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13화 (414/527)

제73장. 잠시만요, 형님(6)

허리 뒤로 묶어 내린 커다랗고 빨간 리본.

무릎까지 내려오는 분홍 치마의 하얀 레이스. 소매가 풍성한 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블라우스와 같은 재질의 레이스 리본으로 발목을 두르게 되어 있는 하얀 구두.

그냥 본다면, 초콜릿 색의 반묶음 머리와 정말 잘 어울리는 예쁜 옷차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달리한다면.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므에옹!"

고양이의 시선으로 본다면.

"에옹!"

"······ 니앙!"

어울림이고 예쁨이고 뭐고 그냥 움직이는 큰 장난감이다.

"흔들거리니까 신기해?"

"에옹!"

"냥!"

"우와, 대답해주는 거야?"

"미오옹!"

사람 하나를 장난감 삼은 두 고양이가 있는 곳은 루비아 관의 별관이었다. 타국의 사절들이 머물도록 마련된 루비아 관 중에서도 특별한 귀빈에게만 제공되는 곳이었다.

그런 용도인 만큼 타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카이리스의 부강을 자랑할 겸 그들의 생활 수준에 맞는 환경도 제공할 겸 참으로 호사스럽게 꾸며진 것으로 이름이 난 곳이기도 했다.

체르밀 궁보다 약간 작은 면적이었으나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두 개의 일반 관과 하나의 별관을 나누는 길 옆에는 잘 꾸며진 정원과 적당한 크기의 연못이 자리했다.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으로 바꾸어 심어 장식한 길을 따라 걸어가면 시스파니안과 하츠아라의 모습이 조각된 거대한 분수가 나왔다. 그 뒤로 펼쳐진 별관의 모습, 아름다운 검은색 조각이 눈에 띄는 하얀 대리석 건물에는 누구나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물론 이 아름다움 역시 사람의 시선에서 그렇다는 소리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시선을 달리 해본다면.

"꽉꽉!"

이를테면 파란 리본을 맨 오리에게 있어서는 여기저기 헤엄치고 뒤적거리기 참 좋은 큰 놀이터일 뿐이었으니까.

"······ 뭐야."

사람 눈에나 아름다운 곳. 그런 곳에서 그저 신나게 노는 세 동물을 지켜보던 아리안느의 표정이 변했다. 곧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루비아 별관의 정원을 울렸다.

"왜, 왜. 갑자기 왜 나한테 와?"

허리에 맨 붉은 리본의 끝을 잡아채려 자꾸 뛰어오르는 은백색의 고양이와 발목에 매어 둔 레이스 리본을 툭툭 건드려보는 회색의 고양이를 곁에 두고도 태평했던 아리안느였지만, 연못을 한바퀴 돌아 나온 몸을 분수대 물에 한 번 더 담근 뒤 이제 다 놀았으니 안아달라며 달려드는 축축한 오리까지 그냥 둘 수는 없었던 까닭이다.

오리의 목적지가 자신의 품이라는 것을 확신한 아리안느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클린!]

아마 세상에서 제일 절박한 클린이 아니었을까.

드미레아가 작게 웃었다. 그 곁에 있던 리리에는 그저 신기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아리안느는 마법사에요?"

금세 보송보송해진 새하얀 오리를 안아들고는 동그랗고 단단한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기 시작한 아리안느가 대답했다.

"아니야. 나는 법 다루는 사람이야. 마법도 다루고 약도 다루고 내 정혼자도 다루기는 하지만."

"우와······."

이것저것 다룰 줄 아는 것이 많기는 해도 아무튼 직업 구분 상으로는 엄연한 법무관이 아니던가.

좀 더 초롱초롱해진 눈의 리리에가 물었다.

"왜 마법사는 안 해요?"

"마법사가 제일 좋아 보여?"

"네."

"왜 그렇게 생각해?"

"기사님들이 그랬어요. 상대하기 제일 힘든 게 마법사라고요."

"그건 카이리스 마법사들이 유난히 또라······."

"린 영애."

"아, 미안해요. 아가들이랑 있어본 적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하다보니 입도 편해졌던 아리안느가 드미레아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리리에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린 뒤 대답을 이었다.

