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12화 (413/527)

제73장. 잠시만요, 형님(5)

손바닥에 들이부어진 묽은 약이 상처 속으로 스민다.

가만히 앉아 제 손을 지켜보는 붉은 눈에는 조금의 찡그림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을 본 베로니카가 칼리안을 대신해 눈꼬리를 찌푸리며 말했다.

"아픈 약이에요, 이거."

축복의 힘이 있는데 아무 약이나 써도 탈이 나지 않을지를 고민하고 있으려니 상관없다는 답이 전해졌다. 심각한 상처라면 차라리 그냥 두는 것이 낫지만 이 정도 상처는 무엇을 바르든 괜찮다고, 칼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마치 베로니카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안다는 듯이.

그래서 제일 센 약을 가져온 참이었다.

소드마스터라서 어지간한 약은 듣지 않을까봐 그랬다. 칼리안이 아무때나 어디서든 뜬금없이 다쳐오는 능력이 있는 사람임을 알아서 최대한 빨리 낫게 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게. 드미레아가 가져왔던 약보다 아프네."

"아프기는 하세요?"

"아프지. 아픈 약이라며."

"왕자님 얼굴만 봐서는 아픈 줄 모르겠어요. 물만 뿌려도 아플 텐데 말이에요."

지금껏 치료했던 사람들 중에 정말 독하다 생각했던 발칸의 웬 기사 한 명과 에일라도 인상은 찌푸리던데. 태연히 앉아 제 상처 벌어진 곳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모자라 그 속에 스미는 독한 약에도 일말의 반응이 없지 않나.

"우리 할아버지가 왕자님 지독하다더니, 진짜 그렇네요."

"스승님이 언제 나 지독하다고 그러셨어?"

"네. 많이요."

"딱 네 번 말한 것을 두고 많았다며 일러바치느냐."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앨런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지지않고 대꾸했다.

"네 번이면 많은 거지."

"네 번이면 적은 것이지."

"아니야. 많은 거야. 할아버지가 국왕 전하 답답하다고 한 게 열 번도 안 되는데. 그 전하를 두고 겨우 열 번도 안 되게 말했던 걸 생각하면 네 번은 엄청 많은 것 맞아."

"저런. 그 말은 어디 가서 하지 말거라. 그 날로 다같이 짐 싸들고 남쪽나라로 도망가야 할 터이니."

"어디 가서 안 해. 그런 말을 누구 앞에서 해."

"그······ 베로니카. 내가 그 국왕 전하 셋째 아들인데."

"왕자님은 할아버지 아들이니까 괜찮아요."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한 살 어린 조카딸의 말에 칼리안이 어색한 얼굴이 되어버린 사이, 예의 그 약이 다시 한 번 상처 위로 들이부어졌다.

이번에는 반대쪽 손이다. 플란츠의 칼을 두 손으로 잡았으니 양손에 사이좋게 상처가 났다.

여지없이 똑같은 반응이 이어진다.

어색한 기색이 머무르던 그 얼굴이 조금도 바뀌질 않는다. 손가락 하나 움찔거리질 않았다. 멀쩡한 살에 닿아도 화끈거리는 약이었으니 분명 상처 속이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질 텐데도.

"아프시다면서요."

"응. 아파."

"사람들은 아프면 아파해요."

"두거라. 아프다는 말이나마 꺼내기 시작하신지도 얼마 안 된 분이니."

베로니카를 말리는 척 타박하는 말에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불평같은 타박 속에 얼마나 많은 걱정이 들었는지 모를 리 없었으니까.

"아프면 아파하는 게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은 아니야, 베로니카."

칼리안이 이렇게 대답을 전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불덩이를 피부 밑에 비집어 넣은 것 같은 통증이 드는 오른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새로 생긴 상처 말고 다른 것을 봤다. 무딘 날이 억지로 파고들어 생겨난, 차라리 잘 벼려진 검이었다면 흉터까지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그런 상처자국을 봤다.

"아파도 아파하지 않는 게 당연한 사람들도. 있어."

숨을 쉬며 살고 있으면서도 숨을 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당연하다 해서 괜찮은 건 아니잖아요."

