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장. 다른 끝(4)
어떻게 된 일인지는 이미 안다.
하얀 수리에게 변장용 마법 용품을 주었던 일도 있었고, 그 물건 덕분에 눈앞에서 칼리안을 놓친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 텐실의 왕세자 역시 같은 것에 의존해 연명하는 가짜가 아니던가.
"네. 이렇게 다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칼리안 왕자님."
그러니 왕궁에서 칼리안의 배웅을 받고 돌아오게 된 저택의 집사가 칼리안의 방문을 알려 준 것도, 곧장 응접실을 찾았을 때 정말로 칼리안을 마주친 것도,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남작이 분명 나와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겠다 하였고 나 역시 그리하겠노라 하였었는데. 몰랐다 하니 조금 서운합니다."
이런 말이나 건네면서 웃고 있는 칼리안이든.
잠시나마 한 길을 걷겠노라 했던 칼리안이든.
둘 중 하나는 가짜라는 뜻일 테니.
"이런. 제가 오해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왕자님께 빈 말을 드린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뵙게 되어 놀랐을 뿐입니다."
"놀라다니. 카이리시스가 이렇게나 비좁은데 남작과 내가 어디에서 마주친들 놀랄 것이 있겠습니까."
"······ 네. 맞는 말씀입니다."
앞에 선 이가 가짜든,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눴던 이가 가짜든. 사실 크게 상관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둘 모두 칼리안으로 앞에 섰으니 둘 모두 칼리안으로 대해주면 될 일이다.
"다만 제가, 왕자님과 제 아버지와의 대화를 방해한 것이 아닌지 걱정됩니다."
문제는.
마법 물품으로 칼리안 행세를 한 이가 누구였는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진짜 칼리안이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이 맞는지. 거기에 더불어, 이곳의 칼리안은 그레이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이러한 의문들을 당장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아닙니다. 이야기는 모두 마쳤습니다."
여러 의구심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라시드를 보며,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방금 전 왕궁 안에서 만난 '칼리안'과 완벽하리만치 똑같은 모습으로.
"보다시피 다시 돌아가려던 길이니 괘념치 말아요."
"네, 왕자님."
"시간이 넉넉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낮에 있던 일 때문에 내가 조금 바빠서."
"이렇게 시간이 늦었는데 무슨 일로 또 바쁘십니까."
그 말에 칼리안의 입술이 잠시 다물어졌다 벌어졌다.
속삭이는 것보다는 큰, 하지만 그레이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을 미성이 라시드의 귓가에 와 닿았다.
"틈이 벌어진 울타리······ 때문에. 속을 좀 끓이고 있어서."
조금 전 만난 또 다른 칼리안이 했던 말과는 다소 달랐다.
'울타리를 고쳐두느라 신경을 썼더니 속이 좀 답답한데.'
분명 플란츠의 속내를 뒤집어 둔 것 정도는 이미 다 해결했다는 듯 굴지 않았던가.
"아무튼. 다시 만나자 한 말은 다음에 지키겠습니다, 남작."
곧 칼리안이 자신의 손을 펼쳐 라시드에게 내밀었다.
겉보기로는 그저 평범한 악수였으나 라시드에게는 아니었다. 멀쩡해보이던 손등이었으나 그 안쪽 손바닥에 길게 벌어진 상처 자국이 보인 탓이다.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고 이미 조금씩 아물기 시작한 상태. 축복의 힘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오늘 낮 즈음에 다쳤을 상처. 그런 것이 보였다.
그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마친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그 사이 손을 다치셨습니까."
"아······ 이거."
붕대는 푼지 오래다. 왕궁 밖을 나서는 왕자가 양 손에 붕대를 감아들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어보인 칼리안이 대답했다.
"형제들이란 이런 저런 일들로 서로 부딪혀가며 크게 마련 아닙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라는 말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만 내어 둔 칼리안이, 더는 대화를 이어갈 의사가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용한 걸음으로 라시드의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특별할 것 없는 과일 향이 아주 잠시 주변을 맴돌다 사라져간다. 여유 가득한 칼리안의 그림자도.