"기사들이 마법사를 꺼려하는 건 싸워서 이기기 어려운 이유도 있지만 사고방식이, 그러니까. 생각하는 게 서로 많이 달라서 그래. 상극이거든. 음. 그러니까. 서로 엄청 안 맞거든. 마법사가 더 세고 더 좋은 직업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렇게나 상극인 이들이 왕궁에만 들어가면 한 달이 채 안 되어 똑같이 탄산수 말아먹으며 어떻게 해야 빌헬름 관의 정중앙에 3왕자님 동상을 성공적으로 세우고 사지육신 멀쩡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토론하는 사이가 된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굳이 알려줄 필요 없을 속쓰린 사실과 체리 향이 묻어나는 홍차를 함께 삼킨 드미레아가 리리에를 보며 물었다.

"리리에. 검 말고 마법이 배우고 싶니?"

"마법을 배우면 나도 마법사 할 수 있어?"

"네가 하고싶은 건 무엇이든."

약을 배운다면 베로니카가 있고 마법을 배운다면 앨런과 칼리안이 있고, 마법도 검도 아니고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누구를 불러서든 얼마든지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검을 계속 익히겠다 하면 칼리안에게 약속을 받은대로 브리센의 검술을 가르치겠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브리센이야, 대가 끊기든 말든.

드미레아와 리리에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않나.

그러니 무엇이든. 정말 무엇이든 못 할 것이 있을까.

"지금 알려줘야 해, 드미레아?"

입술을 오므린 채 고민하던 리리에가 이렇게 물었다.

"아니야. 오랫동안 생각하고 알려줘도 돼."

"그럼, 저하께도 물어보고 세리에 엄마에게도 물어보고 제일 좋은 걸로 정할래."

생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드미레아가 잠시 아리안느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나 아리안느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곤 리리에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곁에 앉아 코코 목의 파란 리본을 예쁘게 고쳐 묶다가, 그 리본에 '나는 파란 머리 부군단장님을 엄마로 둔 코코입니다.'라는 말이 수놓인 것을 보고 웃음소리를 내던 아리안느가 물었다.

"리리에. 소공작님에게는 안 물어봐?"

"드미레아한테는 안 물어봐도 돼요."

"왜?"

"드미레아는 검이랑 내가 제일 좋아요."

자신있게 대답하고서는,

'맞지?'

하며 입 모양으로 물어본다. 리리에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은 드미레아가 대답했다.

"그래. 맞아."

사실은 얀과 리리에를 제일 좋아하지만.

"이따가 저하 뵈면 물어봐야돼. 그러니까 잊어버리지 말라고 말해줘야 해, 드미레아."

"알았어. 꼭 얘기해줄게."

초콜릿 우유를 처음 마셔본다 했던 날처럼 웃은 리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옹······."

빨간 리본에 어느새 흥미를 잃고 찾아온 루시가 리리에를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난 리리에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양 팔 가득 루시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루시의 뒤를 이어 리본에 시선을 뺏긴 안네를 그냥 둔 채 분수대로 가 앉았다.

석양이 제일 많이 드리운 곳이 분수대였던 까닭이다. 루시는 햇빛을 좋아했으니까.

제 어깨에 머리를 댄 채 잠든 커다란 오리를 피해 살며시 차를 마시고 내려놓은 아리안느가, 리리에를 지켜보는 드미레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 눈치 안 봐도 돼요. 저 꼬맹이가 어느 집안 애인지는 나도 이미 알아요."

"네.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습니다. 다만······ 어느새 버릇이 되었나 봅니다."

"버릇? 소공작님이 다른 사람 눈치 보는 버릇이 생길 일이 있어요?"

"린 영애를 린 후작의 딸이라거나 세크리티아 국왕 전하의 정혼자로만 보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나 역시 그렇습니다만. 리리에는 그런 눈길이 유난히 심해서요."

"저 애를 브리센이랑 연관짓는?"

"아니면 왕세자 저하를 떠올리거나.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누군가 그런 눈으로 리리에를 보지 않을까, 걱정이 늘 앞섭니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아리안느가 물었다.

"정작 브리센에서는 모르는 척 하는 일 아닌가. 난 그렇게 들었는데. 맞아요?"

"······ 네.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 리리에를 마주친 적도 있었습니다만. 아직은 리리에에게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모르는 척 하고 있다 해야겠죠. 에반이나 레넌, 아. 브리센의 후작이었던 이와 그 아들입니다."

"알아요. 누구인지."

"네. 그 둘도 리리에에 대해서 외부에 알린 적 없던 터라. 사실상 브리센에서는 리리에를 자신들의 혈육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해야 맞을 겁니다."

"모르는 척 하는 게 본인들 입장에서는 낫겠네요. 후계자 자리를 놓고 괜한 분쟁이 생기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테니까."

