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16화 (417/527)

제74장. 다른 끝(3)

반짝거리는 녹빛 눈이 붉은 눈을 한껏 올려다봤다.

녹빛 눈이 곧 옆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또 다른 붉은 눈을 다시 올려다봤다.

"우와······."

왕궁은 정말 신기한 곳이다.

처음으로 오게 되었던 왕궁은 조금 무섭고 조금 심심했는데 다시 오게 된 왕궁은 그렇지 않았다. 플란츠가 얘기했던 것처럼 고양이 두 마리가 마음껏 돌아다니고 오리가 헤엄치고 말들도 정말 많았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소는 없고 소고기만 있었지만.

그래도 리리에는 실망하지 않았다. 넓은 정원, 이곳 저곳에 예쁜 분수가 있고 작은 개울이 흐르고 언덕도 있고 꽃도 많았을 뿐 아니라 풀잎 배를 띄울 커다란 호수도 있었지 않나.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다 구경해볼 수 없을 만큼 신기한 것이 많았으니까.

거기에 더해 또 하나.

"진짜 똑같아요! 신기해요!"

똑같이 붉은 눈, 똑같이 까만 머리.

똑같은 칼리안 왕자님이 둘이나 있다니!

"누가 진짜인지 알아보겠어, 리리에?"

"지금 말씀하신 칼리안 왕자님이 진짜 칼리안 왕자님이에요!"

시오나의 방울소리같은 얼굴로 대답한 리리에가 눈밭을 잔뜩 뒹군 새끼여우처럼 웃었다.

"아, 그렇겠구나. 괜한 것을 물었네."

멋쩍은 웃음을 보인 칼리안이 곁을 봤다.

거울을 보는 듯 똑같은 얼굴을 한 또 다른 '칼리안'이 눈꼬리를 찌푸렸다. 그 입에서 무어라 말이 나오기 전에 칼리안이 먼저 말했다.

"그 고운 얼굴로 그렇게 인상쓰시면 안 됩니다."

"······ 너."

"그 고운 입으로 멍멍거린다는 험한 말 쓰셔도 안 됩니다."

내 아우님께서 얼굴이고 입이고 그렇게 참 곱디 고우셔서 좀만 수틀리면 미간도 찌푸리고 세상 모든 것들을 네 자식 삼은 양 이 새끼 저 새끼 해가며 정말 듣기 좋은 예쁜 말씀만 골라 뱉으셨느냐고.

"하······."

하고픈 말이 많지만 리리에 덕에 거름없이 건네지도 못하게 된 '칼리안'이, 그나저나 아무리 잠시 뿐이라지만 세상에 이렇게 예쁜 사람이 둘이나 있어도 정말 괜찮을까 하는 걱정을 꺼내놓고 있는 거짓말 못하는 동생 놈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라시드고 그레이고 뭐고.

저 놈은 이 상황이 그냥 재밌기만 한가보다.

그래. 의견을 낸 내가 잘못했지.

"그래서, 어느 분이 어디로 가실 겁니까."

고개를 치켜들기 어려워 보이는 리리에를 훌쩍 들어올려 안아올린 드미레아가 이렇게 물었다.

"브리센 후작저로."

"라시드 브리센 쪽에."

두 칼리안이 함께 대답했다.

둘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드미레아가 마지막 점검을 마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입을 가리켜보이며 둘 중 한 명의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겉모습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칼리안 왕자님의 행동이나 걸음걸이며 말투는 이미 잘 아실 테고요. 잘 웃어주기만 하시면 들킬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괜찮아, 드미레아. 형님 의외로 잘 웃으셔."

"그렇습니까."

"응. 헤르츠 경이 그러던데. 하루에 적어도 세 번씩은 활짝 웃어주신다고."

플란츠가 왜 웃는지 알 길도 없고 큰 궁금증도 없는 드미레아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리리에는 플란츠가 그렇게 웃는 모습을 하루빨리 보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리안느도 없고······ 오늘은 돌아갈거야?"

