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11화 (412/527)

제73장. 잠시만요, 형님(4)

내버리고 나서도 얼마든지 다시 주워들 수 있는 것.

무엇을 포기하고 대신 내어주든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것.

그것을 따져봤다.

지금 당장 라시드의 숨을 비트는 것.

지금 당장 플란츠의 숨을 틔우는 것.

어떤 것을 놓치는 게 더 아까운지. 답을 낼 필요도 없는 문제였으나 굳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 이 순간 무엇이 더 아까운지. 무엇이 더 급한지.

분명 이쯤이면 칼리안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만 짖어라 물지 말아라 말리고 들었어야 할 놈의 침묵이 짖고 물어도 괜찮다는 허락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허락이 아니라, 채 말리지도 못할 상태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서.

'무엇이 헤르츠 경의 첫인사가 됐을까.'

말이었을까. 그렇다면 누구의 어떤 말일까. 혹은 행동이었을까, 표정이었을까. 또 다른 향기였을까. 그런 의문을 풀어내지 않으려 저울을 가져다 댔다. 계산을 하고 더 기우는 쪽을 가늠하기만 했다. 지금 당장 더 중요한 것이 어느 쪽인지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다. 저절로 돌아가려는 머리를 막아가며 그렇게 지금 해야 할 일을 정했다.

- 뱀을 뱀이 잡나. 뱀은 쥐나 잡지.

사냥하지 않고, 함께 뒤엉키다 죽게 될까봐.

라시드의 무엇이 베른에게 와닿은 아르센의 첫인사처럼 플란츠의 숨통을 죄여놨는지 그것을 알게 되면, 이곳이 어디이고 어떤 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며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전부 다 까먹어 버릴까봐. 향기로운 독으로 온 몸을 치장한 저 뱀과 똑같은 것으로 되돌아가 달려들까봐. 함께 죽게 될까봐.

그것이 이 순간 라시드가 가장 원하는 일이며 이 순간 플란츠가 가장 원하지 않을 일이며 이 순간 자신이 절대로 선택하지 말아야 할 길임을 알아서.

"짐승이나 막으려 쳐 둔 울타리라서. 뱀이 들었던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가."

참았다.

"하여······ 이제 내가 뒤늦게나마 그 울타리를 좀 고쳐두어야 할 듯 한데."

기어이 참았다.

"아. 두 분의 시간을 너무 오래 빼앗았나 봅니다. 말씀드린대로 저 역시 왕궁에 다른 일이 있던 터라. 허락해 주신다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 그래요."

"네, 왕자님. 차후에 다시 뵙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 역시. 브리센 남작."

기어코 기어이 참았다.

"즐거운 대화, 나누기를 바랍니다. 란델 형님과."

라시드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란델을 만나러 왔다 이야기한 적 없었으니까.

상대의 속내를 읽고 행보를 예견할 줄 아는 이가 비단 라시드 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아직 고개를 치켜들지는 말라는 조언임을, 가장 경계하고 날을 세워가며 대해야 할 사람은 플란츠도 란델도 아닌 칼리안 자신이라는 사실을 새겨두라는 경고임을 알아들었다.

"······ 감사합니다."

라시드가 유려한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잊지 않고 예를 보였다. 뒤로 돌아 발을 옮겼다. 멀어져갔다.

지켜봤다.

칼리안은 참았다.

그런데.

- 팔락······!

붉은 망토가 눈에 보였다.

검은 구두가 눈에 보였다.

마력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거리낄 것 없는 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것이, 늘 참으라 말리던 이가 더 인내하지 못한 것이, 칼리안을 지나쳐 멀어져가는 이를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이 보였다.

"형님."

그 손.

새파랗게 질린 손.

손에 들린, 새파랗게 질린 그 손에 들린.

"······ 잠시만요, 형님."

얼음을 벼려 만든 비수가 보였다.

- 콰악!

칼리안이 팔을 뻗었다. 플란츠를 잡아챘다. 손에 들린 것을 잡아챘다. 귀족들의 눈에 그것이 보이기 전에, 망토에 가려진 손이 바람결에 드러나기 전에, 플란츠를 붙들었다.