"잘 됐다 여겨야 할지. 화가 난다 여겨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그럼 브리센 떼버리고 지그프리드 가문으로 들이지, 그렇게는 왜 안 해요?"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렇습니다."

아리안느의 허리 뒤에 매달린 빨간 리본을 잡겠다며 두 발로 일어나 양 손을 위로 쭉 뻗던 안네가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하던 말을 잊고 잠깐 놀랐던 드미레아가, 얼른 다시 몸을 뒤집고 털을 고르기 시작하는 안네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리안느에게 하던 대답을 계속 이었다.

"리리에가 조금 더 크면. 커서 무엇이 될지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할 만큼 자라면. 자신의 성을 브리센으로 계속 쓸지, 지그프리드로 바꿀지, 그때 직접 정하도록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서요."

아리안느가 작은 소리와 함께 찻잔을 내려놓는 드미레아의 손을 내려다봤다.

검을 다루는 사람임을 여실히 증명하는 수많은 굳은살이 보인다. 이미 소공작의 자리에 올라섰고 가문의 검술을 모두 배운지 오래 되었을 텐데도, 적당히 자리를 이을 생각 없이 계속하여 검을 수련하는 이의 손이었다.

그렇게나 고집 센 사람이 리리에를 데려와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고집부리지 않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은 바뀔 것 뻔한, 어린아이의 장래희망 하나에도 같이 고민을 해줄 뿐. 무엇 하나 강요하질 않는다.

왕족 다음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설 사람이 고양이 한 마리가 뒤로 넘어진 것에 놀랄 줄을 안다.

"칼리안 왕자님이 소공작님 멋진 사람이라고 자랑을 했었는데. 아무렴 내 정혼자보다 멋질까 하고 반쯤 안 믿었거든요. 내 정혼자도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서. 그런데 내 친구 정혼자도 진짜 멋있는 사람이었네."

"왕자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엄청 많이 했어요. 그러다 정말 지그프리드로 들어가겠다 싶을 만큼."

드미레아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리 그래도 밀린 약속과 쌓인 빚은 하나도 안 깎아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실 오늘 소공작님 오시는 줄 모르고 선약을 잡았어요. 괜찮으면 차라리 그 분을 여기로 불러서 다같이 저녁먹고 놀아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저녁식사는 저도 왕자님과 선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아무래도 왕자님께서 오늘도 원하시는 바를 이루지 못한 듯 합니다. 그래서 제가 굳이 이곳에서 하루를 자고 가진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형 말고 내가 왕세자 할 거다'라고 알리고 나면, 그 정혼자인 드미레아에게 엄청난 관심이 쏠릴 것 같아 이곳에서 묵고 가려 했던 터였다. 그런데 얀의 말을 들으니 플란츠 덕에 계획이 무산된 것 같았다. 그랬으니 왕궁에서 몸을 피하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지금 저택에 귀한 손님도 계신 터라. 식사 자리는 오늘 말고 다음에 다시 가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 베로니카 얘기를 들으니 베른 경이 공작저에 있다던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잘 됐네요. 그럼 나중에 베른 경까지 다시 만나요."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빨간 리본에 대한 미련을 드디어 버리고 찾아온 회색 고양이를 안아들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리리에가 무엇이 되고 싶다 이야기할지.

나중에는 어느 가문의 성을 쓰겠노라 이야기할지.

이런 것 말고.

멍멍이 오라버니는 안 그러는데 얘는 털이 정말 많이 빠지는구나, 하는 생각이나 떠올리면서.

* * *

익숙한 것보다 낯선 것이 나을 때가 있다.

괜한 변덕이 들었을 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들 때.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고 싶을 때. 그리고.

"동생 말고 다른 놈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익숙한 것들은 전부 다 상처만 키울 뿐일 때.

그런 어느 날에는 낯선 것이 낫다.

적어도 베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베른은 그랬으니까.

데블란이 죽고 조금씩 낡아 바스러지듯 미쳐간 베른을 다시 세운 건 체이스도 아니었고 루이즈나 키리에도 아니었으니까. 왕궁 밖의 낯선 세상과 낯선 사람들이었으니까.

베른과 썩 닮은 플란츠도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그래서 베른의 모습으로 플란츠를 찾았다.

