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장. 잠시만요, 형님(3)
봄이었다.
새의 깃털을 멀리 흩뿌린 듯한 하늘. 살살 뭉쳐들면 하늘색 설탕과자가 만들어질 것만 같던 단 공기. 소매 끝을 간질이는 바람에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지 않을까 여겨지는 그런 봄이었다.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벅차는 봄이었다.
온실의 밖은, 그런 봄날이었다.
온실의 바깥 세상만 그렇게나 봄날이었다.
온실 안에는 온데간데 없을 봄이 온 사방을 꽃빛으로 물들이던 날이었다. 머무르던 봄을 전부 다 온실 밖으로 내보낸 것일까 싶을 만큼 온실 안의 세상은 그저 혹독했다. 오로지 그곳만은 봄이 아니었다. 짙은 꽃 향이 가득했으나 영원토록 봄이 아니었다.
- 또각, 또각.
가볍지 않은 구두 소리. 그렇다 하여 무겁고 둔하지도 않은 구두 소리. 결코 느리지 않지만 경박하도록 빠르지도 않은 구두 소리. 걸음걸이만으로 사람을 위축시키는,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그런 소리가 유난한 봄 속을 거닐었다.
"그래. 정말 좋은 방법이구나, 플란츠."
가는 풀잎이 잔잔한 바람에 휘어드는 모습도, 노래하던 작은 새가 날개 끝을 오므리는 모습도, 꽃잎에 맺힌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모습도. 둥글고 어여쁜 것들을 전부 다 그려보아도 그보다 더 고울 수 없을 미소가 떠올랐다.
더없이 기쁘다는 듯이.
혹은 더할 바 없이 언짢다는 듯이.
"하지만, 플란츠. 내 아가."
진주 가루를 개어 만든 듯한 가늘고 긴 손가락 끝이, 자신을 빼어 닮은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스쳐 지나가듯 쓰다듬었다.
어린 생명에게 애정을 나누어주는 행위라 하기에는 조금 다른. 완벽한 이의 손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조각에 진심어린 감탄을 보내듯이.
"그것은 정답이 아니란다."
그 손길에 목을 움츠린 아이가 대답 대신 숨을 죽였다.
손을 거둔 이가 살며시 허리를 숙였다. 아이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속삭이듯 터져나오는 아름다운 음색이 온실 안을 물들였다.
"한 번 더, 생각해보겠니?"
"······ 모르겠어요."
"그것도 정답이 아니구나."
"어머니······."
보드라운 손길, 다정한 목소리.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이의.
"그것도. 틀렸단다."
얼어붙은 눈.
"다시 생각해보렴."
돌아가겠노라고.
잘못된 곳에 찾아온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겠노라고.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 주먹을 움켜쥔 손을 드레스 자락 속에 숨긴 채 그리 말했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허리를 낮춰 아이의 눈을 마주보면서, 그렇게 오로지 제 아이만을 바라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저, 네 앞에 엎드린 이들의 등을 내려다볼 때뿐이란다. 그러니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네가 고개숙인 모습은 볼 수 없을 것이란다. 세상의 그 누구도 너로 하여금 고개를 수그리고 바닥을 바라보도록 만들지 못할 것이란다."
그렇게 만든 네 세상을 나에게 건넬 때까지. 플란츠.
마지막 말은 작고도 작아서.
그 작은 말을 홀로 들은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저와 똑같은 빛의 연두색 눈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아이의 예만······ 받을게요."
그리고 다시 생각해 낸 답을 전했다.
"저 아이가 왕실의 예법을 알고 있으리라 믿는 것이니?"
"······ 네."
"그렇다면 예법을 가르쳐 줄 손길은 필요치 않겠구나."
그것이 정답이었을지.
아니면 오답이었을지.
알려주지 않은 이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저 아이 홀로 예를 올리게 하자꾸나. 네가 원하는 대로, 플란츠. 저 아이가 네게 흠 없는 인사를 올리게 될 때까지, 몇 번이고······ 기다려주도록 하자꾸나."
향기로운 말이 이어졌다.
"어서, 내 아가. 그리 하라 말을 해 주어야지. 네가 결정한 일이잖니."
그런 봄이었다.
그다지도 혹독한 봄날이었음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봄을 버텼던 두 아이 모두.