"네. 다녀오신 뒤 카스트린 경과 만나시는 것을 구경하고는 싶습니다만. 저택에 아버지도 안 계시고 어머니와 베른 경만 있으니 돌아가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래. 어차피 오늘은 대련보다는 다른 얘기를 더 많이 할 것 같으니까. 카스트린 경과 다시 제대로 붙게 될 기회가 있으면, 그때 부를게."

"알겠습니다."

곧 칼리안이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 뒤 드미레아의 품에 안긴 리리에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자고 가는 건 다음에 해야 되겠네, 리리에."

"네. 그렇게 할게요."

"다음에 오면 더 잘 놀아줄게. 얘기도 더 많이 하자."

"네, 왕자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리리에가 방긋 웃었다.

어린 아이의 웃음이란 그저 사랑스럽기만 할 따름이라, 저도 모르게 손을 올린 칼리안이 리리에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칼리안을 겁내지 않는다 알려주려 맛 좋은 쿠키까지 전해주었던 리리에가 아니던가. 그런 리리에를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될 테고 조금 더 자라고 나면 브리센의 검술도 가르쳐야 할 텐데 언제까지고 계속 어색하게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아······."

그 대화를 듣던 또 다른 칼리안이 작은 소리를 냈다.

자신이 세뉴 관에 찾아가 칼리안의 계획을 막은 것이, 칼리안의 두 손바닥에 긴 자상을 남긴 것 뿐 아니라 리리에가 왕궁에서 자고 가기로 했던 일을 취소시키는 결과도 낳게 되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된 까닭이다.

"리리에."

낮지 않은 어색한 목소리로 리리에를 부른 '칼리안'이 곁에 벗어 둔 붉은 망토에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망토 위에 잘 올려두었던 것을 집어들어 리리에의 손에 쥐여주었다.

반짝거리는 검은색 보석이 박힌 브로치. 칼리안이 제 붉은 망토를 플란츠에게 둘러 줄 때 같이 준 것이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그 브로치가 무엇인지, 어떤 보석인지 잘 알지 못할 리리에가 '칼리안'을 향해 물었다.

"이게 뭐예요, 저하?"

"선물. 내가 실망시켜서."

"네가 여기에 더 있지 못해서 실망했을까봐 사과하는 뜻으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말씀이야."

형님 너 또 선물 돌려막기 하시냐고.

어린 애한테 시커먼 다이아몬드 브로치 주신거냐고. 아니 지금 저게 열 살도 안 된 애한테 어울릴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냐고. 애들한테는 차라리 어디서 바람개비나 하나 만들어 건네주는 게 더 나은 걸 모르시냐고. 바람개비가 뭔지는 알까 싶지만 아무튼 형님 너 선물도 진짜 딱 너다운 것을 하고 있다고.

이런 타박을 좀 할까 하다가, 저 어여쁜 얼굴에 대고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한 칼리안이 짧은 말만 풀어 설명을 해줬다. 그리고 리리에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으며 말을 더했다.

"그건 블랙 다이아몬드라는 보석이야. 사실 대부분은 흠이 많아서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해. 그래도, 리리에. 검은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이것처럼 예쁜 것들이 있어. 투명하고 반짝거리는 흔한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더 찾기 어렵지만 그만큼 더 귀한 보석인 거야. 너처럼."

그 브리센 속에서 완두콩이나 리리에가 태어났듯이.

조금 더 자라고 나서야 칼리안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리리에가 예쁘게 웃었다. 그것이 값지고 귀하다 해서가 아니라 플란츠에게 선물을 받은 것에 신이 나서. 그리고, 자신에게 닿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한없이 듣기 좋아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다 꿈이라 생각하라던 그 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여전히 다정해서.

'너 지금 네 것이랑 바꾼 커프스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흔하다고 나한테 면박주는 거냐' 하는 듯한 또 다른 칼리안의 눈길을 무시한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러니까 잘 간직해."

"네, 왕자님. 고맙습니다. 저하, 고맙습니다. 오늘 재밌었어요. 실망 안 했어요."

