를 고스란히 닮은 괴이한 모습으로 잠시 웃어보인 칼리안이 다시 변했다.
긴 머리카락의 색이 또 바뀌어간다.
서서히 색이 사라져가다 푸름을 띠는 은빛으로 변해갔다.
란델과 플란츠도 본 적 있던 또 다른 모습이었으나 훨씬 더 어린, 지금의 칼리안보다도 더 어린 시절의 아이가 연보랏빛 눈을 빛내며 두 형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것도. 제가 아는 모습."
어린 날 언젠가의 베른이 되어 입을 연 칼리안이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외모는, 직접 보고 겪기 쉬우니까. 떠올리는 것에 어려움이 없으니까 바뀝니다. 그런데 속은 아니라서. 떠올릴 수가 없어서. 안 바뀝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저 역시 그게 안 됩니다. 이번에 발칸과 싸움을 했을 때에도 결국은 겉보기로만 그럴싸한 가짜 근육이었으니까요. 히나 말대로 속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또 어떤 것을 보여줄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칼리안을 잠시 지켜보던 란델이 낮은 숨을 내쉬었다. 칼리안을 바라보던 플란츠가 두 눈을 힘주어 감았다 떴다.
툭, 툭.
칼리안의 왼팔에 걸려있던 팔찌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이를 곳 없이 바닥을 구르다 눕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란델도 플란츠도 그 모습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칼리안의 체형으로, 베른의 얼굴을 한 이의 한쪽 소매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습을 봤다. 그 속에 들어야 할 팔이 사라진 것을 지켜봤다.
"저는······ 겪었으니까. 이 정도는 됩니다, 저는."
제 팔이 사라진 모습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자신의 오른팔을 플란츠에게 내밀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눈치챈 플란츠가 조용히 손을 뻗어 팔찌를 풀었다.
달칵.
사라졌던 것이 다시 소매 속에 생겨난다.
그 모습에 안도하는 연두색 눈을 보며 작게 웃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하얀 수리가 죽은 것을 라시드는 모릅니다. 제가 이것을 또 쓰리라는 것을, 심지어 이런 식으로 쓸 생각을 하리라는 것을, 라시드는 모릅니다. 똑똑해서."
하얀 수리로 변장을 하겠다는 뜻이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 계획을 이야기 한 칼리안이 장난스런 웃음을 지었다.
"라시드 브리센 빨리 없애고 텐실에 가서. 란델 형님 심장 풀어드릴게요."
사라진 것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렸던 이가, 그것조차 이용해보겠다며 그리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