시간의 축 앞에 서서 '아직 미친왕이 되지 않은' 플란츠와 대화하던 베른 말고, 빨간 만화경을 보며 파란 꽃을 이야기하던 옛 칼리안 말고, 미친왕과 완두콩을 구분하던 것을 그만두고 베른과 옛 칼리안을 나누던 것도 때려친 지금의 칼리안 말고. 그냥 언젠가의 베른.

생김만으로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플란츠와 비슷한 나이였을 어느 날의 베른. 플란츠와는 일말의 연관도 없는 베른으로 잠시 돌아와 이곳을 찾았다.

그 생각이 맞아서일지 틀려서일지.

어쨌거나 플란츠가 베른을 불렀다.

"혹시 싫으면."

"됐어. 그게 싫었으면 팔찌를 끼고 왔을 리가."

기껏 불러놓고는 눈치부터 본다.

그 부름이 베른에게 여전한 상처일까봐.

그렇게나 똑똑한 놈이, 또 오답을 냈을까봐.

"맨날 동생이니 아우님이니 반말도 못하게 하면서. 이럴 때 써먹을라고 거울 보게 만들었나."

칼리안이었다면 그냥 '괜찮다' 하고 말았겠지만 이 시기의 베른은 그 정도로 둥글지 않았다. 생김이 달라지니 우스울 만큼 쉽게 그 때의 성격과 말버릇이 튀어나온다.

하기사.

'나는 괜찮으니 괘념치 말고 자네 하고 싶은 말 다 꺼내놓게.'

하고. 죽기 전 베른의 대외용 말버릇을 꺼내드는 건, 그림이 좀 많이 이상하긴 할 거다.

만약에 그랬으면 저 순한 완두콩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서서는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오죽했으면 옛 칼리안이 말버릇을 지적했을까.

"······ 거울."

"거울 보고 왔어. 기억한대로 참 잘 생겼던데."

더 짧아질 것 없다 여겼는데 플란츠의 말이 극도로 짧아졌다. 그런데 그걸 또 참 잘도 알아듣는다.

"이런 눈 본 적 있어? 이거 귀한 거야. 우리 형님 눈도 이런 색은 아니야."

"있어."

"누구."

"대사막 개."

"······ 무슨 개?"

"책에. 썰매 끄는 개."

"아니야."

"그렇던데."

"책 말고. 직접 봤어?"

"못 봤어."

"난 봤어."

"······ 자랑하는 건가."

"다르다는 거지. 걔들은 파란 눈이야. 내 거랑 달라. 아니, 애초에 사람새끼 눈을 개새끼 눈에 대는 게 정상이야? 이 눈이 어딜봐서 개 눈이야? 귀하디 귀한 사람 눈이지."

저게 사람새끼인가 개새끼인가.

고양이 말고 사람 말고 정말 개짖듯 짖는 놈을 잠깐 쳐다본 플란츠가 쪼그려 앉기를 포기하고 그냥 바닥에 앉았다. 속이 갈라졌든 곪은 게 터졌든 아무튼 다리는 저렸던 까닭이다.

그 모습에 씩 웃은 베른이 똑같이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언제."

"언제 봤냐고?"

끄덕.

"정확히는 몰라. 몇 년쯤 뒤에. 개 좋아하던 귀족 하나가 대사막에서 데려왔어. 그런데 세크리티아는 덥잖아. 그래서 마법사를 고용해 온 집을 대사막처럼 만들어둬야 했어. 그걸 보고 아리안느랑 내가 저 놈은 개를 키우는 건지 겨울을 키우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말을 했었지."

"······ 온실처럼."

아. 말실수했다.

후드 아래로 흘러내린, 하늘거리는 제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베른이 주먹을 꽉 쥐었다. 기껏 분위기를 바꾸려고 얘기를 했는데 온실을 떠올리게 해버리다니.

괜히 나서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라던 스승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어른이 되었어야 했나보다.

"어······ 비슷하지만 다르지. 개랑 꽃은 엄연히······."

아.

세렌티시여.

- 찰싹!

급하게 말을 멈추고 제 입을 찰싹찰싹 때리는 베른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뭔 생각을 했는지 다 보인다.

"아······ 무튼. 달라."

"그래."

이를테면 얀의 '속아드리는 거예요'와 같은 맥락의 답인 것이다. 다르다고 우기기 힘들어 보이니 그냥 그런 셈 쳐주겠다는, 뭐 그런 대답 말이다.

스스로에게 답답함을 느낀 베른이 주변에 보는 눈이 없음을 확인한 뒤 후드를 거뒀다.