다른 어떤 것에도 절대로 물들지 않을 단단한 보석을 받은 리리에가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그럼."

"먼저 가 볼게."

곧 두 명의 칼리안이 각자의 길을 나섰다. 한 명은 그레이 브리센의 후작저를 향해 곧바로 출발할 테고, 또 한 명은 잠시 기다린 뒤 라시드 브리센을 찾아가게 될 터였다.

그렇게 둘이 떠난 뒤.

드미레아가 리리에를 안은 그대로 루비아 관을 나섰다.

"춥지는 않아?"

마차가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드미레아가 이렇게 물었다. 춥다기보다는 조금 졸린 얼굴이 된 리리에가, 브로치를 들지 않은 손으로 눈을 살짝 비비며 대답했다.

"응. 하나도 안 추워."

자박자박.

드미레아의 발소리가 이어졌다.

"저하께는 여쭤봤어? 기사가 좋을지, 마법사가 좋을지."

"응. 여쭤봤어."

"뭐라고 하셨어?"

달빛을 가득 안고 반짝이는 검은 브로치. 그 안에 담긴 달을 들여다보며 달빛처럼 환히 웃은 리리에가 말했다.

"좋은 어른이 되라고 하셨어."

검이 좋겠느냐 마법이 좋겠느냐 하니 엉뚱한 대답을 했단다.

칼리안의 말대로다. 플란츠는 리리에의 고민을 푸는 데에 있어서는 별 도움이 안 될 대답을 했다.

피식 웃은 드미레아가 자신의 어깨에 턱을 괸 리리에를 바라봤다. 얼굴 대신 보이는 짙은 녹빛의 머리에 예쁘게 묶인 노란 리본이 보였다.

"머리 다시 묶었네."

루시와 안네와 코코를 데리고 노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직접 묶어주었었는데 이제와 보니 리본의 모양이 달라져 있다. 서툰 솜씨 덕에 몇 번을 묶어도 세로로 틀어지고 한쪽 꼬리가 더 길게 만들어져서 결국은 적당히 묶어두고 만 리본이었는데 그것이 어느새 보기 좋게 묶여 있는 것이다.

"응."

고개를 끄덕인 리리에가 웃음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저하께서 묶어주셨어."

"저하께서? 리본을?"

"응. 루시랑 안네랑 코코 리본 많이 묶어보셨댔어."

드미레아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플란츠가 묶어주었다는 리본을 만져보던 리리에가 물었다.

"드미레아. 저하는 좋은 어른이야?"

"아니야."

"좋은 어른이 아니야?"

"좋은 어른이 될 사람이야."

"그럼 칼리안 왕자님은?"

"칼리안 왕자님은······ 좋은 어른이 된 사람이야."

자갈길을 걸어가는 한 명의 발 소리가 길게 내려앉았다.

두 명의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았다.

"어려워, 드미레아."

"더 자라면 알게 될 거야."

"드미레아만큼?"

"얼만큼이든."

오래도록.

* * *

언제 그렇게 거부감을 보였냐는 듯.

보기 좋은 미소를 가득 띄운 붉은 눈이 맑게 빛났다.

"울타리를 고쳐두느라 신경을 썼더니 속이 좀 답답한데. 잠시 걷겠습니까. 내가 정문까지 남작을 배웅해줄 겸."

"네, 왕자님. 영광입니다."

안 그래도 분수대의 물 소리를 오래도록 귀에 담은 터였다. 때문에 라시드는 거절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 쪽으로 다가왔다.

검은 장막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

그 사이로 두 사람의 발소리가 가만히 이어졌다.

"울타리를 벌써 고치셨습니까."

"남작이 그리 열심히 알려주었는데 시간을 허비해서야. 온전히 안온해졌다는 장담을 함부로 하지는 못하겠으나 잠시 숨을 돌릴 만큼은 고쳐 둔 듯합니다."

"반가운 말씀입니다."

