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14화 (415/527)

제74장. 다른 끝(1)

그래. 안다.

익숙한 것보다 낯선 것이 나을 때가 분명 있다.

그럴 때가 있다는 것은 곧 '있기는 있다' 혹은 '없지는 않다'는 소리다. 그 말인즉슨, 대부분의 경우에는 낯선 것이 기껍지 않다는 의미인 것이다.

'키리에.'

'네. 왕제님.'

'사람이 생을 마치면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혹시 생각해본 적 있어?'

'많습니다.'

'어떻게 될 것 같아.'

'답을 내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왜.'

'의미가 있겠습니까.'

'의미가 없나.'

'무덤 위에 시나스타를 올리고, 혹은 강가에 안네루시아를 띄우고. 떠난 이를 위로하는 행위라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정말 시나스타를 받아들고 안녕을 고하는지, 안네루시아에 올려진 불빛을 따라 걸어가 사라지는지, 정말 위로를 받기는 하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지.'

'네. 산 자들이 죽은 이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겠다며 만들어낸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생을 다한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는 것 또한 산 자들을 위한 자기만족,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낯선 것은 기껍지 않다.

대체로 다 기껍지 않다.

'저는 왕제님도 저와 같이 생각하고 계신다 여겼습니다.'

'죽음 이후를 생각하거나 추도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네.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왕제님께선 아직까지도 푸른 솔새의 무덤에 시나스타를 올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랬던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벌써 일 년입니다. 그 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틈이 날 때마다 그곳을 찾아가 술병만 비우고 오셨습니다. 아직 단 한 번도 시나스타를 들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시나스타같은 거창한 꽃은 에일라한테 안 어울려서 그래. 머리 위에 그렇게 소란스러운 것을 올리지 않아도 이미 예쁘잖아, 에일라는.'

'왕제님.'

'응.'

'푸른 솔새는 죽었습니다.'

낯선 것은, 결코 기껍지 않다.

'······ 그랬던가.'

'네. 죽었습니다. 일 년 전에.'

'그래······. 에일라가 죽었지. 그렇게 되었지.'

'왕제님께서 푸른 솔새 한 명의 무덤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떠올리시는지 압니다. 왕제님께서 직접 죽여 없앤 사람들과 데블란까지. 전부 다 그 무덤에 같이 묻힌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압니다. 그 무덤 위에 다 올라가지도 못할 만큼의 시나스타가 필요해서, 하지만 아무리 많은 시나스타를 올려도 일말의 소용이 없으리라 생각되어서, 그래서 차마 올리지 못하시는 것도 저는 압니다.'

'······ 내가 잠꼬대라도 했나. 나를 왜 그렇게 잘 알아, 넌.'

'왕제님.'

'응.'

'사람들이 떠난 이들의 무덤에 시나스타를 올리는 이유는 그것이 무의미함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죽은 이가 어찌 될지에 대해 유의미한 생각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 알면서도 그렇게 의미없는 짓을 사람들은 굳이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떠나보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고 싶어서 그러나.'

'살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렇게 하면 살아지나.'

'그렇게 하면 살아집니다.'

'그렇게 한다고 살아지나.'

'어떻게든······ 살아집니다.'

'그럼, 키리에.'

'네. 왕제님.'

'그렇게 해서 떠나보내면, 나는. 그 뒤에는.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나.'

데블란이 죽었다. 그리고 푸른 솔새가 죽었다.

이유없이 죽은 그 많은 생명들에 대한 대가라는 듯 푸른 솔새가 죽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직접 깨달아보라는 것처럼, 네가 저지른 일을 직접 겪어보라는 것처럼, 정말 보란듯이 죽었다.

'원망하고 용서구할 사람이 없으면 왕제님은 못 사십니까.'

'형님을 지키려고 살았고. 지켜내고 나니 원망과 속죄가 남았는데······.'