아리안느의 머리끈을 그새 잃어버려서 에일라의 손수건으로 머리를 묶었었다. 그랬더니 헐겁게 묶인 머리가 어느새 풀려 후드 속에서 엉망이 되었다.

긴 머리를 풀었다 하나로 다시 모으기 시작하는 베른에게 플란츠의 질문이 들려왔다.

"머리는. 언제부터."

습관대로 입에 물고 있던 손수건을 얼른 뱉은 베른이 기억을 더듬다 답을 전했다.

"어릴 때부터. 자랄 때는 형님이랑 얼굴도 엄청 닮고 체격도 별로 다르질 않았어서. 내가 형님보다 더 어리긴 했어도 키는 늘 비슷했거든. 눈을 들여다보기 전에는 잘 티가 안났어. 린 후작이 나를 1왕자님이라 부르질 않나 멀리서 형님을 본 어머님이 당신 친아들을 베른이라 부르질 않나. 난리도 아니어서 내가 길렀어. 나중에는 얼굴도 좀 바뀌고 키도 내가 더 커지긴 했는데 계속 길렀지. 잘 어울리잖아. 잘생겨서."

자신감인지 자만심인지 이제 참 헷갈리는 놈의 마지막 말을 그냥 흘려들은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불편할텐데."

"불편했지. 처음에는 내 칼에 머리카락 잘려나간 때도 많았고 밖에서 기사들이랑 닭 잡아먹다가 태워먹은 적도 있었고 내 머리 내가 깔고 앉는 바람에 허리 숙이려다 목 부러질 뻔한 날도 있었고. 싸우다 머리끄덩이 잡힌 일도 있었고."

저 머리를 붙잡았다는 상대방의 손이, 혹은 목이 어떻게 됐을지는 굳이 안 물어본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정리를 마친 베른이 손을 내렸다. 그것을 따라 움직이던 연두색 눈동자가 손에 감긴 붕대에 가 닿았다. 붕대 속 상태를 물끄러미 가늠해보는 양을 눈치 챈 베른이 말했다.

"됐어. 이것도."

손이 커졌으면, 상처도 커질 수밖에.

한참동안 베른의 손을 보던 플란츠가 다시 아래를 봤다. 작고도 작은 꽃송이들을 봤다. 그리고 다시 또 한참이 지난 뒤 입을 열었다.

"······ 어려워서. 왔는데. 더 모르겠어."

"뭐가."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는 정답이 없다고······ 그랬는데. 정말 그런 건지."

"제이아 경 만나 얘기 잘 하고 나왔더니 여기가 텅텅 빈 게 보이고. 그래서 찾아왔더니 항상 향기가 나던 이 곳에 향기 없는 꽃이 피어있고. 그렇게 변한 것은 정답이 맞을지 정답이랄 게 없는 일이었는지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당신 때문에 생긴 상처 당신 때문에 벌어진 사람이 찾아오고. 그렇게 된 것도 정답이 없는 일이 맞는지, 아닌지. 다시 모르겠고."

끄덕.

무슨 말을 할까 잠시 고민하던 베른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무 말이나 꺼냈다.

"아버지 살아있었을 때. 에일라가 내가 하는 짓들을 눈치 챘었어. 피 냄새가 난다고,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느냐고 물어봤어."

말 한 마디에 지난 일들을 다 묻고 고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사람이란 애초부터 그럴 수 있는 놈들이 아니라서. 때로는 괜찮다가도 곧 다시 잠겨들고 마는 놈들이라서.

"고민했어. 얘기를 해 줄까. 말까. 아무에게도 말 못했던 일들을 털어내고 나도 조금 더 편해질까. 욕을 먹고 위로를 받고 그러면 어떨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말았어. 누구에게 얘기한들 달라질 것 없는데 그걸 알려서 뭐하나. 소용없는 일인데.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조금씩은 괜찮아져야 할 생이라서.

"나같은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었는데. 나한테 실망을 많이 했어, 에일라가. 그래서 세작이 되어 카이리스로 갔어. 그러다 아버지가 에일라를 텐실에 보냈는데. 카이리스보다 텐실이 더 위험했거든. 어차피 내 정혼자를 결정해야 될 때이기도 했고, 내 정혼자가 아리안느만큼 힘있는 가문 사람이면 안 되기도 했고. 그래서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어. 사실은 에일라가 내 정혼자라고. 돌려보내 달라고."