"그리 여깁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더는 뱀이 들지 않도록 해두셨다 하니 다행하고 반가운 일입니다."

칼리안이 소리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다행하고 반가운 일이라 이야기하는데······ 벌써 고쳤느냐는 그 말이 내 귀에는 왜 아쉽다는 소리로 들릴까."

"말을 건네드리는 입은 저의 것이고 말을 건네받는 귀는 왕자님의 것이니, 제 말이 뜻하신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단지 그 뿐입니까."

"단지 그 뿐입니다."

네가 내 말을 꼬아듣고 있으니 그런 식으로 들리는 것이라 하는데, 어쩌겠나. 모름지기 사람이란 제가 보고싶은 것만 골라 보려 하고 듣고싶은 것만 골라 들으려 하게 마련이니. 때문에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란델 형님과는 즐거운 대화 나눴습니까."

"대화는 잘 했습니다. 다만 즐거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남작이 모르는 것도 있었습니까."

"아무리 저라 한들 모르는 것이 없겠습니까."

이렇게 답한 라시드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 왕자님의 본심을 제가 여전히 모두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본심이라."

길을 지나던 기사 네 명이 칼리안을 향해 예를 올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지나친 칼리안이, 살짝 다물었던 입을 다시 열어 말을 이었다.

"나는 내 본심을 전부 꺼내 둔 것으로 알았는데."

이 말을 들은 라시드가 주머니 속에서 에메랄드 브로치를 꺼내들었다. 세뉴 관 앞에서 마주했던 칼리안이 있는대로 부서뜨려 건네주었던 것이었다.

"이 브로치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라시드의 말을 정정했다.

"그 에메랄드. 라고 해야 맞겠습니다."

"그리 구분해야 한다면 조각조각 부서진 에메랄드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왕자님."

"머지않은 미래의 브리센처럼."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라시드를 직시하는 이의 붉은 입술이 미려하게 움직였다.

"······ 이라고 덧붙인다면. 보다 정확할 듯 하고."

"그렇다는 것은,"

"나는."

자박.

칼리안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렇게 여기는데. 남작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 발소리보다 훨씬 작으나 그 이상 또렷할 수 없을만큼 곧은 목소리가 라시드를 향했다. 진실일지 아닐지 알 수 없을, 의외라는 얼굴을 한 라시드가 대답했다.

"제 질문 한 번에 이렇게 쉬이 속내를 보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침마다 전해지는 독차를 물리고자 그보다 더한 독을 스스로 집어삼킨 사람입니다. 억누르고 숨겨가며 곁의 눈치를 살피기보다 먼저 꺼내놓고 전시해두어야 나은 일도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어차피······ 내가 건넨 말이 거짓없는 속내가 맞을지 아닐지, 그것만은 남작이 원하는대로 받아들일 것 아닙니까. 말을 건네는 입은 나의 것이고 말을 건네받는 귀는 남작의 것이니."

라시드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추어 섰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자리한 왕궁의 정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서로 바라는 것이 다른 끝이라 하더라도. 머지않은 그 날까지는 남작과 내 걸음이 잠시 겹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남작."

"그렇다면, 플란츠 왕세자 저하는."

대답 대신 이렇게 입을 뗀 라시드가 고개를 돌렸다.

"이 물건이 어울릴 사람일지, 어울리지 않을 사람일지. 왕자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를 더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칼리안이 있는대로 부숴놓겠다 했던 그 브리센에 플란츠가 속할지, 속하지 않을지. 그것을 물었다.

"말 했는데."

칼리안이 라시드를 마주봤다.

자신을 향한 녹빛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을 전했다.

"내 약점이 무엇인지."

"······ 네.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면 답이 될 겁니다. 남작에게도."

"그렇다면 확실히, 왕자님과 제가 서로 바라는 것은 비슷하나 그 끝은 분명 다르겠습니다."

"남작이 바라는 그 끝에 두 형님은 있되 나는 함께 있지 않을 테니, 서로가 바라는 끝이 비슷하되 다를 수밖에."