곧 붉은 빛을 띠는 부드러운 연고가 발렸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으나 축복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굳이 꿰매는 대신 연고만 발랐다. 마취제 안 통할 것 분명한 손에, 아픈데도 아픈 것을 모르는 사람 손에, 억지스레 바늘까지 드나들게 하기는 싫었던 까닭이다.

"저는 그게 안 당연한 사람이 있다는 걸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게 안 당연한 사람이 좀 더 괜찮아졌으면 좋겠어서 말하는 거예요."

살짝 웃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것을 이해해달라 한 것이 아니라 잠시 푸념을 했을 뿐이라는 말 대신 다른 대답을 전했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져야지. 괜찮아지려고 사는 거니까."

"괜찮아질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면, 안 괜찮은 법부터 배우세요."

베로니카가 손가락으로 칼리안의 상처를 가리켜보였다.

"이런 건, 안 괜찮아 해도 괜찮은 거예요. 말로만 아프다 하시지 말고요."

"그래. 배울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배워 알고 있어야 가르쳐 줄 수도 있을 테니까.

* * *

노을이 진다.

어느새 해가 다 기울고 복도 끝 창에서 붉은 노을빛이 비춰든다. 나뭇가지에 작은 새가 내려앉았다 다시 어디론가 날아가는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복도를 걸어갔다. 한 손에 하나씩, 베로니카에게 얻은 붕대를 든 채였다.

그렇게, 상처를 감싸는 대신 상처 감쌀 붕대만 받은 칼리안이 빌헬름 관의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반가운 얼굴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얀."

얀은 팔찌를 통해 전해진 칼리안의 부탁을 듣고 빌헬름 관에 찾아온 참이었다.

쫄랑쫄랑 다가온 얀이 칼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것이 썩 달가운 물건이 아님을 알고 쳐다보다 사색이 되어 입을 열었다.

"왕자님! 손은 또 왜 이래요!"

기사들의 훈련 소리가 잠시 멈췄다 다시 시작될 만큼 큰 소리로 걱정을 해 왔다.

"레릭이 어디 가지도 않고 저를 계속 졸졸졸 쫓아다녔어요. 여기 같이 오려는 걸 떼놓고 오느라 힘들었어요. 플란츠 저하 무슨 일 생겨서 왕자님도 다치셨어요? 붕대는 감지도 않고 왜 그러고 들고 다니세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왕자님 손이 또 이렇게 됐는데요?"

"그냥. 세뉴 관에서 일이 좀 있었어."

"아니,"

또 어떤 새끼냐고.

또 험한 말이 나올 차례임을 직감한 칼리안이 얼른 얀의 말을 잘랐다. 날이 갈수록 왕궁 안에서도 시로이안이 되는 때가 많아지는 내 시종 이렇게 만든 것도 전부 다 나임을 아는 탓에 혼내지도 못한 채로.

하기사.

안 울고 화만 내는 게 어디냐 싶다. 손바닥에 처음으로 상처가 났던 날에 체르밀 궁이 떠나가라 울어대던 새끼 코끼리가 아니던가.

그 때를 생각하다 피식 웃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내 손 말고 네 눈이 영영 안 돌아오는 건 아닐지를 더 걱정해야 할 것 같아, 얀."

잔뜩 성난 얼굴을 하면 뭐 하나.

퉁퉁 부었던 눈이 아직까지도 그대로인데.

"동글동글하던 내 새끼 코끼리 이제 부푼 보리빵같은 얼굴로 계속 지내야 하면 어떡하나."

"뭘 어떡해요. 왕자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까 왕자님이 계속 미안해 하시면서 데리고 사셔야죠."

"데리고 살기는 살 건데."

칼리안의 말이 잠시 멈췄다.

금세 시원하게 변한 칼리안의 손등이 얀의 눈을 잠깐 덮었다. 손에 쥔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손바닥에 난 상처 때문에 손바닥으로 덮지는 못했다.

"동글동글한 게 더 좋으니까 가서 이렇게 찜질이나 하고 있어. 걱정할 일 아니니까 괜한 걱정 말고."