* * *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볼 때마다 처음 뵙겠다 인사를 해대는 통에 '너랑 내가 그렇게나 비밀스러운 관계인 줄로 착각할 뻔했다'는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플란츠는 다른 말없이 그냥 서있었다. 칼리안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지금 막 인사를 건네 온 라시드에게 시선을 두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정말 놀랍게도, 새까만 꼬리를 수직으로 내려뜨린 듯한 동생 놈을 향해 오늘은 짖거나 물면 안 된다는 주의를 주지도 않았다.
"나서지 마세요. 뒤에 계십시오. 여기 어딘지 안 까먹을 테니까."
사일런트를 거두기 직전.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플란츠 왕세자 저하, 그리고 칼리안 왕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만나뵙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칼리안이 사일런트 막을 치워내는 그 사이, 나에랑샤 거리의 옥상에서 건네진 것과 다르지 않은 인사가 들려왔다. 한 발을 내 플란츠의 앞으로 와서 선 칼리안이 라시드를 쳐다보다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앞에 선 놈이 처음 만난 놈인지 아닌지를 기억해 내 보려는 것처럼.
"네. 반갑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정말 처음 봤다는 듯한 반가움을 띠며 흠잡을 곳 없는 라시드의 예를 받았다.
칼리안의 뒤에 세워진 플란츠를 훑듯이 바라본 라시드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왕세자의 감청색 정복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붉은 망토를, 그 망토의 본래 짝이었으리라 의심할 여지 없을 칼리안의 붉은 셔츠를 한 번씩 살핀 뒤였다.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보다 근사한 모습을 뵐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퍽 흥미로운 모습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역시 아쉽게 되었습니다, 남작."
"이런,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관객이 한 명 쯤 더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내가 잠시 했으니."
"차후에는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겠습니다, 왕자님. 안 그래도 두 분의 사이좋은 대화조차 듣지 못한 듯 하여 그것에도 아쉬움이 큰 사람이니 말입니다."
방금 전, 대화를 나누는 것은 보였으나 소리가 전해지지 않았던 일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화를 나누던 둘의 낯빛을 보았음을 알려주는 말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사일런트를 펼쳤음을 알고 있다는 어설픈 자랑도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보았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으나 칼리안이 눈치채지 못한 일을 상기하라는 소리였다. 경고였다.
"사사로운 대화를 놓친 것에 아쉬움을 느낄 만큼 우리에게 관심을 두었습니까."
"당연한 말씀을 건네십니까. 이 땅의 누구인들 감히 두 분께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과분한 말입니다. 그리 아껴주신다 하니."
"아무쪼록 기꺼이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꿀과 독이 함께 든 말이 오고갔다.
뻔뻔하리만치 평화로운 대화를 빠짐없이 귀에 새겨두며 하나하나 잘 배우고 있는 완두콩이 뒤에 선 것을 잊었는지 아닌지.
세뉴 관에서 나와 어느새 꽤 많이 다가온 귀족들을 쳐다본 칼리안이 라시드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래도 다행한 일 아닙니까."
"무엇이 다행이라 여기십니까?"
"이곳에서 우리가 대화하는 모습, 그나마를 보았다 하니. 남작은 아쉽다 하나 내 아쉬움은 좀 덜어낼 수 있겠습니다."
타인의 앞에서 제 옷을 가볍게 만드는 일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희멀건 놈의 작태에 기함한 칼리안이 그 완두콩 붙들어 잡고 도로 돌돌돌 싸매던 것은 보지 못했어도, 달래는듯 싸우는듯 다시 화해하던 사이좋은 모습이나마 보았다 하니 덜 아쉽다는 말.
그리고, 결코 시시하지 않을 무력을 지닌 듯 보이니 라시드를 상대함에 있어 아쉬움이 좀 덜어진다는 말.
그 모두를 잘 알아들은 라시드가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왕자님께서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아쉽지 않다 여겨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남작."
칼리안이 웃음을 보였다.
봄기운이 물씬 피어오르는 기분이 절로 든다.
귀족들이 조금 더 가까이 왔다. 세뉴 관 밖으로 나서는 길이 하나 뿐이니 멈추거나 돌아갈 바 없이 지나쳐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가는 말은 듣지 못하겠으나 칼리안과 마주 선 이의 얼굴을 알아봤을 만큼은 다가온 귀족들을 일별한 라시드가 말했다.
"제가 궁금한 것을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언제는 네가 허락받고 물었느냐는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다른 일로 왕궁을 찾을 일이 있어 길을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제 귀를 간질이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슈린츠에 계시다는 소식 말입니까."