"이런······ 그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어찌 모를까. 란델 형님께는 탑을, 내 형님께는 나락을, 나에게는 악몽을 주려 하는데."

라시드가 기꺼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플란츠 세자 저하께서 그 날까지 남아 계셔야 한다는 것은 같으나 그 곁에 올려 둘 이는 서로 다르니. 왕자님과 제가 바라는 종막이 같을 수는 없겠습니다."

라시드가 잠시 몸을 돌렸다.

체르밀 궁의 앞에서 이곳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은 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톡톡톡.

손 끝으로 에메랄드 브로치를 두드린 라시드가 싱긋 웃었다.

"그래도 그리 나뉘기 전까지는 한 길이 되겠습니다, 왕자님. 제가 그리 생각하고 걸음을 옮겨도 괜찮겠습니까."

"잠시나마 이렇게 걸어주겠다 하니. 고민을 덜었습니다."

똑같이, 톡톡톡.

발 끝으로 바닥을 두드린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 * *

따뜻한 찻잔을 내려다 본 이의 붉은 눈이 찌푸려졌다.

"굳이 이렇게 티를 내려 들지 않아도 될 것을. 손님을 접대하는 모습 역시 브리센답구나."

제대로 먹고 마시고 쉬지도 못해 다소 파리해진 안색을 하고 있던 집 주인과, 그 집 주인에게 불려와 갑작스런 손님을 위해 차를 준비해와야 했던 집사가 꽤 비슷한 얼굴을 했다.

짜증을 삭이는 표정을 했다는 소리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두리를 은으로 장식한 하얀 찻잔에 시선을 고정시킨 칼리안이 고운 목소리를 냈다.

"커피 속에 들었던 독을 아직 잊지 못한 사람이니, 다시 내오거라."

곧 칼리안이 제 고운 등을 고급스런 가죽 의자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이미 한 번 보았으나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던 응접실을 느긋하게 쭉 둘러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차를 다시 내 오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 속에 독을 만들어 넣었다 여겨질 만큼 오래 걸리기야 하겠느냐."

"그것이 아니라······."

"네 아들은 아직 왕궁에 있다.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야기 마치고 갈 테니 채근하지 말거라."

침실로 찾아와 인사를 건네더니, 숨길 것도 없다는 듯 걸어나와 응접실로 향한 칼리안이었다. 막아 설 새도 없이 멋대로 응접실에 들어서 자리를 잡고 앉은 칼리안을 보며 그레이가 할 수 있던 일이 뭐가 있었겠나. 집사장을 다시 불러와 차를 내오게 시킬 수밖에.

그나마 내어 준 커피도 마다하고 굳이 다른 차를 가져와라 시키는 속내를 짐작하지 못한 그레이가 긴 침묵으로 대답같은 항의를 전했다.

- 달칵.

오래지않아 응접실에 다시 들어선 집사장이 색과 향이 짙지 않은 홍차를 내려놨다. 마찬가지로 은테를 두른 찻잔이다. 은 스푼까지 조심스레 내려놓은 집사장이 조용히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 달그락.

하얗고 고운 손을 움직여 필요치도 않은 스푼을 들어올린 칼리안이 홍차 속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다시 꺼낸 스푼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조금이라도 색이 변한 곳이 있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행여 독을 넣었다 하더라도 브리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은에 반응하지 않는 독만 써왔다는 것, 그런 독이 들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칼리안에게는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을 그레이 뿐 아니라 칼리안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신중히 살피는 것에 부아가 치민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 왕자님께 해를 가하면, 그것이 곧 누구의 이득이 되는지 압니다. 그 정도로 어리석지 않으니 그만 하십시오."

"의외로구나. 네가 그 정도의 생각을 할 줄이야."

다시 찌푸려지는 눈꼬리를 애써 제자리로 올려 둔 그레이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여전히 그런 모습에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는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하긴. 그랬으니 잠시 살려두었지."

칼리안이 찻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그러더니, 그렇게나 의심스런 눈초리로 찻잔을 살핀 것을 다 잊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홍차를 마시고 내려놓았다.