* * *
모든 것이 다 같다.
누군가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꼼꼼하게 기억해 낼 수만 있다면, 혹은 상상할 수만 있다면, 생긴 겉모습이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어려운 것은 외모가 아니라 그 밖의 것이다.
말투, 버릇, 성격, 얼굴 표정, 손버릇. 그 하나하나를 완전히 똑같이 따라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얀 수리 역시 그 외팔이 검사의 말투와 성격을 익히느라 꽤 오랫동안 수고하지 않았던가.
지그프리드의 영지에 있을 하얀 수리를 생각하다 지워낸 라시드가 다시 본래의 고민으로 돌아왔다. 그 칼리안의 모든 면을 똑같이 따라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지를 떠올려봤다.
칼리안의 시종, 기사, 정혼자, 스승.
그리고, 칼리안의 형제.
란델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제 겉에 누군가의 모습을 두를 만한 위인이 못 된다. 다른 넷은 굳이 칼리안의 모습을 취하고 라시드 자신을, 혹은 그레이를 찾아 올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한 명.
왕세자, 플란츠.
하지만.
'제대로 찾아 온 것이 아니라 했나.'
'네, 남작님. 방문자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는데, 후작님의 침실에서 갑작스레 칼리안 왕자님께서 나오시더니 응접실로 가셨습니다. 마치······.'
'좀도둑처럼 창문을 타고.'
'아······ 네. 그렇지 않고서는, 본관 안에 하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왕자님을 본 이가 아무도 없을 수는 없습니다.'
'몰래 숨어들고 굳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인가.'
'칼리안 왕자님께서 이곳에 억류되어 있던 일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요. 후작님의 목숨을 언제든지 취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것을 후작님 뿐 아니라 이 저택의 모두에게 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 일단 알겠다.'
후작저에 온 것이 칼리안 본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나. 그렇다면 왕궁에서 자신을 찾아왔던 이가 가짜라는 뜻이 된다.
아니.
앨런 마나실을 잊고 있었다.
이런 일을 도와 줄 만큼 앨런 마나실과 친분이 있다면, 굳이 칼리안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후작의 침실에 방문할 수 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이곳에 왔던 이가 가짜다.
그리고 칼리안의 행세를 할 만한 이는 플란츠가 유력하다.
'틈이 벌어진 울타리······ 때문에. 속을 좀 끓이고 있어서.'
칼리안의 손에 나 있던 상처를 떠올렸다.
직접 보지 않았어도 뻔하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잊고 칼을 빼든 것 아니겠나. 그 일로 기어코 제 동생 손에 갈라진 자국을 만들어 둔 놈이 바로 플란츠다. 그런 놈이 반나절도 되지 않아 다시 '브리센'에 왔다.
혹은. 제 속을 그렇게 뒤집어 둔 라시드를 찾아왔다. 멀쩡한 얼굴로 대화를 나눴다. 저를 살려놓고 브리센을 같이 잡자며 손을 내밀었다.
"······ 글쎄."
그럴 수 있는 놈인가.
있다 한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무엇을 바라서.
"어쩐 일로 응접실에 들렀느냐. 서로 눈에 거슬리지 않으며 지내기로 한 줄 알았는데."
응접실 입구에 선 채 잠시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껏 라시드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 그레이 브리센이었다.
금세 풀지 못할 의문을 잠시 접어 둔 라시드가 그레이를 쳐다봤다. 가늘지도 낮지도 않은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그레이를 향했다.
"오면 안 될 곳에 와서 마주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봤다고. 칼리안 왕자님을 만난 것을 비밀에 부치고 싶었는데 하필 나에게 들켜 심기가 틀어졌다고. 그냥 솔직히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후작. 이해합니다."
라시드가 방금 전 왕궁에서 누굴 마주하고 왔을지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할 그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뚜벅 뚜벅.