그 둘이 죽어 사라진 뒤 찾아온 세계는 낯선 것이었다. 생각해본 적 없던 것이었다. 더 이상 이유없이 죽여야 할 생명이 없었고 더 이상 갈급하게 지켜야 할 목숨도 없었다. 더 이상 원망할 상대도, 속죄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원망도 속죄도 내멋대로 털어내면. 이제 그럼 어디에 기대 사나, 나는.'

그 낯선 세계를 견디지 못해 매일 밤 유령을 불러냈다.

매일 밤 데블란이 찾아들었다. 푸른 솔새가, 단 한 명도 잊지 않고 기억하던 수많은 이들이 찾아들었다.

매일 밤 원망을 했다. 용서를 구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낯선 하루가 다시 시작됐다. 그 하루를 버티고 나면 어김없이 유령이 찾아들었다.

'얼마 전 조난되어 죽은 채로 떠내려온 텐실의 기사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지금 왕제님이 그 자와 다를 것이 있습니까.'

'다를 것이 없나.'

'당장 붙들고 살 것이 없어서 원망과 속죄를 붙들고 사는 왕제님과, 당장 마실 것이 없어서 바닷물을 들이마신 그 자가 서로 다를 것이 있습니까. 결국 메말라 죽고 말 텐데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소금물 그만 드십시오. 왜 자꾸 삼키십니까.'

키리에가 그렇게 말했다.

'토해내기라도 하십시오. 그래야 숨이 돕니다. 그렇게 해야 삽니다. 가끔씩이라도 좋으니, 제발······ 물 밖으로 나와 토해내기라도 하십시오.'

토해내라 했다.

굳이 삼킬 것이라면 그렇게라도 하라 했다.

하지만 베른은 그리 하지 못했다.

메말라갔다. 미쳐갔다.

조금씩 허물어지듯이. 깎여나가듯이. 지워져가듯이.

* * *

붉게 물들던 하늘이 푸르게 빛났다.

어두운 밤을 맞이하기 직전, 하루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일지 쉼을 맞이하는 반가움일지 모를 기색을 담고 아름답게 물들었다. 붉음과 푸름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다 담아 한 데에 어우러지듯 섞여나갔다.

그 사이에 고개를 숙이고 앉은 형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차라리 이게 다 너 때문이다 하면서 우기기라도 하면 '왜 나 때문이냐 브리센이랑 실리케랑 르메인 때문이지' 해가며 반박해주고, 이게 다 나 때문이다 하면서 오지랖을 부리면 '왜 너 때문이냐 브리센이랑 실리케랑 르메인 때문이지' 해가며 설명해줄텐데.

미련한 놈들은 그것조차 서로 내뱉지 못하여.

- ······ 툭.

실리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

실리케를 위한 안네루시아를 준비하지 못한 것.

'미안합니다.'

그에 대해 미뤄왔던 말만 전했다.

- 툭. 툭.

멀쩡한 꽃 위에 소금물만 주고 있는 완두콩에게 그 이상은 해줄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제야 간신히 토해내는, 꽃잎 위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소금물 소리를 그냥 듣기만 했다.

늘어진 석양 빛에 길게 이어지다 이내 어둠에 잠겨 사라져가는 그림자만 계속 보고 있었다.

노을지던 하늘이 푸르게 변해가도록.

길어지던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도록.

꽤 오랫동안 말없이 곁을 지켰다.

- 툭······ 툭.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 소리가 잦아드는 것을 알게 됐다. 조금 더 뒤에는 꽃송이가 젖어들지 않게 된 것을, 나름대로 밝은 귀에 꽃잎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 들리지 않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나 조용히 울음이 멈췄다.

아무 소리 없이 토해내던 것이 아무 소리 없이 그쳤다.

칼리안이 소리없는 긴 한숨을 흩어내듯 내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보다 옅은 웃음을 지었다. 완두콩이 계속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다.

