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15화 (416/527)

제74장. 다른 끝(2)

그레이 브리센 후작의 침실에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들기 조금 전.

기름지지 않은 소고기에 바질과 버섯으로 만든 페이스트를 바르고 그 위를 페이스트리 반죽으로 감싸 구워낸 음식이 앞에 놓였다. 그것을 잘라내니, 겹겹이 겉을 감싼 페이스트리 속에서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듯한 육즙이 흘러나왔다.

고기와 페이스트, 그리고 페이스트리까지 놓치지 않고 잘라 한 입에 넣은 칼리안이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향긋하고 담백한 맛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던 까닭이다.

"오랜만에 먹는 것 같은데. 맛있네."

잠시 후, 제 앞에 놓인 음식을 야무지게 다 먹은 칼리안이 생글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곁에 있던 시종 한 명이 새로 건네주는 깨끗한 접시에 토마토와 함께 구운 베이컨이 올려졌다.

짙은 빛의 와인으로 목을 축인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보며 대답했다.

"네. 맛이 아주 좋습니다."

"그렇게 좋아하실 것을, 그냥 나가겠다 하셨는지."

뒤이어 찾아드는 플란츠의 말에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늘 마음이 급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같이 브리센을 닫자 했더니 브리센을 없애겠다 대답한 동생 놈이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것을 플란츠가 붙들어 잡았다.

그리고 드미레아와 저녁 약속이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내가 방금 너한테 브리센을 '같이' 닫자 말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같이 닫자는 얘기가 너 혼자 다 때려부수면 내가 뒤에서 박수쳐주마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도 친절히 설명해줬다.

그 후 브리센을 어떻게 같이 닫을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루비아 관에 온 참이었다. 밥 못 먹고 왕궁 밖에 나가면 억울하다 했던 내 동생 밥이나 좀 먹여 내보내려고.

"약속을 또 잊으려 하셨던 겁니까."

"아니야, 드미레아. 얼른 갔다와서 먹으려고 했지. 설마 내가 내 정혼자님이랑 한 약속을 잊어버릴까."

"많이, 잊으셨습니다."

"아니야. 잊은 게 아니라 못 지킨 거지."

"다릅니까."

"달라. 많이 달라."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드미레아가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 달그락!

- 촤악!

그런데 그 때, 식사 자리에서는 도무지 듣기 어려운 큰 소리가 드미레아의 옆에서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팔을 뻗던 리리에의 풍성한 소매에 걸린 주스 잔이 넘어진 것이 보였다.

정확히는 테이블 위 허공에 컵이 멈춰 섰다 해야 할 일이다. 컵과 테이블 사이를 잔잔하게 메운 바람이 컵을 받쳐들고 있었으니까.

"아······."

놀란 얼굴의 리리에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잔 속의 음료가 쏟아지는 것은 막지 못했으나 깨지지 않도록 붙드는 것에는 성공한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리리에의 노란 원피스에 한가득 묻은 주스 자국을 얼른 지워냈다.

"괜찮아."

"······ 네, 저하."

그 뒤 리리에가 무슨 말을 꺼낼지를 눈치채고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주는 것은 플란츠의 몫이었고, 어려운 자리의 식사에 너무 긴장하지 않도록 도닥인 것은 드미레아였다.

플란츠를 보며 한 번, 드미레아를 보며 한 번, 그리고 칼리안을 보며 또 한 번. 리리에가 얼른 주변을 둘러보며 인사를 했다.

그렇게 작은 일을 치른 저녁식사가 마무리되었다. 깨끗하게 치워진 테이블 위에 무화과 잼을 얹은 요거트와 연한 홍차가 올려졌다.

디저트를 올린 시종들이 식당에서 나간 뒤, 리리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한참을 머뭇거리던 리리에가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한 모금을 마신 홍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루시를 보러 갈까 하는데. 리리에."

"저도,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끄덕.

허락의 표현에 얼른 일어난 리리에가 플란츠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예를 보인 뒤 플란츠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요거트 위의 무화과 잼을 이리저리 휘젓던 칼리안이 볼멘소리를 냈다.

"내가 많이 불편한가. 온갖 재주 부려가면서 주스잔도 잡아주고 옷도 닦아줬는데."

"제가 볼 때에는 왕자님께서 불편해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아······ 그런가. 그걸 느껴서 리리에가 자리를 피했나."