천천히 걸어와서는 방금 전까지 칼리안이 앉아있었을 소파에 앉은 라시드가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칼리안이 남겨 둔, 찻잔 속에 반쯤 남은 홍차에서 옅은 향이 난다. 그 향을 맡고 있으려니 조금 전 스쳐 지나간 칼리안의 향이 다시 맴도는 느낌이다.
라임, 오렌지, 혹은 시트러스.
꽃의 향은 조금도 섞이지 않은 향기. 짙지도 않아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거나 실외에 있었다면 느껴지지도 않았을 그런 향기.
'동생 그늘이 더. 살만하던데.'
확실히 그렇기는 했겠군.
꽃 향기를 있는대로 흘려대던 플란츠의 말을 떠올린 뒤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감상을 삼킨 라시드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푹신한 쿠션이 뒷머리를 받치고 높은 천장의 정교한 장식과 아름다운 빛을 비산시키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라시드는 그런 것들에 편안함을 느끼지도, 감탄하지도 않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드르륵.
라시드의 귀에 의자를 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곁에 누가 있는지도 잊은 듯한 모습으로 소파에 기댄 아들의 꼴을 더 참을 수 없게 된 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였다.
눈도 뜨지 않은 라시드가 냉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또 도망치십니까?"
"······ 말에 위아래가 없는 것은 언제 고칠 생각이냐."
"누가 들으면, 말씀하신 분께서는 위아래 참 잘 아는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라시드 브리센."
"그나저나. 후작의 얼굴에 봄이 들었습니다."
이런 말로 그레이의 입을 다물린 라시드가 고개를 들어 그레이를 쳐다봤다. 잔뜩 찌푸린 눈으로 제 아들을 쳐다보는 녹빛 눈을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무 그렇게 활짝 갠 얼굴을 하진 마십시오. 후작이 나를 쳐내면 돕겠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그런 말씀이라도 하고 가신 줄로 착각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긴 침묵이 돌았다.
칼리안이 온 이유를 이미 눈치챘다. 그 말에 긍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아무것도 소용 없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그레이가 밀었던 의자를 다시 끌어당겼다.
"······ 브리센의 후계는 너에게 주마."
그 목소리 한 번 비장하기도 하다.
라시드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렇게 기를 쓰고 드디어 얻어낸 후작위에서 곧 내려오게 될까봐 걱정이 되십니까? 설마 내가 지그프리드에서 거둬간 그 아이에게 후계 자리를 잃을까봐 겁이라도 먹을 것이라 여기십니까?"
"라시드."
"빼앗길까 걱정 말고 누리십시오. 후작이 앉은 그 곳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으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대체 왜 이러느냐?"
"재밌어서 그럽니다."
"무엇을 말이냐."
"하늘이 무너지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흥미로울 것 같아서."
"그것이 무슨 소리냐."
라시드는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칼리안이 남기고 간 찻잔을 집어들었다. 그것을 코 끝에 가져다 대고 다 식은 차의 남은 향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그 뒤에는 팔을 옆으로 뻗었다. 받쳐줄 것 없는 바닥을 향해 찻잔을 뒤집었다. 그 홍차가 마치 칼리안이 그레이에게 남겨놓고 간 말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 주르륵!
뒤집힌 잔에서 갈색의 찻물이 쏟아져 내린다.
"나는 분명 얘기를 했습니다. 당분간 후작의 목에는 손을 대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약속 어기는 것을 싫어하니 내 말을 잘 지키려 노력은 하겠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후작을 닮아 썩 똑똑하지는 못한 터라······ 후작이 칼을 꺼내든다면 내 약속도 곧 잊을지 모르겠습니다."
뚝, 뚝, 뚝.
남은 몇 방울의 홍차가 느릿하게 추락하는 모습을, 찌푸린 얼굴로 제 아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그레이를, 번갈아가며 한 번씩 바라본 라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똑하게 처신하십시오. 후작."
이렇게 말한 라시드가 빈 찻잔을 그레이의 앞에 내려놓곤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쏟아진 홍차의 향이 그레이의 발끝을 적셔간다.
마른 피같은 찻물이 그레이의 발끝을 물들인다.