형님 너는 처음 울어봐서 몰랐겠지만 사실 사람은 울고 나면 눈이 붓는다. 히나도 없고 심장에 서클 두 개를 떡하니 만들어놨으니 치유사도 못 찾아 갈 텐데. 내가 내 정혼자님이랑 밥 먹기로 했으니 리리에도 아직 있을 것 뻔한데. 형님 너 그렇게 계속 수그리고 있으면 눈만 더 붓는다. 루시가 잡아오던 개구리 꼴 나는 건 진짜 순식간이다. 개구리 얼굴로 리리에랑 밥 먹을 거냐 내가 눈 찜질 하는 방법이라도 알려줄까.

그런 말이나 좀 해 줄까 하다가.

"플란츠."

"······ 왜."

조금만 더.

잠깐만 더.

칼리안 말고 다시 베른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잠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제 속내 죄다 꺼내놓는 얀을 달래준 적은 있었으나 한 마디 말도 없이 뚝뚝 울기만 한 놈은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아득해져서.

"불렀으면."

불렀으면 말을 하라고.

이렇게 말한 완두콩이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베른은 대답하는 것도 잊고 미간을 찌푸렸다.

"······ 와."

안 부었다.

눈꼽만큼도 안 부은, 고작해야 눈에 들었던 고양이 털을 이제 막 빼낸 정도의 모양새만 되어 있는 연두색 눈이 베른을 보고 있었다.

억울하다. 실컷 울어제낀 놈 눈이 멀쩡하다. 아니 나는 우리 히나한테 두꺼비 소리까지 들었는데 왜쟤는왜쟤만대체왜저렇게멀쩡하냐고.

"왜."

"아니야."

"뭔데."

"그냥 잠깐 억울했어."

"뭐가."

"그런 게 있어."

뭐, 그래. 시스파니안께서 희멀건한 저 놈이 막내일 줄 알고 남은 축복 아낌없이 몰아주시느라 내 건 조금 부족했나보다. 설마 셋째가 있겠냐 싶어 그러셨나보다. 시스파니안께서도 당신 후손 중에 그런 노새같고 소같고 존재감 없는 것 같은 놈이 나온 것도 모자라 바로 그 놈이 아들을 셋이나 둘 것이라고는 예상 못하셨겠지.

이해심 넉넉한 내가 이해해야지.

"내 동생이 그랬는데. 억울하다는 말도 안 하면서 저와 대화를 하자 하느냐고."

"그랬지. 당신 동생이."

"당신도 그럼. 뭐가 억울한지는 말해주고 대화하자 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아까부터 난 내 얘기만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당신 달래주려고 온 거지, 당신이 날 궁금해 할 자리는 아니지 않아?"

"상관있나."

"상관없나."

말을 따라하듯 답한 베른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저녁 약속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고 저 놈은 리리에 앞에서 제 눈에 고양이 털 들었다 나온 정도의 티도 안 내고 싶을 테니. 조금 더 얘기를 하다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거니. 그런 생각이 든 까닭이다.

"억울한 것 많지, 나도."

그리고 이렇게 입을 열었다.

다만 네 눈이 안 부어서 억울하다는 말 대신 다른 것을 내어놨다. 제 속내 온전히 꺼내놓는 법도 모르고 계속 배우려고만 드는 놈이니, 속내 꺼내는 법을 깨닫고 배워낼 때까지는 먼저 꺼내 보여주는 수밖에.

"처음으로 바다에 빠졌을 때도, 제대로 된 이유로 나를 설득시키지도 못한 채 칼을 들었던 일도, 영영 아름다울 줄 알았던 푸른 새 한 마리가 죽은 것을 안 날도. 억울했지."

"······ 그래."

"뭐. 그렇게 대단한 것들만 억울했던 건 아냐."

"그럼."

"형님이 내기로 걸었던 돈을 주지 않고 모르는 척 했던 것도 억울했지. 어느 날 갑자기, 그 형님이 찾아와서는 '더 이상 네 꼴 못 보겠으니 왕궁에서 나가라' 했을 때에도 참 많이 억울했고."

이렇게 말한 베른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한 번, 그리고 자신의 배를 한 번씩 가리켜보였다.

"딱 이런 시간이었거든. 배고프기 시작할 때."

"······ 배고파서."