"······ 진짜요."

"진짜."

"네. 알았어요."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것들 챙겨왔어요."

한결 누그러진 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와 함께 얀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앞으로 내밀었다. 한 손을 내려 그것을 받아 베스트 주머니에 살짝 꽂아넣은 칼리안이 다시 얀의 눈을 덮었다.

"또 나가실 거예요?"

"아직 몰라. 나가게 되면 얘기해줄게."

"꼭이요."

"꼭."

"알았어요."

"카스트린 경은, 만났어?"

"네. 만났어요."

"올 수 있대?"

"네. 그런데 오늘 저녁에 세크리티아의 린 영애가 왕궁 밖에서 세이렌 경을 만나기로 했대요. 그래서."

"······ 늦겠네. 많이."

"네. 호위를 해야 하니까 늦을 수 있다고,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래도 괜찮은지 여쭤봐 달라 했어요."

"괜찮아. 기다리면 돼."

날이 새기 전에는 올 테지.

에우리아 만난 아리안느가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지만 않는다면.

"······ 부럽다."

"네?"

"아니. 아니야. 아무 말도."

둘 사이에 같이 껴서 밤새도록 술이나 좀 퍼마시고 싶은 마음을 자신의 주량을 상기해가며 애써 눌러 둔 칼리안에게, 얀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아무튼 그럼 기다리신다고 전할게요. 그런데 설마 그 손으로 대련하시려는 건 아니죠?"

"으응. 아니야."

"왕자님 거짓말하시면 다 티나요."

"조금만. 상처 안 덧날 만큼만. 어차피 아파서 오랫동안 검 들고 있지도 못해."

"진짜요."

"진짜."

"네."

"그래."

"속아드리는 거예요."

"속아줬으면 걱정 말고 가. 카스트린 경에게 얘기만 전하고. 가서 눈 시원하게. 알았어?"

"네. 알아서 잘 쉬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눈 찜질을 핑계로, 칼리안 걱정하느라 서성대지 말고 쉬라는 말임을 아는 얀이 이렇게 대답했다.

"참, 왕자님."

그러더니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무언가를 꺼냈다. 조금 전 전해진 것보다 더 작은 주머니였다.

칼리안의 손에 눈이 가려진 채로 주섬주섬 주머니를 연 얀이 자신의 손바닥에 내용물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칼리안의 눈높이로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런 게 레이븐 목걸이 옆에 들어있던데요."

"어디에?"

"왕자님 장신구 진열함이요. 왕자님이 좋아하셨던 블랙 다이아랑 루비로 만든 커프스 있던 곳에요. 그런데 오늘 왕자님 다른 커프스 하고 가지 않으셨습니까? 원래 있던 커프스가 사라지고 처음 보는 게 들어있어서 메를린이 지금 왕자님 귀중품 보관 창고에 찾으러 갔어요. 혹시 그 커프스는 거기에 두시고 새 것으로 바꿔서 넣어두신 건가 하고요."

"······ 아."

얀의 말을 들으며 그 손에 올려진 것을 확인한 칼리안이 묘한 소리를 냈다. 미간을 찌푸린 얀이 물었다.

"혹시 커프스 잃어버리신 거예요?"

"아니야. 안 잃어버렸어."

"그럼 바꿔두신 게 맞아요?"

"창고에 둔 게 아니라. 형님 드렸어."

"그걸 왜요? 엄청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요."

"아니."

말을 멈춘 칼리안의 시선이 다시 내려갔다.

눈 앞에 내밀어진 것을 보다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다이아몬드로 테를 두르고 그 안에 자개 장식을 했다.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질 좋은 자개를 몇 겹씩 붙여 조각을 해 두고 그 한가운데에 다시 커다랗고 투명한 다이아몬드를 넣었다. 아주 정교하게 세공하여 만든 커프스였다.

장담할 수 있다.

"아······ 미치겠네."

저건 분명, 완두콩이 가진 것중에 제일 비싼 커프스일 거다.

멋대로 가져간 게 아니라 멋대로 바꿔갔다.