* * *
체르밀 궁의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이 어깨를 굳혔다.
언제든지 검을 뽑아들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손을 푸는 것을 본 '칼리안'이 눈꼬리를 찌푸렸다.
곧 나지막한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내 아우님께서 이 곳을 이미 지나가셨나."
칼리안이 돌아올 때까지 가능한 많은 놈들의 눈에 띄고자 이곳 저곳을 걸어다녔다. 궁에서 나가던 귀족들과 말을 나누고 수많은 시종들의 인사도 받았다. 그러다 이제 충분하겠거니 싶어 체르밀 궁으로 온 참이었다.
더 웃다가는 얼굴에 경련이 일 것 같아 그냥 때려치고 오는 길이라 해야 맞겠지만. 아무튼.
"칼리안 왕자님께서는 조금 전에 이미 안으로 드셨습니다."
"하······."
경계심 가득한 기사들의 말을 들은 '칼리안'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당장 욕조에 파묻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치는 하루를 보냈는데 내 집 앞을 지키던 놈들이 나를 막고 서니 짜증이 날 수밖에.
"······ 누구십니까."
조금 전 칼리안을 들여보낸 뒤 칼리안이 다시 나오지도 않았는데 똑같은 칼리안이 다시 들어가려 하고 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함을 안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겠거니와 이미 들어간 것이 가짜인지 지금 앞에 선 것이 가짜인지 가늠하지 못할 테니까.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쉰 '칼리안'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암기를 꺼내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을 만큼 천천히 소매를 걷어 손목을 밖으로 뺐다. 그 뒤에는 가느다란 손목에 채워져있던 얇은 팔찌를 풀었다.
- 찰칵.
자신들의 눈 앞에서 검은 머리가 서서히 탈색되어 가고, 붉은 눈이 정 반대의 색으로 바뀌고, 손가락 한 마디가 안 될 만큼이나마 키가 좀 자라고, 큼지막하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해가는 것을 보던 기사들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곧바로 목을 죄여오는 타이부터 헐겁게 한 칼리안, 아니. 플란츠가 셔츠 윗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정말로 몸에 딱 맞춘 것처럼 꽉 끼게 되어버린 검은 재킷을 벗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재킷부터 벗어 둘 것을 그랬다는 작은 후회를 하면서.
그렇게 일단 숨부터 돌린 플란츠가 기사들에게 무언가를 내보였다.
플란츠의 팔에 대충 얹어진, 누가 보아도 칼리안의 것이 분명할 검은 재킷과 그 손에 들린 팔찌를 확인한 기사들이 아연한 얼굴을 했다.
"부군단장님, 아니. 저하. 그것을 왜 저하께서 가지고 계십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어쩌다 보니."
"아니 그럼 말씀을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단검이라도 꺼내시는 줄 알고 공격할 뻔했잖습니까. 하마터면 광장에 설 뻔했습니다, 저하."
"말만 해선 안 믿을 것 아닌가."
"······ 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제 들어가도 되나."
"아, 넵.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그런데 지나가라 말하던 기사의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기사 한 명이 조심스레 플란츠의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자못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하.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뭔데."
플란츠의 허락에도 한참동안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사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저하께서 저를 어떻게 부르시는지. 그것만 말씀해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 나 맞다고."
치미는 짜증을 가라앉힌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긴장하면 하품하는 갈색 머리. 휘파람 잘 부는 갈색머리."
"아,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남모를 하품을 삼켰던 갈색 머리 기사가 그제야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이제 진짜 지나가도 된다는 듯 깊숙이 허리를 숙여보인 뒤 옆으로 비켜섰다.
- 저벅.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은 플란츠가 잠깐 발을 멈췄다. 그리고 뒤로 돌아 두 명의 기사를 한 번씩 쳐다봤다.
"너."
"네, 저하."
"내일 쉬고. 너."
"넵, 저하."
"내일 나한테 와."
그러더니 이렇게, 끝내 의심을 건넨 놈을 쉬게 하고 잘 믿어준 놈에게는 찾아오라 말했다.