"배고파서 더 억울했지. 아무리 사람을 쫓아내도 밥은 주고 내보내야 할 것 아냐."

끄덕.

저 놈을 굶길 생각을 했다니.

보라색 눈 달린 국왕도 확실히 지독한 놈이다.

"그리고. 절벽에서도."

"절벽이 왜."

"당신 동생이 말해준 적 있었지. 내가 술먹고 절벽에서 굴러내려왔던 일이 있었다고."

"있었어."

"왕궁에서 나온 뒤에 하릴없이 길을 나섰는데. 하루하루 연명하듯이 걷고 있으려니 웬 바위 절벽이 앞을 막더라고. 그걸 보고 있는데 괜한 부아가 치미는 거야. 왕궁에서 나왔다고 저까짓 게 내 길을 막나, 하고."

"돌아가면 되잖아."

"술 마신 뒤였어."

"······ 이해했어."

"그래. 아무튼 그래서 내가 저것 하나 못 지나갈 줄 아느냐며 기어올라갔지. 다 올라가고 나니까 기분이 좋더라고. 그럼 내가 뭐 했겠어."

"술."

"그래. 기쁜 마음에 자리에 앉아 술 몇 잔을 마셨지."

"취했으면서."

"절벽 올라가느라 다 깼어. 그러니 더 마셨지. 술을 반쯤 마신 뒤에 반대편으로 내려가려는데, 아무래도 좀 아쉽잖아. 그럼 내가 뭐 했겠어."

"술."

"그렇지."

누가 가르쳐놨는지.

그놈 참 똘똘하기도 하다.

"그래서 딱 한 잔만 더 마셔야지 하고 주섬주섬 술병을 꺼내드는데 손이 미끄러졌어."

"취해서."

"아니, 미끄러졌다니까. 미끄러져서 술병을 놓쳤어. 그래서 그것 잡겠다고 한 발 디뎠다가 그대로 굴러 내려왔지."

이렇게 말한 베른이 엄지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올라갈 땐 오래걸렸는데 되게 금방 내려오더라."

괜한 질문을 했다는 듯 플란츠가 긴 한숨을 쉬었다.

베른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 내려와서 정신 놓긴 했지만 그건 확실히 기억해. 엄청 빨리 내려왔어, 내가."

"······ 그래."

"그러고 나서 눈을 떴는데 온 몸에 이상한 풀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다들 날더러 거기는 왜 기어 올라가서 왜 술까지 처먹었냐고 미쳤냐고 하더라고. 내가 왕제인 것도 모르고 다들 내가 술에 취해서 굴렀다 믿었으니까."

"사실이잖아."

"아, 물론 미치긴 했지. 조금 취했던 것도 맞지. 그런데 엄연히 나는 취해서 구른 게 아니거든. 술병 잡으려다 구른 거지. 차라리 다 마시기나 하고 나서 그런 말을 들었으면 좀 덜 억울했을 걸."

"그게······ 억울한."

"그치. 그게 억울한 일이지."

"고작."

"고작이라니. 말이 심하네. 사람은 별 것 아닌 일에 전부 다 억울해하는 족속들이거든."

이렇게 말한 베른이 플란츠를 가리켜보였다.

"그러니까 당신도, 뭐든 다 억울해해도 괜찮아."

"뭐든."

"당신 동생 괴롭히고 외면한 것 빼고."

"······ 알아. 그건."

"그럼 그 반대도 알아야지. 그것을 빼면 다 억울해해도 된다는 걸."

그 일을 억울하다 느낄 놈이 아닌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을 억울하다 여겨야 할지 모르는 놈이라서 알려줬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억울해해도 괜찮은지, 카이리스의 역사를 가르쳐 준 선생이 마지막 시험의 범위를 알려주듯이.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플란츠가 목소리를 냈다.

"커프스. 훔친 게 아니었는데 훔쳤다 오해받은 일은."

"당신 동생 몰래 바꿔간 것을 당신 멋대로 교환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억울해해도 돼. 내 생일 챙기려고 만들었지만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았을 물건 대신, '나'한테 좀 더 잘 어울릴 것으로 바꾼 셈 치면 되니까."