아무래도 꺼려지는 마음이 든다.

싫은 것이 아니라 묵직한 것이 심장을 누르는 기분이 된다. 처음 리리에를 봤을 때 떠올렸던 아이 생각이 드는 것은 칼리안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 아이가 지금은 죽지 않고 세크리티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무엇 때문에 어린 아이를 꺼려하는지 묻지 않은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리리에가 저하께 여쭐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 아마도 저나 왕자님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부끄러운 모양입니다."

"내가 불편한 게 아니라?"

"네. 왕자님을 불편하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요."

다행이라는 얼굴을 해 보인 칼리안이 물었다.

"형님께 고민 상담이라도 하려는 건가."

"비슷할지도요."

"별 도움 안 될 텐데."

"왕자님께서는 저하께 자주 얘기하시면서 도움이 안 된다 하십니까."

"아······ 상담이라기보단, 그건 그냥. 내가 뭔 소리를 하든 일단 조용히 잘 들어주시기는 하니까."

"그 역시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리리에에게는."

작게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차는 왜 안 드십니까."

"지금은 별로. 나중에 마실 거야."

조용히 찻잔을 내려 둔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칼리안의 손과 얼굴을 바라보다 물었다.

"한 대 맞고 오시더니. 또 싸움을 하신 겁니까."

"응? 나 안 맞았어, 드미레아."

"이번에는 맞아주는 대신 저하를 울려두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와······ 어떻게 알았어?"

"티나는데요."

"어디가?"

"어딜봐도요."

칼리안이 울었던 날, 한참이 지나 말짱해진 얼굴을 보고도 눈치를 채더니 이번에도 여지없이 눈치를 챈 모양이다. 어디 한 군데 달라진 것 없는 태평한 얼굴의 완두콩을 보고 운 것을 알다니.

"역시 내 정혼자님. 어디 하나 안 대단한 곳이 없네."

"세뉴 관에서 안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라시드 브리센이 왔었어."

"네. 그 말은 들었습니다."

"아직 얘기를 듣지는 못했는데. 라시드 브리센이 실리케와 일이 좀 있었나봐. 그래서 그 일을 두고 형님을 건드렸는데······ 그게 터져버려서."

"그래서 칼까지 꺼내드신 겁니까."

칼리안이 손에 감긴 붕대를 쳐다보며 웃었다.

"인내심 깎이면 앞 뒤 안 보는 게 누굴 꼭 닮아서. 막았지, 내가. 그러고 나서 형님이랑 얘기를 좀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드미레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하셨습니다."

"나 칭찬해주는 거야?"

"좋으십니까."

"좋지. 요즘 칭찬 들을 일이 없었거든."

"······ 대체 몇 살이셨기에 칭찬 한 마디에 그렇게 반색을 하십니까."

"스물 여섯."

생글거리며 돌아오는 말에 드미레아가 피식 웃었다.

"왕자님 덕분에 제 오라버니도 잘 살고 있고 저와 부모님도 숨을 돌렸습니다. 더 이상 브리센이 활개를 치지도, 사람이 아닌 듯한 일을 벌이지도 않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여행을 나서게 됐고 발칸은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고요. 마나실 후작 역시 어린 시절 뵈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리리에가 제 앞날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저하께서는 그 말을 들어주실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요."

그리고 이런 말을 건넸다.

"칼도 잘 쓰시고, 마법도 잘 쓰시고. 곁에 두고 보고 있을 때 흐뭇한 건 모르겠어도 언짢지는 않고. 말도 잘 하시고 성질도 잘 부리시고. 왕자님도 칭찬받을 일 많은 사람입니다."

칭찬세례를 했다.

물론 성질 잘 부린다던 말은 조금 애매했으나 칼리안에게는 분명한 칭찬이 맞았다.

"이상하다. 내 정혼자님 이런 사람 아닌데."

"리리에 또래의 아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왕자님도 칭찬받을 면이 많은 분이니 예전의 일에 너무 얽매여 있지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아, 하고.

그제야 드미레아의 말을 이해한 칼리안이 작은 소리를 냈다.

"왕궁 안에서 그런 옷 입고 돌아다니기 어려운 날에는 공작저에 오셔도 되고요. 얘기 잘 들어주시는 형님 말고 또 다른 사람 필요해지면, 들어드리겠습니다. 리리에 찾아주신 값으로 치고요."