"방패랑 검 들고."
"넵, 부군단장님."
플란츠를 잘 믿어 준 대가로 반나절은 달리게 될 기사가 대답을 했다. 어차피 플란츠도 같이 뛸 것을 아는 터라 불만을 내기가 어려웠다. 플란츠가 가고 나면 괜히 혼자 나서서 휴가를 얻게 된 놈에게 한 마디 쯤은 하겠지만, 잘못은 잘못이니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플란츠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체르밀 궁을 향해 발을 옮겼다.
쉬고 싶다. 오늘은 진짜 피곤하다. 당장 들어가 물 속에 몸을 좀 담그고 나와서 고양이들 품에 안고 늘어져 있어야지. 꼭 그렇게 해야지.
- 저벅, 저벅.
그런 생각이 가득 들어섰으나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무표정을 한 플란츠의 걸음이 계속 이어졌다. 회랑을 지나 호숫가를 돌아 체르밀 궁으로. 주변을 오가는 시종들의 인사를 또 받으며 2층으로, 3층으로, 그리고 비로소. 4층으로.
"저하!"
플란츠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은 것인지, 계단으로 황급히 걸어오던 레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을 낼 일도 아니었고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기력도 다 사라진 플란츠가 적당히 고개만 끄덕이고 제 방 앞으로 걸어갔다.
"저하."
"쉴 거야."
"저하, 그것이 아니라······."
"일단. 내일."
나 일단 들어갈 거라고. 목욕 준비는 알아서 해 뒀을 테니 나도 알아서 혼자 씻고 알아서 쉬다 알아서 잘 거라고. 그러니 할 말은 내일 하라고.
이런 긴 말을 기적적으로 줄인 네 글자를 내뱉은 플란츠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발 안으로 들어선 뒤 레릭을 밖에 둔 채 문을 닫았다.
- 달칵.
불이 켜져 있었다.
바닐라와 오렌지가 들어간 듯한 차 향이 확 퍼진다.
다시 찌푸려진 눈꼬리를 한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제 방에 멋대로 들어와 앉아있던 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너."
분명 칼리안일 것이다.
플란츠의 손에 들린 것과 비슷한 것을 입은 채 플란츠의 베이지 색 소파에 앉아 반갑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뻔하다. 안네를 무릎 위에 올린 채로, 곁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루시의 등에 손을 올려 둔 채로. 제 방이라도 된다는 양 그렇게 느긋하게 앉아있는 칼리안이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열었던 플란츠의 입이 다물렸다.
"늦었구나."
아무 표정 없이 찻잔을 내려놓는, 방금 들어온 방 주인에게는 시선조차 두지 않는, 고불고불한 금발과 짙푸른 눈의 또 다른 형제 한 명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까닭에.
문을 닫을 때 레릭이 왜 그렇게 다급한 얼굴이었는지, 레릭이 왜 체르밀 궁 입구로 마중을 오지 못했는지, 이런 변수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플란츠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발을 옮겼다. 그리고 맞은 편 소파에서 태평하게 누워 잠에 든 두 고양이를 일별한 뒤 란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예의없는 행동이냐고.
그렇게 말하려 했다.
너무 피곤하고 지친 까닭에 오늘은 형님과 대화할 정신이 없다 하려 했다. 아니라면 그냥 이대로 발을 돌려 다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차라리 빌헬름 관에서 밤을 새는 것이 낫다 여겼으니까.
- 달칵!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 형님 오셨네요."
4층 방의 문이 제멋대로 또 열린 까닭에.
"혹시 형님, 란델 형님과 벌써 싸우셨습니까."
당장 깨질 듯한 침묵을 가르고 들어온 놈이, 혼자 밝은 그 놈의 목소리가, 4층의 침묵을 멀리멀리 흘려버린 까닭에.
"편 들어드릴까요?"
새하얀 자수가 가득한 화려한 검은 재킷을 걸치고 이렇게 물어오는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이 방에 5층 거주인을 불러들였을 것 뻔한 원수같은 동생 놈을 바라보다가.
생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