제 것을 놓고 내 것을 가져갔다. 다른 놈 손에 든 것 뺏는 취미 없는 분이라서. 바꾼다는 말의 범위를 제멋대로 확 늘려둔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빼앗은 게 아니라 교환해 간 거였다.

"이게 더 좋아서. 바꿨어, 내가."

얀의 오해를 얼른 풀어 준 칼리안이, 루비아 관에 가기 전에 체르밀 궁에 먼저 가서 메를린이 괜한 수고를 더 하지 않도록 하라고 전했다. 그 뒤 얀의 눈에서 손을 떼고 새로 생긴 커프스를 받아들며 말했다.

"찜질 끝."

이제 가 보라는 뜻이었다.

- 달칵.

그렇게 얀과 헤어진 뒤.

베로니카와 함께 있을 앨런의 빈 집무실에 들어선 칼리안이 얀이 전해 준 주머니를 열었다.

검은색 일색의 옷과 검은 로브가 들어 있었다. 빌헬름 관 안에서도 그렇고 이 밖을 나설 때에도 제대로 입지도 않은 차림으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으니까.

주섬주섬 새 옷으로 갈아입은 칼리안이 붕대를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것을 손에 감았다. 모르긴 해도 어지간해서는 베로니카가 해준 것보다 훨씬 나을 것 분명한 솜씨로.

- 기어코 그리 나설 요량이십니까.

칼리안이 자신의 집무실에 든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앨런이 이런 말을 보내왔다.

- 네. 그러려고요.

앨런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혀를 쯧쯧 차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잠깐 웃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 계속 저렇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 나서지 않는 게 제일 낫다 말씀을 드렸는데 또 그렇게 말을 안 들으십니까.

- 아버지 말씀 한참 안 들을 나이잖아요, 저도.

칼리안은 다 큰 어른이지만, 사춘기니까.

- 그것 참 대견하기도 하십니다.

- 아무래도 걱정이 되기도 하고. 들여다 봐야죠.

붕대 감긴 손을 재주 좋게 놀려 새 커프스를 채운 칼리안이 본래 입던 옷을 주머니에 다시 챙겨넣고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검은 로브를 걸치고 모자를 푹 눌러쓴 까닭이었다. 이 꼴을 하고 발칸 놈들의 눈에 띄었다가는 검이든 불화살이든 물세례든 아무튼 다 쏟아질 것이 뻔하지 않나.

- 쿡쿡 쑤시고 아리더라도 약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 ······ 알아서 해 보시지요. 새로 짓는 빌헬름 관에 가 계시니.

옛 헤이시아 궁의 터.

해가 기울기 시작한 때라 건물 짓는 이들도 모두 왕궁 밖으로 나갔을 테니 밤같은 적막이 들어섰을 곳.

- 네. 스승님.

이미 그 곳으로 발을 놀리고 있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앨런과의 대화를 마친 뒤 속도를 높였다.

* * *

아는 곳.

아는 건물과 아는 사람들이 지냈던 곳.

아는 꽃이 피고 아는 향기가 가득했던 곳.

그러나 이제는 모르는 나무, 모르는 풀만 눈에 보이는 곳.

새삼 낯설다 여겨지는 곳을 저도 모르게 찾아온 이가 조용히 발을 옮겼다. 아직 어둠이 내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 조용함 때문에 한밤보다 어둡게 여겨지는 그런 곳을 묵묵히 걸었다. 모르는 나무를 지나치고 모르는 풀을 스쳐 지나가고 시스파니안의 공동 옆을 비켜가면서.

- 타박.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끝도 없이 계속 움직일 것만 같던 발이 가만히 멈췄다.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바닥도 내려다보았으나 한 곳에 머무르지 않던 시선도 함께 멈췄다. 그 눈초리가 가만히 아래로 내려갔다. 발에 밟힐 뻔했던 작고 하얀 것에 머물렀다.

- ······ 사락.

허리를 숙였다.