그 손에 들린 칼날을 제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도록, 감추듯 움켜쥐었다.

플란츠가 라시드에게 정말로 칼을 겨눌 생각이 아니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칼이 라시드가 아니라 제게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빼들었음을 알았다.

"형님."

짙고도 깊은, 향수.

아무리 먼 곳까지 벗어났다 한들 벗어나지 못할. 결국은 이렇듯 한 순간에 되돌아가는. 증오하듯 그리워하다 결국은 빠져 죽고 마는.

그 향수에 잠겨 되살아난 오지랖 넓은 죄책감.

그것을 이기지 못해 꺼내 든 칼임을 알았다.

그래서 붙들었다. 가로막고 섰다.

"······ 형님."

플란츠가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마력을 움직였다. 라시드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못할 약하디 약한 얼음의 날. 오러를 두를 생각도 잊은 채 붙들어 잡은 그 날을 타고 흐르는 것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클린을 썼다. 계속하여, 계속하여.

"형님."

그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하여서, 아무리 불러도 듣지 않는 듯 보여서, 무엇을 해도 발을 막아서지 못할 것 같아서.

- 사아악!

사일런트 막을 펼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플란츠."

불렀다.

"······ 당신 동생이. 부르잖아."

알렸다.

연두색 눈이 비로소 제 동생을 본다. 성문 앞에서 마주했던 것과 꼭 닮아버린 눈을 채 되돌리지도 못하고 칼리안을 봤다.

긴 한숨을 쉰 칼리안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괜찮아."

손으로 전했던 말을 입으로 다시 전했다.

달랬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 * *

- 보는 눈 좀 물려주세요.

- 그리하지요.

한 마디면 되었다.

왕세자의 정복을 딴 옷을 잘 빼입고 세뉴관을 찾아갔던 칼리안에게서 라시드의 기운이 멀어지는 것을, 물을 다루는 플란츠가 얼음을 모으는 것을, 칼리안의 마력이 움직이는 것을, 다름아닌 '클린'을 끝도 없이 사용하는 것을, 앨런이 알았다. 그것이 지극히 비정상적인 일임을 직감했다.

그랬으니 그 이상의 말이 필요할 리 없었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앨런이 둘의 곁에 모습을 드러냈다. 빌헬름 관의 집무실에서 세뉴관으로 곧바로 찾아 온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게 되었다. 대뜸 플란츠를 데리고 어딘가로 움직일 상황은 못 된다는 것을 눈치챘다.

"저하. 전하께 연락이 왔습니다. 저하를 찾으시어 이리 갑작스레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칼리안이 이미 정복을 벗고 있고 칼리안이 두르던 망토가 플란츠의 어깨에 올려져 있었으니 플란츠 덕분에 마뜩찮았던 칼리안의 계획이 무산되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눈치 좋은 핑계를 꺼내들며 둘을 가리고 섰다.

"그러고 보니 다들 오랜만인 것 같네."

앨런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귀족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르메인이 돌아오면 회의를 다시 열 테니 우선 돌아가도록 이야기하고, 회의장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온 레릭을 체르밀로 먼저 보냈다. 이미 자리를 뜬 라시드가 상황을 봤을지 보지 못했을지. 그것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렇게 주변을 다 비워낸 앨런이 다시 돌아섰다.

- 사아······.

플란츠의 손에 들린 짧은 비수의 손잡이가 사라진다.

칼리안의 살 속을 파고들었던 차가운 날이 사라진다.

틈을 막던 날붙이가 치워지자 맺혀있던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마저도 클린으로 지워낸 칼리안과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플란츠를 본 앨런이 잠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우선 자리를 옮기시지요."

속을 다친 것이 아니었으니 마법으로 몸을 옮겨도 문제 될 것이 없어 한 말이었다.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플란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것을 멋대로 허락으로 들은 대마법사가 둘을 감싸안았다.

빛이 일고, 시야가 바뀐다.

* * *

봄날의 오후.