"네, 왕자님. 그런 소식이 제 작은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렇습니까."
"······ 만."
칼리안의 대답을 무시하듯, 혹은 잘라내듯. 제 말을 이어붙인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그런 것보다 궁금한 일이 있어 이렇게 한 걸음에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칼리안이 실소했다.
하기사. 세 아들이 각자 제 아비를 노새 취급, 소 취급, 없는 취급 하고 있는데. 국왕을 만난 적도 없을 남작 나부랭이가 국왕을 '그런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고. 그런거지.
전하께서 잘못하셨네.
나 말고, 나부랭이 쟤 말고. 전하께서.
"나에게 궁금한 일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렴 제가 어찌 칼리안 왕자님께 궁금증을 두겠습니까. 왕자님의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이에게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짙은 녹빛의 두 눈이 칼리안의 뒤로 다시 움직인다.
- 툭.
완두콩이 제 발 끝을 바닥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있지도 않은 목줄이 당겨지는 느낌이라. 칼날 대신 웃음을 만든 칼리안이 느긋한 어투로 답을 건넸다.
"그런 이가 있던가······ 잘 모르겠는데."
"네, 왕자님. 그런 이가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등 뒤를 향하는 녹빛의 시선을 잡아채듯 따라붙은 붉은 눈이 서슴없이 빛났다.
"내가 내 울타리 속에 고이 모셔두고 지키는 분은 계십니다만. 그것을 숨었다 해야 하나. 그렇지는 않은 듯 한데."
"숨기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숨어들고 숨겨 줄 이유가 있나. 굳이 그리해야 할 만큼 독한 짐승도 없는 안온한 곳인데."
"왕자님께서 이곳을 안온하다 여기실 줄은 몰랐습니다."
칼리안이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허면. 내가 내 울타리 속에 고이 모셔두고 지키려 드는 분께 궁금한 것이 있다, 그런 말로 알아들으면 되겠습니까."
"네. 왕자님. 그리 여겨주셔도 무관하겠습니다."
"듣겠습니다.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답할 수 있는 물음이라면 답을 해 주고."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아무리 휴식을 취하고자 하셨다 하나······ 칼리안 왕자님께서 며칠을 두고 종적을 감추셨던 직후에 이렇게, 하필 이런 시기에 수도를 떠나실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말입니다."
다른 말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꺼내진 질문.
그와 함께, 다가오던 귀족들의 발걸음 소리가 잦아들었다.
굳이 고개를 돌려보지 않아도 그들의 얼굴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시드의 질문을 이미 들었으리라. 그러니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하나 더 발견했다는 얼굴들을 하고 있겠지.
이제부터 오가는 대화는 저들의 귀에 모두 들릴 터였다.
"궁금증이 들지 않겠습니까. 전하를 슈린츠에 모셨다, 왕자님께서 그리 수고롭게 다른 이들의 입을 빌려가며 전해주신 그 사실이 무엇을 위한 안배일지. 그 문제를 홀로 해결하지 못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일부러,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때를 기다려 나섰다.
귀족들의 앞에 굳이 나서 시선을 모으고 경계를 받을 필요 없이 자연스레 집중을 받도록. 억지를 부려 칼리안의 편에 선 귀족들의 얼굴이 찌푸려질 틈 없이 모두가 궁금해 할 질문을 건넬 때를 기다렸다. 칼리안의 대답을 모두가 함께 기다리고, 칼리안이 애매모호한 말로 시선을 피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르메인이 자리를 비웠다 소문을 낸 것이 칼리안 왕자였다는, 사실 여부를 굳이 확인해 줄 필요 없을 재미있는 이야기를 귀족들에게 알렸다.
"나의 수고라······."
공개적으로 나서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라시드의 행동에 칼리안의 손 끝이 움직였다. 남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작은 호선을 그려내며 대답을 전했다.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실을 내가 일부러 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부러 숨긴다면 모를까."
"혹시 모를 일 아닙니까. 이 기회에, 왕자님께서 그리 보듬어 담아두신 분의 드높은 자리까지 보듬어 안을 생각을 하셨을지."
붉은 망토가 칼리안의 시야에 비쳤다.
칼리안이 몸을 살짝 비틀었다. 그리고 한 발 나서 라시드의 입을 막으려 드는 플란츠의 앞을 도로 가로막았다.