베른의 생일을 챙기겠다며 칼리안에게 어울릴 커프스를 맞춘 것이었지 않나. 그것을 대신해 베른에게 더 어울릴 커프스로 바꾸었다 여기면 될 일이니까.

"안네가 자라는 것을 제대로 못 본 일은."

"당신이 스스로 세크리티아에 가자고 한 거지만. 그것도 억울해해도 돼."

"내 동생이 자꾸 말을 내리는 건."

"그건 당신이 어려서······ 지만. 억울해 할 수는 있지."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억울하다 여기는 것 하나하나 이런저런 말이 많이 붙고는 있지만 아무튼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억울하다 여겨도 된다는 허락이라서. 정말 무엇이든 다 억울해해도 괜찮다는 허락이라서.

"······ 알았어."

"그래."

"칼리안."

"왜······ 네."

저 놈 고치려다 이미 조각난 내 인성 말고 인격까지 조각나 미쳐 날뛰면 어쩌나 하는 얼굴이 된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래, 뭐. 어쩌긴 어쩌겠나.

조각나면 똘똘한 형님 저 놈이 알아서 주워다 붙여놓겠지.

"나는. 브리센이 아니야."

사람의 것이 아니라던 연보라색 눈이 사람의 것임이 분명할 연두색 눈을 봤다. 깨어지고 부서진 조각들을 조금쯤 흘려보내고 조금쯤 털어낸, 메마르던 것에 다시 빛이 도는, 다시 잘 여물어가는 완두콩같은 눈을 봤다.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까. 누가 키운 완두콩인데."

"그러니까. 칼리안."

짖는다 말하는 대신 한 번을 눈감아 준 완두콩이 말을 이었다.

"나는. 브리센 필요없어."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이제껏 브리센을 남겨 둔 것은 플란츠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플란츠의 안위를 위해서도 물론 필요했던 가문이지만 그 거대한 것을 당장 부서뜨릴 수가 없어 그대로 두었다고. 세렌티의 안배를, 혹은 플란츠가 시간의 축을 돌린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대비하기 위해 그대로 두었던 것이라고.

그것을 고스란히 플란츠에게 쥐여주어 그들의 힘이 곧 칼리안의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건드리지 않았다고.

플란츠가 이미 잘 알고 있을 사실.

플란츠의 의견은 묻지 않은 채 통보하듯 알려줬던 사실.

그런 말을 다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네."

"브리센을 대신할 것은 내가 만들 수 있어."

플란츠가 칼리안의 손을 가리켜 보였다.

흉터 가득한 커다란 손, 베른의 손. 그 위에 결국 새로운 상처가 생긴 손. 그런 손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같이 닫아. 브리센."

그 오랜 부대낌의 끝에 의견을 냈다.

"세력이든 무력이든. 얼마든지 만들어 전부 다 쥐여드릴 테니."

통보 말고, 설득 말고, 반항 말고, 비로소 대화를 건넸다.

"그렇게 되면 형님 억울할 일 참 많이 생길 겁니다."

"알아."

"실리케로 모자라 브리센까지. 에반과 레넌을 지나 브리센을. 그레이와 라시드 뿐 아니라 브리센 전체를,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 전체를 배신했다고. 전부 무너뜨렸다고. 그런 모습조차 실리케를 닮았다고. 그렇게나 빼어 닮아서는 그 끝을 모르고 고개를 치드는 것조차 닮았다고. 분명 그리 말할 겁니다."

"나 하나 살겠다며 내 어머니 손을 놓고 아우님 그늘 속에 몸을 피하고. 편한대로 브리센을 다시 등에 업고. 거기에 더해 하나 더 늘어난다 해도. 상관 없는데."

"지금까지 제가 드린 얘기는 다 잊으셨습니까."

"아우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그 입 다물려 놓으시겠지."

"아무리 그렇다 한들,"

"입을 다물리고 손가락을 꺾어두어도 건네지는 것이 있으면. 그 말에 억울하단 내 말도 어련히 알아서 들어주시겠지."