불편한 것도 잊은 채 계속 두르고 있던 붉은 망토가 바닥에 닿았다. 그러나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은 의식하지 못했다 해야 맞을 일이다. 하루종일 그것으로 등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어찌됐건 망토가 흙바닥에 닿는 것도 잊은 채 허리를 숙이고 뒤이어 무릎까지 구부린 이의 손이 움직였다. 발을 멈추게 한 그 작고 하얀 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에도 피어 있습니까. 빌헬름 관 뒤에서 에일라가 구경하던 것을 봤었는데요."

모르는 것 투성이가 되어버린 곳에서 아는 것을 보아 손을 내밀고 있으려니,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 발 소리."

대답도 아니고 설명도 아닌 말.

그런 말이 지금 막 찾아와 말을 걸었던 칼리안을 향했다.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어떡하나. 앨런에게 자신있게 약 주고 오겠다 했던 말과는 달리 내심 걱정하던 칼리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급하게 오다 까먹었습니다. 발 소리 내는 거."

"왜."

"걱정되니까요."

"누가."

"제가 걱정할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딸기잼을 얹은 양파같이 참 안 어울리는 모양새로 쪼그려 앉아있는 완두콩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형님 걱정해서 온 겁니다."

그리고 그 완두콩과 똑같은 모습으로 쪼그려 앉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잠시 칼리안을 쳐다봤던 플란츠가 고개를 되돌렸다. 저를 걱정해서 찾아왔다는 말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것인지. 혹시라도 똑똑한 머리로 대답을 건넬 말조차 고민을 할까 싶었던 칼리안이 다른 얘기를 먼저 꺼냈다.

"제이아 경 방에 잠시 계시라 했더니 그 새를 못 기다리고 나가셨습니까."

"······ 어쩌다보니."

"네."

짧게 답하는 플란츠의 눈을 따라 칼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을지 모를 그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히나 로브에 있는 꽃이네요. 우리 히나가 좋아하는 것 같던데."

플란츠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리시움."

그리고 칼리안이 모르던 꽃 이름을 알려줬다.

안네루시아랑 시나스타랑 장미랑 르니에리 말고 꽃 이름이라고는 하나도 모를 것 같던 형님 네 놈이 어떻게 나도 모르는 이런 들꽃 이름을 아느냐고. 하필 히나 로브에 새겨진 꽃이랑 똑같이 생긴 꽃을 어디서 어떻게 누구한테 어쩌다 왜 들었는지 상세히 설명하라고.

언젠가 꼭 물어봐야 되겠다 싶은 질문 하나를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 둔 칼리안이 대답했다.

"······ 그렇습니까."

"향기가 없다고. 하던데."

"신기하네요. 낯설기도 하고."

"좋았는데. 나는."

"그러셨습니까."

"모르다 알게 된 것이 나쁜 일이 아니었던 적이 별로 없었어서."

몰라서 행동한 것의 결과는 늘 나빴고, 모르고 고른 선택지는 늘 나쁜 답이었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소식은 늘 나쁜 일이었다. 모르던 것을 새로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나쁘지 않았던 적이 많지 않았다.

"······ 슈린츠에. 가시죠. 같이."

"갈 필요 없잖아. 이제."

"놀러가는데 이유 필요합니까."

"란델 형님은."

"같이요."

"싫어."

"형님이 란델 형님이랑 싸움 나면 제가 형님 편 들어드릴게요."

플란츠가 입을 다물고 라리시움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말이 이어져 들렸다.

"바다 말고, 바위 산 말고. 나무도 많고 물도 많고. 형님 못 보셨던 것 많이 있습니다. 알려드릴게요. 뭐가 더 있는지. 새로 알아도 안 나쁜 것들."

그렇게 전해지는 목소리.

알고 있지만 낯선 칼리안의 낮은 목소리를 한참 듣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 베른."

앨런이 다 고쳐 건네 준 팔찌를 다시 차고. 얀의 옷을 입고, 더 커진 손에 난 상처를 붕대로 감고, 긴 청은발을 올려 묶고, 플란츠가 놓고 간 커프스를 하고.

그런 모습으로 플란츠를 찾아온 이가 연보랏빛 눈을 돌렸다.

"그렇게 막 부르라고 알려 준 이름 아닌데. 나는."

그리고 이렇게 툴툴대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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