"왕자님."

"얘기하거라. 듣고 있으니."

"조금 전에 저에게 하셨던 말씀은 무엇입니까."

홍차의 향이 마음에 든다는 듯 여유롭게 웃던 칼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나 오래도록 고민할 시간을 주었는데. 답을 내기는 커녕 질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느냐."

이래서 브리센들이란.

들으라는 것인지 무시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을 혼잣말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그레이를 쳐다봤다.

"네 아들이 천지분간을 못하여 내 계획이 계속 어그러지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생각을 좀 하다 보니 깨달음이 오더구나."

그레이를 응시하던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모로 돌렸다. 그렇게 비딱한 얼굴로 눈을 내리뜨고는 홍차를 내려다보는 것인지 제 속내를 내려다보는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브리센을 없앨 때까지 이 자리를 맡아 줄 이가 둘일 필요는 없지 않나······ 하고."

"왕자님께서 저나 제 아들 중 누구 한 명에게 검을 겨누시는 순간, 남은 한 명이 왕자님의 뒤를 노릴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그래. 그랬지. 내가 브리센 남작을 없애면 네가 나를 그 범인으로 몰 테고, 내가 네 허리를 완전히 꺾어버리면 브리센 남작이 나를 범인으로 몰 테고. 그것이 무서워서 내가 이제까지 몸을 사렸지."

무엇을 숨기랴.

솔직한 심정을 건넨 칼리안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니 내 생각이 어찌나 짧았는지. 내가 이제야 반성을 하였다."

그레이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있겠느냐. 네가 칼을 들고 내가 도우면 될 것을."

"그 말씀은······."

"네가 세상에 내어 둔 자식이니 네가 거두거라."

"왕자님."

"부정이 차고 넘쳐 그리 하기 어렵다 하면, 네 아들을 찾아가마. 네 아들도 내 말을 거절한다면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때를 기다리며 몸을 사려야 되겠다만."

달칵.

향 좋은 차가 다시 한 번 칼리안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향을 삼킨 입에서 독이 흘러나왔다.

"······ 과연."

네 아들도 내 말을 거절할까.

이런 의미가 가득 든 고운 미소가 칼리안의 입에 올랐다.

한동안 그 입술을 바라보던 그레이가 눈을 들었다.

"질문같지도 않은 질문을 건네십니까."

칼리안의 붉은 눈을 마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내가. 그리했느냐."

칼리안의 붉은 눈을 피하지 않고 쳐다보던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아주 유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답이 필요한 것에나 질문이라 이름하는 법입니다, 왕자님. 그러니 괜한 걸음을 두 번이나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답을 할 필요가 없다.

다시 발을 옮겨 라시드를 찾아 갈 필요도 없다.

"그래. 두 번의 걸음을 할 필요가 없겠구나."

"그렇습니다."

새빨간 입술을 조금 더 끌어올린 칼리안이 꽃처럼 웃었다. 그 후 세 모금 째를 마신 차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내 형님을 마주친다면."

"괴한에게 습격당하셨던 칼리안 왕자님을 왕궁까지 호위해드린 이후로 계속 뵙지 못했으니, 무탈히 잘 지내시는지 안부라도 여쭤봐야 하겠습니다."

"그래. 듣기 좋은 말이로구나."

곧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응접실 문 앞까지 걸어간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멀찍이 서 있던 그레이를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건넸다.

"조만간, 다시 보자꾸나."

그런데 그 때.

- 달칵.

칼리안의 말에 대한 대답인 것처럼.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그레이를 향하고 있던 칼리안의 고개가 다시 앞을 향했다.

"······ 칼리안, 왕자님."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가 칼리안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습관처럼, 버릇처럼, 여전한 모습으로 예를 보였다.

인사를 마치고 들어올린 얼굴이 아주 조금 굳어 있었다.

처음 보는 그 표정이 퍽 마음에 든다는 듯.

"다시 보게 되는군요. 남작."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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