"누가요."

"당연한 것을 물으시는지."

플란츠의 입술이 올라갔다.

"내 아우님이든, 아니면. 진짜 망나니같은 내 친구든. 누구든 들어주실 텐데. 아닌가."

칼리안이 다시 플란츠를 봤다.

무엇을 벼려 만들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날 선 별빛을 담은 채 그렇게 한참동안 플란츠를 쳐다보다가.

"그리 여기신다면······."

나지막한 대답을 했다.

- 달칵.

곧 칼리안이 오늘의 쓸모를 다한 팔찌를 풀었다.

길게 이어져 땅 위에 내려앉았던 머리카락이 조금씩 짧아져갔다. 얼만큼의 시간을 보내도 녹지 않는다던 대사막의 설원, 그곳에 휘몰아치는 바람같던 빛이 조금씩 짙게 변했다. 빛을 잃고 어둠에 잠기듯, 빛을 좇아 어둠 속을 걷듯, 아니. 그보다는.

더는 잠겨들지도, 물들지도, 잘려나가지도, 퇴색하지도 않을 그런 검은 빛으로 반짝인다.

흉터 많던 손이 조금씩 바뀌었다. 수많은 흔적이 남아있던 상처 대신 곧 다시 아물게 될 상처 하나와 이미 다 아문 상처 하나만 남겨진 희고 긴 손으로 바뀌었다.

칼리안이 붉은 눈을 들어 플란츠를 바라봤다.

"브리센, 없애드리겠습니다······ 기꺼이."

형을 향해 답을 전했다.

* * *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루를 조금 늦게 마친 이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하고, 하루를 이르게 마무리 한 이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시간.

"서재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침실에 드시겠습니까."

질문을 받은 이가 턱짓을 했다.

날카로운 턱선이 침실 쪽을 가리켜보였다.

"네, 후작님. 정리를 마쳐두었으니 안으로 드십시오."

지나칠만큼 깊이 구부러지는 허리를 마뜩찮은 눈으로 내려다 본 그레이가 발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오는 집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질문인 줄 알지만 쓸데없는 답을 기다리듯 형식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차나 술을 준비해드릴까요."

"필요없다."

정해진 질문과 답을 주고받듯, 단어 그대로 쓸모없는 몇마디 말을 다 마친 그레이가 침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저를 따라 들어오려 하는 집사를 물리고 문을 닫았다.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던 까닭이다.

이 집에서, 내 집에서, 언제 다가올지 모를 검을 늘 준비하고 어디에 들어있을지 모를 독을 늘 경계했다. 아무도 믿지 못한 채로.

"하······."

긴 한숨이 든다.

변경백령에 있을 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러니 이게 전부 다.

"저런. 나 때문에 여전히 고생이 큰 듯 보이는구나."

이게······.

전부 다.

"그레이 브리센. 후작."

그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모든 일의 원흉.

붉은 눈의 검은 고양이가 또다시 그레이의 침실에 찾아와 있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애써 물린 그레이가 여상스런 얼굴을 했다. 그리고 침착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칼리안이 당장 자신을 죽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내가 뭘 좀 가늠하고 있는데."

마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즐거운 얼굴로 생긋 웃은 검은 고양이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너와 네 아들. 하나는 이제 필요치 않게 되었는데. 둘 중 누굴 나중에 죽여야 나에게 더 큰 이득이 될지 고민이 되더구나."

그러더니 이렇게.

"누굴 남겨둘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그 놈이 그 놈이라. 이것을 어찌 해야 할지······. 그런 고민이 지워지질 않는 터라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당사자들의 의견을 들어줄 줄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훗날 이 내가 좋은 왕으로 남지 않겠느냐."

양손에 들린 맛 좋은 과일 중 어떤 것을 먼저 먹어치울지 고민하는 듯한 여상스런 얼굴로.

"그러니 얘기해보거라, 후작. 주의깊게 들어줄 테니······ 기꺼이."

실로 쓸데없는 질문을 건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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