나도 너만큼 고민해봤다 알려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다는 쓸모없는 위로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랬더니 아버지는 제일 위험한 일에 에일라를 혼자 보냈어. 발각됐고, 에일라는 적당히 도망칠 줄을 모르는 놈이었고.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 숨이 멎었던 날에. 에일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같이 들었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것을 플란츠에게 풀어놨다.

"세상에 정답이 없나. 아닌 것 같지. 내가 에일라를 그렇게 만든 건 내 탓이 맞으니까. 내 선택이 잘못된 게 맞으니까."

플란츠의 고개가 다시 끄덕여진다.

그건 네 오답이 맞다는 소리다.

잠시 웃음을 터뜨린 베른이 입을 열었다.

"리리에 또래의 어린 아이를 숨겨 살려낼 방법을 강구하지 않고 칼을 들었던 것은 정답이었나.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두었던 것은 정답이었나. 그리하여 그 많은 이들을 대신 죽여 없앤 일들은 정답이었나. 옆 나라 국왕이 보내 온 짧은 편지를 무시한 것은, 정답이었나······ 아닌 것 같지."

"아닌 것 같은데."

"그치."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라리시움을 쓸어내린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나도. 틀린 적이 많았어서."

이제껏 겪어 온 수많은 오답을 떠올렸다.

정답이 없었다 여기기에는 오답이었음이 명확한 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베른의 손에 감긴 붕대를 떠올렸다.

"그래. 틀린 것 참 많지. 당신이나 나나."

쓸어내려도 아무런 향이 올라오지 않는 꽃을 보면서 베른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형님의 기사가 된 것은 정답이 맞았고. 내가 키리에를 꺼내와 검을 가르친 것도 정답이었고. 비록 형님에게는 거짓말을 남겨두고 왔지만, 마지막 그 순간까지 한 발자국도 안 물러서고 옆 나라 국왕을 막아선 일은 정답이 맞다 생각하는데. 내 마지막은 온전한 정답이었다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때."

"······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 내가 3층 창문으로 들어갔던 일이. 맞는 일이었을까."

"모르겠어?"

"모르겠어."

"사실은 당신 동생도 그 생각을 했어. 그래서 그 답을 직접 물어볼까. 당신 동생이 그렇게 마음을 먹고 찾아갔었는데. 실리케에게."

실리케에게.

당신 아들이 당신의 손을 놓고 당신 품으로 뛰어든 것이, 당신이 보기에 정답이 맞는지. 그것 말고도 참 많은 것들을 묻고 싶었는데. 그 날의 실리케는 제 손을 놓고 품으로 뛰어든 것이 누군가의 생이었음을 모르고 있어서. 결국 묻지 못했던.

그랬던 어느 날의 일을 생각하며 베른이 말을 이었다.

"결국 제 때 묻지를 못하고. 이곳에 르니에리를 심어 건네면서 물어봤는데. 그래도 답을 듣지 못해서. 당신 동생에게 있어 그 물음은 결국 정답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 됐어. 내 생각에, 플란츠. 당신도 아마 평생이 가도록 그 답을 찾지 못할 것 같은데."

"······ 맞아."

"정답이 없으면 오답도 없는 거니까. 당신 생이 전부 오답이었다고, 그렇게 여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해. 플란츠."

끄덕끄덕.

한참이 지나서야 움직이는 완두콩의 고개를 내려다보던 베른이 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이제껏 칼리안이 건네지 못하던 이야기 하나를 대신 꺼냈다.

"그 날의 실리케를 미리 막지 못한 일. 그래서 당신이 실리케와 마지막 말도 나누지 못하게 되었던 일. 결국 그 일이 평생의 의문으로 새겨진 일. 그것만은 분명한 오답이었다고. 당신 동생은 그렇게 생각하거든."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망을 하든 사과를 하든 당신에게 그런 기회가 있었어야 했다고. 당신 동생은 이제와 그런 후회를 하고 있거든."

"진심으로······ 후회를 하고 있거든."

애써 고개를 들어올리다가, 석양에 가득 물든 새빨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붉은 하늘에 물든 연두색 눈을 감았다.

눈이 부셔서.

고개를 숙였다.

눈이 부셔서. 정말 그냥, 눈이 부셔서.

툭.

툭툭.

향기 없는 꽃 위로, 석양 빛을 담아 붉게 물든 투명한 것들이 툭툭툭 떨어졌다.

베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 곁을 한참동안 그렇게 지키다가.

"······ 미안합니다."

위로일지 사과일지.

정답일지 아닐지 모를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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