자연스레 등 뒤로 옮긴 가느다란 손가락이 움직였다.
여지없는 반말이 플란츠를 향했다.
- 괜찮아.
여기가 어딘지, 안 까먹었어.
플란츠가 발을 멈췄다.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아니라면 이 기회에. 왕자님께서 그리 보듬어 담아두신 분의 드높은 자리까지 보듬어 안을 생각을 하셨다······ 라고. 그 소문을 들은 이들이 그렇게나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끔 하고자 하셨을지."
손 끝에 머무르던 긴 미소가 칼리안의 얼굴에 들었다.
새삼스런 재미를 다시 깨달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 답을 맞히기가 그리 어려웠습니까."
"네. 그리 어려웠습니다."
"생각지 못한 질문을 들었으니. 내가 또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하실 만한 질문을 드렸습니까."
"늘 고민이 됩니다. 남작은 항상 내게 즐거운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사람이니."
봄의 기운으로 가득찬 눈에 불꽃이 인다. 세상의 모든 녹음을 집어삼킬듯 서늘하게 빛났다.
"나와 남작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서로의 손에 무엇을 든 채로 만나든. 늘 한결같이."
라시드가 칼리안이 숨긴 것 하나를 들췄으니 칼리안 역시 하나를 들춰냈다. 카이리시스에 찾아온 뒤 귀족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라시드를 이미 여러 번 만났음을 입에 올렸다.
왕궁에서 라시드를 본 이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라시드는 칼리안을 과연 어디서 만났을지.
그런 궁금증 하나를 흥미 가득한 귀족들의 머릿속에 더해준 칼리안이 답을 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은 자수와 금장으로 장식된 검은 베스트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라시드에게 건넸다.
라시드가 시선을 내렸다.
칼리안이 건넨 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쳐다봤다.
"이것이면 대답이 될 듯 한데. 어떻습니까."
녹빛의 아름다운 에메랄드 브로치.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렇게만 보일 에메랄드 브로치. 다만 가까이서 본다면, 멀쩡한 표면 속이 산산이 조각나 깨진 균열이 고스란히 비춰지는.
칼리안이 라시드의 손 위에서 부서뜨린 에메랄드.
제 가치를 다 잃어버린 허름한 보석. 그것을 보았다.
곧 라시드가 웃음소리를 냈다. 결코 격식에서 어긋나지 않을, 비웃음도 아니고 박장대소도 아닌 웃음을 내보냈다.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를 굳이 막지 않으며 웃다가 입을 열었다.
"네. 왕자님. 답이 되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답이 되었다 하니."
언젠가 에반의 앞에 선 칼리안이 깨뜨렸다던 에메랄드처럼, 그 이후 브리센이라는 성을 잃고 속절없이 죽어나간 에반처럼.
칼리안의 손 끝에서 다시 한 번 깨져나가게 될 것이 같은 빛의 눈을 지닌 그레이 브리센이라는 의미일지. 그 눈을 고스란히 닮아버린 라시드 자신일지. 혹은 브리센 전체일지. 그것을 굳이 가늠하지 않은 라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왕자님. 아니······ 저하."
누구를 향한 경고든 상관없이 이미 충분히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던 까닭에. 정말 기쁜 선물을 받기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을 해보였다.
"이것이 플란츠 왕세자 저하의 결정이 맞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귀족들은 보지 못할 칼리안의 대답을 손에 꼭 쥔 채 플란츠를 바라보며 물었다.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저하께서 정답을 찾으신 겁니까?"
칼리안의 고개가 뒤로 돌려졌다.
라시드를 상대하느라 올려두고 있던 말간 웃음기가 칼리안의 얼굴에서 아주 잠시 사라지다 억지로 다시 드러났다.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새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가느다란 숨을 애써 들이쉬면서.
"이런······ 아무래도 제가 불필요한 질문을 드린 듯 합니다. 방금 들으신 것은 부디 잊어주십시오, 저하."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훑듯이 바라본 라시드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한 발을 뒤로 물렸다. 마지막 질문들은 거두었으나 원하던 것은 취했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가득 띄워올렸다.
"울타리가 온전히 안온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칼리안 왕자님."
"······ 아."
여기가 어디인지 안 까먹겠다고.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했을까."
칼리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떠올렸다.
향기 가득한 봄날.
그 짙은 꽃내음에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벅차서.