긴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바닥에 작은 문을 낸다.

그곳을 밟으면 다른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심스럽게 한 발을 올려보던 기억이 난다. 다만 그렇게 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창 그림자 뿐. 바닥을 비추던 햇살만 발 위로 훌쩍 올라설 따름이라. 괜스런 실망 속에 앞세운 발을 다시 되돌리던 날이 있었더랬다.

치료실 바닥에 생겨난, 조금 비뚤어지고 격자가 있는 네모난 창 그림자. 햇빛으로 만든 문처럼 보이는 그것을 건너다보던 이가 고개를 되돌렸다. 침대 위에 놓아 둔 조그만 간이 테이블에 올려진 종이에 써내려가던 글씨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낮은 한숨을 쉬었다.

- 똑똑똑.

마치 그 한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한 노크 소리가 울린다.

"네. 들어오십시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대답을 한 니들렌이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종이를 치우고 나서 대답을 할 걸, 하고. 뒤늦은 후회를 재빨리 미뤄두고는 서둘러 테이블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달칵.

그러나 들어오기를 허락받은 누군가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잉크병을 닫고 협탁 위에 펜을 놓고 펼쳐진 종이에 손을 뻗을 즈음, 치료실을 찾은 손님은 이미 문을 열고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문으로 고개를 돌린 니들렌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팔락······.

그 바람에 이제껏 적어내려가던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군단장님, 부군단장님, 왕자님!"

대체 왜 여길 왔는지 알 수 없는 세 명의 손님이 하나같이 참 대단한 이들이었으니까.

"그냥 있게. 그 다리로 일어나 서라고 할 사람 여기 아무도 없으니."

"네, 네."

왕세자와 왕자를 대신해 인사를 거절한 후작이 잠시 병실을 둘러봤다.

"치료실 빈 곳이 여기 뿐이던데. 맞나?"

"헤르츠 부군단장의 치료실도······."

"거기에는 다른 손이 들었으니."

"아, 네. 그럼 맞습니다. 저도 다른 대원과 같이 있었는데 치료 끝나서 복귀했고 곧 또 다른 대원이 여기 올 것 같습니다."

"아. 다른 데 안 다치고 목만 밟혔다는."

"맞습니다, 군단장님."

"그럼 잠시만 저하와 같이 있게. 나는 왕자님 데려가 손 좀 고쳐놓고 다시 올 터이니."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부드러운 웃음을 지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니들렌의 침대 옆 의자에 플란츠를 앉혔다. 여전히 한 마디의 말도 없는 플란츠를 그렇게 덜렁 남겨두고는 칼리안을 데리고 도로 나갔다.

- 스승님.

-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모르겠으나 브리센 남작이 제대로 일을 쳐 둔 모양입니다.

- 네. 맞습니다.

- 일단 따라오시지요. 그러다 흉 지면 새끼 코끼리가 또 난리를 부릴 것 아닙니까.

- 아뇨. 그게 아니라. 형님은 체르밀 궁이나 집무실에 모셔두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렇습니다.

- 왕자님 손 갈라진 것이나 신경쓰십시오. 저하 속이 갈라진 것은 잠시 저렇게 두시는 게 낫습니다.

- 그래야 합니까?

- 싫으십니까?

- 아닙니다. 싫은 것이 아니라 제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 그렇습니다.

- 그럼 그냥 두시지요. 왕자님이 검은 머리에 빨간 눈을 한 채로 저하 앞에 계속 있어 보아야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을 터이니.

- ······ 네.

- 말릴 것을 그랬습니다. 그리 차려 입으실 때 어쩐지 사달을 낼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쓸데없는 생각 말고 다 낫고 나면 저한테 한 소리 들을 생각이나 하십시오. 두 분 다.

- 네······.

물론 칼리안이 얌전히 끌려나간 것은 아니었으나 니들렌이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 달칵.

곧 문이 닫히고 갑작스레 찾아들었던 셋 중 둘이 사라졌다.

딱 그 만큼의 숨막히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영문 모를 니들렌이 자리에 앉은 채 안절부절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 부군단장님."