얀의 옷을 알아본 드미레아가 이런 말을 건넸다.

칼리안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드미레아. 내 정혼자님. 정말 언제나 든든하네."

"그렇습니까."

"고맙고."

드미레아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말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 * *

치솟는다.

그러나 다시 떨어져내린다. 몇 번을 더 솟아오르지만 결국 더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한 채 있던 곳으로 되돌아 내려간다.

- 쏴아아아······!

세뉴 강에 물고기 밥을 주는 행사를 치르고 나면 카이리스의 왕궁에도 물이 돌았다. 겨울을 지내는 동안 인공 연못과 인공 호수를 제외하고는 전부 막아두었던 물길을 여는 것이다. 인공 개울에도, 그리고 분수에도.

겨우내 멈췄다 다시 솟아오르기 시작한 분수를 본 것이 얼마만일까. 체르밀 궁 밖에서 발을 멈춰 선 적 없던 란델이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분수에 다시 물이 도는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는지, 그런 것에 눈을 두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물이라······ 늘 깨닫게 되는 사실입니다만, 왕자님. 카이리스는 참으로 살기 좋은 곳입니다."

하늘로 치솟다 결국 다시 아래로 흘러내리는 분수의 물줄기를 보던 라시드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곁에 서있는 란델을 향해 이렇게 말을 건넸다.

르메인이든 플란츠든, 라시드가 체르밀 궁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할 리 없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시드는 왕궁을 찾았다. 그리고 란델을 체르밀 궁의 밖으로 불러냈다.

다른 이의 눈을 피해 세뉴 관에서 만나지도 않았다. 오고가는 이들이 참 많은 위치, 체르밀 궁과 근접한 분수 정원. 그 곳에서 란델을 기다렸다. 그리고 란델은 다른 거절 없이 라시드를 찾아왔다.

아마도 란델을 아는 이들이 이 상황을 본다면 꽤 놀랄 것이 분명하다. 칼리안도 플란츠도 아닌 란델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외부인을 만나는 것을 볼 일이 없었을 테니까.

"작년의 텐실은 물이 넘쳐나 문제였는데 올해에는 반대인가 봅니다. 비도 눈도 오지 않아 밀의 낟알이 메마르고 호수 바닥이 드러나고······ 심지어 왕궁에 있던 분수까지 전부 다 작동을 멈춘 상태라 하니.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가늠이 어렵습니다."

밀이 마르고 호수 바닥이 드러나는데.

그보다는 왕궁의 분수가 물을 뿜어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듯한 말이었다.

비아냥일지 걱정일지 다른 의미를 품고 있을지. 알기 어려운 라시드의 말에도 란델은 아무 표정 없이 묵묵히 서있기만 했다. 분수대의 수면 위에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파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러니 이곳이 얼마나 좋은 땅인지, 생각할수록 초대왕님의 혜안에 감탄을 금치 못할 뿐입니다."

란델의 반응에 별달리 신경쓰지 않는 듯한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호응없는 단 한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도 실망하지 않고 제 몫의 대사를 읊어나가는 연극 배우처럼.

"바다가 없는 대신 바위에서 소금이 나고, 마르지 않는 강이 흐르고, 어머니 나무의 보은에 곡식 창고가 빌 날이 없고······ 포도가 영글면 돼지도 살을 찌우니. 이만한 나라가 이 대륙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잠시 대화를 하자 하더니, 말이 없구나. 이만 돌아가겠다."

길게 이어진 말에 란델이 짧은 대답을 건넸다.

이것 참,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은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이제껏 말씀을 건네드렸는데 말이 없다 하시면 무어라 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란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시드의 빈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저 홀로 산책을 나왔다는 태도였다. 한가로운 오후에 찾아든 무료함을 분수대의 물소리로 쫓아보려 했을 뿐이라는 듯이 말이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란델 왕자님."

혼잣말같은, 홀로 나선 배우의 독백같은, 분수대의 큰 물소리에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은 목소리가 계속하여 란델을 향했다.

"부족함 하나 없는 땅에서 배불리 먹고 자란 이들이 사는 나라. 지진과 가뭄을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지조차 셈할 필요가 없는 나라. 세렌티가 아닌 다른 것에 뿌리를 두었으나 세렌티의 기적을 입은 듯한 이 나라. 그런 나라를 이끌어가는 축복받은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맺어질지 말입니다."

"무상한 일이구나."

여전히 관심없다는 듯.

분수대 소리보다 조금 더 시끄러운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대답한 란델이 몸을 돌렸다. 저 물소리보다 무익한 대화를 이어갈 이유가 없다 여긴 까닭이었다.

- 저벅.

세공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길고 긴 말이 모두 다 무위로 돌아간 것에도 라시드는 웃었다. 화를 참거나 억누른 기색조차 없었다. 혼자만의 무대가 정말 마음에 든다는 그런 얼굴을 한 채로 웃기만 했다.

- 저벅, 저벅.

란델의 발이 계속 움직였다.

분수대에서 한 발을 멀어져 라시드의 곁을 지나쳤다. 라시드로부터 한 발을 멀어졌다. 그런 행동을 지켜보던 라시드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멈추십시오, 왕자님."

명령.

그저 높임말이 들어갔을 뿐인, 분명한 명령.

- ······ 탁.

란델이 발을 멈췄다.

란델에게 보이지 않을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띄워낸 라시드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란델의 앞으로 가 섰다.

"정말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답을 한 것으로 안다만."

"왕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제가 이뤄드릴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듯이 말하는구나."

"아무렴 제가 왕자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겠습니까."

느긋하게 대답한 라시드가 란델을 내려다봤다.

란델의 푸른 눈이 라시드의 녹빛 눈을 바라봤다.

깊디깊은 바다가 넓디넓은 숲을 집어삼키듯이. 나무에 뒤덮여 보이지도 않는 깊은 땅 속에 무엇을 숨겼을지 알아보듯이.

"란델 왕자님께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란델이 고개를 들었다.

라시드를 다시 한 번 깊숙이 응시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텐실의 왕좌에 오르십시오."

여전한 명령.

란델의 눈이 라시드의 속내에서 빠져나왔다. 그와 함께 라시드의 말이 이어졌다.

"이 왕국의 종막, 정말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그 자리에 오르면 카이리스가 말로를 걷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구나."

"세상의 그 어떤 일을 장담하겠습니까만. 제 눈에는 그리 보입니다."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모든 것이 네 손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듯, 누구든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대로. 그리 될 것처럼 여기는 중인 듯 보이고."

"아······ 이런. 저는 제가 왕자님을 잘 알고 있다 여겼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오히려 왕자님께서 이렇게나 저를 잘 알고 계시니, 이 역시 영광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좋을대로 여기거라.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니."

"네. 제 뜻대로 여기겠습니다. 그러니 왕자님."

"다만. 한 가지를 관여하자면, 네 어미에게 말을 더 배운 뒤 다시 온다면 좋겠구나."

"말을 배우라니.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란델이 라시드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분수를 가리켜보였다.

"저 물이 너와 다를 것 없지 않느냐. 치솟으려 발버둥치다 결국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마는 것을. 제아무리 스스로를 남다르게 여긴다 한들 우연찮게 조금 더 높이 튀는 물방울일 뿐인데 당연한 사실을 잊고 마치 하늘에 닿기라도 할 것처럼 행동하는 네 태가 말조차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와 다를 것이 없으니."

라시드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 긴 미소를 지으며 란델을 쳐다봤다.

"······ 왕자님. 왕자님께서 디디고 계신 발판이 얼마나 메마르고 무른 곳인지, 잊으셨습니까."

"네 기억 속에 자리한 이 왕궁이 얼마나 메마르고 박한 곳인지. 너야말로 잊은 듯 하구나."

작은 발 소리가 다시 울렸다.

란델이 몸을 완전히 돌려 라시드를 마주보고 섰다. 조금 전까지 분수를 가리켜보이던 손으로 라시드를, 그리고 바닥을 가리켜보였다.

"네 어미에게 말을 다시 배울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말을 꺼내기까지 같은 말을 반복하도록······ 나 역시 그리 해볼까. 그리 하면 네 자리를 깨우치겠느냐."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에게는 어려울 일이 아니다만. 네게는 다를 것 같은데."

짙고 푸른 눈을 따라 움직이던 녹빛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습관 같은 웃음을 지었다.

"아, 이런. 제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왕자님께도 전했습니까."

"라시드 아리엘리."

"······ 네. 왕자님."

"그래. 그런 성을 사용하던데."

"어머니가 그 성을 그다지도 아끼어 그렇습니다."

"그다지도 아낀다면, 그 대단찮은 왕관을 네가 직접 써 보지 그러느냐."