그러니까 이 망할 완두콩이 라시드랑 뭔 일이 있었는지 그것만 얘기를 해줬으면 이런 일은 안 벌어졌을 것 아니냐고. 이제 이 사태를 어쩔 거냐고. 좀만 더 있으면 귀족들이 죄다 이 꼴을 볼 텐데 그건 어떻게 수습할 거냐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르니에리에 잔뜩 잠긴 꼬락서니에 멀쩡한 컵까지 깨 가며 기억을 쫓아내고 더 묻지도 않은 것이 바로 나였음을 깨닫는 바람에 다른 말을 못 했던 칼리안.

때문에 칼날만 붙들어 잡고 플란츠의 이름만 그렇게나 불러댔던 칼리안 덕에,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알아들을 딱 그만큼은 돌아온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느냐 묻기에는 너무 명확하게 무슨 일이 있는 얼굴이라 오히려 묻지 못하게 된 니들렌이 손을 뻗었다. 그 뒤 협탁 아래칸에 놓여있던 종이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어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동생이 보내왔습니다. 맛이 좋은데, 드셔보세요."

니들렌의 쌍둥이 동생 스칼렛이 만든 쿠키.

이번에는 아픈 누나 빨리 나으라며 만들었으니 여전히 맛있을 것 분명한 쿠키를 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다시 제 발치를 내려다봤다.

구두 끝이 유난히 반짝인다.

플란츠의 발 끝에 햇살이 든 까닭이다.

그 모습을 우두커니 보던 연두색의 시선이 햇살을 따라 움직였다. 바닥에 놓인 격자무늬 그림자로, 창문에 놓인 화분의 그림자로, 그렇게 움직이던 시선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얇은 종이 하나에 가 닿았다.

플란츠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그것을 보았다. 햇살 아래 새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 사락······.

손을 뻗었다.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손 끝으로 바닥을 스치며 종이를 집어들었다.

치우려던 종이가 떨어진 것을 그제야 눈치 챈 니들렌이 서둘러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왕족의 손에 들린 것을 차마 뺏지 못하고 다시 거두었다. 대신 그것을 설명하고자 입을 열었다.

"아, 그건."

"······ 왜."

그 입이 열린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역시 알 리 없을 니들렌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 과묵한 왕세자 앞에 꺼내 놓을 이야기 하나가 있음을 깨닫고 말을 시작했다.

"부군단장님께서도 아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대원들은 칼리안 왕자님 칼에 맞고 손에 맞았는데, 저는 왕자님께 말로도 맞았습니다."

- 싸움 중인 것도 잊어버릴 만큼 걱정할 거면서. 제 아랫사람 안 챙기고 왕족을 구하고. 그래놓고는 다른 놈들 다 쓰러질 때까지 지휘하는 것도 잊고 여기로 달려오고. 그러면 어떡해.

일개 대원을 앞에 두고도 웬만해서는 경어를 쓰던 칼리안이 말을 내렸다.

- 사단장 씩이나 되는 새끼가.

거기에 더해 보다 심한 말도 했다.

"욕도 듣고 혼도 났습니다."

플란츠가 종이에서 눈을 돌려 니들렌을 쳐다봤다.

그 눈을 보며 아무래도 걱정이 되니 무슨 일인지 알려달라 하는 대신, 니들렌이 계속 말을 이었다.

위험에 노출된 기사를 안 챙긴 일. 분명 '적'이었던 칼리안이 왕족이라는 이유로 먼저 구하려 들었던 일을 말했다. 약을 전해주러 왔다가 그 종이를 들여다보며 이걸 왜 적느냐 물었던 베로니카에게만 살짝 털어 둔 이야기를 플란츠에게도 전했다.

"그런데 칼리안 왕자님께서 해준 그 말씀 듣고 생각이 너무 복잡해져서요. 빈 종이가 있는 걸 봤는데 이러다 거기에 사직서 쓰겠다 싶어서, 사직서 안 쓰려고 같은 방 쓰던 마법사 별명을 낙서처럼 그냥 적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복귀했습니다만 그 때까지는 있었거든요. 덧셈 틀리는 회색 머리 마법사요."