"그래서야 재미가 있겠습니까? 저에게 필요한 것은 고작 비와 눈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수까지 막아야 하는 그런 작은 나라의 왕관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 왕관을 쓰고 대단찮은 보석을 손에 들고 작은 왕좌에 올라 줄,"

마리오네트.

속삭이듯 말을 맺은 라시드가 싱긋 웃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란델이 질문을 건넸다.

"그 역할이 나에게 제격이라 여겼느냐."

"맞습니다, 왕자님."

텐실의 왕관.

칼리안도 같은 것을 권했다.

카이리스의 왕관은 제 것이라 줄 수 없고 탑에 보내기는 싫고 장미가 잘 자랄 작은 영지 하나를 내리기엔 지나치게 초라하여 대신 건네는 자리. 그런 자리에 오르라 했다.

두 사람이 하나의 자리를 똑같이 건네는데, 한 곳에서는 악취가 진동을 하고 또 한 곳에는 그 어떤 냄새도 나질 않으니. 우스운 일이다.

란델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자리에나마 앉는다면, 플란츠가 고개 숙인 모습을 계속 볼 수는 있겠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나마 권해드리는 것은 왕자님을 배려해드리고자 하는 제 깊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모습이 변변찮다 홀대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러다 어느 날 제 서운함이 넘쳐나 혹시라도······."

라시드의 손가락이 란델을 향했다.

란델의 가슴을, 그 속에 들었을 심장을 향했다.

"왕자님을 감히 옭죄려 들까. 겁이 납니다."

"봄이 돌아온 뒤로 이제까지 내내 마음 속이 편치 않았는데. 기꺼운 말을 이렇게 듣는구나."

란델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맺혔다.

"네가 말을 다시 배우고 온다면, 그 때는 생각을 해 보마. 그 왕관에 대해서."

평온한 목소리로 답한 란델이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저벅, 저벅.

체르밀 궁을 향해 발을 옮겼다.

멀어져가는 란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라시드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란델이 마차에 오르도록, 그의 시종이 마차 문을 닫고 마차를 출발시키도록,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마차가 체르밀 궁의 회랑 안으로 들어가 사라지도록.

그 후에는 고개를 돌려 분수를 바라봤다.

'저 물이 너와 다를 것 없지 않느냐.'

방금 전 듣게 된 란델의 말을 계속하여 되뇌면서, 해가 다 저물어 달이 뜨고 별이 빛나도록 그렇게 한 자리에 못박힌 듯 멈추어 있었다.

- 저벅.

그런 라시드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브리센 남작님이 맞으십니까."

두 명의 기사, 왕궁을 수비하는 발칸의 기사들이었다.

밤이 깊도록 왕궁에서 나가지 않고 정원에 서 있는 남작을 내보내기 위해 온 것임을 깨달은 라시드가 말했다.

"이 곳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느라 시간이 이리 흐른 줄도 몰랐군. 이만 나가겠네."

"네, 감사합니다."

기사들이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라시드가 나갈 때까지 곁을 지키려는 것일 터였다.

고개를 끄덕인 라시드가 발을 옮겼다.

굳이 이 곳에 더 있을 이유도 없거니와 괜한 오해까지 사 두어 좋을 일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두거라. 남작과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기사들은 물론 라시드 역시 생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이들이 빠르게 예를 보였다.

검은 머리, 붉은 눈.

낮에 보았던 것과 조금 다른,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붉은 자수가 놓인 검은 재킷 차림을 한 왕자.

칼리안이 그 곳에 서 있었다.

"네, 왕자님.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이렇게 인사를 마친 기사들이 자리를 벗어났다.

가벼운 응대로 그들을 떼어 둔 칼리안이 라시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번 다시 얼굴 마주치기 싫다는 얼굴을 하더니 생각보다 빨리 자신을 찾아왔다 여기면서.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남작과 남작의 아비에 대해 고민 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하여, 이렇게 직접 그대를 찾아오게 되었는데······ 혹여 내가 남작의 시간을 방해한 것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방해라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요. 그리 여긴다면 다행입니다."

"네, 왕자님. 말씀하십시오. 무엇이든 듣겠습니다."

라시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같은 시간.

하얀 자수 장식이 가득한 검은 재킷의 또 다른 '칼리안'이 그레이의 앞에 앉아 해맑은 웃음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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