칼리안의 칼 말고 발에 밟혀 일찌감치 다 나은 마법사.

마법 계산은 잘 하는데 보고서를 올릴 때마다 셈이 틀려서 플란츠가 그렇게 불렀었다. 회색 머리 마법사 중에 덧셈 틀리는 마법사라고.

"아무튼 그래서 처음에는 그렇게 별 생각 없이 적어봤는데······ 그 다음 놈이 떠오르고 또 그 다음 놈이 생각나고 그래서 쭉 쓰게 되었습니다."

오렌지 머리 마법사, 케인 테스만. 같은 머리 색 마법사가 아무도 없어서 아직 다른 별명을 못 얻은 마법사.

우유 못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 연보랏빛이 섞인 분홍 머리의 니들렌과 달리 진짜 분홍색 머리를 가진, 우유만 먹으면 배앓이를 하는 마법사.

플란츠가 남모르게 반가워했던, 피망 싫어하는 갈색 머리 마법사. 긴장하면 하품하는 갈색 머리 기사. 안네가 무서워하는 노란 머리 마법사. 휘파람 잘 부는 갈색 머리 마법사. 홍차 마시면 못 자는 빨간 머리 기사.

"그런데 그렇게 적고 있으려니 누가 누군지, 말버릇은 어떤지, 뭘 잘 먹고 뭘 못 먹는지, 뭘 잘하는지. 그런 것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냥 제 밑에 있는 마법사들이나 기사들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하나씩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스칼렛 말고 또 있는 걸 알았으면서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니들렌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이런 말이나마 위로가 될까. 그런 생각에.

"사실 부군단장님께서 저희를 왜 그렇게 부르시는지 잘 몰랐었는데, 적다 보니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제가 이제 안 것을 이미 알아서 그러셨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이름이 지워진 칼리안 때문에, 베른 때문에, 누군가를 이름으로만 기억해두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다. 칼리안이 혹시 또 잊혀져도 하나도 안 빠뜨리고 다 기억해놓으려 하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니들렌이 생각한 이유가 아니었다.

"물론 저와 다른 이유일 지도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여기기로, 제 멋대로 생각을 했습니다. 정답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세상에 정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멋대로 생각하고 뿌듯해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니들렌이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눈으로 살살 쓰다듬듯 그 종이를 바라봤다.

"어쨌든 다 나아서 나가기 전까지 제가 챙겨야 할 놈들 별명 전부 다 기억해내서 적어보려고 하는 중입니다. 다 적으면, 부군단장님께 다시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 나한테. 왜."

"부군단장님 덕에 배웠으니까요. 이번 일 반성하면서 반성문처럼 써서 보여드리겠습니다."

플란츠가 다시 바닥을 봤다.

햇살에 예쁘게 새겨진 그 모습을 봤다.

창문에 놓인 화분의 그림자로, 바닥에 놓인 격자무늬 그림자로, 검은 구두 끝으로. 그렇게 움직이던 시선이 손으로 올라갔다. 손에 들린 종이로, 그 안에 적힌 이름들을 눈에 담았다.

어쩌면 니들렌이 받아들인 이유가 더 맞았을지도 모를. 하지만 정답은 이미 불필요한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부군단장님 제가 그 향수 드리는 대신 실수한 것 한 번 눈감아 주기로 하셨던 일 기억하시죠. 헤르츠 부군단장님께는 이미 말씀드리고 용서받았으니, 부군단장님께서도 이번 일 조금만 혼내고 넘어가 주십시오.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습니다."

바닥을 비추던 햇살이 어느새 조금 기울어졌다.

그것을 밟고 나서도 다른 세상이 펼쳐지지 않는 것에 더는 실망하지 않을, 지금 사는 곳을 벗어나지 않음에 오히려 안심할, 어느새 그만큼이나 아까워진 지금.

"쫓아내시면 안 됩니다. 저 발칸이 너무 좋습니다, 부군단장님."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머리 마법사가 싱긋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